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거문도 간첩침투사건 피해 가족의 인생, 사랑 그리고 재심 ㅣ
KBS 다큐 인사이트 - 간첩과 섬소녀 220929 방송
KBS 다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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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00 views Premiered Sep 30, 2022 #간첩 #섬소녀
KBS 다큐 인사이트 (목요일 밤 10시 KBS 1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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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과 섬소녀'
1976년 9월 거문도 간첩 침투 사건으로 한 집안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남파 간첩은 거문도의 삼촌 집을 찾은 직후 사살되었다.
남파 간첩의 방문을 받아들였던 삼촌 일가족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고문을 받았고 감옥에 갔고 세상에서 지워졌다.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막내딸 김영희는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유영수를 만났다.
정체성을 찾기 위해 모국 유학을 선택한 유영수 역시 간첩죄로 복역 중이었다.
본인 때문에 동생과 친구들마저 구속되었기에 유영수는 수감 기간 내내 후회하고 자책했다.
긴 수감생활이 끝난 후 유영수는 김영희를 찾아가 청혼했다.
아버지의 나라에서 같은 분단의 고통을 겪은 여인을 행복하게 하는 것.
그것이 그의 사명이었다.
두 사람은 오사카에서 한식당을 열어 아들과 딸을 키웠다.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 재심 변호를 위해 일본을 찾은 변호사들에게 유영수는 본인의 사건보다 처가의 재심을 간곡히 부탁했다.반세기 만에 거문도 사건이 다시 법정에 섰다.
재판의 전개와 함께 거문도 사건이 만들었던 세상에서 가장 슬픈 가족과 역시 거문도 사건으로 꽃피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기록한다.
“2022년 9월 1일 김영희 가족의 재심 선고 공판에서 전원 무죄 선고를 받았다. 재판부는 국가의 폭력에 눈감은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 김영희 가족에게 사죄했다. 그날 누구보다도 많은 눈물을 흘린 사람은 남편 유영수였다"
- 이호경PD
#간첩 #섬소녀 #거문도간첩침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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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
재일교포 3세 유학생 유영수는 아이덴티티를 찾으러 한국에 유학갔는데,
한국의 대학에서는 매일 반정부 대모를 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어떤 형태로인가 기여하려고 하며,
우연히 소개받은 어느 학교 교장에게 자기 생각을 써놓은 편지를 보여주는데,
그 생각에는 세 가지 점이 있었다고 한다.
1] 군사 독재 정권 반대
2]김일성 주석에 대한 칭찬
3] 남북의 민족적인 양심인 사람들을 손을 모아서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 이 편지를 보여주자 당장 검거되었다고 한다.
1970년대 힌국에서 김일성 칭찬을하면 않된다는 정도도 몰랐다는 것이다.
한국도 일본 같은 나라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사실 1970년대에 아버지를 만나러 북조선에 다녀온 나의 어머니 일선님도 카나다에서 해외의 양심세력들이 힘을 합처 한반도에 남쪽 체제보다 북쪽 체제 중심으로 통일을 가저오게 하여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운동에 참가했으나, 한국에서는 그런 말을 하면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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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음악]
