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5

무라야마 도미이치 - 위키백과, 村山 富市, Murayama Tomiichi

무라야마 도미이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무라야마 도미이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무라야마 도미이치
村山 富市
내각 공보실에서 공표한 초상
내각 공보실에서 공표한 초상
일본의 제81대 내각총리대신
임기1994년 6월 30일~1996년 1월 11일
전임: 하타 쓰토무(제80대)
후임: 하시모토 류타로(제82·83대)

신상정보
출생일1924년 3월 3일(100세)
출생지일본 오이타현 오이타시
정당일본사회당사회당 좌파→일본사회당→사회민주당
배우자무라야마 요시에

무라야마 도미이치(일본어村山 富市, 1924년 3월 3일~)는 8선 중의원 의원과 제81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이다.

생존중인 전직 총리대신 중에서 최고령으로 유일하게 다이쇼 시대에 태어났다. 또한 역대 총리대신 중 히가시쿠니 나루히코와 나카소네 야스히로에 이어 세 번째로 나이가 많다.

생애[편집]

어린 시절에서 정계 입문까지[편집]

쓰키지의 인쇄 회사에서 일하던 시절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1924년 오이타현 오이타시에서 어부의 6남으로 태어났다. 무라야마의 아버지는 어선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비교적 여유가 있었지만 무라야마가 14살 때 아버지가 죽으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그 때문에 무라야마는 신문 배달 등을 하면서 학교를 다녀야 했다.[1] 1936년 오이타시립 나카시마 심상소학교를, 1938년 오이타시립 오이타 고등소학교를 졸업한 뒤 도쿄에 가서 낮에는 기계 공장이나 인쇄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도쿄시립상업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1943년 구제 메이지 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했는데 이때 마루타니 가네야스의 권유로 호즈미 고이치가 운영하는 반전 운동 단체에 가입했다.[2] 1944년 학도병으로 징집돼 징병검사를 받고 육군 제23보병연대에 이등병으로 입대했다. 1945년 8월 15일 간부후보생으로서 육군 군조 계급 때 종전을 맞이한 뒤 복학하여 이듬해 졸업했다.

1948년 오이타현 어부청년동맹 서기장이 되었다. 어업협동조합 설립 등의 성과를 내고 어업청년동맹이 해산하자 오이타현 공무원 노동조합 서기로 활동했다.[3] 1951년 오이타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1953년 요시에를 만나 결혼했으며 1955년 오이타시의회 의원 선거에 일본사회당 공천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2선 시의원을 지냈으며 1963년에는 오이타현의회 의원 선거에 당선돼 내리 3선 현의원을 지냈다. 1972년 12월 총선에 출마해 당선됐다.

국회대책위원장과 사회당 위원장[편집]

1991년 7월 다나베 마코토가 신임 사회당 위원장이 되고 무라야마가 국회대책위원장에 취임했다. 1992년 「유엔 평화유지 활동 등에 대한 협력에 관한 법률」안의 통과를 막기 위해 국대위원장으로서 당을 진두지휘했지만 자유민주당공명당민사당 등 3당이 연립해 6월 중의원을 통과했다. 하지만 국대위원장으로 재임하면서 자민당의 가지야마 로쿠스케, 공명당의 간자키 다케노리 등 다른 당의 국대위원장과 연결 고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1993년 1월 다나베가 위원장에서 물러나고 야마하나 사다오가 새로 위원장이 되었지만 무라야마는 국대위원장에 유임했다.

리크루트 사건과 도쿄 사가와큐빈 사건으로 당세가 줄어든 자민당이 7월 총선에서 과반수를 얻지 못하자 사회당을 포함한 7개 야당이 연립하여 정권을 빼앗았다. 그렇게 8월 비자민·비공산 연립 정권인 호소카와 내각이 수립됐다. 야마하나는 정치개혁담당상이 되어 입각했지만 다음 달에 사회당의 총선 패배 책임을 지고 위원장에서 물러났다. 후임 위원장은 위원장 대행 구보 와타루가 유력시되었으나 구보는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고 무라야마가 이토 마사토시를 꺾고 위원장에 당선됐다. 당선 후 구보를 서기장으로 기용했다.

자사사 연립 정권의 발족[편집]

1994년 4월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총리대신직에서 물러날 무렵 사회당과 연립 정권 사이에는 감정의 골이 상당히 깊어져 있었다. 연립을 이끌던 신생당의 오자와 이치로는 좌파 정당인 사회당을 신뢰하지 않았고 사회당은 정권을 독단적으로 운영하고 사회당을 배제하려 드는 오자와를 불쾌하게 생각했다. 호소카와가 물러난 뒤 연립 정권은 신생당의 하타 쓰토무를 총리대신으로 추대했다.

그런데 그 직후에 신생당, 일본신당, 민사당 등이 합심하여 사회당을 빼놓은 채 교섭단체 개신을 결성했다. 연립 정권에서 사회당의 영향력을 낮추기 위한 목적이었고 사회당은 반발했다. 사회당은 연립에서 이탈할 뜻을 표명했고 하타 내각은 소수 여당 정권으로 전락했다. 다만 구보, 사토 간주우에하라 고스케아카마쓰 히로타카 등은 연립 복귀를 주장한 반면 야마구치 쓰루오오이데 슌노사카 고켄 등은 연립 이탈을 주장하는 등 사회당의 당내 분위기는 많이 어수선했다.

6월 25일 진퇴양난에 빠진 하타 내각은 총사직했다. 자유민주당 총재 고노 요헤이는 무라야마에게 접근해 연립 정권의 수반으로 사회당 위원장을 추대하겠다며 자신들과 손을 잡을 것을 권했고 사회당은 이를 받아들였다. 전직 총리대신인 가이후 도시키가 무라야마를 지지할 순 없다면서 탈당하여 오자와와 손을 잡고 무라야마에 맞섰지만 패배했다. 그렇게 신당 사키가케까지 참여한 자사사 연립 정권인 무라야마 내각이 발족하면서 1947년 가타야마 데쓰 이래 47년 만에 사회당 위원장 출신 총리대신이 탄생했다. 또한 2010년 6월 간 나오토가 총리대신이 되기까지 55년 체제가 출범한 이래 자민당 당적을 가진 적이 없던 사람이 총리대신이 된 유일한 사례이기도 했다.

무라야마 내각[편집]

일본의 총리대신 무라야마 도미이치(오른쪽)와 이스라엘의 총리 이츠하크 라빈(왼쪽).
제21회 G7 정상회담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

1994년 7월 제130회 국회에서 소신표명연설을 통해 앞으로도 「일본과 미국 간의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과 관련된 의무를 이행해 나갈 것이며 자위를 위한 필요최소한의 실력 조직인 자위대는 「헌법」이 인정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사회당이 그때까지의 정책을 전환하는 분기점이 되었다. 11월 소비세율을 기존 3%에서 4%로 1%p 인상하고 여기에 지방소비세 1%를 더하는 세제 개혁 관련 법안을 성립시켰다.

1995년 1월 17일 효고현 남부 지진이 발생했는데 정부의 대응이 늦어 비판을 받았고 내각 지지율도 급락했다. 3월 20일에는 옴진리교 간부가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을 일으키는 등 사회적으로 불안감이 커져갔다.

5월 2일 총리대신으론 처음으로 중화인민공화국 루거우차오와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을 방문했다.[4] 10일 무라야마와 회담을 한 자유민주당 간사장 모리 요시로가 "무라야마 총리가 '과도적 내각에는 한계가 있다'라고 말했다"라는 얘기를 언론에 흘렸고 『요미우리 신문』이 총리대신이 퇴진 의향을 표명했다고 보도를 냈다. 다른 언론이 이를 모두 받아적으면서 큰 소동이 일어났고 연립 내각에서 모리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6월 9일 연립 여당의 주도하에 중의원 본회의에서 「역사를 교훈으로 평화로의 결의를 새롭게 하는 결의」를 가결시켰다. 7월에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이 발족했고 같은 해 제17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가 실시됐다. 이 선거에서 사회당의 의석수가 크게 줄어들자 무라야마는 사의의 뜻을 밝혔지만 총재 고노를 비롯해 자민당이 유임해줄 것을 요청하여 개조 내각을 꾸렸다. 8월 15일 무라야마 담화로 불리는 「전후 50주년의 종전기념일을 맞아」를 각의결정했다.

선거 패배를 전후로 한 시기에 무라야마는 주변에 총리대신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자주 밝혔다. 그런데 적어도 신년도 예산안이 통과된 다음에나 물러날 것으로 보이던 무라야마가 1996년 1월 5일 돌연 퇴진 의사를 표명했다.[5] 무책임한 태도라는 비판이 잇따랐고 과거사 청산 등 특필할 만한 성과를 냈다며 무라야마 내각에 호의적이던 『아사히 신문』조차 국민을 우롱하는 것도 정도가 있다며 내각을 강하게 성토했다.

갑작스런 퇴진의 배경으론 구보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점, 주택금융전문회사 문제로 야당과의 갈등이 심각했던 점, 오키나와현 미군 기지 문제점 등이 꼽히지만 자세한 사정은 알려지지 않았다.[6]

무라야마는 물러나면서 연립 정당 대표들을 불러 자사사 연립을 이어갈 것, 차기 총리대신은 자민당 총재가 맡을 것, 종교 단체에 지배되는 세력과는 손잡지 말 것 등 세 가지를 당부했다. 당부에 따라 자민당 총재 하시모토 류타로를 수반으로 하는 연립 정권 출범에 합의가 이루어졌고 11일 무라야마 내각이 총사직한 후 제1차 하시모토 내각이 발족했다.

총리대신 퇴임 후[편집]

총리대신에서 물러난 뒤에도 사회당 위원장 자리는 지켰지만 하시모토 내각에 입각하지는 않았다. 1996년 1월 17일 위원장 선거에서 아키바 다다토시를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19일에는 사회당의 이름을 사회민주당으로 고치고 초대 당수가 되었다. 하지만 소속 의원 30여 명이 사키가케 간사장 하토야마 유키오가 제창한 신당 구상에 호응하여 9월에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겨갔다. 사민당의 위기 속에서 총선을 앞두고 중의원 해산 전 의장직에서 물러난 도이를 새 당수로 맞이하고 무라야마는 특별대표가 되었다. 10월에 진행된 총선에서 무라야마는 8선에 성공했지만 사민당은 해산 전 30석에서 선거 후 15석으로 당세가 더더욱 줄어들었다.

반면 어느 정도 당세를 회복한 자민당은 내부에서 더 이상 연립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제2차 하시모토 내각이 출범할 무렵에는 사키가케와 함께 사민당은 각외협력으로 전환했다. 1997년에는 「오키나와 특별조치법」안에 대해 여당이면서도 반대표를 던졌으며 1998년 6월에는 사민당이 먼저 자민당과의 정권협의를 파기했다. 이로써 자사사 연립 정권은 종말을 고했다.

1999년 7월 중의원 본회의에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안이 상정되자 반대표를 던졌지만 통과됐다. 10월 중국에서 건국 50주년 군사 퍼레이드가 열렸을 때 무라야마가 참석했다.[7]

1999년 자민당의 노나카 히로무 등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했다. 2000년 5월 14일 총리대신 오부치 게이조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사망하자 30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추도 연설을 했다.[a]

정계 은퇴와 그후[편집]

2015년 11월에 촬영한 사진. 오른쪽은 오카베 요시히코.

2000년 6월에 중의원이 해산되자 총선에 출마하지 않고 정계를 은퇴했다. 10월 하라 분베에의 후임으로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 이사장이 되었다. 2005년 1월 24일에 기금을 2007년 3월에 해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2007년 3월 6일 기자회견에서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일명 고노 담화)에 대한 당시 내각총리대신 아베 신조의 '나의 내각에서 변경할 수 없는 발언'에 대해 "(기금은) 고노 담화의 정신에 근거해 활동하고 있다. (아베) 총리가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말한 한 그것을 신뢰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31일 기금이 정식 해산했다.

무라야마 내각 때 추진된 교토 영빈관 건설이 2005년 4월 17일 완공됐다. 당시 총리대신이던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하시모토, 모리와 함께 모리야마를 초대해 개관식전에 참석했다. 7월 16일에 오이타시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자전거를 타고 가던 초등학교 4학년 남학생과 접촉 사고를 일으켰다.[8] 학생은 양팔에 상처를 입었는데 당시 국민들은 전직 총리대신이 직접 운전을 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1]

2006년 4월 총리대신으로서 국정을 담당해 중책을 맡았고 다년에 걸쳐 국회의원으로서 의안을 심의한 중책을 맡은 공로를 인정받아 동화대수장을 수장했다.[9]

2009년 중국에서 건국 60주년 기념 군사 퍼레이드가 열리자 참석했다.[7]

명예고문으로 있던 일중우호협회가 2013년 1월 방중단을 파견했는데 명예단장으로서 참여했다. 당시 단장은 협회장이기도 했던 전 자민당 간사장 가토 고이치였다. 무라야마는 중국에 가서 중일우호협회장 탕자쉬안과 회담했다.[10] 2월에는 방중단 주요 멤버와 함께 당시 총리대신이던 아베를 만나 탕자쉬안과의 회담 내용을 보고했다. 당시 일본은 고이즈미 정권의 친미 일변 외교로 아시아 외교에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아베는 이번 방중을 계기로 중국과의 정상회담을 희망하고 있었다. 한편 무라야마는 아베가 무라야마 담화의 노선을 변경할 수 있다고 시사한 데 대해 반대한다는 뜻도 전했다.[11]

같은 달 사민당이 당사를 이전하면서 옛 당사를 철거하기로 했는데 철거 전에 사민당 의원들끼리 만남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무라야마는 "당세가 예전만 못해 안타깝다", "의원이 적어서 쓸쓸하다"라고 한탄했다.[12] 5월 아베가 무라야마 담화를 어느 정도 궤도 수정을 하겠다는 자세를 보였지만[13] 기본 방침까지 바꾸지는 않았다. 이에 7월 헌법 개정 반대 집회에 참석해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된다며 무라야마 담화 재검토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14]

같은 달 실시된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사민당의 득표수가 크게 줄자 무라야마는 다음 달 BS-TBS의 프로그램에 출연해 "더 이상 사민당 같은 거에 구애받지 말고 헌법 개정 같은 공통 과제에 대해 당파를 초월해 협력하는 체제가 가능하면 가장 좋겠다. 다음 총선까지는 그런 체제를 만들어가는 게 중요하다"라고 발언했다. 기자회견에서도 "사민당은 이대로 가도 미래가 없다. 당에 얽매이지 말고 세력을 결집해야 한다. 새로운 당을 만들어도 좋다"라며 사민당이 야당 재편의 마중물이 되어 개헌 반대나 탈원전 등을 토대로 한 신당 결성을 꾀해 사민당의 발전적 해체가 필요하다고 제시했다.[15]

2014년 2월 위안부 문제 등으로 한일 관계가 얼어붙자 대한민국을 찾아 무라야마 담화의 의의를 강연하고 대한민국의 국무총리 정홍원과 회담하는 등 한일정상회담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10월 19일 한국 숭실대학교가 일본의 만행을 용서하고 화해한다는 의미로 일본의 양심적 지도자인 무라야마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로 하자 이를 받아들였다.[16]

2015년 4월 오이타현지사 선거 때 오이타현지부가 자민당-공명당 후보와 민주당 후보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을 지지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자주투표하기로 결정하자 자민당 후보를 지원했다.[17][18][19] 9월 중국 인민 항일 전쟁 및 세계 반파시즘 전쟁 승리 70주년 기념 대회에 참석했다. 무라야마는 일본 정부와는 상관없이 개인적으로 참여했다고 밝혔는데 방중 중에 건강 이상으로 잠시 입원을 했다.[20]

90세를 넘긴 시점에서도 사민당 명예 당수와 NPO법인 일본-베트남 평화우호연락회의 회장 등 여러 역할을 맡으면서 자택이 있는 오이타와 도쿄를 오고가며 왕성한 정치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다.

2020년 11월 14일 사민당이 임시 담대회를 열어 희망하는 당원과 지방조직이 입헌민주당에 합류하는 것을 인정할지를 논의했다. 다수결에 부친 결과 인정하기로 하면서 사민당의 분열이 확정되었다. 무라야마는 이 결과에 대해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당이 쪼개져서 더욱 작아지는 것은 유감이다"라고 했다.[21] 12월 24일 고령을 이유로 사민당 명예 당수와 고문에서 물러났다.[22] 다만 당원 자격은 계속 유지하겠다고 밝혔다.[23]

2021년 7월 11일 자택에서 입헌민주당 대표 에다노 유키오와 회담했다. 에다노가 "선생님께서 건강하실 때 다시 한 번 리버럴한 정치를 만들겠습니다"라고 하자 무라야마는 에다노를 격려했고 에다노가 자택을 나설 때 현관 밖에까지 나가서 배웅했다.[24][25]

2022년 9월 28일 중의원 의원회관에서 열린 이벤트에 영상 메시지를 보냈다.[26]

주요 활동[편집]

1994년 무라야마 총리의 김일성 조전[편집]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무라야마는 일본사회당 명의로 김일성의 사망을 애도하는 조전을 보냈다.[27] 이 같은 행보에 대해 일본사회당은 조선로동당과의 오랜 우호관계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은 일본 특유의 국익을 위한 남과 북에 대한 줄다리기식 외교라고 분석했다.

당시 조전에서 무라야마는 "위대한 지도자 김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에 가슴깊이 우러나오는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한다"라고 밝혔다.[28][29][30]

무라야마 담화[편집]

1995년 8월 15일에 열린 전후 50주년 기념식에서 각의 결정에 근거해 일본이 태평양 전쟁 이전이나 전쟁 중에 행했다고 생각되는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했다. 이 ‘전후 50주년의 종전기념일을 맞아’, 통칭 무라야마 담화는 이후의 정권에서도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역사 견해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보수적인 의원 등에 의해 무라야마 담화와 다른 견해의 발언이 문제가 되어 중국 및 한국 정부로부터 반발하는 경우가 있었다. 진보적인 입장에서는 이 담화를 두고 ‘결국 나쁘다고는 생각하지만 일본 정부는 어쩔 수 없이 태평양 전쟁에 말려든 것이다’는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명칭에는 무라야마 개인의 담화로 표현되지만 이는 각의의 결정을 거친 담화로 무라야마 개인의 사적인 견해가 아닌 당시 정부의 공식 견해이다.

한일병합에 대한 발언 논란[편집]

1995년 8월, 무라야마는 한일병합은 합법적이었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이는 일본 정부의 종래 입장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고 그동안 사회당 위원장으로서 침략 전쟁 인정과 과거 사죄에 앞장서 온 무라야마의 발언이라는 점에서 더욱 충격을 줬다.[31][32] 이런 발언에 대해 당시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는 소극적으로 대응해 국민들의 거센 질타를 받았다.[33] 당시 무라야마의 이 발언에 뉴욕에서 열릴 예정이던 양국간 정상회담마저 무산되었고 양국의원연맹 합동총회가 연기되는 등 한일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경색되었다.[34][35][36]

무라야마는 또 일본 정부가 과거의 역사에 대해 깊은 반성과 사죄의 뜻을 밝혔지만 이는 정치적·도의적인 것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 공식석상에서 한일병합을 합법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지적받았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지난 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줄곧 한일병합조약은 합법이라고 주장해 왔으며 일본의 수많은 정치인들도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최근의 예로는 1995년 6월 전 외무상 와타나베가 지방에서 한 강연을 통해 한일병합이 강제로 체결된 것이 아니며 합법이라고 주장해 물의를 빚었다. 무라야마는 단편적으로 들으면 오해를 사겠지만 의사록을 잘 읽어보면 자신의 생각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며 발언을 철회하지 않았다.[37]

무라야마는 17일에도 한일병합조약은 형식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해 이 조약이 합법적으로 체결됐음을 거듭 강조했다. 무라야마는 참의원 예산위원회 답변을 통해 이같이 말하고 병합조약의 형식과 정치적·도의적 견해는 별개라고 밝혔다. 그러나 무라야마는 정치적·도의적 실태론으로 판단하면 한일병합조약이 대등하고 평등하게 체결된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면서 자신의 발언이 파문을 일으킨 데 대해 우려한다고 말했다. 무라야마는 식민지 지배가 현실적으로 있었던 만큼 사실을 직시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무라야마는 지난 5일 한일병합조약과 관련한 자신의 망언을 취소하지는 않았다.[38]

그러다 11월 19일, 대한민국의 대통령 김영삼과의 회담에서 자신의 발언에 대한 잘못을 시인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39][40][41]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 설립[편집]

1994년 8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민간 기금에 의한 위문금 지급 구상을 발표하고, 1995년 7월에 총리부와 외무성 관할하에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을 설립했다. 이를 통해 1997년 1월, 처음으로 한국인 위안부에게 위문금을 지급했다.

