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23

빅토르 초이 - 나무위키 Viktor Ts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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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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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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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초이
Виктор Цой | Viktor Tsoi
ВИКТОРЦОЙ
본명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
(Ви́ктор Ро́бертович Цой)[1]
출생
사망
1990년 8월 15일 (향년 28세)
장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보고슬로프 공동묘지
국적
직업
본관
서명
빅토르 초이 서명










1. 개요2. 이름 표기3. 생애
3.1. 유년기와 가계3.2. 음악 활동3.3사망3.4. 사생활
4디스코그래피5. 필모그래피6. 음악성
6.1. 음악 성향6.2. 사후의 평가
7. 빅토르 초이에 대한 오해
7.1. 크즐오르다 출생?7.2. 반체제적 가수?7.3. 한국과의 관계
8. 여담
8.1. 위작 음악 문제8.2. 불운의 러시아 록음악 단명사
9. 대중매체에서10. 둘러보기

1. 개요[편집]

Цой жив
초이는 살아 있다[7]
1980년대 소련에서 전성기를 누린 록밴드 키노의 리더이자 보컬프론트맨. 오늘날에도 구 소련 지역인 러시아와 동구권 등지에서 많이 불리는 여러 명곡들을 남겼다.

2. 이름 표기[편집]

본명은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Виктор Робертович Цой)'. 초이(Цой)가 성씨 를 옮긴 것이기에 '빅토르 최'라고도 불린다.

일반적으로 한국어의 ㅊ은 러시아어로 Ч로 전사하지만[8], Ц로 옮겨진 것은 고려인 대부분이 함경북도 특히 육진 지역 출신이 다수인 것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언어학적으로 표준어의 ㅊ과 러시아어 Ч는 치경구개음인 데 반해 육진 방언의 ㅊ과 러시아어 Ц는 치경음이다. 그러므로 육진 방언의 ㅊ은 Ч보다는 Ц에 더 가깝다. 로마자로는 보통 Viktor Tsoi/Tsoy 정도로 적는다.

빅토르 '최'라고 쓰는 경우가 많지만, 생전 그의 정체성이 혼혈 러시아인이었다는 것을 고려하였을 때 공식 표기로서는 러시아어 표기를 따른 '초이'가 더 적합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3. 생애[편집]

3.1. 유년기와 가계[편집]

1962년 6월 21일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종종 카자흐 SSR의 크즐오르다 출생이라는 내용이 인터넷에서 보이는데, 후술되어있듯 이는 오해로 크즐오르다는 빅토르 초이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로베르트 초이의 출생지이다.[9][10]

아버지는 엔지니어로 일하던 고려인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초이(한국어 이름 최동열)였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체육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러시아 SFSR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발렌티나 바실리예브나 구세바였다. 즉, 한국계 아버지-러시아계 어머니 혼혈이다. 그중에서도 빅토르 초이의 외모는 대체적으로 고려인 아버지쪽으로 향해 동아시아인 티가 많이 난다.[11] 다만 전체적인 외모는 동양인이지만, 자세히 보면 눈동자 색깔이 초록빛도 섞여 혼혈 느낌을 준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에 비해 동서양 혼혈 비율이 낮은 기타 서양인과 동양인에겐 다소 이국적인 느낌도 준다. 다만 러시아는 구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동양으로 영토를 넓히며 동양인과 혼혈이 이루어진 역사가 있기 때문에[12] 빅토르의 외모를 특이하게 보진 않는다고 한다. 그렇긴 해도 빅토르가 성장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동부가 아닌 서부이기도 하고[13], 백인 주류 사회다보니 어릴 적엔 빅토르도 때론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인종차별을 당했다고 한다. 일본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데 본인 입장에선 큰 모욕이었다고.
(Вы когда-нибудь сталкивались с тем, что к Вам как-то иначе относились из-за вашей нерусской внешности?)
В детстве. Меня дразнили "японцем" и я очень обижался. Сейчас мне в голову не придет выяснять, кто по национальности мои друзья. Есть среди них русские, украинцы, евреи, армяне... Но это не мешает нам общаться. Я думаю, вести такой учет просто глупо. Люди не делятся на хороших немцев и плохих французов.
(Рок-музыку часто обвиняют в космополитизме, в том, что она губит национальное сознание, народные начала. Поэтому, дескать, ее надо запретить, как "чуждое явление". Что Вы думаете об этом?)
Понимаете, чуждое не приживается. То есть, что здесь эта музыка многим нужна, уже не требует доказательств. Хотя кого-то она может и раздражать. Как раздражал в свое время джаз. Я его просто не слушаю, понимаю, что это не мое. Я бы очень хотел, чтобы те, кого раздражает рок-музыка, просто ее не слушали. Но запрещать?!
(В вашей песне есть слова "Мы ждем перемен". Каких же?)
Эта песня написана давно, задолго до перестройки, и обращена к внутреннему миру человека. Если хотите, ее можно расценивать, как призыв к поступку. Какому поступку - каждый решит для себя сам.

(어린 시절 비(非)러시아계 외모로 인해 다른 대우를 받은 적 있나요?)
어린 시절에 그랬죠. 다들 저를 "일본인"이라 불렀고 이는 저에게 매우 큰 모욕이었습니다. 이제 전 제 친구들이 어떤 국적인지 굳이 알아보려 애쓰는 일이 없습니다. 그 중에는 러시아인도, 우크라이나인도, 유대인도, 미국인도 있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과 거리를 두는 건 참 바보같은 일입니다. 사람들이 "좋은 독일인, 나쁜 프랑스인" 이런 식으로 갈라져 있는 게 아닌데 말이죠.
(락 음악은 종종 세계적이라는 이유로, 국가의 정체성과 원칙을 해친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외국의 현상"은 금지되어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죠.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보시다시피, 외국적인 것은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즉, 이 음악이 여기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은 더 이상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짜증을 유발할 수도 있지요. 과거 재즈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죠. 저는 그냥 재즈를 듣지 않습니다. 제 취향이 아니니까요. 락 음악이 거슬리는 사람들은 그냥 듣지 않으면 됩니다. 하지만 금지라니?!
(당신 노래 중에서 "우리들은 변화를 기다린다"라는 가사가 있던데, 그 변화란 무엇인가요?)
이 노래는 페레스트로이카보다도 훨씬 이전, 아주 오래 전에 쓰인 노래로 인간의 내면 세계를 향한 노래입니다. 원하신다면 이를 어떤 행동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 행동이 어떤 행동이 될지는 각자 스스로 결정할 문제입니다.[14]
그 외 빅토르는 키도 187cm로 장신이었으며, 평균키가 지금보다 작던 당대 기준으로는 이런 점이 더 두드러졌다.

