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이은선 세월호 10주기의 오늘(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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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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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信연구소 오늘, 24.04.16화>
-信學하기이야기 10-
“세월호 10주기의 오늘(1)”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프랑스 드레퓌스 사건을 세밀히 분석한 글을 읽다가 세월호 10주기, 또 이번 총선에서 모든 고통과 죽음같은 시간을 견디고 다시 돌아온 조국혁신당의 조국을 보면서 2016년 세월호 2주기 때 쓴 글을 다시 들춘다. 오늘부터 몇차례에 걸쳐서 이 글과 더불어 세월호 관련 글들을 공유하고 싶다.
알 수 없는 신(神)을 품고 다가온 세월호,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를 수없이 외치며 정말 많은 사람이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그 앞에서 다시 새롭게 '믿음'(信)을 논하고자 했고, 그렇게 해서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10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 
몸(身)의 문제가 더 견딜만해졌고 분명해졌나? 믿음과 부활에 대해서 더 잘 말할 수 있게 되었나? 물음과 답이 몇차례 전회하는 가운데 10년이 지났다. 그런 가운데서도 가까이서는 손주들의 '탄생'도 몇차례 경험했다. 
이 글을 처음 쓴 것은 2016년 4월 4일 세월호 2주기를 맞이하여 <기독교세월호원탁회의>에서 주최한 <세월호의 증인, 부활의 증인>을 위해서였다. 이후 <에큐메니언>에도 실렸고, 나의 책 <세월호와 한국여성신학-하라 아렌트와의 대화 속에서, 2020, 동연>, 129-164pp.에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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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명멸(明滅)한다-4.16세월호의 진실을 통과하는 우리들 1>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5:15)
“진실의 힘은 진실을 밝히는 길이 얼마나 고된지 몸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가의 책임을 추궁하는 길이 얼마나 외로운지 겪어서 알고 있습니다.”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세월호, 그날의 기록> 2016.637 쪽)
“사실이 권력의 손에서 안전하지 못한 것은 분명하지만, 여기서의 핵심은 권력은 본질적으로 사실적 실재가 확보하는 안정성을 대신할만한 대체물을 결코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 사실은 완고성에서 권력보다 우월하다.”(한나 아렌트, <과거와 미래사이>, 2005, 347 쪽)
“마음이 지독하게 슬퍼봤던 자들은 아주 어렵게만 아주 어렵게만 기쁨이 태어난다는 것을 압니다. 그 기쁨에는 아무리 많은 감사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아무리 작은 기쁨도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팟방416의 목소리 시그널, 2016.01.13)
I.  2주기를 맞은 4.16 세월호 진실의 오늘
   “팽목항은 지옥이었다. 산지옥이었다.” “내 자식이 저 40m 물속에 있는데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상태, 거기 있는 게 뻔히 보이는데 꺼내주지를 못하는 상태, 그게 지옥이더라구요. 누구하나 우리한테 똑바로 얘기해주는 데가 없고...” 
   이렇게 “산지옥”, 지금 이곳에서의 지옥으로 비유되는 팽목항에서의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2년이 지났다. 그 사이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 만들어져서 2015년1.1부터 시행되었다. 그 특별법에 따라서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지난 3.28일(월)과 29(화)일 서울시청 8층 다목적 홀에서 제2차 청문회가 열렸었다. 제2차 청문회 첫째 날의 과제는 세월호 참사의 침몰원인과 그 당시 선원들의 조치가 어떠했나를 밝혀내는 일이었다. 권영빈, 장완익 위원 등 조사위원들은 정부가 발표한 당시 상황의 세월호 AIS(Auto Identification System, 선박자동식별시스템: 선박이 항해하면서 자기 위치를 자동으로 발신하는 장치) 항적 복원자료와 진도와 목포, 제주의 VTS(해상관제시스템) 복원자료가 혹시 누군가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조작되었고 편집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객관적 데이터 분석과 더불어 끈질기게 물었다. 
   하지만 해수부와 해양청의 증인과 참고인들(임병준 해수부 해사안전관리과 주무관, 김형준 해양경찰청 진도연안 VTS 센터장, 허용범 합동수사본부 전문가 자문단 단장 등)은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잘모르겠다”, “기계결함” 등을 말하면서 계속 부인했다. 어떻게 17-8노트(18.52km/1시간)의 속력으로 가던 130m나 되는 큰 배가 외부에서의 간섭이 없었다면 3초 안에 뱃머리의 각도를 좌우로 10도 이상씩 빠르게 바꿀 수 있는지, 왜 사고 당시 인근에서 계속해서 구조를 제안한 둘라에이스호와의 교신내용 중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진도 VTS 쪽에서의 대답에만 잡음이 끼어있는지 등의 의혹을 제기했다. 