무라야마 내각이 출범하기 이전에 국비를 이용한 손해배상이나 정부의 사죄를 요구하는 소송이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다른 나라와 조약을 체결했을 때 이러한 문제는 해결이 완료되었다는 입장으로 국비를 이용했는데 위안부에 대해 손해배상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방침을 고수했다.

무라야마의 구상에서는 정부가 기금을 설립하고 이에 소요되는 자금은 민간의 지원으로 하는 것으로 직접적인 국비의 투입을 피하는 동시에 모금에 의한 국민의 진지한 생각이 표현되는 것으로 양자의 주장을 포함하면서 문제 해결을 도모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 기금의 초대 이사장으로는 하라 분베에가, 2대 이사장으로는 총리대신에서 퇴임한 무라야마가 취임해 6억여 엔의 모금액을 이용해 위안부 피해자의 생활 지원과 함께 여성의 명예 및 존엄과 관련된 사업을 진행해 왔다. 필리핀대한민국타이완 등에서 지원사업을 전개했으며, 인도네시아 사업이 종료될 것으로 예정된 2007년 3월에 해산하기로 발표되었다.

역대 선거 결과[편집]

실시년도선거대수직책선거구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락비고
1951년통일지방선거2대시의회 의원 오이타현 오이타시일본사회당
0%
낙선 
1955년통일지방선거3대시의회 의원 오이타현 오이타시일본사회당
0%
 
1959년통일지방선거4대시의회 의원 오이타현 오이타시일본사회당
0%
 
1963년통일지방선거5대현의회 의원오이타현 오이타시일본사회당
0%
 
1967년통일지방선거6대현의회 의원오이타현 오이타시일본사회당
0%
 
1971년통일지방선거7대현의회 의원오이타현 오이타시일본사회당
0%
 
1972년총선거33회중의원 의원오이타현 제1구일본사회당93,256표
22.4%
1위중선거구
1976년총선거34회중의원 의원오이타현 제1구일본사회당102,307표
24.0%
1위중선거구
1979년총선거35회중의원 의원오이타현 제1구일본사회당86,736표
19.2%
1위중선거구
1980년총선거36회중의원 의원오이타현 제1구일본사회당69,466표
14.5%
5위낙선중선거구
1983년총선거37회중의원 의원오이타현 제1구일본사회당121,919표
25.9%
1위중선거구
1986년총선거38회중의원 의원오이타현 제1구일본사회당107,988표
22.5%
1위중선거구
1990년총선거39회중의원 의원오이타현 제1구일본사회당108,343표
22.2%
1위중선거구
1993년총선거40회중의원 의원오이타현 제1구일본사회당106,260표
23.8%
1위중선거구
1996년총선거41회중의원 의원오이타현 제1구사회민주당106,258표
59.5%
1위소선거구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내용주[편집]

  1.  여당 대표가 사망했을 때 제1야당 대표가 중의원에서 추도 연설을 하는 것이 오랜 관례였다. 이에 따라 본래라면 민주당 대표 하토야마 유키오가 연설을 해야 했지만 유족들이 이를 거부했기에 전 야당 대표이면서 전 총리대신이던 무라야마가 연설을 맡았다.

참조주[편집]

  1. ↑ 이동:  本田雅俊 (2008년 7월 29일). 《総理の辞め方》 (일본어). PHP研究所. 222–231쪽. ISBN 978-4-569-70085-4.
  2.  村山富市「私の政治人生」村山富市・佐高信『「村山談話」とは何か』角川書店、2009年、98頁。
  3.  村山富市「私の政治人生」村山富市・佐高信『「村山談話」とは何か』角川書店、2009年、113頁。
  4.  中国・日本 両国人民の友好の絵巻物」中国網
  5.  『平成政治史 1』, 344–345쪽.
  6.  北海道新聞夕刊平成8年1月9日
  7. ↑ 이동:  村山富市元首相が中国軍事パレードに出席・・・これまで3回、連続してすべてに顔出す=中searchaina(2015-09-03)searchinaweb魚拓
  8.  村山元首相が交通事故 自転車の子どもに衝突 - 共同通信、2005年7月16日
  9.  日本の勲章・褒章(賞勲局)」内閣府、2006年。
  10.  尖閣問題で意見交換。菅官房長官「大いに話を」日中友好協会が訪中2013年1月28日 MSN産経ニュース
  11.  村山元首相、安倍首相に1月末の訪中会談内容を報告2013年2月1日 MSN産経ニュース
  12.  社民が旧党本部でお別れ会=村山元首相「低迷歯がゆい」2013年2月27日 時事ドットコム
  13.  村山談話「継承」安倍首相が軌道修正2013年5月16日 MSN産経ニュース
  14.  村山元首相が訴え「談話を見直せば日本は孤立する」2013年7月2日 MSN産経ニュース
  15.  村山元首相、「社民党にこだわらず。次期衆院選は新党」で2013年8月19日 MSN産経ニュース
  16.  韓国・崇実大が村山元首相に名誉博士号 あす授与式 聯合ニュース 2014年10月8日t
  17.  “「大分創生」広瀬さん 村山元首相らが支援”. 《読売新聞》 (일본어). 2014년 4월 13일. 2024년 3월 23일에 확인함.
  18.  “広瀬・大分知事4期目「初心忘れず県民の声聞く」”. 《日本経済新聞》 (일본어). 2014년 4월 14일. 2024년 3월 23일에 확인함.
  19.  “村山元首相、自民系候補にエール 地元・大分の首長選”. 《朝日新聞》 (일본어). 2014년 4월 16일. 2024년 3월 23일에 확인함.
  20.  村山元首相:体調不良で入院 抗日記念行事出席で訪中 毎日新聞
  21.  [1]
  22.  https://www.oita-press.co.jp/1010000000/2020/12/25/081418375
  23.  “社民党、幹事長と副党首の離党承認 立憲に合流、所属国会議員は2人に”. 《毎日新聞》 (일본어). 2020년 12월 24일. 2020년 12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4년 3월 23일에 확인함.
  24.  “枝野氏、村山元首相を表敬 「リベラルな政権」へ決意:時事ドットコム”. 《時事ドットコム》 (일본어). 2021년 7월 1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4년 3월 23일에 확인함.
  25.  INC, SANKEI DIGITAL (2021년 7월 11일). “立憲・枝野代表が村山元首相と面会「もう一回、リベラルな政治を」”. 《産経ニュース》 (일본어). 2024년 3월 23일에 확인함.
  26.  https://web.archive.org/web/20220928094523/https://www.jiji.com/jc/article?k=2022092801068&g=pol
  27.  김재철 (1994년 7월 13일). “무라야마 일본 총리, 사회당 위원장 자격 북측에 조전 보내[김재철]”. 《MBC》 (도쿄). 2023년 4월 19일에 확인함.
  28.  “日총리 北에 哀悼 전문”. 《동아일보》. 1994년 7월 13일. 2023년 4월 19일에 확인함.
  29.  “무라야마 북한에 조전”. 《한겨레》. 1994년 7월 13일. 2023년 4월 19일에 확인함.
  30.  홍성균 (1994년 7월 13일). “日총리 社會黨위원장 명의 弔電”. 《경향신문》 (모스크바). 2023년 4월 19일에 확인함.
  31.  김용수 (1995년 10월 10일). “日총리,"한일합방 법적으로 유효"발언 파문”. 《연합뉴스》 (도쿄). 2014년 2월 23일에 확인함.
  32.  김용수 (1995년 10월 14일). “日정부, 합방조약 합법체결 입장 고수”. 《연합뉴스》 (도쿄). 2024년 3월 23일에 확인함.
  33.  “정부 日망언파문 대응 미온-1”. 《연합뉴스》 (서울). 1995년 10월 18일. 2024년 3월 23일에 확인함.
  34.  “日총리,유엔서 金대통령과 정상회담안해”. 《연합뉴스》 (도쿄). 1995년 10월 16일. 2024년 3월 23일에 확인함.
  35.  “韓日의원연맹 합동총회 연기확정”. 《연합뉴스》 (서울). 1995년 10월 19일. 2024년 3월 23일에 확인함.
  36.  김인영 (1995년 10월 11일). “일본 총리 망언에 대한 강경대응 촉구”. 《KBS》. 2019년 1월 10일에 확인함.
  37.  유승재 (1995년 10월 10일). “일본 무라야마 총리 망언”. 《KBS》 (도쿄). 2019년 1월 10일에 확인함.
  38.  정창훈 (1995년 10월 17일). “무라야마 일본 총리 "합병 합법" 되풀이”. 《KBS》. 2019년 1월 10일에 확인함.
  39.  '망언'잘못 시인”. 《한겨레》. 1995년 11월 15일. 2014년 10월 11일에 확인함.
  40.  "日은 과거역사 바로봐야"金대통령 "韓國民고통에 깊이사과"무라야마 韓·日정상회담”. 《매일경제》 (오사카). 1995년 11월 19일. 2014년 10월 11일에 확인함.
  41.  이동관 (1995년 11월 19일). “韓-日 정상회담「과거사妄言 갈등」일단 봉합”. 《동아일보》 (오사카). 2014년 10월 11일에 확인함.

참고 문헌[편집]

  • 石原信雄『官かくあるべし ― 7人の首相に仕えて』小学館、1997年。ISBN 9784094020311
  • 佐々淳行『後藤田正晴と十二人の総理たち』文藝春秋、2006年。ISBN 4163681205
  • 清原芳治『村山富市 ― その軌跡と使命』大分合同新聞文化センター、2006年。
  • 後藤謙次 (2014년 4월 17일). 《ドキュメント 平成政治史 1 崩壊する55年体制》. 岩波書店. ISBN 978-4000281676.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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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야마 토미시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일본의 국기 일본 정치인
무라야마 토미시
무라야마 토미이치
내각 홍보실 에서 공표된 초상
생년월일1924년 3월 3일 (100세)
출생지일본의 국기 일본 오이타현 오이타시
출신 학교메이지 대학 전문부 정치 경제과 졸업
전직오이타현 어촌청년동맹 서기장
현직메이지 대학 고문
소속정당일본 사회당 →)
사회당 좌파 →)
(일본 사회당 →)
사회 민주당
칭호육군 군 조류 하나 대선 장 명예박사 (메이지대학, 숭실대학 )

배우자무라야마 요시ヱ1953년 -)
기호

내각무라야마 내각
무라야마 개조 내각
재임기간1994년 6월 30일 - 1996년 1월 11일
천황상황(명인)

선거구구 오이타 1구 →)
오이타 1구
당첨 횟수8회
재임기간1972년 12월 10일 - 1980년 5월 19일
1983년 12월 18일 - 2000년 6월 2일

선거구오이타시 선거구
당첨 횟수3회
재임기간1963년 -1972년

당첨 횟수두 번
재임기간1955년 -1963 

기타 직업
초대 사회민주당 당수
1996년 1월 19일 - 1996년 9월 28일 )
 제13대 일본
사회당 위원장 ( 1993년 9월 25일 -1996 년 1월 19일 )
템플릿 보기

무라야마 토미시 (무라야마 토미이치, 1924년 < 다이쇼 13년> 3월 3일 -)는 일본 의 정치가 , 노동조합 지도자. 제81대 내각총리대신 .  등은 키리하나 대선장 .

노동조합운동에서 일본 사회당 에 소속되어 정치가가 되어 오이타현 오이타시 의회 의원 (2기), 오이타현 의회 의원 (3기), 중의원 의원 (8기), 일본 사회당 위원장 (제13대), 내각 총리 대신( 제81대 ), 사회민주당 당수 (초대), 명예당수 를 역임했다.

2019년 11월 29일 에 나카소네 야스히로 가 사망한 것에 따라, 존명하는 내각 총리대신 경험자로서는 최고령, 그리고 유일한 다이쇼 출생의 인물이 되었다. 2024년 4월 시점에 있어서, 역대의 내각총리대신에서는 히가시쿠나미야 치히코왕 , 나카소네에 이어 3번째의 장수 기록 보유자이며, 백수(만 100세) 를 맞이하고 있다 [1] .

개요 편집 ]

오이타시 의회 의원, 오이타현 의회 의원을 거쳐 중의원 의원으로 국정 에 참가했다. 사회당이 좌우 분열하고 있던 시대에는 좌파 사회당 에 소속. 중의원 의원에 당선 후 일본 사회당의 당내에서는 정권 구상 연구회 나 수요회 에 소속되는 등 일관되게 사회당 우파 로 활동했다. 중의원 에서는 사회노동위원회나 예산위원회 의 이사를 맡았고, 물가문제 등에 관한 특별위원회에서는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일본 사회당 국회 대책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은 뒤, 야마하나 사다오 의 사임에 따른 일본 사회당 위원장 선거에 입후보해 당선했다.

비자민·비공산연립정권 에서는 여당 제1당의 당수로서 비자민정권이었던 호소카와 내각 과 하네다 내각을 지지했지만 개신 결성소동 등을 둘러싸고 대립이 격화되어 연립정권 에서 이탈했다. 55년 체제 로 사회당과 대립해 온 자유민주당 과의 연립을 결단해 자사 연립정권을 수립하여 제81대 내각총리 대신으로 취임하여 1994년 6월 30일부터 1996년 1월 11일까지 재임 했다. 그 후 일본 사회당을 해당시키는 것과 동시에 새롭게 사회민주당 을 결성해 동당의 당수나 특별대표를 맡았다. 현재는 학교법인 메이지대학 의 고문이나 오이타현 직원연합노동조합의 특별고문을 맡는 동시에 메이지대학교 우회의 명예회장 등의 명예직을 맡는다. 또 메이지대학에서 명예박사의 명예학위를 수여 받고 있다.

내력·인물 편집 ]

정치가 들어간 편집 ]

츠키지 의 인쇄 회사에서 일했던 무렵의 무라야마

1924년, 오이타현 오이타시 의 어부 의 집에 11명 형제의 6남으로서 태어났다. 무라야마가는 아바모토 였지만 , 무라야마가 14세 때 아버지가 타계하고 있다. 그 때문에 신문 배달 등을 하면서 고학을 계속했다 [2] . 1936년, 오이타 시립 나카지마 심상 초등학교 졸업, 1938년, 오이타 시립 오이타 고등 초등학교 졸업 후, 도쿄에 나와, 낮에는 기계 공장이나 인쇄 공장 등에서 일하면서, 야간은 도쿄 시립 상업 학교에 배웠다.

1943년, 구제 메이지 대학 전문부 정치 경제과에 입학. 철학 연구부에 속한다. 이 무렵, 마찬가지로 메이지대학에 다니던 마루야 킨호 에게 초대되어 호세이 51 이 운영하는 학생 기숙사 「 지친 기숙사」에 들어갔다 . 1944년, 학도 동원 으로 이시카와지마 조선소 에 배속되었다. 같은 해 성인 징병 검사 를 받고, 학도 출진 으로 미야자키현 도성시의 일본 육군 보병 제23연대 에 2등병 으로서 입대. 1945년 8월 15일, 간부 후보생으로서 육군 군조의 계급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1946년 구제 메이지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를 졸업했다. 1948년, 오이타현 어촌 청년동맹의 서기장으로 취임했다. 어업협동조합 설립 등의 성과를 거두어 어촌청년동맹이 해산하자, 그 후는 오이타현 직원노동조합의 서기 로서 활동했다 [4] .

1951년, 오이타시 의회 의원 선거에 입후보했지만, 다음 점에서 낙선. 1953년, 요시지 부인과 결혼. 재기를 기한 1955년, 오이타시 의회 의원 선거에 일본 사회당으로부터 입후보해, 당선(이후 당선 2회). 1963년, 오이타현 의회 의원 선거에 지지자의 후원으로 입후보해, 당선(이후 연속 3회 당선). 1972년 12월, 제3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에 입후보해, 톱에서 첫 당선(같은 자치체 의원 경험자인 사회당 신인대 의사에 다케무라 유키오 ). 이후 낙선 1회를 끼워 통산 당선 8회. 1973년에는 요코지 타카히로 나 타 히데오 등과 「새로운 흐름의 모임」에 참가.

국회 대책 위원장에서 사회당 위원장으로 편집 ]

1991년 7월, 도이 타카코를 대신해 다나베 마코토 가 사회당 위원장으로 취임하자, 무라야마는 국회 대책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1992년 PKO 국회에서는 국회 대책 위원장으로서 진두 지휘를 맡아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6월에 자공민 3당의 찬성 다수로 성립. 국회 대책 위원장으로서 국회 운영에 종사한 것으로부터, 자민당 의 카지야마 시즈로쿠 , 공명당의 칸자키 무법 등, 각 당 국회 대책 위원장과의 파이프를 가지기에 이르렀다. 1993년 1월, 타나베 마코토를 대신해 야마 하나다오 가 사회당 위원장으로 취임했지만, 무라야마는 국회 대책 위원장에 유임했다.

같은 해 7월,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 에서 자민당은 과반수를 회복할 수 없었고, 한편의 사회당도 신당 붐에 묻혀 의석을 거의 반감시켰다. 8월, 사회당을 포함한 8회파에 의해 비자민 연립 정권인 호소카와 연립 내각이 발족. 야마하나 사다오는 정치개혁 담당 장관으로 입각했지만 총선에서 패배의 책임을 맡고 위원장 사임을 표명했다. 후임의 위원장에게는 위원장 대행 쿠보유 와 무라야마가 유력시되지만, 위원장 선거에의 입후보를 쿠보가 사퇴. 9월에 열린 위원장 선거에서는 무투표 당선 저지를 도모해 입후보한 쇼마사토시 를 대차로 깨고 무라야마가 사회당 위원장에게 당선했다. 당선 후 서기장에는 쿠보유를 기용했다.

자사 연립 정권 발족 편집 ]

1994년 4월 호소카와 호희 내각 총리대신이 사임을 표명하면 연립여당은 차기 수반에 신생 당당 슈바다 孜(호소카와 내각에서 부총리 겸 외무대신 )을 추진하기로 합의하고 국회에서 하네다가 총리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수반지명 직후 신생당, 일본신당 , 민사당 등이 사회당을 빼고 원내회파 ' 개신 '을 결성한다고 발표. 사회당의 여당 내에서의 영향을 억제하기 위한 것으로, '개신'은 연립여당 내에서 사회당을 크게 웃도는 최대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사회당에는 사전 상담이 없었기 때문에 무라야마는 이에 강하게 반발해 사회당의 연립 이탈을 표명, 하네다 내각은 소수 여당으로 발족하게 된다. 하네다 정권하, 사회당 내에서는 쿠보유 , 사토 칸수 , 우에하라 야스스케 , 아카마츠 히로타카 등이 연립 복귀를 주장하는 한편, 야마구치 츠루오 , 오오데 슌 , 노자카 코겐 등은 연립 이탈을 지지했다.

