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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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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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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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
  · 
김민기 선생님 빈소에 있다 보니 이런 사진(좌영남 우장희)도 찍게 되는군요. 빈소에서 들은 얘기들로 써봤습니다.
ㅡㅡㅡㅡㅡㅡ
“천재 예술가가 요절했어. 우리 팀 제일 막내인데, 요절한 예술가들 중 ‘톱’일 거야. 원 없이 살았고, 원 없이 술 먹었어.”
23일 오전 서울 대학로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김민기 빈소를 찾은 가수 조영남이 말했다. 79살에도 여전히 왕성한 그에게 73살은 너무 이른 죽음일 터다.
옆에 있던 가수 이장희는 “얼마 전 울릉도 들어가기 전에 많이 수척해진 민기를 잠시 본 게, 며칠 전 통화한 게 마지막이 됐어”라며 휴대전화에 저장한 글을 열어 보여줬다. 10여년 전 쓴 글이라 했다.
“민기가 울릉도에 오면 제일 좋아하는 방이 하나 있지요. 천장은 무너져 내릴 듯하고 벽은 심하게 금이 간 창고를 그는 좋아했지요. ‘형! 난 이 방이 좋아. 햇빛이 살짝 들어오는 이 작은 창이 좋아. 그리고 이 작고 못난 책상이 나는 좋아.’ 실은 그 방은 오래 전에 소가 살던 외양간이지요. (…) 나에겐 꿈이 있지요. 언젠가 민기가 다시 기타를 들고 ‘형, 이 노래 들어봐’ 하고 다가오기를 말입니다. 민기야, 죽지 마라. 아이 러브 유 베리 머치.”
10여년 전 “죽지 마라”고 했던 당부는 이제 부질없어졌다.
가수 정태춘도 빈소를 찾았다. 그는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면서도 “김민기가 없었으면 나도 없었다”고 했다. “막힌 시대를 뛰어넘는 상상력과 뒤통수를 치는 표현력에 큰 영향을 받았어요. 위대한 사람은 남은 이들에게 뜨거운 영감을 주고 떠납니다.” 그는 ‘아침 이슬’ 50주년인 2021년 쓴 붓글을 보여주었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그이의 노래를 한번도 누워서 들어본 적이 없다”
장례 둘째 날에도 가수 박학기가 빈소를 상주처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서울 대학로 소극장 학전 폐관을 앞두고 ‘학전 어게인’ 콘서트를 기획·진행하는 등 김민기와 학전 일이라면 늘 발 벗고 나섰다. 빈소에서도 동료 가수, 배우 등을 맞고 전화 통화를 하느라 분주했다.
“(절친) 광석이 때문에 형님을 알게 됐어요. 학전 개관 때 광석이와 왔다갔다 노래도 하고 하면서 친해졌죠. 언젠가부터 형님이 나하고만 소통하고 나만 찾아서 여러 일을 맡아 하게 됐어요. 나도 상주라고 생각해요.”
그는 김민기를 두고 “카리스마가 뭔지 알려주신 분”이라고 떠올렸다. “형은 큰소리를 치거나 무섭게 지시하고 강요한 적이 없어요. 늘 온화하죠. 그러면서 자신의 행동으로 남들에게 해야 할 지침을 보여줬어요. 매사에 철저하고 완벽하고 공정하게 일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따라가게 돼요. 후배들이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죠.”
“마지막까지 청년이셨던 분”이라고도 했다. “이게 맞다고 하면 절대 물러서거나 타협하는 법이 없었어요. 고집과는 달라요. 남들은 융통성 없다 할지 모르지만, 흔들리지 않는 자기 주장과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갔어요. 그게 청년 정신이죠.”
그는 “형이 돌아가신 뒤 어제 처음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했다. “사람들이 와서 추모 공연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어봤을 때, 내가 물어볼 사람이 없더라고요. 물어보고 허락받을 사람이 없다는 것, 기대고 있던 나무가 없어졌다는 걸 알고 갑자기 울컥했어요. 형이 나한테 이런 사람이었구나. 내 주변 모든 일을 물어보면, 형이 해답이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는 가슴 깊이 새겨둔 김민기의 말을 꺼냈다. ‘김광석 다시부르기’ 공연을 처음 하고 통장에 ‘푼돈’이 들어왔을 때 김민기가 말했다. “돈이라고 다 똑같은 돈이 아니다. 재벌이 하룻밤 술값으로 몇천만원 쓰는 돈과 광석이 생각하며 노래하고 받은 돈은 다르다. 이 돈으로 큰일을 할 수 있을 거다.” 이후 박학기는 돈을 구분해서 쓸 줄 알게 됐다. “일할 때도 어느 행사에 가면 경제적 가치와 영향력이 더 클 수 있지만, 그것 말고도 물밑에 다른 가치가 있다는 걸 형에게 배웠어요.”
이날도 문화예술계·정관계 인사부터 일반 시민들까지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서가며 조문했다. “형이 돈을 많이 번 것도 아니고, ‘왜 저렇게 살았냐’는 말도 듣지만, 누구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워하고 슬퍼하네요.” 이 말을 남기고 박학기는 다시 빈소로 들어갔다.
(기사 링크는 댓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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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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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선생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참 많은 것을 남겨주셨습니다. 당연한 것을 새롭게 보려는 ‘순수한 열정’으로, 세상을 더 밝게 만드셨습니다.
동숭동 학림다방에서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열정이 마음에 울림을 주었습니다. 역사는 선생님을 예술과 세상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지닌 영원한 청년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어린이를 사랑하셨던 선생님의 뜻이 ‘아르코꿈밭극장’에서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편히 영면하시기를 기원하며, 유가족께 위로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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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Sanha
  · 
김민기 선생이 암투병중 기어이 세상을 떠났다. 나도 암투병중이라 마음이 더욱 무겁다. 모두모두 덧없이 떠나는구나... 오래 전 내가 감옥을 나와 절필하고 떠돌고 있을 때 소설가 김훈, 영화감독 이창동, 그리고 김민기 선생 등 세 분이 인사동에서 나에게 위로주를 샀다. 
그게 인연이 되어 마음이 허허로울 때면 가끔 대학로로 김민기 선생을 찾아 소줏잔을 기울이며 많은 위안을 얻었다. 다락방처럼 혼자 숨어있기 좋은 방이었다. 아침이슬 같은 영혼의 김민기 선생이 벌써 그립다. '바람과 나'를 듣는다. 이제 봉우리에서 편히 쉬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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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 K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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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 한국美의 참맛
한국美의 참을 ‘뒷것’이라 말하면서 뒤로 은닉했지만 스스로 드러나고 밝혀지는 삶을 사신 분(김미옥 선생처럼 문자에 중독된 사람은 아니지만, 한 번 듣고 흩어지는 것을 문자로 잡기 위한 시도, 미학은 이렁게 아닌데.... 처음에는 내용을 모두 문자화하려다가 이러면 내가 뽑고 싶은 핵심 내용이 흐려질 것 같아,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점들만 기록했습니다.)

(김민기-한수진 인터뷰)
1. 위대했던 ‘지하철 1호선’에 대한 회상과 평가(1994년 첫 공연)
한: 3000회라니 (외국 공연 35회) 정말 축하드립니다 감회가 깊으시죠
김: 모르겠어요 그냥 해왔을 뿐인데.. 그 처음에 했을 때 어떤 분이 그런 말씀
그건 미련한 짓이다, 그건 예술이 아니다. 똑같은 것을 반복하니까
맞습니다. 그건 미련한거고 예술 아니어도 좋다, 그냥 일이라 생각하고, 그냥 하다보니 3000회가 된거죠
한: 워낙에 애초에 계획이 없으셨군요
김: 애초에야 마 두 번 올리나, 매일 하다보니까 그게 3000번까지...
한: 관객들도... 12년이나 달려왔는데 고장도 없고 파업도 없으셨어요?
김: 아휴 왜 없었겠어요. 그때그때마다 메꾸고 출발하는 거죠
그 영화같으면 한 번 찍고 내보내면 그만이잖아요. 근데 이건 사람이 하는 일인데 사고가 없을 수 없죠. 자잘한 사고부터... 무대 뒤가 껌껌하니까 무대 뒤에서 떨어져 갈비뼈가 부러지고 목이 노래를 부르니까 목이 상해 노래가 안 나오는 경우도 있고, 온갖 사고가 많죠, 사람이 하는 거니까 같이 늘 맞는 것도 아니고 
한: 소극장 뮤지컬이 힘드셨죠
김: 그때는 머,.. 지금도 무모하긴 마찬가진데
출연자가 11명, 연주자 5명, 16명  
소극장의 규모를 넘죠, 지출도 많고 무모한 짓이죠, 3000회라는 것도 무모한 수자인 것 같고, 그 미련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연극쪽에서는 연극 아니다, 예 아닙니다.
뮤지컬 쪽에서도 저건 뮤지컬이 아니다. 예 맞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그런 상태에서 시작한 것 같습니다.
한: 번안 작품이면 동질감을 느끼기 힘든데요?(원작자도 고유한 오리지널한 작품이라고 인정해 더 이상 저작권료를 받지 않음)
김: 대학교시절 30년 짧은 노래들을 만들어 보다가, 3분, 5분 짜리 가요 형식, 내용을 넣기가 갑갑해서 외연을 넓히다가 마당극, 전통극, 오페라, 서양의 뮤지컬을 이런 것들을 좀 훑어본 적이 있었쬬. 살펴보다가 좀 희안한 게 있어 공부하겠다고 시작한 것이지 공연하겠다고 시작한 것은 아니에요. 그야말로 내 고민을 다른 나라의 전혀 나라 문화권의 사람들은 어떻게 풀었나, 공부하기 위해
<그늘>
한: 뮤지컬... 춤추고 노래하는 밝은 극인데 이 작품 꼭 가벼운 그런 것만은 아니잖습니까?
김: 절반은 빛, 절반은 그늘인데 다들 그 빛이 있는 부분만, 클로즈업되고 하는 부분만 보는 데, 절반 그늘에 대해서 늘 얘기가 안 되기 때문에 형평이 맞지 않잖아요
그늘 쪽의 절반의 얘기를 다루었던게 아닌가.. 
한: 제가 본 것으로는 소외된 모습을 다루었다...
김: 그런데 그 ‘소외’라는 말은 맞지 않는게 아닌가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늘이 없으면 이쪽이 있지 않은 거거든요. 그늘은 뿌리라고 봐야지 소외라고 할 수 없죠. 그 그늘 부분이 늘 얘기가 안 되니까... 소외라는 말은 딱 맞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런 쪽의 얘기를 할 때 과거에는 제 젊은 시절, 그늘이 아닌 쪽에 대한 증오, 분노, 공격, 거꾸로 해서 그늘이 아닌 쪽을 없애버리면 뿌리도 또 죽거든요
막 모든 슬픔, 좌절, 절망, 분노 등 예전에는 그런 식으로 표현되지 않았나, 그런데
실제 그쪽의 사람들을 만나보면 그렇게 낙천적이고 긍정적일 수 없어요. 그게 생존의 비결이었죠. 그렇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으니까. 정 반대로 그런식으로만 인정했단 말이죠
여기 이 작품은 굉장이 그늘진 사람들의 얘긴데, 관객들에게는 코미디같은 늘 웃음이 터지고.. 그런 것이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은가.
한: 방은지, 설경구, 조승호.... 1호선 지하철. 배우보는 안목까지 뛰어난줄 
김: 그럴 리 없죠, 그럴 리가 없고.  이 작품의 특성이 주인공과 엑스트라가 있는 작품이 아니거든요. 8-9가지 작품 역,  무대 나왔을 때 제일 편했다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배운가 봐요. 이것 끝나고 밖에 나가면 작품에 겁이 안 났다. 그러면서 성장해나간 거겠죠
(황정민): 배우의 기본은 이 연극에서 배웠다.  연기 지도를 한 적이 없다. 왜냐면 제가 연기자가 아니기 때문에 연기를 해본 적이 없다. 다만 연출을 하면서 관객의 입장에서 이렇게 보인다. 이렇게 해보라고 코치를 한 게죠.
<아침이슬>
노래방에서 부르면 쫒겨나잖아요. 나갈 때 부르는 노래지...
<양희은>: 어머 그 노래 너무 좋다. 그런데 찢어버리길래.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쓰레기통을 뒤져 찾았어요. 네 조각을 냈더라고요. 그 악보를 제가 아직 가지고 있죠.
1971년 낮고 읊조리는 듯한 그의 음성은 글도 생각도 노래도 모든것이 금지된 시절, 이른바 최초의 운동가요가 된 것이다. 아침 이른바 혁명적 낭만주의 세대에 표상, 그 이후 대학가를 넘어서 시민의 노래로 확장.
<상록수>
1977년 김민기는 인천의 염색공장 찾아감. 상록수 만듦 ‘저들에 푸르른 풀잎을 보라“ 노동자의 결혼식 축가를 만든 이 노래마저 금지. 양희은의 말: 아침이슬부터 벗어나고자 했죠. 그래서 상록수를 만들었던 것 같은데..
노래굿 <공장의 불빛> 
동일방직 사건을 노래굿이라는 새로운 형식에 남아냈던 것이다. 노동운동을 담은 노래운동의 직접적인 선조. 3분짜리 노래한 한계를 넘어 노래로 거대한 서사를 담아내려고 했던 점. 훗날 마지막을 각오했다고 말했다. 악몽같은 벼랑끝을 사는 사람들, 모든 삶이 끝나고 모든것이 망가질지도 모른다는 절박감 속에서 했다.
<예수같은 김민기>
노래 때문에 굉장히 많이 기관에 가서 맞아도보고 그랬는데, 그런데 들어가서 알기 시작했어어요. 저를 취조 하면서 너 이런 이런 이유로 이 곡을 만들었지, 너 이런이런 의도로 그 곡을 만들었지, 그래서 알게 됐어요.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 게 아니라 전혀 의도 없이 만든 곡을 아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맞으면서 배웠어요
한: 운동 가요는 목표가 뚜렷한데요.
