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7

백승종 - [송학의 형성과 전개>(저자: 고지마 쓰요시 小島 毅)

백승종 - <송학의 형성과 전개>(저자: 고지마 쓰요시 小島 毅, 역자: 신현승), 논형 2004) 날씨도 더운데... | Facebook

<송학의 형성과 전개>(저자: 고지마 쓰요시 小島 毅, 역자: 신현승), 논형 2004)

날씨도 더운데 어려운 책 이야기를 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그런데 “독서삼매”라는 옛말도 있지요. 날씨가 매우 춥거나 더울 때는 실내에 고요히 머물며 두꺼운 책을 읽는 것도 좋습니다. 바깥의 유혹이 별로 없는 때라 외려 지적 활동은 왕성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조선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살고 있어, 알게 모르게 성리학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그런 점에서 언젠가 한 번쯤은 성리학의 본질을 궁구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고 봅니다만, 여러분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성리학이 무엇인지 알려면 좋은 책이 있어야겠습니다.

말씀드리려는 책의 저자 고지마 쓰요시 선생은 참 훌륭한 학자입니다. 선생의 전공은 양명학(陽明学) 연구인데, 실은 동아시아의 왕권론(王権論)을 비롯해 관심 분야가 넓은 분이지요. <근대 일본의 양명학>을 비롯해 <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사대부의 시대> 등 모두 40여종의 저서를 집필한 것으로 압니다.

이 책은 번역도 잘 되었습니다. 역자 신현승 선생은 상지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는 것으로 들었어요. 신 선생님도 동아시아의 사상과 역사에 관해 약 20종의 저서 및 역서를 내신, 유능하고 부지런한 학자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네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배웠어요. 순서대로 간단히 적어보겠습니다.
첫째, 성리학으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왕안석(王安石)을 만납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송나라의 개혁정치가 왕안석을 지나칠 정도로 비방하였습니다만, 실은 그 선비야말로 성리학의 발전에 원동력을 제공하였답니다. 
두 가지만 예를 들어 설명하지요. 
그 하나는 왕안석이 이치(理)의 철학적 중요성에 착안했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천재지변에 대한 왕안석의 논의에는 이치의 본질이 다음과 같이 포착되었습니다.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 임금은 자신의 행동이 과연 천하의 올바른 이치(天下之正理)에 적합한지 성찰해야 한다.’
‘하늘은 이치(理)의 근본일 뿐이고, 왕이 하는 정치의 잘잘못을 일일이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재지변은 왕이 마음을 제대로 쓰고 있는지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현상으로 여기라.’
훗날 주희(朱熹)는 왕안석의 주장에서 큰 깨침을 얻었다고 하지요. 왕안석이 위에서 말한 이치의 개념을 수용해, 주희는 극기복례(克己復禮)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이해하였습니다. 즉, 극기복례는 공명정대한 하늘의 이치(天理)를 구성하는 크고 작은 사항, 달리 말해 절문(節文)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왕안석이 주희의 사상에 이바지한 또 한 가지는 학문적 계보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입니다. 왕안석은 송나라의 과거시험도 대폭 개혁했어요. 그는 문예를 시험하는 시부(詩賦)를 폐지하고, 국가 현안에 관한 논술(策)과 정치 또는 역사 비평(論)을 시험과목으로 추가했습니다. 아울러, <논어>와 <맹자>를 과거시험의 필수과목으로 정하였습니다. 유학자들은 본래부터 <논어>를 중요한 책이라고 여겼지만, <맹자>는 그만큼 높이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왕안석은 <맹자>를 <논어>만큼이나 귀중한 고전으로 여겼어요. 유가의 도통(道統)이 공자에서 맹자로 이어진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였기 때문이지요. 바로 그 점을 주희가 수용하였어요.

둘째, 주희는 왕안석의 주장을 토대로 한 걸음 더 나아갔어요. 사상적 혁신 또는 심화를 이룩하였다고 평가할 일이었지요. 여기서는 두 가지만 간단히 설명하겠어요. 