그날 ‘선내 대기하라’를 안내방송을 한 강혜성 전 여객부직원은 자신의 대기방송이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으로부터 지시받은 것이라고 증언했으며, 또한 그 때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이준석 선장과 강원식 1등 항해사, 조준기 조타수, 그리고 선원들이 함께 조타실에 있었으면서도 대책회의는커녕 서로 대화조차 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2차 청문회 두 번째 날을 통해서는 선박 도입 및 운영과정에서 ‘한국선급’ 책임자들 및 항만청 관리들과 청해진해운의 밀착, 국정원과의 관계, 그리고 선체 인양과 그 이후의 증거보존 등과 관련해서 질문이 이어졌는데,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노골적인 비리, 태만, 거짓과 방해 등이 한껏 드러났다. 이리하여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세월호의 진실이 더 밝혀질지, 그리고 보존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과 답답함, 안타까움만이 더해졌다. 이와 더불어 특조위의 활동을 6월 30일로 한정하려는 정부와 국회에 대해서 올해 말까지 활동기간을 연장하기 위한 특별법 개정안을 제출하였고, 또한 해양경찰 지휘부에 대한 특별검사임명을 요청했지만 4월 13일의 총선에 이긴 민주당조차 거기에 대해 주목하지 않고 있다. 
지난 청문회에서도 드러났듯이 해수부가 세월호 인양을 특조위 활동이 끝난 이후(7월)로 잡고 있고, 그러면서도 아직까지 세월호 진실의 핵심증거인 선체를 인양 한 후에 어떻게 보존하고 관리할 지에 대해서 “계획이 없다”고 한 것 등은 “세월호는 인양되지만 ‘진실규명’은 침몰할 위기에 놓여있는 것”이라는 지적이 현실이 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혹을 강하게 품게 한다. 특조위는 청문회에서 쏟아진 각종 의혹과 그동안 접수된 조사신청 건수 중 176건의 진상규명을 남겨두고 있다고 하지만 6월30일까지는 그 조사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예견할 수 있다.
II. ‘사실적 진리(factual truth)’와 정치의 충돌, ‘생지옥’의 다른 말
   “사실적 진리는, 만약 그것이 특정 집단의 이득이나 쾌락에 반하는 경우라면,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 심한 냉대를 받는다.” “... ‘진리의 반대는 수천 가지의 모습이고 무한한 (활동의) 장을 가지고 있다.’ 방향 감각과 실재감을 얻기 위해 의존하는 모든 사물의 소름끼치는 동요(動搖)에 대한 경험은 전체주의 통치하에 있었던 사람들의 공통적이고 가장 생생한 경험 중 하나이다.” 
   이 말들은 아렌트가 지금으로부터 4백여 년 전 ‘르네상스(renaissance, 재탄생)’ 시기에 프랑스의 몽테뉴가 한 말을 20세기 나치나 스탈린 등의 전체주의를 돌아보면서 다시 음미한 것들이다. 오늘 세월호 참사 청문회를 지켜본 유족들과 국민들도 크게 공감할 이야기들이다. 세월호 가족들은 세월호의 진실이 세 가지 차원에서 변형되고 왜곡되어 지는 것을 말한다. 즉 먼저 왜 그런 참사가 일어났는지, 다음으로 그것이 일어난 후 왜 그렇게 구조를 하지 못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원인들을 규명하고 진실을 알려는 자신들의 노력과 고통이 왜 그렇게 짓밟혀지고 왜곡되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고 당시 팽목항에서 경험한 “생지옥”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고, 그들이 왜라는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진실을 알려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한, 사고 이후의 매일의 삶도 역시 “지옥”임을 밝힌다.
“지금 현재 가족들은 사고 초기나 지금이나 생활은 거의 똑같아요. 지옥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때도, 그때는 진짜 생지옥이었고, 지금은 지옥, 그보다 조금 좀 나아지기는 했으니까. 언론, 그 다음에 바라보는 시선, 그 다음에 압박, 아직도 이런 게 저희들한테는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가족들한테는. (일 년 내내 지옥을 살고 계신 거군요.) 그러죠. 계속 트집을 잡아서 끌어내릴라 그러고, 없앨라 그러고, 지울라 그러고, 가족들은 어떻게든지 진실규명 할라고 노력을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결국에는 서로 싸우다 보니까 지옥이 되는 거죠. 그렇게. 가족들한테는.”
