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01

12 자신만만 중국, 이제는 ‘충칭 모델’이다



▒ 연세대학교 국제관계학과 ▒




자신만만 중국, 이제는 ‘충칭 모델’이다


글쓴이 : 정승호 날짜 : 11-12-12 19:45 조회 : 860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1827 (558)

자신만만 중국, 이제는 ‘충칭 모델’이다
국유기업을 민영화하지 않고, 여기서 나온 수익을 정부 재정으로 삼아 복지 투자를 늘리는 중국 충칭 시의 해법이 비상한 관심을 모은다. 한·미 FTA를 막 통과시킨 한국 사회에도 커다란 함의를 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날치기 통과 여파로 온 나라가 시끌시끌하던 지난 11월25일, 부산 동아대에서 현대중국학회(회장 장수현)의 2011년 추계학술대회(‘2012, 중국의 세대교체와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가 열렸다. 정치·경제·사회 등 분과별로 진행된 논문 발표 중 성균관대 동아시아지역연구소 이홍규 박사의 발표(‘충칭 모델의 등장과 5세대 지도부의 정치적 비전’)가 눈에 띄었다. 한·미 FTA 정국 때문일까. 한국과는 정반대 선택을 해나가고 있는 중국 지도부의 지혜가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그가 발표한 ‘충칭 모델…’ 논문은 국유기업을 민영화하지 않고 되살려, 여기서 나온 수익을 정부 재정으로 삼아 복지 투자를 늘리는 한편 민간 기업의 활력까지 북돋우는 중국 충칭 시 모델을 소개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차기 지도자로 확실시되는 시진핑 국가 부주석을 비롯해 정치국 상무위원들이 충칭 모델을 잇달아 칭찬한 바 있다. <인민일보> 등 각종 매스컴에도 대대적으로 소개됐다. 충칭 모델은 2012년부터 시작되는 중국 5세대 지도부의 국정 방향으로 유력시되고 있기도 하다.

한·미 FTA를 막 통과시킨 한국 사회에 충칭 모델이 주는 함의는 대단히 크다. 한·미 FTA 통과 이후 한국 사회는 미국 거대 자본에 의한 공공 서비스 및 공기업 민영화를 주요 골자로 하는 ‘워싱턴 컨센서스’의 세계로 빨려 들어갈 것에 대한 시민의 우려와 저항이 극심하다. 이럴 때 민영화 없이도 국유기업을 살려내고 민생 경제의 활력까지 이끌어낸 중국의 경험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중국은 이제 충칭 모델을 중국 모델(베이징 컨센서스)로 정식화해 전 세계에 확산시킬 기세다. 미국 자본의 침략과 약탈로 황폐화된 중남미 국가의 FTA 실패담이 속속 드러나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충칭 모델은 그동안 국내에 단편적으로 소개됐을 뿐 학술 논문으로 발표된 것은 이홍규 박사 논문이 처음이다. 이 박사의 논문과 추가 인터뷰를 통해 충칭 모델의 기원과 내용, 전망 등을 정리한다.


충칭 모델이 처음 알려진 것은 2009년 초 홍콩 <아주 주간> 특집 기사(2월8일자)를 통해서였다. 대륙 출신 베테랑 특파원 지슈어밍(紀碩鳴)이 작성한 ‘충칭 모델이 중국 경제 반격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란 제목의 기사가 그 출발점이다. 그는 이 기사에서 “지난 30여 년 동안 개혁·개방 정책을 통해 중국을 성장시켜온 발전 모델은 대외무역, 외자 유치와 대기업 중심의 경제 발전을 추진했던 연해 지역의 발전 모델이었다. 그러나 2008년 세계 경제위기 이후 이러한 발전 모델은 우위를 상실하고 오히려 내수 중심의 산업구조를 가진 내륙 지역의 발전 모델인 충칭 모델이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기사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그 뒤 충칭 모델을 소개하는 각종 기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베이징 컨센서스’ 새롭게 창조

충칭이 거둔 성과는 놀랍다. 충칭은 최근 몇 년 사이 경제적으로 초고속 성장을 이루고 있다. 2010년 기준으로 충칭의 GDP 증가율은 17.1%로 전국 2위, 증가 속도는 전국 1위다. 그럼에도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 폭은 전국 평균보다 0.4% 낮다. 이런 성과가 개혁·개방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서부 내륙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점이 더욱 놀라운 것이다. 충칭의 성과는 연해 지역 중심의 발전으로 인한 지역 간 불균형과 빈부 격차, 도농 격차 문제 등으로 골머리를 앓던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 통치 위기를 해결해 나갈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했다.

