2024-04-14

갑오농민전쟁의 제2차 농민전쟁.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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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농민전쟁의 제2차 농민전쟁.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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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甲午農民戰爭의第2次農民戰爭 
廈 
 , 머 리 발   (㉭公,J,H利仁전투 
第2次農民戰爭의 배경   孝濡전부  
三.第2次農民戰爭의 봉기 ㉭熊峙전투
四.南• 회匕接東學農民軍의論1幽 ㉭洪州전투  
    大會   公』}퓌牛金峙전투
五.全國각 지방에서의京學農民 ㉭淸,i삐 전투  
  軍의 통기   
  
.日本軍의畔力配置와 작전
七.棗學農民軍主力部隊의 åt  
(0 한밭(大田坪) 전투            
  木川細城山전투   
八.東學農民軍主力部隊의後退와 解體
九.第2次躉民戰爭敗戰의原因
上과主要戰鬪
十.第2次農民戰爭의 사희적   역사적 정격  
十-. 맺 음 말


 . 허 리 말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며 변혀운동의 하나인 1894년의甲午農民戰爭은 그 진전과정을 4단계로 나누아볼 수 있다. 
제 1 단계는 이른바「古阜民亂」의 단계이다. 이것은 1894년 음력 1월 11일 (양력 2월 17일)쩐라도 고부에서「탐관오리괵 봉건적 가렴주구에 견디지 못한 농민 약 1천명이全琫準을 대표로 추대해서古阜郡衙를 습격하여 탐관오리 를 징계하고 군수趙秉甲이 수탈해간水稅등의 망극을 원주인에게 들려주 는「民擾」를 일으킨 것이었다. 이民擾를 일으킨 l동학도와 농민들은 군수가 교체되고 신임군수朴源明이 농인들 요구의 정당성을 인정하며 설득하자 3월 3일(양력 4월囹일)까지에는 모두수산하였다. 이갓은 아직능민전쟁이라고  할 수 없고,- 그 전주곡에 해당하는小民亂또는小暴動의- 성격을 가진 것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제 2 단계는 갑오농민전쟁의「第1次襲民冪」의 ,단계이다.• 이것은• 전라
37주
 = 일대의 동학도와 농민들이 1894년 음력 3월 20일(양력 4월 25일)경全琫準•孫化中•金開男등의 지도하에茂長에南接都所를 설치하고 봉기를 준 비해서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약 4천명의東學農民軍을 편성해서茂長에 서起包하여 먼저古阜를 비롯한 여러 고을의 관아를 점령하고 관군을 격파 한 다음 전라도 수도인全,J`[1에入城한 단계이다. 등학농민군은 4월 27일  (양력 5월 31일)全,기케에 입성하여 5월 8일(양력 6월 11일)全)`蚪和約이 체결될 때까지 11일간全±)%에 주둔하였다. 이 제 1 차 농민전쟁 단계로부터 본격적 農民革命運動이 지 작되었다.
제 3 단계는 갑오농민전쟁의「農民執繡所」의 단계이다. 이것은淸軍과日本軍이 갑오농민전쟁에 개 입하여 조전에 침입하자 두 나라 군대를 찰수시키 기 위하여農民軍과官軍사이에 이른바「全)`에和約」이 체결되고, 그 결과 농민군이 형식상 자진 해산하여 외국군 철수의 조건을 만들면서 전라도 53개 郡縣에「執綱所」를쩔치해서 스스로農民統治를 실시했던 단계이다. 1894년 음력 5월 8일(양력 6월 11일)부터 동년 음력 9월 12일(양력 10월 10일)까지가 이 단계에 해 당한다고 할 수 있다.
제 4 단계는 캅으농민전쟁의「第2次農民戰爭」의 단계이다. 일본침 략군은 동학농민군이 해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철수하기는 커녕 도리어 조전에 주 둔한채 남의 나라에서淸日戰爭을 일으키며 제멋대로 궁궐 첨법을 자행하여 政權을 마음대로 농단하고內政干涉을 자행하였다. 이에全琫準을 지도자로 한東學農民軍은 1894년 음력 9월 13일(양력 10월 11일)경 일본군을 한반도에 서 몰아내기 위하여 제 2차로 봉기해서 일본군과血戰을 전개했다가 그 해 연말에 마침내 패전하게 되었다. 이것은 l동학농민들이 일본침략군을 자기 조국 당 위에서 몰아내기 위해 재봉기하여 싸운抗日民族革命戰爭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는문에서 다루려고 하는 부문은 위의 4 단계인 갑오농민전쟁의 제 2 차 능빈전쟁에 대한 것이다. 이 제2차 능민전행은 스스로「義兵」이라고도 부른 바와 같이 동학농민들이 주체가 되어 전개한抗日民族戰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종래 충분히 밝혀지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가능한 한 실증적 자료에 기초해서 전봉준부대를 중심으로 하여 제 2차 농민전쟁의 전 개 과정을 실증적으로 밝히려고 한다.

 . 제 2 차農民戰爭의 배경
동학농민군이全琫準을 중심으로 하여 1894년 9월 제 2차 농민전쟁에 재 봉기한 것은,日本侵略軍이 한반도에 불법 상륙하여 남의 나라 왕궁에 들어 가서 조선군을 무장해제시키고 정권 교체와 내정간섭을 자행하며, 남의 나 라 국토 위에서 청 • 일전쟁을 도발하는 등 온갖 만행을 자행하는 것을 보고 일본침 략군을 자기 조국 땅 위에서 몰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전봉준은 제 2차 농민전쟁 재봉기의 동기에 대하여 그가 체포된 후 재판 관측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日本이開化라고 일컬어 애초부터 -言半辭도 없이 민간에傳布하고, 한편으로 檄書도 없이率兵하고都城으로 들어와夜半에王宮을 격파하여主上을 경통켸 하 였다고 하기에,草野의士民들이忠君愛國의 마음으로 강개하지 않을 수 없어義旅   규합하여日本人과接戰하게 되었다.」(1)
또한 전봉준은 제 2차 농민전잼에 재봉기해서 서울에 입성하면 일본군에 게 어떻게 하려했는가라는 재판관측(배석한日本領事)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문(일본영사) : 재차起包는日兵이犯闕하였다 한고로再學하였다 하니, 재거 한 후에는日兵에게 무슨擧措를 행하려 하였느냐? 답(전봉준) : 험궐한 연유를 힐문코자 함이었다.
문(일본영사) : 연즉日兵이며各國人으로京城에留隹하는 자를 모두驅逐하려 했느냐?
답(전봉준) : 그러함이 아니라各國人은 다만通商만 하는데日本人은率兵하여 京城에留陣하는 고로我國舅土를侵掠하는가疑訝함이었다.」(2)
즉 전홍준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일본군이 조선강토에 불법 침입하여 군 대를 끌고 수도 서울에 입성해서 밤중에 궁궐을 침범하고 내정에 간여하면 서 일본군을 서울과 국내에 주둔지기는 고로 이것은 우리나라의鹹土를 침 략한 것이라고 보고日本侵略軍을 자기 조국 강토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재 봉기하게 된 것이었다.
 
(1)「全琫準供草」,初招問目,『東學亂記錄』(국사편찬위원회판),下卷, p.529.
(2)「全琫準供草」,再招尙目,『集學亂記錄』,下卷, p.538.
-376 {匕 
여기서는 전봉준의 이 설명을 약간 보완하면서 제 2차 농민전걩 재봉기의 배경을 간략히 고찰하기로 한다.
우선 먼저 들어야 할 것은全』)뻐和約이 성립되어 동학농민근의「반란」상해 가 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日本軍이撤兵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동학농  민군이 관군과-「전주화약」을 맺어 자진해서全』4취城을 관군에게 내어주고 각 기 고향에 돌아가執綱所를 설치한 것은 일본군 개입의 구실을 주지 않고  중양조정으로 하여금 청국군과 일본군을 철병시키도록 하는 교섭의 조건을 만들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예측했던 대로,全』)寸`I城이 수복되 고 내란이 평정되었으니淸軍과日本軍은撤兵해 줄 것을 l정식으로 요청하
였다. (3)
조선 조정의 철병 요청에 대하여 청국측흔 이에 동의했으며, 일본측에 대 하여共同撤兵案을 제의 하였다.
 일본측은 이러한 사태의 반전에 대하여 1894년 음력 5월 11일~12일(양력 6월 14~15일) 내각회의를 열어 토의한 결과 오히려 소위「對韓强硬方針」을 결정하여, 이 기회를 이용해서 군사적 위협을 가해 내정에 간섭하되「개혁」 을 구실로 할 것과淸에 대해서는 이 기적에 전쟁을 불사하고 조선에서 청  국세력을 구축할 것을 결정하였다. (4) 이에 일본은 조선 조정의 철병안과 청 국측의 공동철병 안에는 한 마디의 응답도 하지 않은 채 계속하여 일본군 병 력을 증파시키면서 도리어 음력 5월 14일(양력 6월 17일) •청국공사에게共同干涉案을 제의하였다. (5)  조선 조정은 일본측의共同千涉案을 받고 매우 당황하고 •간장하였다. 조 선조정은 위무독판趙秉稷이 주한 일본공사大鳥圭介에게全』)삐城의 완전 수 복과「동학란」의 완전 진압을 들에 하루 속히日本軍의撤兵을 시행해 줄 것을 재차『요구하였다蕫그러나 일본공사는 이에 대해서는 아무런 응답도 하
(3)『日本外交文書』第27譽第2冊,文書番號550, `「我兵渡韓=”付統暑卜往復差  =我公使問答2件」, -附屬書二,大朝鮮督辦交涉通商事務趙秉稷의照會, 1894 년-五•月l初十日字, •p.206 및『淸光緖朝中日交涉史料』卷13,北洋大臣來電  5} •五月初十日到電報檶, PP. 15~16 참초. 
(4)『日本外交文書』第27卷第2卅,文書番號551,「6月15日그閣議案竝決定,朝 鮮國變亂=對只,\我%態度竝=烙來2行動=關只/나牛」%pp. 206~207 참조.
(5)『日本外交文書』第27卷第多冊,文書番號石57, •1894年+ 6月17日1紊襲「朝鮮問題處理=關只,v對談7藝旨,通告.7들件~」, -pp.214~215 참조. 
지 않고 계속하여 . 일본군형력을 중파시키뗜서淸軍을 일본군보다 먼저 철병 시키자는 제안을 제출하였다. 일본측의 이 모든 제안은 처음부터 청국이 동 의하지 않을줕 알면서 일본이 궁극적으로 청국세력을 한반도에서 밀어내고 단독간섭을 하여 조전을 지배하려는 책 략의 일환으로 나은 것이었다. 예측 했던 대로 청국측은 음력 5월 1일李鴻章이. 일본정부에게共同干涉拒否의 회답을 보내었다. (6} 일본은 이에 청국에게共同干涉에 불응하는 한 일본은 單獨으로라도 조선 내정에 간섭하여「改革」을 추진할 것이며 일본군 천명은 할 수 없다고 하는 소위「제일차 절교서」를 음력 5월 20일(양력 6월 22일) 청 국에 발송하였다. (7)  일본정부는 음력 5월 24일(양력 6월 27일) 내각회의에서 소위「朝鮮內政改革案」이란 것을 결의하였다. 물른 일본정부가 조선내정의「개혁」에 진정한 관심이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었고, (8,「내정개혁」을 침략과 간섭의 구실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9, 일본 의상陸奧宗光은 주한 일본공사大鳥圭介 에게 이「내정개혁안」을 조선정부에게 권고할 때에는 일본이 필요로 하는 利權을 동시에 요구하도록 훈령하였다. (10, 이 훈령에 따라 일본공사는 0 금」 6월 1일(양력 7월 3일) 소위「내정개혀안」을 조선정부에 제출하였다. 이 문 제를 는의하기 위해 조선정부와 일본측은 3차에 결쳐 적당을 하였다. 조전
 
(6)『日本外交文書』,第27卷第2冊,文書番號576,「朝鮮國變亂處理=關날回答 件」, PP. 234~235 참조.
(7)『日本外交文書』,第27卷第2冊,文書番號578,「淸國政府/回答=對只/v   日本政府7薏度通告2 f牛」PP. 235~237 참조.
  (8)中塚明,『'蹇蹇錄' 0世界』, 1992, pp.55~193 참조. 
(9)陸奧宗光,『蹇蹇錄』(岩波文庫版) pp.47~48 참조.
 당시朝蘚侵略과淸日戰爭外交률 주도헀런日本外務大臣陸奧는 여기사  다음과 같이 그의朝鮮內政改革요구를 스스로 설명하였다. 
「나는 처음부터藎鮮內政의改革을 갖고 정치적 필요 이의의 하등의意味 도 없는 것으로 보았고 또한 조금만치도 의협정신으로써十字軍을 일으킬  필요를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朝鮮內政의改革이란 것은 첫째로我國(日本-인용자)의利益을主眼으로 하는 것에 그치고 이것 해군에 굳이我利 益을 회생시킬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또한:今回와 사건으로 이를 논하면   필경朝鮮內政의改革이란 본시日淸양국 간에蟠結되어 풀리지 않는難局 을調停하기 위하여案出한 -箇의政策이었던 것을事局-變하여 마침내 我國의獨力으로 이를 담당하지 않을 수 없기에 이른 것에다. 그러므로 나 는 처음부터朝鮮內政의 그 자체에 해해서는 각별히跫要牲을 두지 않았다.」
 
(10)『日本外交文書』,第27卷第1冊,文書番號395,「交涉開始=先立쿳利權確得 =努L八퐇=.卜:7회l令2件」, p.58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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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은 어차피 개혁의 필요를 통감하고 있었으므로 개혁을 하기로 결정했으 며 음력 6월 11일(양력 7월 13일) 그 개혁 담당기관으로校正韲을 설치하고 6월 13일에는校正韲堂上15명을 임명하였다. (11) 조전조정은 개혁을 시작할 준비를 갖추어 놓고 6월 14일(양력 7월 16일) 의무독판趙秉稷이 일본측에게 개혁은 확실히 단행한 것이므로日本軍은先撤兵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 리나 일본은 6월 16일(양력 7월 18일)撤兵拒否의 회답을 보내어 왔다. (12) 일 본의 목적은 조선 내정의 개혁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조신의 침략과 지배에 있었던 것이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조선내정을 일일이 간섭해오던 청국공사 袁世凱는 번복을 하고 음력 6월 18일(양력 7월 20일) 서울을 탈출하여 귀국하 였다.
동학농민군은 이 기간에執綱所를 설치하면서 집강소 농민통치를 시작하    있었다. (13) 전봉준은 전라도 각지를 순해하면서 집강소의 실태를 들러  보았으며, (1蜀6월 15일에는金開男이 진을 치고 있는 남원에서南原大會를 개최하여 전라도 53개 군현에 빠짐없이 집강소를 설치하여 농민통치와 폐정 개혁을 단행할 것을 다시 한번 더 결의하였다. (15)  둘째로 들어야 할 것은 일본군의 불법적인 궁궐 침입 및 내정간섭과 청 •  일전쟁의 도발이었다. 일본군은 1894년 음력 6월 21일(양력 7월 23일) 새벽 4시에 준비된 작전을 개시하여 조선 왕궁을 포위하고 궁궐에 침범하여 저항  하는 조선군王宮수비병을 살해하고 무장해제시-긴 후 국왕과 왕비를 감금 하였다. (%) 일본군은朝鮮의保護國化라는 장기목표를 갖고 조선국왕에게 강요하여 신정부를 수립케 압력을 가한 바, 국왕은大院君을 섭정으로 하
 ,金弘集을 영의정으로 한 신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이것이 갑오경장의  제일차 김홍집내각인 것이다. (17)
 
(11)『日省錄』高宗31년(1894년) 6월 13일조 참조.
(12)『日本外交文書』第27卷第1冊,文書番號412,「內政改革2勸告=付朝鮮政府回答2 (牛」, PP. 605~610 참조.
(13)愼鏞亶, ㉦「甲午農民戰爭시기의農民執繡所의設置」,『韓國學報』제41짙, 1985 및「甲午農民戰爭시기의農民執綱所의活動」,『韓國文化』, 제 6집, 1985 차조.
(14)『全琤準供草』,四招問目,『東學亂記錄』,下卷, p.551 참조.
(15)『梧下記聞』第2筆의 p.62 차조.  
(16)金允植,『續陰晴史』,「沔陽行遺日記」甲午6월 24일조출 p.326 및黃玹,『櫛泉野錄짊, PP. 145~146 꿈조.
(17)柳永益,『甲午更張硏究』(-潮閣), 1990, PP. 12~16• 참조.
일본군은 이와 동시에 일본군 혼성여단을牙山으로 남하시켜, 조선 궁궐 침범과 동일한 지간인 6월 21일(양력 7월 23일) 새벽 4시에 군사작전을 시작 해서牙山에 진주한淸纂을 기습공격하고 아산만에 정박한 청국 군함 2척을 선제 공격하여 격침시켰다. 일본이 마침내 남의 나라 조신에서 청 4일전쟁 을 도발하여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든 것이었다. (18) 동학농민군 총대장全琫準과 저라관찰사金鶴鎭은 즉각 이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은 것이 를림없다. 김학진은官民相和之隶을 추구하여執綱所 를公認하고 전봉준을 전주에 초청하여 함께 일본군의 간접에 대용하자고 제의했으며, 전봉준도 이에 응하여 전주에 들어가서 상호 협조하여官民相和에 의한執綱所의 농민통치가 진전되있다. (19) 전봉준은 일본군이 철수하 지 않고 조선에留陣하면서 궁궐을 침범한 것이 장차「,必是日本人이我國 을倂呑코자 하는 뜻인줄 알고日本兵을 쳐 물리치고 그居留民을國外로 驅逐할 마음으로 다시起兵을 도모」(20)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청 •일전 쟁의 판세는 결정되지 않고 재봉기의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으므로 채홍기를 단행한 단계는 아니었다. 전봉준은 일본군과의決戰이 불가피하게 되어가는 정세를 내다보고軍需錢과軍需米를 비축함과 동지에欣器와 .馬匹을 수학하 여 후일의 대비를 하면서日本軍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한 제 2차 농민 전쟁 봉기의 준비를 서두르게 되었다.
다음으로 들어야 할 것은 청 • 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가 예견되고 조선 정부의 일본에 대한 야합과 종속이 심화된 상황조건의 변화이다. 일본군은 조선정부에 강요하여 음력 7월 26일(양력 8월 26일) 군사동행의 일종인朝• 日攻守同盟을 늑결하였다. (21) 이것은 조신정부가 극력 기피하는 것을 일본 측이 강요하여 부득이해서 늑결된 것이었다. 그러나 음력 8월 17일(양력 9월 16일) 주壤會戰에서 일본군이 승리하고 패전한 청군은 후퇴하여 전선이 압 특강 건너에 형성되자 한반도는 완전히 일본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 다. 일본측은 청 •일전쟁에서의 승리가 예견되자 내정간섬을 난폭하게 강화
 
(18)朴宗根(朴英宰譯),『淸日戰爭과朝鮮窮(-潮閣), 1989, pp.48~90 참조.
(19)鄭碩謨,『甲午略歷』,『東學亂記錄』上卷출 p.65 참조.
(20)姜昌-,「甲午農民俄爭자료발굴 :全琫準會見記및取調記錄」,『사회와 사 상』창간호, 1988년 9월 및『全琫準判決宣言書原本』,『韓國學報』, 저!39집, P. 189.
(21)『官報』,開國503년 8월 17일자「大藎蚌•大日本兩國盟約」참조.
 
하면서 조선정부에게 일본군에게의 협력 조치를 적극화하도록 강요했으며” 조선정부는 이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학농민군 총대장 전봉준은 청 • 일전쟁의 전세를 예리하게 관찰하면서  청군이 승리하여 일본군이 철병할 가능성을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  기에 전봉준은大院君과도 소통과 연락이 있었다고 한다. (22) 그러나 청 • 일  전쟁에서의 일본군의 승세는 동학농민군의 재봉기를 재촉하는 조건이 되었기 다.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을 자기 조국강토에서 몰아내기를 원한다면, 일본  의 승세가 완전이 굳어져서 청 •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71 전에 일  본군을 후방에서 공격하여 일본군을 구조적으로 전 • 후에서 협공하여 해전  시켜야 했기 때문이었다.平壤會戰에서의 일본군의 승리와 청국군의 패잔  후의 상황은 동학농민군과 전봉준에게 재봉기를 `더욱 촉구하는그것으로 되 있다. 
 다음으로 들어 야 할 것은 일본군의 조전 관군과의 결합에 의한東學黨l「討 伐」준비였다. 일본측은 이미 제일차 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부터天佑俠을 비롯한 그들의 7良人翠들을 첩자로 농민전쟁 지역에 파견하여 동학농민군을  치지하는 것처럼 위장해서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에게 접근하여 정  보를 수집하게 하였다. (23) 집강소 농민통치기간에도 일본은 끊임없이 첩자  들을 호남지방에 파견하여 동학농민들의 동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일본 7良人輩중에는 전봉준을 찾아가서 만다 원조를 해 줄 터이니再蜂起하 라고 전동하는 무리도 있었다. (24) 심지어 일본 `7良人輩중에는 황당무계한  작전계획까지 제시하여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을 현혹시키려고 하다가 거절 당하는 무리까지. 있었다. (25) 동학농민군의四大綱領중의 하나에「逐滅委夷」(일본오칸캐를 몰아내고 멸한다)가 있으므로 일본이 조선을• 침 략해서 소위 「保護國化」하고「植民地化]함에 있어서는 결국 등학농민군이 근원적인 저항 세력이 틤을 일본측은 잘 인식하고 이를「토벌」하기 위한 사전 자료를 준비
 
(22)李相佰,「東學黨과大院君」,『東濱全庠基敎授華甲紀念史學論叢』, 1962;『李相佰著作集』(乙酉文化社, 1978), 제 3원, PP. 401~435 참조. 
(23)姜昌-,「天佑夾느 '朝鮮問題'」, •『史學雜誌』第97卷第8號, 1988 참조. 
(24)海浦篤彌,『東學黨觀察日記』明`冶27年(1894年) 7月20日條,『初齋遺稿』,
p. 90 참조.  
(25)吉ㆍh卜수,「韓山虎嘯錄」,『黑龍』第1卷第6號(明治34年10月) PP. 429~440 및第1 욘甕7號(明治34年11月) pp. 809~818 참조.  
 
第2次•蹙民戰爭
하기 위한 것이었다.즮 •일전쟁에서 •일본군의 승리가 전방되자晷일본군은 약간의 여유를 갖고 조전 관군과 연합하여 동학능민군을「토벌」할 준비를 시 작하였다. 
동학능민군과 전봉준은 청 • 일전쟁에서 일본군이I 승리하면, 다음에는 알 본군이 그 병력으로東學農民軍을「토벌」하러 찾아올 것임을`내다보고 있었 다. 이러할 경우에는 일본군과의 일전은 불가피한 것이며, 불가피한 경우라 면 동학농민군이 먼저 재봉기하여 일본군을 선제 공격하는 것이 우리할 수 도 있었다. 동학농민군에게는 앞으로 다가오는 -일본군과 관군의「토벌」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재통기가 요청되였다.『吳知泳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 슬하였다.
「이 때는甲午九月間이라. 청부에서는東學黨討伐할 준비가 이미 성립되어京兵과日兵과淸兵이 한데 섞이어三南地方을 짓쳐들어온다는 말이 들려•왔다. 전라 도 각읍에 있는執綱所에서는 할 수전이再起兵을 아니할 수가 없이 되했다t](쪝)
즉 청 •일전쟁에서 승세를 단 일본군이 여유가 생기자 조선 관군과 연합 하여 동학농민군을「트별」할 준비를 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자 동학농민준 은 재봉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들어야 할 것은東學農民軍내부에서 나오는抗日흥기의 요청 이다. 일본군이 청 • 일전쟁 기간에 서을~부산간의電線을 가설하고京釜路 에만도 21개소의兵立占部를 설치하여 그 운송에 조선인들을 7殳夫로 강제 동 원하자, 이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 났으며, 이 중에• 동학도들도 적극적으 로 참가하고 주도하였다. (27) 일본 냥인배들의 정보자료를 입수하여 비교적 신속하게 동학농민군의 동 태를 관찰하고 있단 일본의 신문 보도에서는「이미 '양력 7월 30일 경에는 농민군 거명의 조짐이 보이며 그 이유로는 '전에弊政을 개혁할 목적으로 일어났으나言召諭를 만나招討使와和約을 맺고••••••참시 무기를 내려놓고 있 었지만日本은大兵을 파견하여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 한다' '조금이라도 나라를 적정하는 사람들은••••••궁중의 일을 물을 겨를조차 없으므로 우리가
 
(26)吳知泳,『東學史』, p.134.
(27)『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3권,「臨庶第78琥,忠淸道黃山地方_東學狀`?兄聞取書별지보고」, pp.240~24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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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일어나日兵을 막아야 한다' 고 기술하고 있었다」(28)고 한다. 즉 동학 농민군은 일본이 한반도에 대병을 파견하여 결국 조신을 병 탄하려는 것이라 보고「우리가 먼저 일어나 일본군을 막아야 한다」는 구국의식으로 재봉기의 조심이 보였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측의 조사보고에 의하면, 1894년 양력 8월 하순에는「東學黨은 咸뵼縣의縣官을 포박하여 책하기를 인민을無賃으로 일본을 위해 사역케 했 다고 하고, 또 인민에게는 일본의 용역에 따르지 말 것을 교사하였다. 따라 서縣官의 명령에 응하는 사람이 없고縣官은 두려워 사직하거나 또는 거처 들 옮겨 그의 소재지를 아지 못하는」(29) 형편이었다고 한다. 동학농민들이 일본군에 협력한다는 이유로縣官을 포박했다는 것은 이미 항일 재봉기가 임 박했음을 시사하는 것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일본측 자료에는 주한 일본공사大鳥圭介가 조선 외부대신金允植에 게 보낸 공한에서朝鮮軍과日本軍이合同해서東學黨을 진압할 것을 제의 하면서「금년(양력) 8월에서 9월로 접어드는 때부터慶尙•全羅•忠淸각도 에서東學黨이再起하여••••••패찬淸兵도 그중에合勢해서日人을 배척 추방 하고日軍을攻擊할 것이라고 전언하고 있습니다」(30)라고 하여, 이미 음력 7•8월(양력 8•9월)에는 동학농민들의 아래로부터의 재봉기의 요구와 운동이 거세게 솟아오르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음력 8월에는 동학농민들의再蜂起의 요구는 더욱 강화되었다. 충청도天安郡에서는 동학농민들이 음력 8월 12일(양력 9월 11일)경日本人6명을 처단 한 다음 이를 공공연히榜을 붙였으며,天安•竹山•公』尹I,l 기타 각郡에서東學徒들이武器를 탈취하려는 징후가 보이므로 각처의武器庫를 모두 봉쇄하 여 지키는 실정이었다. (31) 또한 충청도河潭•可興지방에서는日本軍兵立占部가 7殳夫를 1백명 모집하여 고용하려 했으나, 이 지방東學黨이 일어나서
 