아버지의 본관은 원주 최씨로, 가계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함경북도 성진시 출신 증조할아버지 최용남(1883~1947)씨가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서 살다가 같은 고려인 여성이었던 안나 바실리예브나 유가이(1896~1985)와 결혼한다.[15] 증조할아버지 부부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빅토르의 할아버지인 막심 페트로비치 초이(한국명 최승준, 1914~1985)를 낳는다. 할아버지인 막심은 이후 KGB에서 근무하며 소령까지 지낸 인물이다. 막심은 빅토르가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 동양 철학을 가르쳐주었고 이는 빅토르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 자신도 를 잘 쓰는 등 예술적 재능을 보였다. 당시 소련 공무원들은 공식적으로 예술 활동을 할 수 없었는데, '최민'이라는 가명까지 지어가며[16] 한글시를 쓰기도 했다.

하여튼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하는데, 이때 증조할아버지 식구들은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로 끌려간다. 카자흐 SSR에서 할아버지 막심 페트로비치 초이는 나데즈다 킴(한국명 김혜정, 1917~2001)과 결혼해 빅토르의 아버지인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초이(한국명 최동열, 1938~)를 낳는다.

외가 쪽 가계를 따라가면 외증조부였던 필리몬 구세프(1880~1939)는 오늘날 벨라루스 동북부의 비텝스크 출신으로 러시아군에 복무했다가 러일전쟁에 참전했고 그 공로로 훈장을 받은 바 있다고 한다. 이후 빅토르의 외할아버지 바실리 구세프(1910~1974)는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해 '젊은 돌격대'라는 공장에서 대장장이로 일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초이는 그림 그리기와 조각 같은 미술 활동에 재능을 보였고[17]미하일 불가코프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등의 거장들이 쓴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이때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를 따라 3번이나 전학을 가야 했다.

1974년, 초이의 부모는 초이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 초이를 미술학교에 입학시켰고, 초이는 3년 동안 미술을 배웠다. 당시 초이를 가르치던 미술 교사는 초이에 대해 '능력은 뛰어나나 반복적이고 힘든 일을 싫어한다'고 평했다.

5학년 때부터 초이는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부모님으로부터 기타를 선물받기도 했다. 이후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던 록 음악을 비롯한 서구식 대중음악에도 푹 빠진 상태가 되었다.[18] 특히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미하일 보야르스키, 비틀즈와 존 레논이소룡과 같은 인물들에게 푹 빠져있었다고 한다.

8학년이 되던 1978년, 레닌그라드의 유명 예술교육기관인 세로프 예술학교(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문화예술대학) 디자인과로 입학해 1년간 공부했으나, 금세 흥미를 잃었고 18세 때인 1979년, 성적 부진을 이유로 퇴학당했다.[19] 퇴학을 당한 이후 빅토르 초이는 어머니의 추천에 따라 공장에서 프레스공으로 일했으며, 가을에는 모스크바 제147야간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야간 학교를 졸업한 후 초이는 레닌그라드 기술전문학교에 입학해 목공 일을 약 2년간 배웠다.

3.2. 음악 활동[편집]

퇴학 당한 빅토르 초이는 화부로[20] 일하며 레닌그라드의 여러 록밴드에서 연주를 맡거나 자작곡을 발표하면서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참고로 초이가 소련 록계에 처음 발을 들일 때만 해도 소련에서 록 음악은 배척받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덕분에 많은 록밴드들이 언더그라운드에 머물러 있었다.[21] 그렇다고 아예 탄압하는 정도까진 아니었는지, 이미 1960년대부터 소련엔 일부 록밴드들이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 중이었고, 1968년에는 모스크바 재즈 페스티벌이, 1986년 5월 콤소몰 주최로 록 파노라마 '86(Рок-Панорама 86) 및 록 파노라마 '87이 공식 행사로 개최되는 등 생각보단 자유로웠다고 한다.[22] 그러다 1980년대 중후반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 시절엔 이런 배척적인 분위기가 많이 완화되었고, 언더그라운드에 머물러 있던 밴드들이 오버그라운드로 많이 나올 수 있었고 초이도 사실 그 수혜자 중 한명이었다.

하여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1981년 초이는 당시 러시아 록 음악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던 아크바리움(Аквариум) 리더 보리스 그레벤시코프(Борис Гребенщиков)의 눈에 띄게 된다. 아크바리움은 1970년대 결성한 러시아 록 밴드로, 벨벳 언더그라운드같은 개러지 록과 캣 스티븐스같은 포크 록에 영감을 받아 시대를 앞서간 음악을 들려줘 인기를 끌었다. 마시나 브레메니(Машина Времени)와 비슷하게 러시아 록 개척자로 꼽히지만, 레닌그라드 투소프카 내 영향력은 아크바리움 쪽이 압도적이었다. 마시나 브레메니는 인기는 있었지만 다소 이질적인 선구자 포지션이었다.

아크바리움의 리더 보리 그레벤시코프는 우연히 어느 파티 석상에서 빅토르 초이의 연주를 듣게 되었고, 즉시 빅토르의 재능을 인정해 당시 레닌그라드의 유일한 합법  공연장이었던 '레닌그라드 록 클럽'(Ленинград Рок-Клуб)에서 공식 데뷔 무대를 마련해 주었다. 이후에도 그레벤시코프는 키노의 세션 연주나 프로듀싱에 참여하며 적극적으로 도와줬다. 1집 '45'나 2집 '캄차카의 지배인'은 아크바리움 멤버들이 없었다면 녹음을 하지 못했을 것이고, 3~4집에서 인상적인 연주를 보여준 베이시스트 알렉산드르 티토프도 원래 아크바리움 소속이었다.