그 하나는 왕안석이 공자와 맹자를 극찬한 이유를 깊이 성찰하여, 주희가 “스승(師)”의 역사적 의미를 극대화했다는 사실입니다.
‘공자와 맹자를 끝으로 도(道)의 전승(道統)이 오랫동안 끊어졌다. 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은 이미 왕의 수중을 떠난 지 오래다. 그러나 이제 공자와 맹자를 학습하는 선비들을 통해 도가 이어질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유교의 도를 부흥시킬 사람이 있다면, 그는 왕이 아니라 공자와 맹자를 진정한 스승(師)이라고 믿는 선비들이다.’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간 것이지요. 그럼 누가 세상의 참 스승이 된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수기치인(修己治人)에 힘쓰는 선비, 즉 독서인(讀書人)이라고 하였습니다.
‘선비가 왕보다 중요하다.’
‘왕다운 왕이 되려면 훌륭한 선비에게서 배워라.’
주희는 이와 같은 신념을 가졌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러한 사상을 전수하였습니다. 자연히 많은 선비가 주희를 자신들의 대변자 또는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공자와 맹자의 도통을 이은 연원(淵源) 있는 지식인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 주희는 왕안석을 통해 인간 본성의 문제도 깊이 성찰하였습니다. 본래 왕안석은 인간의 본성이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고 했어요. 그것은 선악이 갈라지기 이전의 상태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희는 그러한 왕안석의 설명이 불충분하다고 여겼습니다. 주희는 <맹자>의 가르침을 따라 본성은 그 안에 인의예지(仁義禮知)를 이미 가지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요컨대 인간의 본성은 그 자체가 절대적으로 선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혼탁해진 것은 잘못된 기질 때문이므로, 그 잘못을 수정하면 본성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런 확신을 했다는 점에서 주희야말로 절대적 낙관주의자였어요.

‘인간의 마음에 하늘의 이치(理)인 인의예지가 부여되어 있다.’ 이렇게 주장하고 보면, 성즉리(性卽理)라는 주장은 자연스럽게 성립하지요. 그리고 본성이 올바르고 선하다면, 인간은 우주의 근본인 하늘(天)과 다르지 않다는 뜻이 됩니다. 요컨대 이치를 통해서 하늘과 사람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희망도 생깁니다. 동학에서 말하는 인내천(人乃天)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셋째, 주희는 사상적으로 크게 발전했는데, 그에게 자극을 준 선비는 여럿이었습니다. 그중 눈에 띄는 이가 곧 주돈이(周敦頤)였어요. 주돈이는 자신의 사상적 결실을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담았다고 하지요. 그 도설에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무에서 유가 나온다.’ 즉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란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찰을 토대로, 주희는 또 하나의 명제를 만들었어요. 그는 이치와 사물의 관계를 한 마디로 아래와 같이 갈파한 것입니다.
‘이치(理)란 본래 형체가 없으나, 기운(氣)에 의해 형태를 얻는다.’
넷째, 이 책에서 제가 얻은 또 다른 깨침입니다만, 성리학과 양명학의 관계를 새롭게 보아야겠어요. 알다시피 양명학자들은 주희가 마음(心), 본성(性) 그리고 이치(理)의 차이를 구별하는 데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성리학자들이 양명학자들을 거세게 비판했고요. 과연 두 학파는 상당한 관점의 차이가 있어요. 그러나 큰 틀에서 바라보면 성리학과 양명학의 차이는 소소한 것입니다. 두 학파는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훨씬 많습니다.

사람들은 성리학과 양명학을 극단적으로 대비하지만, 그것은 후세에 형성된 왜곡된 이미지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입니다. 성리학이든 양명학이든 개개인이 수신에 힘써 인격을 완성하고, 나아가 세상을 고치는데 이바지할 인물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리학자든 양명학자든, 예교(禮敎)라고 하는 것 - 세상을 지배하는 정돈된 질서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요컨대 성리학과 양명학은 목표가 똑같았습니다. 다만 학문적 수련을 어떻게 할지 그 방법에 관해 의견이 서로 달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명학과 성리학이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랐다고 하는 일반론은 잘못입니다.

