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14

종교 없이, 더 충만하게 사는 사람들 : 책과 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종교 없이, 더 충만하게 사는 사람들 : 책과 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종교 없이, 더 충만하게 사는 사람들

등록 :2018-09-14 10:38수정 :2018-09-14 13:45

미국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먼
‘신 없는 사회’ 이어 ‘종교 없는 삶’
급증하고 있는 무종교인에 주목
“‘내세’ 없어 현실에 충실한다”

종교 없는 삶-불안으로부터 나는 자유로워졌다
필 주커먼 지음, 박윤정 옮김/판미동·1만8000원

영국 소설가 줄리언 반스는 구소련 작곡가 쇼스타코비치 시대의 소음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념 대결이라 지목했다. 그렇다면 현시대가 빚어내는 가장 큰 소음엔 뭐가 있을까. 탐욕스런 자본주의 체제, 고조되는 민족주의 등 다양한 것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를 종교로 꼽는 데 이견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만 봐도 퀴어집회에 몰려가 성소수자들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난민들은 이슬람교도들이니 내쫓으라 목소리를 높이는 기독교인들은 공포의 대상이다. 보수적인 교회는 극우세력의 마지막 숙주를 자처하고, 세습으로 아무리 지탄을 받아도 ‘우리끼리 일이니 간섭하지 말라’며 귀를 틀어막는다. 불교계에서도 학력 위조, 부동산 보유, 숨겨둔 자녀 의혹이 불거진 조계종 총무원장을 끌어내리기 위해 88살의 노스님이 41일 동안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을 벌인 게 엊그제 일이다.



부활주일인 지난 4월1일 오전 서울 구로구의 한 교회에서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종교라는 소음에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신 없는 사회가 더 점잖고 쾌적하고 살기 좋다”고 말하는 이야기는 귀를 솔깃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2012년 국내에 출간된 <신 없는 사회>(원서는 2008년 출간)는 미국의 사회학자 필 주커먼이 덴마크와 스웨덴 같은 스칸디나비아 국가에 사는 사람들을 인터뷰해 그들의 낮은 종교인구와 높은 삶의 질의 연관관계를 조명해 주목을 받았다. 중동, 아프리카, 남미처럼 신을 믿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보다 유럽, 북미, 일본처럼 종교적 성향이 약한 나라들이 대체로 번영하고 평등하며 안전하다는 사실이 이런 경향을 보여준다는 것.

그는 최근 저작 <종교 없는 삶>에서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한 이후 가장 많이 받은 비판이 ‘상관관계는 인과관계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종교를 믿지 않아서 살기 좋은 나라가 됐고, 종교를 믿어서 저개발국가가 됐다’고 단순하게 말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국가의 발전 정도에는 지리, 역사, 문화, 인구 등 다양한 요인들이 영향을 미친다. 게다가 오히려 자본의 축적을 정당화한 개신교의 논리가 자본주의의 기원이 됐다는 막스 베버의 유명한 주장도 있지 않나.

주커먼 자신도 이런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강조한다. 과거에 스탈린 치하 소련이나 폴 포트 시기의 캄보디아처럼 무신론주의를 표방한 끔찍한 전체주의 정권이 존재했다는 사실도 잊지 않고 상기시킨다. 다만 그는 세속주의가 역사적으로 계급제 폐지, 민주주의나 정교분리, 여권 신장 등 다양한 발전을 일구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유일한 인과관계는 아니지만 강한 상관관계는 있다는 말이다.

전작 <신 없는 사회>가 종교 없는 ‘사회’에 초점을 맞췄다면, 그의 신작 <종교 없는 삶>은 종교에 기대지 않아도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포커스를 맞춘 책이다. 주커먼은 약간만 시간대를 넓혀 잡으면 현대에 들어 종교가 약화되는 세속화가 놀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됐다는 점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100년 전 종교가 없다고 말한 사람은 캐나다에서 2%, 오스트레일리아는 1%, 네덜란드에선 10%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각각 30%, 20%, 40%에 이른다. 기독교 국가라 불렸던 미국에서도 25년 전(1990년)만 해도 무종교인이 10% 미만이었는데 현재는 20~30%로 급증했다.