6월 25일, 진퇴궁합 하네다 내각이 총사직해, 사회당을 둘러싸고 자민당·연립 여당이 협의를 실시하는 가운데, 자민당 총재 의 고노 요헤이 가 사회당 위원장 수반의 연립 정권을 타진해, 자사함 공동 정권 구상 에 합의했다. 그러나 자민당 총재경험자인 해부준수 가 “사회당 위원장을 수반에 지지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거기에 나카소네 야스히로 도 동조하면서 연립여당은 해부준수를 통일 후보로 지명했다. 6월 29일, 수반 지명이 열리지만, 중의원에서 과반수에 이르지 않고, 결선 투표가 되었다. 그 결과 무라야마가 지명결선투표로 해부를 꺾고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되어 자사 연립정권 내각이 발족했다. 여기에 1947년 가타야마 내각 이후 47년 만의 사회당 수반 내각 탄생이 되었다. 또한 1955년 자민당 탄생 이후부터 2010년 6월 민주당 스가 나오토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할 때까지는 자민당적을 갖지 못한 유일한 내각총리대신이었다 [주석 1] .

내각총리대신 재임중 편집 ]

1994년 12월 , 도쿄도 에서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 (앞 왼쪽) 등
1995년 6월 16일 제 21회 선진국 정상회의 에서 선진 7개국 정상  과

1994년 7월, 제130회 국회에서 소신 표명 연설 에 임해, 「자위대 합헌, 일미 안보 견지」라고 발언해, 일본 ​​사회당의 그때까지의 정책을 전환했다( 후술 ).

1994년 11월 소비세율을 3%에서 4%로 끌어올려 지방소비세 1%를 더하는 세제개혁 관련법이 성립. 1995년 1월 17일, 효고현 남부 지진 에 따른 한신·아와지 대지진 발생시 일본 정부 의 대응 지연이 비판되어 내각 지지율이 급락했다( 후술 ). 3월 20일에는 ' 앵무새 진리교 ' 간부에 의한 지하철 사린 사건이 일어났다( 후술 ). 그 후 공안조사 청의 조사결과를 존중하고 앵무새 진리교에 대한 파괴활동방지법 적용을 공안심사위원회 에 신청했다(나중에 기준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적용은 배달된다).

5월 10일 자유민주당 간사장 모리 키로 가 “무라야마 총리는 '과도적 내각에는 한계가 있다'고 속박하고 있다”고 발언해 총리대신 관저 에서 무라야마와의 대화를 울렸다. 이 발언을 받아 요미우리 신문사 가 “총리, 퇴진 의향 누설”이라고 보도해, 타사도 이에 이어 큰 소란이 된다. 그 결과 자사 연립 정권 전체에서 숲은 맹반발을 받고 각 내에서는 무라야마의 위류에 노력하는 분위기가 양성되어 무라야마 내각 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1995년 5월 2일, 현직총리대신에서 처음으로 노조 교 와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을 찾았다 .

6월 9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자민·사회·사키가케 3회파 공동 제출의 「역사를 교훈으로 평화에의 결의를 새롭게 하는 결의」( 부전 결의 )가 가결되었다. 6월 21일 전일공 857편 하이잭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는 경찰 특수부대 에 강행 돌입을 지시해 진압했다( 후술 ). 7월 '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 '(아시아여성기금)을 발족시켰다( 후술 ). 같은 달 제17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가 열렸다. 이 선거는 자민당 내각이지만 비자민 총리의 대형 국정선거로서는 자민당이 결당한 1955년 이래 처음이었다. 이 선거에서 일본 사회당은 크게 의석수를 줄였기 때문에 무라야마는 사의를 흘렸지만, 여당 측이 위류한 것으로 총리를 속투해 내각 개조를 했다. 8월 15일, 「무라야마 내각 총리 대신 담화 「전후 50주년의 종전 기념일에 있어서」」(통칭 무라야마 담화 )를 각의 결정했다( 후술 ).

갑작스런 퇴진 편집 ]

1996년 1월 5일, 총리 퇴진을 표명했다 [6] . 무라야마의 퇴진에 대해서는 전년부터 여러가지 형태로 추측이 흐르고 있어, 전년의 참원선에 있어서의 사회당 대패 때에는 고노 요헤이 에 대해 퇴진의 의향을 새었다고도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년도 예산심의를 앞두고 있는 가운데 퇴진은 일찍 예산이 성립된 이후로 여겨졌기 때문에 갑작스런 발표는 큰 충격을 주었다. 다음 6일 신문사설은 균일하게 엄격히 비판하며, 무라야마 정권의 정책에 대해서는 “역대 정권이 손을 대지 못한 성과는 특필된다” 등이라고 호의적인 매일 신문도, 퇴진에는 “ 국민을 어리석게 할 정도가 있다”고 분노를 담을 정도였다.

퇴진의 배경에 대해서는, 사회당내의 쿠보서 기장과의 관계 악화, 주전 문제로 국회를 극복하는 것에 대한 불안,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 사용 문제의 진흙화의 우려 등의 추측이 이루어졌다 [7] .

자사정권협의에서 자민당 총재 하시모토 류타로 를 수반으로 하는 연립에 합의했다. 11일 내각 총사직 하여 하시모토 연립 내각이 발족했다.

무라야마 내각의 사이, 총리 비서관은 소노다하라조 (사회당 중앙본부), 고노미치오 (좌동), 이와시타 마사 ( 대장성) , 건 문남 ( 좌동) , 마키다 쿠니히코 (외무성), 김중 개선 (경찰) 청), 고바야시 타케히토 (왼쪽 동), 후루타 肇(통산성)이 맡았다. 주치의로서 시모 죠 씨 의사(국립국제의료센터)가 종사. 총리대신 공저 에서는 퍼스트 레이디 역 의 2녀 나카 하라 유리 , 사회당 중앙본부의 다나카 미노루, 야기 타카지 등이 비서를 맡았다.

내각총리대신 퇴임 후 편집 ]

하시모토 연립 내각에서는 입각하지 않고 총리 퇴임 후에는 당무에 전념했다. 1996년 1월 17일 일본 사회당 위원장 선거에서 아키하 타다리를 깨고 재선되었다. 1월 19일에는 당명을 사회민주당으로 개칭해 초대당수로 취임했다. 그러나 소속 의원 중 30명이 신당 사키가케 대표 간사 하 토야마 유키오가 제창한 신당 구상에 호응해 같은 해 9월 사민당에서 이당했다. 중의원 해산을 앞두고 중의원 의장 토이 타카코를 사민당 당수로 맞아 스스로는 특별대표(선거투쟁본부장 겸무)로 취임했다.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로 신설의 오이타 1구 에서 출마해 소선거구 승리로 재선(동구에서는 자민당 현직 위토 아다이치 도 비례 부활 ).

11월 제2차 하시모토 내각 에서 사민당은 각외 협력으로 돌아섰다. 그 후 1997년 오키나와 특별조치법안 채결에는 여당이면서 반대로 돌았다. 1998년 6월, 사민당이 자민당과의 정권 협의를 파기하고, 자사 연립 정권은 붕괴했다.

1999년, 7월 중원 본회의에서의 국기 국가법 의 채결로 반대표. 10월에는 중국에서의 건국 50주년의 군사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8] .

1999년 노나카 광무 등과 함께 북한을 방문했다(무라야마 방북단). 2000년 5월 30일에는 중의원 본회의에서 총리 재임 중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내각 총사직 후 5월 14일에 사망한 오부치 에조 에 대한 추도 연설을 실시했다 [주석 2] .

정계 은퇴 후 편집 ]

2015년 11월, 무라야마와 오카베 요시히코

2000년 6월 중의원 해산과 함께 정계를 은퇴했다. 2006년 4월 “내각총리대신으로서 국정을 담당하고 그 중책을 다함과 동시에 다년간 국회의원 으로서 의안심의 중책을 완수했다” [9] 공로로 키리하나 대선장을 수장했다.

2000년 10월 원문병위 의 후임으로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 의 2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2005년 1월 24일 무라야마는 기금을 2007년 3월에 해산하겠다고 선언했다. 2007년 3월 6일, 기자 회견의 석상, 「위안부 관계 조사 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 관방장관 담화」(이른바 고노 담화 )에 대한 내각 총리 대신 아베 신조 의 「내 내각에서 변경하는 것이 아닌 발언 」에 대해 접해, 「(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 은) 고노 담화의 정신을 근거로 활동하고 있다.(아베 신조) 총리가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라고 말하는 한(총리를) 신뢰해 있다”고 말했다. 같은 해 3월 31일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은 해산되었다.

2005년 4월 17일 무라야마 정권 시대에 건설이 결정된 교토 영빈관 의 개관식전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당시), 하시모토 류타로 전 총리 , 모리키로 전 총리와 함께 참석했다.

2005년 7월 16일, 오이타현 오이타시 오지나카마치의 시도 교차로에서 자동차를 운전 중, 자전거를 타는 초등학교 4학년 남아와 접촉해, 남아의 양팔에 부상을 입혔다 [10] . 사고는 보도되어 전 총리가 스스로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도 국민을 놀라게 했다 [2] .

2009년, 중국에서의 건국 60주년 기념의 군사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8] .

2013년 1월, 일중 우호 협회 명예 고문으로서 동 협회 방중단에 명예 단장으로서 참가. 단장의 전 자유민주당 간사장 가토 코이치 ·동협회 회장, 전 방위청 장관 나카타니 전 ·자유민주당 중의원 의원들과 함께 중국 을 방문. 당가선 중일우호협회 회장(전 국무위원)과 회담했다 [11] . 같은 2월, 카토 등과 함께 총리관저에서 아베 신조 총리대신을 면회해 당나라와의 회담 내용 등에 대해 보고했다. 그 때 기자단에 대해 일중 정상회담 실현에 대한 기대를 표명했다. 또 아베 총리가 진행하는 「무라야마 담화」의 노선 변경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생각을 나타냈다 [12] . 또 같은 해 2월, 사민당 본부 이전을 위해 철거가 정해진 구사민당 본부(사회 문화 회관)의 「이별회」에 이토 시게루 등과 함께 참석. 인사 가운데 "당세 침체 치아가 유이" "의원 적고 외로운 한"이라고 슬퍼했다 [13] . 같은 해 5월에는 아베 총리가 「무라야마 담화」에 대한 발언을 어느 정도 궤도 수정하는 자세를 보였지만 [14] , 기본 방침은 그 후에도 바꾸지 않는 채이기 때문에, 같은 해 7월에 참가한 헌법 개정 에 반대하는 집회에서의 강연에 있어서도 「무라야마 담화」의 재검토에 대해서,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한다」라고 말해 더욱 강하게 반대했다 [15] . 같은 달 23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에서 사민당이 득표수를 대폭 줄여 참패한 것을 받아 동년 8월 BS-TBS 의 프로그램 내에서 “이제 사민당 뭐든간에 집착하지 않고, 헌법 개악 등의 공통 과제 에서 당파를 넘어 협력을 호소해 나가는 체제를 할 수 있으면 가장 좋다. 또한 앞이 없다. 당을 고집하지 않고 세력을 결집해야 한다. 새로운 당을 만드는 것이 좋다 . 하는 신당의 결성을 목표로, 사민당은 발전적으로 해소해야 한다는 생각을 나타냈다 [16] .

2014년 2월 종군위안부 문제 등으로 한일관계가 차가워지는 가운데 한국 을 방문해 무라야마 담화의 의의를 강연, 정우원 한국 총리와 회담하여 한국 정부에 한일 정상회담 실현을 불러일으킨다. 2014년 10월 9일, 한국 의 숭실대 로부터 명예박사의 학위를 수여받았다. 수여의 이유는 「일본의 만행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의미로, 일본의 양심적 지도자인 무라야마 전 총리에게 명예 박사의 학위를 수여한다」고 하고 있다 [17] . 2015년 3월 11일, 사토야마·쿠사리의 모임의 결성에 참가했다 [18] [19] .

2015년 4월의 오이타현 지사 선거 에서 사민당 오이타현 연합은, 자민당과 공명당이 추천하는 현직 후보와 민주당이 지원하는 신인 후보의 사이에서 대응을 결정할 수 없게 「자주 투표」가 되었지만, 무라야마는 자민당계 후보를 전면 지원했다 [20] [21] [22] ( 2015년 오이타현 지사 선거 ).

2015년 9월 항일 전승 70주년식전 에 일본 정부와는 무관한 입장에서 사적으로 참석하기 위해 방중하고 있던 곳 컨디션 불량을 호소하고 입원했다 [23] .

90세를 넘어도 사민당 명예당수, NPO법인 일본 베트남 평화우호연락회의장 등 다수의 요직 자리에 있어 2015년 시점에서 집이 있는 오이타와 도쿄를 왕복해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다.

사민당은 2020년 11월 14일 도쿄도 내에서 임시당 대회를 열고 희망하는 당원·지방조직의 입헌민주당 에 합류를 인정하는 의안을 찬성 다수로 통과시켜 분열이 확정적이 되었다. 원당수인 무라야마는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당이 나뉘어 더욱 작아지는 것은 유감이 아니다"라는 코멘트를 발표했다 [24] .

2020년 12월 24일 고령을 위해 당대회 출석 등의 역할을 완수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사민당 명예당수와 고문을 사임했다 [25] . 사민당원은 계속한다고 하고 있다 [26] .

2021년 7월 11일, 오이타의 자택을 방문한 입헌 민주당 의 가지노 유키오 대표 [주석 3] 와 면회. “선생님이 건강한 가운데, 또 한번, 리버럴한 정치를 만듭니다”라고 말한 그를 격려하면서, 면회 종료 후에는 스스로 현관 밖까지 배웅해 “힘내라”라고 성원을 보냈다 [27 ] [28] . 2022년 9월 28일에 중원의원회관에서 열린 이벤트에 비디오 메시지를 보냈다 [29] .

무라야마 내각의 시정 편집 ]

1994년 7월 20일 , 중의원 본회의에서

무라야마 내각 은 1994년 55년 체제 하에서 이어진 보혁 대립에 종지부를 친 자사 연립 정권 이었다.

와타나베 항웅 은 2000년에 “좋은 의미로 진보적 내각으로 사회당의 반안보· 반미 , 국가 · 국기 반대를 무너뜨리고, 국론통일의 폭을 훨씬 넓혀준 것이 최대의 공적”이라고 무라야마를 칭 했다 [30] .

시정 정책 편집 ]

총리대신 취임 후의 소신표명연설 속에서 무라야마 내각의 시정방침으로서 「사람에게 친숙한 정치」 「안심할 수 있는 정치」를 내걸었다 [31] .

정책강령 편집 ]

사회당과 신당사키가케가 맺은 정책 합의에 대해 자유민주당이 참여해 1994년 6월에 ' 자사함 공동정권 구상 '으로 합의되어 무라야마 내각, 제1차 하시모토 내각 의 정책강령이 되었다.

무라야마 담화 편집 ]

1995년 8월 15일 전후 50주년 기념식전에서 무라야마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 전 동전 중에 갔다고 여겨지는 아시아 국가에 대한 '침략'과 ' 식민지 지배'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전후 50 주년의 종전 기념일에 있어서」라는 제목의 내각 총리대신 담화를  의 결정 위에 발표했다. 무라야마 이후의 역대 내각도 모두 역사 인식 으로 담화의 답습을 명언하고 있다. 「무라야마 담화」라는 명칭이 정착되어 있어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로 취급된다 [32] .

무라야마 담화 성립의 경위 편집 ]

1994년 6월 30일 스스로의 뜻에 반하여 뜻밖에 자민당·사회당·신당 사키가케의 3당 연립정권의 총리로 지명된 무라야마는 “중의원에서 불과 70석 정도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사회당의 위원장이 총리로 선정된 것은 헌정의 상도에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러한 내각이 태어난 것에는 어떠한 필연성이 있어 역사적인 역할이 부과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 절목이며 자민당 정권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던 과거의 전쟁의 역사 인식 문제 등 내외의 여러 과제에 굳이 붙인다”고 결의해 신정권 수립의 삼당 합의 사항에 “과거의 전쟁을 반성하는 결의를 한다”는 내용을 담아 ‘50년 문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총리 취임 후 아세안 제국을 역방한 무라야마는 “아시아 각국은 일본에 대해 표적으로는 좋은 얼굴을 하지만 실제로 경제대국이 된 나라는 다시 군사대국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일본은 과거의 전쟁 의 후시말을 붙이지 않았는지, 또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면 좋지만, 하는 의심을 말밖에 느꼈다”고 말한다.

1995년 6월 9일, 중의원 본회의 에서 과거 일본이 실시한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사죄하는 「역사를 교훈으로 평화에의 결의를 새롭게 하는 결의」가 채결되지만 자민당 의원으로부터도 다수 의 결석자가 나와 만장일치로 통과할 수 없었다는 것을 받아 무라야마는 담화의 작성을 결심한다.

이가라시 히로조 관방장관을 중심으로 여러 학자들이 무라야마가 과거 연설에서 발언한 내용 등을 담은 형태로 담화 문안을 작성했다. 무라야마는 담화 문장이 완성된 후 일본 유족회 회장인 하시모토 류타로 통산대신 에게 뿌리를 돌리는 의미에서 담화 문장을 보이자 하시모토가 “문장 안에서 종전과 패전을 사용하고 있지만 패전으로 통일했다. 더 나은 것이 아닐까”라고 지적해 무라야마도 찬성한다.

전후 50년째의 종전 기념일인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는 “사회당의 위원장이 총리가 된 이상 이 정도의 담화를 낼 수 없으면 의미가 없다”라고 이의가 나오면 총리 사임을 어둡게 냄새 맡는 형태로 담화의 각의 결정에 임해, 내각 개조로 새로운 관방 장관으로 취임한 노자카 코겐도 담화에 이의를 주장하는 각료 가 있으면 즉시 파면 하는 각오였다. 각의에서 후루카와 사다지로 관방 부장관 이 담화를 읽고, 노사카가 「이의 없습니까?」라고 하면, 타카파 라고 불리는 에토 타카미 총무청 장관 , 히라누마 사토시 운수 대신 , 시마무라 요시후미 부 장관 을 포함한 전 각료( 무라야마 개조 내각 )이 한마디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담화에 서명해 만장일치로 각의 결정되어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다.

무라야마 담화 성립 이후의 움직임 편집 ]

무라야마는 담화 발표 당시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이다」라고 후계 총리가 담화를 답습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무라야마 뒤를 받은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 이후 [33] , 현재의 키시다 후미오 총리 에 이르기까지 모든 내각이 역사인식에 대해 이 담화를 답습한다는 취지를 명언하고 있다 [34] .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국 정부 의 공식적인 역사인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32] .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도 전후 60년의 종전 기념일인 2005년 8월 15일에 무라야마 담화를 답습하는 내용의 고이즈미 담화를 발표했다 [35] .

보수계 의원 등에 의해 무라야마 담화와는 견해를 달리하는 내용의 코멘트가 발행되어 그때마다 중국 , 한국 정부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일본은 전후 , 전시중에 행해졌다고 하는 침략 행위에 대해서는 당사국에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보상도 끝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사죄론은 불필요하다」라고의 비판이 있는 한편, 반대로 「 이 담화는 결국 '전쟁에 일본 정부는 말려들었다.