김: 그런 생각하면서 맨드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전 그런거 못하겠더라고요... 의도를 갖고 했다면..
의도를 갖고 못 맨들어봤기 때문에, 전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해요 아마추어라고, 프로라면 의도를 가지고 했겠죠. 프로같으면 의도와 기획이 있어야 되잖아요. 전 그런게 없었기 때문에 전 아마추어라고 생각해요
한: 세상에 대한 원망은 없습니까?
김: 아이고 머 그 모든 사람이 그렇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화가 났다고 해서, 내가 치면 내가 속는 게 되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쪽에서 때리고 고문하고 그러면 누근들 안 죽이고 싶겠어요 내가 달려들면 내가 니한테 니가 파논 함정에 들어가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한번은 그 서소문 근처 범신사라는 보안소 분소가 있어요
거기를 들어갔는데, 좀 살벌한게 벽이 다 쿠션으로 돼있어요. 자살 못하게 할려구.
들어가자마자 이제 신나게 맞는데, 맞는것도 프로한테 맞아야돼요. 
프로한테 맞으면서 재밌었어요. 
어차피 맞아서 꼬꾸라지는 건데. 
맞아서 꺼져가는 성냥개비처럼 의식을 잃어가는데, 때리는 사람이 슬로우모션으로 보이는거예요 
의식을 잃어간다는 것은 통증이 없어져가는 거죠 
화나는 것은 통증이 있을 때 화나는 거지 통증이 없어지니까 그 사람에게 미안하다. 
괜히 저 사람이 나 때문에 죄짓는 거잖아요. 그렇게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한: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그런 생각이 드실 수 있죠?
김: 근데 그건 그 통증이 있었으면 그렇게 할 수 없었겠죠. 근데 통증이 없어지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그 예수가 십자가에서 한 얘기가 있잖아요 
”저 사람들을 용서해주십시오“
통증이 없어질 때가 되면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도 참 재밌는 경험을 공부했어요
한: 아직도 미워하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김: 아 그거 미워하면 뭐해요 그 사람들도 월급받고 일하는 사람이고, 나를 때려야 먹고 사는 사람들이잖아요. 불쌍한 생각이 들었어요.
한: 말씀을 듣고 보니 투사 김민기, 이렇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김: 전 싸워본적이 없고... 늘 그 사람들에게 죄송해요.. 전 싸워본 적이 없고
전 그렇게 못했어요. 하고 싶었죠. 근데 저는 용기 안 낳고, 전 처지고 움직일 수 없이 감시를 받았어요. 근데 마치 그렇게 헌 것처럼 포장,  죄스런 마음, 빚진 마음.
<농사>
그해 1987년 전북 김제에서 농사
황명걸의 시 <실한 낱알>에도 언급된다.
나병식이 마늘장사 하고
원혜영이 채소장사하더니
김민기가 쌀장사에 나섰다
선후배 친구들
잃어버린 입맛 찾으라고
......
(안치환) 김민기 선배에 대한 소문 같은거 나타나지는 않지만 우리에게는 지표, 방향같은 
그가 세상의 한 가운데서 농촌으로 들어간 이유가 무엇일까?
김: 그분네들처럼 살고 싶더라고요 사는 것 몽땅 다, 저는 그분네들 부럽고 그분네들이라고 말하는 거가 잘못된 거죠
그렇게 살고 싶었어요. 집이 불나고 해서 엉뚱하게 도시로 나게 됐는데, 아직도
그 시절이 꿈 같아요, 그렇게 좋았어요.
하루 24시간이 몽땅 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으니까. 그게 어떻게 설명이 될 수 있겠어요. 직접 살아보세요.
5시되기 전에 일어나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고, 잠자더래도 뻗어서 자고, 너무 충만한 잠, 그게 유유자적한 살밍 아니죠. 바쁘고 힘들게 살았지만 꽉 싼 삶을 살았어요 늘 그리로 돌아가고 싶어요
한: 운동의 현장에 서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그당시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늘 떳떳하다는 생각을 했어어요. 물론 늘 희생하는 사람들에게 늘 죄송스러웠죠.
내가 그 역할을 해야 되느냐, 지금 24시간 노동하고 이렇게 내가 꽉 찬 하루를 사는게. 그럴 수 있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을 거고, 나는 이렇게 사는 것이 내 주제에 맞다, 라는 그런 생각을 했죠.
나서고 싶은 생각이 안나더라구요
그리고 늘 통제를 받았어요
한:거기까지 따라 왔어요
김: 그럼요
한: 노래 만들 생각?
안 맨들려고 이를 악물었죠
농사 하기 전 밭에 흙덩어리를 갈아없잖아요
그걸 괭이, 꾸부러진 등으로 툭툭 때리면서 흙을 만드는데
턱 허는데 파삭하는 소리가 나잖아요. 흑이 부서지는 소리요
화성체계를 잊으려고 하는데, 이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화성체계를 잊으려하는데 그 소리가 들리더라구요
아 그 소리의 맛이라는 게, 그 소리가 좋더라고요
<1987년 말할 수 없는 충격>
수십만명이 운구를 하면서 그 노래를 부르는데 굉장이 소름
그 노래는 더 이상 자기 노래가 아니었다.
그리고 6년 뒤
김민기는 비로소 자신의 노래들과 맞이한다.
아름다움, 이런 추악하고 비극적이며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곧추 세워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인 노래들, 평생 노래로 극으로 세상을 담아왔던 김민기
그의 음반 겉표지에 ”이 땅의 힘겨웠던 한시대를 함께 살아온 모든 이들에게 니 노래를 바칩니다. 1994.1 김민기“
<송창식>, 김민기가 정말, 목소리 너무 좋고 용모 너무 준수하시고...
김: 그건 창식이 형님이, 참 끔찍한 형님이셨어요
공장의 불빛 만들 때 그때 얼머나 살벌한 시절
자기 강습실 내주고 노래하고, 쟁이라는 게 그런게 있어요. 일거리가 자기 한테 와 있으면 그게 벼락맞아 죽을 줄 알면서 피할 수 없는데 그게 쟁인데 창식이 형은 분명 벼락맞을 줄 알면서 저를 도와준거예요. 창식이 형의 애정으로 저를 그렇게 말씀한거죠.
한: 실제로 무슨 일을
김: 아 당연히 끌려잤죠. 그때 그런 내색도 안 해요 대인이죠
<김지하>
한: 김대표님께 가장 영향 미친 사람?
어머니고 어머니는 키워준 분이고
김지하 형님을, 전 부정할 수가 없는게
한국말이 살아있더라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지하 형님 그것을 보면서 입속에서딱 혀가 따라가더라구요 
아 말이라는 게 문자로만 되어 있는 게 아니구 살아 있는 거구나, 전 너무 놀라운 일이었어요.
제 노래 얘기 하지 말라구
지하철 대단한 성공했다는 얘기 하지말라구
Yoo Jung Gil  (유정길)의 페북:
https://www.facebook.com/yoogilyong/videos/460832793478459
0:21 / 42:11
Yoo Jung Gil
  · 
(김민기에 대한 긴 글과 긴영상) 
유정길
저는 예전 90년 중반 김지하선생님과 생명민회를 함께 할때 김민기 선생이 초청을 하셔서 김지하선생과 같이 지하철 1호선을 봤고, 이후 뒷풀이에 함께 했습니다. 
===
김명리
  · 
고 김민기 선생님 영전에
아, 김민기 선생님...
선생님이 그예 먼길 떠나셨다는 소식에 황망한 마음을 가누기 어렵습니다. 
토지문화관의 귀래관에서 2007년의 봄날을 함께 지내며 선생님이 건네주셨던 하염없는 따뜻함과 고요한 품과 
새벽이면 눈 부비며 올랐던 산, 해 뜨기 전의 어둑한 산길을 선생님 뒷모습을 등빛 삼아 걸어가노라면 어느샌가 틔어오던 임도의 새벽빛이 영원처럼 느껴지기만 합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이 계셔주셔서 행복했습니다. 선생님과 동 시대를 숨쉴 수 있었기에 암울하고 어둡기만 했던 청춘의 날들을 무사히 건너올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노래, 선생님의 영혼에 기대면 남아 있는 날들의 숨길도 햇빛쪽으로, 햇빛쪽으로만 트이는 날들을 살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도 일찍 먼길 떠나시는 슬픔에 가눌 수 없이 고개가 떨어지고 우두망찰 두 손을 모으고만 있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의 눈물 이제는 돌아보지 마시고 선생님 부디, 부디 평안히 가세요. 
선생님의 영원한 안식을 빌고 또 빌겠습니다. 
.==
Yoo Jung Gil
  · 
(김민기에 대한 긴 글과 긴영상) 
유정길
저는 예전 90년 중반 김지하선생님과 생명민회를 함께 할때 김민기 선생이 초청을 하셔서 김지하선생과 같이 지하철 1호선을 봤고, 이후 뒷풀이에 함께 했습니다.  이후 몇번 더 뵈었지요.
정말 많은 분들이 페북에 추모의 글을 올리셨군요... <황해문화>에 나온 긴 글과 예전에 <선데이클릭>의 인터뷰를 올립니다.
제가 어쩌다보니 김민기선생의 노래 거의 전곡, 공장의 불빛 대사와 노래까지 다 외우는듯하군요.
.......................
계간 <황해문화> 전성원 편집장의 글을 공유합니다(구자우)
김민기(金敏基, 1951.3.31.~2024.7.21.)
오래전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에서 그에 대해 다룬 글을 쓴 적이 있다. 나의 인물 아카이브에는 여전히 김민기, 그에 대한 항목이 있다. 출생지, 생년월일을 비롯해 기타 등등 내 수준에서 그에 대해 알 수 있을 만한, 알아낼 수 있을 만한 수준의 내용들을 틈틈이 차곡차곡 정리했었다. 물론, 그에 대한 오비추어리(obituary)를 쓰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지만, 오늘 그의 생몰연대의 괄호를 닫으며 아래와 같은 추모의 글을 올린다.

▮ 홍수처럼 번져온 노래 - 김민기
● 돈 벌어 대는 것도 좋긴 하지만/ 무슨 통뼈 깡다구로 만날 철야요/ 누구는 하고 싶어 하느냐면서/ 힘없이 하는 말이 폐병삼기래
 - 소리굿 '공장의 불빛' 중에서
이제는 가수라기보다는 한국적인 뮤지컬의 창시자, 혹은 연극 연출가, 기획가로 더 익숙해진 김민기. 내가 김민기의 노래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생이 되어서의 일이었다. 아직 동아리란 말보다는 서클이란 말이 더 익숙했던 그 시절에 나는 가톨릭학생회란 서클에 가입했다. 고등학생이 되고 처음 가본 MT에서 우리는 밤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선생님과 선배들이 가르쳐주는 노래들을 배웠다. 그때 배운 노래가 김민기의 <아침이슬>과 <상록수>였다. 선생님이 한 잔씩 나눠주던 맥주에 얼굴이 불콰해진 우리들은 처음 들어보고 배워보는 그 노래의 아름다운 가사와 선율에 젖어 밤하늘의 별들이 빗방울에 젖어드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원도 홍천 계곡에서의 MT. 나는 지금도 그날 밤의 별과 모닥불, 그리고 저마다 뭔가 깨달음을 얻은 듯한 그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우리들은 그날 밤 세상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우리들은 누구도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다만 김민기의 노래만이 김광규 시인의 시구처럼 그 해 세밑을 달궜다. 그리고 이듬해 87년 우리들 중 많은 친구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 학생, 청년들 중 하나가 되었음은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다만 김민기의 노래들은 더 이상 불리지 않았다. 우리들의 노래는 김민기의 <아침이슬>과 <상록수>에서 <농민가>, <타는 목마름으로>으로 그리고 다시 좀 더 격렬한 운동가로 바뀌어 갔기 때문이다.
나는 젊은 시절, 김민기의 노래를 통해 우리 대중가요에도 ‘가사(Lyric)’가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다. 
●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
- <친구> 중에서
● 무궁화꽃을 피우는 아이/ 이른 아침 꽃밭에 물도 주었네/ 날이 갈수록 꽃은 시들어/ 꽃밭에 울먹인 아이 있었네
- <꽃피우는 아이> 중에서 -
● 서산에 붉은 해 걸리고/ 강변에 앉아서 쉬노라면/ 낯익은 얼굴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온다/ 늘어진 어깨마다 퀭한 두 눈마다/ 빨간 노을이 물들면/ 웬지 마음이 설레인다
- <강변에서> 중에서 -
● 내 고향 가는 길 매서운 북녘길/ 찬바람 마른 가지에 윙윙거리고/ 길가에 푹 패인 구덩이 속엔/ 낙엽이 엉긴 채 살얼음 얼었네/ 눈보라 내 눈 위에 녹아 흐르니/ 내 더운 가슴에 안아볼거나/ 뿌리채 뽑혀버린 나무 등걸에/ 내 더운 눈물 뿌려 잎이나 내어보세
- <고향가는 길> 중에서 -
이를테면 그 당시 사회과학 서적의 커리큘럼이 백산서당의 책으로 시작해서 몰래 구해 읽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으로 이어지듯 우리들은 김민기의 노래로 시작해서 다른 세상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솔직히 나보다 조금 윗세대의 사람들에게 <아침이슬>은 양희은의 것이었겠지만 나에게 김민기의 노래는 온전히 김민기의 것이거나 아니면 이제 막 목울대가 굵어가던 청소년기의 우리들의 노래로 기억된다. 솔직히 그 점만큼은 다행스러운 일이란 생각이 든다.