그러하겠지요. 우리가 아는 말로 비유하면, 가톨릭과 개신교의 관계일 것입니다. 신학적 차이를 파고들면, 크다면 큰 차이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평신도나 일반 성직자의 차원에서 보면 개신교와 가톨릭이 소통하는 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모두 똑같은 성서를 읽고 똑같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지요. 차이보다는 동질성이 훨씬 높은 집단입니다.
앞으로 한동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고, 틈이 나면 <송학의 형성과 전개>도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 중복날 석양재에서 백승종 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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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찬욱
왕안석의 "도통론"은 사실상 불교 선종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하더군요 남선종=>왕안석=?주희 "주세영은 "왕공[왕안석]의 여행에 동행하여 정림사定林寺에서 며칠 밤을 묵었는데, 그곳에서 듣도 보도 못한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왕안석]는 "삼대와 주성왕 周成王 시대에는 주로 우리 유림들 사이에서 성인이 태어났으며, 두 한나라 시대에는 주로 불자들 사이에서 성인들이 태어났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주장이다. 그는 또한 "설봉雪峯의 발언 때문에 재상이 되기로 동의했다……"라고 말했고, 주세영은 "설봉의 성명을 듣고 싶다"라고 말했다
왕안석은 대답하였다. "이 늙은이가 다른 중생들을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https://cup.columbia.edu/.../the-religious.../978023120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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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백승종
맞는 말씀입니다. 주희도 선가(禪家)에서 많이 배운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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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화
좋은 책 소개,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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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종 replied
 
1 reply
남궁효
감사합니다!
백승종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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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Hyeok Bae
중복날에 시원하게 잘 읽었습니다^^
백승종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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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ongHyun Yoo
이미 백승종 교수님의 소개 정리글로 저는 만족하고도 남습니다. 더위를 잊을만큼 기쁘고 좋은 일이 중복되어 있으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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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백승종
유정현 하하 우리 목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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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영
깊이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대다수 선비들이 양명학을 이단으로 몰지 않고 품었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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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백승종
나태영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오영동
늘 감사합니다
백승종 replied
 
1 reply
Kanghun Ahn
주자학과 양명학이 대동소이하다는 백 선생님의 고견에 저도 동의합니다, 아마도 그 둘의 차이는 도달점이라기보다 방법의 차이가 아닌가 싶고요. 결국 "리" 理의 편재성을 믿은 주희는 격물을 통해 그것을 깨달으려 햇다면 왕양명은 그것이 아니라 "심" 안의 리 (사실 심즉리는 "심이 리 그 자체다" 가 아니고 "심 내부에 리가 잇다" 가 더 정확한 해석이라고 중국의 Chen Lai 교수가 제기한 바 잇고 저도 맞다고 봅니다) 를 바로 깨닫는 정도 이겟고요.
아마 김영식 선생님 책에서도 나오지만 ("주희의 자연철학") 주희가 외부 대상으로 "리"를 밝히는 방식은 주로 "유비" 추론에 근거하고 잇고 (그의 "인설" 仁說 이 대표적인 것 같습니다, 천지/태양의 자애로움이 만물을 생성시키는 것을 인간의 측은지심/인 으로 "비유"하며 공통적인 "리"를 설명하는) 그러한 논리가 한계에 다다를 때 결국 양명과 같은 심학이 나오고 그러한 전조는 이미 양명 이전에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Wing-tsit Chan, "The Ch'eng-Chu School of Early Ming" (Self and Society in Ming Thought), 29-52) 각설하고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의에 저도 동의하고 무엇보다 멋진 글 감사드립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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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백승종
Kanghun Ahn 좋은 말씀 해주셔서 공부가 많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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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의 형성과 전개
고지마 쓰요시 (지은이), 신현승 (옮긴이) 
논형 2004-02-20