2008년 11월, 타모 신슌오 항공 막료장은 “일본은 침략 국가였는가”라는 논문을 발표. 아소 타로 정권으로부터 무라야마 담화의 정부 견해와는 다른 인식을 나타냈다고 해서 엄격한 비판을 받아 경계당했다 [36] .

2015년 총리 취임 전은 무라야마 담화에 비판적인 발언을 한 적이 있는 아베 신조가 전후 70년의 고비에 어떠한 총리 담화를 내는지 국내외에서 주목받지만 같은 해 1월 5일 의 연두 기자 회견 에서 “ 아베 내각 은 무라야마 담화를 포함해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다. 그 위에 미래 지향의 새로운 담화를 발표하고 싶다”고 발언해, 무라야마 담화의 답습을 명언했다 [37] .

무라야마 자신의 담화에 대한 생각 편집 ]

오럴 히스토리 「무라야마 토미시의 증언록」등 중에서 무라야마 담화에 대해 「원래 일본 국내에는 과거의 전쟁은 맞았는지 잘못이었는지 명확한 통일 견해가 없었다.그 중에서 과거의 전쟁을 총괄 하는 정부 견해로 무라야마 담화를 내놓고 전후 50년의 고비에 일단의 맹목을 붙일 수 있었다. 하나의 국제적인 정의가 되고 있다. 지배로부터 아시아를 해방하기 위한 것이었고, 일본이 싸웠기 때문에 아시아 국가들은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좋은 면도 있었다고 전쟁을 정당화할 의견도 있다. 그러나 전쟁 확대에 반대하는 신중 논란도 있었지만 군의 폭주를 저지하지 못하고 일본이 아시아에서 침략, 식민지 지배를 추진한 사실에 틀림은 없다. 와의 신뢰관계  구축해 나가야 한다 . 하지만 대다수의 국민은 무라야마 담화를 지지하고 있으므로 안심해 주었으면 한다고 답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 1995년 8월 15일의 담화 성립 당시를 되돌아보며 “중의원 본회의에서 결의한 “역사를 교훈으로 평화에의 결의를 새롭게 하는 결의”(1995년 6월 9일)에는 자민당 내에서도 결석 자가 속출한 것처럼 자민당 의원 중에는 본심의 부분에서는 침략, 식민지 지배의 인정에 저항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자민당은 무라야마 정권이 성립하기 전에는 야당 에 전락해 비애를 핥아 왔기 때문에, 여기서 무라야마씨에게 그만둘 수 있는 것만은 곤란하다고 하기 때문에 담화에 서명한 것은 아닐까. 있는 것만으로 한마디의 발언도 없이 만장일치로 정해졌다. 는 할 수 없었지만, 그 때문에 각의 결정해 정부의 방침으로서 나타내게 되었기 때문에 무라야마 담화는 반대로 무거운 것이 되었다. 적어도 내 앞에서 담화에 저항한 사람은 없다」 있습니다.

전후의 총괄 편집 ]

피폭자 원호법 제정 편집 ]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 설립 편집 ]

1994년 8월 ' 위안부 문제'에 관하여 민간기금에 의한 견무금 지급 구상을 발표하고, 1995년 7월 총리부 와 외무성 관할하에서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 '을 발족 했다. 이 기금에 의해 1997년 1월 한국인 전위안부에 대한 견무금 지급이 시작되었다.

무라야마 내각 성립 이전, 국비에 의한 손해배상 과 정부의 사과를 요구한 전위안부에 의한 소송이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타국과의 조약 체결 시 이들 문제가 해결됐다는 입장으로 국비 투입으로 전위안부에 손해배상을 할 수 없다고 여겨졌다. 무라야마가 제시한 구상에서는, 정부가 기금을 설립해 자금은 민간으로부터의 기부로 하는 것으로, 직접의 국비 투입을 피하는 것과 동시에 모금에 응한 국민의 진지한 생각이 전해진다고 어필하는 것으로, 양자의 주장을 짜고 문제 해결을 도모하는 목적이 있다. 무라야마 자신은, 발족의 경위에 대해 「『어디까지나 정부 보상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으면, 다른 한편으로는『전시 배상은 법적 으로는 모두 해결이 끝난다 . 그럼 제대로 돈을 지불하고 있었다」라고 하는 목소리까지, 국내외의 의견의 격차는 크다” [38] , 「여당 3당의 사이에서도 가혹한 의견의 대립이 있었다」[38] 가, 「그것을 극복 일치점 을 발견하고, 기금의 발족에 빠졌다. 38 ] 의 명예회복을 도모한다” [38] 에는 “여러가지 비판은 있겠지만, 당시의 임박한 상황에서는 이것밖에 방법은 없었다” [38] 라고 적고 있다.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의 초대이사장에게는 원문 병위 , 제2대 이사장에게 내각총리대신 퇴임 후 무라야마가 맡아 약 6억엔의 모금을 모아 전위안부의 생활지원만 여성의 명예 존엄 일반에 관한 사업을 전개해 왔다. 필리핀 , 대한민국, 중화민국 에서 지원사업을 전개하고 인도네시아 사업종료를 예정하는 2007년 3월 해산하는 것이 이사장인 무라야마에 의해 발표되었다.

2000년 9월 1일 제2차 모리내각 에서 내각 관방장관 의 나카가와 히데나오 가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에 관한 기자회견을 열고 이 기금에 대한 일본국 정부의 인식을 다시 표명했다.

2007년 3월 6일 무라야마는 기자회견을 열고 위안부 문제로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미국 하원 에서 심의되고 있는 것에 대해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을 통해) 역대 총리가 위안부에게 사과의 편지를 낸 것이 이해되지 않은 것이 지극히 유감”이라고 발언하고 있다.

재해·사건에 대처 편집 ]

한신·아와지 대지진 편집 ]

1995년 1월 17일, 효고현 남부 지진 에 의해 한신·아와지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일본국 정부의 대응이 늦어진 것에 대해 비판되었다.

위기관리 체제
자위대 파견이 늦은 이유에 대해 「아무튼 처음이기 때문에」라고 대답해, 그때까지 호감의 이미지로 비교적 사랑받아 온 무라야마는 일본 국민으로부터 강한 비난을 받고, 내각 지지율의 급락 에 연결되었다 [2] . 이윽고 대응 지연의 전모가 밝혀짐에 따라 법제도를 비롯한 당시 일본 정부의 위기관리체제 자체의 품림이 드러났다.
지진 재해 발생은 오전 5시 46분쯤이었지만 당시 총리관저에는 위기 관리 용 당직 은 존재하지 않았다. 또 재해대책소관의 국토청 에도 담당 당직이 존재하지 않았다.
연립 내각에 대한 내각 관방 과 관료 의 충성심의 낮음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지진 재해 후, 고토다 마사하루 에게 지시된 사사 준행이 , 총리 관저 멤버 앞에서 위기 관리 의 강의를 실시했지만, 열심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것은 무라야마 단 혼자이며, 그 이외의 정무·사무 스태프는 모두 아무런 관계없이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사사가 엄격히 계명했다고 한다. 또, 무라야마가 지진 재해 직후에 국민을 향해 기자 회견을 열려고 하고 있었지만, 내각 관방 직원으로부터 멈추고 있었다, 라는 일화도 사사의 저서 [39] 로 소개되고 있다.
무라야마는 “초동 대응에 대해서는, 지금과 같은 위기 관리 체제가 있으면, 보다 신속하게 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의 사망자를 내버린 것은, 愚愧(자키)에 참을 수 없다. 칠일 아침은 매년 집에서 묵묵히 한다” [40] 라고 말하고 있다. 또, 「위기 관리의 대응의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초동의 발동이, 늦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것은 더 이상 변명할 수 없네요. 그래. 정말로 죄송합니다」[41 ] [42] 라고 말하고, 변명이나 반론을 할 수 없고, 반성하고 있다는 생각을 말하고 있다.
당시 역대 재임일수 최장의 내각 관방 부장관 으로서 관저에 무게를 두고 있던 이시하라 노부오 는 “전례가 없는 미연유의 재해로 법제도의 미정비 상태에서는 무라야마 이외의 누가 내각 총리 대신 하지만 신속한 대응은 불가능했다. 43] 또 이시하라는 한편으로 「(내각이 즉시 행동을 일으키는 시스템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은) 그 원인은, 멀리 물으면 역시 사회당입니다. 사회당이 내각 권한 강화에 계속 반대했던 것입니다. 내각 민첩하게 대응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아니,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회당에서 나온 총리대신 때 그 위기관리를 해야 하는 사태가 일어나 버렸다. 이것은 힘들다. 이야기입니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44] .
법 제도상의 문제
자위대 의 출동은, 법제도상, 현지· 효고현 지사 조개 하라 슌민 (당시)의 요청이 없으면 명령할 수 없었다. 당일 오전 8시 10분에는 방위청 · 육상 자위대 히메지 주둔지 에서 효고현청에 출동 요청을 내도록 타진되고 있다. 또, 오전 10시전에는 자위대의 헬리콥터를 날려 피해지의 정보 수집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조개하라가 등청한 것은 그 이후로 현황 파악에 시간이 걸렸다. 최종적으로, 조개하라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효고현 참사(방재 담당)가 출동 요청을 오전 10시 10분에 실시해, 그 4분 후의 오전 10시 14분에는 자위대가 출동하고 있다.
2007년, 도쿄도 지사의 이시하라 신타로 는 “고베의 지진 때는, (자위대의 파견을 요청한다) 수장의 판단이 늦었기 때문에, 2000명 불필요하게 죽은 것이군요” [45] 라고 발언해, 지방공공단체의 대응 지연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조카하라는 "이시하라 씨의 오해. 분명히 위기관리면에서 반성은 있지만 요청이 늦었기 때문에 사자가 늘어난 것은 아니다. 희생자의 80% 이상이 발생 직후에 압사하고 있었다" [46] 과 반론하고 있으며, 파견요청의 지연과 희생자수의 증가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한다. 또, 지진 재해 후에 효고현 방재감에 취임한 사이토 토미오는, 이시하라의 지적은 「전혀 근거가 없는 발언으로, 정말로 유감」[46]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회당 내분
당시 야마하나 사다오 등 사회당의 일부에는 분열의 움직임이 있고, 1월 16일 회의에서 민주신당클럽의  에다 만리 등도 발기인에 합류하여 신당결성을 결정 [47] . 1월 17일에 회파 이탈 신고의 제출을 ​​예정하고 있었다. 그 이른 아침에 지진 재해가 발생했기 때문에 중지할 것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야마카들은 당일 오전 중에 회파 이탈 신고를 제출했다 [48] . 무라야마는 당일 11시 지나 "야마하나 씨는 토론을 보고 싶다"고 기자에게 코멘트했다 요출전 ] . 다음 1월 18일, 신당 결성은 배웅이 되어, 산꽃은 5월 10일에 사회당을 이당했다 [49] .
부흥 대응
지진 재해 직후, 무라야마는 국토청 장관 오자와 결 대신에 고리 사다리를 지진 재해 대책 담당상 으로 임명해 부흥 대책의 총 지휘에 해당한다. 또 시모카와베 아츠시 를 위원장으로 하는 지진 재해 부흥 위원회를 조직해, 부흥안의 책정을 진행했다. 피해자에 대한 지원으로서 16개의 법률을 개정 및 제정하여 피해자에 대한 세금 부담의 경감 등을 도모했다.

앵무새 진리교에 대한 파괴 활동 방지법 적용 신청 편집 ]

1995년(헤세이 7년) 3월 20일, 지하철 사린 사건이 발생했다. 무라야마는 법무 대신 마에다 훈남 , 국가 공안위원회 위원 나가나카 광무 , 경찰청장관 쿠니마츠 타카지 , 내각 관방장관 이가라시 히로사라 관계 간부에 철저히 수사를 지시, 진두 지휘를 하는 자세를 보여, 사건 수사에 대해 별건 체포 등 모든 수단을 이용해”라고 발언했지만, 이는 형사수사의 시비에 대해 정치사이드의 말로서는 현저히 문제화했다. (후술)

지하철 사린 사건 등 일련의 사건을 일으킨 앵무새 진리교 에 대해 파괴활동 방지법 적용이 검토되어 공안조사청이 처분청구를 했다. 공안심사위원회 는 파괴활동방지법 적용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적용은 배송되었다.

1952년에 공포된 파괴활동 방지법 은 폭력주의적 파괴활동 을 실시한 단체에 대하여 규제조치를 정한 법률이다. 당초는 일본 공산당 이나 일본 적군 등의 폭력 혁명 에 의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전복을 지향하는 극좌 세력의 확대를 방지하는 목적도 있었기 때문에, 사회당 [주석 4] 처음 55년 체제하의 야당 각당은, 종래법의 적용에 매우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앵무새 진리교에 대한 파괴활동 방지법 적용에는 경찰관료 출신으로 자민당 고토다 마사하루 로부터도 이론이 나오는 등 찬부양론이 분출했지만, 법무대신 미야자와 히로시 , 국가공안위원장 노나카와 협의한 무라야마 는 공안조사청의 조사를 존중하겠다고 결단하고 공안심사위원회에 대한 처분청구에 길을 개척했다. 지하철 사린 사건의 수사에 관해 앞서 언급한 ' 별건 체포 ' 취급에 대한 발언이 본래라면 리버럴 파로서 동지향적인 면이 강한 인권파 변호사들로부터도 큰 반발을 받는 등 찬반양론이 되었다.

2007년 3월 17일 ‘지하철 사린 사건 피해자의 모임’이 짠 ‘나에게 있어서 지하철 사린 사건’에 수기를 올렸다. 이 책에는 쿠니마츠나 『언더그라운드』를 쓴 무라카미 하루키 등도 기고하고 있다.

하이잭에 경찰 특수부대 투입 편집 ]

1995년 6월 하네다발 하코다테행 전일공 857편(승무원 승객 365명)이 도용되어 ' 살린을 소지하고 있다'는 범인이 앵무새 진리교조로 전월에 체포 · 구류 되어 있던 아사하라 아키라 석방을 정부에 요구했다.

무라야마는 국가 공안 위원장의 노나카나 운수 대신 의 카메이 시즈카 와 협의해, 하이잭범과의 교섭에는 일절 응하지 않는 방침을 굳히고, 경시청 경비부 제6 기동대 특과 중대(Special Armed Police, 통칭 SAP )의 투입을 지시했다.

SAP에 돌입을 지시한 후 무라야마는 "만약 죽은 사람이 나오면 백장속으로 유족 아래 사과하러 갈 각오"라고 발언하고 노나카는 "그 때는 나도 동행한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기내의 모습에 대해 수집한 정보로부터 앵무새 신자가 아니라고 판단. 경시청 경비부 제6기동대 특과 중대(SAP)는 돌입에 참여하지 않고 후방 지원으로 돌아가 홋카이도 경찰 본부 기동대 대 총기 부대 와 하코다테 중앙 서원 의 돌입을 지원. 범인을 체포했다. 경상자가 1명이었다.

사린으로 된 물질은 단지  이었고, 납치범은 앵무새 진리교와는 전혀 무관한 정신질환으로 휴직 중인 동양신탁은행(현 미쓰비시 UFJ신탁은행)의 회원이었다.

당시 경찰청 은 특수부대인 SAP의 존재 자체를 극비로 하고 있었고, 실전 투입 후에도 그 존재가 공개되지는 않았다. 1996년 경찰청은 홋카이도 경찰 본부, 지바현 경찰 본부, 가나가와현 경찰 본부, 아이치현 경찰 본부, 후쿠오카현 경찰 본부에 부대를 증설해, 경시청, 오사카부 경찰 본부 의 SAP와 함께, 정식으로 「특수 급습 부대」(Special Assault Team, 통칭 SAT)의 호칭을 주어 정규부대로 공표했다.

외교 편집 ]

1994년 7월 9일 제 20회 선진국 정상회의 에서 선진 7개국 정상  과
1994년 11월 9일 , 무르데카 궁전 에서 인도네시아 대통령 의 수하르트 (왼쪽)와

하네다 내각에서 무라야마 내각으로의 이행은 정권 교체가 되는 것이지만, 외교 방침은 종래의 일본 정부의 것을 기본적으로 계승해, 행정의 계속성을 유지하고 있다.

대 미국 편집 ]

무라야마 내각 성립시 당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 은 사회당 출신의 총리대신에게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94년의 제20회 선진국 정상회의 ( 나폴리·서미트 ) 전의 회담에서, 무라야마가 가난한 어촌에 태어나 자란 스스로의 생생으로부터, 정치가를 뜻에 이르는 과정 등을 부끄럽게 말했더니, 이를 들었던 클린턴은 굉장히 감동하고, 그 후의 서밋에서도 익숙하지 않은 무라야마를 어쨌든 서포트했다고 한다 [50] . 무라야마의 지금까지의 해외 도항력은 불과 4번 밖에 없었고, 본인도 불안을 가지면서의 참가였지만, 무난하게 극복할 수 있었다 [2] .

미일 안보 유지 편집 ]

해상 자위대 관함식 에서의 무라야마(1994년 10월 16일)

1994년 7월 20일, 제130회 국회에서의 소신 표명 연설 에서 「자위대 합헌」, 「일미 안보 견지」라고 명언해, 지금까지의 일본 사회당의 정책을 전환해, 일미 안보 조약 체제 계속 확인했다.

이 때, 연설용 원고에서는 「일미 안보 체제를 유지」가 되고 있었던 것을, 소신 표명 연설에서는 무라야마가 「일·미 안보 체제를 견지[51] [52] [53] 라고 읽었다 것이 주목 받았다.

이것은 무라야마 출신 정당인 사회당에 있어서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였다. 하향식으로 결정한 배경에서 독단 전행과 비판도 받았지만 당은 추인하고 있다.

내정 편집 ]

내각 관방 부장관을 맡은 이시하라 노부오 는 무라야마 내각에 대해 "국정상의 오랫동안 현안이었던 것을 거의 처리했습니다. 이것은 힘든 일을 한 것입니다"라고 연금 개혁, 소비 세율에 걸리는 세제 개혁, 일본인 구출을 위한 자위대법의 개정, 피폭자 원호법 성립, 미나마타병 대책의 해결, 행정 개혁법 성립을 들고 있다 [44] .

원자력 발전의 용인 편집 ]

그동안 원전 반대 운동을 이끌고 있던 당 방침에서 전환해 국회답변에서 “전력 수요를 고려하면 어느 정도의 원자력발전 조성도 이건 부득이하다”는 지침을 제시했다.

재활용법 제정 편집 ]

스틸캔 , 알루미늄캔 , 유리병 등의 분별 수집 이나 리사이클 등에 대해서 정한, 용기 포장에 관한 분별 수집 및 재상품화의 촉진 등에 관한 법률 (용기 포장 리사이클법)을 제정하였다 [54] .

미나마타병 환자 구제 편집 ]

나리타 공항 문제에 대한 대응 편집 ]

1991년 11월부터 15회에 걸쳐 개최된 「나리타 공항 문제 심포지엄」과, 계속해서 1993년 9월부터 12회에 걸쳐 개최된 「나리타 공항 문제 원탁 회의」에서의 결론을 받아, 무라야마는 1995년, 이것 까지 공항 문제의 경위에 대해 현지에 사과했다. 이에 따라 제2기 공사로의 용지 인수에 따른 지주도 나타났다. 그 후, 1996년에 미매수지를 피하는 형태로 잠정 활주로를 건설하는 방안이 계획되었다. 무라야마 등 정부의 사죄에 더해 중립위원들의 겹치는 일에 의해 나리타공항 반대파 주민의 강경자세도 점차 완화되고 있다.

선택적 부부별 성제도 편집 ]

선택적 부부별 성제 도 도입에 찬동하고 있었다 [55] .

