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2

문정창이라는 사람의 케이스는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부산 사람인데, 중등 학교... - Vladimir Tikhonov | Facebook

문정창이라는 사람의 케이스는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부산 사람인데, 중등 학교... - Vladimir Tikhonov | Facebook


문정창이라는 사람의 케이스는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부산 사람인데, 중등 학교 졸업하고 총독부 행정 강습소 졸업이라는 자격으로 1923년에 조선 총독부에 입사하여 정말 열심히 장기 근속해 결국 일제 말기에 군수자리까지 얻은 겁니다. 대졸도 아닌 사람으로서 쉽지 않았던 출세 (?)의 경우죠. 그 사람은 총독부에서 정리한 자료들을 책으로 몇 번 펴냈는데, 이 책은 그 자료집 중의 하나입니다. 해방 이후에 "애국심이 많은 사업가"로 변모하여 안호상 등 국수주의자들과 한 패가 되어서 백제가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가야가 슈메르 문명과 연관이 있었다는 방식의 유사사학 서술을 계속 내놓았습니다. 아무래도 일제 시절의 "위대한 대일본 제국"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상황에서, "대일본"을 "한국"으로 교체하고 "위대한 우리 제국"의 (만들어진) 과거를 선전하는 게 이 "총독부 베테랑"에게 자연스러웠던 듯합니다. 이덕일씨 등이 극찬하는 사람이기도 하죠. 그러면서도 이덕일 등이 "식민 사학" 타령을 하는데...참, 어이 없습니다. 나름 탈식민화 과정을 1960년대 이후에 거친 강단사학보다, 유사사학은 제국주의 시대의 "제국"의 꿈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편입니다.







Gyusoo Yi동농문화재단 강덕상자료센터/東農文化財団 姜徳相資料センター/Kang Deoksang Archive 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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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소개 579>
자료명 : 朝鮮農村團體史
저자 : 文定昌
발행자 : 日本評論社
발행일 : 1942년 12월 20일
쪽수 : 539쪽
문정창이 펴낸 조선농촌단체사입니다. 제1편 농회, 제2편 금융조합, 제3편 산업조합, 제4편 식산계 농촌단체의 구조조정문제로 구성되었습니다. 부록으로는 산림관계단체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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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seon Lee

랑케처럼 역사위에 덧씌워져 있는 것들을 벗겨냄으로써 독일의 역사를 조명했듯, 우리의 역사는 어떤 것을 걷어내야 할지, 그러고 나면 뭐가 나올지 모르겠네요.

김석영

저도 "환단고기"같은 설들을 보면서 저것은 제국주의 이론이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John Maiden

1945년 이전의 조국은 대일본제국이고 1945년 이후의 조국은 대한민국이니 당연히 "애국심"이 이어지죠. 너무나 자연스러운 겁니다.

Andrew Miles Logie

나중에 저술했던 사이비역사학보다 차라리 이 책의 내용이 더 쓸모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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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창

최근 수정 시각: 
文定昌
1899년 ~ 1980년

1. 개요2. 행적
2.1친일 행적2.28.15 광복 이후 행적2.3유사역사학 활동
3. 영향력4. 매체

1. 개요[편집]

한국의 유사역사학자이자,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전형적인 친일파 관료의 삶을 살았으나, 광복 이후에는 극렬민족주의를 부르짖는 유사역사학 신봉자로 변신하여 말년까지도 해괴한 주장을 일삼았다. 일본을 극렬히 증오하는 환빠들은 문정창에 대해서만큼은 도리어 그의 신뢰할 수 없는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할 뿐 아니라 그 이중적인 행적을 옹호하고 존경을 표하는 등 모순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2. 행적[편집]

2.1. 친일 행적[편집]

문정창은 일제강점기 시절 이사관과 군수를 하였다. 이 경력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1937년부터 조선총독부 농림국 농정과 속으로 근무하다가 1942년 6월부터 충청북도 내무부 사회과 사회주사(고등관 7등)로 근무했다1943년 3월 군수로 승진하여 황해도 은율군수에 임명되었다. 1945년 6월 이사관으로 승진하여 황해도 내무부 사회과장에 임명되어 해방될 때까지 재직했다. 관직생활을 하면서 '산업조합 설립까지, 1932.11', '조선의 시장, 1941.7', '조선농총단체사,1942.12' 등을 저술했다. -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문제연구총서 인명편1 (ㄱ~ㅂ) 친일인명사전, 796