(28)『東京日日新聞』1894년 8월 5일자 (朴宗根,前揭書, p,213에서 재인용).
(29)『中路兵立占監本部陣中日誌』p.67 (朴宗根,前揭書, p.200에서 재인용).
(30)『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1 권,第202號,「東學黨의再起와日軍의匪徒鎭壓에 따른朝鮮政府의 협조 요청」, p.132.
(31)『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1 퀸,「忠淸道天安郡에서日本人6명이東學黨에 게殺害된件」, PP. 118~122 :「天安東匪의鎭壓을 위한兵力派追」, PP. 131~   132 및「天安郡에서日本人을殺害한金敬先•趙明큣事件에 관한交信」,  P. 144 참조.
일본군대의 진을 운반해주는 자는 모두 죽여야 한다고 협박하여 아무도 일 -본군에는雇用되려는 사람이 없게 되었으며官吏들도 전혀 어떻게 할 수 없 뗬다. [32) 경상도安東에서는 유생徐相轍등이東學黨을 가탁하여義兵올  일으켜 음력 8월 26일(양력 9월 25일)경 정찰나온日本軍台封兵站部의竹內 大尉를 처단하였다. (33) 이들은 그檄文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東學黨 쇠 아니라儒生들이 있으며, (34)乙未籍氏보다 1년 앞서 일어난甲午義兵이었
•다. (35' 그러나 당시에는 이 거사가東學黨의 것으로 알려치고 있었다. (36) 黃玹의『梧下記聞』에 보면, 동학농민군 대장의 하나인金開男이 1894년  음력 8월 25일(양력 9월 24일)任實로부터南原으로 들어갔을 때南原府使는 쇠미 1개월여 전에 도망해 버리고 전라좌도의 동학농민군 7만여 명이 남원 부증에 모여 기세를 올렸는데 이것은 동학농민군의 재봉기를 요구한 것이어 서, 전봉준이 전주로부터 남원으로 달려가 아직 재봉기의 시기가 아니니 사
-태를 더 관방하자고 설득했으나 김개남이 듣지 않았다고 한다. (37) 동학농민
-군 지도부의 제 2인자격인金開男휘하의 농민군이 재홍기의 동태를 보인 -것은 동학농민군 내부에서의抗日再蜂起의 요구가 더 미루어 들 수 없게
•타오르고 있었음 0 알려주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끝으로 들어야 할 것은 온건개화파 중양정부 내의 친일적 개화파의 입지 의 강화와 이에 따른 중양 조정 정권 교체의 필요성의 대두이다. 일본군이 -음력 8월 17일의平壤會戰에서 승리하여 청 • 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가  전망되자 일본측의 은건개화파 정부에 대한 간섭이 갑자기 강화되었고, 개 -화파 정부 내의 친일적 개화파들이 발호하였다. 또한大院君이 평양에 주둔
•한 `淸軍과 밀통한 사실이平壤會戰에서 승리한 일본군의 압수문서에서 드러
 
(32)『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1 권,「京第84驟,忠淸道7叩鷹•可興近地東學黨 의跋扈로雇用困難」, PP. 122~123 참조.
(33)『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3권,「安東東學黨과竹內大尉시체보호의件」,
P. 275 참조.
〈34)『駐韓日本公使館記錄』제 1퀀,「京第87琥,安東亂民巨魁徐相轍의 -檄文入手送付」, PP. 123~125 참조.
(35)朴宗根,前揭書, pp.200~203.
㉩金祥起,「朝鮮末甲午義兵戰爭의 전개와 성격」『한국민족운동사연구』제 37년, 1989 참조.
(36)朴宗根,前揭書, PP. 205~206 자조.
(37)『梧下記聞』,甲午8월초,第2筆의 p.93 참조.
 
884 {匕
나게 되자 섭정 대원군과軍國機務處를 중심으로 한 일부 온건개화파 정부  각료들 사이에 대립이 격화되어大院君의 제거는 시간문제로 대두되었다. 여기에 다시朴泳孝가 일본측의 알선으로 귀국하여 갑신정변 때의大逆罪가 사면되고 정계 복귀가 추진되었다. (38) 중앙청부 내의 이러한 친일적 경향의 강화는 종래 군국기무처의 개혁에 암국적 기대를 걸고 있던 동학농민들과 전봉준 등에게 중양정부가 친일적. 경향으로 기울어졌다는 생각을 갖게 하고 중앙정부를 교체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했다고 볼 수 있다.
동학농민들과 전봉준 등은 위에 든 마와 같은 배경과 이유로 이반에는淸 日戰爭에서 승세를 굳혀가고 있는 막강한 일본침 략군을 자기 조국강토에사 몰아내어 일본에 종속화되어가고 있는 자기祖國을 구하기 위해서 재봉기하  게 된 것이뗬다. 따라서 제 2차 농민전쟁의 동기는 일차적으로 일본침략군  을 몰아내고 나라의 자주독립을 지키기 위한抗日民族革命戰爭의 동기를  처음부터 강력하게 갖고 출발한 것이었다* 
 .第2次農民戰爭의 통기
동학능민군 총대장全琫準과 그의 추종자들이 제 2 차 농민전생의 봉기를  결정한 것은 1894년 음력 9월• 초라고 추정된다. 전흥준은 8월 하순까지도  일부 집강소 접주들의 홍기의 움직임과 요청에 아직 사태를 더 관망해야 한 다고 동의하지 않았다.『梧下記聞』에 의하면 1894년 음력 8월 25일任實로  부터南原으르 들어간金開男은 이곳에서 재봉기를 준비했는데 전라좌도의 동학농민군 7만여명이 이에 모여서 드나들며 그의 지휘를 받았다.金開男아 이르는 곳에는 좌도의 동학능민군이 군복을 입고 마중을 나왔는데 그 깃발  과鉦鼓가 80리나 이어져서 그 기세가 표하였다. 이것은 동학농민군의 재 봉기를 목전에 준비한 것이었다. 전봉준은 김개남이 남원에서 재봉기를 준 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주로부터 남원으로 즉각 달려가서 다음과 같은 말 로 김개남의 재봉기를 만류하였다.
 
(38)『官報』,開國503年8月초 1일, 초 3日, 초4日및 초5日자 찬조,  
 
「이제時勢를 살피건대倭와淸이 전쟁을 하고 있는데 어느 한 편이 승리하면 반 드시 군대를 우리에게 돌릴 것이다. 우리들은 미복 수는 많지만烏合之衆이어서 쉽게 도망해 버린다. 이 무리를 가지고는 종래 뜻을 이를 수가 없다.歸化(39)에 의 탁하여 여러郡縣에 흩어져 있으면서 서서히 그 번동올 관찰하는 것만 같지 못 하다. 
그러나 김개남은「큰 무리가 한 번 흩어지면 다시 모으기 어렵다」(41) 느 이유를 들어 전흥준의 설득을 듣지 않았다. 즉 전봉준은 음력 8월 25일경까 지만 해도 각郡縣의執網所체제를 유지하면서 동학농민군을 각 집강소에 분산시켜 은닉한 채로 청 • 일전쟁의 귀결과 정세의 번동을 더 지켜보고 싶었 던 것이다. 그 이유는 청 •일전쟁에서 어느 한쪽이 승리하면 바로 승리한 나라가 군대를 동학농민군에게 돌리어 토벌하겠다고 내려올 것이고 동학통 인군은 오합지중이어서 패전하기 쉬우니 본래의 통기의 뜻을 실현시킬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金開男은 7만여 명이나 집합시킨 동학농 인군을 한번 해산시키던 다시 모으기 어렵다고全琫準의 권고를 듣지 않은 것이었다, 김개남은 동학농민군의 전봉준 다음의 제 2인자의 위치에 있는 지도자였으며, 전봉준의 지시와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훨씬 더 급진적 인 독자적 활동도 하면서 전봉준과 은근히 경합하는 상황에 있었으므로,金開男이 재봉기하겠다는 것은 동학농민군 전체의 재봉기를 전도할 수 있는 중대하고 심각한 것이었다.
전봉준이 설득에 실패하자, 다음에는 이어서孫化中이南原으로 달려가 金開劈을 다음과 같은 말로 설득하였다고 한다.
「우리들이 통기한 것이 반년이나 되었다. 비록 전라도가 모두響墮한다고 발하 지만,士族으로서 성망있는 자가 (우리를) 따르지 앓고, 재산있는 자가 따르지 않 으며,能文之士가 따르지 않는다. 더불어接長이라고 부르는 자들은愚賤해서禍를 즐기고剽竊을 기뻐하는 무리들 뿐이다. 인심의 향배를 알 수 있으며, 일이 반드 시 성공하치 못할 것이다.四方에散開하여 (동학농민군의)苟全을 도모함만 같지 못할 것이 다.」(4가
 
(39) 여기서의「爺化」는「歸順」의 뜻이 아니라全羅觀察使金鶴鎭과의全』I,lf和約 및「官民相和之策」의「妥協」에 의한「執綱所體制에의歸化」를 의미한 것이 라고 볼 수 있다.執綱所體制는 형식상 동학농민군의「白發的解散」을 전제 로 한 것이므로 이「歸化」의 용어가 사용되있런 것으로 보인다.
(40~41)『梧下記聞』,甲午8月條,第2筆의 P. 93.  
(42)『梧下記聞』,甲午8月條,第2筆의 pp.93~94.
韓 國 {匕
金開男은孫化中의 설득도 역시- 듣지 않았다. (43,  김개남 휘하의 전라좌도 동학농민군의-南原에서의l 집합과 통기 움직임은 뒤늦게 전라관찰사에 의해- 중양정부에도 보고되어 논의되었는 바, 그 내용 은「남원부에聚會한匪徒가 5•6만명이 되는데 각각兵器를 갖고 밤낮으로 跳踉하고 있다」(44)는 것이었다.
 필자는金開男이 1894년 음력 8월 25일경 ,南原에서 전라좌도회l 등학농민 군 7만여 명을 집합시켜 재봉기를 준비한 사실이 총대장全琫準의 재봉기 결 갱에 결정적 압력을 가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전봉준 자신이 남원으로 탈 려가고, 이어서 손화중이 남원으로 달려가 김개남을 설득하려고 노력한 시 일을 약 5일여로 잡으면, 김개남이 두 지도자의 권고를 거절한 후, 총대장  全琫準은 적어도 음력 9월초에는 재봉기를 결심하고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9월초부터는 지역별로 산발적 봉기가 일어나기 시 작하였다. 음력 9월 초 1일金溝출신의 대접주金仁培는 홍기하여光陽및順天의 동학농민군과 연 합해서 경상도河東을 함락시켜 사실상 점령하였다. (45)金允植의 음력 9월  7일조 일기에는 9월초부터 들은 소식으로「또 들으니兩`湖의東匪가 무리를  끌어 모아서 서울로 향하였는데 장차 보름쯤에는 서을을 범한다고 한다」” 는 소문이 `있다고 기특하였다. 음력 9월 초9일의『官報』에는 경상관찰사의 전보에 의하면匪徒수백명이 홍기하여星)•]`l를 함락시켜 첩형하였다고 기록  하였다. (47) 또한 9월 초9일자 군국기문처議案의草記에는匪徒가 경기도 의竹山과安城에서 홍기하여 이를 점령했으므로壯衛營領官李斗璜을竹山府使로,經理營領官成夏泳을安城郡守로 임명하여 각각 군대를 영솔하  고 불일내에 내려가서 진압하도록 하였다. (43) 전라도 뿐만 아니라 충청도, 경상도, 경기도 등지에서도 자연발생적으로 동학농민군의 간헬적 재봉기들 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전봉준은 음력 8월말에 고향泰仁에 들렸다가 9원초에泰仁을 출발하여
 
(43)『捂下記聞』,甲午8月條,第2筆의 p.94 참조.
(44)『官報』,開國503年9月22日자 (亞細亞文化社版)第1卷, p.530「南原府聚會之匪徒爲五六萬各特兵器日夜跳跟」참조. (45)『梧下記聞』,甲午9月條,第2筆의 p.101 참조.
(46)『續陰晴史』上卷,高宗31년 9월 7일초, p.339 참조.
(47)『官報』,開國503년 9월 초9일자, (亞細亞文化社版),第1卷, P. 464 참조.
(48)『官報』,開國503년 9월 최0일자, (亞細亞文化社版),第1卷, 468 차조.
金:傋院坪을 거쳐서參禮에 도착하여 여기에 제 2차 농민전생 흥기의大都所를 정하였다.參禮는全Jil,l 바로 북쪽에 있는驛으로서 토지가 광활하고 전라도 교눃의• 요충지이므로 재봉기의大都所를 설치하기에 적합한 곳이텼 다. 전홍준은泰仁을 출발하여冬禮驛에 도착하는 사이와 삼례 도착 직후까 지에鎭安에 “사는 동학접주文季八•金永東•李宗泰,金溝에 사는 점주趙駿九,全尹[,l의 겁주崔大奉•宋日斗,井邑의 점주孫如玉,扶安에 사는金錫元•金世中~嵂卿宣(景善) •宋熹玉등 접주들과 재봉기를 모의하였다. 그리 하여 1894년 음력 9원 13일(양력 10월 11일) 동지孫化中을 비롯하여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全』)`H,鎭安,興德,茂長,高敞등 전라도 53군현에 동학농민 군의 재봉기를 촉구하는檄文을 돌리고 또 사람을 파견하였다. (49' 이것이 동 학농민군의 제 2차 농민전쟁 봉기의 공식적 선언과 같은 것이었다.
전봉준의 재봉기檄文에 호응하여 즉각 쑤禮驛에 모인 동학농민군이 약 4천명이 되었다. (50) 그리고 이 격문에 호응하여 전라도 각지執網所에서 동 학농민군이 재봉기하였다. 이 때 전봉준의 격문에 호응하여 처음 재봉기한
〈표 1>南接湖南지방에서第2次農民戰爭때 봉기한頭領과兵力
 
(49)『全琫準判決宣告書原本』, 『韓國學報』제39칩, 1985, PP. 189~190 참조.
(50)『全琫準判決宣告書原本힒,『韓國學報』제39집, 1985, P. 190 참조.
 
4匕執網所의 동학농민군을 오지영의『東學史혱에서 보면 (표 1>과 같다. (51, 이 때 처음 재봉기한 집강소의 동학농민군은 약 11만 4,500명에 달했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자기 고을에서 농민군부대를 편성하여大接主•執網의 지 휘를 받은 것이었고, 모두가參禮에 모여全琫準의 직접 지휘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중에서 소수만이 직접參禮로 달려와서全琫準部隊에 편입되 었다.
동학농민군의 지휘 체계는全琫準이大將(총대장)이 되고大頭領인孫化中 과金德明이總指揮가 되었다纛(52]南原에서 홍기한大頭領金開男은 직접 全琫準의 지휘하에 들어오지 않고 상당한 독립성을 가지면서 자기가 직접 지휘하는 약 1만명의金開男部隊를 편성하여 독자적 행동을 한 것으로 보 인다.
전봉준은參禮驛에 모인 동학농민군 부대들 중에서崔景善部隊는光』44해에 파견하여孫化中部隊와 함께光尹]`하羅』)`h芹근에 남아서日本軍의 남해 안으 로의 상륙과 배후 공격을 차단하고 호남일대의 집강소 체제 유지의 무력으 로 활동하도록 하였다. (53) 전봉준의 음력 9월 13일의參禮驛에서의 제 2 차 농민전쟁 재봉기는報恩` 에 있는北接大道主崔時亨의 사전 허락을 받지 않고 단독으로 결정하여南接만 재봉기한 것이었다. 제 1 차 능민전쟁 때에도 전봉준은東學제 2세 교 주인北接大道主최시형의 허락을 받지 않고 통기하여北接과南接사이에 약간의 갈등이 있었는데, 전봉준은 제 2차 농민전쟁 봉기에도 북접대도주의 허락을 받지 않고 재봉기했으므로 갈등이 약간 더 격화될 것은 내다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등학농민군이 홍기의 목적을 탈정하기 위해서는 거 대한 세력을 갖고 교주가 직접 지휘하는北接과의 연합과 통합이 절실히 필 요하였다. 이에全琫準은 오지영의 제의를 받고 북접과 두터운 친분이 있는 吳知泳•金邦瑞•劉漢弼등을 복점 대도소에 파견하여南北接連合을 도모하 도록 하였다. 오지영 등이 복접 대도소에 도착해 보니金演局•孫秉熙•孑系天民•黃河- 드 0五丁= 0 드으긚 “ 「道로써亂을 지음0 불가한 일이다. `湖南
 
(51)『衷學史』, PP. 134~135 참조, 
(52)『東學史』, p.135 참조.
(53)『全琫準供草』,四招問日,『東學貳記錄』下卷, PP. 551~554 참조.
第2大
의全琫準과湖西의徐璋玉은 국가의 역적이요師門의亂賊이라 우리는 딸 리 모여 그것을 공격하자」는 남점 규탄의 통문까지 지어놓고 있었다. 오지 영은日本軍과淸軍과 관군의 앞에서 동학군이 내분을 보임은 불가하며 동 학도인은 단합하여 생사를 같이해야 한다는大義를 들어 교섭하였다. 북접
-측에서는孫秉熙가 이에 적극 찬성하여 남점 규탄의 통문을 건어 치우게 하  협의한 결과輔國安民의 기치하에 특점도 봉기하여南北接이連合해서 進退를 같이 하기로 합의하였다. (54) 이에南北接連合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동학 제 2세 교주인 북접대도주崔時亨도 이에 찬성했을 뿐 아니라,南北接  의 조화를 강화하기 위해吳短泳을兩湖都察에 임명하였다.兩湖都察의 임 무는南接과 화t接사이의 갈등,包와包사이의 갈등을 해소하여調和를 강 -화하고 도인과 외부인사의 관계, 집강소와 집강소의 관계를 감독하는 일이 었다.
최시형은 음력 9월 18일北接산하의 각 포 접주들과 동학농맨군들을靑
 [쇠에 집 합하게 하였다. 이에 북접 동학농민군 수만명이 모인 자리에서 최시 -형은 손병희 • 손천민의擧義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하여「人心이  곧天心이라, 이는 곧天運所致이니君等은道衆을 동원하여全琫準과協力 -하고師寃을 4申하며吾道의大願을 실현하라」고 말하여 명령하고,孫求熙를  統領에 임명하여北接軍을 지휘하도록統領旗들 내려 주어 일제히 전선으로
 나가도록 하였다. (55) 이에北接도 9월 18일자로靑山에서 홍기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서南北接連合에 고취되어南接에서도追加의 홍기가 있었다.
〈표 2〉 追加로 南接湖南지방에서第2次 農民戰爭재蜂起한 지역과頭籟
 
(54)『東學史』, PP. 137~139 참조.
(55)李敦化,『天道敎創建史』19331第2篇의 p.6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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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3〉北接湘西와 그以北에서第2次農民戰爭매蜂起한 지역과頭領
 
이때南接의追力日蜂起의 지역과頭領들을 보면〈표 2)와 같다. (56) 또한 이때湖西와 그以北의北接의 통기 지역과頭領들을 들어보면 (표.
3>과 같다. (57)
北接의 봉기 지역은 위의 표에서는 최초로 봉기한 충청도• 경기도• 강원
 
도의 일부 지역만 제시되어 있지만, 이 박에도 북접의 지휘지역은 경상도•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등에 걸쳐 있었다. 따라서北接이 통기했다는 것 은, 제 1 차 농민전쟁때와는 달리, 제 2차 농민전쟁 때에는全國의東學農民『 이 풍기했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었다. 이 때 4匕接산하에서 처음 흥기한 동  학농민군을『天道敎創]建史』는 약 6만명이라고 추산하였고, (58)『東學史』는-
약 10만명 이 라고 추산하였다. (59) 이에 1894년 음력 9월 13일~18일에는南接과北接의 동학놓민군이 모두 연합하여 제 2 차 농민전쟁에 봉기하게 되었고, 이어서 전국 각지의 등학농 민들이 뒤따라 봉기하게 되었다.
 
(56)『東學史』, PP. 139~140 참조.
(57)『天道敎創甦史』,第2篇의 p.65 및『東學史』p.140 참조.
(58)『天道敎創建史』,第2篇의 p.66 참조.  
(59)『東學史』, 140 
 
第2次
 四.南•北接東學農民軍의論山大會
  전봉준은 쑤禮에서 1894년 음력 9월 13일 제 2차 농민전쟁 재봉기의檄文 을 각처에 돌린 후 약 1개월 가까이 이곳에 주둔하였다.
그 이유는 우신 각지에서 동학농민들의 봉기와 무장의 강화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호남 일대에는執絹所의 동학농민군 통치가 이미 실시되 어 어느 정도의 무장이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충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수의執網所들에서는官衙의武器庫를 열어서 무장  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호남 일대에서는 1894년 음력 9월 17일 현재伍實 을 비롯하여 29개 군현의武器庫가 재봉기한 동학농민군에 의해 열려져서 무기를 빼앗겨 동학농민군이 무장을 강화하였다. (60) 이러한 일은 재봉기를 합의한北接산하의忠淸道에서도 광범위하게 일어나서, 봉기한 동학농민근 들은 각 고을의官衙의武器庫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해서 무장하였다. (61) 魯城현감의 보고에 의거한忠淸監司朴齊純의 보고와 같이, 이것은「湖南匪徒」(전붕준의南接)의檄文(警報)이 도착하여 이미「亂形」(反亂형대)으로 통기 한 것이었다. (62) 충청도에서는 전봉준의 격문이 도착하기 이전부터 이미 사 실상 동학농민군이 재봉기한 것처럼 활동하고 있었다. (63) 그러다가 전봉준 의 격문이 도착한 후에는 충청도에서의 동학농민군의 봉기는全道에 걸쳐 광범위하게 일어났으며, 특히天安과 지방에서는 극성하였으므로 이미 이때부터朝』鮮軍과 함께日本軍이 내려가「토벌」을 시작하고 있었다, (64) 충 청도 수#山지방에서의 동학농민군의 재봉기에 대해서는日本軍이 출동하면서 새로 착임한 주한일본공사井上馨은 음력 10월 9일(양력 11월 6일)자의 조선 정부 의부대신金允植에게 보낸 서한에서「貴國政府(조선경부-인용자)는 이
 
(60)『日省錄』홀高宗31년(1894년) 음력 9월 17일조 참조.
(61)『高宗實錄』,高宗31년 10월 2일조 참조.
(62)『日省錄』,高宗31년 9월 18일조 참조.
(63)『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3원,「臨庶第44號,忠淸道黃山의東學黨再發等 에 관한 별지보고」,「臨庶第74號,江景•黃山에서의東學黨에 관한聞取書 별지보고」,「臨庶第78號,』忠淸道黃山地方東學黨再發狀況聞取書별지보 고」, PP. 236~241 차조.
(64)『駐韓E本公使館記錄』, 제 1 권,「天安•洪•:FI국等地日軍派遣關文의發交」,
p. 143 
4匕
린 사유로各陣各隊長및沿道의地方官에게飭令을 내리되,前進과後退를 조절하는 떼 있어서는 모두 우리(日本-인용자)士官의指揮를 따르도록 하게 하고 아울러貴士官과 명정들에게飭令을 내려 이 말을遵守하도록 하십시 요」(65)라고 하여 일본군이 주도적으로「토벌」에 나설 정도로 충청도의 동학 농민군은 거제게 홍기하였다. 또한槐山지방에서도 동학농민군 1천명이 홍 기했으며, (66) 충청북도의 동학농민군이槐山,忠』)`卜[, 부근에 많이 몰려 있으므로 일본군은 2路로 나누어 한쪽은竹山•淸J*frf •忠J,fr[ 방면으로부터 진  격하고 다른 한쪽은鎭川•淸』),I빟 방면으로 공격해서 이 지방 충청도 등학농민 군을 포위하려고 하였다. (67) 충청도 동학농민군은 9월 29일(양력 10월 27일)  새벽日本軍安保兵站部를 습격하여 소각했으며달電線을 절단하여 불통시키
고忠,)빟해를 습격하려고 하였다. (68, 이미忠,)배`[ 부근에서는 동학농민군과日本 軍忠,)피`!支部守備隊가 전투에 들어갔다. (69, 일본군측은「충청 감사의 보고에 의하면 우리(日本-인용자) 군대가忠:)•I`[지방에서 동학당 때문에 해를 입은 자 가 많다고 함」(70)이라는電報를 접수하였다. 일본군은靑安地方에서 정보를  수집하려고 일본군 3명을 통역을 불여 참입시켰다가 l東學農民軍에게 발각되 어 모두 처단당하였다. (71,
또한 경상도에서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여匏宮縣의武器庫를 점령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했으며, (72,星:)•I,l에서도 동학농민군이 홍기하여武器庫  를 탈취하였다. (73, 이러한 현상은 경기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安城 에서는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여武器庫를 습격해서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했
 
(65)『4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1원,「竹山地方東匪剿討와口軍의助剿隊士官指揮飭遵要請에 관한交信」, P. 150.
(66)『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3권,「忠淸道東學黨征討報告」, p.283 참조.
(67)『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1 권, 「忠淸北道東學黨征討方略」, PP. 152~153 참조. 
(68)『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3원,「可興地方東學黨狀況과 중원병 파견 요청」, PP. 290~291 참조.
(69)『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3 권, 「忠)`l,!支部守備兵의東學黨征討報告」, PP. 286~287 참조.
(70)『駐韓E本公便館記錄』, 제 3원, 「淸,J`N地方東學黨에 의해 군대피해 많음」,
p. 295.
(71)『駐瑋日本公使館記錄』, 제 1 권, 「淸安地方東徒의日軍殺害說의確認및拿獲要請에 관한交信」, PP. 156~157 참조.
(72)『日省錄』,高宗31년 9월 117일조 참조.
(73)『日省錄』,高宗31년 9월 19일조 
第2次
 으며, (74)陰竹에서도 동학농민군이貢器廩를 탈취하였다. 175) 동학농믿군의 -봉기가 시간의 경과와 함께 만연되어감에 따라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자기  고을의武器庫를 습격해서 관청의 무기를 빼앗아 무장하는 것이 일반화되었 다. 전봉준은 쏳禮에서 호남 일대의 집강소 농민군은 물론이요, 충청도를  비롯해서 전국 각지의 동학농민군이 그의 격문에 호응해서 봉기하여 무장하
-는 시간동안을 기다리게 된 것이었다.
그 다음의 이유로 전봉준은 농사의秋收가 끝나기를 기다리느라고冬禮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동학농민군은 무기만 놓으면 일반 농민이  있기 때문에 전봉준의 격문에 호응하여 아무리 농민전쟁에 참가하고 싶을지  라도 일년 농사의 결실을 거두어들이는 가장 보람있고 분방한秋收期의  -중에 무기를 들고 홍기하려고 하지 농민이 많았으며,秋收를 끝내고 -나서 봉기하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돤다, 그러므로 전봉준은  秋收期가 끝남을 잠깐 기다려 재봉기의 군사작전을 하려고 한 것이었다. (77  뿐만 아니라 동학농민군이北上하여 서울에 진공해 들어가려면 박대한軍需 米와軍需錢이 필요한 것인데 이것은 당시 농촌의 형편으로서는秋收가 끝 -나야 제대로 조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봉준이參禮에서 봉기한  후 추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고 스스로 응답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들어야 할 이유는 전봉준이北接과의 연합 타결에 시간이 걸렸 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전봉준은 음력 9월 13일의 봉기 후에 앞서 기  술한 바와 같이吳知泳등을北接의報恩`大都所에 파견하여 남 • 연합  에 성공하였다. 오지영이 북접 대도소에 다녀와 연합 협상 성공을 보고한  이후 북접에서도崔時亨의 서한을 갖고 전봉준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며, 이  과정에서 전봉준이北上하면서論山에서 남•북접이 만나論山大會를 갖기 로 한의한 것으로 보인다. (78)南•北接의 상호 연락과 연결은 관변측에도
 
(74)『日省錄』,高宗31년 9월 30일조 참조.
(75)『日省錄』,高宗31년 10월 2일조 참조.
(76)『全琫準供草』,三招問目,『東學亂記錄』,下卷, p.548 참조.
(77)海浦篤彌,『東學黨覿察日記』明治27年7月20日條,『初齋遺稿』, p.91 참조.
(78)『宣諭榜文並東徒上書所志謄書』중의公,)`H倡義所義將李裕尙의上書중의 全琫準과의問答내용,「求見全將問了兵端答以昨承法軒湖西都會之文,將以向北矣」참조. p.382 참조.
 