지금부터 전 북괴 노동당 중앙당 연락부
정치공작원 김용규 씨의 자수사실을 발표해 드리겠습니다
76년 9월 중앙당으로부터 전남 거문도에 침투하여 고정관측 활동을 하고 있는 김영희를
해독 월북할 것과 818 사태 이유의 남한정세에 관한
정보 수집을 해오라는 임무를 받고 공작선을 타고 해상으로 남아
76년 9월 19일 22시 30분 거문도에 침투하게 되자 이번
기회 자수 기순 하기로 결심하고 같이 침투하였던 동료 간첩 이명에게
함께 자수할 것을 간곡히 권유하였으나 그들이 불응 한가하므로
부득이 이들 이명을 사살하고 9월 20일 새벽 3시 인근
삼산지서에 자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음악]
[박수]
[음악]
[음악]
반죽
원해 강대리 오진산이
없어 [음악]
한국 갔다 와서 한국 음식보다도 우리 집이 맛있다고 그래
이거는 죄송합니다
[박수]
[음악]
이것 좀 먼저 밑에 내려 버렸네 자마다
그냥 저는 제 입맛으로 만들어요
원래 제가 잘할 때 우리 엄마가 쫓겨 조금 저기
달게 드신 편이었어요 그래서 제 입맛에 맞춰서 하는데 일본
사람들이 다 맛있다고 해요
오빠가 비밀리에 찾아왔답니다 집에 세 명이
한 사람이 두리를 총으로 죽이고 사전 오빠도 죽이고
자수했다고 그래서 거문도가 비상이 걸려 가지고 가족이 다 잡혔다고
[음악]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내가 이번에 김 선생을 거문도에 낙화시킨 목적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전라남도 여천군 거문도에 이미 포섭된
고척 김재민을 통해서 그의 딸 김영일을 대동 입국시키는 동시에 대한
정보를
입세하라는 의문을 받았습니다 [박수]
저희 사촌 오빠가 혼자 온게 아니라 세 명이서 왔었어요
저희 집 왔다가 커갖고 한 10분쯤 있으니까 총소리가 났었거든요 그래서 이제
엄마가
이제 우리
왜 자꾸 이제 우리 다 죽었나 보다
옆에서 아빠 아버지 비명소리라든지 불길하지 소리라든지
그런게 너무 고통스러웠던 것 같아 교도소 가기 전에
서울구치소에서 재판부 들어왔다 갔다 하잖아요
면회가 없는데 왜 혼자 그때는 독방에 있었으니까 그
악방들에서 긴급조치로 들어온 학생
들이라든지 먹으라고 주잖아요 주면 못
먹고 이제 다 모아놨다가 나가는 남자다 엄마 줘야지 아버지
[음악]
침투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3인조 간첩 단 이들은 거문도에 고정관측을 보습해
놓고 정보를 입수해 오던 중 고정 간첩 김재민의 딸 김영일은 대동
입국하라는 임무를 띠고 난타 됐다
그건 지시한 공적 사명은 더했겠죠 서울 주민등록증 도장과 전남 여수고
두 장입니다 김영희는
서울 부산 등기에서 주민등록증을 절취해 난파 간첩들의
신분가장을 합법화 시켰다 영의 동문은 서울에 다녀왔어
그리고 김정은을 서울 제일한강교 밑으로 유인했어 만났습니다
선생님 형님이 이북에 계시즘 아니 그걸
놀라지 마세요 형님이 편지를 보낸다면 받으시겠어요 아니
당신 아니 그저 김 선생님의 의사를 물어봤을 뿐이에요
[음악] 그리고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도 마시오
[음악]
라면 라면이 제일 많이 나가고요 보편적으로 그리고
보통 일본 라면집 가면은 돼지고기 육수를 돼지 뼈에서 많이
내거든요 저는 저희는 그냥 한국식으로 저기
한국식인지 뭔지 모르는데 아무튼 저희 어렸을 때부터 한국에는 그 소고기
뼈로 육수내는 거잖아 [음악]
6남매 좀 막내로 뛰어났는데요 [음악]
임신 가왕 매직큐
생각이 안 나거든요
학교에서 돌아오면 뭐 바다 가서 살에 뜯고 뭐 미역 뜯고 그때는 뭐 고등
잡고 소설인데 먹고 자랐거든요 [음악]
겨울철에 지금도 보고 막 보기도 싫어해
[음악]
저는 중학교 3학년 다니다 나왔어요
그 당시는 그 중학교에 납부금을 제때 못 내면은 운동장에
이름 다 써 붙여 놓고 막 그랬었어요 뭐 창피하니까
학교 안 간다고 그만뒀어요 중학교 3학년 때
[음악] 그래서 너무 아버지하고 이제 같이
옥수수 아니면 고구마 그런 농사를 조금씩 짓고 있었어요
여기 저기 서돌이의
[음악]
[음악]
그 집안은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가까운 받고 [음악]