종교법인법 개정과 창가학회 간의 갈등 편집 ]

앵무새 진리교 의 지하철 사린 사건을 받고 무라야마는 문부대신 시마무라 요시노부 에게 지시하여 종교법인법 개정안을 제134회 국회에 제출했다. 심의에 즈음해, 자유민주당, 일본 사회당, 신당 사키가케의 여당 3당이, 창가 학회 명예 회장 이케다 다이사쿠 와 창가 학회 회장 아키타니 에노스케 의 증인 환문을 요구했기 때문에, 야당의 신진당 , 공명이 반발했다. 공명소속 의원과 구 공명당 에 참가하던 신진당 소속 의원들이 참의원 종교법인 특별위원장 사사키 만을 감금하거나 국회의사당 에서 피케팅을 하거나 채결 저지를 꾀했기 때문에 국회가 공전한다 사태로 발전했다. 최종적으로 아키타니를 국회에 참고인 소치한 뒤 개정 종교법인법을 성립시켰다.

덧붙여 무라야마는 창가학회의 정치 활동에 지극히 비판적인 정치가로서 알려져 있다 요출전 ] .俵孝太郎등이 창가학회의 정치활동에 비판적인 ' 4월회 '를 발족시켰을 때 무라야마는 일본 사회당 위원장의 직함으로 동회 설립 총회에 참석하고 있다. 1996년 1월 총리퇴임 시에는 총리대신 관저 에서 여당 3당 간부들에게 “3당 연립은 지키길 바란다. 그것이 자신의 희망이다. 이 나라를 창가학회의 지배하에 어떤 정당에 맡길 수는 없기 때문이다” [56] 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무라야마 내각 및 무라야마 개조 내각에는, 전술한 시마무라를 비롯하여, 카메이 시즈카 , 요사노 루 , 사쿠라이  , 다카 무라 마사히코 , 히라 누마 라이오 , 노나카 광무, 오시마 리모리  , 창가 학회의 정치 활동에 비판적인 ' 헌법 20조를 생각하는 모임 '의 주요 멤버들이 다수 입각하고 있다.

관저 기능 강화와 정치 주도 편집 ]

관저가 들어간 무라야마는 내각총리대신, 내각관방장관, 내각관방 부장관 을 제외하면 총리대신관저 직원들은 모두 관료 임에 위기감을 느꼈다. 「관저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행정 을 하는 청이 아니고 정치적인 판단을 하는 청이기도 하다」[57] 라고 생각한 무라야마는, 관저 내에 「좀 더 정치가의 발언, 의견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도 좋다 [57] 의 이유로 '내각 총리대신 보좌'의 포스트를 설치했다 내각 총리대신 보좌는 여당 3당에 소속된 국회의원 중에서 선택하는 것으로 하고, 나카가와 히데오리 , 하야카와 카츠 , 니시오리 아츠시 , 도이다 사부로 등을 임명했다. 선임된 내각총리대신 보좌는 총리 연설과 답변 등에 대한 의견구신과 정치과제에 관한 정보 수집을 담당했다. 이 내각총리대신보좌의 포스트는 총리의 사적인 상담역과의 자리매김이었지만, 후에 내각법이 개정되어 「내각총리대신보좌관」의 포스트가 법제화되었다(내각법 제19조).

정치사상 편집 ]

무라야마는 사회당당 내에서는 자치노우파, 정권구상연구회 , 수요회에 소속되어 있어 일관되게 사회당 우파 로 활동해왔다. 다만 무라야마 내각 성립 후, 오자와 이치로 등과 제휴를 목표로 자사 연립 정권에 비판적인 세력을 「사회당 우파」, 자사 연립 정권을 지지하는 세력을 「사회당 좌파」라고 언론이 편의적으로 호칭했기 때문에, 무라야마가 사회당 좌파인 것 같은 오해가 생겼다. 덧붙여 무라야마 내각에서 입각한 하마모토 만조 , 오오데 슌 , 야마구치 츠루 남들은 모두 사회당 우파에 속하고 있다.

원자력 정책 편집 ]

탈원전 활동을 하고 있는 무라야마는, 호소카와 호희 , 고이즈미 준이치로 , 하토야마 유키오 , 스가 나오토 의 전 총리 4명과 함께, EU 의 집행 기관· 유럽 위원회 의 위원장 인 울즈라·폰·데아·라이엔 반대로 EU 내에서 원전 반대를 요구하는 서한을 2022년 1월 27 일자 로 보냈다. 그러나 서한 속의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영향으로 아이들이 갑상선암으로 고통받고 있다 .

야마구치 장 환경상 은 “(현이나 유엔의 전문가에 의한 조사로) 현시점에서는 방사선의 영향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평가가 되고 있다.” “말할 수 없는 차별이나 편견을 조장하는 것이 우려되고 "우리 호리 마사오 후쿠시마 현 지사 도"후쿠시마 부흥을 위해서는 과학적 지견에 근거한 정보 발신이 매우 중요하다." "객관적인 발신을 부탁드립니다. 한 대응을 요구한 것 외에, 여야 간부들이 무라야마들을 비판하고, 특히 자민당은 무라야마들에 대한 비난 결의를 정리하는 자세를 보였다 [58] [59] [60] [61] .

한편 무라야마 등은 시민단체를 통해 야마구치 환경상이나 내보리 지사에 반대로 항의해 질문서를 보냈다 .

에피소드 편집 ]

  • 전후 정치권에서는 내각총리대신의 자리를 싸워 몇번이나 치열한 정쟁이 펼쳐져 온 가운데, 자신의 의사에 반해 주위의 추거에 의해 총리에 취한 희귀한 존재. 무라야마 자신 「총리 대신이 되려고 생각한 적도 없으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고 일본중 누구 한 사람 내가 총리가 된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수반 지명 선거로 선택되면,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총리 관저에 단신 부임으로 데려간 것 같은 것”이라고 술회하고 있다.
    • 실제로 비자민 연립정권의 하네다 정권이 좌절한 것으로 자민당을 포함한 많은 유력 의원들로부터 총리 취임을 설득받았을 때도 ‘어디의 나라의 이야기’라며 고사하고 계속해서 수반 지명 선거에서 자민당이 자신에 대한 투표로 이야기를 정리한 것으로 알려지지 않았고, 수면하에서 자사 정권 성립에 분주한 측근 노사카 코리 에게 "내가 당선하면 어떻게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 스스로의 인생을 「순회의 인생」이라고 말했다 [63] . 욕심 없는 성격으로 오이타시 의회 의원으로부터 현 의회 의원, 중의원 의원, 사회당 위원장을 거쳐 내각 총리 대신을 맡은 것도 “모두는 자신의 의사가 아니다. 우연히, 우연히, 순회의 연속으로 주위로부터 등을 밀려 그렇게 됐다. 하지만 총리가 된 이상은 열심히 하는 것 외에는 없으면 배고프다”고 말한다. 사회당 위원장과 총리에 취임했을 때 "왜 내가 이 자리에 앉게 된 거잖아"라고 말했다.
  • 총리 재임 중에는 카메이 시즈카 와 노나카 광무 등 자민당 내에서도 무투파로 불린 의원들로부터 열렬히 지지되어 카메이, 노나카는 후년도 무라야마를 최고의 총리였다고 칭찬하고 있다.
  • 총리 재임 중에는 「자위대의 일본국 헌법과의 합헌성」이라고 하는, 오랜 일본 사회당의 정책을 전환하는 고신의 선택을 강요받은 것 외, 한신·아와지 대지진이나, 앵무새 진리교 사건, 전일 공기 하이잭 사건 등 대재해, 대사건이 빈발한 것도 있어 사임 후에 수면제 를 마시면서 총리를 맡았다고 보도됐다.
  • 총리 재임 중 아내가 지병(요통) 때문에 공무에 동반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비서를 하고 있던 딸이 동행했다. 총리대신 공저 에는 딸 부부, 손자 2명과 동거했다.
  • 총리 취임 직후 이탈리아 나폴리 에서 열린 선진국 정상회의 에 참석했다. 국제회의 참석은 당연히 처음이었기 때문에 출발 전에 미야자와 키이치 전 총리가 “ 통역이 있기 때문에  에 대해 걱정하지 않아요” [64] 등의 조언을 했다.
  • 총리 재임중은, 수상 경험자로 동년의 다케시 타 등원 총리가, 무라야마의 좋은 상담 상대가 되고 있었다(다케시타는 1924년 2월 26일생, 무라야마는 같은 해 3월 3일생으로 거의 같은 시기에 탄생하고 있다) 요출전 ] . 또한 무라야마는 역대 내각 총리대신으로 다이쇼 출생 마지막 총리대신이기도 하다.
  • 총리 재임 중에 베트남 요인과 회담했을 때 "베트남이 성장한 것은 일본 덕분입니다."라고 사교 사령을 말했 을 때 "그것은 다릅니다. 있어. 일본은 그 도움을 했을 뿐이야」라고 말을 돌려주었다. 그 이후, 베트남의 요인은 무라야마에 존경의 마음을 띄워 사교 사령을 넘은 회담이 되었다. 국회의원을 그만둔 뒤에도 베트남으로 왕래하고 있다.
  • 정상회의 개회 전 리셉션에서 복통과 설사를 일으켜 중좌, 다음날도 일부 회의를 결석하는 등 관계자를 걱정시켰다. 해외 방문 경험이 적은 무라야마는 체류 중에는 현지의 음식물에 매우 주의하고 있어 체류처의 총영사공저에서 나온 식사만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회담 전에 정상이 옥외에서 환담했을 때, 웨이터가 내놓은 복숭아 주스에 실수로 손을 내밀어 버리고, 그것에 해당해 버렸다고 나중에 술회하고 있다. 이날 저녁 리셉션 무렵에는 이미 컨디션이 나쁘고 일체 요리에 손을 대지 않았다 [주석 5] . 하치만 카즈로 등 은 외무성 등이 무라야마의 건강 관리를 충분히 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 자신의 정권운영에 대해 큰 반성이 있다고 하는 한편, 민주당 정권은 어느 내각도 웃도는 정도의 사상 드물게 보는 끔찍한 정권이라고 노다 요시히코 내각의 소비세 증세 방침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 “ 납치문제 가 정리되지 않기 때문에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은 영원히 이야기할 수 없다 . 하지만 부족하다고 하면, 쌀을 보내는 것 같은 것은 당연히 있어도 좋을까」라고 발언(1999년경).
  • 톤짱의 애칭으로 불린다 [65] . 사회당은 무라야마를 모델로 한 마스코트 '돈짱 인형'을 발매했다. 덧붙여 총리대신 재임중의 해외 미디어에서의 통칭은 「토미」였다.

인물상 편집 ]

  • 무라야마 후, 부모가 정치가가 아닌 총리대신은 2010년의 스가 나오토 까지 없었다( 모리키로 의 아버지는 국회의원은 아니었지만 현지의 촌장을 맡고 있었다).
  • 현재의 각료 자산 공개 제도가 시작된 1987년 이후 무라야마의 자산은 역대 총리 중 최하위로 메이지 ​​시대 에 건조된 자택의 시가가 ‘수십만엔대’로 발표되었기 때문에 청빈이라는 이미지 을 가진 [주석 6] [주석 7] .
  • 서민파재상이라 불리며 정계은퇴 후에도 생활상은 질소로 조심스럽고 오이타 시내를 이동할 때는 자전거를 사용하고 있다.
  • 정권 발족 후 8월, 총리 주변이 여름방학의 계획을 세우려고 하면, "나는 연중 무휴의 어부의 출신. 필요"라고 거절해 주위가 그런 일을 하면 세계의 행정부의 웃음 씨가 된다고 설득했다. 그 후 「그럼 민박에 묵고 싶다」라고 희망했기 때문에, 관계자가 몇개의 민박을 찾았지만, 「총리가 묵고 싶어? 보내게 되었다.
  • 긴 눈썹은 트레이드 마크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 TV 의 『진행! 전파 소년』에서는 마츠무라 쿠니요가 자랑의 눈썹을 자른다는 기획에 승낙했다.
  • 2007년 제21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에서 “무라야마가 비례구 에 입후보할 것인가”라는 문의가 있어 관계자를 곤혹시켰다. 원인은, 오이타현 선거구 무소속 후보인 마츠모토 후미로쿠가 , 무라야마와의 투샷의 선거 포스터 5000장을 내밀었기 때문이라고 보여지고 있다 [66] .
  • 신장은 173cm로 1920년대 출생으로는 장신이다.
  • 장녀는 마리(1955년 6월 8일생 [67] ), 차녀는 퍼스트 레이디를 맡은 나카하라 유리 [68] , 손자가 두 명 있다 [69] .
  • 오이타시의 자택 옆이 오오세키 치요 다이카이 (현· 구중 부모님)의 친가로, 치요 다이카미가 어린 시절, 무라야마에서 머리를 쓰다듬거나 음료를 주거나 했다고 한다.

교우 관계, 타인에게의 평가·발언 편집 ]