또 빅토르는 당시 인기 밴드였던 '조파르크/주파르크(Зоопарк)의 리더이자 한때 아크바리움의 멤버이기도 했던 미하일 '마이크' 나우멘코(Михаил 'Майк' Науменко)하고도 친하게 지낸다.[23] 이들의 이야기는 훗날 2018년 영화 레토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자신의 메시지를 중간중간 담았기에 고증 100% 전기영화는 아니지만 작품성은 있는 편. 참고로 빅토르가 1990년 교통사고로 요절한 뒤 마이크도 1991년 사망했는데, 두 사람을 1년 간격으로 잃은 그레벤시코프는 한동안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데뷔 공연의 성공으로 빅토르는 알렉세이 리빈(Алексей Рыбин, 기타), 올레크 발린스키(Олег Валинский, 드럼)와 함께 독자적인 밴드를 결성하게 되었고, 밴드 이름은 영화를 즐겨 보던 빅토르의 취향으로 러시아어로 영화인 '키노(Кино)'라고 정해졌다. 이듬해인 1982년에는 공식 데뷰 앨범인 '45'를 발표한다.

물론 당시 소련에서는 모든 음반 산업을 국가가 통제했기 때문에 사실상 해적판(...)의 형태로 유통되었다. 1980년대 소련에서는 국영 음반사(멜로디야)에서 녹음하지 않은 앨범들의 상업적 판매가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멜로디야를 통해 유통되지 않은 빅토르, 마이크, 보리스 등의 앨범은 유명세와 상관없이 전부 언더그라운드 음악이었으며 이들의 레코딩은 당시 기준으로도 질이 썩 좋진 않았다.[24]

이 앨범의 수록곡 중 '엘렉트리치카(Электричка)[25]'가 개인의 삶을 보장하지 않는 전체주의 체제의 부조리를 짧고 우회적으로 비판한 가사로 큰 인기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와전된 것으로 알렉세이 리빈의 증언에 따르면 가사는 그냥 출근하기 싫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사실 초기 키노는 딱히 철학적 얘기보단 일상적 얘기를 하는 그룹에 가까웠다. 가사는 자신은 어젯밤 늦게 잠들어 간신히 일어났으며, 의사에게 가야 할 것 같지만 통근 기차가 자신을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는 내용이다. 당시 초이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정신병자 행세를 하며 정신병원에 자주 들락거렸는데, 이 당시 경험이 투영된 곡이라고 한다.
Я вчера слишком поздно лег, сегодня рано встал,
난 어제 너무 늦게 누웠고, 오늘 일찍 일어나야 했어
Я вчера слишком поздно лег, я почти не спал.
난 어제 너무 늦게 누웠고, 난 거의 잠을 못 잤지
Мне, наверно, с утра нужно было пойти к врачу,
난 아마 아침부터 의사한테 갔어야 했어
А теперь электричка везет меня туда, куда я не хочу.
허나 지금 통근전철이 내가 원치 않는 데로 나를 데려가
(간주)
Электричка везет меня туда, куда я не хочу.
통근전철이 내가 원치 않는 데로 나를 데려가(2번 반복)
(간주)
В тамбуре холодно, и в то же время как-то тепло,
연결통로는 쌀쌀하면서도 뭔가 따뜻해
В тамбуре накурено, и в то же время как-то свежо.
연결통로는 담배 연기 자욱하면서도 뭔가 상쾌해
Почему я молчу, почему не кричу? Молчу.
​어째서 난 침묵할까, 어째서 부르짖지 않을까, 그저 침묵...
(간주)
Электричка везет меня туда, куда я не хочу (3 раза).
통근전철이 내가 원치 않는 데로 나를 데려가
이 앨범은 매우 빠른 속도로 팔려나가 소련 젊은이들에게 파급되었고, 레닌그라드 록 클럽에서 열린 콘서트에서는 '나는 나의 집을 선언한다...(비핵화 지대로) (Я объявляю свой дом...(безъядерной зоной))'라는 한층 노골적인 반전/반핵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발표해 화제가 되었다. 이 곡은 1985년 출반된 세 번째 스튜디오 앨범 '이건 사랑이 아냐...'에서 공식 출반되었으나, (비핵화 지대로)라는 중요한 괄호 제목은 삭제되고 그냥 '나는 나의 집을 선언한다'로 나오는데 가사엔 그대로 나온다.[26]

1984년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캄차카의 지배인'이 발매된다. 캄차카(Камчатка)는 당시 속어로 '머나먼 곳', '보일러공'을 일컫는 단어였는데, 빅토르 초이가 보일러공으로 생계를 유지한 데서 착안한 자조적인 타이틀이다.[27] 이 외 1967년 소련 코미디 '추코트카의 지배인'에서 제목을 가져온 것이기도 한데, 추코트카나 캄차카 지방이나 둘 다 소련의 변방에 위치한 반도 지역이다. 당시 초이가 일하던 곳은 현재 '캄차카 하우스'라는 이름의 술집이 되어 있는데 관련 굿즈도 전시되어 있고 매일 공연이 이루어진다.

이 '캄차카의 지배인' 앨범에서는 이후 라이브와 후속 앨범들에서도 자주 재편곡되어 등장하는 대표작 '마지막 영웅(Последний герой)'이 인기를 얻었고(1번 트랙), 색소폰이나 첼로키보드 등의 세션 악기를 적절히 가미해 밴드의 소리 영역을 확장시켰다.

각각 1985년과 1986년 발매된 후속 앨범들인 3집 '이건 사랑이 아냐(Это не любовь)'와 4집 '밤(Ночь)'도 큰 인기를 얻었지만, '키노'하면 떠오르는 최고의 대표작은 1988년 발표된 다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혈액형(Группа крови)이었다. 원래 이 앨범은 소련 내에서 발매할 계획이 없었고 미국에서만 발매할 예정이었다. 당시 소련 락 가수들은 미국 진출을 꿈꾸고 있었으나 서방의 무관심 및 언어적 장벽 등으로 인해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런데 키노 초기 시절부터 같이 협업해 오던 가수이자 엔지니어 비시냐는 "이 좋은 앨범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며 이를 소련에 발매했고, 이 때문에 초이와 비시냐 사이는 틀어지게 된다.