〈匕  
포착되어巡撫營은 9월 29일경「호남• 호서의 (동학) 비류가 상호 연결했으  며,湖西가 바야흐로 `湖南에게 원조를 청했다 한다」(79)고 보고하였고, 국왕도 이를 받아「湖南4湖西의匪類가 상호違絡되었다고 한다」고 대책수립과  시행을 명령하였다.
전봉준이論山에서 재봉기한農民軍의大會를 개최하기 위하여先鋒隊를  파견한 것은 10월 6일경으로 추정된다. 이 남접의 선봉대는 음력 10월 7일  경 논산의 ,띲津을 점령하고(80) 이어서論山大會의 개최지역을 전진 보위하  기 위해서 한밭(大田)에 진출했다가忠淸道營兵80여명과 조우하여〈한밭전  투〉를 치른 후에 이를 격파하고營將廉道希는 생포하여 불태워 죽였다.(81) 전홍준 자신은 약 4천명의 군사를 인솔하고 음력 10월 11일경參禮를 출  발하여 음력 10월 12일(양력 11월 9일)論山에 도착하였다. 전봉준의 격문에 호응하여論山大會에 참가한 유생 의병장李裕尙은 250명의 군사를 인솔하  고「본월(10월) 12일論山浦에留陣하고 있는데 높은 곳에 을라 남쪽을 바라  보니 흙먼지가 중천하고 총포가 숲과 같이 보여서 급히 전초대를 보내어 알  아보게 하였더니南軍16만 7천명이라고 보고하였다.全(봉준) 장군을 청하 여 찾아보고兵端을 물었더니全(장군)이 답하기를 며칠전에法軒(최시형)의  湖西軍도都會하겠다는 글을 받았으며, 장차北으로 향하겠다고 하였다」(82) 고 기특하였다. 이 기록으로 보아도 전봉준이 4천명의 군사를 인솔하고論 山에 도착한 것은 음력 10월 12일에 들림없다. -여기서南接軍을 16만 7천명 이라고 한 것은 이유상의 전초대가 탐문한 숫자인데, 논산에 도착한 전봉준  의 동학농민군 숫자가 아니라 호남일대에서 홍기한南接봉기군 전체의 수 숫자를 전하여 듣고 이유상에게 보고한 것이었다고 해석된다.
전봉준은 음력 10월 12일論山에 도착하자, 격서의 일종으로 우선京軍과 충청도營兵에게告示하고 백성들에게 알리는 다음과 같이 국문으로 된 고 시문을 발표하였다.
 
(79)『日省錄』,高宗31년 9월 29일조,「巡撫營啓言兩湖匪類互相連結별,湖西-」:  方請援於湖南云」참조.
(80)『日省錄』,高宗31년 음력 10월 8일조 참조 
(81)『日省錄』,高宗31년 음력 10월 9일조 참조.
(82)『宣諭榜文並東徒上書萌志謄書』, PP. 381~382. 
第2次
「고시 (告示) 경군여 영 병 (京軍與營兵) 이 교시 민 (而敎示民)  무다(無他)라. 일본과 조선이 개국 이후로 비록 인방(隣邦)이나 누대 적국이더 니 성상의 인후(仁厚)하심을 상항(三港)을 허개(許開)하여 통상 이후 갑신 십월의 사홍(四凶)이 협적(俠敵)하여 군부(君父)의 유1태쿰이 조석(朝夕)에 있더니 종사의 흉복으로 간당(奸黨)을 소멸하고 금년 십월의 개화간당이 왜국(倭國)을 체결하여 승야입경 (乘夜入京)하여 군부를 핍 박하고 국권(國權)을 천자(擅恣)하며 우황 방백 수령이 다 개화중 소속으로 인민을 무휼(撫倣)하지 아니하고 살륙올 좋아하며  령을 도란하매, 이제 우리 통도가 의병을 들어 왜적을 소멸하고 개화를 제어하며 조정을 청평(淸平)하그 사직을 안보할 새 해양 의병 이르는 곳의 병정과 군교(軍較)가 의리를 생각지 아니하고 나와 접전(接戰)하매 비록 승패는 없으나 인명이 피차에 상하니 어찌 불상치 아니 하리요. 기실은 조선끼리 상전(相戰)하자 하는 바 이니어늘 여시(如是) 골육상전(骨肉相戰)하니 어찌 애닯지 아니하리요. 또한 공 주(公*J`I퀔) 한밭(大日)일로 논지하여도 미록 춘간의 보원(報怨)한 것이라 하나 일이  참혹하며 후회막급이며, 방금 대군이 압경(壓京)에 팔방이 흉흉한대 편벽되어 상  전(相戰)만 하면 가위 골육상전이라. 일변 생각컨대 조전사람끼리야 도는 다르나 척대(斥委)와 척화(斥華)는 기의(其義)가 일반이라. 두이자 글로 의혹을 풀어 알 게 하느니 각기 들려 보고 충군우국지심(忠君憂國之心)이 있거든 곧 의리로 돌아 오면 상의하여 갈이 척왜척화(斥倭斥華)하여 조선으로 왜국이 되지 아니게 하고 등심 합력하여 대사를 이루게 하을새라.
갑오 십일월 십이일(83, 등도 창의 소(東徒f昌義所)」(8幻
전봉준 동학농빈군의 이 고시문은 동학농민군과 정부군은道는 다르지만 일본치 략군을 반대하는斥倭와 청의 침 략군을 반대하는斥華는 그義가 동  일하니 조선사람끼리 서로 싸우지 말고 동학능민군과 정부군이 연합하여 함 께斥倭斥華해서 조전으로 하여금倭國이 되지 않게 항일 투쟁을 같이 전개  하자고 호소한 것이 었다.
전홍준의 논산 도하에 즈음하여 호남의 남접 각지의 동학농민군부대들도 연락과 통문을 받고 논산에 도착하였다.
 
(83)『東學亂記錄』에는 이『고시 (告示) 경군여영병 (京軍與營兵) 이교시민(而敎示民)』과 그후 음력 11월 제 1 차公hi혜戰鬪후에 발포한『示京軍營兵』의 2개 告示文에 대해 편집자는 그 발포 일자를 모두「甲午11월 12일」이라 기록하 여 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착오임이 분명하다. 다른 지역 연구자가 이미 전 에 밝혀놓은 바와 같이, 순국문으로 된「고시 (告示) 경군여영병(京軍與營兵) 이교시빈(而敎示民)」의告示文은「한받전투」직후에 발표한 것이며,論山大會에 임하여 발표한 것이 명백한 것이라고 본다.
(84)『宣諭榜文並東徒上書所』志腦書』, 한. 379~380.
(t 
한편 북접군은 음력 9월 18일의靑山聚會에서 각접의 두령들이 북접대도.
주崔時亨으로부터「道衆을 동원하여全琫準과 협력하고師寃을 4申하며 우  리道의大願을 실현하라」는 봉기 명령을 받은 후 각지에 돌아가서 동학농  민군을 편성하여 봉기한 후 북접대도소가 있는報恩의帳內로 집 합하였다. 
北接산하의 동학농민군 중에서 어떤 부대는報恩까지 도착하는 과정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하기도 하였다. 예컨대忠,)十l의 동학대접주辛在蓮의 동학농민군부대는 음력 9월 24일부터鎭川의 유생許文叔이 일으  킨民堡軍의 진로 방해를 받자 이를 공격하여 격파해서 완승을 거두고許의  민보군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귀가시켰다. (85)辛在蓮의 동학농민군부대는 이• 어서 9월 29일鎭川의官房을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86) 이 동학농민군부대  는 이어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끝에 10월 초6일에는槐山邑을 점령하였” 다. 당시槐山군수李容奭이 충주에 주둔하고 있는 H本軍을 불러다가 동  학농민군을 방어하려고 했으므로 동학농민군과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동학농민군에게도 상당한 피해가 있었는데 마침 해가 져서 어두워지자 동학농민군이 일제히 고함을 치며 돌격하여 일본군을 기습해서 점멸 하였다. 이때槐山의 동학 점주徐씨가 피살됨에 그의 13제된 아들이 아버  지의 원수를 갚겠다고邑내에 참입하여 관아에 불을 질렀으므로 관청과 민  가 과여 호가 소실되는 참화가 일어났다. (87) 북접의崔時亨은 각지의 동학농민군이報恩에 모이자孑系秉熙를統領으로  하여 각包를 총지휘하게 하고,鄭璟洙의包를先鋒軍으로,全奎錫의包를  後軍으로,李鍾勳의包를 좌익으로,李容九의包를右翼으로 삼아北接軍부  대를 편성했는데 모인 동학능민군이 모두 6만명이나 되었다. 이에 4匕接농  민군은 10월 10일 경에孫兼熙의 지휘하에 행군을 시작하여敦論村에서  ,띥守備兵과 싸워서 크게 승리하고, 이튿날全軍을 2隊로 나누어甲隊는永」同과沃川을 거쳐서論山에 도착하여全琫準의 동학농민군과 합세했으며,  乙隊는 i褒德의芝明市에 이르러淸』)4`I官軍과 싸워서 이를 점멸하고論山에:
 
(85)『兩湖右先鋒日記』甲午9월 22일~28일조,『東學亂記錄』上卷, pp.260~ 263 참조.
(86)『兩湖右先鋒日記』,甲午9월 29일조,『東學亂記錄』上卷, p.263 참조.
(87)『兩`湖右先鋒日記』,甲午9월 최0일조,『東學亂記錄』上卷, p.269 및『天道 敎創建史』,第2篇의 pp.65~66 참조.
 
39/
도착하였다. (삐
동학농민군은南接과北接이論山에서 합류하자全琫準과孫秉熙를 결의 형제를 맺도록 하고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추대하였다.『東學史』는 이 때의 남점과 북접의 의기 투합된 모습을 다음과 같이 고사하였다.
「東學軍의大本營은論山浦에 있었으며湖南全琫準과湖西孫秉熙兩大絍이 서 로 만나 손을 잡으니 -面이如舊에肝膽이相照하고志氣符合되는지라. 드디어妃弟의誼를 맺어死生苦樂을同盟하니全은兄이 되고孫은弟가 되었다, 이 달로 부터同卓에서 밥을 먹고同帳에서 참을 자고 기다 모든 일을 동일한步調를 취하 여 나가기로 결심하였다.」(삐
이 때論山大會에 집합한南北接軍의 병력 규모에 대하여『宣諭榜文並東徒上書所志彌書』는南接軍이 16만 7천명이라 기록했고(90)『天道敎創建史』는 北接軍이 6만명이라고 했으므로, (91) 양자를 합하면 22만 7천명이 된다. 그 러나 이것은 과장돤 숫자이고 잘못 계산된 것이다. 앞에서도 기술한 바와 같이 위의 남점군의 병력 숫자는 공주 의병장李裕尙이 전봉준부대의 논산 도착을 멀리처 보고 전초대를 파견하여 탐문해보게 했던 바 호남일대南接軍총규모가 16만 계명이라는 탐문결과보고를 받은 것에 불과했지 논산에 도착한南接軍의 병력숫자는 아니었다. 또한 위의 북접군의 병력 숫자는 보 은에 모인北接軍의 총명력이었지 손병회의 인솔하에 논산에 도착한 병력 숫자는 아니었다. 논산대회때에 재편성된 전봉준 직할부대는 약 1만명이었 고, 손병희의 직할부대도 약 1만여명이었다고 추정되는데, (9하 그렇다면 論山大會에 참가한 남 • 북접군은 그후의 부대 배치 상황에서 추정할 때 약
5만명 정도였다고 판단된다.
전봉준은南• 회t接연합이 실현되자 음력 10월 16일兩湖1'昌義領袖의 자격 으르 충청도 관찰사(朴齊純)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한문 편지를 보내었다.
 
(88)『天道敎創建史』,第2,篇의 p.66 및『兩湖右先鋒日記』甲午10월 14일조, 『東學亂記錄』上卷, P. 275 참조.
(89)『東學史』, p.141.
(90)『宣諭榜文뾰東徒上書斯志謄書』,『東學亂記錄딘,下卷달 P. 382 참조.
(91)『天道敎創建史』,第2篇의 p.66 찬조.
(92)『全琫準供草』,初招問目,『東學亂記錄』下卷, p.529 및『全琫準判決宣告書原本』『韓國學報』제39집, 1985, P. 190 참조.
(93)『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1원,「公』hN附近戰鬪詳팺」, p.247 및『巡撫使呈報罎』,『東學亂記錄』下卷, P. 10「仄川包東徒數萬名」참조.
{匕  
다豪i」湖f昌義領袖全琫準은湖西巡相(충청도 관찰사) 각하에게 글을 올린다.  
覆載간에 사람은綱紀가 있어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컨는 것이니,食言하고 미•  0 2-이는 자는 사람으로써 논할 수 없느니라. 하물며 바야흐로 나라가 어렵고 류! 기 그 이 이 느 어찌 감히外飭과內誘로써 하여 하늘과 태양 아래 한 순간이라도 숨을 수고 목숨을 유지 할 수 있겠는가.  
일본침 략자들이 구실을 만들고 군대를 동원하여 우리君父를 핍박하고 우리 백 성을 근심케 하니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옛날 임진왜란의禍에 오라캐가凌寢하 여闕廟를 불태우고君親을 욕보이고 백성들을 살륙했으니, 백성들이 함께 모두 분하게 여기여千古에 잊을 수 없는 ,l艮이다.草野에 있는 필부와 몽매한출十동까지 아직도 울분을 잠재우지 못하고 있으니 항차 각하는 대대로 녹을 먹은 고관으로서 평민小夫보다 몇배나 더하지 않겠는가. 오늘날의 조정대신들을 보건대, 망령되어 자기 생명의 안전만을 생 각하여 위로는君父를 협박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속여서 京夷(일본-인용자)에게連腸하여南쪽 백성들에게怨을 펴서 망령되이親兵을 동 원하여先王의赤子를 해치고자 하니• 참으로 어떠한 • 뜻이며 궁극적으로 무엇을 하 켜는 것인가.
이제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극히 어려운 것임을 진실로 알고 있으나, 일 편단심 죽음을 각오하고 천하의人臣된 자로서 두 마음을 품은 자를 소제하여先工朝오백년遺育의 은혜에謝하고자 하니, 원컨대 각하는猛省하여義로써 함께 죽으면 천만다섂일까 하노라*   갑오 10월 16일在論山謹呈」(94)
전봉준의 이 편지는 대상이 충청도 관찰사이니만치 유생들이 애용하는 구 투의 표현을 빌려 친일 대신들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충청도 관찰사에게 크 게 반성하여 동학농민군의抗日義兵에 동참한 것을 요구한 호소문이었다.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의 제 2 차 농민전쟁이 일본침 략군을 자기 조국강토 에서 몰아내고 국권을 지키기 위한抗日義兵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기 때문 에, 극소수이지만儒生등 과거에 동학농민군에 적대적이었던 사람들도 동 학농민군과 함께 는산대회에 참가하였다. 예컨대『東學史』에 의하면,公,)`I력 출신의 유생 의병장李裕尙,曠山府使겸營尉金元(允)植등은 처음에 동 학농민군을「토벌」하는 데 나섰다가 동학농민군의抗日義兵으로서의 성격과 활동을 보고 동학농민군에投合하여 활동하였다. 심지어淸國敗戰兵약간도 동학농민군의論山大本營에 찾아와附合하기를 간청하였다고 한다. (95}『梧下記聞』에서는 동학농민군의 제 2차 농민전쟁 봉기 무렵에 동학농민군에게 
 
(94)『宣諭榜文並東徒上書所志謄書』,『東學亂記錄』,下卷, PP. 383~384 참조.
(95)『東學史』, PP. 141~14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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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종한 호남지 방의 양반관료와儒生으로서 I益山郡守鄭源成,求禮縣監趙圭 -夏,獒樹察訪梁柱』爀,和順進士曺家善,任實진사韓興敎,興陽진사申瑞求,月頁天진사劉在述, 구례 -前현감南宮杓, 고부前軍醫邕宅圭, 고부 유  생宋鎭庠등을 들었다. (96) 金開男의 동학농민군은論山大會에 참가하지 않았다. 전홍준은參禮를 띠 나論山으로 향하면서 김개남에게 연달아 격문을 띄워서北上하여後援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김개남은 음력 10월 14일南原을 출발하여全%bl•[ 로 향했는데銃筒을 가진 농민군이 8천명,輜重이 백리에 이어졌다고 한 다. (97) 김개남은 전주에 체류하여軍需錢을 징발하면서 이에 비협조적인古阜郡守梁性煥과南原府使李龍憲을 살해하고順天府使李秀弘을 곤장 30대 를 치고 투옥하였다. 킵개남은論山으로 가지 않고全,)`H에 주둔한 채 독 자적으로北上을 준비하였다.
동학농민군의論山大會에 의해 전봉준의 지휘 아래서 동학농민군의 부대 편성과 배치가 조정되있다. 우선 북쪽으로는金福用이 지휘하는 3천명의 동  학능민군이天安의木川細城山에 주둔하여 일본군과 관군의 남하를 저지하
 ,朴德七과朴寅浩가 지휘하는 7천명의 동학농민군을洪,州•禮山방면에  주문시켜 해안의 평야지대를 따라 일본군과 관군의 남하를 저지하게 하였 다. 그리고崔漢圭가 지휘하는 3천명의 동학농민군을公『秀네의維鳩방면에  전진케 하여公IJ•[`喊을 외곽으로 포위하현서 일본군과 관군의 지원로를 차단  게 하였다. (99) 그리고 남방으로는金仁培가 지휘하는 1만명의 동학농민군을 11頂天과麗水와相開에 배치하여 일본군과 관군의 남해안 상-수을 저지하도록 -하고, (100)孫化中과崔景善이 지휘하는 7천명의 동학농민군을光)l빟와  부근에 배치하여 일본군과 관군의 후방 공격을 차단하고 호남 일대의執網 所체제 유지와 유생들의 결집을 저지하여 후비를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고論山으로부터는全琫準이 직접 지 휘하는 1만명의 동학농민군부대
〈전부준부대)와 1系秉熙가 지휘하는 1만명의 동학농민군부대(손병희부대)의 2만
 
(96)『梧下記聞』,甲午8月條,第2筆의 pp.94~95 참조.
(97)『梧下記聞』,甲午10月條第3筆의 p.20 참조.
(98)『梧下記聞』,甲午10月條,第3筆의 p.24 참조. (99)『東學史』, p.151 참조.  
(100)『梧下記聞』,甲午9月條,第2筆의 p.101 참조.
4匕
명이 주력부대가 되어 부상하면서公•)l,}를 공격하여 점령하도록 하고,全』)`厖 에 주둔하고 있는金開男이 지휘하는 8천명의 동학농민군부해가 뒤이어 북 상하면서後援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41%) 그리고 이밖의 각지의 다수의 동학  농민군부대들은 그 뒤를 이어 북상케 하였다.  그리하여 전봉준부대와 손병희부대 2만명은 1894년 10월 21일경公列`5를  공격하여 점령하려고論山을 출발하였다. (102) 전봉준 지휘하의 동학농민군이 먼저公)•卜l를 점령하려고 한 것은 당시公 州가忠淸道의首都로서 이를 점령하면 이미 점령한 전라도 수도全』尹에와 함 께湖南•湖西가 모두 동학농민군 지배하에 완전히 들어오며 동학농민군의 北上에 관군의 저지선이 없이 바로 다음에는 서울漢弓을 공략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 
五.全國각지 방에서의東學農民軍의 봉기
전봉준이 1894년 음력 9월 13일 제 2차 농민전쟁 봉기의 격문을 전국에 돌리고, 제 2 세 교주 최시형도 흥기를 명령하여, 10월 12일~20일論山大會 가 열리는 기간에東學農民軍은 전라도와 충청도에서만 봉기한 것이 아니才全國에서 봉기하였다. 그 중에서도 황해도, 경기도, 경상도, 강원도에서는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대규모적이고 격멸하였다. 주모는 이보다 훨씬 작았지 만 평안도와 함경도의 일부에서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다.
의정부의 음력 9원 24일자啓言에는「호남과 호서의匪類가 근래에 다시  嶺南과關東과京畿와黃海道등지에 만연하였다」(劗3)고 하였다. 각 지방의 동학농민군의 봉기와 농민전쟁은 각각 별개의 특립논문이 필요한 방대한 수 제이므로 다른 기회로 미루고, 여기시는 몇즐씩으로 간단한 줄거리만을 작 기로 한다.
 
(1이)『梧下記聞』,甲午10月條,第3筆의 p.19 참조.
(102)『駐韓日本公使館記錄』제 1 권,「諸第83號,恩津•礪山等地東徒의公,hi*攻取豫定開戰書送付」, P. 174 참조.
(103)『日/省錄』,高宗31년(1894년) 음력 9월 24일조,「議政府啓言兩湖匪類들丘   It夏蔓延方'픛뙤南關東畿海等地云各處剿撫事宜幷令巡撫使請-切辦理. -1  참조.
4이
黃海道에서는 대접주元容馹,崔瑞玉,林鍾賢,吳膺善,尹道敬,方燦斗, 姜成- 등이 지휘하는 동학농민군이長淵에서부터 봉기하기 시작하여 황해
도 각 처에서 수만명이 봉기했으며, (104, 음력 9월 27일(양력 10일 25일)에는 황해도 수도인海,)`!`를 점령하였다. (105' 황해도 관찰사鄭顯奭은 부상을 입   判官은 동학군에 포박되어 이 사실을 중앙정부에 제때에 보고조차 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106) 황해도 동학농민군은海』)주뻬서 일단 철수했으나, 그 세력이 크게 불타올라서 13개 군현을 점령하고金川까지 진출하였다. (107) 황해도 동학농민군은 또한 청일전갱의軍需品조달을 위하여靈寧에 파견 된日本軍入江少佐일행을 공격하여 2명을 사살하고 나머지 일본군을 모두 黃『尹卜로 패주시켰으며, (108)豊川지방에서 활동하는日本商人들을 처단하였 다. (10아 동학농민군은載寧에서도日本商人들을 처단하고 추방하였다4 (11삐 일 본군측은 황해도에서 -부기한 동학농민군의 총수를 약 3만명이라고 추산하였 다.咀1) 일본군은平壤에 있던 일본군 중에서 1개 중대를 급히 황해도에 파 견하고, (1鷺) 이어서龍山에 있던 7受備步兵중에서 1개 증대를 황해도에 급 파하여「토벌」을 담당하게 하였다. (1昭) 황해도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이海,)`I,를 방어하게 된 후에 특히八峰接主金믘洙(金九)가 지휘하는 7백명의先鋒隊를 앞세워 수천명이 음력 11월 2일 경에 제 2 차로海4)`에城을 공격하였다. (114) 조선조정측은 사태가 급박하다는 巡撫營의 보고를 받고 원명을 보내도록 명령한 정도였다. (1苔) 그러나 4시간
 
(104)韓,泊腐,「東學農民軍의蜂起와戰鬪-江原•黃海道의 경우-」,『韓國史論』, 제 4 집, 1978, 참조.
(105)『東學史』, p.152 참조.
(106)『日省錄』,高宗31년 11월 2일조 및 11월 4일조, 참조.
(107)『續陰晴史』上卷,甲午11월 9일조, p.345 참조.
(108)『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3권,「黃海道東學黨征討狀況」, p.303 참조.
(109)『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3권,「南立占發甲第10琥,黃海道東學黨情況에 관 한 보고」, PP. 254~255 꿈조.
(110)『柱韓日本公使館記錄』, 제 3권,「載寧地方東學黨情`況퍲告」, P. 306 참조.
(111)『東學黨征討略記』, p.18 참조.
(112)『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1 권,「海,h卜凍學軍防剿狀況과拿瓊者會審方針周知依賴」, p.180 참조.
(113)『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3원,「南站發甲第10號,黃海道東學黨情況에 관 한 보고」* p.254 및 제 6권,「豊川•瑞興•鳳山등치東學黨討伐情況에 관한坂井大탄의報告書送付의件」할 PP. 10~12 참조.
(114)金九,『白凡逸志』(白凡金九先生紀念事業協會版), PP. 33~36 참조. (115)『日省錄』高宗31년 11월 2일조 참조.
 
