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1

오늘은 ‘미래의 어제’ ::박유하 2024

오늘은 ‘미래의 어제’ :: 문화일보 munhwa.com



오늘은 ‘미래의 어제’
입력 2024-07-19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슬램덩크의 日 소도시 가마쿠라
바다와 산 어우러진 푸근한 공간

불필요한 욕망서 자유로운 모습
작고 오래된 집에서 우리보다 행복

이웃과 세상에 관심 더 가질 때
우리는 좀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봄부터 일본의 소도시 가마쿠라(鎌倉)에서 잠시 지내고 있다.

한국에서는 만화 ‘슬램덩크’의 성지로 더 알려져 있는 듯하지만, 가마쿠라는 12세기 말부터 14세기 초까지 이어진, 일본 역사 최초의 무사정권 시대 수도다. 도쿄 중심부에서 한 시간이면 가는데, 수도라고는 하지만 중심부만 본다면 끝에서 끝까지 걸어도 한 시간이면 웬만한 곳은 다 갈 수 있는, 아주 작은 공간이다. 그 중심부를 동서 양쪽으로 나지막한 산들이 둘러싸고 있고 산줄기에서 흐르는 샛강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바다로 이어지는 공간. 바다와 산이 함께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 산들이 나지막해서 푸근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에도시대를 근세로 구분 짓는 일본에서 ‘중세’라고 불리는 가마쿠라는, 지진이며 해일 등 자연재해가 많았고, 그래서일 터인데 여기저기 사찰이 점점이 박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역사며 종교 관련만으로도 수많은 스토리를 가진 곳이지만, 가마쿠라에서 지내면서 눈길이 더 많이 갔던 건 오늘을 살아가는 주민들의 모습이다.

바다로 이어지는 골목 안 바람을 가득 품어 신선한 공기 속에서 매일 아침 집 앞길을 꼼꼼히 쓸어내던 노인들, 산책하다 만난 강아지들을 서로에게 인사시키던 중년 여성들, 백발 휘날리며 손주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학교에 데려다주던 할아버지, 붉은 서핑 보드를 자전거 옆구리에 싣고 달리던 젊은 여성, 우람한 개에게 작은 모자를 씌워 산책 나온 강건해 보이는 팔을 가졌던 남성, 티코만큼 작은 자동차가 대부분이지만 빨갛고 노란, 때론 서핑 보드를 매달고 있어 언제든 바다로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던 자동차들.

오래된 사찰과 최신 모델 자동차가 사이좋게 공존하는 가마쿠라 풍경이 특별해 보였던 건, 우선은 가마쿠라만의 특별한 풍광과 공기 때문이었겠지만 그 이상으로, 시간이 한껏 느리게 흐르는 공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살기 좋은 곳으로 전국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고, 정년 퇴임하면 이곳으로 이주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던 순간들이기도 했다.

어떤 절은 경내가 동네 지름길처럼 되어 있어 뒷문에서 앞문으로 가로지르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들은 평지에 지어진 절 문 앞에 멈춰 서서 잠시 합장을 했다. 감사를 표한다는 건, 그/그녀 안의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증거가 아닐까. 또 그건, 신사(神社)에서의 ‘기도’처럼 가벼운, 그러나 오늘에 대한 감사와 함께 누군가를 위해 비는 일이 일상화한 이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이기도 했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품은 사람들만큼, 집들도 오래되었고 여전히 나지막했고 동네는 고요했다. 그런데도 낭독이며 타히티댄스 모임이며 가마쿠라를 걷는 모임까지, 서로에게 손가락질 아니라 손짓하는, 금방이라도 목소리가 들릴 듯한 다양한 커뮤니티 전단지가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어항에서 열린 축제 때는 흥겨운 멜로디에 맞춰 남녀노소가 화려한 꽃무늬 옷을 입고 맨발로 서서, 만면에 미소를 띠고 하와이안 댄스를 즐기고 있었는데, 그 충만해 보이던 모습은 분명 불필요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사실 그런 모습은 굳이 일본까지 오지 않아도 해마다 발표되는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에게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긴 하다. 수상자들의 맑은 얼굴은 그들의 관심이 그저 연구에만 있을 뿐 재산을 늘리는 등의 다른 욕망에는 미처 내어 줄 시간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곤 했다. 그런 그들의 맑은 얼굴에서 나는 오늘 아닌 내일, 개인을 넘어선 사회 전체의 행복에 대한 꿈을 보곤 했다. 혼자 부유한 삶보다 모두가 함께 더 쾌적하고 편안한 미래를 꿈꾸는 삶. 자기 관심사가 재미있어 타인에게 분노하거나 성급할 필요가 없는 사회. 아직은 이웃과 인간에 대한 기대와 꿈이 남은 사회.

일본 역시 저출산 현상으로 고민 중이라지만, 그럼에도 일본의 출생아 수는 2023년에 우리보다 약 세 배 더 많았다. 그건 일본이 우리보다 더 미래에 대한 꿈을 꾸고 있는 사회임을 증빙하는 것으로 내겐 보인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6배 이상이니 우리보다 6배 더, 인간과 미래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해야 할까. 우리 사회가 어느샌가 아이를 포함한 타자와의 관계를 손익 관계로 간주하며 출산도 결혼도 연애도 하지 않게 된 것과는 달리.

일본이 경제동물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건 이미 40여 년 전이고, 지금의 일본은 돈에 대한 욕망이 적은 사회다. 최근 일본에서 20만 부 베스트셀러가 된 어떤 책은, 돈이라는 것이 개인을 넘어 공동체를 위한 것이 될 때 최대 가치를 갖게 된다는 사실을, 중 2학생도 알 수 있도록 풀어쓴 책이었다.

개인적 욕망을 넘어 타자와 세상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질 때 우리는 좀 더 행복해 질 수 있지 않을까. 번쩍이는 새집 아닌 작고 오래된 집에 살면서도 우리보다 훨씬 편안해 보이는 이들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한 20년 질주해 (어느 정도) 부유해졌으니 이제라도 멈춰 서서, 서로에게 편안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두 함께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더 늦기 전에 성장 대신 성숙을 고민했으면 싶다. 오늘이 편안한 이유가 누군가가 노력한 어제가 있기 때문이라면, 오늘을 사는 우리 역시 그런 ‘미래의 어제’를 만들어 두어야 할 테니까. 책임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무엇보다, 욕망에 잠식되지 않아 느리게 흐르는 시간은, 우선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해 주니까. 그 시간이 만드는 미소와 감사와 배려로.



박유하 세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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