1968년. 전 세계를 뜨겁게 달궜던 청년 문화는 1970년에 접어들면서 차갑게 식어 버렸다. 60년대를 정의했던 프로테스탄트 포크의 밥 딜런은 포크기타 대신 일렉트릭 기타를 메고 나왔고, 존 바에즈만이 고독하게 자리를 지켰고, 청춘의 광폭한 질주를 노래했던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제니스 조플린은 유명을 달리했다. 우드스톡은 폭력으로 점철되었고, 히피들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혁명에 대한 낭만적 열정은 시들어 버렸고, 버려진 청년 혁명가들은 산 속으로, 혹은 도시의 곳곳에서 고립된 채 폐기되고 있었다. 1960년대가 '순수의 시대'이자 '광기의 시대', '혁명의 시대'였다면 1970년은 그 벽두부터 그런 혁명과 순수, 광기의 불꽃이 한 줄기 비에 사그라들듯,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의 영향은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고, 새마을 운동의 근면, 협동, 자조의 깃발 아래 대중문화는 그야말로 못다 핀 꽃 한 송이로 시들어 사라질 지경이었다.
▮ 김민기 - 곡절 많은 역사의 유복자
김민기의 아버지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조산원이었다. 그의 부친은 그가 태어나기 직전 패퇴하던 인민군에 의해 피살되었고, 김민기는 유복자로 1951년 3월 31일, 전북 이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함경도 원산 태생으로 연희전문을 다녔고, 연희전문 4학년 때 기숙사 내의 한국인 학생에 대한 차별대우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동하다 제적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산원 자격증을 땄다. 귀국 후 남부지방의 여러 곳을 다니며 진료활동을 벌이다 이리의 병원에서 김민기의 부친과 만나 결혼하여, 10남매를 낳았다. 김민기는 그중 막내다. 아버지 없이 자란 김민기에게 활동적인 어머니의 영향은 대단히 컸다고 한다.
그는 서너 살 때부터 어머니와 형, 누나들이 각기 직장과 학교로 나간 후, 늘 혼자 집을 지켜야 했다. 텅 빈 집에서 하루 종일 혼자 지내야 하는 어린 그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작대기를 가지고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글자를 배우기 훨씬 이전부터 그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스스로 대화를 나누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유년시절의 체험은 다분히 외로움과 공포의 기억을 동반한 채 아직도 그의 뇌리 속에 생생히 살아있다. 혼자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다가 듣게 되던 방공훈련의 사이렌 소리, 거의 매일 밤 되풀이되던 등화관제의 칠흑같은 어둠, 그 어둠속에서 간간히 들리던 개 짖는 소리, 검은 깃을 씌운 전등 아래서 듣던 괘종시계 소리, 지붕 밑 홈통의 빗물 떨어지는 소리…. 그의 감수성 속에 최초로 자리 잡은 음악은 바로 그런 소리들이었다.
1963년, 서울 재동국민학교 졸업, 경기중학교 시절, 김민기의 생활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 것은 미술반과 보이스카우트 활동이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미술실에 틀어 박혀 그림을 그렸고, 주말이면 보이스카우트 대원들과 어울려 캠핑을 다니곤 했다. 물론 공부는 뒷전이었다. 당시 서울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던 셋째 누나가 그를 음악의 세계로 이끈 최초의 스승이었다. 그는 피아노 밑에서 누나의 연주를 듣다가 잠이 들곤 했다. 그의 음악적 감각은 거기서 크게 자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누나의 연주에서 틀린 대목을 정확히 꼬집어 내는 '훌륭한 귀'를 가지게 된다. 그 당시 그가 다룰 수 있었던 유일한 악기는 소년단실에 있는 ‘우쿨렐레’였다. 캠핑 때마다 우쿨렐레로 노래를 반주하는 일은 항상 그의 몫이었다.
1966년, 경기고등학교 입학하여서의 생활도 중학교 때와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에게 그 자신의 악기가 생긴 것이다. 셋째 누나가 입학을 기념하여 선물한 클래식 기타는 그가 최초로 소유한 악기였다. 그는 혼자서 누나의 피아노 악보를 이용해 기타를 익혀나갔고, 얼마 안가 학교 내의 소문난 기타연주자가 되어 있었다. 누나가 선물한 기타는 그 후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뒤바꾸어 놓은 계기가 된 셈이었다.
▮ 미술에서 음악으로 - 그리고 다시 연극으로
유정길, [2024-07-22 오후 9:02]
196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입학한 그는 더욱 그림에 몰두했고, 1학년 때 이미 개인전을 열만큼 왕성한 창작의욕을 보였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려왔고, 중·고등학교 내내 미술실에서 그림만 그리다시피 해왔던 그에게 대학교과과정의 미술수업은 도무지 성이 차지 않았다. 따라서 학교성적은 그리 좋은 편이 못되었고, 결국 그는 1년 낙제를 하게 된다. 그가 학교 작업실에 틀어박혀 그림에 몰두하고 있을 때 고교시절 그룹사운드 활동을 했던 한 친구가 그를 찾아왔다. 자기와 함께 듀엣을 만들어 노래를 하자는 제안이었다. 마침 그림 그릴 물감 값이 아쉬워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1만 원 가량의 빚까지 지고 있었던 김민기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둘은 함께 기타를 치며 다방에서 노래를 부르게 된다.
듀엣의 이름은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 라는 의미)였다. 그가 낙제를 하고 두 번 째로 1학년에 다니던 1970년 어느 날, 고교동창이던 임문일(그는 70년대 초 한때 DJ로 인기를 누렸었다.)의 소개로 양희은을 만나게 된다. 집안 사정으로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던 양희은이 가수활동을 시작하며 그에게 노래반주를 부탁했고, 김민기는 양희은의 노래를 반주해 주며 그녀를 위해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했다. 1970년 양희은의 데뷔작으로 발표된 '아침이슬'을 비롯, 그녀가 부른 많은 노래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당시 YWCA에 이른바 통기타 붐의 시발점이 되었던 '청개구리홀'이라는 조그만 공간이 있었다. 많은 통기타 가수들이 이곳에서 자유스럽게 노래를 부르며 어울리곤 했다. 김민기도 자주 이곳에 들러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이 '청개구리홀'의 후원자였던 경음악 평론가 최경식이 그의 재질을 높이 사 레코드 출반을 주선해 주었다.
1971년 그는 처음이자 거의 마지막이 되다시피 한 자신의 레코드(LP)를 취입하게 된다(이 LP는 계속 판매금지에 묶여 있다가 1987에 가서야 재발매가 되었지만, 아직 CD 버전은 발매된 적이 없다). 이 레코드는 발매된 지 얼마안가 압수조치를 당하게 된다. 그것은 그가 1972년 봄 서울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대되어 노래부르기를 지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가 불러준 노래는 '우리 승리하리라[피트 시거(Pete Seeger)의 <We shall overcome>의 번안곡)', '해방가', '꽃피우는 아이'등 세 곡이었다. 이튿날 새벽 그는 동대문서로 연행되었고, 시중에 남아있던 그의 레코드는 전량 압수되었으며, 그의 노래 '꽃피우는 아이'가 그의 노래 중 처음으로 방송금지되었다. 이것이 그가 그 후 수도 없이 되풀이하게 되는 연행행로의 시작이었다.
▮ 김민기와 김지하의 만남 그리고 노동자
그가 가수 및 작곡가로서 조금씩 알려지고 있던 1971년 무렵, 시인 김지하를 만나게 된다. 당대를 가장 치열하게 살고 있던 한 시인과의 만남은 그에게 있어 대단히 충격적인 체험이었다. 당시 김지하 등을 중심으로 유수한 시인, 학자, 화가, 음악인, 영화인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한국문화의 방향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모임을 가져오고 있었다. 이 모임의 이름은 폰트라(PONTRA : Poem ON TRAsh, 즉 "잿더미위에 시를"이란 뜻)였는 데, 김민기도 이 모임에 참가하여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고 선배들의 조언을 듣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이 모임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그가 지금까지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의식이 조금씩 틀이 잡히기 시작하였다. 김민기는 중·고등학교 시절의 미술반 동기이며 함께 서울대학에 다니고 있던 친구 이도성 등과 함께 신정동에 야학을 열어 노동자들을 가르쳤고,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활동에도 참여, 노동자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1972년 여름, 노동자와의 야유회에서 그로서는 잊을 수 없는 한 가지 체험을 이때 하게 된다. 마산 수출공단의 노동자들과 해변으로 야유회를 갔을 때였다. 막 석양이 지는 바닷가로 하나씩 둘씩 돌아오는 고깃배들을 바라보다 그가 무심코 "야, 참 멋있는데"하고 중얼거렸다. 그 때 옆에 같이 있던 여공 한 사람이 쏘아 붙였다. "그 사람들은 모두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예요. 뭐가 멋있다는 거지요?" 그 때 그는 뒤통수를 철퇴로 얻어맞는 충격을 받았다. '난 아직 멀었구나'싶었다. 이 조그만 체험이 그 자신의 감성적 기반에 대해 근본적인 반성을 겪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그가 가져온 소위 '지식인적' 사고방식과 감수성에 대해 뼈저린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다. 어려서부터 그의 삶의 커다란 지주의 하나였던 그림에도 차츰 멀어지게 되었다.
어느 날인가 그는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다. 화면을 수정하기 위해 칼로 긁어내다가 캔버스에 구멍이 뚫려 버렸다. 뚫린 구멍 사이로 방금 그가 그리고 있던 나무가 보였다. 
“도대체 이런 그림을 그려서 무엇 할 것인가. 조금만 움직이면 저 나무를 내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는 데….”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앞으로 그가 살아갈 삶의 방식에 대해 대단히 중요한 시사를 받은 느낌이었다. 그해 겨울 무렵을 기해 그는 완전히 서양화 붓을 놓아 버렸다. 기타라는 악기에 대해서도 회의가 들기 시작했고, 전통 국악기나 민요 판소리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토록 아끼던 기타는 후배 누군가에게 주어 버렸다.
▮ '금관의 예수' 공연과 김민기
1973년 무렵,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시인을 중심으로 카톨릭권의 문화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 일환으로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를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하였다. 이 공연에는 김민기 외에 많은 연극패 탈패들이 참가했던 바, 이를 계기로 김민기는 연극패, 탈패들과 본격적인 교류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노래 '금관의 예수('주여 이제는 이곳에'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으나, 첫 발매된 양희은의 음반에는 '주여 이제는 그곳에'로 제목이 달려있었다)'는 첫 공연지인 원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작곡되었다.
김민기가 국악에 관해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되는 것은 당시 미대에 함께 다니던 김구한을 통해서였다. 김구한은 1966년에 국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악과에 합격하였으나 형편상 입학을 포기했다가, 1969년에 미대에 입학, 조소과에 다니고 있었다. 김구한에게서 단소를 배우면서 전통음악에 접하기 시작한 김민기가 보다 본격적으로 국악의 대중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작곡과 출신의 이종구와 김영동을 만나게 되면서 부터였다. 그 첫 작업은 음대의 동아리인 '20세기 음악연구회'의 발표회 무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신경림의 시에 이종구가 곡을 붙인 작품이 국악과 기타반주로 무대에 올려졌다. 기타부분의 편곡과 연주는 물론 김민기가 맡았다. 1973년 말, 김민기는 경음악 평론가 최동욱의 주선으로 지구레코드사와 미국의 RCA와 함께 라이선스 음반을 만들기로 계약을 맺었다. 이때 받은 계약금을 가지고 준비한 것이 1974년 4월,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 이종구 작곡발표 무대였다.
이 작곡발표회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제 1부에서는 이종구가 작곡한 작품들을 김민기가 노래불렀다. 김지하의 시에 곡을 붙인 '빈 산', '서울길'을 비롯, '백제관음', '하나이었다더라'등 여러 노래들이 국악반주로 발표되었다. 제 2부에서는 한·일관계의 문제를 특히 기생관광에 초점을 맞추어 풍자한 소리굿 '아구'가 공연되었다. 소리굿 '아구'의 대본은 남사당 덧뵈기중의 먹중과장의 기본골격을 원용하여 김민기가 정리한 것이었고, 이종구가 작곡을 맡았으며, 채희완, 임진택, 김석만, 이애주 등이 참여했다. 이 국립극장 공연은 TV로 방영될 예정이었으나 녹화도중 중단되었고, 레코드 출반 계획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물론 그 노래들이 공연 윤리위원회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연자체는 대단한 성황을 이루어 입장료가 200원인 데 암표가 무려 3000원씩에 거래될 정도였다. 전통 탈춤양식이 오늘의 문제를 담는데 얼마나 유용한 것인가를 보여준 이 소리굿 '아구'는 이후 1970년대 전반을 통해 크게 일어나 마당극 운동의 결정적인 시발점이 되어준 것이었다.
유정길, [2024-07-22 오후 9:02]
1974년 10월, 군에 입대한 그가 처음 배치받은 곳은 카츄사 중의 카츄사로 불리는 AFKN 방송국이었다. 그가 비교적 편한 군대생활을 보내고 있던 1975년, 전국은 소위 유신 찬반 국민투표 문제로 온통 들끓고 있었다. 카톨릭권을 중심으로 국민투표 보이콧 운동이 맹렬히 전개되었고, 투표당일에 명동성당에서 하루 종일 투표를 반대하는 집회와 공연을 벌이려는 계획이 세워졌다. 이 모임의 계획에서 김민기의 노래들이 주 레퍼토리로 채택되었다. 소위 '운동권 가요'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무산되었지만 이 일로 김민기는 영문도 모른 채 보안부대로 소환되었고, 곧 이어 최전방으로 재배치되었다. 전방으로 배치되어 갔을 때 그를 기다린 것은 2월 혹한 속의 차디찬 사단 영창이었다. 내복도 못입은 채 15일간의 독방 영창생활을 마친 후 그 곳에서 그는 나머지 군생활을 보냈다.