"혈액형"은 반전가요라는 것이 사실상 정설이지만, 초이 본인이 이에 대해 직접적인 의견을 밝힌 적은 없다. 또 다른 유명곡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의 경우, 초이가 여러 인터뷰를 통해 이 노래는 페레스트로이카나 정치적 변화와 무관한 노래라고 선을 그은 바 있다. 개인의 변화를 그린 곡이라는 것.[28] 물론 당시 시대상 아무리 점진적 자유화 조치가 내려지고 있다곤 하지만 일당독재 체제였던 것은 변함이 없는지라 초이가 당국에 끌려갈 거 각오한 거 아닌 딴에야 속내를 온전히 말할 수도 없는 환경이라 현재도 이는 팬들 사이의 논쟁 대상이다. 조금 마이너하게는 정치적 혹은 반전 사상의 영향이 전무한 자신의 길을 나서는 전사(warrior)의 노래라는 설부터 영화 스타워즈를 보고 영감을 받았다는 설까지 온갖 주장이 존재한다. 다만 이 때문에 저작권이 완전히 무시되어 인기에도 불구하고 키노 멤버들이 손에 쥔 돈은 그야말로 극소수였다고 한다. '밤' 앨범만 해도 당시 소련의 유일한 국영 음반사 멜로디야에서 1988년 무단으로 찍어내 20만 부나 팔았지만 멤버들에게 돌아간 돈은 1코페이카도 없어 논란이 있었다.

같은 해에는 라시드 누그마노프(Рашид Нугманов; Rachid Nougmanov) 감독의 '이글라(Игла, 바늘이라는 뜻의 러시아어)'라는 영화#에도 주연으로 출연했는데, 체제와 인습에 냉소적인 반항아 스타일의 주인공 모로(Моро)를 연기해 호평을 받았다.

5집 '혈액형'에 이은 후속 앨범인 6집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에서는 더욱 묵직한 록 사운드를 선보이면서 인기몰이를 했는데, 1990년에 모스크바에 위치한 러시아 최대 경기장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대규모 단독 콘서트를 열면서 인기의 최절정을 맞이했다. 이 때 경기장에 모여든 관중들은 공식 집계로만 62,000여 명에 달했고, 심지어 모스크바 올림픽 때나 볼 수 있었던 성화까지 점화되는 등 전설급의 이벤트를 연출했다고 한다.

그러나 초이는 자신에게 들어오는 금전적 이익과는 별개로, 점차 반복적인 공연 활동에 큰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다. 몇몇 지인들과 팬들은 당시 초이가 상업적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본다.
Сегодня отыграл ещё пару концертов, и понял что больше не могу, или просто сойду с ума.

오늘 공연을 또 몇 탕 더 뛰었어, 그리곤 깨달았어. 더 이상은 할 수가 없다고, 아니면 미쳐버릴 것 같다고.[29]
inv-choi

1990년 8월 15일, 라트비아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차(모스크비치 알레코)를 타고 낚시 여행에서 돌아오다 버스(이카루스 250 빨간색 모델)와 충돌한다. 이 충돌로 빅토르 초이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차는 완전히 박살났으며, 전해지는 말로는 가슴에 핸들이 찍힌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향년 28세. 당시 아들 사샤와 같이 갈 예정이었으나, 자던 사샤가 일어나지 않아 혼자 낚시 여행을 갔기에 사샤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사족으로 초이의 죽음에 KGB가 관여되었다는 음모론도 있다. 자세한건 빅토르 초이 의문사 사건 항목 참고. 이로 인하여 이카루스 버스는 오늘날 러시아 인터넷에서 초이를 상징하는 또다른 이 되었다고 한다.[30]

어쨌든 초이가 사망한 날 모스크바 아르바트 거리(house no. 37의 벽)에는 '오늘 초이가 죽었다(Сегодня погиб Виктор Цой)'라는 문구가 검은색으로 쓰였으며, 이 아래 '초이는 살아있다(Цой жив!)' 라는 말이 덧붙여지며 일명 '초이 벽(Стена Цой)이 만들어진다. 누가 어떤 의도로 썼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초이의 사망 소식을 듣지 못한 다른 팬이 "헛소리 하지 마라. 초이는 멀쩡히 살아 있다"라는 뜻에서 이렇게 적었거나, "이 세상에선 떠났지만 우리 가슴 속에는 항상 살아 있다"라고 추모하는 뜻에서 적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이후 이 글귀는 후자의 뜻으로 받아들어져 빅토르 초이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그를 기리는 팬들이 외치는 슬로건이 되었다. 빅토르 초이의 음악은 영원하다는 뜻으로도 사용 가능하며, 실제 온라인에서 그의 음악을 듣는 팬들이 자주 사용하는 관용어처럼 굳어졌다.

초이를 추모하는 공간은 이 외의 도시에도 존재하나 여기가 제일 유명하며, 모스크바의 랜드마크 중 한 곳으로 꼽힌다. 현재 이곳은 키노 팬들의 성지와 더불어 만남의 장소로 취급받고 있으며, 이 곳을 방문할 때는 팬들이 아래에 위치한 재떨이에 부러뜨린 불 붙인 담배를 두고 가는 것이 전통 아닌 전통이다. 그냥 담배만 두고 가도 되는 것 같다. 왜 담배인지는 모르겠으나, 초이 벽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벽에 '담배 한 갑(Pachka Sigaret)' 가사가 그라피티로 자주 그려진 것에 대한 오마주일 수도 있고, 골초였던[31] 빅토르를 추모하는 뜻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팀의 핵심 멤버였던 빅토르 초이가 사망하자 얼마 안가 키노는 해산을 선언했으며[32], 초이의 시신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보고슬로프 공동묘지(Богословское кладбище)에 안장되었다.

3.4. 사생활[편집]