의 격전 끝에 일본군의 현대적 화력을 당하지 못하여 동학농민군이 패퇴하 였다. (116) 황해도 농민군은 제 2차 해주 점령에 실패한 후에도正方山城에 있는武器庫를 점령하여 무기를 공급하고, (117) 또한李東燁의 지휘하에九月山에 주둔하여 일본군과 대치하였다. [1“)
경기도에서는鄭景洙•任命準등이安城에서,高在棠은陽智에서,任學善•洪汞箕는全奎錫•金틔鎭은利)k뻬서,辛在俊은楊根에서, 金泰悅은砥平에서 먼저 동학농민군을 일으키었다. (119) 뒤이어 경기도 각지 에서 동학농민군이 연달아 봉기하였다.安城의 동학농민군은 안성 군청을 공격하여 구기고들 열고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하있다. (120) 동학농민군은陰竹縣도 점령하여 무기고를 열어서 농민군의 무장을 강화하였다. (121) 동학농 민군은水原부근에서도 홍기하여 활동했으며, (122) 일본군이「토벌」에 나서 동학농민군 지도자를 체포하자 한 때 후되했다가는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항일 무장활동을 하였다. (123) 동학농민군은水原을 위협했으므로 일본군이 긴급히 병력을 수원에 증파하였다. (124)高陽과匏山사이에서는 동학농민군 이 신출하여 우편배달부를 습격해서 통신을 마비시키면서 일본군을 위협하
였다.(125)
경상도에서는 일찌기 9월 초에花開,南海,河東,泗川,晋』)•I%昆陽,星州등지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다. (12㈜南海에서는 음력 9월 11일(양력
10월 9일)에湖南동학도 19명이 무장하고 현청에 들임하여吏胥들을 위협해
(116)『東學黨征討略記J, PP. 16~19 및『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권,「海)IF퍼地   方東學黨에 관한鈴木/少尉의諸報告」PP. 229~230 참조.
(117)『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6권,「豊川•瑞興;鳳山등지京學黨討伐戰•7兄 에 관한坂井大尉報告書送f寸의 4牛」, PP. 11~13 참조.
(118)『白凡逸志』, PP. 39~42 찬조.  
(119)『東學史』, P. 140 참조.  
(120)『터省錄』,高宗31년 음력 9월 30일조, 참조.  
(121)『日省錄』,高宗31년 음력 10월 2일조, 참조.  
(122)『駐韓昌本公使館記錄』, 제 1 권,「東學黨의景況및征討에 관한華城留守 의書翰」결 pp.159~161 참조.  
(123)『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1 권,「水原府匪徒討伐을 위한日軍出兵과朝鮮官軍의協助에 관한諸交信」, PP. 141~143 참조. 
(124)『駐韓目本公使館記錄=1, 제 3권,「水原으로의軍隊派遣의 {牛」홀, pp.362~ 363 참조.
(125)『駐韓日本公便館記錄』, 제 1 권,「高陽地方兇徒情況과寺院에 관한報告上申」, PP. 223~224 참조.
(126)『梧下記聞』,甲午9월조,第2筆의 PP. 101~103 참조.  
第2次 훃03
서 감옥에 있는 동학도 16명을 임의로 석방했고 이어서 200명의 동학농민군 이昆陽등지로 향하였다.泗川에서는 음력 9월 13일(양력 10월 수백명 의 동학농민군이 홍기하여東軒에 진입해서武器章를 열고 무기를 발취하여 무장했으며, 20일에는 800명의 동학농빈군이銃劒을亡 난입하여公麝를 불태워 버렸다.河東에서는 음력 9월 15일 등학농빈들 수챈명이多率寺에 모여서 봉기했으며,光陽•順川의 동학농민군들 수천명이旗를 고 꽹과리   치며 총을 소아대면서 바로河東邑을 공격하여 입성하있다4 (1”)河東邑 에는 본래 400명의砲手가 있었으므로 동학농민군에 저항하여 큰 전투가 별 어겨서 동학농민군의 -陣은 패배했으나 나머지 다른 동학농민군들이 일시 에 공격하여河東邑을 점령했으며河東府使는漆谷의 본택으로 도망해 버렸 다. 이 전투로河東의 많은民家들이 불타고 수백명이 사방하였다. (128)河東의 동학농민군은 호남에서 온 동학농민군과 합세했으므로 그 기세가 매우
강대했기 때문에 (129, 수천명의 병력으로晋,J`Il를 점령하려고 위협하였다. (130) 固城에서는 600여명의 동학농민군이 홍기하였다.晋尹蚪에서도 음력 9월 14일 (양력 10월 12일)府內에서 동학농민들이 홍기하기 시 작했는데, 17일에는 7可東으로부터 수천명의 동학농민군이 들어와晋,)뻬城을 점령해 버렸다. 18일에 는嶺湖大接主金仁培가 1천여명의 동학농민군을 거느리고晋J녥희에 들어왔는 데軍陣의 전면에「輔國安民」이라고大書한大紅旗를 세우고 징을 울리며 북 을 치면서 총을 조아빘는데 포성이 우뢰와 같아서 관속들이 모두 도망하였 다. (131)晋』)수圈모인 동학농민군들은大集會를 연 다음昌原,金海,南海의 봉기를 촉구했으며 (132) 이어서固城과統營을 공격하려고 위협하였다. (133) 등 학능민군의 강대한 세력에 늘란 일본측은釜山兵站部의日本軍을 출동시켜 대항하기 시 작하였다. (134)
 
(127)『承政院日記』,開國503년 9월 30일조, 참조.
(128)『韓國東學黨蜂起-件』(日本外務省外交史糾館所藏)「機密第75號」참조.
(129)『亡韓日本公使館記錄』, 제 1 권,「第197臥,東學匪徒의河東攻擊에 따른巡査•兵力派逍問題」, P. 129 참조.
(130)『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1원,「京第90號,河東附近東學黨의 •群集과日軍出兵에 따른地方官의 편의제푱 문제」, p.135 참조.
(131)『承政院日記』,開國503년 9월 30일조, 참조.
(132)『韓國東學黨蜂起-件』,「機密第75號』참조.
(133)『駐韓日本公使館記錄』,第1卷,「京第92號,賢尙道泗川의東學黨에 관한 實況報告」, PP. 146~147 참조.
(134)『承政院日記』,開國503년 11월 초 4 일조, 참조.
40부
경상도 서남지방의 동학농민들은晋4)수를 거점으로 삼아서 여기서 출발하 여四出,丹城,山淸,宜寧,鎭海,漆原등의 여러 읍을 공격하여 일시 점 거하였다. [1%) 이에 놀란 경상관찰사 i也錫永이 동학당 대접주들과 면담하여 사태를 해결해 보려고 시도했다가, (136, 일본군에 탐지당한 바 되어東學黨 에 동정적인 관찰사라고 격렬한 규탄을 받기도 하였다. (13D 경상도 지방의 등학농민군은 음력 9월 15일 경醴泉에서도 4•5천명의 큰 규모로 봉기하여 예천음을 공격하였다. (138) 동학농민군은 9월 17일에는麓 宮縣에서도 봉기하여 무기고를 점령하고 무장했으며, (139) 9월 19일경에는 星기타를 공격하여 구기고를 점령하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蜨0) 동학농민군은 尙』J,버에서도 -봉기하여 급파된 일본군과 전투하였다. (141) 또한 동학농민군은 善山부근에서도 수천명의 규모로 봉기하여 •日本軍의洛東兵站部를 습격하 려고 위협하였다. (142) 일본군은晋|尹I+닉東學농민군 수천명이 두 갈래로 길 을 나누어釜山을 습격하려 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이의 대책에 전전긍긍하 였다. (143)
동학농민군의星•秀I,l와 7可東공격 때에는 전투가 격렬하여星,),ID}에서는 민가 6백여호가 소실되었고, i可東은邑전체가 불타다시피 되었다. (144) 동학농민 군의 무장활동과 전선 절단에 의하여 E本軍의大邱~安山간의電線이  
두 파괴되었다. (145) 10월 14일(양력 11월 11일)에는 부근에서 동학농민
 
(135)『梧下記聞』,甲午9월조,第2筆의 p.103 첨지.  
(136)『駐韓日本公使館記錄』켩 제 1 권,「第212琥,東萊府伯등各地方官의 \匪徒歡   待」, pp.136~137 및 제 3권,「東學黨에 대한東萊府伯의 수조의 (牛」p,277
(137)『駐韓日本公使館記錄』, 체 3권,「東學黨을 환대한地方官처분의 4牛」, PP. 284~285 참조.
(138)『日省錄』,高宗31년 음력 9월 15일조, 참조.
(139)『日省錄』,高宗31년 9월 17일조, 참조. 
(140)『日省錄』,高宗31년 9월 19일조, 참조.
(14D『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3원,「洛東守備兵의尙,h卜L東學黨격퇴」, p.294 참조.
(142)『駐韓I日本公使館記錄』, 제 3권,「可興4洛東東學黨情況」, p.363 참조. 
(143)『駐韓旨本公使館記錄』, 제 3권,「酬東學黨의釜山습격예정」, p.358 참조,
(144)『日省錄』,高宗31년 10월 12조, 참조 
(145)『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3권,「大邱••安山간電線파괴 배상 요청」,
p. 342 참조.
 
405
군과 출동한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혈전이 전개되었다. (L46) 일본군은 이 전 두 1주일 후에도 이 지역을 장악하지 못하고 고전하였다. (14” 경상도에서의 등학농민군의 통기는 이 이후에도 계속되어, 예컨대 10월  26일경에는義興에서도 농민군의 봉기가 있었으며, (148) 11월 7일까지도 동
-학능민군의 봉기가 연이어 계속되었다. (149) 江原道에서도 동학농턘군의 봉기는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150) 강원도에서 기는 1894년 음력 9월에平믖에서吳德甫등이 봉기하기 시작한 것을 비롯하
•여 이어서李和卿등이原尹H에서활尹冕鎬등은橫城에서,沈相賢등은晎川 “에서 동학농민군을 일으켰다. (151) 강원도에서 큰 규모로 동학농민군이 통기  한 곳은原ㆍ」`!팀寧越,平킂,旌善,橫城,洪川,江陵,襄陽등지였다. 영월 • -평창 정선의 동학농맨군은 합세하여 수천명의大軍을 만들어서大關嶺을
 널어 음력 9월 초4일(양력 10월 2일)江陵을 공격해서 점령하였다. (152) 강원도 동학농민군은江陵을 점령하자마자 9월 초5일東門에「三政의 폐 -막을 쳡革하고輔匿安民한다」(153)는 방문을 붙였다. 강원도의 동학농민군은 영월 • 평창 • 정전의 3읍을 점령했을 때에도「三政을 마음대로 정했으며(冒定 三政)」, 강릉의「府中에 4~5일 주둔하는 동안에도軍布猊와糴糴秫(환곡)를  바로잡아서三政을 임의로 삭감」[1쫴하였다. 또한饒戶에 대해서는錢財를 징 발했을 뿐만 아니라土地文書도 빼 앗고자 하였다. (155) 동학농민군은江陵 을 점령하여 4~5일간 주둔했다가大關嶺너버로 다시 철수하였다.車箕錫이
 
(146)『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3권,「晋,J뻐附近豪學軍과 R軍의 전투」, pp.377 ~378 참조.
(147)『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3퀀, •全羅西南部東學黨征討의 4牛」, P. 381 참조.
 (148)『日省錄』,高宗31년 10월 26일조, 참조.
(149)『日省錄』,高宗31년 11월 7일조, 참조.
(150)韓洧劤,「東學農民軍의蜂包와戰鬪-江原•黃海道의 경우-」,『韓國史論』 제 4 집, 1978 참조.
(151)『東學史』, p.140 참조.
(152)『東匪討論』,『韓國學報』제 3 집, 1976, p.265 및『4駐韓日本公使館記錄』제 3권,「江陵•洪,月{ •海5취地方東學黨征討報告」, P. 317 참조.
(153)『臨滌討匪小錄』,甲午9월 초5일조, p.7「初五日揭榜于邑東門矯革三政之弊寰輔國安民云云] 참조.
(154)『東匪討論』,『韓國學報』제 3 집, p.265「留住府中至於四五日維正軍糴稅三政妊意減削」참조.
(155)『東匪討論』,『韓國學報행 제 3 칩, p.265 참조.
406
지휘하는 동학농민군은平쿜의蓬坪內面에서 포수대장姜渭瑞가 지휘하는 官軍을 패주시켰다. (156) 이에 대항하여日本軍2개 중대가 급파되었으며, 양반 유생들의民堡軍이 편성되어 동학농민군에 대항하였다. (157)  平安道에서는 황해도와 접경인祥原에서 약 예명의 동학농민군이 봉기하 여郡衙를 습격하였다.咸鏡道에서는元山부근에서 추백명의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다. 평안도와 함경도에서는 규모가 작았다 할지라도, 결국全國8도 에서 모두 동학농민군이 흥기한 것이었다.  
이 때 제 2차 농민전쟁에서 홍기한 동학농민군의全國의 규모는 얼마나 되었을까?全琫準은 그후 체포되어 일본군의 심문을 받을 때, 그 동학능민 군의 규모를 약 60만명이며, 그 중에서 생명을 바치기로 서약한 핵심제력은 약 4천명이라고 말하였다. (158) 당시 전국의 동학교도 중에서 약 60반명의  학농민군이全國에서 제 2 차 농민전쟁에 봉기한 것이었다.
 日本軍의武力배치와 작전
동학농빈군이 1894년 음력 9월부터 제 2차 농민전쟁에 홍기하기 시작하 자 청 • 일전쟁을 한반도에서 도발하여 전쟁증인 일제의日本軍과 조선정부 의官軍은 이를「진압」하기 위한 출동을 시작하였다. 이중에 동학농민군을  탄압하고 대항하는 데 주도적으로 활동한 것은 일본군이었다. 물론 이것은  남의 나라에 무단上陸하여 침략행위를 자행하고 남의 나라農民運動에 무  단式力干•涉한不法的인 것이었다.
大鳥圭介의 후임으로 1884년 음력 9월(양력 10월)에 새로 부임한 주한 일 본공사井上馨은 동학농민군 재-통기의 움직유〕이 일어나자 이 기회에「耄22滅  “委夷」를 주창하는 항일세력인 동학군들을 뿌리뽑을 필요가 절실하다고 판단  하여 동학군만을 전담하여 토별할 1개 대해의 병력을 특파해 줄 것을 일본  군의大本營에 전보로 요청하였다. 이를 받아서 일제가 특파한 부대가 이른”
 
(156)『臨滌討匪小錄』,甲午11월 초 6일조, p,19 참조. 
(157)『駐韓日本公使館記錄~1, 제 1 권,「寧越等地에 있는石森大尉에게 보낸 -目러令 寫本의送付」헗 p.229 및『東匪討論』, •『韓國學報』, 제 3 집, pp.266~303  참조.
(158)『東京朝E新聞』1895年(明治28年) 3月65字,「東學大巨말審問續聞」참조. 
40/
〈표 4〉第2次鏖民戰爭당시朝鮮駐행日本軍의配置상황(1894년)
 
자료 •.『朝鮮駐箚軍歷史』, PP. 18~19 및 『大山巖關係文書』의「朝鮮守備隊-覽」에 의거하여朴宗根씨 작성.朴宗根,『淸日戰爭과朝鮮』p.241 참조.
바後備步兵獨立第19大隊였다.
이 때문에 국내외에서 나은 다수의 연구문헌들이 동학농민군과 전투에 들 어간 일본군 부대가 독립제19대대 병력뿐인 것으로 기술해 왔는데,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당시 일본군은 청 • 일전쟁의兵站공급로 확보와 병참조 달을 위하여後備步戾第6聯隊와第10聯隊및後備步兵第18大隊를〈표 4> 와 같이 청 •일전쟁의 전선 후방이 되어버린 한반도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이 병력은 약 5천명이었다.
일본군은 병참로를京釜路와仁川~大同江路의 2개선으로 하여 요지마다  兵立占司令部를 설치했는데, 경부로에는釜山•龜浦•勿禁店•三`7良津•密陽• 淸道•大邱•多富•洛東•台封•聞慶•安保•忠),I,I •可興(河潭) •長湖院•利川•混池岩•鳥Il!見•松`7皮鎭• 서울(京城)의 21개소에 병참사령부를 설치했고, 인천~대동강로에는仁川•音1山•高陽•坡,尹hi •長湍•開城•金川•葱莠•  興•劍水•鳳山•黃尹에 •中和•漁隱`7同의 15개소에 병참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일본군은 이 36개 병참부에 각각守備隊라는 통칭으로 1개 소대 내지 27규
소대 씩을 주둔시 켰다. (159'
 
(159)朴宗根,前揭書, p.199 차조.
 
408
캅오농민전생의 제 2차 농민전쟁은 전국 각 지방에서 봉기했기 때문에, 일  뇨 이 병참부의守備隊병력을 모두 동학농민군「진압」에 투입하였다. 이 때문에 동학농민군 부대들도 기회만 있으면 일본군 병참부를 기습하여 치열 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일제 기록에도 동학농민군과의 전투에서 사상당한 일본군 병참사령부 수비대의 일본군 명단이 일부 남아있다. (160) 경기도 • 황 해도 • 강원도 • 경상도 지방의 동학농민군「진압]에는 전적으로 일본군 제18 대대와 이 일본군 병참부 수비대가 투입되있고, 또 이 중 일부가 충청도와 전라도의 동학능민군「진압」에 제19대대의 보조 병력으로 두입되있다.
일본군後備보병독립 제19대대는 전라도와 충청도의 동학능민군을 찾아 나서서「수색 토벌」을 할 목적으로 특파된 부대였다. 이 일본군 부대는 조  선정부의 관군과合同하여 동학농민준을「진압」하도록 되었는데 그「진압」 의 원칙으로서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받았다.
  「東學黨진압을 위한派遣隊長에게 내리는 훈령.  
1.東學黨은 현지 충청도忠』)`I헤 •槐山및 지방에 군집허 있으며땰 그밖에 나어 지 동학당은全羅道• 구忠i靑道각지에 출몰한다는 보고가 있으니, 그根據地를 ^  아니어 이를剿絶하라.
2, 조선경부의 요청에 의해後傭步兵第19大隊는 다음 항에서 지적하는 세개의 길  로分進하여朝;鮮軍과 협력,沿道에 있는東學黨을 격파하고 그禍根을剿滅함  으로써東學黨이再興하는後息을 남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우두며 리로 인첀되는 자는 채포하여京城公使館으로 보내고,東學黨巨物級간의往複文書, 혹은 정부 내의官吏나地方官, 또는有力한側과 동학당 간에往復한 文書는 털을 다해 이를 수집하여 함께公使館으로 보내라. [•••~•] 단, 이번東學黨을 진압하기 위해 전후하여 파견된朝鮮軍각부대의 2進退와調達 은 모두 우리士官의命令에 따라서 하게 하며, 우리軍法을 지키게 해서, 만일軍法을 위배하는 자가 있으면軍律에 따라 처리하기로朝鮮政府로부터朝鮮軍各部隊長에게 이미示達되어 있으니, 세 갈래 길로 이미 출발했거나, 또는 장차 출발 할朝鮮軍의進退에 대해서는 모두 우리士官으로부터 지휘 • 명령을 받아야 될 것임.」,161)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일본군의「진압」작전의 원칙이 ㉦ 동학당의根據地
 
(160)『駐韓日本公使館記錄』제 1 퀸,「東學黨에 의한 지금까지의死傷者通報」, PP. 190~191 참조.
(16D『駐韓日本公使館記錄』제 1원,「後備步兵第19大隊運營上의訓令과日程表」,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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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아내어剿滅할 것, 동학당의再興의後患을 남기지 앓도록 뿌리까 -지 철저히剿滅할 것, ㉭ 우두머리로 인정되는 자는 생포하여 서울의日本 -公使館으로 뵈u 것, ㉦ 동학당 거물급 사이의 왕복문서 또는 동학당과 정 -부 관리 • 지방관 • 유력자 사이의 왕복문서들은 힘을 다해 수집하여 일본공 사관으로 보멀 것, 6日本軍士官이朝鮮軍각부대를 지휘 • 명령할 것,
〈표 5〉a本軍費傭第19大隊의 3路分進纛定表  
西路分進中隊 大隊本部 備隊1中隊
제 1 알 黑川부근 新院부근 廣{,I* 부근
제 2 일 水原부근 龍仁부근 安興부근
제 3 일 振威부근 陽智부 長湖院부근
제 4 일 安城渡부근 /「#山부근 可興부근
5 일 天安부 (滯在) 忠,JhH 부근
6 일 (滯在) 鎭川부근 (滯 在)
저 7 일 大坪부근 •淸』)취 부근 安保부근
제 8 일 公",N 부근 文義부근 梧桐부근
제 9 일 魯城부근 增若驛부근 台封부근
10 일 礪山부근 (滯在) 洛東부근
제 11 일 參禮驛부근 赤登洞부근 蓮香驛부근
제 12 일 全州부근 永同부근 (滯在)
제 13 일 泰仁부근 秋風驛부근 多富驛부근
저 14 일 川原驛부근 開寧驛부근 大邱부근
제 15 일 長城부근 洛東부근 (滯在)
제 16 일 (滯在)
제 17 일 潭陽부근
제 18 일 柯玉里부근
제 19 일 南原부근
제 20 일 雲峰부근
제 21 일 咸暠부근
저 22 일 安義부근
저 23 일 居昌부근
제 24 일 (滯在)
제 25 일 勸賓驛부근
제 26 일 高靈부근
제 27 일 부근
제 28 알 扶桑부근
제 29 알 洛東부근
中路分進中隊및 東路分進中隊및守 자료 :『駐韓日本公使館記錄』제 1원, PP. 155~156 참조.
푸10 {t 
㉭ 조전군도日本軍法을 지키게 해서 위반자는日本軍律에 따라 처리할 것, ㉨ 동행하는朝鮮軍뿐만 아니라 이미 출발했거나 장차 출발할朝鮮軍도 알 본군士官으로부터 지휘 • 명령을 받도록 할 것 등이다. 이 때 일본군은 항일  세력인 동학농민군의 뿌리까지 철저히 색출하여 살륙해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할 것을 목적으로 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朝鮮軍부대들을  日本軍이 지휘하고 명령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군 후비보명 제]9대대는 3로(西路•中路•東路)로 나누어 등학농민군을  찾아서 남하할 계획을〈표 5)와 같이 수립하였다.
일본군의 작전은東路의分進中隊를 조금 먼저 출발지 키어 동학농민군을 東北쪽으로부터全羅道방면으로 내몰도록 하였다. 만일 동학농민군이江原 道와咸鏡道방면으로 후틔하면 러시아 국경 가까운 곳으로 후퇴하는 것이 되어 적자 않게後患이 남을 것이라고 판단해서 이를 엄밀히 예방하려고 했  기 때문이었다. 즉 동학능민군을東北쪽으로부터 몰아 내려와서全羅道의 남해안지방에 몰아부쳐 여기서 모두 살룩해 버려서 후일 일제의 한국 명단• 에 대한 저항세력을 미리 철저히 발본 색원하여 모두剿滅시켜 버리겠다  는 것이었다. [162) 일본군은 이 작전을 위해東路의分進中隊를 10월 13일  (양력 11월 10일) 먼저 출발지 켰으며, 동학농민군의 전라도쪽으로의 들이에 이 병력으로는 불충분하다고 판단하여 10원 19일(양력 11월 16일) 수비대 중• 에서 1개 중대를 다시 증파해서 2개 중대를 조신군과 함께東路로 나아가게 하였다. (163)
西路와中路의 일본군分進中隊들은 이보다 며칠 후에 출발해서 동학능  민군을「토벌」하되,大隊本部는中路分進隊와 함께 가고, 동학농민군이 전  라도 남해안 지방에서까지 촌적도 없이 찾아볼 수 -없을 청도가 되면 일본 군 특파대대는 경상도洛東兵立占司令部에 집합하여 과음 명령을 기다리도  록 하였다. 그리고 양식 등 군수품의 보급은各分進中隊에 조선정부의鎭그 憮使와內務官吏등을 수행케 하여 각 지방관을 독려해서現地調達케 하-
 
(162)『在韓日本公使館記錄』제 1 퀸,「公,*`N救援要請과江原,臧鏡•貰尙道方面으 로의賊徒侵人警告」, PP. 164~165 차조. 
(163)『騷韓日本公使館記錄』, 제 1 권,「棗路로의 1個中隊增派問題」,「發第81號, 東路로의 1個中隊增派通告」, PP. 165~16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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쉈다. (164)
그리고 전라도의順天앞바다에는 일본 해군의 군함「筑波」와「操江」의  2척의 군함을 파견해서哨戒하면서 동학농민군이 다도해의 점들이나 제주도 에 들어가는 것을 차단하고 때로는 해군(陸戰幻명력을 상륙시켜 동학농민군
「征討」에 협력하게 하였다.
그 결과 동학농민군 진압에 동원된 일본군 병력은 육군이後備步兵第19大隊,後備步兵第18大隊,後備步兵第6聯隊,後備步兵第10聯隊등 약 5,800명 이었고, 해군이 군함筑波號와操江號의 2칙과陸戰隊(해병대) 2개 중대였 다. 이 병력으로 일본군은京釜路以西의 충청도와 전라도의 동학농맨군에  대한 포위망을 쳐서 3로로 좁혀 내려오는 작전을 취한 것이었다. 이 작전은 -세부사항에서는 진전에 따라 일부 수정되었으나, 큰 골격과 원칙은 그대로 수행되었다.
한편 조선정부의官軍의京兵은 일본군이 음력 6월 21일 궁궐을 침범할   일본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했었고 그 후에 왕궁 호위대로 남은 병력은 모두 합해야 2천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갑오경장 후에 긴급히 새로  敎導中隊(壯衛營소㈜도 3백여명에 불과했을 뿐 아니라 군사훈련의 기간이 짧아서, 모든京兵을 합쳐도 수집만 동학농민군의 봉기에 대항하기에는 역  부족이었다.
동학농민군 진압에 등원된繭鮮軍의 병력 규모를 보면 10월 12일에 서울 -을 출발한先鋒陣이 ㉦ 선뵹진 본진 장병 89명,統衛營장병 357명, ㉭ 敎導中隊장병 326명 등의 합계 772명이었다. (165) 이어서 10월 16일부터 전 통신을 뒤이어 남하한京兵을 그 보급 기록에서 보면, ㉦經理營709명, ㉣ -巡撫營108명, ㉭統衛營3이명, ㉦壯衛營844명 등의 합계 1,962명이었
 다. (166)先鋒陣과 후속 본전을 합하면 조선정부의京兵은 2,734명이있다. 즉  京兵의 규모는 약 2,800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여기에 조선의 각도에는地方兵으로監營의營兵이 약간 있었다. 각監營 의營兵의 구도는 250~500명의 규모였던 것으로 추산된다.
 