319쪽

목차


제1장 | 천天

제1절 천견론天譴論
제2절 교사론郊祀論
제3절 천리天理에 의한 통합統合
제4절 주희朱熹에 의한 전개展開
제5절 천견론의 재현再現
제6절 교사론의 재현再現
제2장 | 성性

제1절 북송北宋의 성설性說
제2절 주희의 정론定論
제3절 심心.신身.정情.성性
제4절 무선무악無善無惡
제5절 주륙朱陸의 이동異同
제6절 비난非難과 조정調停
제3장 | 도道

제1절 주제主題의 구성構成
제2절 이학理學의 개산開山
제3절 허상虛像의 성립成立
제4절 종사從祀의 승강昇降
제5절 당송唐宋의 변혁變革
제6절 도통道統의 후계後繼
제4장 | 교敎
제1절 성인聖人의 가르침
제2절 예학禮學의 의의意義
제3절 동관冬官의 보망補亡
제4절 교화敎化의 직관職官
제5절 가례家禮와 향례鄕禮
제6절 한학漢學과 송학宋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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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지은이: 고지마 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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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근대 일본의 양명학>,<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사대부의 시대> … 총 41종 (모두보기)
도쿄대 인문사회계人文社会系 연구과研究科 교수. 도쿄대 문학부文学部 중국철학中国哲学 전공 졸업. 현재 유교사儒教史, 양명학陽明学, 동아시아 왕권론東アジア王権論 등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송학의 형성과 전개宋学の形成と展開』(2004년 한국에서 번역 출간), 『동아시아의 유교와 예東アジアの儒教と礼』(2007년 한국에서 번역 출간), 『주자학과 양명학朱子学と陽明学』, 󰡔야스쿠니 사관 막부 말기 유신이라는 심연靖国史観 幕末維新という深淵』, 『중국의 역사 07 중국사상과 종교의 분류 송조中国の歴史07 中国思想と宗教の奔流 宋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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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신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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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즙산학과 송명유학>,<명대 말기 유종주와 지식인 네트워크>,<한국을 다시 묻다> … 총 17종 (모두보기)
2021년 현재 중국 정강산대학井岡山大學 외국어학원 일본어과 교수. 일본 동경대학 동아시아사상문화 전공 석사 및 박사, 중국 천진사범대학 정치사상 전공 석사, 강원대 철학과 학사. 10년 간의 중국, 일본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뒤 고려대 HK연구교수, 상지대 조교수 및 여러 대학 등에서 강의와 연구 활동에 매진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운명의 힘에 이끌려 중국으로 다시 건너가 지금은 동아시아 유교사상사 가운데, 강서 유학과 여릉문화(강서성 길안시)에 흥미를 갖고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명대 말기 유종주와 지식인 네트워크』(2020), 『제국 지식인의 패러독스와 역사철학』(2015), 『한국을 다시 묻다』(2016, 공저) 등, 옮긴 책으로 『잔향의 중국철학: 언어와 정치』(2015), 『삼국지의 세계』(2011, 공역), 『송학의 형성과 전개』(2004), 『사대부의 시대』(2004), 『동아시아 역사와 일본』(2005, 공역), 『청년 모택동』(2005) 등이 있다. 그 외 수십 편의 동아시아 사상문화 및 유교철학 관련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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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 201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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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인사人事'에 의해 '천재天災'가 발생한다는 논리를 '천견론天譴論'이라고 칭한다. 저자에 따르면 천견론은 과학이나 신앙이 아니라, 정치 공간에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동원된 정책 수단이다. 정치의 득실과 재이災異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은 순자荀子나 왕충王充 같은 송대宋代 이전의 사상가들이 이미 주장한 바이지만, 송대에도 천견론은 소멸되기는커녕 군주가 "이치[理]에 의거하여 일을 처리"하도록 이끄는 방편이었다. 신종대를 보면, 재해와 이변은 신법에 반대하는 대신들이 왕안석의 전횡을 타도할 때 뿐만 아니라, 왕안석에 의해 "일어나야 할 이변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그것을 경하"하는 대응 수단으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30)