  • 소박한 생활
    록 스타로 일생을 화려하게 살았다는 인식을 갖기 쉽지만, 실제 사생활은 질박(質樸)하기 그지 없었다고 한다. 인기의 절정을 누리던 시기에도 여전히 레닌그라드의 아파트 단지에 있는 작은 보일러실에서 살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80년대 소련에서는 국영 음반사(멜로디야)에서 녹음하지 않은 앨범들의 상업적 판매는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앨범을 발매해도 문화 산업을 국가가 통제하고 있는 이상 해적판에 가까운 비공인 음반이었다. 그마저도 카세트 테이프로 찍어낸 불법 복제본이 횡행하고 있어서 수중에 들어오는 돈도 매우 적었다고 한다. 터프해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초이의 평소 성격은 내성적이며 침착한 편이였고 물질적 욕심이 없고 소박한 편이였다.[33] 특히 여성과 대중들 앞에선 수줍음이 많았지만 친한 친구들끼리는 농담을 즐기는 유쾌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가까운 주변인들이 말하길 상당히 게을렀다고 하는데 가장 좋아하는 활동이 집에서 편안하게 쉬면서 TV를 시청하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취미로 쌍절곤을 다루거나 각종 동양 무술도 즐겼다고 하나 정작 싸움이 벌어졌을 때 싸움을 말리거나 그 자리에서 도망치는 타입이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공예에도 소질이 있는 편이라 때때로 네츠케[34]를 깎아서 가까운 이들에게 선물한 적이 종종 있었다. 학창시절부터 미술에도 흥미가 깊었던 터라 음악 활동 전에는 부업 삼아 그림을 그려서 판매하기도 했는데, 구글에 검색해 보면 초이가 그린 작품들이 많이 나온다.
    술은 즐기지 않았으나, 흡연자였다. 선호하는 담배는 럭키 스트라이크였는데,[35]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이글라 등에 흡연 장면이 유독 많이 포함되어 골초라는 이미지가 강하나 실제 흡연량은 하루에 한 갑 미만이였다고 한다.
  • 결혼
    공식 데뷔 무대를 치렀던 1982년 서커스단 소장이었던 마리안나[36]라는 여자와 동거하기 시작한다. 둘은 1985년에 결혼해 같은 해 아들인 알렉산드르(애칭 사샤)[37]가 태어났다. 참고로 알렉산드르가 태어난 그 해에 빅토르의 할아버지 막심 페트로비치 초이가 세상을 떠났다. '이건 사랑이 아니야' 등에 수록된 '사샤'라는 곡이 있는데, 알렉산드르 초이가 태어나기 이전 작곡되었기에 알렉산드르와는 관계가 없다. 러시아 웹에서는 사샤가 초이의 이상형이었고 여기서 아들 이름을 따왔다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1987년 영화 '이글라' 촬영 도중 만난 영화 평론가 나탈리야 라즈글로바랑 바람이사귀게 되면서 마리안나와는 별거하게 되었지만 사샤와 교류는 계속했다고 한다.[38] 마리안나는 빅토르보다 3살 연상인 1959년생으로, 2005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 유족
    빅토르의 어머니인 발렌티나 구세바는 2009년에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나, 아버지 로베르트 초이 씨는 2020년대까지도 생존해 있다. 2010년경 병원 수술비 문제로 집까지 팔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자 후원을 위해 러시아 TV에 나온 적이 있었는데, 이때 엄청난 후원금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2018년 4월에는 아들의 작품 재산권 문제를 놓고 소송을 했는데 승소했다는 기사를 통해 근황을 전했다. 기사.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복동생으로 레오니트 초이가 있는데,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 알렉산드르 초이
    빅토르 초이의 유일한 자식으로, "사샤 초이"라는 이름으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부친의 사망 이후 부친의 그림자에 눌린 삶을 오랫동안 살아왔고 인터뷰 등을 통해 이에 대한 괴로움을 지속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자신에게 있어선 잘 기억도 나지 않는[39] 아버지인데 팬들의 공격은 다반사고[40] 그에 대한 이야기도 잘 들을 수 없는데[41] 집 밖에는 어디에서나 자신의 부친이 살아 있다고 적혀 있는("Цой жив") 것을 보는 기분은 매우 끔찍한 일이고, "초이"라는 자신의 독특한 성씨로 인해 언제나 아버지와 비교당하며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다녔다고 한다. 결국 학교를 중퇴하고 초이가 아닌 몰차노프(Молчанов)라는 가명으로 모스크바로 상경해 러시아 채널1의 편집자로 잠시 동안 일했으며, 얼마 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록 밴드 para bellvm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며 20대를 보냈다고 한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빅토르 초이의 아들이라 좋았던 점은 "교통 단속에 걸렸을 때 경찰이 여권을 보고 보내준 일"이 전부였다고.

    사샤 초이의 노래 "나의 일부 (나에겐 없는)"(Часть меня (Которой нет)). 아버지의 그림자에 눌린 자신에 대해 서술한 노래이다. 빅토르 초이가 담긴 홈 비디오로 만든 공식 뮤직 비디오. 그래도 이 곡에서 생전 빅토르 초이와 자신이 같이 찍었던 어린 시절의 짤막한 비디오들로 뮤비를 만든 것으로 보아 아버지에 대한 악감정은 많이 사라진 듯. 키노와 협업하기도 한다.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키노/디스코그래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필모그래피[편집]

연도
제목
배역
비고
Йя-Хха
본인 역
특별 출연[42]
Конец каникул(휴가의 끝)[43]
주연
Рок(록)[44]
다큐
Асса(아싸)
본인 역
특별 출연[45]
모로 역
주연
Город(도시)[46]
본인 역
특별 출연[47]
Цитадель смерти(죽음의 성채)[48]
모로 역
주연

6. 음악성[편집]

6.1. 음악 성향[편집]

Камчаткa(캄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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Это не любовь(이건 사랑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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Я объявляю свой дом (나는 나의 집을 선언한다).
빅토르 초이와 키노의 초기 음악성을 알 수 있는 노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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ЛЕГЕНДА(전설). 중기 무렵인 1986년 정규 4집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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Группа крови(혈액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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Хочу перемен(변화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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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ончится лето(여름이 끝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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Спокойная ночь(고요한 밤/편안한 밤/굿나잇).
빅토르 초이와 키노의 후기 음악성을 알 수 있는 노래들이다.

초기의 몇몇 곡을 제외하면 키노의 음악은 대부분 빅토르 초이가 작사/작곡하였으며, 들으면 알다시피 초기와 후기의 음악적 색채나 분위기가 상당히 차이가 큰 편이다. 초기엔 캄차카처럼 곡 분위기에서 낙관적인 베짱이가 노래하듯 밝은 톤을 즐겨 사용했으나, 1988년 혈액형 앨범 전후를 기점으론 마치 투사라도 된듯한 어두운 톤이 주류가 되어간다. 가사도 초기가 주로 일상적인 내용이 많은 편이라면, 후기는 진지하고 철학적인 내용이 많은 편이다.