(164)『4駐韓日本公使館記錄』제 1 권,「後備步兵第19大隊運營上의訓令과日稗表」, P. 155 참조.
(165)『各陣將卒成冊』(親軍統衛營),『東學亂記錄』下卷, P. 639 차조.
(166)『各陣將卒成冊』(京各營供給記),『東學亂記錄』下卷, PP. 649~65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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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地方儒生들이民堡軍,義兵••• 등 여러가지 명칭으로 동학농민준  에 대항하는 군대를 편성하여京兵과營兵을 지원했는데, 그 규모는 일정치
(167)
일본침 략군이 이 모든反동학군대들을 지휘하고 명령하면서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선 것이었다.
七.東學農民軍主力部隊의 회匕上과主要戰鬪
동학농민군은 1894년 음력 10월에는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자기 지방의  일본군 및 관군과 전투에 들어가고 가 지방고을들을 점령하기 시 작하였다.  이 중에서 동학농빈군 총대장全琫準은 쏯禮를 출발하여 10월 12일論山에  도착해서 10월 16일경北接의 동학농민군과 함께論山大會를 치르고 부대를  개편한 후 10월 21일경 약 2만명의 병력으로公』기Ii를 향하여北上하기 시작  하였다.
전봉준부대가薌豊를 출발한 무렵부터南•北接의 동학농민군 주력 부대가  치른 주요 전투들 중의 몇가지를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0 한밭(大田坪) 전투
전봉준부대가參禮로부터論山으로 행군하여論山大會를 개최하려고 준비  하던 중에 전봉준부대의 선봉대가 음력 10월 9일 직전경에論山북방의  받(大田坪)에서營將廉道希가 인솔하는 충청도監營軍80여명과 조우하여  이를 점멸한 전투이다.『高宗實錄』에는 충청도 관찰사의 보고를 받은 10원  9일의 의정부의 계인으로 충청도兵營領官廉道希가 병정 80명을 영솔하고 連山•鎭岺을 순회하여公』기나의 한받(大田) 근방에 도착했을 때 돌연 동학농 민군 만여명과 조우하여 생포되어서燒殺당했는 바, 병정의 전사자를 충청 감형에서 제사하고公錢으로 보상할 것을 건의하였다. (168) 전봉준은論山大會를 개최함에 즈음하여 대회 개최지를 얻호하기 위해 직
 
(167)『甲午軍功錄』,『東學亂記錄』下卷, pp.713~728 참조.
(168)『高宗實錄』,高宗31년 10월 초9일조 및『日省錄』高宗31년 10월 초 9일  , 참조.  
 
전에 선봉대를 파견해서論山북방을 경계하게 했던 것으로 보이며, 충청도 병영도論山大會의 정보를 입수하고 사전에 그 개최지 일대를 순찰하고 귀 임하다가 동학농민군과 조우한 것으로 보인다. 전봉준이 며칠 후인 10월 12 일京軍과 충청도營兵에게 보낸 고시문에서「또한 공주 한밭 일로 는지하 여도 비록春間의報怨한 것이라 하나 일이 참혹하며 후회막급이며」(169)라 고 기록한 것이 바로 이〈한발전투〉이다. 이것은 전봉준부대의 선봉대가 충 청도營奐을 쳐부순 전투였다.
(2)木川細城山전투
전봉준부대가 논산을 출발하여 공주로 향한 바로 그날인 음력 10월 21일 충청도本川의細城山에서 동학농민군과 일본군• 관군 사이에 큰 전투가 별 어겠다. (170)木川細城山에는 앞서 쓴 바와 같이金福用이 지휘하는 북접의 동학농민군 3,000명이土城을 쌓아놓고 주둔하고 있었다. 이 농민군부대와 그 주둔지인細城山은 전봉준부대가 북상하는 경우 그 전홍이 되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이들이 전봉준부대와 더불어 북상하면 동학농민군의 서을 진입 에 유리한 위치를 선취할 수 있었다. 반면에 정부군이 이細城山의 동학능 민군을 패배시키면 동학농민군의 서울 진입을 일단 차단하여 저지할 수 있 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순두 선봉장李圭泰는 10월 20일天安에 도착하여 공동작전을 하기로 한 일본군의 도착을 기다렸다. 당시內浦에 상륙한 일본군과 관군은 바로天安 으로 오지 않고 먼저洪,)뻐로 진군해서 홍주와禮山•德山방면의 동학능민 군을 위협하여木川細城山쪽으로 몰면서 우회하여 도착하였다. 그 결과 목 천 제성산에는 예산 • 덕산 지방의 동학농민군도 밀려와 합류했기 때문에 동  학농민군의 수는 더욱 증가하였다.
細城山의 지형은南•東•北쪽의 3면은山勢가 험준하고西쪽만 조금 평 평해서西쪽만 잘 지키면 진입해 들어오기 어려운 천연 요새의 지형이었다. 동학농민군은 이에西쪽 산기슭 방어에만 전력을 투입하고南•東• 쪽에 는 지세의 협준성만 믿고 방어를 소홀히 하였다. 일본군과 관군은 1개소대
 
(169)『宣諭榜文蛇東徒上書所志謄書』, (告示京軍與營兵而敎示民昇『東學亂記錄: 下卷, p.379.
(170)『巡撫使呈報牒』,甲午10월 22일조,『東學亂記錄』下卷솵 PP.8æ9 붐조.
41푸 4匕 
 細城山의 험준한東南쪽 기슭에 배치하고, 2개소대를 세성산의 험준한  회匕쪽 기슭에 매복시켰으며, 1개 소대와 다수의 관군을 세성산西쪽의土城 위에 정면으로 동학농민군과 대치하도록 배치하였다. (171)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은 음력 10월 21일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처음 제성 산의 평평한西쪽土城안을 향하여 집중공격하다가 이어서 제성산의東南 쪽으로부터도 공격하게 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처음에 정면의 적을 향하여 치 열하게 저항하여 전-부하다가 적이 정면에만굇는 것이 아니라 배후에서도 공격해 오는 것을 보고 농민군을 나누어 용감히 대항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의火力이 우월하여 대항하기에 벅차게 되자 일본군이 없는北쪽 기슭을 향  하여 철수케 하였다. 이것이 치명적인 판단착오가 되어 북쪽으로 철수하던 동학농민군은 해복한 일본군 • 관군의 2개 소대의 집중 포화에 걸려 필사적 으로 저항했으나 막대한 희생을 내고 참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동학농민군 은 전사자 약 370명, 부상자 약 400명을 내고 동학군 대장金福用과 중군  金永祐, 화포장元金玉등은 일본군 • 관군에 생포되어 총살당하였다. (172) 동학농민군의細城山戰鬪에서의 참패는 서울을 향한 농민군의 북상로가 차단 • 저지당한 것으로서 동학농민군의 작전과 사기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중앙의 정규군으로서의 막강한日本軍•京軍과 오합지졸인東學農民軍사이에는 정상적인戰力과火力에서 엄청난 격차가 있음을 처음으로 잘 증명해 보여 주었다.
(3) ,스치),미利仁전투  
전봉준부대 1만명과 손병회부대 1만명은 음력 10월 21일 공주를 향해 는 산을 출발하여魯城과 공주敬川店에 군영을 설치하였다. 여기서 동학농민  군은 3로로 나누어公,)+[`를 향해 농민군을 진출시켰다. (173) 우선 주력부대인  전묭준부대의 1隊는利仁驛으로 진출하고 다른 1隊는 무너미(板峙)를 널어 
 
(171)『巡撫先聱陣謄錄』,甲午10월 22일조닭『東學亂記錄』,上卷, pp.413~414 참조.
(172)『巡撫使呈報牒』,甲午10월 22일조,『東學亂記錄』下卷, PP.W9 :『官報』 開國503년 10월 27일자 및菊池謙讓,『朝鮮近代史』下卷, pp.239~241 참조.
(173)『官報』開國503년 11월 27일자,「公山剿匪記」중의〈利仁之役〉, (亞細亞文化社版)第1卷, PP. 759~760 참조.
공주 남쪽 10여리 지점의孝浦에까지 진출하며, 손병희부대(통칭沃川•永同包)는 공주 동쪽 30리 지점의大橋에 진출하게 하였다. 2만명의 동학농민  군이 3路로 나누어 동시에 진출하면서公,)[렇를 3띤에서 공격하기 시작했으므  로 이제公』)}i`는 풍전등화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貯4) 이 때公J취에는 일 본군이 다 도착하지 않아서 일본군 1개 중대 (200명)와 조신정부의京軍약
•800명 및 소수의營兵과民堡軍이 방어 군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175, 전봉준부대의 1隊는 음력 10월 22일利仁驛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이에  놀란 충청도 관찰사는 23일 새벽에 명령을 내려 서산군수成夏永, 안성군수 晎運燮,經理甕領官具相祖, 참모관具完喜등의 관군과 일본군이 합세하 여利仁驛을 탈환하게 하였다. 일본군과 관군은 음력 10월 23일利仁의 동  학농민군을 공격하여 치열한 전부가 전개되었는 바, 이것이〈利仁전투〉였 다. 일본군과 관군은 한 때利仁驛올 탈환하여 점령한 듯 하였다. t176) 그러 나 동학능민군이 산에 올라가大砲를 소면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집중사격을  가하며 용감히 싸워 다시利仁驛을 점령했으므로 일본군과 관군은敗戰했으 허, (177) 충청도 관찰사의 후퇴명령에 기탁하여熊峙방면으로 후되하였다. (1제 이〈利仁戰鬪〉에서는 동학농민군이 크게 승리했으며, 일본군과 관군은 전사  자 약 120명과 부상자 약 300명을 내고 꿈패하였다. (179) 利仁전부는公*)넣`幟役의 첫번째 전투로서, 동학농민군은 이 첫번째의 전투 에서 크게 승리한 것이었다. 동학농빈군의 사기는 충천하게 되었다.
(4)孝浦전투
동학능민군의 1대는利仁전두에서 승리한 후 바로 이어서 음력 10월 24일 재벽公』州監營의 뒷산인鳳鳳山을 포위헀으며, 다른 1대는 무너미를 1읩어 孝浦를 공격해서 점령하였다. (180)孝浦를 지키던官軍과 일본군은 동학농민
 
(174)『先鋒陣呈報牒』甲午10월 26일조,『東學亂記錄%下卷, PP. 172~173 참조.
(175)『駐韓日本公使館記錄』제 1원,「公귀위附近戰鬪詳報」, p.209 참조.
(176)『巡撫使呈報牒』甲午10월 28일조,『東學亂記錄』下卷, 한. 17~18 차조.
(177)『先鋒陣呈報牒』甲午10월 26일조,『東學亂記錄』下, P. 165 참조.
(178)『官報』開國503년 11월 27일자「公山剿匪記」중의〈利仁之役〉, (亞細亞文 4匕社版)第1卷, pp.760~761 및『巡撫先鋒陣謄錄』甲午10월 27일조,『東學亂記錄』上卷, PP. 43~44 차조.  
(179)『東學史』, p.146 및菊池嗛讓,『朝鮮近代史』下卷, p.242 참조. (180)『東學史』, P. 146 참조.
뷔6 4匕
군의 하늘 찌를 것같은 사기에 놀래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도주하 였다.
조선정부의『官報』는 관군이孝i甫전투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패주한 것을 뱃사람의 말을 인용하면서 마치 관군이 통학의大軍을 피하여 철수한  것처럼 다음과 같이 기특하였다.
「날이 밝은 후에 금강 나루의 뱃사공이 찾아와 보고하기를, '孝浦에 주둔한留晫兵이 이른 새벽 달빛을 다고 강을 건너 가비렸다. 일본군少尉도 비록 여러번 만류했으나 다음에 만나자고 말하고 (유진명이 떠났으므로) 드디어 (일본군도) 이 른 아침北上하였으므로결 인심이 흉흉하고 의뢰 할 곳이 없어- 소란이 크게 일어나 서 진정시킬 수가 없다' 고 하였다.辰時에烽臺에서 연기가 일더니賊兵(동학농민 군-인용자)이 크게 이르렀다고 보고하여孝,浦에 방비가 없어 두인지졈괴k 같이 들• 이온 것을 알았다.」(181)
그러나孝浦전투는 동학농민군이 대규모로 공격해 들어오자孝ä甫를 지기 고 있던官軍과日本軍중에서官軍이 편저 도망치고 뒤이어 만루하던日本軍도 패주한 전투였음을 알 수 있다. (182) 이날大橋를 점령했던 북접의 손병희부대(통칭永同•沃川包)는 안성군수 洪運燮의 관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물리치고 철수하여 전봉준부
대와 합류하였다. (183)
동학농민군은利仁전투와孝浦전투에서 연달아 승전하고 공주를 3면에서 포위하여 사기가 하늘을 찌를 것 같이 표하였다. (184) 조선정부와『官報』에 서조차「이날 밤賊軍(동학농민군-인용자)의 첩첩火光이 수십리를 서로 바 치니人山人i每를 어찌 큰 강의 모래 숫자에 비길 것인가」t185뇨 비유하였다.
그러나 이날 밤부터 일본군과 관군의戰力은 크게 보강되었다.日本軍대 위森尾가 지휘하는 일본군 1개중대가公,)`버에 도착했으며, 뒤이어李圭泰가
 
(181)『官報』開國503년 11월 28일자,〈孝浦之戰〉, (亞細亞文化社版),第1卷, P. 765.
(182)『巡撫先鋒陣謄錄』甲午10月27日條,『東學亂記錄』上卷, pp.439~440 참조.
(183)『官報』開國503년 11월 28일자,〈孝浦之戰〉, (亞細亞文化社版)第1卷, p. 766 참조.
(184)『先鋒陣呈報樸』甲午10월 25일조,『東學亂記錄』下卷, PP. 174~175 참조.
(185)『官報』開國503년 11월 28일자,〈孝i甫之戰〉, (亞細亞文化社版)第1卷, P. 766.
 
인솔하는京軍의先鋒陣이 공주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壓하
(5)熊恃전부
동학농민군은 10월 25일 새벽 6시에 부대를 3로로 나누어 3천명의 주력부 대는熊峙에 있는 관군을 공격하고, 1대는陵庵山에 있는日本軍을 공격하 며, 다른 1대는 그 옆月城山에 있는 관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동학농민군 은冷泉뒷산을 점령하여熊峙와月城山의官軍과 치열한 교전을 전개하였 다. 그리고 1隊가陵庵山의日本軍을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일본 군은月城山과陵庵山의 중앙에 들어가서 동학농민근의 측면과 배후를 공격 했으나 실패하였다. 동학농민군과 일본군 • 관군은 이렇게 서로 대치한 상태 에 있다가 오후 1시가 되자 동학농민군도 뒷쪽 산으로 철수하기 시작하고 일본군도 오후 2사에公)퍼로 철수하였다. (1而이 날의熊畤전투는 일본군의 보고에 의하면 승부없이 서로 미등하였다.
그러나 조선官軍의 기록은熊峙전투에서의 동학농민군의 피해를 과장하 였다. ,『官報』는「25일 이른 아침 일본군도 또한熊峙에 올라왔는데賊軍(동학농민군-인용자) 대장은紅蓋를 날리면서 큰 가마를 타고南路로 바로 을라오는데 그 기제가 7朝水의 밀리는 것과 같았다. 일본군과 관군은 동시에 연달아砲를 소아대니 그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하였다.血戰수시 간에 사 상자가 매우 많아 저들은 마침내 되각하였다.」(188)라고 기특하였다. 또한巡撫先鋒陣의 기록은「적의 세력은 과연 소문과 같이 산과 들을 코어 헤아릴 수 없는 숫자였다. 소위 적장全琫準은 가마라고 홍개를 휘날리며 깃발을 들고 뿔나팔을 불면서 벌떼처럼 3르로 진병해 왔는데半日을 치 열하게 싸웠 으나勝負를 가리지 못하였다. 오후 4시경에 이르러 헤아려보니 적砲殺70 여명, 생포 가이었다」(189)고 기특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보고는熊峙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의 피해를「전사자 과, 부상자 미 상」(190) 이 라고 하였다.
 
(186)『官報』開國503년 11월 28일자〈孝*甫之戰〉, (亞細亞文化社版),第1卷, PP. 765~766 참조.
(187)『駐韓日本公使館記錄』제 1권,「公,",I附近戰鬪詳報」, p.209 참조.
(188)『官報』,開國503년 11월 28일자,〈孝浦之戰〉, (亞細亞文化社版) p.766.
(189)『巡撫先鋒謄錄』,甲午10월 27일조,『東學亂記錄』,上卷, p.441 참조. (190)『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公,hN附近戰鬪詳報」, p.209 참조. 418 韓 國 文4t 14
동학농민군은 날이 어두워가자 바야흐로 철수함에 있어서 대포 소리를  발하여 전투를 하려는 기제를 보이현서 오히려 대장이 군대를 수습하여 철  수했는 바, 이를 관찰한 일본군 장교가 저들도 역시兵律i을 안다고 말했다 한다. {1叨
동학농민군은 해가 떨어지자公列탭로부터 남쪽으로 30리 떨어진 지점의敬川店까지 철수하여 주둔하였다.熊峙전투는 승부를 가릴 수 없는 막상막하 의 전투였지만 전봉준부대로서는 처음으로 승리하지 못한 전투였으며,戰力 이 많이 소모되었기 때문에 전력 충원이 필 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6)洪]I뻐 전투
전봉준이敬川店에 주둔하여 다음 전투를 준비하고굇을 무렵인 음력 10월 28일(양력 11월 25일)朴德七등이 지휘하는洪),f[ •禮山•德山지방의 동학농 민군이洪:州城을 공격하였다. 당시 홍주는 일본군 1개 소대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겠다고餘美•海美방면으로 나갔다가 동학농민군에게 포위 당하여 쫏 겨서洪勢I,殲안으로 도망해 들어와 30명의 관군 및 약 1,000명의民堡軍이 수 비하고 있었다. (192) 동학농민근은 일본군이 도망하 들어간洪|月,I城을 공격하 여 함락시키려고 음력 10월 28일(양력 11월 25일) 오후洪l尹H城을 포위하고, 오후 4시에德山가도 왼쪽高地의 진지를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이 때 홍 주성을 포위한 동학농민군의 병력을 약 3만명이 라고 추산하였다. (193) 동학능민근은 오후 4시 25분경 홍주의氷韋언덕을 공격하고,東門성밖 1백미터 앞까지 접근하여 맹렬-한 공격을 가하였다. 일본군과 관군은 소총과 대포를 발사하여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야음을 이용하여 밤 에 디공격을 가해서 홍주성을 점령하려고 하였다. 이에 동학농민군은 밤이 되자 야음을 이용하여大砲를東門40미터 앞 지점까지 끌고 가서 동문에 마 구 발사하며 공격하였다. 일본군과 관군은 동문에 응원대를 증파하여 필사 적으로 저항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저녁 7시 30분까지 치열한 공격전을 전개
 
(19D『•官報힒,開國503년 11월 28일자,〈孝浦之戰〉, (亞細亞文化社版) pp.766~ 767 참조.
(192)『駐韓日本公使館記錄』제 1 권,「發第103號, 및援兵要請」, P. 222 -참조.
(193)『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洪쏘卜賄近戰鬪詳報」, p.212 참초.
했으나 홍주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튿날 음력 10월 29일 날이새자 새 벽 6시경 동학농민군은 세 방면에 업호병을 남기고 홍주 성문으로부터 약 1,500미터 되는 지점에 있는鷹峰고지로 철수하여 이 고지의 관군의 진지를 점령하고, 이어서 오후 5시경海美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이洪』)취城전투 에서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의 전사자를 약 200명 부상자는 미상이라고 하였 다. (19시 *,J,F[城전투는 동학농민군이 승전하지는 못했지만 대명 력으로 일본 군과 관군을 공격한 대전투였다.
동학농민군은海美로부터禮山의新禮院으로 이 동하여 주둔해서禮山邑을
위협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禮山縣監은 음력 10월 29일 동학농민군 수만명 이新禮院에 주둔하고 있는데 예산 • 대홍 • 홍주 3읍의民堡軍과官軍이 이 를 막고 있지만官軍이 패전하면 동학농민군이 바로禮山邑에 들어오게 되 어 있어 위험이 경각에 달렸으니 긴급히 구원해 달라고先鋒陣에 화급한 군 대 증파를 요청하였다. (196' 또한 일본군은 보병 1개 대대 또는 2~3개 중대 와 대포 몇 문을洪秀[`뻬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197) 일본측은 이에 응하 여 일본군 1개 중대를 응원병으로 음력 11월 4일(양력 11월 30일)牙山에 상 룩시켜 이튿날洪』州에 도착케 하였다. (198) •禮山•德山부근의 동학농 인군부대의 막강함과蘯城전투의 격렬했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다.
(0公|)Ill牛金峙전투
동학농민군 총대장 전봉준은 10월 25일敬川店으로 철수하여 이곳에 약 10여일간 주둔하현서公州寸를 공격하여決戰을 감행할 준비를 하였다. 동학 농민군들은 우선 탄환 공급을 강화하고 부대도 정비하여 보강하였다. 그리 고 전홍준은 동학능민군의 병력을 대폭 증강시키기 위하여金開男에게 긴급 히 통지하여 8천명의 동학농민군부대를 인솔하고敬)Ⅱ에 와서公州`[의決戰
 
(194)『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1 권,「洪4`卜I附近戰鬪詳報」, pp.211~212 참조. (195)『先鋒陣呈報棋』,甲午10월 29일조,『東學亂記錄』下卷, PP. 182~183 참조. (196)『巡撫先鋒陣謄錄』,甲午10월 29일조,『東學亂記錄』上卷, p.447 참조.
(197)『駐韓日本公使館記錄』제 1 권,「發第103琥,洪』,세`廠徒擊退狀況報告및援兵宴請」, p.221 차조.
(198)『뾰韓日本公使館記錄별, 제 「後援兵1倡中隊의洪|h卜l到着및賊徒擊退 에 관한別報」, p.226 참조.
 