분위기상 저 마을에 살 수도 없는 거야 그 친구가 내부장 했어
아 일본어 갔구나 [음악] sk하고 이거 못 들어왔어 살 수가
없으니까 근데 이제 지금 와서 사람들이 없을 텐데 그 당시에는
[음악]
[음악] 그것도 안 잊어져요
사상범이 뭐예요 하고 물었어요 간소한테 그러니까 갈 수가
막 벗으면서 아니 사상범이 뭔지도 모르는
일어나가시를 사상팔이라고 잡아 놓았다고
할아버지가 밀양읍에 사셨는데 그때
무슨 자리였다고 그래요 근데 이제 토지개혁이 있어 가지고 주인이 바뀐
바람에 일자리를 잃었대요 [음악] 그래서
정크베이 29년에 일본으로 건너와서 어사가의 전적했답니다
일산이 넘으면 울산을
[음악]
절도선에 역마다 그 본사판에서
노동한 조선 사람들의 부락이 있습니다
아버지도 절도 권사 거기에 정사 하느라고
갔다가 어머님도 그 당시 당광의 요금으로 일을 하셨어요 그래서 어떻게
해서 만나서 연못이었는데
원래 불확이라는 거는 일본에서 막 10시 당하고 사람들이잖아요 내가
태어났는데서는 조선 사람 아니면 오키나와 사람이야 그거
남아 있는가
연하게 되고 오든지
생활은 그래도 제일 10시 반 그 지방에서 살아 가지고
좋은 사람 한국 사람 일본 사람 관계없이 서로가 같은
인간으로서 그냥 아주 화목하게 산 거 같아
[웃음]
아리가또
[음악]
화이팅
[음악]
1970년 리츠메칸 대학 화학과에
들어갔는데 저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제가 조선인이라는
의식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한국말로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음악]
대학에 들어가지마자 제일 큰 간판이 뭐냐면은
군사정권 박정희 타도하라 4.19 학생혁명 영화제 안내
주최자가 조선문화연구회 그리고 한국 문화연구회
양쪽 그 석을 거기에 왔다 갔다 해서 모르는 내 뿌리를
찾아내려고 그렇게 열심히 다닌 것 같아요
떳떳하게 살지 못한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거는
한국 시점 모르는 자기 모우의 실정 모른다는 거
역사도 물론이지만 현실도 모르고 또 한국말 제대로 못하는 자기 나란
말입니다 내 말인데 그래서 유학 가게 됐죠
부산대 대학원에서는 군사독전 반대하는
모임이 거의 날마다 있었습니다
내가 일본에서 태어난 삼세로서
분열된 모국에 무엇으로 위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날마다 많이 했습니다
같이 유학간 돌녀의 친척이 마침 관저 포경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고
동료한테 들었어요
제 생각을 편지에 담아서 전해 놓는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세 가지 있는데,
한 가지는 군사 독재 정권 반대
그리고 제가 김일성 주석에 대한 칭찬을 많이 했죠. 그것이 한국에서는 안 되잖아요
그리고 남북의 민족적인 양심인 사람들을 손을 모아서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물론 복숭아 장모님도 다 보셨습니다
혼전 꺼내 가지고 저한테 이마에 이렇게 해서 혼잣말하고
그래서 그냥 끌려갔어요.
정보국에서 저한테 자꾸 물어보면서
북에 관념 일본에서 누구하고 접선 누구 출연 받고
행동했냐
그러면
기절하면 되는데 역방에 내 동생
놓고 고문하는 그 피면서
한국 사람으로서 자립하기 위해서는 꼭 우리말 할 수 있게
해야 그런 저 권유로 유학한 거죠
우리 손님들 많이 오기 시작하니까 이제
끝내자 화이팅
[음악]
너의 뭐 형이 간첩이다 너도 같이 했지 뭐 이런
식으로 뭐 데리고 전기 고문하고 우리 고문하고
형이 뭐지 10년이었는데 [음악]
6년 바람 지금도 한 번씩 이제 그때 그런 일이
없었으면 또 망사가 되고 이제 좀 직접적으로 보람이 있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전도에요
근데 [음악] 종을 그렇게 이제 원만한 거는 아니고 그 당시 전부를
[음악]
우리 사건을 이용당한 그 신문 발표 그걸 보고 제가 많이
반성했어요
이렇게 영향을 하는구나 하는 거 그거 내가 모자라
네 개인으로 그치지 않았구나
그것이 내가 어리석었죠 그 후회가 지금도 남고
특히 교도소 생활을 더해서 첫발될 때까지 저의 고민은 그거였습니다
[음악]
그래도 여기는 앉아서 한잔씩 하고 있네
당신 말이 맞았구먼 형부가 틀렸네
