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신용벌 단상] 전봉준과 안중근: 동아시아에서 동북아시아로 < 신용벌 단상 < 여론 < 원대신문 < 기사본문 - 원광대학교 신문방송사

[신용벌 단상] 전봉준과 안중근: 동아시아에서 동북아시아로 < 신용벌 단상 < 여론 < 원대신문 < 기사본문 - 원광대학교 신문방송사


Sunghwan Jo
12 April at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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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상 후반부가 삭제됐는데, 복원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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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경제사학자 하라 아키라(原朗)는 2014년에 낸 저서『청일·러일전쟁 어떻게 볼 것인가: 동아시아 50년 전쟁(1894~1945) 다시보기』에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각각 ‘제1차 조선전쟁’과 ‘제2차 조선전쟁’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했다. 두 전쟁 모두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학자 정근식은 같은 2014년에 쓴 논문 「중국갑오전쟁박물관에서 다시 보는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 1894년 동북아시아전쟁의 개념화를 위하여」에서, “1894년 동북아시아전쟁은 동아시아가 전통적 중화체제에서 근대적인 일본 중심의 제국체제로 이행하는 계기였다.”고 하였다. ‘동학농민전쟁’이나 ‘청일전쟁’이라고 하면 한반도에서 동시에 진행된 두 전쟁이 마치 별개의 사건처럼 들리기 때문에 ‘동북아시아전쟁’이라고 부르자는 것이다. 
2014년은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이 일어난 지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같은 해에 한일 양국에서 새로운 주장이 제시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러한 관점의 한국사야말로 ‘트랜스내셔널 한국사’ 또는 ‘글로벌 한국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올해에는 또 어떤 연구가 나올지 기대된다.
* 이 글의 아이디어는 지난 2월에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의 연구진들(권의석, 유지아, 이정하, 허남진 교수)과 “동학혁명,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동북아시아 지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여러 차례 토론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이 외에도 2월 20일에 일본 교토에서 있었던 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와 류코쿠대학(龍谷大學) 안중근동양평화연구센터와의 공동학술대회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동북아의 미래공생」에 참여했던 경험도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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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벌 단상
[신용벌 단상] 전봉준과 안중근: 동아시아에서 동북아시아로
조성환 교수(원광대 HK+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기자명원대신문
입력 2024.04.12





한국인 중에 전봉준(1855~1895)과 안중근(1879~1910)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이 아버지와 함께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안중근과 전봉준은 대외적으로는 일본에 저항했지만, 대내적으로는 대립 상태에 있었다. 왜 그랬을까?

 두 인물 모두 유학자로 출발하였다. 전봉준은 전라도에서 서당 훈장을 하였고, 안중근은 황해도의 양반 가문 출신이다. 하지만 전봉준은 1890년 전후에 동학에 입도한 뒤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동도대장(東道大將)'으로 불렸다. 안중근은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1895년에 가톨릭 신자가 되어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유학자로 출발했지만, 한 명은 동학으로, 다른 한 명은 서학으로 각각 다른 길을 간 것이다. 기존의 질서가 깨지고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는 전환기에 생긴 <유학의 갈림길>이다. 유학자들은 동학농민군이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폭도라고 생각했고, 동학농민군은 지도층의 부패를 바로잡고 새로운 평등 사회를 수립하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무력 충돌이 1894년 봄에 일어난 제1차 동학농민혁명이다. 그래서 이는 사상적으로는 '유학과 동학 사이에 일어난 내전'으로 규정될 수 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해방공간의 좌우 대립보다 반세기나 먼저 이념대립이 시작된 것이다.

 한편 시야를 국외로 돌리면, 전봉준과 안중근 사이에는 또 다른 역사적 상황이 전개된다. 그것은 바로 '러시아'라는 존재이다. 안중근이 죽기 전에 뤼순감옥에서 쓴 「동양평화론」에는 그러한 언급이 자주 보인다. 거기에서 러시아는 황인종을 위협하면서 동북아의 평화를 해치는 포악한 백인의 나라로 서술되고 있다. 또한 1905년 러일전쟁의 원인은 일본이 청나라를 침범한 청일전쟁의 발단이라고도 지적하고 있다. 1894년의 제2차 동학농민혁명과 그와 동시에 일어난 청일전쟁 무렵만 해도 '러시아'니 '동양'이니 하는 인식은 대두되지 않았다. 이 시기의 한반도는 여전히 '동아시아' 패러다임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을 종주국으로 해서 주변국이 조공을 제공하는 대가로 제후로 책봉되는 '중국적 천하 질서'를 말한다. 그런데 1842년 난징조약으로 중국이 서양과 근대적인 조약을 맺음으로써 이 질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1898년에는 조선과 청나라가 「한청통상조약」을 맺음으로써 종속적인 조공책봉 체제가 대등한 조약체제로 전환되었다. 뿐만 아니라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중국의 자리를 대신하자 러시아가 일본을 견제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1905년에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러시아의 등장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범위가 〈동아시아〉에서 〈동북아시아〉로 확장된 것이다. 동시에 한국인들의 활동 무대도 넓어지게 된다. 안중근은 1907년부터 3년 동안 러시아에서 교육활동과 의병활동을 하였고, 니체나 톨스토이 같은 사상도 이 무렵에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왔다.

 이처럼 전봉준과 안중근이 살았던 시대는 국내적으로는 이념적 대립이 시작되고, 대외적으로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질서가 새롭게 형성되는 격동기였다. 그것은 결국 일본의 세계대전 참전으로까지 확대되었고, 일본의 패전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일본의 경제사학자 하라 아키라(原朗)는 2014년에 낸 저서 『청일·러일전쟁 어떻게 볼 것인가: 동아시아 50년 전쟁(1894~1945) 다시보기』에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각각 '제1차 조선전쟁'과 '제2차 조선전쟁'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했다. 두 전쟁 모두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이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전쟁'이나 '청일전쟁'이라고 하면 한반도에서 동시에 진행된 두 전쟁이 마치 별개의 사건처럼 들리기 때문에 '동북아시아전쟁'이라고 부르자는 것이다. 2014년은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이 일어난 지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같은 해에 한일 양국에서 새로운 주장이 제시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러한 관점의 한국사야말로 '트랜스내셔널 한국사' 또는 '글로벌 한국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이 되는 해로서 또 어떤 연구가 나올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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