그럼에도 듣기에 부담되거나 억지로 연기하는 느낌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감정을 담담히 표현하였기에, 비약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팬들에게 큰 거부감 없이 고루 받아들여졌다. 물론 키노에게 오늘날의 명성을 가져다준건 후기 음악들의 존재가 크긴 하다. 현지에서도 후기 시절 곡들이 훨씬 인지도가 높다 보니, 한국은 물론 오늘날 러시아 현지에서도 초이 그리고 키노에 대한 음악적 평가는 한쪽으로 치우친 경향이 있는 편이다.

가사의 묘한 체제 비판적 성격 외 곡 분위기에서도 당시 소련의 사정에 비추어 보면 대단히 전향적이고 전위적인 모습을 보여 주목받았는데, 당시 미국과 유럽에서 인기를 끌던 뉴웨이브포스트 펑크 계열 음악의 어법을 빨리 도입한 것이 즉효였다. 물론 서구에서 받은 강한 영향 외에도 러시아 포크 음악의 어법이나 블라디미르 비소츠키 등의 대선배들로부터 이어받은 가사 운율의 고전적인 분절법 등 전통적인 요소도 중시되어 키노만의 오리지널리티도 가지고 간다. 특히 빅토르 초이의 출신과도 연계되어 러시아적 세계관과 동양적 세계관의 혼합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다만 록이라고는 해도 서구의 그것과 달리 강렬한 기타 사운드나 화려한 드러밍, 고음역을 넘나드는 보컬 톤 등의 자극적인 요소는 생각보다 많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서구 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소프트 록이나 포크 록 정도의 임팩트밖에 느낄 수 없다는 이들도 종종 있다. 뉴웨이브라는 장르 자체가 그런 것과는 거리가 좀 있기도 하고. 물론 이지 리스닝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오히려 그 점이 선호되기도 한다. 실제로 빅토르 초이의 유명세를 모른 채 들어도, 오래된 음악이지만 대개 자극적이지 않아 편안한 감상이 가능하다. 후기 시절 돋보이는 빅토르 초이 특유의 중후한 중저음 톤도 매력 포인트.

강렬한 헤비사운드 같은 것을 원한다면 Ария같은 당시의 헤비메탈 밴드를 들으면 되지만... 록 음악을 '서구의 퇴폐적인 산물'이라며 신물나게 까고 있던 소련 문화 당국의 제도권 밖에서는 누가 들어도 아이언 메이든 삘이 나는 메탈 밴드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다. 소련은 록 음악을 단순한 하위 문화 취급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곳에도 '록의 시대'가 있었네-3.

당시 서구에 비해 문화적으로 낙후된 소련에서 이 정도로 정제되면서 강한 메시지를 전해준 밴드는 극히 드물었고, 그 중에서도 이만큼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밴드 역시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키노나 키노의 프론트맨 빅토르 초이는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일각에선 위에도 언급한 전설의 음유시인이자 배우였던 비소츠키나 프리 재즈를 소련에 도입하고 꾸준히 발전시킨 재즈 뮤지션인 뱌체슬라프 가넬린 등과 함께 소련 반체제 음악인의 거두로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지금도 키노를 기억하는 러시아인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키노 이전엔 이 땅에 대중음악이란 것이 없었다.[49] 키노가 오고 나서 소련에 대중음악이 생겼다. 이것이 우리가 아직도 빅토르 초이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이유다."

6.2. 사후의 평가[편집]

사후인 지금도 많은 팬들에게 기억되고 사랑받고 있다. 당연히 연예인 인기로는 최전성기만큼은 아니겠지만, 시대상과도 엮여 한때의 스타를 넘어 꾸준히 기억되는 일종의 예술가적 반열에 오른 모양새.

당시 소련에서 가장 인기있는 록스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빅토르 초이가 갑자기 사망했을 당시엔 충격에 빠진 팬들이 투신자살을 하기도 했다. 또 영혼결혼식을 올리거나, 그가  속에 나와서 를 읊어준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그의 묘소엔 무보수 묘지기를 자처하는 극성 팬들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서도 거리 건물 외벽 곳곳에 빅토르 초이나 키노와 관련된 그래피티를 접할 수 있다. 모스크바에는 대중가요에 많이 언급되는 아르바트 거리에 아예 빅토르 초이의 팬들을 위한 낙서용 외벽이 있어서, 빼곡하게 쓰여진 낙서들을 볼 수 있다.

2000년대엔 모스크바대에 빅토르 초이의 동상이 세워진다는 기사가 떴다.# 사실 그 외에도 관광&추모 목적도 있는지 상트페테르부르크 오로라 영화관 근처 기념물, AltGPA 근처 바르나울의 기념물, 알마아타의 기념비, 사망 장소 부근에 들어선 사망 현장 기념비, 노브고로드 지역 오쿨로프 카 기차역의 기념비, 빅토르 초이 사망 30주년을 기념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세워진 기념비 등 생각보다 참 많이도 세워놨다.

사후 10주기였던 2000년에는 러시아의 후배 록 뮤지션들이 키노의 히트곡들을 모아 녹음한 트리뷰트 앨범을 발표했고, 한국에서도 6월 항쟁 이후 공산권 국가의 문화예술 규제가 완화된 뒤에는 한대수나 YB같은 음악인들이 키노의 노래를 한국어로 번안해 부르기도 했다.

2020년대에도 유튜브에서 빅토르 초이의 음악 영상들을 보면 키릴 알파벳으로 적힌 추모 댓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더 놀라운 건 번역기를 돌려서 읽어보면 옛날 올드팬이 아니라 유튜브에서 듣고 유입된 신규 팬도 상당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신규 팬 유입에는 후배 가수들의 리메이크나 언급, 동유럽산 게임 스토커 시리즈와 메트로 2033에 빅토르 최의 곡들이 들어간 것 등도 관련이 있다.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서 현 세대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음악성을 갖췄다는 것.

빅토르 초이 탄생 50주년을 맞아 2012년에는 미공개 곡을 수록한 '아타만(Атаман)' 앨범이, 2017년에는 러시아 락 음악가들의 헌정곡이 담긴 '우리는 영화관을 떠났다(Мы вышли из Кино)'와 '55'가 발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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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55주년을 맞아 제작한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 1989)' 뮤직비디오. 무려 러시아 최대 포털 사이트인 얀덱스가 제작을 맡았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음악가, 배우, 학생, 행인들과 찍었다고 한다. 초이와 관련된 몇 가지 상징이 있는데, 자신이 빅토르 초이에 대해 좀 안다 싶으면 찾아보자. 정답은 코멘트에 적혀 있으니 구글 번역기 돌려서 확인해보면 된다. 1분 20초와 25초 벽에 적힌 문자열은 얀덱스 뮤직 1달 무료이용권이라고 한다.