호적 오이치
무라야마가 메이지 대학의 학생 시절에 들어가 있던 지친 기숙사의 기숙사장. 무라야마는 “종전 직후 우익에서 좌익부터 다양한 사람이 지채 기숙사에 출입했지만 호세 씨는 일절 구별도 차별도 하지 않고 누구와도 분리하지 않고 접했다. 설교를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이런 삶을 살 수 있다면 훌륭하다고 생각했다.”라고 호적 5일 부터 깊은 가오루를 받았다고 술회한다.
아사누마 이나지로
「대중과 함께 대중과 배운다」라는 무라야마의 정치철학은, 사회당 위원장의 선배이기도 한 아사누마 이나 지로의 삶에서 배운 교훈이라고 말해, 사회당에 뼈를 메우기 결의를 한 것은, 아사누마와의 만남, 위대한 존재로서 지극히 깊은 존경의 마음을 안고 있다. 「아사누마씨가 우익 청년에 자살된 것은, 아무래도 잊을 수 없다」 「헌법 9조를 지키는 것이, 아사누마의 정신이 계속 살아 있는 증거」등이라고 계속 말한다.
이치만다 쇼토
오이타현 의회 의원 시절의 무라야마는 다른 오이타현 의의와 시정촌장들과 함께 오이타 출신일 때의 오오쿠라 장관 · 이치만다 나오토 에, 오이타현에의 신산업 도시 지정을 진정했다. 그런데 이치만타로부터는 “국가 전체를 고려해 가부를 판단해야 하는 문제이며, 진정에는 좌우되지 않는다”라고 갇혀 버렸다. 무라야마는 그런 이치만다에 실망하는 커녕, 반대로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70] .
도이 타카코
1989년 7월의 참원선에서 일본 사회당이 대승해 위원장이었던 도이 타카코 가 「산은 움직였다」라고 말한 당시를 되돌아보며 「도이씨의 인기는 굉장했다. 그래서 사람이 많았다. 그런 인기는, 그 사람이 아니면 만들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라고 평하고 있다. 도이는 무라야마가 총리 시대의 중의원 의장 이며, 의장 사임 후에 함께 사민당을 지지하는 등 맹우 관계라고 할 수 있다. 2014년 9월에 체거한 도이의 이별회에서 “헌법을 지키고, 생활에 살리면서 외치고 계속 노력해 왔다. 나보다 젊은 토이씨에 앞선 것은 유감이지만, 뜻을 이어 절대로 지켜낸다. 오타카, 고마워요”라고 추모의 말을 말했다.
야마하나 사다오
무라야마의 전임의 사회당 위원장. 1993년 총선 후에 성립한 비자민연립정권 호소카와 내각 에 국무대신(정치개혁담당)으로 첫 입각하지만 이 총선에서 사회당은 대패했기 때문에 위원장은 사임했다. 무라야마 정권 발족 후, 사회당의 틀을 넘은 민주·리버럴 세력을 결집하는 신당 구상을 내세운 야마하나 사다오 에 대해, 무라야마는 “왜 서두르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고, 신당 반대의 의향을 전하지만, 이별에 끝난다 . 그러나 산화가 신당결당을 위한 회파 이탈신고를 제출할 예정이었던 날, 한신·아와지 대지진이 발생해, 그 대신은 없어져, 산화신당은 사라졌다.
쿠보유
무라야마가 사회당 위원장 시대의 서기장. 야마하나 사다오 사임 후의 사회당 위원장 선거에서는, 쿠보 테이와 무라야마의 이름이 사로잡혔다. 무라야마는 자신이 위원장이 되기에는 단승 반대였지만, 주위의 설득을 받아 출마를 결심했고, 쿠보는 무라야마와 회담해 출마를 포기하고 서기장으로 취임했다. 쿠보는 사회당 내에서도 비자민연립정권파의 입장이며, 사고방식의 차이는 있었지만, 무라야마는 총리 시대, 당무는 거의 쿠보에게 맡겼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가라시 히로조
무라야마가 뜻밖에 총리로 지명되어 조각에 들어갔을 때 관방장관은 주저하지 않고 이가라시 히로조 를 지명했다. 「수완, 역량, 커리어, 인품, 어느 쪽을 봐도 최적의 사람」이라고 해, 무라야마 정권 시대에 한신·아와지 대지진 이나 앵무새 진리교 사건 이라고 하는 위기 대응 등에도, 수완을 크게 발휘했다고 높이 평가해 있다. 2013년에 사망한 이가라시의 이별회에 참석해 “나보다 2세 젊고(87세) 아직도 일할 수 있는 나이였다”고 말했다. 현역 시대에는 이가라시 등 몇 명의 사회당 의원과 부부 동반으로 나라를 밤새 여행한 적도 있다고 한다.
노사카 코켄
무라야마 개조 내각에서 관방장관을 맡은 노자카 코겐 은 무라야마의 측근적 존재. 소수 여당의 하네다 내각이 좌절해 정국이 혼미하는 가운데, 옛부터 면식이 있던 자민당의 카메이 시즈카 와 수면하에서 협상을 거듭해, 자사사 연립 정권 성립에 진력했다. 그러나 무라야마 본인은, 1994년 6월의 수반 지명 선거에서, 자민당이 무라야마에의 투표로 이야기를 정리한 것은 알려지지 않고, 투표가 진행되는 가운데, 앞의 자리에 앉는 노자카에게 「와시가 당첨되면 어떻게 하는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노자카는 무라야마로부터 총리 퇴진의 의향을 털어놓자 "이것이 총리와 나의 유일한 싸움이다"라고 말할 만큼 철저히 퇴진에 반대했다.
고토다 마사하루
무라야마는 고토다 마사하루 가 중의원 첫 당선 무렵에는 다나카 각영 에 가깝고, 금전 부정의 인상이 강한 고토다에 국회에서 야지를 날렸지만 의 해외파견 반대만은 협력하려고 부르고 이후 비둘기파끼리 의기투합한다. 무라야마가 총리 재임 중, 한신·아와지 대지진 등에 즈음해 고토다가 자주 조언을 실시해, 무라야마도 1995년 7월의 참원선에서 사회당이 패배한 후, 진퇴를 상담하는 등 좋은 상담 상대의 한사람이었다.
카지야마 시즈로쿠
무라야마가 사회당 국회 대책 위원장을 맡고 있었을 때, 자유민주당에서는 카지야마 시즈로쿠 가 국회 대책 위원장을 맡고 있어, 국회 운영을 둘러싸 양자는 종종 대립했다. 그 후, 카지야마는 2000년 제4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눈앞에서 사망하고, 무라야마는 제4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지 않고 중의원 의원을 은퇴했다. 그 때 무라야마는 카지야마에 대해 “결정한 것은 제대로 지킨다 . 또 자사 정권 성립 전에는 카야마로부터 총리 취임을 설득받았다고 한다. 덧붙여 무라야마와 카야마는, 양자 모두 대일본 제국 육군 군조를 경험해, 지방 정계를 거쳐 국정에 진출했다고 하는 공통점이 있다.
이시하라 신타로
이시하라 신타로 는, 무라야마가 사회당 국회 대책 위원장을 맡고 있을 때 「미군 요코다 기지의 문제는, 본래 사회당이 임해야 할 과제」라고 말하면 무라야마가, 솔직하게 물어 쓰치다 타카코 위원장에게 진언했다 일로부터 친해져, 1994년 6월의 자사정권 성립 직전에는 「무라야마씨로 가자」라고 발언. 무라야마 사무소를 찾아 총리 취임을 받도록 요청한 이시하라에 대해, 무라야마는 「혼란스럽지 않을까」라고 일축했다.
호헌파·친중파 필두격의 무라야마와 개헌파·대중국 강경파 필두격의 이시하라이지만, 2013년 6월 정계 장로가 모인 원탁회의 등에서 동석하는 사이이다.
카메이 시즈카
카메이 시즈카 는, 사회당에서 무라야마의 측근이었던 노자카 코겐 과 수면하에서 협상해, 자사 정권의 성립에 진력. 총리 취임을 고사하는 무라야마에게 "천명입니다, 포기하고 총리를 받으십시오"라고 설득했다. 비둘기의 무라야마가 조각에서 타카파의 카메이에게 운수대신 취임을 의뢰하자 카메이는 “나는 타카는 타카라도 비둘기를 지키는 타카”라고 말했다. 총리로서의 유능함을 극찬하는 카메이에 대해 무라야마는 "칭찬하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라고 말했다.
노나카 광무
사회당의 야마구치 츠루오 와 접촉하는 등 자사 정권 성립에 노력한 한 사람. 무라야마가 총리 시대인 1995년 6월에 전일공기 하이재킹 사건이 발생했을 때, 무라야마는 국가 공안 위원장 의 노나카 광무 에 “당신을 모두 신뢰하고 맡깁니다. 만약 뭔가 있으면 책임 를 받아 총리를 그만두고 백장속을 하고 위령으로 돌겠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노나카에게 전폭의 신뢰를 보였다. 총리 사임 후 여야로 나뉘어 이후에도 초당파로 방북하는 등 활동을 함께하고 있다. 「노나카 씨는 적에게 돌리면 무서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라고 인터뷰에서 질문받아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라고 대답하고 있다.
고노 요헤이
비자민연립정권 하네다 내각이 좌절하고 정국이 혼미하는 가운데 자민당 총재였던 고노 요헤이 는 총리 취임을 고사하는 무라야마에게 “지금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을 수반 지명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배고프다"며 눈물을 흘리면서 무라야마를 설득하고 무라야마도 감동했다고 하지만 "오랜 세월 반목해 온 사회당과 자민당이 손을 맺는다고 한다. 이것은 힘들었다"고 총리 취임 전의 복잡한 가슴 안을 밝힌다. 자사 정권 시대를 되돌아보고 연립 정권의 파트너인 고노 요헤이, 신당 사카케 대표· 무무라 정의 와의 삼당당 수간의 신뢰 관계가 강고했기 때문에, 정권을 원활하게 운영할 수 있었다고 술회한다. 같은 비둘기파로 사상적으로도 가까이 “가노씨에게는 한 번 총리를 하고 싶었다”라고도 평하고 있다.
다케무라 정의
비자민 연립 정권의 호소카와 내각 에서 오자와 이치로 의 강권 정치에의 반발을 강화하는 가운데, 신당 사키가케 대표·무무라 정의와의 협력 관계를 깊게 되어, 하네다 내각의 성립 직전에 통일회파 「개신」이 사회당 , 신당사키가케를 벗어나는 형태로 결성됨으로써 함께 비자민연립정권을 이탈하고 이후는 공동보조를 취한다. 하네다 내각의 목욕으로 정국이 혼란하는 가운데 타케무라도 무라야마에게 총리 취임을 설득. 무라야마 내각의 오쿠라 대신에 취임해, 무라야마를 지지했다. 무라야마는 “항상 뭐든지 상담해 온 사이”라고 말해, 사회당 해당 후의 신당 문제에 이르기까지, 협력 관계를 소중히 했다.
오사토 사다리
고리 사다리 도 자민당 국회 대책 위원장으로서 자사 정권의 성립에 진력. 무라야마 정권에서는 당초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을 맡고 있었지만, 한신·아와지 대지진이 발생하자 그 2일 후에 무라야마는 오사토를 지진 재해 대책 담당 장관에게 임명해 지진 재해 부흥의 권한을 주었다. 무라야마는 지진 재해 당시의 고사토를 되돌아보며 "잘 현지와 도쿄를 오가며 국회답변에서도 간절히 정중하게 대답했다. 고사토씨를 임명한 것이 좋았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오시마 리모리
무라야마가 오랜 현안으로 해결에 임한 과제 중 하나가 미나마타병 피해자 구제 문제였다. 사임 직전인 1995년 12월에 담화를 발표하고 해결을 보지만, 여기에는 오오시마 리모리 환경청 장관의 일이 컸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에토 타카미
아시아 국가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사과한 무라야마 담화는 전후 50년의 종전 기념일인 1995년 8월 15일에 각의 결정되어 이른바 ‘타카파’로 불리는 에토 타카미 총무청 장관, 시마무라 요시후미 부 대신, 히라누마 사토시 운수 대신도 일절 이의 없이 담화에 서명했다. 그 후 “식민지 시대는 일본은 좋은 일을 했다”고 발언한 에토 타카미 총무청 장관을, 무라야마는 정부의 견해와는 다른 발언을 했다고 갱배했다.
이시하라 노부오
1987년의 다케시타 내각 이후, 자민당 정권, 비자민 연립 정권에 건너 오랜 내각 관방 부장관을 역임해 온 이시하라 노부오 는, 무라야마 정권 성립 직후는 사의를 굳히지만, 무라야마가 “자신이 되고 싶어서 총리가 되었다 별로 아니다. 아무래도 지지해 주었으면 한다”고 강하게 위류하고, 1995년 2월까지 유임했다. 같은 해 4월의 도쿄도 지사 선거에 이시하라가 입후보했을 때는, 무라야마가 응원 연설을 실시해 “ 한신·아와지 대지진 에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이시하라씨의 존재가 컸기 때문”이라고 호소했다.
대전창수
1995년 오키나와에서 미국병에 의한 소녀폭행 사건 발생 후 오키나와의 미군기지의 강제사용절차에 의한 대리서명을 거부하는 대전창수 오키나와현 지사 와 장시간 회담했지만 대전에 “다른 사람에게 아픔도 자는 것은 할 수 있지만, 타인을 아프게 해서는 자는 것은 할 수 없다. 오키나와 재일미군기지 문제를 스스로 손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을 무라야마는 후회하고 있다.
키시 신스케
기시신스케 총리가 미일 안보조약 개정을 한 1960년 무라야마는 오이타 시의회 의원이었지만 국회 주변에서 열린 안보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 “ 기시내각 의 방식은 민주주의를 부정한다는 의식이 강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다만 무라야마는 총리로 취임한 직후인 1995년 7월 20일 국회답변에서 자위대 합헌을 인정함과 동시에 미일 안보조약의 용인도 표명해 오랜 일본 사회당 정책 전환을 실시했다.
미키 타케오
미키 타케오는 무라야마와 마찬가지로 메이지 ​​대학 출신의 총리이며, 2011년 11월 메이지 대학 창립 130주년 기념 사업으로 열린 「미키 타케오 심포지엄」에 무라야마는 패널리스트 중 한 명으로 참석하여 「미키 씨도 나도 함께 명대 출신의 총리는 변혁기에 나온 것 같네요”라고 말했다. 무라야마는 2010년에는 도쿠시마현 에 있는 미키의 묘참을 실시하고 있다.
후쿠다 사토오
무라야마는 총리 재임 중에 사망한 후쿠다 준오 전 총리의 내각·자민당 합동장에서 추도의 사사를 읽고 '정치는 최고의 도덕'이라는 후쿠다의 말을 기리었다. 무라야마는 저서에서도 “유권자로부터 선택되는 정치가는 유권자 이상으로 올바른 도덕관념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 무라야마는 총리 취임 직후인 1994년 여름, 카루이자와에서 정양하는 후쿠다를 방문하고 있다.
다케시타 등
무라야마가 뜻밖에 총리로 취임했을 때 좋은 상담 상대 중 한 명은 같은 해의 다케시 타 등이었다. 다케시타가 경제정책에 약한 무라야마에게 조언을 하면 무라야마는 “너는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 총리대신이 됐다. 나는 연습 없이 됐으니까”라고 말했다.
카이베 슌키
자민당·사회당·신당 사키가케의 추천으로, 무라야마가 슈반 지명 선거로 당선했을 때, 비자민 연립 정권으로 주도권을 잡고 있던 오자와 이치로 는, 자민당으로부터 해부 토시키 전 총리를 뽑아 무라야마의 대항마에 세워 했다. 결선 투표에까지 얽혀 있을 때 스스로가 총리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무라야마는 “총리까지 했던 해부씨에게 이길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 후 해부는 야당 제1당 신진당 대표로 취임해 무라야마와 대치했다. 2011년 11월, 메이지 대학 주최의 은사 미키 타케오의 심포지엄으로 무라야마와 동석했다.
미야자와 키이치
경제정책에 약했던 무라야마는 총리 시대, 다케시타 등과 함께 재정통인 미야자와 키이치 에게도 자주 조언을 요구했다. 영어를 말하지 않고 외교 경험도 없는 무라야마는 총리 취임 직후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직전에 미야자와에게 인사하러 가서 “서밋에서는 영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 하면 좋겠어요”라고 격려되어 “좋은 어드바이스를 받았다”라고 평하고 있다.
호소카와 호희
호소카와 내각 당시 호소카와 호희 의 기자 회견이 자정에 열리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중대한 발표 [주석 8] 정도 심야에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한 때에는 하룻밤 새벽 언론 이나 야당뿐 아니라 여당에게도 큰 놀라움을 줄 수 있었다. 당시 연립여당의 사회당 위원장이었던 무라야마는 호소카와를 '심야에 떠들썩한 남자잖아'라고 평가했다.
하시모토 류타로
무라야마 내각에서 통상산업대신을 맡은 하시모토 류타로 는 한때 무라야마와 같은 사회노동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어 “젊고 처음이었다”고 당시를 되돌아 본다. 총리 사임 후 하시모토에 대한 정권 교체는 언론 등에서 '선양'이라고 야기되었지만, 무라야마는 '하시모토 씨로 좋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나에게 후계자를 결정할 권한은 없다. 고노 씨에게 한 번 총리가 되고 싶었지만"라고 말하고 있다.
오부치 에조
오부치 에조 가 총리 재임 중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2000년 5월에 죽었을 때, 무라야마가 추도 연설을 읽고, 오부치의 업적 중에서도 특필해야 할 것은 “우리 나라에서 정상 회담을 개최할 때, 개최지를 오키나와에 결정한 것"으로서, 젊은 시절부터 오키나와 문제에 대한 대처를 평가했다. 또한 다음달 총선에서 무라야마는 정계를 은퇴하고 있으며, 이 추도 연설이 마지막 국회 연설이 되었다. 총리 경험자로부터 총리 경험자로의 국회에서의 추도 연설 은 이것이 처음이다.
모리키로
모리키로 는 자민당이 1993년 총선에서 야당으로 전락하여 신산을 핥은 당시 간사장이며, 자민당의 정권 복귀를 위해 카메이 시즈카 와 연계하여 사회당 위원장인 무라야마를 수반으로 하는 '자사함 연립정권' 성립에 노력했다. 무라야마는 총리 취임 직후 오랜 사회당 정책 방침을 전환해 자위대를 합헌으로 인정하는 국회답변을 했다. 이 정책 전환은 무라야마에게 역대 사회당 위원장의 얼굴을 떠올릴 정도로 매우 고통의 결단이었지만, 숲이 고례하러 가면 무라야마는 “총리와 사회당 위원장 모두가 중요하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야마자키 타쿠의 저서 'YKK 비록'에 따르면 고이즈미 준이치로 도 무라야마에게 총리 취임을 요청했다고 한다. 고이즈미가 전후 60년의 총리 담화로서, 무라야마 담화를 답습하는 고이즈미 담화를 발표한 것은 평가하는 한편, 고이즈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서는 “무라야마 담화와 야스쿠니 참배는 양립하지 않는, 열매가 없다”고 단언 했다. 2005년 4월, 교토 영빈관 개관식에서 고이즈미가 옆에 앉은 무라야마에게 「지금 무라야마 담화를 공부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 「그것은 상당한 일이라고」라고 농담 반으로 말했다고 한다.
아소 타로
무라야마는 총리 시대 아소 타로를 국토청 장관에게 기용할 의향을 보였지만 노나카 광무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토야마 유키오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 에서 자민당에서 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는 “유권자가 한표 투입함으로써 정권을 바꿀 수 있었다. 이것은 대단히 획기적인 일”이라고 강연했지만 그 후 하토야마 유키오 가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 로 내각 총리 대신을 사임한 것에 접해 “뭔가 전망과 근거가 있어 이전을 주창했는지 생각했지만 전망도 근거도 없었다”고 비판했다.
스가 나오토
동일본 대지진 발생 다음 날에 재해 지역에 들어가 비판 된 스가 나오토 에 대해 "나는 한신 아와지 대지진 때 현지 진입이 느리고 비판되고 스가 씨는 다음날에 가서 비판되었다. 는 규모가 다르기 때문에 일괄적으로는 말할 수 없지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총리가 가면 오히려 현지에 폐를 끼친다”고 말한다. 칸이 총리사의를 표명하면서 사임을 미루었을 때에는 '빨리 사임해야 한다'고 엄격히 비판했다.
노다 요시히코
「정치 생명을 베팅한다」라고 말해, 소비세 증세 법안을 성립시킨 노다 요시히코 에 대해 「내가 소비세 증세 법안을 성립시켰을 때는, 선행 감세를 실시했다.노다씨의 경우는, 갑자기 소비 세금을 전면에 내놓고 정치생명을 걸겠다고 밝혔다.
아베 신조
2006년 10월, 제1차 정권시 아베 신조 가 총리 취임 직후에 방중해, 고이즈미 정권 시대에 식어간 일중 관계의 타개를 도모해, 중화 인민 공화국과의 전략적 호혜 관계를 내세운 것을 높게 평가하는 한편, 2013년 12월 말 제2차 정권 아베가 야스쿠니 신사 에 참배했을 때에는 “본인의 기분을 지키기 위해 나라를 팔도록 총리가 있을까”라고 엄격히 비판했다. 아베의 헌법 개정론이나 무라야마 담화를 둘러싼 발언의 흔들림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일본 기자 클럽 의 강연에서 「무라야마 담화와 아베노믹스 는, 총리대신의 이름을 씌우는 노선이지만, 어느 쪽이 장수할까」라고 질문되어 「무라야마 담화그럼. 아베노믹스는 경제이기 때문에, 목적을 도달하면 사라져 간다.이쪽 는 역사이기 때문에 "라고 말했다.
오자와 이치로
1993년 총선에서 비자민연립정권 호소카와 내각이 성립한 당시 무라야마는 아직 사회당 위원장으로 취임 하지 않았고, 사회당 연립정권 참가에는 반대의 입장이었다. 오자와 이치로 가 큰 권력을 잡고 있던 비자민 연립 정권에서 하네다 내각 이 성립하기 직전에 사회당을 벗어난 통일회파 「개신」이 결성된 것에 격렬하게 반발해, 「수의 힘으로 정치를 양단하자 하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 이것은 용서하기 어렵다”며 연립정권에서 이탈했다. 또 오자와가 주장하는 소선거구 제도 도입에도 반대의 주장을 관철했다.
마에하라 세이지
2006년 2월 민주당 대표였던 마에하라 세이지 와 회담하여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고이즈미 총리(당시)를 비판한 뒤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도 총리 때 그렇게 해 "라고 조언했다.
히로세 카츠 사다
2007년 3월, 히로세 가쓰다다이 의 오이타현 지사 선거 출진식에서, 이 선거는 「당락을 묻는 선거가 아니다」[71] 라고 연설해, 히로세의 「압도적인 승리」[71] 의 실현을 청중에게 호소했다.
2015년 4월 12일에 행해진 오이타현 지사 선거에서도, 무라야마는 일본국 헌법 개정을 주장하는 아베 신조를 비판하는 입장이면서, 자민·공명이 추천한 히로세 카츠사다의 지지에 돌고, 히로세 의 4선에 공헌해, 사민당 오이타현 연내로부터 물의를 자아냈다.
타모 카미 슌오
2008년 11월, 무라야마 담화의 일본국 정부 견해와 다른 인식을 나타낸 논문을 발표했다고 해서 자위대 항공 막료장을 갱패된 타모 카미 슌오 에 대해 “다모 신 논문은 많은 학자가 부정하고 있다”고 비평했다.
하시시타 토오루
2013년 5월에 하시시타 테츠 오사카 시장이 “ 종군 위안부 는 당시 필요했다”며 전시 중의 종군 위안부 제도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한 것에 대해 NHK의 취재에 응하여 “이와 같이 종군 위안부가 국제 문제화하고 있는 가운데, 그러한 발언은 이해할 수 없다”고 엄격히 비판. 하시시타가 이 발언으로 국내외에서 엄격한 비난을 받으면서 사과나 발언의 철회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변화를 반복해도 문제가 커질 뿐. 하는 것이 좋다”고 충고했다.

스포츠 편집 ]

약력 편집 ]

  • 1924년 - 11인 형제의 6남으로 탄생.
  • 1936년 - 나카지마 심상 초등학교 졸업.
  • 1938년 - 오이타 고등 초등학교 졸업 후, 상경해 낮에는 기계 공장, 인쇄소에서 일하면서 야학에 다닌다.
  • 1942년 - 도쿄 시립 상업 학교 졸업.
  • 1943년 - 구제 메이지 대학 전문부 정치 경제과 입학.
  • 1944년 - 이시카와 섬 조선소 배속.
  • 1944년 - 학도 출진으로 미야자키현 도성시에 있는 대일본 제국 육군 보병 제23연대에 2등병으로 입대(최종계급: 육군 군조).
  • 1946년 - 구제 메이지 대학 전문부 정치 경제과 졸업.
  • 1948년 - 오이타현 어촌 청년동맹서 기장.
  • 1951년 - 오이타시 의회 의원 선거 낙선.
  • 1953년 - 요시지 부인과 결혼.
  • 1955년 - 오이타시 의회 의원 선거 당선(당첨 2회).
  • 1963년 - 오이타현 의회 의원 선거 당선(당첨 3회).
  • 1972년 - 제3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구오이타 1구에서 입후보해 당선(이후 통산 당선 8회). 사회노동위원회에 소속. 우파의 「수요회」입회.
  • 1973년 - 요코지 타카히로 홋카이도 지사, 타에이오 전 사민련 대표와 「새로운 흐름의 모임」에 참가.
  • 1976년 -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선(2기째).
  • 1976년 - 오이타현 사에키시의 「진폐 진동병 문제」로 환자 구제의 길을 만든다.
  • 1979년 - 제3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선(3기째).
  • 1980년 - 제3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다음 점에서 낙선.
  • 1983년 -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톱 당선으로 중의원 의원으로 되돌아 피는다(4기째·이후 4회의 선거에서는 모두 톱 당선).
  • 1986년 - 제3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선(5기째).
  • 1990년 - 제3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선(6기째).
  • 1991년 - 중의원 물가 문제 등에 관한 특별 위원장.
  • 1991년 - 일본 사회당 국회 대책 위원장.
  • 1993년 -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선(7기째)
  • 1993년 - 일본 사회당 위원장.
  • 1994년 - 내각 총리 장관.
  • 1996년 - 최초의 소선거구 제도에서의 총선거가 된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로 오이타 1구로부터 입후보해, 당선(8기째).
  • 1996년 - 사회민주당 당수.
  • 1996년 - 사회민주당 특별대표.
  • 2000년 - 총 선거 전에 정계 은퇴 발표.
  • 2000년 - 재단법인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사장.
  • 2002년 - '팔월의 카리유시' 리우보우 역으로 영화 출연.
  • 2006년 - 키리하나 대선장 수장.