2.2. 8.15 광복 이후 행적[편집]

광복 후엔 유사역사학을 하여 책을 썼으며 1976년에는 이유립안호상임승국 같은 유사역사학자들과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하여 ‘국사 바로잡기 운동’이란 것을 하였다.
해방 후 월남하여 1946년 조선농회 기획부 기획과장등을 지내다가 1947년 이후 사업체를 경영하면서 일제 침략사 및 한국고대사 연구와 관련한 저술활동에 종사했다. 주요 저서로 '근세일본의 조선침탈사, 1964', '(군국일본)조선강점36년사 상 중 하,1965~1967', '단군조서사기연구'(1968), '고조선사연구'(1969), '일본상고사'(1970), '한국고대사'(1971), 가야사(1978) 등이 있다. 1980년에 사망했다. -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문제연구총서 인명편1 (ㄱ~ㅂ) 친일인명사전, 796쪽
광복 후 월남하여 미군정 하에서 잠시 조선농회(朝鮮農會) 총무부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47년 공직에서 은퇴하고 개인 사업을 하면서 재야 역사가로 활동, 여러 권의 책을 냈다. 1976년에는 이유립(李裕岦), 안호상(安浩相), 유봉영, 임승국(林承國), 박창암(朴蒼岩), 박시인(朴時仁) 등과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하여 ‘국사 바로잡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1980년 2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문정창

2.3. 유사역사학 활동[편집]

광복 후엔 유사역사학 책들을 내었는데 대륙백제설을 주장하거나 가야와 수메르 문명의 유사성을 주장했다. 또한 자신의 책을 '일본인으로부터 받은 피해 계산서'라는 앞 뒤가 맞지 않은 주장을 하였다.
광복 후 문정창의 한국사 연구는 일제 침략사와 한국 고대사 연구에 치우쳐 있었다. 이는 일제 식민사학에 대한 기성 사학계의 도전이 불충분하다는 비판의 차원에서 시도된 것이다. 예를 들어 일제가 날조한 ‘반도 사관’을 극복하기 위해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없었다거나, 백제의 활동 무대가 중국 대륙이었다고 주장하였고, 심지어 가야와 수메르 문명의 유사성을 내세우는 등 한국사의 외연 확대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침략상에 침묵하는 사학계의 풍토를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이를 소상히 밝힌 자신의 저서가 ‘일본인으로부터 받은 피해 계산서’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문정창의 한국사 연구의 뿌리는 일제 관료 시절 수집한 자료에 바탕을 두고 있는 만큼 이런 비판은 극히 모순적인 것이라 하겠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문정창

3. 영향력[편집]

이 인간 이래로 수메르가 소머리 혹은 수밀이래서 기원이 한국이다 이런 식의 소리가 환빠들만의 상식으로 통용되었다.

3.1. 두산백과[편집]

두산백과에서는 문정창의 유사역사학 행위를 "일제가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왜곡해 놓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로 잡는데 힘"쓴 행동이라 미화했다.
1976년에는 안호상(安浩相)·박창암(朴蒼巖)·이유립(李裕岦)·유봉영(劉鳳榮) 등과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하여 일제가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왜곡해 놓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로잡는 데 힘썼다. 두산백과 - 문정창

3.2. 윤정모[편집]

주간한국에선 "인류 최초의 수메르 문명은 한민족 역사"라는 기사가 올라왔다. 윤정모가 쓴 소설에 대한 것인데, 문정창 의 유사역사학 책을 사실로 받아들인 것이다.
"1984년에 '교육신문' 여기자가 가져다 준 <수메르 역사>(문정창 저)라는 책을 읽고 처음엔 너무 엉뚱하고 놀랍다는 생각을 했어요. 잊고 지내다 1998년 영국박물관의 수메르 특별관을 관람하게 됐는데 숨이 멎을 듯이 강한 인상을 주면서 옛날 일이 생각났어요. 귀국하자마자 다시 책을 보고, 지인들을 통해 수메르와 관련된 책을 구해 읽었어요." - - "인류 최초의 수메르 문명은 한민족 역사"
그는 1984년 겨울 우연히 ‘수메르 역사’라는 책을 접한다. 역사학자 문정창씨가 쓴 책으로, 수메르 문명은 고대 동이족이 건설했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다. 그는 이때는 그러려니 하고 무심코 넘겼으나 14년이 흐른 1998년 봄 대영박물관 수메르관(館)을 지나다가 전시된 두개골을 보고 목덜미가 서늘해지면서 예전에 읽었던 책 내용이 떠올랐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수메르어와 한국어는 동일한 교착어로 그 어근이 같다고 명백히 밝혔음에도 우리나라 제도권 학자들은 이것을 거론한 적이 없다.” - 반미작가서 한민족 뿌리 캐는 역사작가 변신