2018년 빅토르 초이의 일생을 다룬 영화 레토가 러시아에서 제작, 개봉되었고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경쟁후보작으로 출품되었다. 빅토르 초이는 한국인 배우 유태오가 연기했다. 같은 해 개봉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와 미묘하게 비슷한 점이 있다. 각각 소련과 영국의 소수민족 출신인 보컬의 전기 영화이고, 둘 다 요절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다만 두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확연히 다른데, '보헤미안 랩소디'가 단순히 프레디 머큐리의 일대기를 다룬다면, '레토'는 빅토르와 마이크라는 스타가 아니라 아직 스타가 되기 전 80년대 초 레닌그라드의 언더그라운드 음악계와 사회에 대한 간접 비판에 더 초점을 맞춘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러한 이유로 초기 가린과 쌍곡선 시절밖에 다루지 않으며, 인기의 절정을 달리던 키노 후기 모습은 크레딧이 나오기 직전 2~3분 나오는 게 다이다.

2020년 8월 벨라루스의 시위 현장에서 벨라루스 시민들이 끌려가는 상황 속에서 키노의 노래 '변화'를 불렀다. 사실상 민중가요로 범국민적인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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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초이의 사망 30주기를 맞이한 2020년 러시아에서 그의 죽음을 다룬 영화가 개봉했는데 갑론을박이 있다고 한다.#

러시아계 귀화 한국인 일리야 벨랴코프 말에 의하면 90년대 러시아에선 문화 현상적인 존재였으며, 사후에도 그 시절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고 하는데, 한 시대의 아이콘이었고 후대에도 어느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적절한 평가다.

7. 빅토르 초이에 대한 오해[편집]

7.1. 크즐오르다 출생?[편집]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 출생이라는 말이 인터넷에서 돌아다닌다. 여기에 이로 인해 '러시아 연방 해체 이후 카자흐스탄과 러시아가 초이의 고향을 두고 싸웠다'는 투의 썰이 붙어 다니기도 한다. 크즐오르다는 초이의 아버지가 태어난 곳이다. 초이는 레닌그라드 출생이고 레닌그라드에서 활동했다.

빅토르 초이 소련 여권
초이의 여권. 왼쪽 면에 보면 '1962년 06월 21일 레닌그라드 출생'이라고 적힌 걸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이 여권은 2018년 초이의 어느 친구(익명 처리)의 냉장고 뒷면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외에도 친구들의 주소록과 '변화(Перемен)'의 초이 자필 악보도 같이 발견했다고 한다. 그 친구는 이걸 경매에 붙였고, 신원 미상의 인물에게 한화 1억 5천만 원에 낙찰되었다고 한다. 키노의 초기 멤버인 알렉세이 리빈은 이걸 두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그 친구를 비난했다.

여담으로 러시아 현지에서는 초이의 동아시아인스런 외모 때문인지 극동 지방 출신인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50] 정말 이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반농담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

7.2. 반체제적 가수?[편집]

국내 언론에선 빅토르 초이를 당시 소련 반체제의 상징적 인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 편인데, 당시를 살아보지 않은 입장에선 '소련이라니 얼마나 억압이 심했을까? 분명 해방에 대한 메시지가 있을 게 분명해!' 하는 식의 1차원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는게 어찌보면 당연하고, 이는 본토인 러시아 및 해외의 팬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진 일종의 '전설'이다. 다만 자세히 파고보면 이는 모호한 부분도 있다.

일단 초이 본인은 반전을 지향하면서도 "자신의 음악은 정치와 큰 상관이 없다"고 선을 그은 바 있다.
Q: Отражаются ли как-то на вашем творчестве перемены в общественной жизни?
(사회적 삶의 변화가 당신의 예술세계에 어떻게든 반영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A: А как они могут отражаться? Я же не певец социального протеста, не пишу песен "на злобу дня".
(그게 어떻게 반영된다는 건가요? 저는 무슨 사회운동을 하는 가수도 아니고, '원한의 시대'[51]에 대한 노래를 쓰지도 않는데요.)

- '젊은 레닌주의자 신문' 1985년 4월 인터뷰
Q: Получается, что надо писать только о том, что испытал сам? Вы же написали антивоенную песню «Я объявляю свой дом безъядерной зоной», хотя не испытали ужасов войны?
(그렇다면, 오직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에 대해서만 써야 한다는 뜻인가요? 하지만 전쟁의 공포를 직접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집을 선언한다'라는 반전 가요를 쓰셨잖아요?)

A: Понимаете, хотя эта тема разработана многими, за нее, по сути, серьезно никто не берется. Тем же, кто пишет псевдопатриотические и псевдоантивоенные песни, не верят. Я написал эту песню потому, что тема войны действительно меня взволновала и волнует до сих пор.
(아시다시피, 이 주제는 많은 사람들이 다뤘다만, 사실 그 누구도 진지하게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가짜 애국이나 가짜 반전 가요를 쓰는 사람들은 믿지 않습니다. 제가 이 노래를 쓴 이유는 전쟁이라는 주제가 저를 정말로 흥분하게 하기 때문이죠.)

- 신문 논쟁과 진실(Аргументы и факты) 39호(1987년)에 실린 빅토르 초이의 인터뷰 내용 중

초이의 지인인 영화감독 라시드 누그마로프는 초이 사후의 QnA에서 이런 증언을 했다.
Q: Могли бы Вы сказать, что Цой избегал разговоров о политике или что политика его интересовала мало?>
(빅토르 초이가 의도적으로 정치 화제를 피했는지, 아니면 정치에 관심이 없었는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

A: Я бы сказал так: политика не входила в круг главных интересов Виктора. Но сказать, чтобы она вовсе его не интересовала, не могу. Слишком разносторонним человеком был Виктор для столь однозначного утверждения.
(정치는 전반적으로 빅토르의 중요한 관심사는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그러나 아예 관심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한 가지 주제로만 한정짓기엔 빅토르는 너무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번역의 출처는 여기

사실 러시아의 반문화인 투소프카(тусовка) 자체가 상당히 비정치적인 편이었다. 원래 투소프카는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언더그라운드 아티스트들의 총칭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초이는 밴드 아크바리움 등과 함께 레닌그라드 투소프카에 속해 있었다. 레닌그라드 투소프카는 '레닌그라드 락 클럽'이 건립된 1981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존재했다. 다른 많은 투소프카들처럼 이들은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정도로만 돈을 벌면서 클럽, 아파트 등 여러 곳에서 라이브 공연을 했으며[52] 이들의 라이브 공연은 80년대 소련의 락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 '투소프카'는 이념이나 신념을 투사한 구체적인 메시지보다는 개인의 행복을 방해하는 억압적인 체제에 냉소적이었다.