군에서 재대했을 때, 이미 그의 노래는 방송가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었지만, 묘하게도 그는 자신이 입대하기 전보다 훨씬 유명해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는 '위험인물'로 단단히 낙인찍혀 있었고, 모든 공식적인 활동에 제약을 받아야 했다. 대학가에서는 여전히 그의 노래들이 애창되고 있었지만, 그를 인기가수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학가에서 불리는 노래 가운데에는 그의 노래 외에 작자미상의 구전가요들도 상당히 많았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것들도 김민기의 노래일 것이라고 지레 단정 짓고는 했다. 그는 본의 아니게 대단한 투사로 인식되고 있었다. 제대하고 얼마 후, 그는 가까스로 부평근처의 어느 공장에 취직하게 된다. 생산직은 아니었지만 그로서는 노동자들의 삶과 의식을 가까이서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그 공장에서 노동자들을 모아 새벽마다 공부를 가르쳤다. 소위 말하는 '의식화 교육'과는 무관하게 노동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이었다. 거의 매일 계속되는 야근 때문에 밤에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야학이 아닌 조학인 셈이었다. 이 때, 그와 함께 생활한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을 위해 그는 '상록수'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러주기도 했다. 그의 현장생활에 관해서는 소설가 조세희가 '난장이 마을의 유리병정'이라는 작품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공장에 다니던 중에 그는 당시 서울미대 학장의 배려로 대학 졸업장을 받게 된다. 중등교사 자격증도 함께였다. 대학에 입학한 지 9년만의 졸업이었다. 더 이상의 공장근무가 곤란해지자 그는 퇴사했다. 그 후 한동안 그는 노동자들과 함께 기숙하며 노무자 생활을 해야 했다. 그로서는 몹시도 춥고 외로운 시기였다.
▮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과 노래굿 '공장의 불빛'
양희은이 노래한 이 디스크는 그가 군대시절에 작곡한 '늙은 군인의 노래', '식구생각' 그리고 제대후에 만든 '밤배놀이', '상록수(앨범에서는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이 제목이다)'등, 그의 작품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정작 어느 한곡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할 수는 없었다(앨범의 작사작곡자는 김아영으로 되어 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김민기라는 이름으로는 심의를 통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래가 문제가 아니라 작곡자의 이름이 문제였으니 심의 기준치고는 기가 막힌 심의기준이 아닐 수 없었다. 남의 이름을 빌어 낸 이 앨범은 그나마도 얼마안가 일부가 삭제되었고, 곧 다시 판금되어야 했다. 말썽이 된 것은 '늙은 군인의 노래' 때문이었다(이것도 기가 막힌 일이다. 이 노래는 약간의 가사를 바꾸어 나중에 군대에서도 부르게 되니 말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더 이상의 합법적인 음악활동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 김민기는 새로운 작업에 착수한다.
<공장의 불빛>은 1970년대 대표적인 노조 탄압사례의 하나인 동일방직 사건을 소재로 하여 노래굿이라는 새로운 양식으로 카세트 테잎에 담아낸 것이었다. 한국교회 사회선교협의회의 후원으로 제작된 이 테이프에 김민기는 자신의 이름석자를 비로소 떳떳이 밝힐 수 있었다. '공장의 불빛'은 나오자마자 커다란 화제가 되었고, 그는 당연히 연행되어 조사를 받아야 했다. 백원담 교수의 회고에 의하면 이 때 김민기는 아현동의 어느 무용 교습실을 빌려 한국의 마당굿을 토대로 하여 공장의 노동 작업을 형상화한 기계춤을 그가 직접 지도하며 공연준비에 박차를 가했다고 한다. 1979년의 초봄 무렵 김민기는 경찰이 겹겹이 둘러싼 공연장에서 <공장의 불빛>을 공연했다. <공장의 불빛>은 그가 시쳇말로 '빵에 갈 각오'를 하고 만든 것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구속되지 않고 곧 풀려나왔다.
조사를 마치고 나온 그는 이제 더욱 더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고 있었고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얼굴도 모르는 부친에 대한 짙은 그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익산의 어느 집에서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머슴살이조차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를 고용한 주인집은 정기적으로 그에 관해 경찰에 보고를 해야 했다. 10·26이 터진 후 그는 김제로 옮겨 소작 농사를 시작한다.
▮ 80년 광주와 농사꾼으로 변모한 김민기
10.26직후, 한국사회는 새로 맞을 봄의 기대로 잔뜩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김민기가 대학시절에 활동했던 야학의 후배 강학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여성 해고 노동자들에게 보모교육을 시켜 유아원을 설립하고자 한다며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10.26 이전 같으면 어림도 없었을 유아원 기금마련 자선공연이 김민기에 의해 기획되었고, 그는 실로 오랜만에 무대에 섰다. 프로그램에 그의 이름은 한 줄도 비치지 않았지만 소문을 듣고 문화체육관에 몰려든 젊은이들이 김민기에게 열광적인 박수를 쏟았다. 그는 마지막 공연에서 계속되는 앵콜 요청으로 다섯 곡이나 더 불러야 했다. 이 공연에서 마련된 자금으로 '해송 아기둥지'라는 이름의 유아원이 설립되었다.
1980년 봄, 광주지역 대학출신의 문화패들이 극단 '광대'를 조직, 창립공연으로 마당극 '돼지풀이'를 공연했다. 이 창립무대에서 소설가 황석영이 축사를 했고, 김민기가 기획, 양희은 등이 찬조 출연하여 노래를 불렀다.
김제에 자리를 잡고 농사를 짓는 동안 그의 집에는 전라도 지역의 문화패를 비롯해, 전국 각지의 문화예술인들이 쉴 새 없이 들락거렸다. 모내기철이나 추수 때면 각지의 친구, 후배들이 모여들어 일을 도와주었고 그의 집은 마치 장터처럼 떠들썩하기 마련이었다. 이 때 김제·전주지방의 젊은 연극패들이 자주 그를 찾아왔었는데, 그는 이들을 규합, 근대사 세미나를 겸한 마당극 '1876년에서 1984년까지'를 창작했고, 1981년, 전주에서 소규모 위크숍 형식으로 공연을 가졌다.
1981년, 김민기는 전곡으로 옮겨 작은 아버지와 함께 소작을 시작했다. 그 때 그는 영농자금 마련을 위해 겨울내내 해태 양식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전곡에서 농사를 짓던 중 그는 농민의 현실을 더욱 깊이 절감하는 계기가 된 한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그해 그는 약 5000평 규모의 참깨농사를 시작했다. 그때 모 비료회사에서 그 일대를 맡아 액체비료를 살포했는데, 나중에 보니 싹이 몽땅 타 죽어 있었다. 
김민기는 혼자서 원인조사에 나섰고 결국 비료회사에서 정량의 5배 이상이나 과다살포한 탓임을 밝혀낸다. 그때부터 보상을 받기 위해 각지를 찾아다니며 협조를 구했으나 도움 받을 길이 없었고, 그는 혼자서 비료회사를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비료의 필요량과 실제 살포량, 토지의 산화도 등에 관해 거의 완벽한 데이터를 작성해 냈다. 그는 이를 근거로 회사에 손해배상을 청구, 끝내 배상을 받아내는 집념을 보인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소위 '새마을 운동' 이후 마치 투기꾼처럼 변해 버린 농민의 모습과, 속으로 더욱 피폐해 질 수밖에 없었던 농촌의 현실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1981년 겨울, 전곡의 민통선 북방지역에 5000평 규모의 논을 소작할 기회가 생겼다. 단, 논 옆에 있는 흉가 하나를 매입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유정길, [2024-07-22 오후 9:02]
그 겨울, 김민기는 충남 보령의 탄광에서 일을 해 50만원을 벌었고, 그것으로 흉가를 매입, 그 곳에서 생활하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는 마을의 젊은이들을 규합, 청년회를 조직했고, 그것을 통해 쌀 출하사업도 벌였다. 그곳에서 생산된 쌀을 도시의 소비자들에게 직매함으로써 중간 유통과정의 부조리를 없애고, 농민과 소비자가 다함께 이익을 얻도록 하는 사업이었다. 이 사업의 결과 농민 측과 소비자 측에게 각기 250만 원 정도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청년회는 이 이익금을 기금으로 쓸 수 있었고, 그 중 일부는 마을 공동 목욕탕 건립기금으로 적립할 수 있었다. 이 일로 한때 엉뚱하게도 '쌀장수'로 소문이 났고, 시인 황명걸은 '쌀장수 김민기'라는 시를 발표(문예중앙, 1984 여름)하기도 했다.
▮ 한국적 뮤지컬의 탄생, <지하철 1호선>
1983년, 극단 연우무대는 2년 전 김민기가 전주에서 만들었던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의 대본을 손질하여 대한민국 연극제에 출품, 본선에 올랐다. 이 연극은 김민기의 연출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되었는데, 당시 제목은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였다. 이 작품은 평론가들로 부터는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지 못했지만, 김민기의 명성에 힘입어 대학생층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고, 문예회관 대극장 개관이래 최대의 관객동원이라는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그가 전곡에서 농사꾼으로 일하고 있던 1983년 겨울, 그가 살고 있던 집에 화재가 나 가재도구와 가지고 있던 책까지도 몽땅 불타 버리는 액운을 만난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이 새로 집을 지어 줄테니 계속 머물러 달라고 했고, 그 자신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때 미국에 유학중이던 김석만이 돌아왔다. 김민기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그는 돌아오자마자 김민기를 만나 함께 일할 것을 종용했다. 마침내 김민기는 농촌생활을 일단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김석만, 오종우 등과 함께 사무실을 내고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계약금을 받아 시작한 이 기획은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뮤지컬의 창작자체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던 데다 내용상 아무런 하자가 있을 수 없었던 작품임에도 그것이 김민기의 작품이라는 이유 때문에 공연윤리심의를 위한 접수가 거부되어 심의를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 때문이었다. 레코드사로부터 받아낸 계약금만 고스란히 빚으로 떠넘겨진 결과가 되고 말았다. 아직까지도 그의 이름으로 레코드를 낸다는 것은 그 내용을 불문하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새로운 각오로 추진한 모처럼의 시도는 또 한 번의 좌절을 겪어야 했지만, 그 작업을 계기로 한 여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뮤지컬 출반계획을 추진하던 사무실에 상근하며 그의 작업을 도왔던 이미영이었다.
1985년 8월 31일,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서른다섯의 노총각 김민기는 결혼식을 올렸다. 쏟아지는 비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이 있던 서울미술관에는 수많은 하객들이 모여 그들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고, 그들은 불광동의 두 칸짜리 전세방에서 새살림을 시작한다.
▮ 김민기 -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가 빚지고 있는 이름
<지하철 1호선>의 성공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지하철 1호선>의 원작자인 폴커 루드비히(원제는 Line 1-das Musical)는 김민기가 만든 <지하철 1호선>이 원작의 감동을 뛰어넘는 한국적 뮤지컬로 변모한 사실에 감탄하며 서울에서의 1,000회 공연을 기념하기 위해 독일에서 직접 맥주 5통을 가지고 와 전달하기도 했다. 그리고 독일에서의 공연도 대성공이었다. 김민기는 지금도 일요일이면 집 앞의 작은 밭에서 직접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봄이 오면 땅을 갈고 돌을 고르고, 싹이 나면 솎아주고, 잡초를 뽑아주고, 저녁에는 그 밭에서 자란 푸성귀를 뜯어다 친구들과 함께 밥을 지어먹는다고 한다.
얼마 전(2001년) <지하철 1호선>은 중국 공연을 성공리에 마쳤다. 중국 공연을 준비하느라 노심초사하는 김민기에게 백원담 교수는 "어떻게든 되겠지요."라고 그를 위로하기 위한 말을 했는데 그 말을 들은 김민기는 몹시 화를 내며 "세상에 그렇게 되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이제 청년 김민기는 더 이상 청년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존경할 만한 기성세대를 물을 때, 이런 사람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하나의 훌륭한 전범으로서 ‘김민기’란 어른을 가질 수 있었다. 김민기는 자본주의 사회 하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얼굴 없는 생산과 소비라는 상품 교환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규명해가는 작업을 <지하철 1호선>을 비롯해 여러 작업들을 통해 해나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뒷것’을 자처했다. 
사르트르가 죽었을 때 누군가 그랬단다. “이제 프랑스도 조금 외롭겠다고”고. 우리에게 1970년대의 김민기가 없었다면, 그 시기의 대중문화는 우리 문화사에서 단 한 줄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아무 것도 없던 시대라고. 솔직히 나의 세대가 김민기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세대는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침이슬>에서 시작되어 다른 노래들로 건너갔듯이 한동안 그의 모호한 태도(이 말은 순전히 상대적인 개념의 말이다. 김민기 자신이 특별히 어떤 입장을 밝힌 적은 없기 때문에.)로 인해 그를 용도 폐기하는 분위기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화는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김민기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김광석도, 안치환도, 노래를 찾는 사람들도, 꽃다지도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대중음악사에서 김민기란 한 인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몹시 쓸쓸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21세기에도 김민기라는 한 개인에게 여전히 빚지고 있는 것이다. 뒷것, 김민기는 우리 시대 문화예술의 거대한 배후(背後)이자 든든한 그늘이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 그를 잘 알 수 없었던 세대라는 편리한 이유로 이 글은 오래 전에 읽었던 김창남 선생님의 책에서 많은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으며,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에 수록된 글을 일부 고쳐서 다시 올린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김명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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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민기 선생님 영전에
아, 김민기 선생님...
선생님이 그예 먼길 떠나셨다는 소식에 황망한 마음을 가누기 어렵습니다. 