3.3. 이덕일[편집]

이덕일은 문정창을 선생이라 하며[1] 동북아역사재단이 이걸 무시한다면 세금 운운했다.
그러나 이미 1963년에 북한의 리지린은 <고조선연구>에서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다는 사실을 논증했다. 남한에서도 문정창 선생이 1969년에 간행한 <고조선사연구>를 통해, 그리고 윤내현 교수도 <한국고대사신론>(1986)을 통해, 필자 등도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2006) 등의 저서를 통해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지 않았다고 논증했다. 그럼에도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 연구기관들은 동북공정에 맞서는 이런 이론을 완전히 묵살한 채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것이다. - 이덕일, 현재진행형 역사 왜곡 뒤엔 ‘쓰다·이병도 짙은 그림자’

4. 매체[편집]

[1] 이것이 이덕일의 심각한 자기 부정인 것이, 그동안 반대 세력을 모두 친일 식민사학자로 몰던 이덕일이 친일반민족행위자에게 선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여기서도 이덕일이 친일, 식민사관 프레임을 자기가 필요할 때만 이용해 먹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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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창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문정창(文定昌, 일본식 이름: 文山定昌, 1899년, 부산 ~ 1980년)은 일제강점기의 군수이며, 대한민국의 재야 역사학자이다.[1] 본관은 남평(南平), 호는 백당(柏堂)이다.

생애[편집]

1932년 문정창은 '조선 쇼와 5년 국세조사기념장'을 수여받았고, 1942년에는 충청북도 내무부 사회과 사회주사(고등관 7등), 1943년에는 황해도 은율군수, 1945년에는 이사관으로 승진하여 황해도 내무부 사회과장을 지냈다.[2]

8·15 광복으로 황해도가 인민공화국 치하에 들어가자 월남하여 남한에서 한때 조선농회(朝鮮農會)총무부장에 있기도 하였으나 1947년 그만두고 저술활동을 했다.

환갑이 넘은 나이까지 한국 고대사에 관한 저서를 다수 집필하였다.[3]

그의 주장으로부터 일제가 20만 권의 역사책을 불태웠다는 이야기, 이스라엘과 한민족은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 등이 튀어나왔다. 그는 한족의 조상으로 받들어지는 황제가 동이족으로서 본래 한민족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문정창은 '동이'의 개념을 광의로 사용하면서 중국 고대사에 등장하는 동이를 한민족의 조상으로 취급했으며, 이를 서량지나 임혜상과 같은 중국 학자들도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동이족인 소호족 일파가 서쪽으로 떠나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정착하여 수메르 문명을 건설했다고 주장했다.

이스라엘이 한민족과 갖는 관련성에 대해서 문정찯은 "그 소위 '선민'을 영문으로 된 성서 《구약》역대기 상 16장 13절이 Chosen People(음대로 읽으면 조선 사람)이라고 기록하였음을..."이라며 주장했다[4]

약력[편집]

사후[편집]

기타[편집]

그가 1969년에 간행한 《고조선사연구》(古朝鮮史硏究)와 윤내현 교수도 <한국고대사신론>(1986)을 통해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논증하였다.[5]

저서[편집]

  • 《産業組合設立まで》, 1932 ~ 1933
  • 《조선의 시장 朝鮮の市場》, 조선총독부, 1941
  • 《조선농촌단체사 朝鮮農村團體史》, 조선총독부, 1942
  • 《백제사 》(百濟史), 백문당(柏文堂), 1964, 1975
    • 1988년에는 인간사에서 출간하였다.
  • 《군국일본 조선강점 삼십육년사》상.중.하, 1965 ~ 1967
  • 《단군조선사기연구 檀君朝鮮史記硏究》, 백문당, 1966
  • 《근세일본의 조선침탈사》, 백문당, 1967
  • 《고조선사연구》(古朝鮮史硏究), 백문당, 1969
  • 《일본상고사 日本上古史》, 백문당, 1970
  • 《한국고대사 韓國古代史》상.하, 1971, 1979
  • 《고대일본사: 한국사의 연장》, 1973, 1989
  • 《한국고대사연구평》, 백문당, 1976
  • 《광개토대왕훈적비문론 廣開土大王勳績碑文論》, 백문당, 1977
  • 《가야사 加耶史》, 백문당, 1978
  • 《(한국-슈메르)이스라엘의 역사》( (韓國∼슈메르)이스라엘의 歷史) , 백문당, 1979