소속 단체·의원 연맹 편집 ]

저작 편집 ]

단저 편집 ]

공저 편집 ]

기고 편집 ]

출연 편집 ]

각주 편집 ]

주석 편집 ]

  1.  비자민 총리였던 하네다 효 와 하토야마 유키오 는 1993년까지 자민당 중의원 의원이며, 호소카와 호희도 참의원 의원 시대는 자민당원으로 다나카파의 깃발에 참가하고 있다. 또 총리퇴진 이후도 포함해 자민당적을 갖지 않았던 정치가로서도 카타야마 테츠 이후이다(카타야마의 후임인 아시다 균 , 요시다 시게루 는 총리퇴진 후에 발족한 자민당에 참가했다). 또, 2011년에 취임한 노다 요시히코 (단 호소카와가 대표를 맡은 일본 신당 출신)를 포함해, 1955년의 자민당 발족 이후의 내각 총리대신으로 자민당 소속력이 없는 내각 총리대신은 2019년 현재 3 이름이다(무라야마, 스가, 노다).
  2. ^ 중의원에서의 여당 제1당 당수 경험자에게의 조사는 야당 제1당 당수가 실시하는 것이 관례이며, 본래라면 민주당 대표의 하토야마 유키오가 실시할 것이지만, 소부치의 유족측이 거부했기 때문에, 야당의 당수경험자로 총리경험도 있는 무라야마가 예외적으로 이를 했다.
  3. ^ 무라야마·하시모토 정권 당시, 여당의 사키가케에 소속하고 있었다.
  4.  당시의 일본 사회당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표방하고 있어, 공산주의 정당이나 사회주의 정당이 아니다. 그 영문 표기도 'Social Democratic Party of Japan(일본 사회민주당)'으로 현재의 사회 민주당 의 영문당명과 완전히 동일했다.
  5. ^ 언론 보도에서는 '측에 있던 대식한의 무 무라 조상 에 붙어 과식했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올리브유 를 다량으로 사용한 이탈리아 요리 를 먹었기 때문에' 등 여러 설이 날아갔다.
  6. ^ 무라야마 내각 성립에 따라, 자택은 관광 명소가 되어, 관광 버스를 탄 단체 손님이 방문했다
  7. ↑ 또 , 「뉴스 스테이션」에서 무라야마의 동생이 기자 회견할 때의 회장이 되었다.
  8.  쌀 시장의 부분 개방, 고노 요헤이와의 정치 개혁 관련 법안의 수정 합의, 국민 복지 세 구상 등.

출처 편집 ]

  1. 무라야마 토미시 전 총리 오늘 100세의 생일 “일본이 어디까지나 평화로운 나라이도록” FNN, 2024년 3월 3일
  2. d 혼다 마사토시 (2008-07-29). 총리 를 그만두는 방법 . PHP 연구소. pp. 222-231. 
  3. ^ 무라야마 토미시 “내 정치 인생” 무라야마 토미시·사 타카노부 ““무라야마 담화”란 무엇인가” 카도카와 서점 , 2009년 , 98페이지.
  4. ^ 무라야마 토미시 “내 정치 인생” 무라야마 토미시·사 타카노부 ““무라야마 담화”란 무엇인가” 카도카와 서점 , 2009년 , 113페이지.
  5. ↑ 중국·일본 양국인민의 우호의 그림책 ” 중국망
  6. ↑ "헤세이 정치사 1" , 344-345쪽.
  7.  홋카이도 신문 석간 헤세이 8년 1월 9일
  8. b 무라야마 토미시 전 총리가 중국 군사 퍼레이드에 참석...지금까지 3회, 연속적으로 모두에 얼굴을 내는=중 searchaina(2015-09-03)searchina web어탁
  9.  “ 일본의 훈장·포장(상훈국) ” 내각부 , 2006년.
  10. 무라야마 전 총리가 교통사고 자전거의 아이에게 충돌 - 공동 통신, 2005년 7월 16일
  11. 센카쿠 문제로 의견 교환. 스가 관방 장관 "대단히 이야기를"일중 우호 협회가 방중 2013년 1월 28일 MSN 산케이 뉴스
  12. ↑ 무라야마 전 총리, 아베 총리에 1월말 방중회담 내용 보고 2013년 2월 1일 MSN산케이 뉴스
  13. ↑ 사민이 구당 본부에서 이별회=무라야마 전 총리 “저미치가 유이” 2013년 2월 27일 시사닷컴
  14. ↑ 무라야마 담화 '계승' 아베 총리가 궤도 수정 2013년 5월 16일 MSN 산케이 뉴스
  15. 무라야마 전 총리가 호소 “담화를 재검토하면 일본은 고립된다” 2013년 7월 2일 MSN 산케이 뉴스
  16. ↑ 무라야마 전 총리, “사민당에 구애받지 않고. 차기 중원선은 신당”으로 2013년 8월 19일 MSN 산케이 뉴스
  17. ↑ 한국·숭실대가 무라야마 전 총리에 명예 박사호 내일 수여식 연합 뉴스 2014년 10월 8일 t
  18. 호시노 노리히사(2015년 3월 11일). “ 무라야마 전 총리 “일본이 고립되지 않는가 ” 아베 총리의 담화 우려:아사히 신문 디지털 ” ( HTML ) ( 일본어 ). 무라야마 전 총리 “일본이 고립되지 않는가 아베 총리의 담화 우려 . 아사히 신문사 . 2015년 3월 11일 열람.
  19. “ 70년 담화 ‘ 반성’ 계승을/무라야마 전 총리 등 공부회 발족 | 전국 뉴스 | 시코쿠 신문사  ( HTML ). (2015년 3월 11일). 2015년 3월 11일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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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무라야마 전 총리: 컨디션 불량으로 입원 항일 기념 행사 출석으로 방중 매일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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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 21세기 임조 - 정치개혁의 궤적- ”. 새로운 일본을 만드는 국민회의 . 2018년 3월 25일 열람.
  50.  이시하라 노부오 회고록 총리 관저의 결단』(중공 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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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제130회 국회――본회의――제1호」『참의원 회의록 정보 제130회 국회 본회의 제1호국립 국회 도서관 , 1994년 7월 18일 .
  53. ↑ 「제130회 국회에 있어서 의 무라야마 내각 총리대신 소신 표명 연설」 「 Speech of Prime Minister Murayama in 130th session of the Diet 내각 관방 내각 홍보실, 1994년 7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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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 카토 코이치 「 창가 학회 문제, 총선거, 재편의 추억――이것이 격돌의 초점이다――『일용 대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유쿠 에 Archived 2013년 7월 24일, at the Wayback Machine .
  57. d TBS , STREAMING VIDEO NEWS , JNN ,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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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 “원전 사고를 둘러싼 전 총리 5명의 서간 기시다 총리 자민 결의로 대응 검토” . NHK NEWS WEB ( NHK ). (2022년 2월 10일) 2022년 2월 10일 열람.
  62. ↑ “전 총리 등 5명이 대신, 지사에게 역항의 “탈원전” 시민 단체가 의견 집약 후쿠시마 원전 사고 EU 서간 문제” . 석간 후지 .
  63. “ 무라야마 모토 총리 “총리가 된 것은 『순회”” 주간 아사히 ”. 아사히 신문 출판(2015년 2월 2일). 2020년 5월 24일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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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  「『신내』에서 서로 빼앗아」『아사히 신문』 아사히 신문 도쿄 본사, 2007년 7월 18일 .
  67.  인사흥신록 45판 46화
  68. https://www.asahi.com/articles/ASL9S4T1JL9STPJB005.html
  69. https://imagelink.kyodonews.jp/search?product_type=1%2C2%2C11&keyword=%E6%9D%91%E5%B1%B1%E9%A6%96%E7%9B%B8%E8%B3% 87%E6%96%99&opendetail=3908144
  70. ↑ b 내 이력서」 「일본 경제 신문사 」일본 경제 신문사 .
  71. b 「오이타에서도 지사 선고시 ― 새로운 쟁점도 부상」 「선거·오이타에서도 지사 선고시 새로운 쟁점도 부상」 일본 인터넷 신문, 2007년 3월 24일 .
  72. ↑ “ 일조 우호 의원 연맹 결성 ”. korea-np.co.jp . 조선 신보. 2023년 12월 26일 열람 .
  73. “ 인사하는 무라야마 전 총리 일조 우호 의련이 설립 총회 (코드 2000022300117)의 사진·이미지:보도 사진·뉴스 영상의 제공 구입 서비스:KYODO NEWS IMAGELINK(이미지 링크) ”. 보도 사진·뉴스 영상의 제공 구입 서비스 :KYODO NEWS IMAGELINK(이미지 링크) 2023년 12월 26일 열람 .

참고 문헌 편집 ]

  • 이시하라 노부오 『관개 있을 수 있는 ― 7명의 총리를 섬기고』쇼가쿠칸 , 1997년. ISBN 9784094020311 . 
  • 사사 준행 「고토다 마사하루와 십이인의 총리들」문예춘추, 2006년. ISBN 4163681205 . 
  • 기요하라 요시하루 “무라야마 토미시 ― 그 궤적과 사명” 오이타 합동 신문 문화 센터, 2006년.
  • 고토 켄지「문서 헤이세이 정치사 1 붕괴하는 55년 체제」 이와나미 서점 , 2014년 4월 17일. ISBN 978-4000281676 . 

관련 항목 편집 ]

외부 링크 편집 ]

공직
선대
하네다 孜
일본의 국기 내각총리대신
제81대: 1994년~1996년
차대
하시모토 류타로
의회
선대 노사
카 코켄
일본의 국기 중의원 물가 문제 등에 관한 특별 위원장
1991년
차대 이와
타루 히데오
당직
선대
결성
사회민주당 당수
초대: 1996년
차대
도이 타카코

대산 하나다오
일본 사회당 위원장
제13대: 1993년~1996년
차세대
사회민주당 에
선대
대출준
일본 사회당 국회 대책 위원장
제16대:1991년~1993년
차대 노사
카 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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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iichi Murayama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Tomiichi Murayama
村山富市
Official portrait, 1994
Prime Minister of Japan
In office
30 June 1994 – 11 January 1996
MonarchAkihito
Preceded byTsutomu Hata
Succeeded byRyutaro Hashimoto
Chairman of the Social Democratic Party
In office
25 September 1993 – 28 September 1996
Preceded bySadao Yamahana
Succeeded byTakako Doi
Member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for Oita 1st district
In office
11 December 1972 – 19 May 1980
Preceded byIsamu Murakami
Succeeded byIsamu Murakami
In office
19 December 1983 – 2 June 2000
Preceded byIsamu Murakami
Succeeded byBan Kugimiya
Member of the Ōita Assembly
for Ōita City
In office
1963–1972
Member of the Ōita City Council
In office
1955–1963
Personal details
Born3 March 1924 (age 100)
ŌitaEmpire of Japan
Political partySocial Democratic Party
Other political
affiliations
Japan Socialist Party (Until 1996)
Spouse
Yoshie Murayama
 
(m. 1953)
[1]
Alma materMeiji University
Signature
Military career
Allegiance Japan
Service/branch Imperial Japanese Army
Years of service1944–1945
RankOfficer candidate
Battles/warsWorld War II

Tomiichi Murayama (村山 富市Murayama Tomiichi, born 3 March 1924) is a Japanese politician who served as Prime Minister of Japan from 1994 to 1996. He led the Japan Socialist Party, and was responsible for changing its name to the Social Democratic Party of Japan in 1996. Upon becoming Prime Minister, he was Japan's first socialist leader in nearly fifty years. He is most remembered today for his speech "On the occasion of the 50th anniversary of the War's end", in which he publicly apologised for Japan's past colonial rule and aggression. Of the ten living former prime ministers of Japan, he is currently the oldest living prime minister, following the death of Yasuhiro Nakasone on 29 November 2019. Murayama is also the only living former Japanese prime minister who was born in the Taishō era.

Early life and education[edit]

A teenage Murayama while working at a printing company.

Murayama was born in Ōita Prefecture on 3 March 1924; his father was a fisherman.[2][3] He was the sixth son of eleven children. His father passed away when he was fourteen, forcing him to deliver newspapers and work small jobs to help make a living.[4] After graduating from Oita Municipal High School in 1938, he moved to Tokyo, and began working at a printing factory during the day, and studied at the Tokyo Municipal School of Commerce at night.

He entered Meiji University in 1943 as a philosophy student, but was mobilised in 1944 and assigned to work in the Ishikawajima shipyards. Later that year, he was drafted into the Imperial Army and assigned to the 72nd Infantry of the 23rd Brigade of the 23rd Division as a private second class. He was demobilised following Japan's surrender with the rank of officer candidate, and finished the war as a cadet with the rank of sergeant. Following the death of Yasuhiro Nakasone in 2019 and of Giorgio Napolitano in 2023, Murayama is the only living former prime minister with military service connected to the war.[citation needed] He graduated from Meiji University in 1946, and in 1948, he became the general secretary of the Oita Prefecture Fishing Village Youth League. After the Fishing Village Youth Alliance was disbanded after achieving successes such as establishing a fisheries cooperative, he subsequently worked as the secretary of the Oita Prefectural Employees' Labor Union.[5]

Representative and JSP Politician[edit]

Early career[edit]

In 1951, he ran for election as a member of the Oita City Council, but was defeated as runner-up. In 1953, he married his wife, Yoshie Murayama. In 1955, he ran for the Oita City Council again, and was elected as a member of the Japan Socialist Party, being elected twice after. After serving for eight years, he ran for the Prefectural Assembly of Oita in 1963, and was elected, there serving for nine years. He then ran in the 1972 Japanese general election for the former Oita's 1st, being placed at the top of the list and winning. He was then elected nine more times in the district. In 1973, he joined the "New Flow Association" with Takahiro Yokomichi and Hideo Den.

Chairman of Diet Affairs Committee[edit]

When Makoto Tanabe replaced Takako Doi as Chairman of the JSP, Murayama became chairman of the National Diet Committee. At the so called "Peacekeeping session" in 1992, where it was debated if the Japan Self-Defense Forces should participate in United Nations peacekeeping work, Murayama took the role of the primary opposition leader to the bill. Nevertheless, it passed with the support of the LDP and other liberal parties. As he was involved with other parties due to his role as Chair of Diet Affairs, he had connections with several other party higher ups, including Seiroku Kajiyama of the LDP and Takeho Kanzaki of Komeito. In January 1993, Sadao Yamahana replaced Makoto Tanabe as chairman of the Socialist Party, but Murayama remained as chairman of the National Diet Committee.

In July, later that year, the 1993 election saw the LDP lose over 50 seats, and the JSP under Sadao Yamahana took a similar tumble, losing seats to new opposition parties such as the Japan Renewal Party or the Japan New Party, both under LDP defectors Tsutomu Hata and Morihiro Hosokawa respectively. In August, the Hosokawa Cabinet - the first non-LDP cabinet since the party's formation - was established. The JSP, despite being the biggest party, was not given the Prime Minister spot. Instead, Sadao Yamahana was named Minister in Charge of Political Reform. Yamahana resigned from JSP leadership to take responsibility for the poor showing in the 1993 election. Murayama was elected as leader without much in the way of opposition, appointing Wataru Kubo as General-Secretary. The Hosokawa cabinet survived for a year - it managed to pass the 1994 Japanese electoral reform, before Hosokawa resigned following revelations of a campaign finance scandal.[6][7]

Following Hosokawa's resignation, bickering began over who would succeed him, with every party from the Hosokawa Cabinet eventually picking Tsutomu Hata. The Hata Cabinet was soon after sworn in with a confidence vote; however, just a few days after, the combined forces of the Japan Renewal PartyKōmeitōDemocratic Socialist Party, Liberal Reform Federation, Japan New Party would form a unified parliamentary group, the "Kaishin", with the goal of undercutting JSP influence in the Hata Cabinet. The group would go on to form the New Frontier Party soon after. Murayama felt betrayed by the announcement - he announced the JSP would withdrawal from the coalition, leaving it with minority status. An internal battle waged in the JSP, with other leaders, such as Wataru Kubo, believing they should return to the Hata Cabinet.

On June 25, the Hata Cabinet resigned en masse, believing they would not survive a confidence vote. Yōhei Kōno soon after entered talks with Murayama on the possibility of a grand coalition; they came to an agreement where Murayama would inherit the Prime Ministership from Hata soon after. However, several LDP heavyweights disagreed with the idea, including Yasuhiro Nakasone and Toshiki Kaifu, who stated that "We cannot support the chairman of the Socialist Party as the leader." A challenged to Murayama then emerged from Kaifu, who was nominated by rebel LDP members for Prime Minister. With no majority in the Japanese House of Representatives, a run-off was held between Kaifu and Murayama, which Murayama then won, making him the first Socialist Prime Minister since the LDP had formed in 1955.

Administration of the Murayama Cabinet[edit]

Murayama at the plenary session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July 20, 1994

The Murayama Cabinet was a coalition government, sometimes described as a grand coalition, which played a significant part in ending the often explosive LDP-JSP conflict which had dominated every election prior, even with third parties beginning to form in the seventies and eighties.

Tsuneo Watanabe praised Murayama in 2000, stating that "His greatest achievement was that he was a progressive cabinet in the best sense of the word, crushing the Socialist Party's anti-security, anti -American, opposition to the national anthem and flag, and greatly expanding the scope of unification of national opinion."

Policy platform[edit]

The LDP, New Party Sakigake, and the JSP had come to a basic policy agreement prior to the establishment of the cabinet, which served as the basis for it and the First Hashimoto Cabinet which succeeded it. These included:

In his policy speech after taking office as Prime Minister, he stated his wish for "people-friendly politics" and "peace of mind politics" as his administrative policies.[8]

Murayama Statement[edit]

At a ceremony commemorating the 50th end of the Pacific War, Murayama announced the "Occasion of the 50th Anniversary of the War's End", an official apology for the "invasion" and "colonial domination" of Asia that Japan undertook before and during the Pacific War and Second Sino-Japanese War. The Prime Minister issued a statement entitled "On the Commemoration of the End of World War II" after a unified Cabinet meeting. All successive cabinets since Murayama have clearly stated that they will follow the statement. The aptly name "Murayama Statement" has become established, and it is treated as the official position of the Japanese government.[9]

Development of the Statement[edit]

It had been agreed upon by all three parties that with the war's end approaching it's 50th anniversary, some sort of statement would have to be issued. Shortly After taking office as prime minister, Murayama toured ASEAN countries and said, "Although Asian countries outwardly look nice towards Japan, in reality, countries that have become economic powers may become military powers again. I felt that they hadn't cleaned up after themselves, and that I hope they don't make the same mistake again." Later, on June 9, 1995, a plenary session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agreed to pass the Fusen Ketsugi statement. The struggle of finding a perfect middle ground was difficult, but the results were still promising; while a significant number of members of all parties abstained either out of a wish for a stronger or weaker statement, only 50 members of the LDP had abstained, wishing for a weaker statement. Somewhat frustrated by being unable to find the votes necessary to pass it unanimously, Murayama turned towards drawing up a separate statement.