   여기에 더해서 이번 416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내가 뒤늦게 알게 된 더 충격적이고도 끔찍한 사실 하나는 이런 정치와 진실의 충돌이 단지 유족들을 상대로 해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인간성의 지극하고도 자연스러운 표출이라고 여겨져 오던 자원봉사자, 그것도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고서 팽목항에서 희생자를 수습해 오던 민간 잠수사들과의 관계에서도 벌어진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 김관홍 잠수사의 말에 따르면, 그는 2014년 4월23일 팽목항에 먼저 가있던 후배 잠수사로부터 그곳에 바다로 들어갈 수 있는 잠수사들이 너무 적으니 빨리 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아내의 허락을 받고” 다른 동료들을 더 모아서 그곳으로 급히 내려갔다. 당시 언론의 보도는 사고현장에 500여명의 잠수사들이 투입되었다고 했지만 막상 가보니 선내로 진입할 수 있는 잠수사는 7명뿐이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는 7월9일 해경이 “달랑 문자 하나로” 그만 철수해 달라고 할 때까지, 즉 배안에 희생자가 11분 더 남아있었지만 그들의 요구로 어쩔 수 없이 철수해야만 했을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선내로 진입하며 죽음을 넘나들면서, 온갖 비리와 비인간성을 겪으며 열악한 상황 속에서, 동료 민간잠수사의 죽음도 목도하며 스스로도 다리부상을 당하면서 일했음을 전한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들은 “죽음과 맞서서 일하고 있는데” 국회의원들이나 권력자들은 와서 자신들을 배경으로 사진 찍고, 브리핑 받고, 그들이 한 마디씩 던진 말들을 해수부와 해경은 전문가인 자신들에게 다시 명령하고, 심지어는 유족들이 수고한다고 보낸 음식물조차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면서 잘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면서 그 시간들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더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해경이 바로 민간 잠수사 이광욱씨의 죽음을 자원봉사자들인 자신들에게 뒤집어씌우고, 2015년 9.15일 국정감사에서 해경본부장이 위증까지 하면서 이들을 임금고용인으로 둔갑시키며 절망과 죽음에로 몰고 간 것이다. 또한 바다 속을 넘나들며 290여구의 시신을 수습해오는 가운데 얻은 부상을 공무원들의 책임 떠넘기기로 제 때에 치료해주지 않아서 이들 중 누군가는 절망으로 자살하고, 누구는 신장투석까지 하는 지경으로 병이 깊어졌고, 김관홍 잠수사 자신도 더 이상 잠수 일을 할 수 없게 되어서 대리운전으로 생계를 벌며 자식들과 더불어 죽으려고까지 했다고 고백한다. 동료 자원봉사 잠수사의 죽음이 ‘업무상과실치사’로 덧씌워져서 억울한 재판을 받아온 선배 공우영 잠수사에 대한 판결이 2015년 12.7일 17개월이나 걸린 지난한 싸움 끝에 ‘무죄’로 판명되었지만, 그리고 자신은 그 일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증언을 해서 위증을 정정해 낼 수 있었지만, 수개월동안 생업까지 뒤로하고 세월호의 구조에 힘을 쏟던 이들에게 남겨진 것은 “억울함과 외로움, 그리고 아픈 몸뿐이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국체와 거기서의 사람들은 뼛속까지 썩어있었고, 그 타락한 관료주의와 보신주의, 일상화된 거짓말과 뻔뻔함은 정말 혀를 내두를 지경임이 드러났다.
정숙자
이은선교수님, 다시 읽어도 가슴이 아픕니다. 결국 한 나라의 지도자가 이 큰 사건 때문에 희생당한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지않고 오히러 무관심했다는 것은 이 참사가 계회적인 참사라는 루머를 근정하고 있는것 같이 느껴집니다. 사탄의 지배를 당한 현지도자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소감입니다.
3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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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예 선생님 그렇지요. 저도 다시 읽으면서 너무도 끔찍한 기획이었기 때문에 문대통령도 밝힐 수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민중과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거지요...