왕안석은 그저 재이와 연관된 사태를 소멸시키려는 사고방식에서 한걸음 나아가 "군주는 재이를 계기로 자신의 행동이 '천하의 올바른 이치[天下之正理]'에 맞는지를 반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군주된 자의 근심은 이치를 궁구하지 않는 것"에 있으며, "궁리窮理야말로 정치의 요체"인 것이다.(56) "재이가 구체적인 사상에 대한 '응보[應]'가 아니며 군주의 수덕修德에 의한 궁리가 중심 과제"가 되면서, "리理의 권위를 보증"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여기서 변함없이 '천天'이 등장한다. 단, 이때의 천天은 "리理의 근본으로서만 기능하는 것이고 군주의 시책에 일일이 끼어들어 쓸데없이 참견을 하는 유의지자有意志者"의 의미를 상실한다.(57)




이로써 재이는 "어떤 개별적 현상에 의해 기계적으로 발생"하는 사태가 아니라 "군주의 마음의 준비에 대한 감시와 억제 기능을 가진 현상으로서 파악"되었다.(71) 주희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일신一身의 사욕私慾을 이겨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으로 돌아간다"고 주석을 달았을 때, '예禮'의 치환이 '천리의 절문'인 것은 그러한 이유이다. 주희는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우선시하는 욕망이 기질氣質로서 갖추어져" 있지만, 그것을 극복하여 "'천리의 절문', 즉 규범으로서의 예禮에 합치한 말과 행동을 해 나가는 것이 당연히 사람으로서의 올바르고 본래적인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80)




"북송北宋에서 맹자를 세상에 널리 알린 제일인자는 왕안석이다."(98) 왕안석은 "당대唐代 이래로 중시되어 오던 시부詩賦를 시험과목에서 제외하고, 그 대신에 책策(시사문제에 관한 대책)과 논論(역사비평)을 중시하였다." 또한 "'겸경兼經'이라는 명칭 하에 <논어>와 <맹자>를 모두 과거의 필수과목으로 삼았다. 결국 <맹자>는 이러한 계기를 시작으로 하여 경서로서의 취급을 받게 되었다."(101) 왕안석은 "본성[性]은 서로 가까운 것이지만, 습관[習]이 서로를 멀어지게 한다"(<論語> 陽貨)는 공자의 말을 빌어, 성性에 선험적인 시비是非나 선천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性이 원인이 되어 구체적인 형태로서 발현한 상태가 문제"라고 말하였다.(99)




주희는 "본성 그 자체에는 선악의 구별이 없다"는 왕안석과 호남학파의 주장을 배척하고, 인의예지仁義禮知를 본성으로 인정한 한유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는 "장재張載의 '심心은 성性과 정情을 통합한 것'이라는 규정"을 기본으로 삼아, 사람은 본래 선한 본성을 갖추고 있으며, 다만 "기질의 소위所爲에 의해 악행이 생겨난다"고 보았다. "이 세상에서 악을 없애기 위해서는 기질을 선으로서의 본성으로 되돌리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인의예지를 "사람의 마음에 미리 부여된 리理로 간주하는 것"이 주희의'성즉리설性卽理說'이다. 아울러 이러한 리理는 그 "본래적인 올바름과 선함"의 근본 원리인 천天에 기대고 있기에, 성性은 리理를 통하여 우주와 연결된다.(110-2)




