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1-26

친일·매국 대명사 이완용, 그 행적 낱낱이 들춰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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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매국 대명사 이완용, 그 행적 낱낱이 들춰보니
최초입력 2016.08.16




▲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물밑 한국사-8] 독립지사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우리나라 대표 친일파인 이완용을 모르는 경우는 없다. 대한제국을 팔아먹은 이완용. 을사오적의 이름을 다 기억 못해도 그 대표 격인 이완용은 모두가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이완용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물밑에는 존재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이다. 그들의 논리는 대개 다음과 같다.

 이완용은 고종과 순종의 충실한 신하로 당시 내각총리대신으로 황제의 뜻을 대리하여 조약을 체결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이완용은 황실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대한제국이라는 국가는 황제의 것이기 때문에 이완용이 황실 이외의 것을 고려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이런 엉터리 말은 이완용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말이라 하겠다. 나쁘다고만 말할 것이 아니라 왜 나쁜지 알아야 한다.

 조조가 오나라를 공격해오자 신하들은 조조와 싸워서는 승산이 없으니 항복하자고 말한다. 손권은 혼란스러워진다. 이때 노숙이 나서서 말했다.

 "신과 같은 사람은 조조에게 항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군은 그러실 수 없습니다. 신은 조조가 지금보다 나쁘게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군은 모든 것을 잃고 돌아갈 곳이 없을 것입니다."

 근대의 대한제국이 아니라 전근대 시절의 선비도 이 정도의 식견이 있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이 맺어질 때도 고종은 승낙하지 않았으나 이완용이 강압적으로 이 일을 통과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후 헤이그 밀사 사건이 일어났을 때 고종 퇴위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07년 5월 23일 이완용은 참정대신이 되었는데, 이것은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을 퇴위시키려고 했지만 참정대신인 박제순이 이토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토는 이완용을 참정대신으로 추천했고 고종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참정대신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그해 7월 1일에 헤이그 밀사 사건이 알려졌다.

 7월 3일 이토는 이완용을 불러서 질책하고 고종을 만나 추궁하기에 이르렀다. 고종은 모르는 일이라고 말했고 이토와 이완용은 고종을 퇴위시키기로 결심했다. 이날 밤 이완용은 고종을 독대하고 양위를 말했다. 고종은 화를 내고 그를 물리쳤다.

 7월 6일 이완용은 내각회의를 소집하고 대신들을 이끌고 어전으로 나가 양위를 상주했다. 이완용은 16일, 17일 계속 양위를 상주했다. 18일에 고종은 이토를 불러서 담판을 짓고자 했다. 하지만 이토는 모든 일을 이완용에게 미루고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나중에라도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으려 한 것이다.

 이날 밤 농상공부대신 송병준은 고종에게 일본 천황과 일본군 사령관에게 가서 사과하라고 고종을 윽박질렀고 이완용도 계속 양위를 주장했다. 결국 고종은 보름을 끈 양위 협박에 19일 새벽 1시에 황태자에게 황제대리를 명한다고 말했다. 이완용은 바로 이날 황제대리의식을 집행했다. 원래 이런 일은 궁내부대신 박영효가 해야 하는 것인데, 박영효는 궁에 나오지 않아 버렸다. 그러자 이완용은 자신을 궁내부대신서리로 임명해서 의식을 해치워 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일제는 황태자의 황제 즉위를 축하하는 전보를 보냈다. 황제대리가 아니라 황제로 만들어버리려 한 것이다. 그러자 이완용이 바로 장단을 맞춘다. 22일에 이완용은 황제대리가 아니라 황제라고 부르자고 상주해서 황제 즉위를 기정사실화했다. 이 황제가 바로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다.

 그동안 껄끄러웠던 고종을 치워버린 통감 이토는 23일에 이완용을 불러서 내정까지도 모두 통감의 지휘를 받는다는 내용의 조약을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정미7조약, 한일신협약이라고 불리는 조약이다. 받아서 그냥 서명만 하는 수준인지라 다음날 체결되어 버렸다. 그리고 8월 1일에는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다. 시위 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이 해산에 항의해서 권총 자살을 했고 1대대 병사들은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한 뒤 일본군과 충돌했다. 제2연대 2대대도 합류했다. 남대문을 중심으로 펼쳐진 이 전투에서 대한제국군은 200여 명이 전사했다. 일본군도 100여 명이 전사했다. 해산된 대한제국군은 의병활동에 합류하였고 이완용은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헌병보조원에 한국인들을 채용하여 이이제이 전법을 사용하자고 한다. 1910년부터 3·1운동의 1919년까지 지속된 헌병무단정치의 기초가 이처럼 이완용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 1909년 7월 25일 대한민보 신문 만평으로 이완용이 며느리와 사통을 했다는 추문을 말장난한 것이다. 이 추문은 사실은 아니지만 당시 한국인이 이완용에 대해 가진 분노를 나타내고 있다.대한제국에서 무소불위의 이완용은 황실을 감시하도록 자기 집안 사람을 배치했다. 궁내부대신 이윤용은 형, 탁지부대신 임선준은 사돈, 승녕부총관(고종의 비서실장) 조민희는 처남, 승녕부시종 이항구는 아들이었다.

 1909년 7월 10일 이토는 통감에서 물러났다. 그의 송별연 때 그는 이완용에게 사법권도 일제에 넘기라고 명했다. 이완용은 11일에 자기 집으로 대신들을 불러 이토의 지시를 전했다. 탁지부대신 임선준, 학부대신 이재곤, 법부대신 고영희만 반대를 표하고 내각총사퇴를 결의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우물쭈물하기만 했다. 12일에 다시 회의가 열렸는데 이번에는 반대론이 득세하여 내각총사퇴로 총의가 모아졌다. 당황한 이완용은 13일에 통감 소네 아라스케를 만나서 단독으로 조약을 체결해버렸다. 날짜도 12일로 하루 전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대신들에게는 이 문제로는 회의를 열지 않겠다고 통보해버렸다.

이완용은 12월 22일에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 의사에 의해 칼에 찔렸다. 이완용은 중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1910년 2월 14일에 퇴원했다. 이재명 의사는 한일강제병합 이후 9월 13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무렵 가장 거대한 친일파 단체인 일진회는 한일합방을 청원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이 큰 공을 놓치게 된다고 여긴 이완용은 선수를 쳤다. 그는 1910년 8월 4일 비서 이인직을 통감부에 보내 합병을 제의했다. 일제 쪽도 놀랐다. "그물도 치지 않았는데 물고기가 뛰어들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순조롭게 진행될 줄 알았지만 이런 뻔뻔함에는 친일내각도 놀라고 말았다. 학부대신 이용직의 반대에 부딪쳤다. 이완용은 이용직을 일본 수해 위문사절로 임명해 도쿄로 보내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이용직은 이완용의 속셈이 뻔해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고종을 만나 합방을 진언했다. 고종은 이완용이 떠난 뒤 분에 떨며 말했다.

 "앞서 일진회가 합방을 제안했을 때 신은 죽어도 그런 매국의 거사는 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완용은 8월 22일 어전회의를 열어 합병안을 처리했다. 이용직은 속여서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영원히 일본인으로 살 것이라 생각했다. 75년 후에는 이씨 성을 가진 일본총리가 나올 거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했을 정도다.

 그는 이처럼 긴 세월 동안 나라를 조각 내 팔아먹었다. 황실에 충성하지도 않았고 나라에 충성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위해 살았을 뿐이다.

[이문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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