3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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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1 d  · 
<한국信연구소 오늘, 24.04.19 금>
-信學하기이야기 11-
"세월호 10주기의 오늘 (2)"

지난 화요일 10주기 날 올린 글의 두번째 부분입니다. 어제 시청 서울시의회 앞에서의 <그리스도인 월례기도회>에서 여러 어머니들을 다시 만났습니다. 예은이 어머니, 지성이 어머니, 시찬이 부모님 등...
예배에 참석하는 세대들이 많이 젊어진 것을 보고 그래도 안도했습니다. 여성신학자 후배들도 반갑게 만났습니다. 이렇게 우리 삶은 다시 세월호 10주기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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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명멸(明滅)한다-세월호의 진실을 통과하는 우리들 2>
III. 그러면 교회는 어떠한가? 생지옥을 통과하며 다시 ‘신(神/信)’을 증거해내는 사람들(身)
   “다 대통령께 보고하기 위한 것” “영상과 더불어 청와대는 구조 인원수를 실시간으로 보고하라고 요구했다. 구조 인원을 옮기는 장소도 거듭 물었다. 대통령 보고에 한 줄을 더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기울어지는 배 안으로 뛰어들어서 승객들을 구조해야 할 해경은 배 밖에서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서 해경 지휘부에 보고했다. 123정 정장 김경일, 항해팀장 박성삼, 행정팀장 이민우는 사고현장으로 출동한 후 세월호 침몰 전까지 인터넷(IP접속)에 접속했다. 
   인권연구가 조효제 교수에 따르면 미국 정치학자 러멜(R.J. Rummel)은 국가가 인간의 생명을 얼마나 파괴시킬 수 있는지를 평생 연구하면서 ‘데모사이드(democide, 민살民殺)’라는 개념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집중된 국가권력이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인권침해 주범”이라고 한 그의 지적을 상기시켰다. 나는 이번 세월호 참사도 그 범주에 들어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우리는 이번 참사와 더불어 대한민국에서 ‘국가’의 위격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목도하였다. 그런데 그 국가의 개념과 더불어 유사한 정도로 크게 흔들리고 있는 존재가 ‘교회’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 특히 그렇게 민살을 의심받을 정도로 전체주의화된 국가권력에 이의를 달지 못하고 하수인과 충복처럼 지내고 있는 개신교는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 이번 참사의 직격탄을 맞은 사람들이 있어도 거기에 대해서 외면하고, 왜곡하고, 그만 잊어버릴 것을 강요했다. 그러자 많은 유족들이 그곳을 떠났고, 깊은 방황에 들어갔으며, 근본에서부터 자신들의 신앙을 검토해보기 시작한 것을 우리가 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가운데서 마치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서 열매를 맺는다 (이사야 11:1)’는 언명대로 그 비극을 넘어서 오히려 새로운 신앙과 또 다른 양상의 초월과 새로운 신앙공동체가 싹터오는 것을 본다. 더군다나 그것이  어떤 외부적 중보자를 통해서라기보다는 바로 세월호 가족들 안에서, 그들 스스로의 탐색과 질문을 통해서, 세월호의 진실을 함께 통과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잉태되고, 찾아지고, 실천되고 있다는 것이다. 416의 참사에서 딸 예은이를 잃은 416가족협의회의 집행위원장 유경근 씨는 지난 3.17일 ‘4.16 세월호참사 2주기 전문가 토론회’를 기해서 다음과 같이 언명했다.