횰20
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199) 그러나 김개남부대는 오지 않았으며,公
州會戰에 참가하지 않았다. (200) 한편 일본군과 관군도 전두준비를 강화하였다. 일본군은 남하하는 제19대 대의 모든 병력과 응원대를公)`1`뻬 집 합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西路分進隊
 
가 음력 10월 26일(양력 11월 23일)公』)릴1에 도착하였고,中路分進隊와 제19대 대 대대른부병력은 대대장南기`四郞과 함께 음력 10월 29일(양럭 11월 26일) 公,月`l에 도착하였다. (2이) 일본군은洪州에 파견된 일본군 응원대 1개중대에 대해서도公,),레에 모여 합세하라고 명령하였다. (202, 그리하여 공주에는 일본 군 1개 대대 병력(약 1,000명)이 집합했으며, 조전정부의京軍도 이미李圭泰가 지휘하는先鋒陣까지 도착하여 약 2,000여명이 주둔하게 되었다.
조신정부의『官報』에 의거하여 보면, 음력 11월 초3알先鋒陣과 일본군 장교는 상의하여 군대를 3진으로 나누었는 바, 제 1 진은板峙(무너미)에, 제 2진은利仁에, 제 3진은公]`네營밑에 주둔케 하여 서로 교대 윤회게 하면 서 전진 방어의 체제를 갖추었다. (203)  등학능민군은 전봉준이 직접 지휘하는 약 1만명의 전봉준부대와 손병희가 지휘하는 약 1만명의 손병희부대가 2로로 나누에 11월 초8일(양력 12월 4일) 오후 2시경부터 일제히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204) 동학농민군의 1대는板峙 (우너미)로 직진하여經理廳영관具相祖가 지휘하는京軍을 맹렬히 공격하 였다. 구상조가 지휘하는 경리청 관군은 혼비백산하여 패주해서公,)+1해邑안 으로 급히 퇴각하였다. 등학농민군의 다른 폐는利仁으로 직진해서 2로로 나누어 정현에서는成夏永이 지휘하는京軍을 맹렬히 공격하고 후련에서는 梧室上路를 따라 3面의山을 끼고 되로를 차단하여 성하영의 관군을 포위 해 버렸다. 성하영의官軍은利仁에서 동학농민군에 포위되어 막대한 희생 을 내며 몇시간 동안을 악전고투하다가 밤이 되었는데 마침 비가 내려 화승
 
(199)『宴報』,開國503년 11월 29일자, 부록〈牛金之師〉, (亞細亞文化社版), 제 1 구] 771 참조.  
(200)『全琫準f共招』,四招問目,『東學亂記錄』下卷, p.558 참조.
(201)『4左韓日本公使館記錄邕, 제 1 권,「仁站發甲第43號, ``%혜附近東學黨征討및 視察』주斤見에 관한山村大尉의報告寫本送付」, p.231 참조.
(202)『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1 퀸,「洪|N`馳方東學徒討伐狀i兄」, P. 227 참조.
(203)『官-報=1,開國503년 11월 29일자, 부록〈牛金之師〉(亞細亞文化社版)1 P. 771 참조.
(204)『先鋒陣日記』,甲午11월 16일조,『東學亂記錄』上卷, pp.235~236 참조.
총사격이 몇시간 멈추자 간신히 포위망을 탈출하여 도주해서 공주정 안으로 들어갔다. 동학농민군은板峙공격과利仁공격에서完勝을 거둔 것이었다.
초8일 밤 동학능민군은香峰山위로부터 약 1,400미터 떨어진山위 일대 에서 활활 불을 지피고 공주성의東南쪽을 포위하면서 계수 총과 포를 쏘아 있으며, 일본군과 관군은 공주성 안에 패주하여 들어간채, 이튿날 아침까지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205) 다음날인 11월 초9일 새벽부터 일본군 장교의 지휘하에 일본군과 관군은 公』州1城방위를 위한 부대 재배치를 단행하였다. 일본군은森尾대위의 지휘 하에 1개 중대의 신홍대를牛金峙의 최고치에 주둔케 하고,統衛營隊官吳昌成이 지휘하는 관군은金鶴i同에,經理廳영관具相祖가 지휘하는 관군은 熊峙에,統衛營영관張容鎭이 지휘하는 관군은烽燧臺에 주둔케 췄으며, 利仁에서 탈출하여 돌아온成夏永의 관군은 일본군과 함께牛金峙에 주둔하 게 하였다.營將李基東이 지휘하는營兵은鳳鳳山의 뒷산인周峰에 주둔케 하였다. 지리적으로 유리한 지점은 일본군과 관군이 선점하여 주둔해서 방 어태세를 갖춘 것이었다.
동학농민군은 11월 초9일 오전 10시부터 제 2차 대공격을 감행하였다.
동학농민군은孝浦로부터熊峙와牛金恃에 이르는 30리의 전신을 3로로 나 누어 대공격을 감행혔는데 주공격 지점은公,州營에 바로 들어가는 가장 증 요한 길목인牛金峙였다. 동학농민군의 공격과 전투는 참으로 치 열하였다.
조신정부의『官報』는 이를 표현하여「賊兵은 3면으로 둘러싸고首尾가 30 리나 된 것이 마치常山의 뱀과 같아서擊하년 바로應했다」(2㈅고 기특하 였다. 또한『巡撫先鋒陣謄錄』은 그 이튿날 초9일 낮이 되어 적의 세력을 상세히 탐문하니 각隼이 서로 바라보는 곳에 7것발들이 가득히 꽂혀있는데 동쪽으로는板城뒷산으로부터 서쪽으로는鳳凰山뒷기슭까지 연달아 3•40 리에 걸쳐山上에陣을 친 것이, 마치 사람으로 병풍을 두른 것과 같아서 勢力이 심히 창궐하여 고립무원의 염려가 없지 아니하였다」(207)고 기특하였
다. 또한 등학통민군의 전투하는 모습에 대하여『巡撫使呈報牒』은「아 저
 
(205)『巡撫使呈報牒』甲午11월 최0일조,『東學亂記錄』下卷, pp.28~29 참조,
(206)『官報』,開國503년 !1월 29일자쫡 부록〈牛金之師〉, (亞細亞文化社版), P. 772.
(207)『巡撫先鋒陣謄錄』,甲午11월 29일조,『東學亂記錄』上卷, 487 참조.
수만의匪類들은 둘러친 것이 연하여 4•50리에 결쳐서 길이 있으면 길을 싸 워서 빼앗고 높은 홍우리가 있으면 그것을 싸워서 점거하려고 ,聲東趨西하고 閃左忽右하면서 것 발을 휘날리고 북을 두드리며 죽음을 무룝쓰고 앞을 다투 어 기어오르는 것은 어떠한 의리이며 어떠한 담략인지言念情跡에 등골아 써늘하였다」(208)고 기특하였다. 또한『官報』는牛金峙전투를 묘사하여, 일  본군이「산마루에 나란히 서서 일지에 총을 소고 다시 산속으로 은신했다가  賊이 고개를 년고자하면 곧 또 산마루에 올라가서 일제히 총을 발사했는데 이렇게 하기를 4•50차 하니 시체가 산에 가득히 찼다」(209)고 기특하였다. 이: 것은 동학농민군이牛金峙고개를 년으려고 4•50차나 돌격전을 감행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니, 동학농민군이 빈약한 무기를 가지고 일본군의 우세한 화 력 앞에서 얼마나 용감하고 처절하게 전투했는가를 잘 전하여 주고 있다.
조선정부의『官報』에 그려져 있는 수金峙戰蜀圖(牛金之師)를 보면,牛金峙  에서日本軍(日大原寸留陣)과 직접 대치하여 전투한 것은全琫準部隊(全賊留陣) 였다. (210) 일본군의 보고에 의하면,牛金峙에서 해치하여 공격해은 동학농 민군이 약 1만명이었고, 이와는 별도로三花山에 주둔했다가梧實뒷산을
항해 전진한 동학농민군도 약 1만명이라고 하였다. 이 두 자료를 종합해 보 년 1명만의 전봉준부대가 요지인牛金峙를 공격하였고, 다른 동학농민군 1대  (손병희부대인 듯) 1만명이梧實뒷산을 1원어 공주로 들어가려고梧實뒷산을 향해 전진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군의 보고는 다음과 같이 기특하였다.
「5일(음력 11월 9일-인용자) 오전 10시利仁街道와牛禁峙山사이 약 10리에 결 천 곳에賊徒가 대략 1만여명이 나타나 우리 (일본군-인용자)의 우익 서쪽-을 향해 ,急進-해 왔다. 그 기세가 뱅털하였다.牛禁峙山은公*J`卜i의 요지로서 이곳을 잃으면 公』hl까I를 지길 방도가 없다. 
이와 동시에三花山의賊(1만여명)도梧實뒷산을 향해 전진하였는리, 그 정세 가 매우 급하였다. 그리고 이곳 역시公,J`[寸의 효지로 천연의 험지이다.」(21U 일본군의 보고자료에 의하면, 전봉준부대는 10시부터 급히 공격을 시작하
 
(208)『巡撫使呈報牒』,甲午11월 최0일조,『東學亂記錄』下卷, p,31.  
(209)『官報』,開國503년 11월 29일자, 부록〈牛金之師〉, (亞細亞文化社版) 제 1 p.773.  
(210)「東學亂史枓」(完)『亞細亞硏究』1962년 6월 호,「公秀H剿匪記篇」의〈牛金之師圖〉, p.292 찬조.
(211)『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1 권,「公,)퓌附近戰鬪詳報」, p.247.
여 전진해서 10시 40분경에는牛金峙정상의 전망 약 500미터에 있는 산 위 로 전진해 왔다. 일본군은 병력을 증파하여 일제사격을 가했으나 동학농민 군은 교묘하게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약 2백명이牛金峙정상에서 약 150미 터 되는 산허리를 진격해 왔으며, 그 선두의 5•6명은 바로 몇 미터 앞死角 지점에 육박했고, 앞산 위에 있던 동학농민군은 더욱 더 가까이 전진해왔 다. 여기서牛金峙고개마루의 일본군과 그 앞 140~150미터 지점에 접근하 여 진을 친 전봉준부대의 동학농민군 사이에 10시 40분경부터 오후 1시 40 분경까지 3시간 동안血戰이 전개된 것이었다. 전봉준부대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의 몇 미퇴 앞까지 돌격했다가는 일본군의 일제사격에 걸려 무너지고   들격했다가 무너지는 것을 되풀이 했다. 일본군의長銃은 500보의 거리 를 자연 발화식으로 사격할 수 있었는데 비하여, 동학농민군의火繩銃은 심 지에 불을 붙여서 100보 밖에 못나가니畎器의 격차를 도저히 극복할 수 없 는 것이었다. (212) 동학농민군이 이牛金峙고개만 넘어 일본군을 제압하면 公,)十는 점령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의 돌격은牛金詩고개마루를 선점한 일본군의 몇 미터 앞에서 되풀이되어 좌절당하였다. 조선 관변측 기 록에서 동학농민군이 40~50 차례나 고개를 넘으려고 처절하게 공격해 와서 시체가 산에 가득했다고 기특한 것이 바로 이 전투였다.
일본군은 오후 1시 20분~40분 사이에經理營의 조선군 50명을 차출하여 牛金峙의 전방 산허리로 전진시켜서牛金峙고개마루로부터 약 140~150미 터의 산허리에 결쳐 있는 전봉준부대의 왼쪽을 사격케 하였다. 정면과 좌측 의 양방향에서 협공을 받게된 전봉준부대는 전방 약 500미터 지점의 산꼭대 기로 퇴각하였다.牛金峙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조신군(經理營兵)의 얻호사격 을 받으면서 그 전방 산허리로 위치를 전진시켰으며, 동학농민군이 일본군 의 진격에 동요되는 것을 보고 일본군 1개소대와 1개분대를 차출하여 동학 농민군 속으로突擊戰을 감행하였다. 이에 전통준부대의 동학농민군은 퇴각 을 명령하여利仁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전봉준부대는牛金峙戰鬪에서 패전 한 것이었다.
일본군은 철수하는 전봉준 부대의 추격을經理廳의 조선 관군에게 맡기고 일본군 1개 중대를 급파하여利仁街道로 나가 전봉준부대의退路를 차단하
 
(212)『梧下記:聞』,甲午10월조,第3筆의 p.20 참조.
 
려고 하였다. l그러나 일본군이利仁부근에 이르러 보니 전봉준부대는 아직 도 전투력을 갖고 있어서, 일본군이地形地利에 기대지 않고 전봉준부대를 공격했다가는 패전할 것이 내다 보이므로 일본군은利仁부근 일대의 산허 리에 불을 지르고 몰래 되각하였다. 그러나梧實뒷산에 있는 동학농민군 (손병희부대)은 손실을 입지 않아 되각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그에 대한 경계 를 조신관군에게 맡기고, 일본군은 오후 8시에公,尹卜로 찰수하였다. 즉 음력 11월 9일의牛金峙전투는 오전 10시부티 오후 8시까지 하루 종일 전개된 심 이며, 특히 그 중에서 오전 10시 40부터 오후 1지 40분까지의牛金峙산마 투의 일본군과 그 약 140~150미터 앞 우금치 산허리의全琫準部隊와의 3시 간에 걸친血鬪는 동학농민군 병사들이 이 고개를 넘으려고 일본군陣地의 몇 미터 앞까지 돌격했다가 일본군의 우세한火力에 쓰러지기를 되풀이한 처절한 전투였다.
일본군 보고는牛金峙전두에서의 동학농민군의 피해를 전사 37명, 부상자 미상이라고 했으나, (213) 이것은 물론 축소된 것이다. 일본군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여기서 제 3소대를牛禁峙山에 증파하여 일제사격으로써, 전방 산 위 약 800m 가 되는 곳에 군집한 적(동학농핀군-인용자)을 해적케 했으며,經理營兵은 가장  가까운 적을 항해 사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적은 교묘하게 지형지물을 이용, 약 200명이牛禁畤山꼭대기에서 약 150m 되는 산허리로 진격해 왔다. 그 선두의 5,6 명은 몇미터 앞死角지점에 육박했고, 앞산 위에 있던 적은 더욱더 전진해 왔다.  수시간 동안 격전했는뎨 우리 군대(일본군-인용자)가 가장 힘써 싸웠다.
오후 1시 40분經理營兵의 일부(50명)를牛禁峙山전방 산허리로 전진시켜牛禁 1Ⅰ寺山사꼭대기에서 약 140 내지 150m의 산허리에 결처 있는 적의 왼쪽을 사격케 하였다. 그래서 적은 전방 약 500m의 산꼭대기로 퇴각하였다. 오후 1시 20분牛禁畤山의 우리군대(일본군-인용자)를 그 전방 산허리로 전진시키고經理營兵에 급 사격을 시켰으며, 적이 동요되는 것을 보고 1개소대와 1개분대로써敵陣에 돌입케 하였다. 이에 이르러 적이 틔각했으므로經理營兵에게 추격을 맡기괴 중대는利仁街道로 나간 적의退路로 다가가려고 하였다.
중대는利仁街道로 나가 급히 추격, 드디어利仁부근에 이르러 그 일대의 산허 리에 불을 지르고 몰래 퇴각하였다. 그리나 동남수의賊徒가 여전히 틔각하지 않 으므로,韓國軍에게牛禁峙山•梧實뒷산 •香峰•月城山등의 경계를 맡기고 기
 
(213)『駐韓日本公使館言己錄』, 제 1 권,「公쐬`l附近戰鬪詳報」, p.248 참조.
타 대원은公,lili로 철수하였다. 이 때가 오후 8시였다.」(214,
전봉준은 그후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牛金峙전투에 대하여 응답하면 서,「日兵이 먼저公)`너에 웅거하였으니 사세가接戰하지 아니할 수 없는 고 로 2차 접전 후 만여명軍兵을 점고한 즉所餘者불과 3천여 명이오그 후에 또 2차 접전 후點考한 즉 불과 5백여 명인고로 패주하여」(215)라고 설명하였 다. 그러나 이것은 과장된 것이다. 전봉준이牛金峙전투에서 패전하여利仁 에 철수했을 때에도 전봉준부대는 수천명이 남아 있었으며, 동남쪽의梧實 뒷산에 주둔하여 공주를 공격하던 1만명의 동학농민군은 여전히 건재하여 있었다. 문제는 동학농민군의牛金峙전투 패전 이후부터戰勢가 역전되어 일본군과 관군이 공세에 서게 되었고,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화약과 탄환 이 고갈된 상태에서守勢에 서게 된 데 있었다.
음력 11월 11일(양력 12월 7일) 동학농민군의 전세는 더욱 불리하게 되있 다. 공주의 동남쪽梧實뒷산에 주둔하면서 간헐적으로 일본군과 관군은 공 격하여 그들의 병력을 분산시키고 공주에 묶어두었민 동학농민군 1대가熊峙에 주둔하고 있던官軍에게 패전했기 때문이다.熊峙에 주둔하고 있던經理廳의京兵은 위계전술을 써서 그들의 군복을 벗어버리고 수건을 머리에 들러 동학농민군의 차림새로變裝을 한 후 동학농민군을 돕겠다고 신호하면 서 농민군이 주둔한 산 위로 올라갔다.梧實뒷산 동학농민군은 그들이 농 민군의 다른 1대라고 오인하고 기꺼이 받아들였더니 면전에 이르자 불의에 일제 사격을 비 오듯이 가하며 기습했으므로 동학농민군들은 놀래서 패주하  였다. (316)梧實뒷산의 등학농민군마저 패전한 것은 이제 막강한 병력의 일 본군과 관군이公:),에에서 나와서 동학농민군을 추격하는 추격전을 할 수 있 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전봉준의 지휘하에牛金峙전투나梧實뒷산 전투에 참가한 동학농민군은 음 력 11월 11일 저녁 10리를 더 후되하여 “魯城에 주둔하였다. 전봉준은 11월 12일 노성에서京軍과營兵에게 보내는 다음과 같은 고시문을 발표하였다.
 
(214)『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1 권,「公,J`I혜附近戰鬪詳報」, PP. 247~248.
(215)『全琫準供草』,初招問目,『東學亂記錄』下卷, p.529 참조.
(216)『官報』,開國503년 11월 29일자, 부록〈牛金之師〉. (亞細亞文化社版) 제 1 권, PP. 773~774 참조.
「京軍과營兵에게告示한다, 양차의交戰은 후회 각급이라. 당초의擧義는斥邪遠佞하는 것 뿐이라.京軍이邪 를 돕는 것은 실로 본심이 아니고營兵이佞을 돕는 것도 어찌自意에서 나은 것 이겠는가. 필경은天理에同歸하리니 지금 이후로는 절대로 서로爭%하지 말고 부 질없이人命을 살해하지 말며人家를 불태우지 말고 함께大義를 도와 위로는輔國家하고 아래로는安民庶할 뿐이라. 우리가 만약 기만하면 반드시天罪가 있을 것이고 그대들이 마음을 속이면 반드시 자별할l 것이니, 원컨대 하늘을 가리키고 해 에 맹세하여 다시는傷害가 없기를 바란다. 며칠전의爭進은 길을 빌리러 한 것뿐 이다. 갑오 11월 12일, 창의소.」(217)
전봉준의 이 고시문은官軍(京軍과監營兵)에게停戰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동학농민군과 관군이大義에 입각하여 연합해서 일본침 략군에 대항할 것을 호소한 것이 었다.
그러나 승기를 잡은 일본군과 이미 그 밑에 들어가 일본군의 지휘를 받는 관군이 전봉준의 호소에 귀기울일 리가 없었다. 일본군과 관군은 이제 본격: 적으로 추격전을 시 작하였다.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牛金峙전투를 전환점:
으로 공격하는 위치에서 추격당하는 위치로 바뀌어, 후퇴하면서 이제 일본 군과 관군에게 추격 당하게 되었다.
 
(8)淸91111 전투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이牛金峙전투에서 패전한 날로부터 4일 후인 음력
11월 13일(양력 12월 9일)金開男의 동학농민군도淸,가I城을 공격했다가 일본 군과 관군에게 패전하였다. (218) 金開男은全尹I,l에 주둔하고 있던 때에 10월 25일敬川店에 주둔한全琫準
으로부터北上하여 합류해서 응원하라는 통문을 받고 바로 전주를 출발하여
 
(217)『先鋒陣呈報牒』,『東學亂記錄』,下卷, PP. 185~186.  
「示京軍營兵 兩次交兵4脰莫及矣.當初擧義斥邪遠佞而已.京軍之助邪寔非本心營兵之扶嵌豈或自意.畢竟之事同歸天理自今以後切勿互相爭鬪妄殺人命火 !劈人家同扶大義上輔國家下安民庶而已.吾若欺慢必有天罪君如欺心必有自滅願指天誓日更無傷害幸甚.日昨爭進(昔路而已. 甲午十-月十二日   倡義所!花押1」 
(218)『錦營來札(道園)』『東學亂記錄』上卷, p.83 참조.
 
第2次
覷山을 점령하였다.錦山에는 군민들이 전참판鄭B朝를民堡軍대장으로 추대하고軍官鄭志煥의 지휘 아래 동학농민군을 막으려고 준비했다가金開男部隊의 대군이 이르자 민보군들이 흩어져 도망했으므로鄭縐朝가 농민군에  게 생포되어 죽고鄭志煥이 제 아들과 함께 저항하다가 전사하였다. '219) 김  개 남은錦山에서 현감李容德을 축출하고 동학농민군을 풀어서 적대자들에
-대한 살룩과 약탈을 허용했다고 한다. (220) 金開男部隊는錦山에서 여러날 체류하다가 다시北上하여 음력 11월 10일 -오후 4시경에鎭岑을 점령하고, 이튿날인 11월 11일 •褒德과新灘津을 점령 한 다음에淸,州로 향하였다. (221) 여기서 주목할 것은 김개남이錦山을 점령 한 다음에 바로 전홍준이 주둔하고 있는敬川店으로 가지 않고 전봉준의 제 2차 공주 공격을 지켜보고 있다가 진참•회덕 •신탄진을 거쳐淸,州로 향했  다는 사실이다.『甲午略歷』에는 김개남이 쇠〉卜1를 출발할 때부터淸,州로 향 했다는 의미로 기록되어 있다. (272) 즉, 김개남은全)•M에서 전봉준의北上과 응원을 재촉하는 통문을 받고北上하여 전봉준을 응원하되 전홍준부대에 합 투하여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행동을 해서 별도로淸4月해城을  격하여 함락시켜서 간접적으로 그를 지원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개남부대는 1만명의 병력을 2路로 나누어 11월 13일(양력 12월 9일) 새벽 6시 40분경淸)•[`E城앞 1,500~1,600미터 지점에 도착하였다. 일본군은 김개 팜부대의 다수에 놀라 신탄진 방향으로부터 은 동학농민군이 약 1만 5•6, 000  명,文義방향에서 은 동학농민군이 약 1반명이라고 보고하였다.淸』)빟`脣兵 50~60명과 일본군 1개소대는淸,)寸`慽안에서 방어 함이 불리하고 공세적 방 어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일본군은淸|尹蚌南門에서 600미터 떨어진 지점의 宿地를 선점하여 잠복하고,淸』)`i,脣兵은南門밖 정면에서 방어진을 구축하 였다.
김개남부대는 7시 20분경 청주성 남문 밖 500미터 지점에 도착하자 총공 격을 개시하였다. 조신군이 정면에서 저항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밀리기 시작
 
(219)『梧下記聞』•,甲午10월조,第3筆의 p.26의 첨지 참조.
(220)『梧下記聞』,甲午10월조,第3筆의 p.26 참조.
(221)『巡撫先鋒陣謄錄』,甲午11월 13일조,『東學亂記錄』上卷, p.499 및『巡撫使呈報牒』,甲午11월 13일조,『東學亂記錄』 p.35 참조. <222)『甲午酪歷』,『東學亂記錄』,上卷, p.74 참조.
學28 (匕
할 무렵에 일본군이 김개남부대와 400미터 떨어진 거리의背側面으로부터 동학농민군을 내려다 보는 유리한 지형에서 일제사격을 가하였다. 약 4~5 분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전 • 후에서 협공을 당한 김개남부대는 더 견디지 못하고 패전하여新灘津방향으로 되각하였다.營兵과 일본군이 김개남부대 를 추격하였다* (223) 김개남 부대는 되각하다가 오전 8시경淸)`If에서 약 10리 떨어진 신탄진 방향의 산위에 모여 대오를 정미해서 반격을 감행하였다. 이번에는 7침개남 부대도 유리한 지형을 선점했기 때문에 약 1시간 동안이나 추격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일본군의 보고에도「한 때는東學徒의 소행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싸웠다」고 기특할 경도로 용감히 싸웠다. 추격군이 2略 로 나누어 1대는 오른쪽 산위로부터 급히 공격하고 다른 1대는 김개남부대 의 뒷쪽으로 우회하여 퇴각로를 차단하자 김개남부대는 더 지행하지 못하고 오전 10시 40분경新灘津방향으로 패전하여 되가하였다. 일본군은 김개남 부대의 피해를 전사자 20여명, 부상자 미상이라고 보고하였다. (224)  淸』)`까牧使는 김개남부대의淸尹I,l戰鬪에 대하여,「지난달 13일 새벽湖南匪類만여명이陣을 벌려 성밖 3리허까지 침범해 왔다,兵營에서 병정을 내보 내어 일본군과 함께討破해서追捕하였는데, 살상자가 거의 백여명에 이르 렀다」(225)고 보고하였다.  
김개남부대는淸,州전투에서의 패전 후 더 북상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후되 하였다.
/\.東學農民軍主力部隊의後退와解體 
전봉준이 지휘하는 동학농민군 주력부대(전뵹준부대와 손병희부대)는  牛金峙전투에서 패전한 후魯城에 주둔하고 있다가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고 11월 14일(양력 12월 10일) 전면적인 후퇴를 하게 되었다. 동학농민군 의 또 하나의 주력부대인 김개남부대도淸尹`l`쩐투에서 패전한 후 일본군과
 
(223)『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1 권,「瀞*`卜袝近戰鬪詳報」, pp.249~250 참조.  
(224)『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1 권,「瀞,J위附近盈鬪詳報」, pp.250~251 참조. (225)『巡撫先鋒陣謄錄』甲午11월 15일조,『東學亂記錄』 p.507.  
第2次
관군에게 추격 당하면서 계속 남쪽으로 후되하게 되었다.
전봉준부대는 약 3천명의 병력으로論山남쪽의小土山高地에서 대오를 정비하여 반격을 시도하였다. 일본군 1개중대와壯衛營兵1개 대대,統衛營兵200명으로 편성된 추격군은 11월 15일(양력 12월 11일) 오후 3시경 능민 군부대 진영 안에까지 맹공격을 가해와서 전봉준부대는 다시 후퇴하여 논산 서남쪽 1,200미터 지점에 있는 논산黃華臺에 주둔하여 전투를 준비하였 다. 1226) 그러나 추격군이 막강한火力으로 3면에서 포위하여 공격하 왔으 므로 동학농인군은 약 30분간 치열한 전투를 한 후 다시江景으로 후되하였 다. (22가 일본군은 는산전투에서의 동학농민군의 전사자를 약 20명, 부상자 는 미상이라고 하였으나, (228) 관군의 보고는 농민군의 전사자를 익사자• 포 로총살자를 포함하여 약 300명이라고 하였다. (229) 전홍준부대는江景에서 김개남부대를 만났다. 김개남부대는淸!州전투에서 패전하고 후퇴하면서鎭岑에 다시 들어가 무기와 보급품을 보충한 다음, {239 강경까지 후되했다가 전봉준부대를 만난 것이었다. 전봉준부대와 김개남부 대는江景에서 연합하여 추격군에 대항했으나 또 패전하였다. 이에 전봉준 부대와 김개남부대는 다시 헤어져 각각 별도로 후되하였다. (230  전봉준부대는 전라도 수도인全『州로 후퇴하여 며칠 주둔했다가 지형이 유 리한 지점에서 반격을 가하기 위해金溝의院坪으로 철수하였다. 전홍준부 대가 철수한全』州에 음력 11월 23일日本軍후비보병 제19대대장南小四郞 과 그의 일본군 및李斗璜이 지휘하는右先鋒陣의京軍이 들어왔다. (232, 전봉준은金溝의院坪에서金文行,劉公萬,文行敏등의 접주들과 함께 동 학 농민군들을 초모하여 병력을 보충해서 약 6천명의 동학농민군부대를 편 성하여院坪의山위에品자 모양의 3면으로 포진하였다. 11월 25일(양력 12 월 21일) 일본군 1개 중대와 조선군敎導隊가 산 아래에서 4면으로 산을 포
 
(226)『在韓日本公使館記錄』, 제 1 권,「論山戰鬪群報」, pp.253~254 참조.
(227)『巡撫先鋒陣謄錄』,甲午11월 17일조,『東學亂記錄』,上卷, PP. 525~527 및『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1 권,「論山戰鬪詳報」, p.254 참조.
(228)『駐韓日本公使錧記錄』, 제 1 권,「論山戰鬪詳報」, p.254 참조.
(229)『巡撫先鋒陣謄錄』할甲午11월 18일조,『東學亂記錄』, 上卷, 529 참조. (230)『巡撫先鋒陣謄錄』,甲午11월 15일조,『東學亂記錄=1, 上卷, PP. 505~506 및『巡撫使呈報牒』,甲午11월 15일조,『東學亂記錄걸, 下卷, p.36 참조. (231)『梧下記聞』,甲午11월조,第3筆의 p.35 참조.
(232)『兩湖右先鋒日記』,甲午11월 29일조,『東學亂記錄』, p.326 참조.
 