그러니까 형부 오늘 비 안온다고 그랬잖아
아이고 이거 뭐야 어제
화를 하고 저 언니를 누가 70 넘었다
그러겠어요 아이고 참 절씨구 좋다 내가 좋아
우리가 빨랐는데 나중에 내가 광주가 있을 적에 영희가 온 거야
하니까 언니가 지도하고 있어서지도
[웃음] [음악]
광주교도소 여사의 전설이니까 나는 그 소스도 아니고 사방에서 사방
언니하고 같이 있던 방이 87년도
87년도에 광주에 있었는데 아 여기가 인연 시기가 있던
얘기냐 민현숙이 냄새가 아직까지는
창남으로 보는 환경 동경 이게 민현숙이가 다 보성
내가 보고 있구나 하고 언니가 지도를 하고
있으니까 그때는 내가 면허 언어잖아 그래서
감복 옷 싸면 창고에 거기에 앉아서 이거 다 먹고 나오라고
통닭 한 마리하고 나를 그 참고하는 지도니까 할 수 있었지 통닭 한 마리하고 넣어줬어
그럼 내가 거기서 통닭을 얼마나 울면서
울면서
그러니까 얼마나 먹고 싶었겠어요 그러니까 그 통닭을 하나 다
울면서 뜯어 먹고 그러고 나도 그걸 죽어도 잊을 수가 없다고 형부 엄마가 와서 언니한테
예쁜 운동화를 넣어줬어 나 곤색 곤색에다가 하향도 이렇게 휘둘러주고
지금도 안 잊어버리는데 그 운동화를 언니가 안 신고 나를
챙겨줬어 그러니까 그게 내가 평생 못 잊는다고
그래가지고 같은 국가보안법이잖아요 그래서 여기는
면회 오는 사람도 없고 아무도 없었으니까
친동생이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챙겼죠 내가 어렵고 어렵고 그때는 뭐
19세가 19살인가 20살
아버지는 무기 어머니는 10년
김현식은 3년 6개월인가 받고 완전히 있을 때
저하고 알게 됩니다 [음악]
그 사상범 전치범 전부 다 전형권자에게 일환으로 남자
여자 다 모이게 해서 차를 마시면서 간담회 해요 그래서 김효인 씨가 왜
들어왔나에 대한 관심이 있었어요 [음악]
80년 그 광주사태 있던 해에 나왔어요
8월 특사로 기쁜 마음보다
어디로 가야 되지 집에 없어졌잖아요
결혼 같은 거는 내가 뭐 생각할 수도 없고 꿈꿀 수도 없고
열심히 일하면서 보람을 느낀게 이제 엄마 아버지 있던 엄마 아버지 면회
다니는 거
지 도
아줌마가 아저씨가 오늘도 와다시오리 연행구라야
나사를 나한테는
[음악]
결혼식 앞에서 이제 그 선약 하잖아요 근데 유영수 씨가 갑자기 주머니에서
무슨 편지를 하나 내더니 편지를 읽는 거예요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한테
영이는 자기가 책임지고 데려간다고
현대탄을 옛날 일제시대 때 그 강제로 끌려가는
끌려서 현했던 건너가는게 아니라 지금 이제 행복을 안고 이제 자기가
데려갈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편안하게 이제
잠드시라고
요 [음악]
[음악] 같은 비극을
겪은 한 사람이라도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장애인이라기보다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하신 일이라고
생각해서 김영인 씨를
[음악]
난 또 도시락국
선수가다가 저한테 누가요 워낙 때
난 또 어머 때문 아깝다 문재인 대학교 어려운 자사이노
쿠타바모
원심 판결 중 피고인에 대한 부분을 파괴한다
이 사건 공소사실 중 이적
표현물 제작으로 인한 방공법 위반의 점을 제외한 나머지
점은 모두 무죄 선고하고 나서
판사가 과거에 국가의 잘못을 이제서야
이런 판결로 밖에 위로하지 못하는 점
용서해 달라고 그래도이 판결만으로라도
조금이나 위로 받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그래서
첫발은 끝났거든 판사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재판장으로서 저한테 그 말 들어주게 하려고
그래서 끝나고 나와 너무 좋아가지고 나는
막 그러한 판사님의 그 말 때문에 모든 것이
날라가 버린 거야 최재형
판사한테는 감동이냐
[음악]
유영수 씨가 변호사님들만 만나면 붙들고 저보다도
뭐 아픈 이야기라고 미쳐갔던 이야기는 진짜
분단이 아픔이 덩어리라고 오빠가 내려와서 신고하는 것 뿐인데
처갓집 억울함 풀어주는게 자기 마지막 숙제라고
이제 변호사님들이 이제
관심 갖고 준비 중에 있어요
근데 어느 날 자는데 그 엄마 아버지가 너희 창 오빠라고 해서 나
손을 끌어안고 안 치는데 그 이제 창 오빠라는 사람이 아 네가 영이구나
하면서 이제 와서 내 손을 잡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잘 지내나