“유가족이 중심이 되게 해 달라” “앞으로 세월호 참사를 해결해 나가는 일에서 유가족들은 중심에 있을 것이다. 상징적인 중심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 운동을 이끌어가는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이 참사의 당사자들이 그들의 종교적 신앙(信)과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 신(神)의 새로운 정의에 대한 답을 끄집어내려는 일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약 80%의 유족들이 다니던 신앙공동체를 떠났지만, 그들은 다시 새롭게 예배와 기도회를 구성하여 모이고 있고,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를 활성화시키고 있으며, 그리고 그들이 기성교회와 신학에 던지는 물음들은 참으로 급진적이어서 기존의 섣부른 인습적 대답으로는 더 이상 그들에게 다가가기 힘들다는 것을 잘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광화문 예배에서 다시 만난 자리에서도 나를 포함한 기존 신앙인들의 입을 다물게 한 세월호 유족 이창현 엄마 최순화씨는, “그동안 교회에서 배웠던 모든 것은 교회 건물 안에서만 적용되던 것이었다. 오십 평생을 의지했던 하나님이 힘을 못 주시더라. 사고 후 교회는 박차고 나왔지만 하나님을 떠나지는 못했다. 오히려 사람들을 만나며 힘을 얻었다. 이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또 다른 하나님이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대답이 기존의 신앙체계와 교회체제, 거기서의 독점과 편협, 왜곡과 거짓을 깨면서 큰 균열을 일으킬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서 내가 더 생생하고 분명하게 그들에게서 새로운 신앙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경우는 기존 좁은 의미에서의 그들의 종교적 발언에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 나름의 생생한 삶의 서술, 특히 어떻게 그들이 오늘 세월호의 진실과 더불어 나름대로 씨름하며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이야기해주는 보편적인 삶의 서술에서이다. 즉 나는 그들이 그들 고유의 방식으로 생지옥을 살아내고 있는 이야기들 속에서 그들의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서 그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이 오늘 한국사회와 한국 믿음(信)이 총체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또 하나의 위기에 대한 돌파구를 찾아주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철학적 성찰이 세월호는 “신(神)〔내 앞에 있는, 이해 불가능한 초월자〕을 참으로 많이 닮았다”고 한 말을 이해하고, 또한 그러한 가족들의 고백이야말로 서구 사회학자가 예견한 탈근대적 세계시민사회에서의 “자기만의 신(der eigene Gott)”의 모습을 잘 닮아있다고 여긴다. 
   2학년 1반 김민지양의 아버지 김내근씨는 어릴 적 부모의 부재로 할머니 손에서 자랐고, 어렵게 가정을 이루었지만 둘째아이 민지가 한 돌도 되기 전에 아내가 집을 나갔다. 그래서 아이들을 홀로 보살펴왔지만, 하루에도 네다섯 번씩이나 딸과 통화를 할 정도로 잘 키워냈다. 하지만 이번 참사로 딸 민지를 잃었다. 그 아버지는 그러나 이후의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안산의 분양소를 지키는 일을 도맡아왔고, 매 아침 눈뜨자마자 하늘공원에 있는 딸에게 아침인사를 하러가서 일상을 나누고 손으로 온기를 전하고 온다고 한다. 돌아와서 분양소를 지키면서 어느 날 노숙과 진실규명 싸움으로 지치고 병든 다른 유족 아빠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거기서 ‘416클럽’이라는 축구모임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 일로 자기가 평소 가장 많이 느끼며 지내왔던 “혼자라는 느낌”, “내팽겨진 느낌”을 다른 아빠들도 아직 홀로 집에 떨어져 있으면서 겪고 있지 않을까를 염려하고, 그래서 축구동아리로 그들을 밖으로 끌어내고자 했고, 그런 그는 어떤 경우에도 평생 딸의 사망신고를 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축구활동을 통해서 “그동안 우리를 도와주신 분들에게 고맙다는 표시를” 할 수 있다고 감사해 한다. 