430
위하여 총공격을 가하였다. 지형이 유리한 전봉준부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두려 7시간 동안을血戰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의 막  강한火力앞에서 동학농민군은 장시간의 격전으로 탄환이 고갈되어 37영의  전사자를 내고 패전해서泰仁방면으로 후퇴하였다. (233) 전봉준부대는 약 5천~6천명의 병력으로泰仁의主山인城隍山•閑加山• 菹理山의 세 산이 합쳐지는 산봉우리에 고리처럼 포진하였다. 11월 27일 (양력 12월 23일) 아침 일본군과 관군은 동학농민군을 추격하여東•西의 양 로로 나누어서 공격하였다. 전봉준부대는 용감히 항전하여 남은 탄환을 비 오듯이 사격해서 산위로 기어올라오는 일본군과 관군을 저지하였다. 전봉준 부대가 깃발로 신호하여 농민군을 모두城隍山에 집합시킨 후에야 일본군과 관군은 농민군이 철수한 다른 산에 을라 제 2차 공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쩐봉준부대는城B垕山위에서回龍銃을 연달아 발사하며 치 열하게 반격하였 다. 일본군과 관군은 한 때敗戰하여 쫓겨서下山하였다. 일본군과 관군은 다시 각 부대들을 모아兩路로 나누어서 성 황산의 전봉준부다1를 제 3 차로 공 격하였다, 이 때는 이미 오후 9시의 어두운 밤이었다. 전봉준부대는 일본군 과 관군을 맞아 11월 27일 하루종일 전투한 것이었다. 전봉준부대는 단약이 고갈되고 병사들이 극도로 지쳐있었으므로 항전을 중단하고 이셴에는 회t쪽 인金溝로 북상하여 철수하였다. 관군의 보고는泰仁城*皇山전투에서 동학 농민군을 30여명 사살하고 40여명을 생포했다고 보고하였다. (234) 그러나 전 부 내용을 보면泰仁城隍山전투는 일본군과 관군이苦戰한 전투였으며, 전봉준부대가 결국 철수했으니 패전했다고 볼 수 있지만 총체적으로 막상막 하의 전투였다고 할 수 있다.
1894년 음력 11월 27일(양력 12월 23일)의〈泰仁城隍山戰鬪〉가 전봉준부대 의 마지막 전투였다. 종래 모든 연구가〈金溝의院坪전투〉를 마지막 전투라 고 보아온 것은 사실과 따른 잘못된 것이다. (235)
 
(233)『撫巡先鋒陣謄錄』,甲午11월 26일조,『東學亂記錄』,上卷, p.553 참조.
(234)『兩湖右先鋒日記』,甲午11월 1 29일조,『東學亂記錄』上卷, pp.326~327 참조.
(235)全琫準部冣는〈泰仁城隍山戰圖〉를 마지막 전투로 싸운 후金溝로 철수하 여金溝에서解散하였다. 이 때문인지 종래 모든 캅오농민전첑에 대한 연 구들은泰仁城隍山戰鬪바로 앞에 있었던〈金溝院坪戰鬪〉를 마지막 전투 라고 잘못 해석해 왔다. 그러나全琫準部隊는 1894년 음력 11월 25일〈金
쭈31
전봉준은泰仁城隍山으로부터 철수하여 다시金溝에 주둔해서全琫準部隊의 동학농민군을解散하기로 결심하였다. 농민군들을 초모해보아도 지난 번처럼 농민군의 수효는 약간 증가하겠지만紀律이 없어서 다시開戰하기는 지극히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전봉준은 승전할 수 없는 싸움을 계 속하기 보다는 동학농민군을 해 산하여 농민군의 목숨을 아끼고 전봉준 자신 은 후일의 재기를 기약하여 서울에 참입해서 국내의 정세를 알아보려 하 였다.
전봉준은 그리하여 1894년 음력 11월 28일 전라도 쇼溝에서全琫準部隊의 등학농민군을 해산하였다. 전홍준이 제 2차 농민전쟁에 봉기한지 약 2개월 半만의 일이었다. 전봉준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金溝에 이르러 다시招募하니 수효는 조금 증가하나紀律이 없어 다시開戰하 기는 지극히 어려웠다. 일본군이 뒤따라 오므로 두 차례接戰하다가 패주하여 각 기 해산하였다.金溝에서解散한 후에 나는 서울의裏面을 상세히 알고자上京하 려 하였다.」(2삐
전봉준은 부대를 해산한 그날로井邑의立巖山城을 넘어 후일의 재기를 의론하기 위해金開男등 동학군 지도자들과相會하려고 12월 초 2일(양력 12월 28일)淳킄의避老里에 부하 3명을 데리고 몰래 찾아갔다가 배신자의 밀고로 그마을士人韓信賢과 그의 일당에게 기습당하여 체포되었다. 전봉 준의 체포에는 상금 1천냥이 걸려 있었다. (237) 전봉준은淳昌에 주둔하고 있 는敎導隊에게 인도되어 교도대에 의해 그후 서울로 이송되어 심 문을 결畢고
처형 되었다. (238)
 
溝院坪전투〉를 치른 후北쪽으로 이동하여 11월 27일 다시 바지 박으로 〈泰仁城隍山戰鬪〉를 치르고 그 직후에 다시 남쪽으로金溝에 철수하여 이 듣날인 음력 11월 28일金構에서解散하였다.
(236)『全琫準供草』,初招問目,『東學亂記錄』,下卷, P. 529 참조.
(237)『巡撫先鋒陣謄錄』,甲午12월 초 6 일조,『東學亂記錄』上卷, PP. 579~580 및『先鋒陣呈報牒』,甲午12월 초 7 일조,『東學亂記錄劗下卷, PP. 208~209 찬조.
(238)全琫準은 부하 2명과 함께淳昌避老里에서韓信賢•金永徹•丁昌昱등과 民丁들에게 기습당하여 체포될 때 도망하지 못하도록銃개며리판으로 발과 다리를 심하게打擊당하여步行이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전봉준은 이벶 厚昌에留陣하고 있던京軍敎道隊에 인도듼 후羅,州를 거쳐서全,J`卜로 이 송되었다.全羅觀察使李道宰는 동학능민군이全琫準구출작전을 감행하 면 전봉준을 뼛길 열려가 있다고 해서日本軍에게 넘겨 서울로 압송캐 하
432
양력 년 원
〈표 6)東學農民軍의牛余峙戰鬪이후後逗•解散중의湖西• i盞南 에서의主饔戰鬪
 
음력 년 월 
甲午11월 5일 11월 7일
11월 7일
11월 8일 11월 8일
11월 9일
11월 9일
11월 11일
11월 13일
11월 14일
11월 14일
11월 14일
11월 15일
11월 16일
11월 17일
11월 18일
11월 20일
11월 25일
11월 26일
11월 27일
12월 4일
12월 5일
12월 7일
12월 8일
12월 9일
12월 12일
12월 12일
12월 12일
12월 13일
12월 15일
12월爻6일
12월 18일
12월 18일
12월 18일 乙未1월 24일
1894년 12월 1일
12월 3일
12월 3일
12월 4일
12월 4일
12월 5일
12월 5일
12월 7일
12월 9일
12월 10일
12월 10일
12월 10일
12원 11일
12월 12일
12월 13일
12월 14일
12월 16일
12월 21일-
12월 22일
12월 23일
12월 30일
1895년 1월 2일
1월 3일
1월 4일
1월 7일
7일
1월 7일
1월 8일
12월 31일
1월 10일
1월 11일
1월 13일
1월 13일
1월 13일
2월 18일
주 요 전 투
靑山縣石城村전부 永同郡梁山村전투 海美縣,.梅峴전투 靑山縣文岩전투 永同郡부근 전투 수帛山縣부근 전투 沃川郡增若驛전투 文義郡智面,村전투 부근 전투 連山부근 전부 論山郡驛覘山전투 礪山부근 전투 論山黃華臺전투 鎭安縣부근 전투 栗谷邑부근 전투 高山縣전투 표光邑점령 전투 金溝院坪전투 左水營전투 泰仁縣城隍山전투 長興碧it'少驛점령 전투 長興府점령 전투 康津縣점령 전투 茂朱邑전투 龍潭縣전투 永同龍山步垈전투 朝陽乾山전투 長興南面古邑튚 전투 長興南門外전투 玉山村전투 長湖院•陰城間전부 海南縣城外전투 鍾谷전투 大芚山전투
 
후33
여기시는 전봉준부대의 후퇴와 해체만을 간단히 썼지만, 이 기간에 전국 각지에서 일본군 • 관군의 동학농빈군의 공격과 농민군의 항쟁 전투가 있었
다. 전통준부대의魯城에서의 후퇴 이후부터의 주로 호서 호남지방에서의 큰 전투만을 몇개 들어 보아도〈표 6)과 같다.
전봉준부대 이외의 몇개 동학농민군 주력부대의 해체 과정을 보면,金開男部隊는泰仁에서 해산하고,金開男은 전봉준이 체포되던 날과 동일한 음 력 12월 초 2일泰仁山內面種松里에서江華營兵에게 생포되었다. (239) 관 군은 김기남을全』州에 데려다가 서울까지 이송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하여
전주에서 처형해 버렸다. 4240)
孫秉熙部隊는 전봉준부대와 행동을 내내 같이하여金溝의院坪전두와泰仁의城隍山전투까지 함께 치르고金溝에서 전봉준부대가 해산하자 전용준 과 헤어졌다. 손병희부대는 일본군과 관군에게 추격당하여長城까지 내려갔 다가長城의葛峴에서 일본군• 관군과 격전을 치르고 방향을 바꾸어北上하 였다. 손병희부대는 일본군 • 관군에 추격 당하면서淳呂을 지나任實의烏項里에서 숨어있던崔時亨을 만났다. 손병회부대는 계속 북상하다가茂,)뉘의
 
였다. 서을에서도 동학농민군 세력의 구출작전이 있을 것을 얻려하여全琫準을 내니日本公使館監房에投獄해 두었다. 이 때문에 재판 이전의 모 든 비공식적審問이日本側에 의하여獨占되어 진전되었다. 공식裁判과 審問은 5回있었는데(御招는 1895년 음력 2월 9일,再招는 2월 11일,三招 는 2월 19일,四招는 3월 7일,五招는 3월 10일),裁判庭에 출정 할 때도 全琫準은 여전히步行不能상태였기 때문에 가마를 타고 출정하였다. 부 당하게日本領事內田走槌가 재판관 석에陪席하여審問했음에도 불구하 고全琫準은 -世의英雄답게 당당히 응수하였다.日本領事의會審하에甲午更張政權의法務衙門權設(臨時特設)裁判所에서 1895년 음력 3월 29 일(양력 4월 23일)全琫準은『大典會通』刑典중의「軍BPI騎馬作變官軍者不得時斬」(군복으로 발을 타고 관문에 변란을 일으킨 자는 해를 기다리지 않고 참한다」는 조항의 적용을 받아死刑宣告를 받고, 그날로 그의 등지들 인孫化中崔景善(永昌),金德明,成斗漢등과 함께絞首刑이 집행되있다. 全琫準은 교수대 오르기 직전에「爲國丹忱誰有知](나라 위한 붉은 정성 그 누가 알리오)라는詩句를 남겠다고 한다. 이 때全琫準의 나이 41세였 다 0東學農民軍指揮者全琫準•孫化中•崔永昌(卿宣)判決宣告書.原本』, 『韓國學報』, 제39집, 1985 참조).
(239)『右先鋒日記』제 3권,甲午12월 초5일조, p.3 참조.
(240)『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1 권,「泰仁縣山內面種扮里에서衷徒金介男等襲捉」P. 197 :『官報』,開國503년 12월 초 6 일자, (亞細亞文化社版), 제 1원 p.793 :『巡撫先鋒陣謄錄긴,甲午12월 초 6 일조,『東學亂記錄』上卷, p.579 및『續陰睛史』下卷,甲午12월 초6일 • 초 7 일조, p.348 참조.
43孕
長白里에서儒生李廬伯의民堡軍을 반나 하룻밤大戰을 하여 크게 이기고 西水院-黃間을 거쳐永同의靝山에 도착하였다. (241) 손병희부대는 음력 12 월 12일(양력 1895년 1월 7일)永同의龍山장터(場垈)에서經理廳경군 70명과 靑)尹하兵180명이 합세한 관군과 조우하여 관군 5명을 전사케 하고 패주시켰 다. 관군의 보고는 전과를 허위보고하면서도 탄환이絶乏되었는데 산에 을 라보니賊勢가 또 다시 강정하여 4언을 포위했기 때문에 부득이하여 전사자 의 시지도 거두지 못하고淸』月`1氏營으로回軍했다고 현명하였다. (242) 손병희 부대는 일본군의 추격이 심하므로龍山을 출발하여報恩의鍾谷에 도착해서 夜營하였다. 이때 눈이 많이 내리고 추위가 극심하여孑系秉熙部隊가鍾谷에 서 모락불을 피워놓고 몸을 녹이고 있었는데 음력 12월 18일(양력 1895년 1월 13일) 새벽 3시에日本軍1개중대 병력이三宅大탐와桑原小탐의 지휘하에 夜襲을 감행하였다. 손병희부대는 안심하고 있다가 당한 기습이므로 처음에 는 당황했으나 곧 몇차례나逆襲을 감행했으며, 부근의高地를 점령하여 맞 은핀高地의日本軍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의 보고에서도「그들(동학농민군인용자)도高地를 점령하여 내려다 보면서 우리와 맞섰으며 그 기세가 매우 사나웠다. 싸움이 한창 벌어졌을 때東學徒가 우리의 양측으로 나와 우리를 包圍하亡- 1 되었을 뿐만 아니라,中央으로突擊해와 오만하기가 그지없 었다」:2鞹:고 기특하였다. 이 전투에서 손병희부해가 얼마나 용감하게善戰했 는가를 잘 알려 준다고 할 것이다.
손병회부대가 패주하는日本軍을 추격하여 약 80미터까지 접근해서 장시 간 싸울 때 오전 9시경 동학농민군은 단약이 고갈되었으며, 손병희부대의 제 1 선이 조금 취약해지자 일본군이 이 기회를 틈타 만격으로 들아서全線 에서突擊을 감행해 왔다. 손병희부대는火力의 부족으로 더 싸우지 못하고 두 길로 나누어淸:)1타 방면으로 철수하있다. 이것이 바로〈鍾谷전투〉이다.
이鍾谷戰鬪는 음력 12월 18일 새벽 3시부터 오전 10시까지 7시간 동안 계 속하여血戰을 전개한 대전투였으며, 손병희부대가火力을 모두 쏟아넣은 마지막 전투였다. 일본군은鍾谷전투에서의 동학농민군의 손실을 전사자
 
(241)『天道敎創建史』,第2篇의 66 차조.
(242)『巡撫先鋒陣謄錄』,甲午12월 20일조,『東學亂記錄』,上卷, 619叴조. (243)『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6원,「鍾谷附近戰鬪詳報」, p.70.
 
300여명, 부상자 미상이라고 하였다. (244) 손병희부해는淸,州의華陽`2同을 거쳐서 음력 12월 24일(양력 1895년 1월 19일) ,않)뉘의外西村에 도착하니,官軍이忠J,fl의無極市에서 앞을 가로막고 공격 대제를 갖추어 기다리고 있었다. 최시형 • 손병희 등은 더 이상 전투를 감행 하는 것이 등학농민군의 희생만 증가하고 무의미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이 에 음력 12월 24일忠,)해력外西村에서孫汞熙部隊를解散하고,崔時亨•孫秉熙등 간부들은 자적해 버렸다. (245, 孫化中部隊는 전흥준의 명령을 받고 남하하여 음력 10월 27일光列•I에 입 성해서 주둔하고 있다가, 전봉준이牛金特전두에서 패전한 후 11월 27일金溝에서 전봉준부대를 해산하면서 손화중에게 통보하여 동학 농민군부대를 해산해서東學農民들의 생명을 구하라는 권고를 하였다. (246) 손화중은  에서 12월 최일 손화중부대를 해산하고, 손화중 자신은 참적하였다. (247) 손 화중은 그후高敞에 숨어 있다가, 음력 12월 11일 고창士民李鳳宇에게 체 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전봉준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248, 崔景善部隊는 손화중부대와 함께光尹I해와羅)•J•I 등지에 주문하고 있다가 전 홍준부대가金溝에서 해산한 직후 전봉준으로부터 해 산하여 동학농민들의 생명을 보전케 하라는 권고를 받고 손화중 부대와 함께 해산했으며, 최경선 =光:)十뻬서 해산(歸化)하라는 뜻의 방문을 붙여 놓고 사라졌다. (249) 최경 선은同福에 은신해 있다가 12월 초 3일 관군에게 부하 220명과 함께 체포 되었는데, 최경선은 일본군에게 인도되어 서울에 압송해서 전봉준 등과 함 께 처형되있으며, 나머지 최경선과 최후까지 함께 있던 동학농민군들은 저 향한다고 관군이 참혹하게 학대하여 157명을 총살했고 나머지 62명도 투옥 했다가 대부분을 학살하였다. (250) 일본군 후미보명 제19대대와 제18대대의 일부 중대는 물론이고 각 지역 병
 
(244)『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蜀귄,「鍾谷附近戰圊詳報」, pp.68~70 참조.
(245)『天道敎創建史』,第2篇의 p.67 참조.
(246)『梧下記聞』,甲午11원조,第3筆의 p.35 첨지 참조.
(247)『巡撫先鋒陣謄錄』,甲午11월 22일조,『東學亂記錄』, 上卷, p.572 참조.
(248)『官報』,開國503년 12월 18일자, (亞細亞文化社版), 제 1 권, PP. 867~868 참조.
(249)『巡撫先鋒陣瀰錄』,甲午11월 22일조,『東學亂記錄』,上卷, p.572 차조.
(250)『全羅道各邑所捉東徒數爻及所獲什物升錄成冊』,開國503년 12월조,『東學亂記錄』,下卷, p.707 참조.
  436
참부의 일본군들이 조선정부의 관군과 함께 패전한 동학농민군들을 남한의 西南地方(전라도 지방)으로 몰아넣으면서 전국 각 지방에서 동학농민군들을 「토벌」하고 학살하였다. 동학농민군「토벌」만을 전답하기 위하여 특파듼 후 비보병 제19대대만 수색, 전투, 학살을 맡은 것이 아니었다.京釜路와仁川-大同路의 각 지점 병참부의 일본근들도 수색, 전투, 학살에 투입되있 다. 예컨며, 9월에 7可東• 동학농민군 7백명이 집결하자 일본군釜山 氏立占部에서 3개 소대의 일본군을 투입하여 이를「토벌」, 학살하도록 하였
다. (%1) 특히 경상도 • 강원도 • 황해도의 등학농민군「토벌」과 학살에는 주 로 각지兵站部의日本軍이 투입되었다. 
일본군의 동학농민군에 대한「토벌」은「鎭壓」에만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 니있다. 드 0 大本營으로부터「禍根을剿滅함으로써東學黨이再興하는
後患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2521는 작전의 원칙과 목적을 명령받고 있었으 므로 조선의 가장 완강한反侵略抗日勢力인 동학농믿군을 아예 뿌리채 뽑 아서 모두 살해해 버리는 것이 일본군의「토벌」목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일본군은〈철저한 수색〉과 색출된 농민군에 다한〈학살〉을 주로 자행하였 다. 그러므로 등학농민군이 이미〈解散)되어 평범한 농부가 되어버린 경우  에도 일본군은 점령지에서 이들을〈색출〉하여 (총살〉〈학살〉하고〈효수〉하 였다. 하나의 예를 들면今寶城군수의 갑오년 음력 12월 26일자 보고에 의하 면, 보성군에는壯衛營의京軍과口本軍이 도착하여 동학농민군에 가담했던 현저한 자 수집명을 체포하여 처단한 후京軍은長興방면을 향하여 이미 떠  났는데도 불구하고,日本軍은 여전히寶城邑에 남아서守城軍으로부터 정보 를 캐어내어 동학농민군에 가담했던 자 30여명을 추가로 더 색출하여 체포 해서〈총살〉하였다. (253, 일본군의 이러한 학살 만행은 전라도 지방 전역에서 자행된 전형적 유형이었다. 이것은 동학농민군이不殺入의 원칙을 지키어 점령지에서 가능한 한 사람을 죽이지 않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이에 각 지방의 동학농민군들은全琫準部隊가 해산한 후 그에 뒤다라 일
 
(251)『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3권,「吏學黨鎭撫를 위한河東으로의出兵의 /;牛」,p.355 차조.
(252)『駐韓日本公便館記錄』, 제 1 권,「隻儲步兵第19大家運營上의訓수`과日程   表], p.154.
(253)『巡撫先鋒陣謄錄書,甲午12월 26일조,『東學亂記錄』,上卷, P. 638 찬조.
第2次
부는 급히 해산하여 농민화해서 타지방으로 멀리 도괴했지만, 일부의 동학 농민군은 남해안까지 밀려 가면서도 완강히 일본군과 관군에 저항하였다. 하 나의 예를 들면, 전라남도長城에서는 약 1첸명의 동학농민군이 해산하지 않고 모여 음력 12월 초 4일(양력 12월 30일) 장홍성 밖의碧涉驛을 점령하였 다. (254) 이 등학농민군부대는 숫자가 더욱 증가하여 이튿날인 12월 초5일 (양력 12월 31일) 새벽에는長興府를 공격하여 점령해서 일본군에 협력하여 동학농민군을 학살한長興府使를 난타했으며 (결국 사방)吏胥들을 총살하였 다. {255) 이 동학농민군부대는 약 1만명의 대부대로 증가해가지고 음력 12월  초7일(양력 1895년 1월 2일)에는康津邑올 점령하였다. (256) 이에 경악한靈岩郡守는 다음 차례는 자기 고을이라고 긴급 구원을 요청하였다. (250 이 동학 농민군부대는 제 2 차로官軍이 지키고 있는長興府를 다시 점령하려고 음력  12월 13일부터長興城을 포위하여 공격하다가 긴급 구원차 도착한日本軍  및京軍敎導隊의 대병력과 12월 15일長興城南門밖에서 대격전을 전개하 여 약 200명의 전사자를 낸 후 전투력이 다하여 후퇴해서 해산하였다. (2583 이 부대 뿐만 아니라 동학농민군은 각 지방에서 소 •중규모 부대로 일본군 과 관군에 완강히 저항퀐으며, 특히 호남 지방과 호서 지방에서는 일본군과 관군 • 민보군의 잔혹한 추격과 학살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군 자존부대들은 필사적으로 완강히 저항하였다.
남해안에서 완강히 저항하는 동학농민군의 되로들 차단하고 철저히 학 잘하기 위해서 일본이 파견한 군함筑波琥는 전라도 앞바다로 항진하여 음력 11월 26일(양력 12월 22일) 일본 해군대위가 지휘하는陸戰隊(분견디1)  를 전라도左水營에 상-부시켜 이곳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을 무차별 학살하
 
(254)『右先鋒日記』제 3원,甲午12월 18일조, p.24,•『巡撫先鋒陣謄錄』,甲午 12월 초9일조,『東學亂記錄』,上卷, p.581 및『先鋒陣呈報牒』,開國504 년 저월 13일조,『東學亂記錄』,下卷, p.263 참조.
(255)『先鋒陣呈報牒』開國503년 12월 초 6 일조,『東學亂記錄』下卷, p.214 및 『巡撫先鋒陣謄錄』甲午12월 초6일조,『東學亂記錄』上卷졸 PP. 578~579 차조.
(256)『右先鋒日記』, 제 3권,甲午12월 18일조, p.24 및『巡撫先鋒陣謄錄』,甲午12월 최0일조,『東學亂記錄』上卷, p.588 차조.
(257)『巡撫先鋒陣謄錄살,甲午12월 최0일조,『東學亂記錄%上錄, p.589 참조.
(25B)『巡撫先鋒陣謄錄』,甲午12월 21일조,『秉學亂記錄』,上卷, pp.623~624
 
438 {匕
였다. (259) 이어서 이日本軍부대는光陽으로 들어가 수많은 동학농민군을 또 다시 무차별 학살하였다. (260) 또한 군함操江號는 등학농민들이多島海점 들 안으로 들어가 숨는 것을 차단하려고 다도해 서남지방을 초계했을 뿐만 아니다,退路를 차단하려고 제주도까지 다녀은 후 다항과釜山항의 경비 를 담당하게 하였다. (261)  
일본군과 관군의 이러한「토벌」방식과, 학살은 비단 전라도 지방에서만 자행된 것이 아니라, 충청도 경상도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의 모든 지방에서 자행되었다. 특히 일본군의 잔혹한 학살로 이 지방의 동학농민군들은 완전 히 해산한 후에도 색출되어 무수히 학살당하였다. 최후까지 완강하게 항전 하는 남해안의 동학농민군들도 1894년 음력 12월 말경에는 거의 침국되었 다. 일본군 제19대대는羅•Il(`뻬다 1895년 음력 1월 16일(양력 2월 10일)경까 지「토별」본부를 두고 작전을 수행하다가艚山으로 돌아갔다. 일본군 후비 보병 제19대대의 작전계획은 원래 29일만에 작전을 종료하여 1894년 음력 11월 16일(양력 12월 12일)에는洛東에 집합하는 것이었는데, 뜻밖에 동학농 인군의 완강한 항전으로 작전이 2개월이나 지연되어 종료되었고 임시 대대 본부도 계속羅|)&卜빠 두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62)  갑오농맨전쟁의 제 2 차 농민전쟁에서 동학농민군이最後의抗戰을 전개한 것은 1895년 음력 1월 24일(양력 2월 18일)의〈大芚山전투〉에서이다. 동학농 민준 간부들 26명(이 중에 임신부 1명, 소년 1명 포함)은 해산이나 항복을 거부 하여 죽음을 각오하고大芚山으로 들어가서大芚山속의寒德山山頂에다要
塞를 설치하였다.大芚山은 전라북도完』)•I,l郡雲莎fil面과 충청남도 수帛山郡및 言侖山郡에 길친 산으로써主峰의 높이가 878미터에 달하고 괴암 절벽이 많은 산이어서 천연의 요새가 될 수 있는 큰 산이었다. 동학농민군 26명은大芚山 속의寒德山山頂의 약간 아랫쪽 몇 길이나 되는 큰 바위 사이에 3채의 집
 