토지문화관의 귀래관에서 2007년의 봄날을 함께 지내며 선생님이 건네주셨던 하염없는 따뜻함과 고요한 품과 
새벽이면 눈 부비며 올랐던 산, 해 뜨기 전의 어둑한 산길을 선생님 뒷모습을 등빛 삼아 걸어가노라면 어느샌가 틔어오던 임도의 새벽빛이 영원처럼 느껴지기만 합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이 계셔주셔서 행복했습니다. 선생님과 동 시대를 숨쉴 수 있었기에 암울하고 어둡기만 했던 청춘의 날들을 무사히 건너올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노래, 선생님의 영혼에 기대면 남아 있는 날들의 숨길도 햇빛쪽으로, 햇빛쪽으로만 트이는 날들을 살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도 일찍 먼길 떠나시는 슬픔에 가눌 수 없이 고개가 떨어지고 우두망찰 두 손을 모으고만 있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의 눈물 이제는 돌아보지 마시고 선생님 부디, 부디 평안히 가세요. 
선생님의 영원한 안식을 빌고 또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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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광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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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영원한 뒷것' 김민기(1951~2024) 별세로 많은 페친들이 조의를 표하고 있다. 더 보태는 건 거추장스러운 사족임에 분명하지만, 짧게 하나 쓴다.
1987년 입대 직전, 여러 이유로 텅 빈 나날을 이어갔다. 마음을 추스르기 어려운 흐느적거리는 발걸음이 이어졌다. 
이겨보기 위해 틈만 나면 끄적거렸다. 노트를 장만해 옮겨적었다. 주로 시(詩)를 썼는데, 그 노트가 아직 남아 있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메마르거나 과잉된 감상을 늘어놓은 잡시들에 불과하지만, 내 청춘 한 자락으로 이해하고 버리지 않았다.
당시 목놓아 부르던 '아침이슬'이 못내 부족했다. 이슬이 다시 맺히기를 소망했다. 2절을 썼다.
종잡을 수 없는 치기와 망연한 허술함에 갇힌 시지만, 다시 찾아 읽는다. 
그를 보내는 나만의 조의다. 마침 이 시도 7월에 썼다.
<밤하늘 빛나는 영롱한 별빛만큼
고이 한줌 드리워진 아침이슬처럼
우리의 햇살이 가슴에 사무쳐
안개바다를 거두고 진실한 내일을 배운다
한길은 먼지속에 끝을 알 수 없고
낙엽만 내 맘에 쌓여 흩날리노나
나 이제 가노라 저 밝은 새벽에
영원한 생명 찾으러 나 이제 가노라>

Donghwak L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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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사람은 가도 노래는 남는다
오래전 광주일보 기자로서 그와의 인터뷰를 끝낼 무렵, 광주 오월을 주제로 한 노래를 청해 본 적이 있다. 그는 나의 청을 완곡하고 정중하게 거부했다. 1980년 5월 당시 김제 뜰에서 모심기를 하던 중 국도를 타고 군용 트럭이 지나가는 걸 보곤 다음 날  2만원을 마련, 전주 중앙성당의 문정현 신부님을 찾아가 “얼른 광주로 가 떡 사서 보내라”라고 밖에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김민기 선생을 다시 만난 것은 원주토지문화관에서 였다. 내가  박사학위를 논문을 쓸 때니까, 아마도 2002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위 아래 한 층을 사이에 두고 그와 나는 함께 지내다가 그 해 연말 망년회 때 원주에서 가장 허름한 술집에서 밤새 술을 마신 바 있다. 흐린 유리창 밖에는 때마침 흰 눈이 내리던 그 밤의  황금빛 순간들이 그립고 또 그립다. 
  과연 사람은 가도 노래는 남을 것인가. 그의 명복을 이렇게나마 빌어본다.

편성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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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선생> 
김민기는 대학 다닐 때 일기를 쓰는 마음으로 매일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뒷산에 올라가 낮잠을 자다 깨어난 얘기는 그대로 ’아침이슬‘이라는 노래가 되었고 군대에서 선임하사 퇴역할 때 부르려고 만든 노래는 ’늙은 군인의 노래‘가 되었다. 
그가 무심코 만든 노래들은 거리에서 공장에서 학교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민주화의 ’배후세력‘ 취급을 받던 그는 다 떨쳐버리고 뒤늦게 학전이라는 곳에서 새싹들을 길러냈다. 그런데 그가 손을 대면 딴따라도 의식 있는 딴따라로 변했고 남과 공동체를 생각할 줄 아는 예술인이 되었다.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김영세는 그와 대학 때 듀엣을 했고 조영남도 김한길도 그와 친구로 지낸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 조용필도 그를 좋아한다 고백했고 송창식도 그를 몰래 도와주었다고 밝혔다. 
1970년대, 80년대, 90년대를 산 사람들 중 그에게 빚지지 않은 자 없으리. 이제 그 빚 받을 사람은 웃으며 떠났으니. 선생이라 부르고 싶은 사람을 하나만 꼽으라 하면 나는 김민기 선생을 대고 싶다. 먼저 죽었지만 늘 먼저 살았던 사람. 그래서 그는 영원한 先生이다. 영면하소서. 
#김민기 #사진출처는월간조선

주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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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선생 돌아가시니 새삼 그분 평가를 두고 여기저기서 논란이네. 나는 이미 그분 암투병 중이라는 얘기 듣고 내 할 말을 했기 때문에 새삼 덧붙일 말은 없다.
다만 지금도 김민기가 논란이 되는 것은 김민기로 상징되는 탈농 이농 정서와 산업화 근대화에 대한 거부감이 이 나라의 지배적 정서로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이 나라는 여전히 김민기를 정리하지 못한 것이다. 운동권의 흔적을 정리하려면 얼마나 오랜 세월이 필요할지 아니 정리를 할 수나 있을지 아득해진다.
개인적으로 김민기는 천재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처신으로 보더라도 운동권 가운데 가장 사심없이 깨끗한 모습으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었다고 감히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고 역겹다. 김민기의 의도와 달리 김민기라는 이름이 얼마나 거창한 상징자산으로 남아 양아치 운동권의 먹잇감, 오락거리로 쓰일지 눈에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나도 공장 생활을 했지만 그리고 일하면서 노래도 듣고 흥얼거리기도 했지만 단 한번도 김민기 노래를 흥얼거린 적은 없다. 아니 거의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내가 김민기의 노래를 가장 많이 불렀던 건 전경으로 입대해 해안초소 생활할 때였다. 
고참들이 술먹고 산다이라는 파티를 하면서 막내이던 내게 노래 한 곡 뽑으라고 할 때 아침이슬 등을 부르곤 했다. 그때는 정말 목소리가 원하는대로 쭉쭉 나왔다. 그때 노래라는 건 간절함의 반영이라는 걸 느꼈다. 
어쩌면 김민기의 노래라는 건 직접 노동하는 자의 간절함이 아니라 그 노동을 구경하는 쁘띠부르주아의 안타까움을 반영하는 것 아니었을까. 내가 공장 생활할 때 불렀던 '연상의 여인'이니 '배신자'니 하는 노래들이 실은 훨씬 더 노동요에 가까운 것 아니었을까.
김민기는 빨리 정리되어야 할 이름이다. 그의 이름이 상징하는 '시대'가 정리된 이후 비로소 김민기는 제대로 평가되고 우리의 진짜 음악으로 소환될 수 있을 것 같다.

Yoo Jung G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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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 방정환, 이오덕, 권정생선생의 후예) 
오늘 조문을 다녀오며 생각해봅니다. 
김민기선생은 김지하에게 영향을 받은 후배지만 그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은 어린이 뮤지컬이였습니다. 지하철1호선에서 돈을 벌어 어린이 청소년 뮤지컬을 만들었고 실제 90년이후 새로운 만든 노래도 대부분 어린이 뮤지컬이었던 것같습니다. 
대부분 나이든 우리들은 7-80년대 아침이슬과 아름다운 사람, 친구등의 노래를 그리워하고 김광석과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배출한 김민기를 주목하지만 실제 그의 관심은 어린이, 청소년에 더욱 천착하셨던게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요즘 아무도 어린이 청소년운동에 주목하지 않을때 그는 어린이 청소년 해방운동에 주목한것으로 보입니다. 성인을 위한 뮤지컬은 <지하철 1호선>정도지만, 어린이청소년뮤지컬은 무려 10여개가까운 걸 보면 말이지요.  <모스키토>,<의형제>,<우리는 친구다>,<고추장 떡볶이>,<슈퍼맨처럼>,<무적의 삼총사>,<도도>등 입니다. 
그는 대부분 우리생각처럼 민주화나 사회운동보다 오히려 방정환, 이오덕, 권정생 선생을 잇는 삶을 살아오신 분이고 진정  어린이 청소년 운동을 꿈꾸웠던 것이지요.  
24일 오늘 발인입니다. 
그동안 김민기선생님 덕분에 행복했고
많은 사람들도 우리사회도 행복했습니다.  
그저 감사하고 고마울뿐입니다. 
김민기 선생님 편히 잘가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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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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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문화관에서 김민기 선생님을 처음 뵈었다. 처음엔 멀리서 지켜만 보고 말도 못 붙였다. 그러다 어찌하여 이모 감독과 셋이서 술을 마시러 간 적이 있었다. 술이 들어가자 이러저런 말씀을 제법 많이 하셨다. 선생의 어머님이 익산에서 산파를 하셨는데 밤늦게 호출이 오면 밤길을 함께 가시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가끔 떠올랐다. 
또 한번은 밥이 나오지 않는 주말, 둘이서 흥업으로 곰탕을 먹으러 간 적이 있었다. 식당에 들어서자 TV에서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미처 알아채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았는데 선생이 씨익 웃으며, 저게 왜 나오나 하셨다. TV로 고개를 돌리니 여가수가 '가을 편지'를 부르고 있었다. 그제야 나도 알아채고 웃었다. 어색하게 노래를 끝까지 다 들었다. 당신 노래 이야기하는 걸 싫어하는 줄 알아 더이상 묻지 않고 곰탕만 맛있게 먹었다. 
또 한번은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고 술집에 갔는데 그곳에서 선생을 만났다. 여럿이 왁자한 술자리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 그날따라 차를 갖고 간 내가 같은 일산이니 모시고 가겠다 했다. 선생은 잠깐만 기다리라더니 가게에서 맥주캔을 사들고 오셨다. 오는 내내 그걸 드시며 이러저런 이야길 하셨다. 댁에 모셔다 드리고 오려는데 같이 들어가자 하셨다. 나는 호기심에 거절하지 않고 집까지 들어가 사모님께 인사도 한 후 돌아왔다. 그날 선생은 차로 편히 귀가하게 돼 '대박'이라고 하셨지만 사실 대박은 내가 난 거였다. 
마지막은 2019년 토지문화관 입주 때였다. 꽤 여러번 함께 걸었던 양안치길을(그곳엔 우리가 '민기로'라 이름 붙인 곳이 두 곳 있었다) 작가들과 걷고 이례적으로 사진도 찍었다. 아마 내가 찍자 했을 것이다. 
며칠 후 선생이 나와 친구 이후경을 불렀다. 낯가림이 심한 선생은 낯선 작가들 속에서 우릴 보자 반가우셨는지 당신의 방에서 술 한잔 하자고 하셨다. 그날 선생이 선물 받았다는 와인 두 병과 선생의 방에 남아있던 술을 거의 다 마실 즈음 어느새 동이 터왔다. 그제야 졸음을 못 이기고 우린 이만 자러 가겠다고 나왔다. 그 후로 난 토지에 가지 않아 더이상 만난 적이 없다. 
선생이 토지에 오실 때마다 걸었던 양안치 '민기로'와 우리가 선생을 닮았다고 했던 '민기 바위', 그리고 그 길가에 피었던 꽃들과 함께 떠나시는 선생을 배웅한다. 나직한 말씀도 노래 같아서 언젠가 몰래 녹음도 했던 김민기 선생님, 고맙습니다!

Sang-Hoo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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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였는데, 아침이슬을 작곡한 유명한 가수분이 아버지와 형 동생 하는 사이라며 앨범을 내기로 했다고 아버지가 며칠 간 촬영 작업에 매달렸다. 가수 앨범 사진을 찍는다니. 다큐멘터리 사진 찍는다는 분이. 나는 그저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머니가 흥분하셨다. 팬이었다고.
그 분이 김민기 선생님. 아버지와 사진을 찍기 위해 출장도 다녀오셨고, 우리집에서 아버지와 술도 한 잔 같이 하셨던 기억이 난다. 얼마 지나자 앨범이 나왔다. 무려 네 장 짜리 앨범. 그렇게 아침이슬이 아닌 다른 노래들을 알게 됐다. 백구, 철망 앞에서, 늙은 군인의 노래, 상록수, 작은 연못 등등. 서태지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던 고등학생에겐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는데 대학에 간 다음부터 그 노래들이 귀에 들어왔다.
김민기 선생님은 ‘수남이형 아들이니까 나도 네 삼촌이야’라고 했지만, 정작 삼촌이라고 불러본 적은 한두번 정도 됐을까. 자주 찾아뵙고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마음만 소심하게 먹다가 어느새 때가 지났다. 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냈다고 아쉬워 하시던 분들이 자꾸 떠나신다. 헛헛하다.
이 사진들이 94년 사진이니까, 딱 아버지가 지금 내 나이 때 찍은 사진들. 나도 벌써 나이만 이렇게 먹었네.
김민기 선생님 웃는 사진을 많이 안 남기셔서, 이렇게 즐겁게 환하게 웃으시는 분이란 걸 남기고 싶어서 올려본다. 평안하시길.

서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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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형이 갔다

한 시대의 아이콘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 세대 길고 어두운 터널을 함께 헤치고 나간 잔잔한 우상이자, 뒷배이며, 서러운 동반자라고도 한다.
