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새지기의 생존자’였다 [본헌터㉛] 홍세화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새지기의 생존자’였다 [본헌터㉛]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새지기의 생존자’였다 [본헌터㉛]
[역사 논픽션 : 본헌터㉛] 황골 공회당의 세화
내 사유체계를 무너뜨렸던 1966년 추석 문유 대부와의 만남
기자고경태수정 2024-01-07 17:46펼침

황골 공회당 창고에서 살아나왔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 헤어졌고, 나는 서울 종로구 연건동 외할아버지집에 맡겨졌다. 4·19 직전이던 1960년 4월초 경기중학교 입학당시의 모습이다. 아직 명찰도 달지 않았다. 본인 제공

내 이름은 세화다.

세계평화를 소망하며, 아버지가 지어주었다. 세상은 평화랑 정반대였다. ‘세계평화’는 태어난 지 얼마 안돼 전쟁의 칼날 위에 섰다. 가스실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유태인 아이의 처지가 나와 같았다. 내가 갇혔던 황골의 작은 공회당 창고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손가락 하나로 삶과 죽음이 결정됐다. 그날로부터 73년, 내가 여태껏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 기적이다.

나는 방황했다. 그리고 반항했다. 정해진 코스를 거부했다. 1977년부터 한국민주투쟁위원회(민투) 맹원을 거쳐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의 전사가 되었다. 1979년 무역회사인 대봉산업의 해외지사 근무원으로 독일 뒤셀도르프에 이어 프랑스 파리로 갔고, 얼마 안돼 남민전 사건이 터졌다. 나는 직장을 잃었다. 한국에 돌아올 수 없었다. 거대한 파도가 내 인생을 덮쳤다. 생존해야 했다. 파리에서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나는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은 황골에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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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2월, 나는 색동옷을 입고 돌 사진을 찍었다. 거친 운명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본인 제공

2008년 가을 과거 국가폭력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기관의 한 조사관이 전화를 했다. 참고인 조사 요청이었다. 황골 새지기 사건을 조사하면서 홍 선생님이 그 집안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당시 사건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내 삶의 기나긴 폭풍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에 담겨있다. 1995년 나는 이 책으로 한국에 돌아올 가능성을 보았다. 책에도 썼지만, ‘빠리의 택시 운전사’였던 나는 일찍이 황골 새지기 민간인 학살사건의 생존자였다. 그 조사관은 생존자로서 나의 진술을 듣고 싶어했다. 그러나 나는 그날에 관해 아무 기억이 없었다. 사건 당시 만 세살이었다. 어떤 기대치를 가지고 연락한 그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거절했다. 아는 게 별로 없어요. 조사에 응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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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서야 다시 말하는 것은, 더 많이 알게 돼서가 아니다. 내 발언이 세상에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안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1947년 12월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내 기억의 불빛은 1951년 서울 종로구 연건동 298-9 외할아버지 집에서부터 켜져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헤어져 서로 떠났고, 나 홀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서 자랐다.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 계속 몰랐다면, 그냥 얼렁뚱땅 대학 졸업하고 세상에 무관심한 채 편하게 살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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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승관은 1년에 한 두 번은 나를 찾아와 충남 아산군 염치면 대동리 황골로 데려갔다. 그곳에 할아버지 할머니의 묘가 있었고 작은 아버지를 비롯한 일가 친척이 살았다. 서울대 금속공학과 1학년에 다니던 1966년 9월 추석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남양 홍씨 집안의 문자 유자(문유) 대부를 만났다. 황골에서 묵던 작은 아버지 집 동네에서 개울 하나를 건너야 하는 곳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내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드러낸 충격적인 비밀과 진실에 눈뜨게 됐다.

1979년 유럽으로 간지 얼마 안돼 남민전 사건이 터지면서 나는 직장을 잃었다. 한국에 돌아올 수 없는 처지였고, 파리에서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1992년 가을 프랑스 난민으로 살던 시절 파리 교외의 작은 아파트에 아버지가 찾아왔다. 가운데는 아들 용빈, 오른쪽은 아버지 승관. 본인 제공

전쟁이 나고 인민군에 끌려갔다가 거제포로수용소에 넘겨졌던 문유 대부는 반공포로 석방으로 황골에 돌아온다. 그러나 고향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아버지와 문유 대부가 이런 이야기를 나눌 때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대화가 조금 더 무르익고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1950년 9월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뒤 인민군이 물러갔다. 문유 대부만 마을에 없었다. 그해 추석에 부인과 어린 아들을 포함한 도합 열네명의 가족이 공회당에 갇힌 뒤 새지기에 끌려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오촌 당숙 승우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아버지 승완은 죽지는 않았으나 공회당에 끌려가 몽둥이 찜질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그렇게 하여 황골 새지기에서 80여명이 죽었다. 반공교육의 영향권 아래 있던 나로서는 이게 뭔가 싶었다.