돌아왔다거나 그래갖고 금방 갈 거라고 그게 처음이에요
저희 집에서 나가고 나서 좀 있다 막 총소리가 났어요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었을까 다 그대로 말하면 그냥 대답만 내내
하면은 집에 바로 보내줄 수 있다고 내가 너무 힘들어 하니까 아버지
비명소리나 막 물 끼얹는 죽고 힘들어 하니까 네가 빨리 바로 이걸
써야 내가 아버지가 편해진다고 잊고 살려고 했었고
돌아보고 싶지 않으려고 애썼고 그리고 아버지랑 그 단어만 들어도
이제 굉장히 힘든 세월을
판사들이 이렇게 밤 인륜적인 고문범죄가 있고 하면 공수하실이 거기 만들어진 거는 다 알
거예요 알고 또 그러고 당시에 다 부모님들 다 신고하려고
했어도 뭐 어떻게 신고해요
북쪽에 이제 가족들이 있는 경우에 만났다 그러면
주관적으로 떠난지 얼마 안됐어요 만약에 신고할 마음이 있었어도 이게 신고할
시간적 여유가 돼요 우선 재심 청구서에는 저희가
재심 사유 고문이나 구분 고기에 많이 초점을 맞출 거고요
큰아버지 김재율 씨가 북한에 간 것 때문에 그런 친척을 뒀다는 이유
때문에 그 정권이 뭐 그 필요에 따라서 간첩으로 만들어지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그 과정에서 국민으로 당연히 누려야
이런 거 다 무시당하고 그런게 너무 좀
안타깝고 이렇게 일가족들이
분단의 비극에서 희생당한 사건 그래서 알고 보면 이산가족의 일회성
접촉으로 볼 수 있는 그런 부분들이 자수 간첩에 의해서 아주 부풀려진
사건으로 이렇게 보고 지금 재심에서 열심히 지금 무죄를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음악]
[음악]
우리 우리만 안돼 우리는 왜 안 태워 있으니까
[음악]
[음악] 안녕하세요
[음악]
간첩 집안으로 낙인이 찍혀 있잖아요 제가 재심을 크게 결심하게 된 거는 아이들
생각하는 거하고 [음악] 저희 엄마 아버지 생각하면은
얼마나 자식들한테 미안할까 [음악]
엄마 아버지 당신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얼마나 자식들한테 미안해 미안해
했었고 지금도 미안해 할까
[음악]
엄마 아버지한테 이제 간첩이랑 그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고 그런 마음 [음악] 우리가
[음악]
위에 행복한 건지
가세요 [음악]
[음악]
아저씨와
[음악]
[음악] 저기 눈물이 많아요 제가 잘 울어요
근데 내가 유영수씨를 만나서 살면서 눈물을 잃어버리고 살았어요
결혼식 앞에서 이제 저희 아버지한테 이야기했듯이 태어난 것이 잘해주고 행복했던 거죠
진짜 아무것도 무식하고 배울 것도 없고
그래 내가 곁에 가서 진짜 많은 사람들한테 사랑을 받고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고 저 뉴욕 스시 만난 걸로
충분히 보상 받은 거는 마찬가지라고
[음악]
아빠 떨려 좀
떨려 재판장님 저 김영희는 일본 땅에서
호국을 그리워하며 밤편성을 넘게 살면서 7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하루 빨리 간첩이란 오명을 벗고 남은 유생을 살고 싶은게
작은 소망입니다 배운 거 없고 무지해서 지금이
자리에서 있는 저희 형제들에게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십시오 존경하는 재판장님 부디 지하에 계신
저희 부모님께서 이제는 편안하게 잠드실 수 있도록
성취해 주시기를 간곡히 호소합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 주십시오
[음악]
[음악]
잘했어 잘했어 많았어 그래서 [음악]
[웃음] 끝까지 잘 싸워서
고맙고 잘했어 [음악]
[음악]
형제들이 다 고생을 하 셨어요 재판부가 어쨌든 소외로서 사제를
얘기를 했어요
[음악]
우리 아버지 바나나를 좋아하시고 아버지 엄마
어제 저희 무죄 받았어요 [음악]
이제 자식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 다 내려놓으시고
편안하게 잠드세요
[음악]
흘러내리고 [음악]
몰살 자유로
이 너무나 [음악] 도
내고향 남쪽 다
가고파도 못 가니 [음악]
임 신한 흐르는 와 [음악]
원한 시고 흐르느냐
[음악]
Show chat rep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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