그러나 여러 필설로 묘사해 보아도 그를 다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차리리, 지금 나처럼 그의 노래 아침이슬이나 친구를, 엘피 레코드에 걸어놓듯이 듣고, 부르고, 판이 걸리는 소리 같은 얕은 기침을 섞어 노랫말을 소리내는 것이, 그를 회상하고, 돌아보는 일의 적격이 아닐까 한다.
역사를 정치나 경제의 파고, 그높이를 재고, 눈에 보이는 힘을 휘두르거나, 짓누른 인물들로 연대표를 이어 써보아도 진경, 그 사실의 역사로 보면 오히려 생경스럽기 그지 없다.
우리 그 시대 젊은 이가, 이제 늙은 이로 이행되는 이 현대사에서 김민기 형의 노래를 듣고, 부르며, 울고 웃었던 세대인들의 심중에 흐르는 에너지와 그 너울로, 다시 마음속의 역사, 문화의 시대사를 이야기 해야 한다.
체루탄 연기가 자욱하던 교정에서, 거리에서 목이 쉬고, 숨이 막혀도, 같이 부르고, 귀에 들리던 아침이슬 만한 정서적 파워가 어디에 있었을까.
그의 노래는 암울, 분노, 눈물의 때에도 통했지만, 때로 기쁨과 희망과 다시 일어남의 기호로도 쓰였다. 처절한 낭만, 애절한 희망가이기도 했다.
말수도 적은듯, 수수한 얼굴에, 대중적 인기인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듯한, 한 시대의 문화권력자, 그 상징이 이제 세상을 내려서서 그 세월에 지고 말았다.
아직 아까운 나이임에 분명하나, 그는 치열하고, 묵직한 생애를 꽉 채워 살고, 그 강을 건너갔다.
편히 영영의 세계에서 쉬기를 바란다.
시대가 간다, 우상도 가고, 절망같은 희망, 한 세월이 흐르고, 예측치 못할 새로운 시간이 태어난다.
나는 그의 시대를 기억하는 그 시대의 한 존재로, 우리들의 젊은 날 품었던 꿈은 그대로 지닌채, 남은 시간에 평화롭고 싶다.
김민기 형, 잘 가시라.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이든,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지 모를 깊은 바닷속의 고요이든, 그 어느 곳이든, 훠이훠이, 잘 가시라.

조정선
  · 
김민기 하면 정동MBC 시절인 1984년을 떠올립니다. 디스크쇼를 함께하던 이종환 선배가 어느날 희귀본이던 김민기의 음반을 손에서 놓치는 바람에 LP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둘로 동강난 건 아니고, 반쯤만 금이 간 상태라 틀 수는 있었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선배님, 이 음반은 딸꾹질을 하네요"
딸꾹질이 멎지 않던 LP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방송을 탔습니다. 당시는 아침이슬이 금지곡이었기 때문에 주로 친구를 틀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음악PD 일을 37년이나 하면서 새삼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김민기를 소재로 한 변변한 기획물 하나 만들지 못했는지 말입니다. 그의 타계소식을 접하고, 그가 얼마나 우리 음악사 아니 현대사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고, 훌륭한 삶은 살았는지, 대중들에게 전해주지 못한 것, 개인적인 추억거리 하나 만들지 못한 것은 오래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김민기 님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내세를 기원합니다.

Kim Jeong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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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이진순의 열림’이 고 김민기 선생을 인터뷰한 것은 2015년 3월 하순이었다. 인터뷰 기사는 그로부터 한 달 지나서 지면에 실렸다.
다큐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가 방영되고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자 10여 년 전의 인터뷰가 지난 5월 재소환되었다. 
다큐 방영 후, 고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는 소문이 무성했고 이제 현실이 되었다. 평소의 그답게 고인은 마지막까지 무척 말을 아꼈다. 세상과의 작별을 앞두고 짧은 인사말이라도 남겼을 법한데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 인터뷰의 마무리 대목을 다시 읽어보았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 가운데 하나 바꾸고 싶은 게 있어. ‘쉼표’라는 말인데, 보통 제일 익숙한 게 4분의 4박자 네 마디의 악보인데, 대부분 그 넷째 마디 끝에 4분 쉼표가 하나 있지. 근데 이게 쉼표가 아니라 ‘숨표’라고. 
내가 수영을 좋아하는데 수영하다 잠깐 올라오는 시간에 숨을 쉬는 거야. 마지막 16분의 1은 그 이전의 16분의 15를 내뱉기 위해서 들이쉬는 거거든. 쉬는 게 아니고 전체를 살리기 위한 숨표! 그러니까 16분의 1은 16분의 15랑 등가라고. 마이너리티(소수자)라고 보는데 마이너리티가 아니고. 복지가 그냥 퍼주는 게 아니란 얘기. 아, 근데 말이 길다. 내가 취했네.(웃음)”
고인의 말처럼 쉼표는 쉰다는 의미가 아니라 숨 쉰다는 의미의 숨표다. 고인의 육신은 죽어서 영원한 쉼표를 찍었지만 고인의 음악은 오래오래 우리 사회 전체를 살리는 숨표가 될 것이다.
삼가 고인의 영전에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

KyungHo Shin
  · 
고 김민기 분향소에 
조문하고 오는 길입니다.
분향소 내부사진은 
촬영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외부에서 주변을 몇 컷 촬영했는데
그것마저도 
혹 고인과 유족분들에게 누가 될까 싶어 
올리지 않습니다.
대신
지금은 Arco 꿈밭극장으로 바뀐 
학전에 들러
고인을 추모하는 이들의 모습만 올립니다.
#뒷것 #김민기 #학전 #arco꿈밭극장

Keun R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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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 할 만큼 했지..."라는 유언을 남긴 채 김민기 선생이 떠난 날에 저는 이 기도 시집을 읽습니다. 성찰과 사색의 시인 이문재 선생이 국내외 대표적 기도 시를 골라서 엮은 시집입니다. 
모든 기도는 자기를 놓아버리는 순간 신성에 가 닿는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당신의 머리맡에 부디 이 기도가, 이 시집이 놓여지길 빕니다. 
저는 원래 천국 사람이었습니다 / 다니엘 슈만
어머니,
제게 남은 이 생의 마지막 나날이
몹시 괴로울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여러모로 제 생애 최고의 날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 슬퍼하시면, 저는 제 모든 꿈을 이루기 위해 몇백 년을 더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게 주어진 시간에 충실했으니, 저는 아무런 후회가 없습니다.
아마도 제가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느긋한 마음으로
모두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는 일이 절대로 없었을 테죠.
이것은 시커먼 구름을 뚫고 찬란하게 쏟아지는 은빛 햇살과 같습니다.
꿈을 이룰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죽은 사람들이 참 안타깝습니다.
저는 모든 꿈을 이루었는데 말입니다.
제가 천국에 갔느냐고 누군가 묻거든, 어머니 이렇게만 말씀해주세요.
저는 원래 그곳 사람이었다고.
ㅡ어머니를 사랑하는 아들
다니엘 드림
<당신의 그림자 안에서 빛나게 하소서> 이문재 엮음, 달

Jinmo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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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 가시는 길에  노래 한곡 올립니다 _()_
<천리길>    김민기
동산에 아침햇살 구름 뚫고 솟아와
새하얀 접시꽃잎 위에 눈부시게 빛나고
발아래는 구름바다 천리를 뻗었나
산아래 마을들아 밤새잘들 잤느냐
나뭇잎이 스쳐가네 물방울이 날으네
발목에 엉킨 칡넝쿨 우리 갈길 막아도
노루 사슴 뛰어간다 머리위엔 종달새
수풀 저편 논두렁엔 아기 염소가 노닌다
가자 천리길 굽이굽이쳐 가자
흙먼지 모두 마시면서 내 땅에 내가 간다
쏟아지는 불햇살 몰아치는 흙먼지
이마에 맺힌 땀방울 눈가에 쓰려도
우물가에 새색시 물동이이고 오네
호랑나비 나르고 아이들은 출렁거린다
먹구름이 몰려온다 빗방울도 떨어진다
등 뒤로 흘러내린 물이 속옷까지 적셔도
소나기를 피하랴 천둥인들 무서우랴
겁쟁이 강아지는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가자 천리길 굽이굽이쳐 가자
흙먼지 모두 마시면서 내땅에 내가 간다
동산에 무지개 떴다 고운 노을 물들고
하늘가 저 멀리엔 초저녁 별 빛나네
집집마다 흰 연기 자욱하게 덮히니
밥 냄새 구수하고 아이들을 부르는 엄마소리
가자 천리길 굽이굽이쳐 가자
흙먼지 모두 마시면서 내땅에 내가 간다
출렁이는 밤 하늘 구름엔 달 가고
귓가에 시냇물 소리 소골소골 얘기하네
졸지말고 깨어라 쉬지말고 흘러라
새아침이 올때까지 어두운 이 밤을 지켜라
가자 천리길 굽이굽이쳐 가자
흙먼지 모두 마시면서 내 땅에 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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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 Hyup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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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셔온 글>
김민기(金敏基, 1951.3.31.~2024.7.21.)
오래전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에서 그에 대해 다룬 글을 쓴 적이 있다. 나의 인물 아카이브에는 여전히 김민기, 그에 대한 항목이 있다. 출생지, 생년월일을 비롯해 기타 등등 내 수준에서 그에 대해 알 수 있을 만한, 알아낼 수 있을 만한 수준의 내용들을 틈틈이 차곡차곡 정리했었다. 물론, 그에 대한 오비추어리(obituary)를 쓰기 위한 목적은 아니었지만, 오늘 그의 생몰연대의 괄호를 닫으며 아래와 같은 추모의 글을 올린다.
▮ 홍수처럼 번져온 노래 - 김민기
● 돈 벌어 대는 것도 좋긴 하지만/ 무슨 통뼈 깡다구로 만날 철야요/ 누구는 하고 싶어 하느냐면서/ 힘없이 하는 말이 폐병삼기래
 - 소리굿 '공장의 불빛' 중에서
이제는 가수라기보다는 한국적인 뮤지컬의 창시자, 혹은 연극 연출가, 기획가로 더 익숙해진 김민기. 내가 김민기의 노래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생이 되어서의 일이었다. 아직 동아리란 말보다는 서클이란 말이 더 익숙했던 그 시절에 나는 가톨릭학생회란 서클에 가입했다. 고등학생이 되고 처음 가본 MT에서 우리는 밤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선생님과 선배들이 가르쳐주는 노래들을 배웠다. 그때 배운 노래가 김민기의 <아침이슬>과 <상록수>였다. 선생님이 한 잔씩 나눠주던 맥주에 얼굴이 불콰해진 우리들은 처음 들어보고 배워보는 그 노래의 아름다운 가사와 선율에 젖어 밤하늘의 별들이 빗방울에 젖어드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강원도 홍천 계곡에서의 MT. 나는 지금도 그날 밤의 별과 모닥불, 그리고 저마다 뭔가 깨달음을 얻은 듯한 그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우리들은 그날 밤 세상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우리들은 누구도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다만 김민기의 노래만이 김광규 시인의 시구처럼 그 해 세밑을 달궜다. 그리고 이듬해 87년 우리들 중 많은 친구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 학생, 청년들 중 하나가 되었음은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다만 김민기의 노래들은 더 이상 불리지 않았다. 우리들의 노래는 김민기의 <아침이슬>과 <상록수>에서 <농민가>, <타는 목마름으로>으로 그리고 다시 좀 더 격렬한 운동가로 바뀌어 갔기 때문이다.
나는 젊은 시절, 김민기의 노래를 통해 우리 대중가요에도 ‘가사(Lyrics)’가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다. 
●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
- <친구> 중에서
● 무궁화꽃을 피우는 아이/ 이른 아침 꽃밭에 물도 주었네/ 날이 갈수록 꽃은 시들어/ 꽃밭에 울먹인 아이 있었네
- <꽃피우는 아이> 중에서
● 서산에 붉은 해 걸리고/ 강변에 앉아서 쉬노라면/ 낯익은 얼굴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온다/ 늘어진 어깨마다 퀭한 두 눈마다/ 빨간 노을이 물들면/ 웬지 마음이 설레인다
- <강변에서> 중에서
● 내 고향 가는 길 매서운 북녘길/ 찬바람 마른 가지에 윙윙거리고/ 길가에 푹 패인 구덩이 속엔/ 낙엽이 엉긴 채 살얼음 얼었네/ 눈보라 내 눈 위에 녹아 흐르니/ 내 더운 가슴에 안아볼거나/ 뿌리채 뽑혀버린 나무 등걸에/ 내 더운 눈물 뿌려 잎이나 내어보세
- <고향 가는 길> 중에서
이를테면 그 당시 사회과학 서적의 커리큘럼이 백산서당의 책으로 시작해서 몰래 구해 읽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으로 이어지듯 우리들은 김민기의 노래로 시작해서 다른 세상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솔직히 나보다 조금 윗세대의 사람들에게 <아침이슬>은 양희은의 것이었겠지만 나에게 김민기의 노래는 온전히 김민기의 것이거나 아니면 이제 막 목울대가 굵어가던 청소년기의 우리들의 노래로 기억된다. 솔직히 그 점만큼은 다행스러운 일이란 생각이 든다.
1968년. 전 세계를 뜨겁게 달궜던 청년 문화는 1970년에 접어들면서 차갑게 식어 버렸다. 60년대를 정의했던 프로테스탄트 포크의 밥 딜런은 포크기타 대신 일렉트릭 기타를 메고 나왔고, 존 바에즈만이 고독하게 자리를 지켰고, 청춘의 광폭한 질주를 노래했던 지미 헨드릭스, 짐 모리슨, 제니스 조플린은 유명을 달리했다. 우드스톡은 폭력으로 점철되었고, 히피들은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혁명에 대한 낭만적 열정은 시들어 버렸고, 버려진 청년 혁명가들은 산 속으로, 혹은 도시의 곳곳에서 고립된 채 폐기되고 있었다. 1960년대가 '순수의 시대'이자 '광기의 시대', '혁명의 시대'였다면 1970년은 그 벽두부터 그런 혁명과 순수, 광기의 불꽃이 한 줄기 비에 사그라들듯,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의 영향은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고, 새마을 운동의 근면, 협동, 자조의 깃발 아래 대중문화는 그야말로 못다 핀 꽃 한 송이로 시들어 사라질 지경이었다.