   2학년 5반 김건우군의 어머니 김미나씨는 인천에서 태어나서 여상을 나와 안산의 컴퓨터 부품회사에 취직이 되어 안산으로 왔다. 결혼을 하고 건우와 민우 두 아들을 낳고서 아이들과 그 친구들에게 맛있는 것 해주는 일을 큰 기쁨으로 여기면서 지극히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오던 그녀에게 큰 아들 건우가 사고를 당한 것이다. 그녀는 만약 자신들이 “조금만 더 힘이 있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면, 그런 사람의 아이가 한 명만 있었어도” 그렇게 “휴지통에 버려진 것 같”이 방치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냥 보통사람들이잖아요. 그냥 보통사람들만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는 그녀는 그래서 그해 여름에 “神같은 존재인 교황님”이 오신다기에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무언가 해줄 수 있다”고 무척 기대를 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교황이 떠나고 나서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에게 “시체장사”라는 말까지 하는 한국사회를 보면서 그녀는 크게 반성했다고 한다. “이건 아니구나. 어차피 이거는 우리가 해야 되는 거구나. 내가 해야 되는 것이구나. 나말구는 할 사람이 없구나. 내 아이 일을 왜 지금까지 다른 사람한테 기대하고 해달라고, 그렇게 부탁은 아니어도, 내가 스스로 나섰어야 하는데 왜 그랬을까?”라고 크게 깨달은 것이다. 이후에 그녀는 건우가 금요일마다 집에 데려와서 함께 간식을 먹곤 했던 다섯 친구들의 엄마아빠를 만나서 그들과 “오인방”이라는 모임을 만들었고, 이들과 더불어 진상규명을 위해서 거리로 나가면서 그 자식들이 서로 약속했던 것처럼 자신들도 일생동안 “아이 같은 마음으로 순수하게” 한 가족으로 같이 살아가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들은 아이들의 이름으로 기부금도 내고, “몸으로 봉사해보자”라고 하면서 함께 요양원 청소봉사도 다닌다. 그렇게 그녀가 지금까지 6백일이 넘도록 스스로 조사도 하고, 알리는 것도 하고, 시위 현장에 나가서 캡사이신 세례도 맞고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아들 건우가 자식을 구해내지 못한 엄마를 용서하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노심초사하면서 아이에게 너무도 ‘미안(未安)’해서 그 이름도 맘껏 크게 부르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참사 이후 지난 2년의 시간을 고백하는 엄마/아빠들은 하나같이 미안하고, 안타깝고, 자신의 잘못과 부족함을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큰 고통으로 아이들 사망신고를 평생 하지 않을 것이며 가슴에도 뭍지 못하겠다고 할 정도로 아프면서도, ‘어떻게 진실규명과 진상규명, 거기서 더 나아가서 안전사회를 이루겠다고 하며 싸움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지’를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두 번 다시는 이런 저희와 같은 일을 안 겪었으면 좋겠어요. 저희들이 겪어보니까 이건 사람이 살 짓이 아니예요. 사람이 살면서 겪어야 할 것은 안되요. 저희 한번으로만 족했으면 좋겠어요. 아이를 잃고 부모들이 길거리에서 싸운다는 자체가 증말 지옥이예요, 너무 힘들어요. 정부 방해, 언론의 방해, 바라보는 시선, 너무 힘들고 너무 외로워요.” 
   416가족협의회 진상규명분과의 일을 맡아서 요사이는 배 인양과 관련하여 어떻게든 가족들이 거기서 소외되지 않도록 동분서주하며 핸드폰까지 털리는 경험을 한 준형이 아빠는 “난 그냥 야채장사 하던 준형이 아빠라니까”라고 외친다. 그런 준형이 아빠, 장훈씨에게 ‘어떻게 그렇게 모두 그저 “일상생활을 영위하시던 분들이” 이 참사가 나면서 그처럼 발 빠르게 팀을 만들고, 대표를 세우고 하는 등의 놀라운 대응을 할 수 있었느냐’라고 묻자, 그 대답은 “절박함이죠. 절박함”이라고 밝힌다. 아들이 죽었는데 “왜 죽었는지를 모르겠는거야. 이유를 알아야 될 것 같애. 그런데 이유를 알라니까 더 파고들게 되고, ... 그 배가 왜 그렇게 넘어갔는지 이유를 모르겠고, 왜 한 놈도 들어가서 구해주지를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은 거예요. 단순하게.” 라는 응답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그렇게 애쓰는 이유가 있는데, 나중에 죽어서 준형이한테 “한 가지 얘기를 해주고 싶어서” “너를 위해서 이만큼 했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았어”라는 말을 해줄 수 있기 위해서라고 한다. 왜냐하면 생전에 그에게 “해준 것이 너무 없어서”.
   이렇게 참으로 평범하게 일상을 살던 사람들이, 거창하게 삶에서 어떤 ‘뜻’이나 ‘원리’, ‘원칙’에 대한 의식도 없이, 부한 것도 아니고, 학력이 높은 것도 아니며, 가정생활이 항상 평탄했던 것만도 아닌, 오히려 나름대로 아픔을 많이 겪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지금의 진실을 위한 끝없는 행진의 사람들로 변환될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들이 ‘불가사의한 초월자’의 모습을 닮은 세월호 앞에서 그 불가사의한 불가능성에 맞서서 그렇게 용기 있게 도전하고 행위하는 사람들이 되었을까? 그래서 정부가 수천 명의 경찰병력과 온갖 비밀경찰의 정보력과 심지어는 백색테러의 방식도 서슴지 않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서도 도무지 “가족들이 뭉쳐있는 것을 못보겠다”고 할 정도로 배척받고 억압받는 대상이 되었을까? 앞에서 소개했던 김관홍 잠수사는 한 시간이 넘는 고통에 찬 긴 토로의 시간을 마무리하면서 다음과 같은 분명한 말로 자신들의 명징한 분석과 알아차림을 언표한다. 이 뚜렷한 언명 속에 나는 우리 시대의 희망을 본다.