더불어 알게 된 내 어린 시절. 일본에서 돌아와 아나키스트 활동을 하다 전쟁과 함께 도피생활을 하며 부인과 아이들을 황골에 맡겼던 아버지. 문유 대부의 가족처럼 공회당 창고에 끌려갔던 어머니와 나, 돌쟁이 동생 민화.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 동네 아주머니 누군가 나를 지목하며 했다는 말. 쟤 아버지는 빨갱이 아니에요. 살았다. 그러나 얼마 뒤 홍역으로 세상을 떠난 동생 민화. 민족평화를 소망하며 지었다는 그 이름 민화.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어머니의 고립감과 환멸.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문유 대부는 그럼에도 그 악의 소굴 같은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집밖에 나가면 가해자들 천지였다. 새로 장가 들었고 딸 셋을 낳았다. 아내는 가해자 집에 가서 품앗이를 했다.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가족들의 넋이라도 지켜야 한다며 고향을 지켰다. 갈 데도 없었다.

문유 대부는 왜 내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내가 서울대 교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일까.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었는데, 앞으로 뭔가 힘이 생길 것 같은 청년에게 의지하고 싶었을까. 그날부터 내 방황이 시작됐다. 대학을 다니기 싫어졌다. 낙제를 했고, 결국 그만뒀다. 몸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술 대신 담배를 하루에 세 갑씩 피웠다. 음악에 몰두했다. 모든 말들이 엉터리 수작처럼 들렸다. 가장 싫어한 소리는 라디오에 나오는 아나운서들의 청아한 목소리였다. 그 누구하고도 말을 섞기 싫어 물 한 모금을 입 안에 물고 다녔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 물음표가 비대하게 몸집을 키워 나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1966년 추석의 그 만남은 내 사유체계의 바탕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형해화시켰다.

1992년, 파리에서 망명 중인 아들에게 아버지가 찾아왔다. 나는 물었다. 왜 그때 동네 아이들까지 싹 다 죽였을까요? 1950년 9·28 수복 직후 황골처럼 가족 단위로 마을 사람들을 학살한 경우는 드물다. 한국전쟁에서 이런 류의 학살은 주로 1951년 1.4후퇴 직후 벌어졌다. 아버지는 구원(舊怨)과 텃세와 이권을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묵혀왔던 사적 감정, 가문끼리의 기싸움, 그리고 가구 수에 비해 좁은 땅. 숨기고 있던 알력이 이데올로기 대립과 전쟁이라는 기회를 틈타 순식간에 타올랐다고 했다. 단순한 복수가 아니었다. 상대 집안 씨를 말려야 했다. 그래야 그 집과 땅을 통째로 차지할 수 있었으니까.

1969년, 학과를 바꿔 다시 대학에 들어갔다.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1970년 11월 내 인생에서 두번째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은 반독재를 넘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했다. 그리고 1975년 4월8일 대법원의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선고와 18시간 뒤의 사형집행. 도무지 박정희 정권의 무도함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자꾸만 황골의 공회당에 동생과 함께 갇혀 떨고 있는 나를 바라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남민전에 들어갔다. 삐라를 뿌리러 거리를 쏘다녔다.

2023년 5월13일 충남 아산시청 광장에서 열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아산지역 발굴유해 봉안식에 참석해 헌화했다. 이날 황골 새지기에서 발굴된 2구도 세종 추모의 집에 안치됐다. 고경태 기자

나는 이념이 투철한 사람이 아니었다. 민족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니었다. 사르트르와 까뮈의 책을 읽으며 어느 새인가 실존주의에 경도되었다. 황골의 공회당에서 살아나온 아이는 부조리에 저항하지 않고서는 못 견디었다. 그렇다. 다시 복구한 내 사유체계의 줄기에 저항이 자리잡았다. 나는 늙어서도 말과 글에서 불온성을 지우지 못했다. 기존 체제에 대한 반항, 주류 가치관에 대한 의문과 회의. 나는 지금도 끊임없이 회의하는 존재다.

어떤 명분으로도 전쟁이 일어나선 안되는 이유는, 황골 새지기에서와 같은 일이 다시 벌어져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교양이다. 누군가는 ‘계몽’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계몽이라는 번역어는 주체와 대상을 나누는 것 같아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계몽’(enlightment)의 본래 뜻은 ‘이성의 빛’이다. 이성의 빛을 잃는 순간, 우리는 인간임을 포기하게 된다. 맹자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을 말했다. 다른 말로 하면 똘레랑스다.

우리는 이성의 빛을 품고 있는가. 황골 공회당 창고에 갇힌 아이는 아직도 불안한 눈초리로 세상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다.

<다음회에 계속>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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