▮ 김민기 - 곡절 많은 역사의 유복자
김민기의 아버지는 의사였고, 어머니는 조산원이었다. 그의 부친은 그가 태어나기 직전 패퇴하던 인민군에 의해 피살되었고, 김민기는 유복자로 1951년 3월 31일, 전북 이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함경도 원산 태생으로 연희전문을 다녔고, 연희전문 4학년 때 기숙사 내의 한국인 학생에 대한 차별대우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동하다 제적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산원 자격증을 땄다. 귀국 후 남부지방의 여러 곳을 다니며 진료활동을 벌이다 이리의 병원에서 김민기의 부친과 만나 결혼하여, 10남매를 낳았다. 김민기는 그중 막내다. 아버지 없이 자란 김민기에게 활동적인 어머니의 영향은 대단히 컸다고 한다.
그는 서너 살 때부터 어머니와 형, 누나들이 각기 직장과 학교로 나간 후, 늘 혼자 집을 지켜야 했다. 텅 빈 집에서 하루 종일 혼자 지내야 하는 어린 그에게 유일한 즐거움은 작대기를 가지고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글자를 배우기 훨씬 이전부터 그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스스로 대화를 나누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유년시절의 체험은 다분히 외로움과 공포의 기억을 동반한 채 아직도 그의 뇌리 속에 생생히 살아있다. 혼자서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다가 듣게 되던 방공훈련의 사이렌 소리, 거의 매일 밤 되풀이되던 등화관제의 칠흑 같은 어둠, 그 어둠속에서 간간히 들리던 개 짖는 소리, 검은 깃을 씌운 전등 아래서 듣던 괘종시계 소리, 지붕 밑 홈통의 빗물 떨어지는 소리…. 그의 감수성 속에 최초로 자리 잡은 음악은 바로 그런 소리들이었다.
1963년, 서울 재동국민학교 졸업, 경기중학교 시절, 김민기의 생활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 것은 미술반과 보이스카우트 활동이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미술실에 틀어 박혀 그림을 그렸고, 주말이면 보이스카우트 대원들과 어울려 캠핑을 다니곤 했다. 물론 공부는 뒷전이었다. 당시 서울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던 셋째 누나가 그를 음악의 세계로 이끈 최초의 스승이었다. 그는 피아노 밑에서 누나의 연주를 듣다가 잠이 들곤 했다. 그의 음악적 감각은 거기서 크게 자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누나의 연주에서 틀린 대목을 정확히 꼬집어 내는 '훌륭한 귀'를 가지게 된다. 그 당시 그가 다룰 수 있었던 유일한 악기는 소년단실에 있는 ‘우쿨렐레’였다. 캠핑 때마다 우쿨렐레로 노래를 반주하는 일은 항상 그의 몫이었다.
1966년, 경기고등학교 입학하여서의 생활도 중학교 때와 마찬가지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에게 그 자신의 악기가 생긴 것이다. 셋째 누나가 입학을 기념하여 선물한 클래식 기타는 그가 최초로 소유한 악기였다. 그는 혼자서 누나의 피아노 악보를 이용해 기타를 익혀나갔고, 얼마 안가 학교 내의 소문난 기타연주자가 되어 있었다. 누나가 선물한 기타는 그 후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뒤바꾸어 놓은 계기가 된 셈이었다.
▮ 미술에서 음악으로 - 그리고 다시 연극으로
196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입학한 그는 더욱 그림에 몰두했고, 1학년 때 이미 개인전을 열만큼 왕성한 창작의욕을 보였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려왔고, 중·고등학교 내내 미술실에서 그림만 그리다시피 해왔던 그에게 대학교과과정의 미술수업은 도무지 성이 차지 않았다. 따라서 학교성적은 그리 좋은 편이 못되었고, 결국 그는 1년 낙제를 하게 된다. 그가 학교 작업실에 틀어박혀 그림에 몰두하고 있을 때 고교시절 그룹사운드 활동을 했던 한 친구가 그를 찾아왔다. 자기와 함께 듀엣을 만들어 노래를 하자는 제안이었다. 마침 그림 그릴 물감 값이 아쉬워 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1만 원 가량의 빚까지 지고 있었던 김민기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둘은 함께 기타를 치며 다방에서 노래를 부르게 된다.
듀엣의 이름은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 라는 의미)였다. 그가 낙제를 하고 두 번째로 1학년에 다니던 1970년 어느 날, 고교동창이던 임문일(그는 70년대 초 한때 DJ로 인기를 누렸었다.)의 소개로 양희은을 만나게 된다. 집안 사정으로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던 양희은이 가수활동을 시작하며 그에게 노래반주를 부탁했고, 김민기는 양희은의 노래를 반주해 주며 그녀를 위해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했다. 1970년 양희은의 데뷔작으로 발표된 '아침이슬'을 비롯, 그녀가 부른 많은 노래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당시 YWCA에 이른바 통기타 붐의 시발점이 되었던 '청개구리홀'이라는 조그만 공간이 있었다. 많은 통기타 가수들이 이곳에서 자유스럽게 노래를 부르며 어울리곤 했다. 김민기도 자주 이곳에 들러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이 '청개구리홀'의 후원자였던 경음악 평론가 최경식이 그의 재질을 높이 사 레코드 출반을 주선해 주었다.
1971년 그는 처음이자 거의 마지막이 되다시피 한 자신의 레코드(LP)를 취입하게 된다(이 LP는 계속 판매금지에 묶여 있다가 1987에 가서야 재발매가 되었지만, 아직 CD 버전은 발매된 적이 없다). 이 레코드는 발매된 지 얼마안가 압수조치를 당하게 된다. 그것은 그가 1972년 봄 서울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대되어 노래부르기를 지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가 불러준 노래는 '우리 승리하리라[피트 시거(Pete Seeger)의 <We shall overcome>의 번안곡)', '해방가', '꽃피우는 아이'등 세 곡이었다. 이튿날 새벽 그는 동대문서로 연행되었고, 시중에 남아있던 그의 레코드는 전량 압수되었으며, 그의 노래 '꽃피우는 아이'가 그의 노래 중 처음으로 방송금지되었다. 이것이 그가 그 후 수도 없이 되풀이하게 되는 연행행로의 시작이었다.
▮ 김민기와 김지하의 만남 그리고 노동자
그가 가수 및 작곡가로서 조금씩 알려지고 있던 1971년 무렵, 시인 김지하를 만나게 된다. 당대를 가장 치열하게 살고 있던 한 시인과의 만남은 그에게 있어 대단히 충격적인 체험이었다. 당시 김지하 등을 중심으로 유수한 시인, 학자, 화가, 음악인, 영화인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한국문화의 방향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 모임을 가져오고 있었다. 이 모임의 이름은 폰트라(PONTRA : Poem ON TRAsh, 즉 "잿더미위에 시를"이란 뜻)였는 데, 김민기도 이 모임에 참가하여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고 선배들의 조언을 듣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이 모임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그가 지금까지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역사와 현실에 대한 의식이 조금씩 틀이 잡히기 시작하였다. 김민기는 중·고등학교 시절의 미술반 동기이며 함께 서울대학에 다니고 있던 친구 이도성 등과 함께 신정동에 야학을 열어 노동자들을 가르쳤고, 인천 도시산업선교회 활동에도 참여, 노동자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1972년 여름, 노동자와의 야유회에서 그로서는 잊을 수 없는 한 가지 체험을 이때 하게 된다. 마산 수출공단의 노동자들과 해변으로 야유회를 갔을 때였다. 막 석양이 지는 바닷가로 하나씩 둘씩 돌아오는 고깃배들을 바라보다 그가 무심코 "야, 참 멋있는데"하고 중얼거렸다. 그 때 옆에 같이 있던 여공 한 사람이 쏘아 붙였다. "그 사람들은 모두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예요. 뭐가 멋있다는 거지요?" 그 때 그는 뒤통수를 철퇴로 얻어맞는 충격을 받았다. '난 아직 멀었구나'싶었다. 이 조그만 체험이 그 자신의 감성적 기반에 대해 근본적인 반성을 겪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그가 가져온 소위 '지식인적' 사고방식과 감수성에 대해 뼈저린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다. 어려서부터 그의 삶의 커다란 지주의 하나였던 그림에도 차츰 멀어지게 되었다.
어느 날인가 그는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다. 화면을 수정하기 위해 칼로 긁어내다가 캔버스에 구멍이 뚫려 버렸다. 뚫린 구멍 사이로 방금 그가 그리고 있던 나무가 보였다. 
“도대체 이런 그림을 그려서 무엇 할 것인가. 조금만 움직이면 저 나무를 내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는 데….”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앞으로 그가 살아갈 삶의 방식에 대해 대단히 중요한 시사를 받은 느낌이었다. 그해 겨울 무렵을 기해 그는 완전히 서양화 붓을 놓아 버렸다. 기타라는 악기에 대해서도 회의가 들기 시작했고, 전통 국악기나 민요 판소리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토록 아끼던 기타는 후배 누군가에게 주어 버렸다.
▮ '금관의 예수' 공연과 김민기
1973년 무렵,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시인을 중심으로 카톨릭권의 문화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 일환으로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를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하였다. 이 공연에는 김민기 외에 많은 연극패 탈패들이 참가했던 바, 이를 계기로 김민기는 연극패, 탈패들과 본격적인 교류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노래 '금관의 예수('주여 이제는 이곳에'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으나, 첫 발매된 양희은의 음반에는 '주여 이제는 그곳에'로 제목이 달려있었다)'는 첫 공연지인 원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작곡되었다.
김민기가 국악에 관해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되는 것은 당시 미대에 함께 다니던 김구한을 통해서였다. 김구한은 1966년에 국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악과에 합격하였으나 형편상 입학을 포기했다가, 1969년에 미대에 입학, 조소과에 다니고 있었다. 김구한에게서 단소를 배우면서 전통음악에 접하기 시작한 김민기가 보다 본격적으로 국악의 대중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작곡과 출신의 이종구와 김영동을 만나게 되면서 부터였다. 그 첫 작업은 음대의 동아리인 '20세기 음악연구회'의 발표회 무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신경림의 시에 이종구가 곡을 붙인 작품이 국악과 기타반주로 무대에 올려졌다. 기타부분의 편곡과 연주는 물론 김민기가 맡았다. 1973년 말, 김민기는 경음악 평론가 최동욱의 주선으로 지구레코드사와 미국의 RCA와 함께 라이선스 음반을 만들기로 계약을 맺었다. 이때 받은 계약금을 가지고 준비한 것이 1974년 4월,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 이종구 작곡발표 무대였다.
이 작곡발표회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제 1부에서는 이종구가 작곡한 작품들을 김민기가 노래불렀다. 김지하의 시에 곡을 붙인 '빈 산', '서울길'을 비롯, '백제관음', '하나이었다더라'등 여러 노래들이 국악반주로 발표되었다. 제 2부에서는 한·일관계의 문제를 특히 기생관광에 초점을 맞추어 풍자한 소리굿 '아구'가 공연되었다. 소리굿 '아구'의 대본은 남사당 덧뵈기중의 먹중과장의 기본골격을 원용하여 김민기가 정리한 것이었고, 이종구가 작곡을 맡았으며, 채희완, 임진택, 김석만, 이애주 등이 참여했다. 이 국립극장 공연은 TV로 방영될 예정이었으나 녹화도중 중단되었고, 레코드 출반 계획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물론 그 노래들이 공연 윤리위원회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공연자체는 대단한 성황을 이루어 입장료가 200원인 데 암표가 무려 3000원씩에 거래될 정도였다. 전통 탈춤양식이 오늘의 문제를 담는데 얼마나 유용한 것인가를 보여준 이 소리굿 '아구'는 이후 1970년대 전반을 통해 크게 일어나 마당극 운동의 결정적인 시발점이 되어준 것이었다.
1974년 10월, 군에 입대한 그가 처음 배치받은 곳은 카츄사 중의 카츄사로 불리는 AFKN 방송국이었다. 그가 비교적 편한 군대생활을 보내고 있던 1975년, 전국은 소위 유신 찬반 국민투표 문제로 온통 들끓고 있었다. 카톨릭권을 중심으로 국민투표 보이콧 운동이 맹렬히 전개되었고, 투표당일에 명동성당에서 하루 종일 투표를 반대하는 집회와 공연을 벌이려는 계획이 세워졌다. 이 모임의 계획에서 김민기의 노래들이 주 레퍼토리로 채택되었다. 소위 '운동권 가요'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무산되었지만 이 일로 김민기는 영문도 모른 채 보안부대로 소환되었고, 곧 이어 최전방으로 재배치되었다. 전방으로 배치되어 갔을 때 그를 기다린 것은 2월 혹한 속의 차디찬 사단 영창이었다. 내복도 못 입은 채 15일간의 독방 영창생활을 마친 후 그 곳에서 그는 나머지 군 생활을 보냈다.