충칭은 정치사회적 안정을 모범적으로 추진한 지역으로도 주목되고 있다. 충칭 당국은 2009년 6월부터 1년간 ‘범죄와의 전쟁’을 벌여 405개 범죄 조직을 척결하고 조직폭력배 등 범죄자 4425명을 잡아들였다. 또 비리 관료들을 구속함으로써 부패를 척결할 의지도 명확히 했다. 그 결과 충칭 시민의 큰 지지를 얻었고 전국적으로도 대중적 호응을 받았다.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9명 가운데 반수가 넘는 5명이 충칭의 발전을 공개적으로 찬양하고 충칭을 방문하기도 했다. 중국 공산당의 차세대 최고 지도자로 확실시되는 시진핑은 물론 역시 정치국 상무위원이 유력시되는 리위안차오(李源潮)가 공개 지지를 표명했다. 여기에 충칭 시 당서기인 보시라이(薄熙來)가 상무위원회에 진입할 것이 유력함에 따라 ‘충칭 모델’의 상당수 내용이 차기 5세대 지도부의 정치적 비전으로 합의될 가능성이 있다.

칭화 대학 리시광(李希光) 교수는 “충칭의 실천은 워싱턴 컨센서스를 타파하고 동아시아 모델을 뛰어넘었으며 베이징 컨센서스를 새롭게 창조했다”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충칭의 실천이 보여준 것은 자본주의 시장, 사회주의 계획, 국유경제, 민간경제, 글로벌 문화, 사회주의 문화가 공존하는 현대적 발전 모델이다. 자기 나라, 자기 도시의 실정에서 출발해 자신의 발전 방향을 찾아내는 것이므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중국 모델’의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한다는 것이다. 그는 충칭 모델이 향후 세계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신지식이 될 것이며, 세계 민중의 희망이 될 수 있다고 자부한다.

그렇다면 충칭 모델의 핵심 내용은 무엇인가. 뭐니 뭐니 해도 국유기업(공기업) 정책이 핵심이다. 무조건 민영화를 추진하는 신자유주의식 해법을 뒤엎은 것이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전까지는 중국도 결국 시장화·사유화·민영화로 갈 거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동아시아 위기가 한창이던 1997~1999년 중국도 신자유주의 영향으로 대대적인 민영화 조처를 취했다.

그러나 중국 지도부는 현명하게도 조대방소(大放小: 큰 것을 쥐고 작은 것을 놓는다)라 하여, 철강·자동차·화학·통신 등 국가 기간산업이나 부가가치가 큰 산업은 절대 민영화하지 않았다. 대신 작고 부가가치가 높지 않은 곳만 민영화했다. 큰 기업들에 대해서는 국가가 지배주주로서 경영권을 가지고 시장 경쟁력 있는 국유기업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자산공사가 국유기업 불량 채권 매입

충칭 시 국유기업들의 부채 규모는 무척 컸다. 이것을 민간이나 외국 자본에 팔아넘긴 게 아니라 충칭 시 정부 산하에 있는 자산공사가 은행 대출을 통해 국유기업들의 불량 채권을 매입하게끔 했다. 또한 국유기업을 땅값이 싼 곳으로 이전시키고 원래의 토지를 자산공사가 사들임으로써 국유기업의 자금력을 확충했다. 여유를 찾은 국유기업들은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생산원가도 낮추게 되어 제품의 품질 향상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국유기업이 이익을 보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자산공사의 불량 채권을 다시 사들여 털어버린다. 국유기업을 해외 자본에 팔아치울 경우 해외 자본이 행할 인수합병(M&A) 기법을 충칭 시 정부가 대신함으로써 국부 유출을 막는 발상의 전환을 한 것이다.