(259)『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1원,「第279號,日本筑波艦의全羅左水營東i匪擊退에 관한電報」, P. 193 및「京第109號,左水營으르 내습한京學徒격퇴 의件」, PP. 240~244 참조.
(260)『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6권,「日艦筑波의運航및全南地域에서의活 動報告」, PP. 5~7 참조.
(261)『駐韓胷本公使館記錄』, 제 3원,「筑波•操江의警備의件」, p.382 찬조.
(262)『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6뒨,「各地戰鬪詳報및京學黨征討策實施報告書送付의 (牛」, pp.63~68 참조.  
第2次 을 짓고, 주위에 큰 들을 쌓아 올려 여기에 총구벙을 냈으며, 큰 돌과 거목 을 쌓아두었다가 관군이 오면 밑으로 굴러 떨어뜨리면서銃을 사격하여 저 항을 했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동학농민군의 이 요새  는 몇 길이나 되는 바위 위에 있어서 아래로부터는 사다리가 있어야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官軍측에서는公|州監營에서 음력 1월 8일경營兵을 파견하여 3일간이나 공격을 했으나 실패하고 돌아갔다. 그후民堡軍이 찾아 와서 공격을 시도하다가 도리어 동학농민군으로부터 총을 맞고 패주하였다.
음력 1월 21일 경부터公,州의官軍이 다시 파견되어 공격을 시도했으나 큰 들과 거목을 떨어뜨리면서 총을 소아빘으므로 접근하지 못하였다.全』가厪營 에서는士官1명과 병사 30명을 파견하여大砲를 끌고 가서 포격하여 이를 점령하도록 하였다”全31十1의官軍31명은 대포를 끌고大芚山속으로 들어와 서 동학농민군의 요새를 향해 계속해서砲擊을 가하였다. 그러나 대포를 가 장 근접해서 설치할 수 있는 위치가 동학농민군의 요새에서 약 1,500미터나 거리가 떨어져 있고 게다가 200~300미터 아래에서 위를 향해 포격했기 때 문에 포만은 모두 동학농민군의 요새에 미치지 못하고 훨씬 전방에 떨어져 한방도 명 중하지 않았다.
日本軍은 일본군 3개분대와 조선 관군 30명으로 된特攻支隊(모두 약 60명) 를 편성하여大芚山에 파견해서 이 최후의 동학농민군을「토벌」케 하였다.
이特攻支隊는銃器뿐만 아니라 등산용 사다리와 장비를 갖고, 음력 1월 24일 새벽 5시 공격작전을 시작하여 3로로 나누어서 기어오르면서 맹렬한 사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등학농빈군의 요새는 세 방면이 큰 바위로 뒤덮여 있고前面은 큰 들을 쌓아 을려서 총구멍을 냈기 때문에 일본군 특공지대의 총기사격은 전혀 효과가 없었다. 이에 일본군 특공대는 조신 관군으로 하여 금 요새 전면에서 맹공격을 계속하도록 해놓고 일본군 특공분대는 특공작전 의 공식대로 요새 후면의 바위 절벽을 몰래 기어 오르도록 하였다. 동학능 민군은 오직 절벽의 산이 험한 것만 믿고 배후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으 면서 계속前面의 일본군과 조전 관군과의 머리 위에만 행렬한 사격을 하였 다. 그러다가 불의에 배후에서 돌격해 들어오는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용감 히 싸우다가 패전하게 되었다. 이때가 오후 2시경이었다. 이것이〈大苞山 전투〉이다. 동학농민군은大芚山전투에서 9시간 동안 항전하다가 요새가 주쮸O dt 
함락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어린소년 1명만 남고,都檢察崔鶴i벆夐:都執우罔張志弓L, 도집강崔高錦,都執行李光儀, 도집행李光宇,大正李是脫,寸妾司趙漢鳳,唼主金在醇, 접주陳秀煥,敎授姜泰鍾,奉道金判童을 비롯해서 25명이 모두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 25명은 대개接主이상의 위치에 있 는 간부급들이었다. 27•8세의 임산부 1명도 전사하였다.接主金石醇은 한 살수 되는 여아를 안고 철벽 계곡으로 뛰어내려 자살하였다. 모두 일본군에 항복하지 않고 장렬하게 전사한 것이었다. (263) 이것이 제 2차 농민전쟁의 동 화농민군의最後의抗戰이있다.
제 2 차 농민전쟁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전사 • 학살된 동학농민들의  총수는 얼마나 되었을까?『天道敎創建史』는 이 전사 • 피학살자 수를「20만 명 이상」(264;이라고 하였다.朴殷植은 이를 약 30만명이라고 추산하였다. (265)
『東學史』는 이를 약 30~40만만명 이 라고 하였다. (266)  동학농민군은 약 30만명이 생명을 바치면서日本侵略軍을 자기祖國1疆土 에서 몰아내어保國安民하려고 처절한抗日農民戰爭을 전개했던 것이다.
九.第2次農民戰爭敗戰의原因
감으농민전쟁의 제 2차 농민전쟁이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한 원인은 어디 에 있을7가? 여러가지 원인이 지적될 수 있지만 그 중에서도 중요한 몇가지 원인을 골라 들면 특히 다음과 같은 점이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들어야 할 것은日本正規軍의 계속적增*•辰와 그들의 동학농민군 에 대한「토벌」공격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남의 나라 일에 부당하게 무장간섭하여 불법적으로日本軍을 한반도에 상특시키고 남의 국트 위에서  淸日戰爭을 도발하였다. 이에 바대하여 일본군을 자기 조국 땅 위에서 몰아 내기 위해 재홍기한 동학농민군에 대하여 일제는 이미 국내에 주둔한日本正規軍뿐만 아니라 별도로 후비보병 19대대와 군함 2척을增派하여 동학농
 
(263)『駐韓日本公使館記錄』, 제 6원,「大芚山附近戰鬪詳報-', pp.71~73 차조.
(264)『天道敎創建史』,第2篇의 p.69.
(265)朴殷植,『韓國`痛史』, 1915,『朴殷植全書』(榎國大東洋學硏究所版),上卷, P. 111 참조.
(266)『東學史』, P. 154 참조.  
第2次
믿군을「토벌」하고 재기 불능하도록 철저하게 색출하여 잔혹하게 학살케 하 였다.淸日戰爭에서의淸軍에 대한日本軍의勝利에서도 증명되는 바와 같 이 당시日本軍의 전투력과 근대적火力은 민병인 동학농민군이 감당하기에 는 벅찬 것이었다, 일본침 략군의 이러한 근대적武器와 막강한火力의 동학 농민군에 대한 공격과 탄압과 학살은 제 2차 농민전쟁 실패의 켯쪠의 원인 이 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등학농민군의武器의 열악성과彈丸의 결핍 및 농민군의 훈련의 부족이 제 2차 농민전쟁 실패의 한 원인이 되었다.黃玹은 당시 동학능민군 이 가진 우리나라의銃筒(화승총)과 일본군이 가진銃을 비교하텬서 등학농 민군의銃은 심지에 불을 불여쓰는 화승총이고 사정거리가 불과 100보인데 비하여 일본군의 총은 사정거리가 400~500보를 지나며 불이 스스로 붙는 內發式이어서 심지에 불을 붙일 필요가 없으므로 눈비 속에서도 중단없이 사격할 수 있기 때문에,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으로 부터 수백보의 농민군측 사정거리 밖에서 사격하면 일본군은 사격을 하는 반면에 동학농민군은 바 라보기만 할 뿐 1발도 사격하지 못했다고 기특하였다. {267)金允植은 일본 군• 관군과 동학농민군의武器를 비교하여, 일본군 1명이 농민군 수천명을 상대할 수 있고,京軍10명이 농민군 수백명을 상대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까닭이 아니라”武器의利와不利의 차이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268) 뿐만 아니라 그 빈약한 무기로써 연이은 전투에서彈藥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지 못한 것은 동학농민군의 전투력을 상설케 하였다. 여기에 다시 동학농민군 은 농민들을 모은 민병이었기 때문에 군사훈련이 부족하거나 결핍되어 있어 서 훈련을 잘 받은 정규군과는 상대가 되기 어려웠다. (269) 이러한 요인이
 
(267)『梧下記聞』,甲午10원조,第3筆의 p.20 참조.
(268)『錦營來札(雲養)』,甲午10월 12일자,書札,『東,學亂記錄』上卷, PP. 90~91
(269)『駐韓日本公使記錄』, 제 6 권,「各地戰鬪詳報및東學黨征討策實施報告書送付의 4牛」, p.62 참조.
日本軍7災備步兵獨立第19大隊~ 대대장으로 동학농민군「트별」을 지휘한 少佐南小四郞은 동학능민군의 전투상황과 전부훈련부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賊은 어느 전투에서나山봉우리를 점령하고 함성을 질 러 그威勢를 과시하였다. 그리고 전투마다賊徒의 수에 비하면 우리 군대 는人員이 매우 적었다. 그래서 그들은 즉시包圍하려고 우리 군대의兩側面으로于廻한다. 그 움직임도 매우迅速하다. 그 까닭은 그들이山地를 跋步하는c기 숙달하였고 각자 휴대품을 갖고 있지 않으며, 만약 소지한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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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합하여 동학농민군과 일본군의 전투력의 큰 격차를 낳아 동학농민군의 제,
2 차 능민전쟁 패전의 큰 원인이 된 것이었다.
셋째로, 동학농민군의分散性과 불충분한組織性이 제 2차 농민전갱의 패  전의 한 원인이 되었다. (270) 동학농민군은 제 2차 농민전쟁 때 전라도와 충 청도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방에서 수십만명이 봉기하였다. 그러나 이 봉기  한 수집만명의 동학농민군은 정규군처럼 하나의 통일된 지휘체계 밑에서 일  사불란하게 작전과 전투를 하지 못하고 각각 자기 지방과 부대 별로分散되 어 고립적으로 작전과 전투를 감행하였다. (271) 따라서 동학농민군은 수십만  명이라고 할지라도 실제의 전투단위는 수천명 • 수백명에 불과했으며, 가장  크고 막강한全琫準部隊도 약 1만명에 불과하였다. 동학농민군 부대들 사이  의 협조는 되었지만 그것도 정규군처럼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통일도』능률적• 협조가 아니라 타협과 협의에 시간이 소요되고 완만하게 움직이는 비능를적! 협조였다. 동학농민군의 이러한分散性과 그리고 유기적 통일적組織性의  부족은 동학농민군의 제 2차 농민전쟁에서의 패전의 원인의 하나로 작용하 였다. (272]
네째로.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의 군사적 전략 • 전술의 부족이 제 2 차 농민  전쟁의 패전의 한 원인이 되었다. 동학농민군과 일본군과의 무기와 화력의 격차, 전투력의 격차가 큰 조건에서는, 동학농민군은 일본군 • 관군의 방비 가 약한 지점이나 쵯점을 기습하여 타격을 가하고 철수한 후 이어서 다음  혓점을 기습하여 일본군 • 관군을 대혼란에 빠뜨리는遊擊戰을 감행하면서 서울을 향하여 바로北上하는 전략 • 전술이 확실하게 필요뵜다고 볼 수 있-
다. 그러나 동학농민군 지도부는公秀I책를 점령하려고, 큰대무기로 잘 무장된 
 
건이 생겨도 즉시 버려버리기 때문이다. 부근에서 그들의 세력이 가 장强盛했을 때는 흔히戰死者나負傷者를 운반하여敵의 손에 넘기지 않 았다. 그러나 이남의 여러 전투에서는 모두 내버려둔云11 운반할 틈이 없었던 것 같다.賊徒는 정말 오합지졸로서 용케 견고한陣地를占領했다 가도 옆에 있는兵士가 죽으면 반드시敗走했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대 로 가까이 가서 사격하지 않으면, 그들을 위압하는 사격 효과를 하지 못•   했다.] 참조.
(270)鄭畛相,『농민집강소를 통해본甲午羹民戰爭의 사회적 지향」,韓國社會史 硏究會論文集제27집,『한국의 전통사회와 신분구조』(문학과지성사), 1991  차조.
(271)鄭晷烈,「古阜民亂의硏究(上•下)」,『韓國史硏究』제49~49집, 1985 참조.  (272) l姜在彦,『韓國近代史硏究걞(한을), 1982, PP. 193~196 참조.  
第2次
일본군의 진지를 향하여 잘 무장되지 않은 농민군으로正面突破의 공식적 돌격전을 감행케하였다. 이것은 동학농맨군에게 막대한 희생만 내게했지 성 공하기는 어려운 전술이었다. 동학농민군지도자들의 근대적 전략 전술의 부 족도 제 2차 농민전쟁 패전의 한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섯째, 당시 캅오경장을 추진한開化派政府의官軍이 일본군의 지휘와 자문을 받으며 그들과 협조하여 동학농민군「토벌」에 가담한 것이 제 2차 농맨전쟁 실패의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일본군과 동학농민군의對決관 계에서 정부와 관군이 어느 쪽에 가담하는가는 승패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것인데, 동학농민군이 재통기하자 개화파 경부는 이것을 동시에 자기들에 대한「반란」이라고 보고 일본군에 협조하여 동학농민군에 대한「진압」과 「토벌」에 출동하였다. 이것은 제 2차 농민전쟁 실패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 였다고 볼 수 있다.
여섯째,兩班儒生들이民堡軍등 각종의 이름으로反革命軍을 조직하여 동학농민군을 공격한 것이 제 2차 농민전쟁실패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양반유생들의民堡軍은 전투력이 강한 것은 아니었으나 각 지방에서 동학농 핀군들을 고립시키고 기습당하게 하는 데 크게 작용하였다.
위의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거대한 규모의 전국적인 제 2차 농민 전쟁도 성공하지 못하고 패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十.第2次農民戰爭의 사회적 역사적 성격
위에서 고찰한 과정으로 전개된 갑오능민전쟁중의 제 2차 능민전쟁의 역  사적 정격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全琫準자신 의 답변이 가장 정확한 설명이 될 것이다. 동학농민군「토벌」에 앞장섰던 일본군第19大隊長이 발에 부상을 입고 생포되어은 전봉준을 심문할 때 그 의 재봉기의 성격에 대해 전봉준은 다음과 같이 당당히 응답하였다. (273)
「우리들은田舍에서生長하여世事에 소원해서日本政府의 우리나라에 대한政 원各方針을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 본년 6월 이래日本軍이 계속하여 우리나라에 오
 
(273)姜昌-,「갑오농민전쟁 자료발글 :全琫準會見記및取調記錄」,『사회와 사상』, 창간호, 1988년 9월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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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것은 반드시 우리나라를倂呑하려 하는 것이라고, 옛날의壬申듸『들亂을  각하여 내고, 인인들이疑懼한 나머지 나를 추대하여首領으로 삼아서國家와生死를 함께 하려고決心하여 이再擧를 도모한 것이다.」(274)
또한 전봉준은 재봉기의 궁국적 대목적에 대한 질문에 다음과 같이도 응 답하였다.
「원래 우리 들이起兵한 것은閔族을打倒하고弊政을釐革하려는 목적이 있는데,  閔族은 우리들이入京하기에 앞서 붕괴되었기 때문에 일단兵을 .解散하였다. 그후  7월에日本軍이 대대적으로京城에 들어와王宮을 프위했다는 것을 듣고 크게 놀  라同志를 모집해서 이(일본군)를驅逐하려고再次兵을 일으킨 것이다. 오직 나와 종국의 목적은 첫째로閔族을打倒하고 -黨의奸臣을 없애며弊政을改革하는 데 있으며, 또한轉運使를 폐하고田制山林制를改正하며小吏의私利를 짓는 자를  엄하게 처 분하는 것을 원했= 비결이다.」(27)
또한 전봉준은日本公使館에서日本警部의 취조를 받는 중에, 네가 저을 에攻人한 후에 누구를 추대하려 뵜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응답 하였다.
「日本兵을 몰아내고惡奸의吏를 쫓아버려君王의 결을 깨끗이 한 후에는 몇사 람의柱石의士를押立해서政i,台를 하게 하고, 우리 자신들은 바로田舍호 돌아가 常職인 농업에 종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國事를 들어 -人의勢力家에 맡기는 것. 은 커다란弊害가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數人의名士가協合하여合議法에 의 해서政治를 담당하게 할 생각이었다.」[276)  일본의『東京朝日新聞』은 위의 전홍준의 응답을「東學首領과合議政治」라 는 제목을 불여 널리 보도하였다.
전봉준의 위의 답변을 정리하여 제 2차 농민전경의 역사적 성격을 찾아 보면, 그것은 1894년 6월 이래日本軍의 조선에의 불법적 상륙과 계수된 증 파가 자기祖國을 결국〈倂呑〉하려는 것이라고 판단하고國家와生死를 같 이하겠다고 결심하여日本軍을祖國疆土위에서 몰아내기 위하여再蜂起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77, 즉 제 2차 농민전쟁의 역사적 성격은日本侵略軍을
 
(274)『貢京朝日新聞』, 1895年(明治28年) 3月5日字,「東學黨大巨魁는其口供] (275)『東京朝日新聞』, 1895年3月5日字,「東學黨大巨魁느其口供」.
(276)『東京朝日新聞』, 1895年3月6日字,「東學首儂之合議政治」
(277)『全琫準供草』,再招問目들『東學亂記錄』,下卷, pp.532~540 및『全琫準判決宣告書原本』,『韓國學報』제39집, ,1985결 PP. 187~190 차조.
 
第2次 4쭈5
자기 조국 당 위에서 몰아내어祖國의自主獨立을 굳게 지키려고 한反帝國主義•反侵略의抗日民族戰爭이있던 것이다.  
그러나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은反帝•反侵略의 항일 민족항쟁을 하면서 反封建투쟁을 다음의 과저]로 추구하였다. 즉 동학능민군이 성공하여 저을 에 입성하면, 가렴 주구만 일삼는奸臣들과 간악한官吏들을 없애고 뉴적 弊政을 모두〈改革〉하려고 하였다. 그 범위는 종래 다른 당시 개혁가들이 엄두도 못내던田制(土地制度)와山林制(林野制度)도 개혁하려는 근본적인 사 회적 경제적 개혁을 포함한 것이었다.
더욱 주목할 것은政`冶制度의 개혁도 단행하되, 종래와 같이 -人의勢力家가 정치를 담당하는 것은 폐해가 많기 때문에 나라의 기둥과 초석이 되는 훌륭한 인물들로 협의기관을 만들어서合議政治를 실행하게 하는 개혁을 추 구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모든 사실들은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은日本(受略軍을 조국강토 위 에서 몰아낸 다음에는中世的봉건체제를 타파하고 근대적 제도를 수립하는 대대적 개혁을 단행하려 했음을 잘 알려주고 있다.
즉 제 2차 농민전챈의 성격은反帝•反侵略민족전쟁과反封建的농민혀  명운동이 통합된 것이었으나,反제국주의 •反침략의抗日民族鬪爭을 선쾸 시킨 동학농민들의 투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제 1 차 농민전쟁이反 제국주의 •反침 략 운동과反봉건적 농민혁명운등을 통합했으면서도反封建的농민혁명운동을 산행시켰던 것과는 대조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갑오농민전쟁의 제 2차 농민전쟁은 먼저 한반도에 불법 침입하여 남의 국 트 위에서 청 • 일전쟁을 일으키며 궁극적으로 자기의祖國을倂呑하려고 노 리는日本侵略軍을 농민전쟁을 통하여 먼저 실력으로 들아내고, 다음에 폐 해 많은 모든中世的封建的制度들을 폐지하여近代的제도들을 수립하려고 한 우리 나라東學農民들의民族革命運動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十-. 맺음말 : 제 2 차 농민전쟁의 사회적 역사적 의의
갑으농민전쟁의 제 2차 농민전쟁은 본문에서 든 바와 같은 몇가지 원인들 의 복합으로 일단 실패했지만, 그것은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었고, 한국 446 4匕 근대사와 한국민족운등사에 커다란 사회적 역사적 의의를 가진 운동이었다.
특히 다음과 같은 몇가지 사실은 제 2차 농민전쟁의 의의로서 주목할 필요 가 있을 것이다.
첫째로, 제 2차 농민전쟁은 일본 군국주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한국침 략과倂呑시도에 대한 한국 능민들의反帝國主義•反侵略抗日무장투첑이 었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곧 한국 농민들의抗日〈義兵〉무장투쟁이었
다. 당시 동학농민군들도 이것을 잘 인식하여 그들 자신을〈義兵〉이라고   현했으며 그들의 본부를〈倡義所〉, 그들의 격문을〈倡義文〉이라고 표현하기 도 하였다.
물론 캅오농민전쟁 전체가反帝•反侵珥各•反帝建농민혁명운동이기는 했 지만, 제 1 차 능민전쟁은反帝•反侵酪보다反封建을 신행시킨 운동이었는 데 비하여, 제 2차 농민전쟁은 일본침 략군을 조국강토에서 몰아내기 위한 反帝•反侵略투쟁을反封建보다 선행시킨 농민들의 민족혁명운동이었다.
제 2차 농민전쟁에서 한국 농민들은 전국적으로 통기하여 자기 조국에 불법 침입해서 청 •일전쟁을 도발하고 내정간섭을 자행하며 호시탐탐 한국 병란 과 식민지화를 노리는 일본침 략군을 몰아내기 위하여 참으로 용감하게 현신 적으로 투쟁하였다. 민족과 조국에 대한 등학농민군의 현신성과 애국심은 참으로 감동적인 것이었으며, 한국근대사의 의제침략기에 에국적 전통을 최 저변의 민중들 속에 확고부동하게 정립하고 발전시켜서 그후 의제 침략에 항거하는 민중의 민족운동에 고갈되지 않는 무한의 원동력을 형성 공급하 였다. 
들째로, 제 2차 농민전쟁은 나라의 자주근대화를 완강하게 저지해 오던 조선왕조의舊體制(ancient regime)를 근본적으로 붕괴시켰다. 물론 제 1 차 농민전쟁과 집강소의 농민통치가 선행해서 구체제를 붕고]시켰지만 이것은 호남 지방에서와 캅오경장에 반영되어서의 일이었다. 그런데 제 2차 농민전 쟁은全國的수준에서 농민들의 구장한 실력에 의하여舊體制를 철저히 붕 괴시켰다. 물론 이 기간에 이미 캅오경장에 의하여改革法令이 공포되고 여러가지 제도개혁이 선포되었다 할지라도, 이것이 중양정부의 탁상 개혁으 로 끝나지 않고 지방 농촌에서까지 실행될 수 있었던 것은 제 2차 농민전쟁 에 의하여 동학농빈들이全國에 걸쳐 무장한 실력으로舊體制를 실질적으로
第2次 447 철저히 붕괴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세째로, 제 2차 농민전쟁은 각계 각층 국민들의 민족적 *정치적 • 사회적• 의식적 각성을 크게 고취하고 촉진시켰다. 동학농민군의 제 2차 농민전쟁은 국민의 각 계가층에게 참으로 심대한 충격을 주었으며, 이 심해한 충격을 받 은 전 국민이 동학농민군이 제기한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각각 자기의 입장에서 깊이 검토하고 반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제 2차 농민전쟁의 충격 과 영향으로 전 국민의 정치의식도 크게 변화하여 일신되고 크게 고양되있 다. 제 2차 농민전쟁의 충격과 영향으로 특히 의제의 침략에 대한 경각심, 일제의 한국 병탄 시도에 대한 경각심, 농촌문제와 지방행정 문제의 심각  성, 구체제의 청산과 대개혁의 절실 절박한 필요성 등에 대한 국민적 인식 과 합의가 전국민적으로 광범위하게 확고히 정립되어 그후 동학농민군이 패 전한 뒤에도兩班儒生들의封建的反動의 시도를 전혀 성공할 수 없게 만들 었다. 특히 항일 민족의식과 개혁의식이 농촌과 산촌의 방방곡곡에까지 정 착하여 지배하게 된 것은 제 2차 농민전쟁의 충격과 영향이 가장 큰 요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네째로, 제 2차 농민전쟁은 우리나라의 자주근대화 운동과 사회발전의 아 해로부터의 커다란 추동력을 공급하였다. 제 2차 농민전쟁에서 동학농민군 이 일본칟략군의 추방과 함께 대대적 개혁의 단행을 전국적으로 요구한 것 은 갑오경장 정부가 한편으로 동학농민군을 탄압하먼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농민들의 아래로부터의 대대적 개혁 요구에 밀리어 농민들의 요구사항을 개 화파식으로 번역해서 대개혁을 단행하는 데 근원적인 힘이 되어 주었다.
제 2차 농민전쟁에서 패전하여 동학농민군 자신은 집-진하지 못했다 할지 라도 집권한 개화파 정부로 하여금甲午更張의 대개혁을 단행하도록 아래로 부터 해대적이고 급박한 사희적 압력을 주입하여 결국 대개혁이 이루어지게 한 것은 큰 역사객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등학농민군 자신들 이 근대적 개혁 요구 조항을 내걸고 제 2차 농민전쟁기간에도 이를 동학농빈 들 자신이 과감하게 스스로 실천한 것은 근대적 대개혁을 저지하던 둑을 농 인군 스스로의 거대한 힘으로 무너뜨리고 자주근대화와 사회 발전을 크게 진 전시긴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섯째로, 제 2차 농민전쟁은反日力量을 크게 제고시키고 그후反日義 4훃8 {匕
兵運動의 튼튼한 토대와 원동력을 형성하여 공급하였다. 제 2 차 농민전쟁의 결과 전국에 걸쳐 특히 농촌과 산촌에는反日力量과反日意識이 크게 제고 되어 축적되었으며, 전국에서 제 2차 농민전쟁에 참가했던 다수의 농민군 병사들은 그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義兵部隊들의 병사가 되어 능민전 경 때와 마찬가지로 완강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한말 의명운동을 다룬 각종 관만 문헌들에서 의병부대의 병사들에 대해「東匪餘黨」이 많다고 기특한 것은 이것을 가리킨 것이었다.
갑오농민전쟁의 제 2차 농민전쟁은 동학농민군이 전투에서는 비록 패전했 다 할지라도 그것은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캅오농민전쟁의 제 2 차 농민전쟁은 정치적 사회적으로 한국사회의 역사에서 수천년 국어은 낡은 전 근대적舊體制를 붕괴시키는 데 결정적 작용을 하여近代社會에의 길과近代的社會發展에의 길을 넓게 열어주었으며, 또한反日力量疊反帝國主義力量을 크게 제고시켜 후일의抗日武裝鬪爭의先驅가 되어 주고 그의 고갈되 지 않는原動力을 형성 공급해 주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필자 : 서을대학교 사회 과학대학 사회 력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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