군에서 제대했을 때, 이미 그의 노래는 방송가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었지만, 묘하게도 그는 자신이 입대하기 전보다 훨씬 유명해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는 '위험인물'로 단단히 낙인찍혀 있었고, 모든 공식적인 활동에 제약을 받아야 했다. 대학가에서는 여전히 그의 노래들이 애창되고 있었지만, 그를 인기가수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학가에서 불리는 노래 가운데에는 그의 노래 외에 작자미상의 구전가요들도 상당히 많았는데, 많은 사람들은 그것들도 김민기의 노래일 것이라고 지레 단정 짓고는 했다. 그는 본의 아니게 대단한 투사로 인식되고 있었다. 제대하고 얼마 후, 그는 가까스로 부평근처의 어느 공장에 취직하게 된다. 생산직은 아니었지만 그로서는 노동자들의 삶과 의식을 가까이서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는 그 공장에서 노동자들을 모아 새벽마다 공부를 가르쳤다. 소위 말하는 '의식화 교육'과는 무관하게 노동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이었다. 거의 매일 계속되는 야근 때문에 밤에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야학이 아닌 조학인 셈이었다. 이 때, 그와 함께 생활한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을 위해 그는 '상록수'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러주기도 했다. 그의 현장생활에 관해서는 소설가 조세희가 '난장이 마을의 유리병정'이라는 작품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공장에 다니던 중에 그는 당시 서울미대 학장의 배려로 대학 졸업장을 받게 된다. 중등교사 자격증도 함께였다. 대학에 입학한 지 9년만의 졸업이었다. 더 이상의 공장근무가 곤란해지자 그는 퇴사했다. 그 후 한동안 그는 노동자들과 함께 기숙하며 노무자 생활을 해야 했다. 그로서는 몹시도 춥고 외로운 시기였다.
▮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과 노래굿 '공장의 불빛'
양희은이 노래한 이 디스크는 그가 군대시절에 작곡한 '늙은 군인의 노래', '식구생각' 그리고 제대후에 만든 '밤배놀이', '상록수(앨범에서는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이 제목이다)'등, 그의 작품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정작 어느 한곡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할 수는 없었다(앨범의 작사작곡자는 김아영으로 되어 있다). 이유는 간단했다. 김민기라는 이름으로는 심의를 통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래가 문제가 아니라 작곡자의 이름이 문제였으니 심의 기준치고는 기가 막힌 심의기준이 아닐 수 없었다. 남의 이름을 빌어 낸 이 앨범은 그나마도 얼마안가 일부가 삭제되었고, 곧 다시 판금되어야 했다. 말썽이 된 것은 '늙은 군인의 노래' 때문이었다(이것도 기가 막힌 일이다. 이 노래는 약간의 가사를 바꾸어 나중에 군대에서도 부르게 되니 말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더 이상의 합법적인 음악활동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 김민기는 새로운 작업에 착수한다.
<공장의 불빛>은 1970년대 대표적인 노조 탄압사례의 하나인 동일방직 사건을 소재로 하여 노래굿이라는 새로운 양식으로 카세트 테잎에 담아낸 것이었다. 한국교회 사회선교협의회의 후원으로 제작된 이 테이프에 김민기는 자신의 이름석자를 비로소 떳떳이 밝힐 수 있었다. '공장의 불빛'은 나오자마자 커다란 화제가 되었고, 그는 당연히 연행되어 조사를 받아야 했다. 백원담 교수의 회고에 의하면 이 때 김민기는 아현동의 어느 무용 교습실을 빌려 한국의 마당굿을 토대로 하여 공장의 노동 작업을 형상화한 기계춤을 그가 직접 지도하며 공연준비에 박차를 가했다고 한다. 1979년의 초봄 무렵 김민기는 경찰이 겹겹이 둘러싼 공연장에서 <공장의 불빛>을 공연했다. <공장의 불빛>은 그가 시쳇말로 '빵에 갈 각오'를 하고 만든 것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구속되지 않고 곧 풀려나왔다.
조사를 마치고 나온 그는 이제 더욱 더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고 있었고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얼굴도 모르는 부친에 대한 짙은 그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익산의 어느 집에서 머슴살이를 시작했다. 머슴살이조차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를 고용한 주인집은 정기적으로 그에 관해 경찰에 보고를 해야 했다. 10·26이 터진 후 그는 김제로 옮겨 소작 농사를 시작한다.
▮ 80년 광주와 농사꾼으로 변모한 김민기
10.26직후, 한국사회는 새로 맞을 봄의 기대로 잔뜩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김민기가 대학시절에 활동했던 야학의 후배 강학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여성 해고 노동자들에게 보모교육을 시켜 유아원을 설립하고자 한다며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10.26 이전 같으면 어림도 없었을 유아원 기금마련 자선공연이 김민기에 의해 기획되었고, 그는 실로 오랜만에 무대에 섰다. 프로그램에 그의 이름은 한 줄도 비치지 않았지만 소문을 듣고 문화체육관에 몰려든 젊은이들이 김민기에게 열광적인 박수를 쏟았다. 그는 마지막 공연에서 계속되는 앵콜 요청으로 다섯 곡이나 더 불러야 했다. 이 공연에서 마련된 자금으로 '해송 아기둥지'라는 이름의 유아원이 설립되었다.
1980년 봄, 광주지역 대학출신의 문화패들이 극단 '광대'를 조직, 창립공연으로 마당극 '돼지풀이'를 공연했다. 이 창립무대에서 소설가 황석영이 축사를 했고, 김민기가 기획, 양희은 등이 찬조 출연하여 노래를 불렀다.
김제에 자리를 잡고 농사를 짓는 동안 그의 집에는 전라도 지역의 문화패를 비롯해, 전국 각지의 문화예술인들이 쉴 새 없이 들락거렸다. 모내기철이나 추수 때면 각지의 친구, 후배들이 모여들어 일을 도와주었고 그의 집은 마치 장터처럼 떠들썩하기 마련이었다. 이 때 김제·전주지방의 젊은 연극패들이 자주 그를 찾아왔었는데, 그는 이들을 규합, 근대사 세미나를 겸한 마당극 '1876년에서 1984년까지'를 창작했고, 1981년, 전주에서 소규모 위크숍 형식으로 공연을 가졌다.
1981년, 김민기는 전곡으로 옮겨 작은 아버지와 함께 소작을 시작했다. 그 때 그는 영농자금 마련을 위해 겨울내내 해태 양식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전곡에서 농사를 짓던 중 그는 농민의 현실을 더욱 깊이 절감하는 계기가 된 한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그해 그는 약 5000평 규모의 참깨농사를 시작했다. 그때 모 비료회사에서 그 일대를 맡아 액체비료를 살포했는데, 나중에 보니 싹이 몽땅 타 죽어 있었다. 
김민기는 혼자서 원인조사에 나섰고 결국 비료회사에서 정량의 5배 이상이나 과다살포한 탓임을 밝혀낸다. 그때부터 보상을 받기 위해 각지를 찾아다니며 협조를 구했으나 도움 받을 길이 없었고, 그는 혼자서 비료회사를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비료의 필요량과 실제 살포량, 토지의 산화도 등에 관해 거의 완벽한 데이터를 작성해 냈다. 그는 이를 근거로 회사에 손해배상을 청구, 끝내 배상을 받아내는 집념을 보인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소위 '새마을 운동' 이후 마치 투기꾼처럼 변해 버린 농민의 모습과, 속으로 더욱 피폐해 질 수밖에 없었던 농촌의 현실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1981년 겨울, 전곡의 민통선 북방지역에 5000평 규모의 논을 소작할 기회가 생겼다. 단, 논 옆에 있는 흉가 하나를 매입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 겨울, 김민기는 충남 보령의 탄광에서 일을 해 50만원을 벌었고, 그것으로 흉가를 매입, 그 곳에서 생활하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는 마을의 젊은이들을 규합, 청년회를 조직했고, 그것을 통해 쌀 출하사업도 벌였다. 그곳에서 생산된 쌀을 도시의 소비자들에게 직매함으로써 중간 유통과정의 부조리를 없애고, 농민과 소비자가 다함께 이익을 얻도록 하는 사업이었다. 이 사업의 결과 농민 측과 소비자 측에게 각기 250만 원 정도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청년회는 이 이익금을 기금으로 쓸 수 있었고, 그 중 일부는 마을 공동 목욕탕 건립기금으로 적립할 수 있었다. 이 일로 한때 엉뚱하게도 '쌀장수'로 소문이 났고, 시인 황명걸은 '쌀장수 김민기'라는 시를 발표(문예중앙, 1984 여름)하기도 했다.
▮ 한국적 뮤지컬의 탄생, <지하철 1호선>
1983년, 극단 연우무대는 2년 전 김민기가 전주에서 만들었던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의 대본을 손질하여 대한민국 연극제에 출품, 본선에 올랐다. 이 연극은 김민기의 연출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되었는데, 당시 제목은 '멈춰선 저 상여는 상주도 없다더냐'였다. 이 작품은 평론가들로 부터는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지 못했지만, 김민기의 명성에 힘입어 대학생층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고, 문예회관 대극장 개관이래 최대의 관객동원이라는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그가 전곡에서 농사꾼으로 일하고 있던 1983년 겨울, 그가 살고 있던 집에 화재가 나 가재도구와 가지고 있던 책까지도 몽땅 불타 버리는 액운을 만난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들이 새로 집을 지어 줄테니 계속 머물러 달라고 했고, 그 자신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때 미국에 유학중이던 김석만이 돌아왔다. 김민기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한 그는 돌아오자마자 김민기를 만나 함께 일할 것을 종용했다. 마침내 김민기는 농촌생활을 일단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김석만, 오종우 등과 함께 사무실을 내고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레코드사와 계약을 맺고 계약금을 받아 시작한 이 기획은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뮤지컬의 창작자체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던 데다 내용상 아무런 하자가 있을 수 없었던 작품임에도 그것이 김민기의 작품이라는 이유 때문에 공연윤리심의를 위한 접수가 거부되어 심의를 받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 때문이었다. 레코드사로부터 받아낸 계약금만 고스란히 빚으로 떠넘겨진 결과가 되고 말았다. 아직까지도 그의 이름으로 레코드를 낸다는 것은 그 내용을 불문하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새로운 각오로 추진한 모처럼의 시도는 또 한 번의 좌절을 겪어야 했지만, 그 작업을 계기로 한 여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뮤지컬 출반계획을 추진하던 사무실에 상근하며 그의 작업을 도왔던 이미영이었다.
1985년 8월 31일,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서른다섯의 노총각 김민기는 결혼식을 올렸다. 쏟아지는 비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이 있던 서울미술관에는 수많은 하객들이 모여 그들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고, 그들은 불광동의 두 칸짜리 전세방에서 새살림을 시작한다.
▮ 김민기 -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가 빚지고 있는 이름
<지하철 1호선>의 성공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지하철 1호선>의 원작자인 폴커 루드비히(원제는 Line 1-das Musical)는 김민기가 만든 <지하철 1호선>이 원작의 감동을 뛰어넘는 한국적 뮤지컬로 변모한 사실에 감탄하며 서울에서의 1,000회 공연을 기념하기 위해 독일에서 직접 맥주 5통을 가지고 와 전달하기도 했다. 그리고 독일에서의 공연도 대성공이었다. 김민기는 지금도 일요일이면 집 앞의 작은 밭에서 직접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봄이 오면 땅을 갈고 돌을 고르고, 싹이 나면 솎아주고, 잡초를 뽑아주고, 저녁에는 그 밭에서 자란 푸성귀를 뜯어다 친구들과 함께 밥을 지어먹는다고 한다.
얼마 전(2001년) <지하철 1호선>은 중국 공연을 성공리에 마쳤다. 중국 공연을 준비하느라 노심초사하는 김민기에게 백원담 교수는 "어떻게든 되겠지요."라고 그를 위로하기 위한 말을 했는데 그 말을 들은 김민기는 몹시 화를 내며 "세상에 그렇게 되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이제 청년 김민기는 더 이상 청년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존경할 만한 기성세대를 물을 때, 이런 사람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하나의 훌륭한 전범으로서 ‘김민기’란 어른을 가질 수 있었다. 김민기는 자본주의 사회 하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얼굴 없는 생산과 소비라는 상품 교환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규명해가는 작업을 <지하철 1호선>을 비롯해 여러 작업들을 통해 해나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뒷것’을 자처했다. 
사르트르가 죽었을 때 누군가 그랬단다. “이제 프랑스도 조금 외롭겠다고”고. 우리에게 1970년대의 김민기가 없었다면, 그 시기의 대중문화는 우리 문화사에서 단 한 줄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아무 것도 없던 시대라고. 솔직히 나의 세대가 김민기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세대는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침이슬>에서 시작되어 다른 노래들로 건너갔듯이 한동안 그의 모호한 태도(이 말은 순전히 상대적인 개념의 말이다. 김민기 자신이 특별히 어떤 입장을 밝힌 적은 없기 때문에.)로 인해 그를 용도 폐기하는 분위기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화는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김민기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김광석도, 안치환도, 노래를 찾는 사람들도, 꽃다지도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대중음악사에서 김민기란 한 인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몹시 쓸쓸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21세기에도 김민기라는 한 개인에게 여전히 빚지고 있는 것이다. 뒷것, 김민기는 우리 시대 문화예술의 거대한 배후(背後)이자 든든한 그늘이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 그를 잘 알 수 없었던 세대라는 편리한 이유로 이 글은 오래 전에 읽었던 김창남 선생님의 책에서 많은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으며,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에 수록된 글을 일부 고쳐서 다시 올린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이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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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죽음을 마주하는 것은 풍랑에 흽쓸려 간 해녀가 이어도에서 돌아왔을 때 마주한 풍경 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김민기 선생님의 부고가 왔다. 전설의 섬 이어도에서의 행복했던 몇 달은 세상의 백 년. 오래 전에 본 티비 단막극 '이어도' 편은 누군가 떠난 세상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했다. 그때 나는 열네 살이었을 것이고, 내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세상을 상상했을 것이고,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슬픔과 쓸쓸함에 어쩔 줄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 나보다 오래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늦봄엔 학전 앞을 서성였고,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가수의 노래처럼, 지금은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집 잃은 꽃사슴 한 마리가 물을 마시고 살며시 잠들었다 돌아가는 깊은 산 속 어느 작은 마을'에 관한 소설을 쓰며 선생의 회복을 기다렸다. 가슴이 쓰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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