주커먼은 특히 최근 미국에서 무종교인이 급증한 이유를 이렇게 말하는데, 한국 상황과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먼저, 보수적 공화주의와 복음주의 기독교 간의 밀월 관계가 정치적으로 진보적이거나 온건한 미국인들을 기독교로부터 소외시켜버렸다. ‘도덕적 다수’ 운동처럼 낙태 불법화, 동성애자 결혼 반대, 복지 재정 축소, 이스라엘 지원, 총기 규제 반대 등 정치적 이슈를 기독교와 강하게 결부시켜, 이런 주제에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을 기독교 바깥으로 밀어냈다. 또한 종교 활동의 핵심축이었던 여성들이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시간이 늘어나자 종교 활동을 할 여유가 없어졌다. 인터넷 발달로 종교에 의문을 제기하는 담론들이 더 쉽고 빠르게 퍼져나가고, 무종교인들이 연결되기 시작한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종교 없는 삶>의 저자 필 주커먼은 무종교인들이 “기적적이고 풍요롭고 덧없는 이 생이 유일한 생이다. 그러므로 이 생을 꽉 붙잡아 만끽하고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생이 끝나도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믿음을 공유한다고 말한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그렇다고 무종교인들이 크리스토퍼 히친스나 리처드 도킨스처럼 종교 자체를 해로운 질병으로 보는 전투적 무신론자가 될 필요는 없다. 주커먼은 이런 극단적인 관점에 반대하며, 오히려 종교의 효용을 인정하는 편이다. 종교는 삶의 의미를 제공해주고, 아픔과 고통·죽음에 직면했을 때 위안을 주며, 오랜 전통 속에서 쌓아온 삶의 지혜를 알려준다. 하지만 과학의 발달로 인간과 우주의 신비가 해명될수록, 종교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는 지체 현상이 거듭될 수밖에 없고,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필요한 건 종교를 박멸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외의 대안을 만드는 것이다.

종교 없는 삶을 산다고 하면, 자연히 이런 질문들이 나올 수 있다. 종교가 없는 사람이 도덕적 행동을 해야 할 이유는 뭘까? 종교공동체가 없으면 외롭지 않을까? 자녀를 제대로 교육할 수 있을까? 끔찍한 고난이 닥쳤을 때 극복하기 어렵지 않을까? 죽음이 닥쳐오면 두렵지 않을까?… 이처럼 종교 없이 산다고 했을 때 떠오르는 의문들을 주커먼은 여러 무신론자의 속 깊은 이야기와 자신의 경험으로 차근차근 해소해준다.

먼저 도덕. 그는 마음속에 자신을 지켜보다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심판하는 신이 없다고 해서 사람들이 비도덕적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사람들은 진화의 과정에서 자신이 속한 집단의 규칙을 지키는 것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터득해왔다. ‘내가 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 행하라’는 황금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들이 도덕적 행동을 하는 충분한 기반이 되어준다.

다음으로 고통. 질병이나 사고로 장애를 가지는 등 불운이 닥친 사람에게 신의 존재는 오히려 혼란을 줄 수 있다. 선한 신이 어떻게 이런 고통을 방치하는가를 묻는 질문은 오래된 질문이지만 여전히 답하기 쉽지 않은 문제다. 하지만 종교가 없다면, 지금 닥친 문제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집중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죽음. 많은 무종교인은 내세를 믿지 않고,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면 오히려 현재의 삶에 충실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이 왜 태어나고 죽는지 인류는 끝까지 완벽한 답을 찾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신비로 받아들이고, 그 신비 속에서 지금의 삶을 충만하게 누리는 것은 언제든 가능하다.

그렇기에 주커먼은 무신론자, 불가지론자처럼 ‘~가 없다’는 용어들은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완벽하게 표현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오히려 무종교인들을 인간과 세계의 신비에 감탄하고 이를 풍성하게 누리며 사는 ‘경외주의자’(aweist)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와 더 가깝다는 것이다. “경외주의는 궁극적으로 실존이 아름다운 신비이며,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경이의 원천이고, 창조와 시간, 공간 같은 실존의 심오한 문제들이 깊은 기쁨과 통렬한 아픔, 숭고한 경외감을 자아낼 정도로 강력하다는 개념을 압축하고 있다.” 이런 깨달음은 사실 법정 스님이나 테레사 수녀처럼 존경받는 종교인들의 생각과도 그다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종교가 시대의 소음이 돼버린 때를 일일이 열거해보라면 끝이 없을 것이다. 밖이 시끄러울수록, 종교의 안과 밖에서 묵묵히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려는 이들은 존재해왔다. 이런 참종교인들 사이의 거리는 오히려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보다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62089.html#csidx2b482c4988bf70c8f407f088803b6f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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