“난 정권의 테러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이건 어떤 종류의 테러라고 생각하시는지?) 민초들에 향한 지배층의 어떤 욕심과 권력, 그걸 유지하기 위한. 내가 미친 건가요? 이웃, 사회단체, 416연대 이런 분들이 난 왜 있어야 되는지 몰랐어요. 지금 이분들은 정화, ‘공기’와 같은 일을 하는데 공기의 중요성은 우리 모르잖아요. 안보이고 못느끼니까. 제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 자체가 웃긴 거예요. 저는 이런 말을 할 놈이 아니라니까요, 사실.”
   이런 고백을 한 김관홍 잠수사는 구조봉사 작업 이후의 그 고통에 찬 시간을 보내고서도 요즈음에 다시 유족들이 “상식을 찾기 위해 싸운다”는 말과 함께 배 인양 과정을 지켜보기 위해 진도 동거차도-참사 현장 바로 “10분 거리(1.6km)”-에 쳐놓은 움막을 방문해서 지난 일을 되돌아본다. 그러면서 당시 사람들이 왜 “구하지 않고 상황 보고(報告), 보고, 보고”만 했는지, 거기서 먼저 할 일은 “본능적으로”, “교육을 받든 받지 않던” 구조였다는 것을 누구든지 아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를 안타깝게 묻는다. 그런데 나는 이처럼 대한민국의 보통사람들이 “상식”을 말하고, “본능”과 ‘교육’을 짚으면서 왜 그러한 어처구니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는지를 안타깝게 묻는 물음 속에서 한 새로운 신의 형상과 새로운 방식의 믿음의 길이 표출되는 것을 본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세월호의 진실 앞에서 치를 떨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 진실을 드러내는 일에 자신들의 남은 생과 모든 것을 걸 결심을 하게 만들면서 용감하게 그 길에 나서게 했다. 그러므로 나는 이 물음과 답의 언표야야말로 그들의 가장 고유한 신앙(信) 이야기이고 ‘하나님(神) 이야기(God-talks)’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참으로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방식(身)으로 새로운 믿음의 길을 가려는 의미라는 것이다; “약속했어요. 니가 올라오고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술을 입에 안대겠다” “나중에 아이들을 만났을 때 떳떳하게, 떳떳하게 살다가 내가 왔다. ... 그런 말을 하기 위해서 유가족들은 다 개인적 윤리를 가지신 것 같아요, 세월호 참사 이후로”, “자기 개인만의 나름대로의 기준을 정해서 아이들을 만날 준비를 저희들이 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이러한 고백과 서술들이 전통의 인습적 신을 무색하게 만들 것임을 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인습적 신의 죽음을 알리고, 대신에 각자의 ‘내면의 신’이 깨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 보편의 ‘상식’과 ‘평범’과 ‘교회 밖’에서 구원이 일어나고 있음이 널리 전파되고, 그래서 거기서 지금까지의 외부적, 타율적 신에 근거한 구원론과 교회론, 성직체계 등이 급속하게 깨어져 나갈 것은 자명하다. 거기에 기대었던 모든 권위들이 그 일을 두려워하는 것도 또한 분명한 일이다. 지금 한국 땅에서 416세월호의 진실과 더불어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런데 사실 예수도 자신의 전통과 더불어 유사한 일을 겪었고, 기독교의 등장도 그 열매이고, 그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 일을 추동시켰다.
정숙자
이은선교수님, 새월호신학 잘 읽었습니다. 신 앞에 인간을 희생물로 해서 누군가를 사린다는 신앙도 우리 나라에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특히 아직 순진하고 험이 없는 제물을 바치는 이야기들 말입니다. 자기 어머니도 자기 아버지도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경험이 있을 경우 인간의 생명의 귀중함을 망각한 사람일 경우 더 그런 미신이 오히러 받아들이기 쉽겠지요! 교수님의 글이 제 상상을 더 확인시켜줍니다. 슬픈 우리 나라의 현실입니다. 새월호 가족이 살 길은 기독교가 아니라 그들의 생명중시의 삶이라 생각합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誠이 악을 이기는 길이지요! 감사합니다.
19 h
Reply
이은선
이렇게 깊게 읽어주시고 또 긴 답글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예 희생제물 이야기는 참아픈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극복해가는 과정이 역사가 인간화되가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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