Several scholars, led by Chief Cabinet Secretary Kozo Igarashi drafted the statement by incorporating things that Murayama had said in past speeches. After Murayama completed the text of the statement, he showed it to Ryutaro Hashimoto and the Chairman of the Japan War-Bereaved Families Association. They had initial conflict over the "end of the war" and "defeat" in the text, but came to the agreement that defeat was the basis of the unification that came after of the people.

On August 15, 1995, the 50th anniversary of the end of the war, Murayama declared, "Now that the chairman of the Socialist Party has become prime minister, it is meaningless if he cannot issue a statement of this level." If there are any objections, Murayama swore to resign as prime minister. Koken Nosaka, who was appointed as the new Chief Cabinet Secretary in the cabinet reshuffle, was prepared to immediately dismiss any cabinet member who objected to the statement. At the cabinet meeting, Deputy Chief Cabinet Secretary Teijirō Furukawa read out the statement, and Nosaka asked, "Do you have any objections?" All the cabinet members (including Murayama's reshuffle) signed the statement without raising a single objection, and it was unanimously approved by the Cabinet, the Murayama Statement being released soon after.

Reactions to the Murayama Statement[edit]

At the time of his statement, Murayama said he was just "stating the obvious thing". He did not expect that his successor, Ryutaro Hashimoto, would fully respect the statement. All cabinets since have clearly stated their intention to respect the statement.[10][11]

The Murayama Statement is considered to be the official historical understanding taken by the Japanese government.[9] Junichiro Koizumi also issued the Koizumi Statement on the 60th anniversary of the war's end in 2005, which followed the Murayama Statement.[12]

Conservative politicians and others have made comments which often differ from the Statement with denial for crimes committed by Japan, and for this, they are usually criticized heavily by the governments of China and South Korea. Most undertake the purview that "Japan has officially apologized and compensated the countries concerned for the acts of aggression it allegedly committed during the war, there is no need for further apologies." Others have also stated that the Murayama Statement was pointless, with the fact that Japan committed the acts being something that can't be helped.

In November 2008, Chief of the Air Staff Toshio Tamogami published a paper titled "Was Japan an aggressive nation?". He was heavily criticized by incumbent Prime Minister Tarō Asō for straying from the view established by the Murayama Statement, and was fired, with Tamogami going on to become a significant figure for the far-right in Japan, as displayed by his run in the 2014 Tokyo gubernatorial election.

Before taking office as prime minister, Shinzo Abe had made statements critical of the Murayama Statement, and attention was being drawn both domestically and internationally to see what kind of statement Shinzo Abe will issue in 2015 on the occasion of the 70th anniversary of the end of the war. But on January 5 of the same year, At the New Year's press conference, he stated, "The Abe Cabinet has inherited the positions of previous cabinets, including the Murayama Statement. On that basis, I would like to announce a new, future-oriented statement", making it clear that the Abe Cabinet would at-least somewhat respect the Murayama Statement.[13]

Establishment of Asian Women's Fund[edit]

In August 1994, a plan was announced to provide condolence money through private funds to women and families who were forced by Japanese soldiers in World War 2 to work as comfort women. In July 1995, the Asian Women's Fund was established under the jurisdiction of the Prime Minister's Office and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Murayama encouraged this. In January 1997, the fund began distributing yen to former Korean comfort women.

Before the establishment of the Murayama Cabinet, lawsuits were filed by former comfort women in various locations demanding state-funded damage compensation and an apology from the Japanese government for its actions. However, the Japanese government took the position that these issues had been resolved when treaties were concluded with other countries, and it was considered impossible to compensate former comfort women through the use of state funds. Under the concept presented by Murayama, the government would establish a fund and the funds would be donated by the private sector, thereby avoiding direct investment of national funds and conveying the sincere feelings of the people who responded to the donations. The aim was to solve the problem, not through the government, but through private organizations. Regarding the background to its establishment, Murayama himself said, "There are those who say, 'There should be government compensation', while others say, 'All wartime reparations have been legally resolved. There is no need to revisit them now.' There is a wide gap in opinion both domestically and internationally, with some saying, 'I paid my dues properly.'[14] we found common ground and managed to launch the fund. As the former comfort women continue to age, we have managed to convey the feelings of apology from the Japanese people while they were still alive, and those who went through heartbreaking experiences. Despite various criticisms, this was the only option available under the pressing circumstances of the time."[14]

Fumibei Hara became the first president of the organization, and Murayama, after retiring as Prime Minister, became the second acting president. He has been developing projects related to the honor and dignity of women in general. Murayama, the chairman of the board, announced that the group will disband in March 2007, when it is scheduled to develop support projects in the Philippines,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Republic of China, and conclude its Indonesia operations.

On September 1, 2000, during the Second Mori Cabinet, Chief Cabinet Secretary Hidenao Nakagawa held a press conference regarding the National Fund for Asian Peace for Women and reiterated the Japanese government's recognition of the fund. On March 6, 2007, Murayama held a press conference and stated that a resolution calling for Japan's apology over the comfort women issue was being considered in the U.S. House of Representatives, saying, "[Through the Women's National Fund for Asia Peace] It is extremely unfortunate that people do not understand that the Prime Minister sent a letter of apology to the comfort women."

Disasters and controversies[edit]

Great Hanshin Earthquake[edit]

Hanshin Expressway after the Great Hanshin earthquake

On January 17, 1995, the Great Hanshin Earthquake occurred, with the Japanese government being heavily criticized for its delayed response to the Hyōgo Prefecture.

Crisis response[edit]

When asked about the reason for the delay in dispatching the Japan Self-Defense Forces to the sight of the earthquake, Murayama, who had been relatively popular as a Prime Minister, received strong criticism from the Japanese opposition and his cabinet approval ratings took a downturn.[4] Eventually, as the full extent of the delayed response became clear, the inadequacies of the Japanese government's crisis management system at the time, including the legal system, were exposed.

The earthquake occurred at around 5:46 a.m., but there was no crisis management employee at the Prime Minister's Office at the time. Furthermore, the National Land Agency [ja], which had jurisdiction over disaster countermeasures, did not have a person on duty. The low loyalty of the Cabinet Secretariat and bureaucrats to the coalition cabinet was pointed out as a problem. After the earthquake, Atsuyuki Sasa [ja], instructed by Masaharu Gotōda, gave a lecture on crisis management to the cabinet. Sasa wrote that Murayama was the only one of the cabinet members who paid attention the entire time, and Sasa reprimanded the cabinet for its distracted behavior. Sasa also wrote about an anecdote where Murayama attempted to hold a press conference immediately after the earthquake, but was halted by Cabinet Secretariat bureaucrats.[15]

Murayama himself said "I think the initial response could have been done more quickly if we had the current crisis management system in place. I cannot bear the shame that so many people died. Every year on the morning of the 7th, I hold a silent prayer at my home."[16] He also said that "There was no crisis management response function at all. There is no excuse for the delay in launching the initial response. Yes, I am truly sorry." He stated further that there was no argument or excuse for the failure in response.[17][18]

At the time, Nobuo Ishihara [ja], who held a role in the Prime Minister's Office as the longest serving Deputy Chief Cabinet Secretary in Japanese history, said "In this unprecedented and unprecedented disaster, and with an underdeveloped legal system, who else but Murayama could become the Prime Minister? Even so, it was impossible to respond quickly."[19] On the other hand, he also said that "If you look far enough, the cause (of the lack of a system in which the Cabinet could take immediate action) was the Socialist Party. The Socialist Party continued to oppose strengthening the Cabinet's authority." Ironically, when a Prime Minister finally originated from the Socialist Party, a situation occurred where they had to manage the crisis. This was a very difficult situation. It's a story."[20]

Legal system issues[edit]

Due to the legal system, the Japan Self-Defense Forces could not be dispatched without a local request from the Governor of Hyōgo PrefectureToshitami Kaihara. At 8:10 AM that day, the Ministry of Defense and Ground Self-Defense Force Himeji Garrison contacted the Hyogo Prefectural Office to request dispatch. Before 10 A.M, JSDF helicopters were sent out to collect information from the disaster area. However, Kaihara only joined the Defense Agency after that, and more time was wasted trying to understand the current situation. Finally, without waiting for Kaihara's orders, the Hyogo Prefectural Counselor (in charge of disaster prevention) issued a dispatch request at 10:10 AM, and the Self-Defense Forces were dispatched four minutes later at 10:14 AM.

In 2007, Governor of Tokyo Shintaro Ishihara claimed that "During the [Hanshin] earthquake, an additional 2,000 people died because leaders were slow in making decisions (about JSDF deployment)."[21] In response, Kaihara said "Mr. Ishihara misunderstood. There is certainly some remorse in terms of crisis management, but the death toll did not increase because the request was delayed. More than 80% of victims were crushed to death near immediately." He argued there was no immediate relation between wait in dispatch and increase in the number of victims. Additionally, Tomio Saito, who took office as the Hyogo Prefectural Disaster Prevention Supervisor after the earthquake, claims that Ishihara's comments are "totally baseless statements and are truly regrettable."

Internal conflict in the JSP[edit]

The coalition formed by Murayama was intensely controversial. A movement began inside the party urging supporters of the Hata Cabinet, including former Chairman Sadao Yamahana. At a meeting on January 16, Banri Kaieda and others from the splinter Democratic New Party Club joined the promoters to form a new party.[22] He was scheduled to submit a notification of withdrawal from the group on January 17. It was thought that the event would be canceled due to the earthquake that occurred that early morning, but Yamahana and others submitted a notice of withdrawal from the group in the morning of the same day.[23] The following day, January 18th, the formation of a new party was postponed, and Yamaka left the Socialist Party on May 10.[24]

Tokyo subway sarin attack[edit]

Emergency personnel respond to the Tokyo subway sarin attack

On March 20, 1995, the Tokyo subway sarin attack occurred, the deadliest terrorist attack in Japan as defined by modern standards. Murayama directed an investigation through relevant ministers, including Minister of Justice Isao Maeda, Chair of the National Public Safety Commission Hiromu Nonaka, Commissioner of the National Police Agency Koji Kunimatsu, and Cabinet Secretary Kozo Igarashi. Murayama himself took the lead in the investigation.

Aum Shinrikyo, which had been responsible for a series of incidents including the Tokyo subway sarin attack, was considered to be subject to the Subversive Activities Prevention Act, and the Public Security Intelligence Agency filed a request for disciplinary action against the doomsday cult. The Public Safety Review Committee judged that the requirements for applying the Subversive Activities Prevention Act were not met, and the application was postponed.

The Subversive Activities Prevention Act, promulgated in 1952, stipulates regulatory measures against organizations that engage in violent subversive activities. Initially, the purpose of the act was to prevent far-left forces such as the Japanese Communist Party and Japanese Red Army from continuing to attempt to overthrow the liberal democratic norm through proletarian revolution. The Socialist Party and other opposition parties instead emerged as the biggest opposition under the 1955 System, so the government took a cautious stance in applying the law. The application of the Subversive Activities Prevention Law to Aum Shinrikyo was controversial, with opposition from Masaharu Gotōda, a former police bureaucrat, and other influential law enforcement figures. Murayama met with Minister of Justice Hiroshi Miyazawa and Hiromu Nanaka again, who both decided decided to respect the investigation by the Public Security Intelligence Agency, paving the way for a request for punishment to the Public Safety Review Commission. Regarding the investigation into the subway sarin gas attack, his comments encouraging arrests via separate cases received mixed reviews, including a strong backlash from human rights lawyers.

On March 12, 2007, he contributed a memo to "My Story of the Subway Sarin Incident", which was compiled by the "Subway Sarin Incident Victims Association". Haruki Murakami, who wrote a book about the attack named Underground, also contributed to the book.

All Nippon Always Flight hijacking[edit]

On June 21, 1995, the All Nippon Airways Flight 857 from Haneda to Hakodate was hijacked. The culprit demanded that the government release Aum Shinrikyo cult leader Shoko Asahara, who had been arrested and detained the month before.

Murayama consulted with Chair of the National Public Safety Commission Hiromu Nonaka and Minister of Transport Shizuka Kamei, and decided that he would not engage in any negotiations with the hijacker. He then decided to call the Special Armed Police of the Tokyo Metropolitan Police Department's 6th Riot Police Department, instructing they take the plane by force. Murayama said after the order that If there are any casualties, I am prepared to go to the bereaved family in white clothes to apologize." Nonaka responded that "In that case, I will accompany you."

However, based on information gathered about the stiuation of the place, the culprit was not an actual Aum Shinrikyo follower. The Riot Police, deployed by the TMPD, did not participate in the invasion of the plane; instead, it provided logistical support to Hokkaido Riot Police. The culprit was arrested; one person had minor injuries.

The substance believed to be sarin was just water, and the hijacker was an employee of Toyo Trust and Banking (currently Mitsubishi UFJ Trust and Banking) who was on leave due to mental illness that had nothing to do with Aum Shinrikyo. At the time, the National Police Agency kept the very existence of the Special Armed Police, and its existence was not revealed even after it was put into action. In 1996, National Police Agency established additional units in Hokkaido, Chiba, Kanagawa, Aichi, and Fukuoka, and together with the SAP in Tokyo and Osaka, established the Special Assault Team, officially announcing the existence of the unit.

Diplomacy[edit]

Although the transition from the Hata Cabinet to the Murayama Cabinet was a change of government, the foreign policy was essentially inherited that of the previous Japanese government, maintaining administrative continuity.

United States[edit]

When the Murayama Cabinet was formed, then-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Bill Clinton was wary of a Prime Minister from the Socialist Party. However, at a meeting before the 20th G7 summit in 1994, Murayama spoke in ambiguous terms about his upbringing in a poor fishing village and the process that led him to aspire to become a politician. When Clinton heard this, he was deeply moved, and even at subsequent summits, he supported Murayama even though Murayama was near entirely unfamiliar with state visits beforehand.[25] Murayama had only traveled overseas four times before, and although he was nervous about participating, he was able to get through the event without major incident.[4]

Maintaining the Japan-US Security Treaty[edit]

On July 20, 1994, in his policy speech at the 130th session of the Diet, he declared that the Self-Defense Forces were constitutional and that the Japan-U.S. Security Treaty would be maintained, changing the policies of the Japan Socialist Party up until then and establishing the Japan-U.S. Security Treaty as fundamental policy.

At this time, the manuscript for the speech read, Maintain the Japan-US security arrangement, but in the policy statement, Murayama read it as "We will firmly maintain the Japan-US security arrangement."[26][27][28] This attracted attention.

This was a hard turn for Murayama's party, the Socialist Party. Although the decision was criticized as being arbitrary because it was decided from the top down, the party has endorsed it, and the modern day SDP maintains the more moderate outlook than the JSP held.

Domestic policy[edit]

Nobuo Ishihara , who served as Deputy Chief Cabinet Secretary, said of the Murayama Cabinet, "It dealt with most of the long-pending issues in national politics. It did a great job. Reform, revision of the Self-Defense Forces Act to rescue Japanese nationals, enactment of Atomic Bomb Survivors Relief Act,and enactment of Administrative Reform Act."[20]

Acceptance of nuclear power[edit]

In a shift from the party's policy, which had led the anti-nuclear power movement up until now, the party stated in its parliamentary response that "Considering electricity demand, it is unavoidable to create a certain amount of nuclear power generation."

Enactment of recycling law[edit]

Under Murayama, the Act on Promotion of Separate Collection and Recycling of Containers and Packaging [ja] was passed, mandating separate collection of recyclable goods and trash.[29]

Narita Airport struggle[edit]

By the time the Murayama Cabinet took office, the Sanrizuka Struggle had transitioned from violent to more non-violent resistance, although debate was still fierce on both sides. In response to the conclusions of the "Narita Airport Problem Symposium" held 15 times from November 1991 and the "Narita Airport Problem Round Table Conference" held 12 times from September 1993, Murayama decided on this issue in 1995. He apologized fully to the local community for the circumstances surrounding the airport issue. As a result, some landowners appeared willing to acquire land for the second phase of construction. Later, in 1996, a plan was developed to construct a temporary runway avoiding unpurchased land. In addition to the apology from Murayama and other government officials, the hard-line stance of residents opposed to Narita International Airport gradually softened due to repeated efforts by neutral committee members.

Selective surname system[edit]

Murayama was a strong supporter of the introduction of the selective surname system for married couples, allowing them to keep their surnames from before marriage.[30]

Revision of Religious Corporation Law, and fight with Soka Gakkai[edit]

In response to the Aum Shinrikyo Tokyo subway sarin attack, Murayama instructed Minister of Education Yoshinobu Shimamura to submit a bill to revise the Religious Corporations Act [ja]. During the deliberations, the three ruling parties (LDP, JSP, and NPS) demanded that Soka Gakkai Honorary President Daisaku Ikeda and Soka Gakkai President Einosuke Akiya be subpoenaed as witnesses, leading to opposition from the New Frontier Party and ex-members of Kōmeitō who had merged into the NFP. The Diet came to a standstill as Komeito-affiliated members and members of the NFP attempted to block the vote from occurring by locking out Man Sasaki, chairman of the Special Committee on Religious Corporations in the House of Councilors, and picketing in and outside of the National Diet Building. In the end, Akiya was summoned to the Diet as an expert witness, and the revised Religious Corporations Law was enacted.

Furthermore, Murayama was known to be critical of the Soka Gakkai movement as a whole.[citation needed] When Kotaro Tawara launched the "Shigatsu-kai", which was heavily critical of the Soka Gakkai's political activities, Murayama attended with the title of General Secretary of the Japan Socialist Party. When he retired as Prime Minister in January 1996, he told executives of the three ruling parties that "I want the three-party coalition to be preserved. That is my wish. I do not want this country to be under the control of Soka Gakkai. We cannot leave it to one political party to decide."[31] In addition, the Murayama cabinet contained a significant number of figures who were heavily critical of Komeito and the Soka Gakkai's movements goals, including those who advocated to strengthen Article 20 of the Constitution, which maintains strict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Strengthening the Prime Minister's Office[edit]

Upon entering the Prime Minister's Office, Murayama felt a sense of crisis because, with the exception of the Prime Minister, the Chief Cabinet Secretary, and the Deputy Chief Cabinet Secretary, all staff at the Prime Minister's Office were career bureaucrats. "The Prime Minister's Office is not just an office that conducts administration , but also an office that makes political decisions."[32] The post of "Assistant to the Prime Minister" was created for this reason. The Prime Minister's assistants were chosen from among the Diet members belonging to the three ruling parties, with Hidenao Nakagawa, Masaru Hayakawa, Jun Nishikori, and Saburo Toida all being appointed to the office. The appointed assistant to the Prime Minister was in charge of providing opinions on the Prime Minister's speeches and answers, as well as gathering information on political issues. The post of "Aide to the Prime Minister" was considered a personal advisor to the Prime Minister, but the Cabinet Act was later amended and the post of "Aide to the Prime Minister" was legislated to be more political in nature.

After politics[edit]

With Yoshihiko Okabe (28 November 2015)

In 2000, Murayama retired from politics. He and Mutsuko Miki traveled to North Korea in 2000 to promote better bilateral relations between the two countries.[33]

Murayama became the president of the Asian Women's Fund, a quasi-government body that was set up to provide compensation for former comfort women.[34] After providing compensation and working on various projects, the fund was dissolved on 31 March 2007.[35]

Murayama turned 100 on 3 March 2024.[36]

Honours[edit]

See also[edit]

References[edit]

  1. ^ "Tomiichi Murayama".
  2. ^ Profile of Tomiichi Murayama
  3. ^ "Japan gets first Socialist PM in 46 years"The Independent. 30 June 1994.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5 November 2012. Retrieved 10 December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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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article incorporates text from Open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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