주희는 자신을 비롯한 도학자들이 맹자를 마지막으로 끊어진 도통道統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했다. 주희와 그 문류門流가 보기에 당대는 공자와 맹자가 통치자에게 도道를 가르치던 상황과 유사한, 그들 나름의 '르네상스'였다. 주희에 따르면 "요순에서부터 공자·맹자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그치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 '도道'는 그 후 천사백 년에 걸쳐서 단절"되었는데, "그것을 다시 부흥시킨 이가 바로 주돈이이고, 그러한 성과가 <태극도설>이다."(157) 주희가 '성性과 정精'을 분리한 것처럼, "리理에는 형상이 없으며 기氣에 붙어 있는 것"이라는 자신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창할 때 "<태극도설>의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구절은 아주 적당한 재료"였다.(168-9)




이제 "도道의 담당자는 군주의 지위를 얻은 자에게만 한정될 수는 없다. 오히려 공자 이후는 '왕王'이 아니라, '사師'라고 하는 것이 도통 계승자의 성격이 되었다."(199) 주자학이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독서인讀書人들의 마음을 붙잡을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로서 그들에게 살아 있는 목표를 제시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때의 독서란 "성인이나 현인들이 글로 써서 남긴 텍스트 등을 통하여 마땅히 그러해야 할 세상의 올바른 모습에 관하여 배우는 작업이었다."(202) 사서학四書學을 학습하여, 오경五經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 "<주례>는 국제國制, <의례>는 가례家禮로 삼고, 여기에 <예기>를 더한 삼례의 학을 부흥시키는 것"이 주희의 실천적 목표였다.(221)




<주례>를 중핵으로 삼아, "치민治民을 위해서는 확고한 (국가) 조직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고 방식"은 왕안석의 신학에서 유래한다. 이에 대항하여 등장한 "정이의 도학道學·리학理學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위정자 자신의 인격 도야와 민중에 대한 풍속 교화를 중시하였다." 그러나 "통치 제도를 중시하는 주례형周禮型과 수양 교화를 중시하는 대학형大學型"은 서로를 배제하기보다는 현실적으로 "수레의 양쪽 바퀴와 같은 관계로 청말淸末에까지 이르렀다. 다만 주자학에서는 이념으로서의 수기치인이 압도적인 무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학형大學型으로 그 무게 중심이 기울어지게 되었다."(243-4)




비록 왕수인이 주창한 명대의 양명학이 각자에게 '천리로서의 양지良知'가 갖추어져 있다는 취지에서, '심心·성性·리理'를 구별하는 주희의 사고방식에 반대했지만, 이들의 관점이 본질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아니었다. "선천적으로 하늘로부터 받은 바로서의 리理에 대하여 존경의 염念을 가지고 경건하게 유지하는" '존덕성尊德性'과 "학문에 의해 견문을 넓히고 리理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해가는" '도문학道問學'을 이항 개념으로 구분 짓고, 주자학과 양명학을 대비시킨 것은 어디까지나 "후세에 만들어진 이미지에 근거한 이야기이다."(131-3) 제3자의 입장에 서 있는 자들에게, 주자학이나 양명학이나 모두 '송학'이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의 집단이었다.




"주자학을 따르든지 아니면 양명학에 영합하든지 간에 명대明代 독서인들이 공통 과제로서 삼았던 것"은, '송학'이 품고 있던 문제인 "수신을 완성한 인물이 지도자가 되어 형성·유지해갈 질서를 어떻게 해서 가능하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이자 실천방안이었다. 여기서 "정돈된 질서, 즉 그들의 용어로 '예교禮敎'가 한층 더 전면으로 떠오르게 된다. 그것이 거경궁리居敬窮理에 의한 것이든지, 아니면 현성양지現成良知 이든지 간에 궁극적인 목표는 동일하였다. 단지 그 방도가 달랐을 뿐이다."(250) 실천론을 배제하고 심성론心性論으로 축소시킨 '송학'은 한당漢唐의 훈고학을 재평가하는 자신들의 방법론을 '한학漢學'으로 칭한 청대 고증학자들이 창안해낸 개념이다.(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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