참고자료[편집]

각주[편집]

  1.  이문영 (2018). 《유사역사학 비판》. 역사비평사. 92, 99쪽. ISBN 9788976965554.
  2.  이문영 (2018). 《유사역사학 비판》. 역사비평사. 105쪽. ISBN 9788976965554.
  3.  김대성, 흉노왕의 후손 김일제 유적을 찾아서, 신동아, 1999.
  4.  이문영 (2018). 《유사역사학 비판》. 역사비평사. 99~107쪽. ISBN 9788976965554.
  5.  현재진행형 역사 왜곡 뒤엔 ‘쓰다·이병도 짙은 그림자’ 한겨레 2009.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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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창 ()

고대사
 
인물
해방 이후 「근세 일본의 조선침탈사」 · 「단군조선사연구」 · 「고조선사연구」 등을 저술한 학자. 역사학자.
이칭
이칭
백당(柏堂), 文山定昌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9년(고종 36) 12월 12일
사망 연도
1980년
본관
남평(南平)
출생지
부산
정의
해방 이후 「근세 일본의 조선침탈사」 · 「단군조선사연구」 · 「고조선사연구」 등을 저술한 학자. 역사학자.
생애 및 활동사항

1899년 경상남도 부산에서 출생했다. 호는 백당백당(柏堂)이다. 부산의 동명중등학교를 졸업한 후, 1923년 경상남도 동래군 서기를 지내다가 1924년 4월 조선총독부 행정강습소에 입학해 이듬해 3월 졸업했다. 경기도 수원군 속, 1927년 경상남도 울산군 속, 1928년 동래군 속, 1930년 경상남도 산업부 산업과 속(1930), 1932년 10월에는 조선 쇼와[昭和]5년 국세조사기념장을 받았다. 1937년 조선총독부 농림국 농촌진흥과 속, 1941년 조선총독부 농림국 농정과 속, 1942년 충청북도 내무부 사회과 사회주사(고등관 7등) 등을 거쳤다.

1943년 3월 군수로 승진하여 황해도 은율군수를 거쳐 1945년 6월부터 해방될 때까지 황해도 내무부 사회과장으로 재직했다. 관직생활 중 조선총독부 간행의 조선조사자료총서인 『산업조합 설립까지(産業組合設立まで)』(1932), 『조선의 시장(朝鮮の市場)』(1941), 『조선농촌단체사(朝鮮農村團體史)』(1942) 등을 저술했다.

해방 이후 월남하여 조선농회(朝鮮農會) 총무부장을 지냈으나, 1947년 개인 사업을 경영하며, 일제 식민사학에 대한 기성 사학계의 도전이 불충분하다는 비판의 차원에서 일제침략사 및 한국고대사 연구을 진행했다. 『근세 일본의 조선침탈사(近世日本의 朝鮮侵奪史)』(1964), 『(군국일본)조선강점삼십육년사((軍國日本)朝鮮强占三十六年史)』(상·중·하, 1965~1967), 『단군조선사기연구(檀君朝鮮史記硏究)』(1968), 『고조선사연구(古朝鮮史硏究)』(1969), 『일본상고사(日本上古史)』(1970), 『한국고대사(韓國古代史)』(상·하, 1971), 『백제사(百濟史)』(1976), 『가야사(加耶史)』(1978) 등 다수의 저작을 출판했다. 1976년 10월 8일 이유립(李裕岦)·안호상(安浩相)·유봉영(劉鳳榮) 등과 '국사찾기협의회'를 결성해 국사 바로잡기 운동을 전개했다. 1980년 사망했다.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1(민족문제연구소, 2009)
『조선연감(朝鮮年鑑)』(1943)
『매일신보(每日新報)』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
『조선총독부 및 소속 관서 직원록(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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