부품을 국내 생산으로 조달한 것도 충칭 모델의 특징 중 하나다. 연해 지역처럼 부품을 외국 수입에 의존하지 않았다. 내륙 개방 정책이라 하여, 이렇게 만든 제품을 해외 시장에 수출하는 새로운 가공무역 체제를 구축했다.

시진핑 부주석(앞)도 충칭 모델을 찬양했다. 중국의 대표적 신좌파 지식인 추이즈위안(崔之元) 칭화 대학 교수가 계산한 바에 따르면 2002~2008년 충칭의 국유자산 총액은 이런 방식을 통해 4배 증가했다. 그뿐 아니라 민영경제 역시 12개 성 가운데 가장 빨리 발전했다. 국유자산의 증대로 재정소득이 확대되어 기업의 법인세를 낮춰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이를 전부 공공시설 투자와 복지에 사용함으로써 주민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켰기 때문이다.

추이즈위안 교수에 따르면 충칭의 이 같은 실험은 1977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제임스 리드의 자유사회주의론과 이론적으로 닿아 있다. 1970년대 중·후반 위기에 봉착한 유럽의 사민당 및 노동당 정권의 돌파구 마련을 위해 등장한 자유사회주의론은 영국 대처 수상 등 우파의 민영화 노선에 대항해, 민영화 없이 국유기업과 민간 경제의 동시 발전을 꾀할 수 있는 정책을 제시했다. 미국 유학파만 득세하는 국내에는 그의 이론조차 소개되지 않았지만, 중국에서는 1992년 책이 번역돼 널리 읽혀졌다고 한다.

이 밖에 논자에 따라서는 농민공(농촌 출신 도시 노동자)을 도시민으로 받아들이는 호구제 개혁과 이들에게 공공 임대주택을 제공하는 대신 농지를 처분하게 한 부동산 정책에 강조점을 두기도 한다. 중공업 위주의 ‘갈색 경제’에서 ‘녹색 경제’로의 전환, 보시라이 충칭 시 당서기가 진행해온 범죄와의 전쟁, 관료부패 척결과 홍색가요 부르기, 마오쩌둥 어록 외우기 등 사회주의 이념 찬양에 방점을 찍는 논자도 있다. 보시라이 정책에 대해서는 중산층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진영에서 문화대혁명을 연상시킨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보시라이는 그렇지 않다고 해명했다.

충칭 모델의 등장 과정에 대해서는 후진타오 주석의 과학적 발전관이라는 비전을 보시라이 현 충칭 시 당서기가 받아서 만들었다는 게 공식 입장이다. 그러나 이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후진타오 주석은 집권하자마자 기존 성장 위주 경제정책의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조화사회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주장하며 이를 과학적 발전관으로 정식화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측근인 왕양(汪洋)이 2003년부터 당서기로 재직하는 충칭 시에서 이와 관련한 정책 패키지를 실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후진타오 주석은 그 후 ‘314 총체전략(충칭을 서부 지역의 핵심 성장 축으로 삼는 등 충칭 모델 초기의 정책적 지침)’이라는 지침을 직접 제시하기도 했다. 상하이 시장 재직 시 푸둥 지구 개발을 담당한 황치판(黃奇帆)이 충칭 시 부시장(후에 시장으로 승진)으로 합류해 경제정책을 전담했다.

충칭 모델이 대중의 관심을 끈 것은 2007년 보시라이 상무장관이 충칭 시 당서기로 오면서부터다. 그는 중국 8대 원로 중 한 사람인 보이보(薄日波) 전 부총리의 아들로 태자당과 상하이방 소속의 촉망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원자바오 총리와 사이가 틀어지면서 충칭 시로 오게 됐는데, 오자마자 조직폭력배 및 관료의 부패와 전쟁을 벌여 대중적으로 크게 주목받았다. 여기에다 때마침 불어닥친 미국발 금융위기가 미국 모델에 대한 대안적 발전관으로서 충칭 모델을 급부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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