당시 레닌그라드 투소프카에서 이런 흐름과 반대로 대놓고 정치적 메시지를 담았던 밴드는 사실상 '텔레비조르(Телевизор)'가 유일했다.[53] 이들은 정부와 충돌을 일으킬 정도였으며, 투소프카에서도 좋은 취급을 못 받았다고 한다. 텔레비조르와 리더 미하일 보르지킨(Михаил Борзыкин; Mikhail Vorzykin)은 2010년대에도 현역으로 활동중인데, 심지어 푸틴과 러시아 극우파를 씹어먹는 위엄을 보인다. 또한 이들의 장르는 일렉트로닉으로 분류될 정도로 전자 음향에 친화적이었다. 평단에서도 토킹 헤즈나 갱 오브 포조이 디비전을 언급할 정도였다. 이 또한 레닌그라드 투소프카에서는 주요 장르가 아니었다. 이들의 대표곡은 '너네 아빠는 파시스트다(Твой папа — фашист)'라는 비범한 제목의 곡이다. 보르지킨은 주파르크의 리더이자 초이와 친했던 미하일 '마이크' 나우멘코와 이 문제로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 이후 화해해 그와 같이 작업을 하기도 했다.

고로 빅토르 초이나 키노에게 '구 소련 국민들의 정신을 각성시키고 자유를 위해 투쟁한 가수'같은 말을 무턱대고 붙이는 것은 이견의 여지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오해 아닌 오해는 키노의 대표 앨범인 '혈액형',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검은 앨범'들이 전부 후기 앨범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초이의 작품은 초기와 후기가 상당히 다르다. 초기 곡은 상대적으로 직설적이고 가벼운 어쿠스틱 기타가 주가 되는 반면, 후기 곡들은 가사들이 모호해 해석의 여지가 갈리는데다 음악 및 초이의 보컬 자체도 상당히 중후해진다. 잘 알려지지 않은 초기 앨범이나 라이브 판을 들어보면(특히 45, 46 앨범) 소탈한 20대 '백수'로서의 초이의 면모를 잘 찾아볼 수 있다.[54]

이러한 초기와 후기의 스타일을 나누는 시각을 가지면, 첫 앨범 '45' 에서 선보인 '알루미늄 오이'가 미사일을 은유한 반전 노래라거나, '엘렉트리치카(전철)'나 앨범 '46'에서 처음 나온 '트롤리버스'가 아프간 전쟁에 끌려가는 노래라거나[55] 하는 시각이 얼마나 본래 의도와 맞지 않는지 보이게 된다. 후기의 시각만으로 초기 곡들을 이해한 것. 초이가 '알루미늄 오이'는 직접 학창 시절 오이를 수확하는 경험에서 나왔다고 밝혔으며, 엘렉트리치카는 그저 '백수가 출근하기 싫다는 노래' 내지는 아무리 가봤자 '전체주의적 사회 비판' 정도, 트롤리버스는 인생에 관한 철학적 노래라 볼만하다. 사실 후기 스타일이라고 해도 '전쟁'에 관한 노래만 있었지, 직설적으로 '아프간 전쟁에 끌려간다'라고 해석될 만한 곡은 없었기에 이는 과한 해석에 가깝다.

허나, 빅토르는 초기 앨범에도 '나는 나의 집을 비핵화지대로 선언한다' 같은 반체제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한 노래도 분명히 냈기 때문에 정확한 건 알 수 없다. 정치 성향을 떠나서 동유럽이나 일부 아시아권의 연예인들은 정치 자체에 얽히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56], 대놓고 반정부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리버럴/진보 성향이 아니라고 속단하기도 어려운 부분이 있다. 특히 구 소련권 국가의 민중들 사이에서 시위 때마다 애송되는 '혈액형'이나 '변화를 원한다'라는 노래는 가사부터가 반체제적 기운을 띌 수 있다는건 빅토르 초이도 모를 리 없지만 작사는 손수 했다.

물론 본인은 특히나 '변화를 원한다'의 경우 후술되어있듯 어떤 정치적 메시지보단 인생의 변화를 바라고 작곡했다고 밝혔지만, 굳이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기 싫다면 그렇게 말하는게 오히려 자연스럽다.
Я подразумевал под переменами освобождение сознания от всяческих догм, от стереотипа маленького, никчёмного, равнодушного человека, постоянно посматривающего „наверх“. Перемен в сознании я ждал, а не конкретных там законов, указов, обращений, пленумов, съездов.
(내가 말하는 변화란 것은 갖가지 도그마나, 온갖 사소한, 무가치한, 무심한 사람들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지속적으로 "위"를 바라보는 정신 세계의 해방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특정한 규칙이나 법률, 상소, 총회, 의회 같은 것이 아닌 정신 세계의 변화를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빅토르 초이의 발언, 생전 인터뷰 중.

게다가 초이는 다른 인터뷰에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이 원한다면 어떤 행동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고 밝혔다.
(В вашей песне есть слова "Мы ждем перемен". Каких же?)
Эта песня написана давно, задолго до перестройки, и обращена к внутреннему миру человека. Если хотите, ее можно расценивать, как призыв к поступку. Какому поступку - каждый решит для себя сам.

(당신 노래 중에서 "우리들은 변화를 기다린다"라는 가사가 있던데, 그 변화란 무엇인가요?)
이 노래는 페레스트로이카보다도 훨씬 이전, 아주 오래 전에 쓰인 노래로 인간의 내면 세계를 향한 노래입니다. 원하신다면 이를 어떤 행동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 행동이 어떤 행동이 될지는 각자 스스로 결정할 문제입니다.[57]

정리하자면, 빅토르 초이는 사회적 지식이 성숙하지 않은 활동 초기에는 정치와는 별로 무관한 행보를 보였다고 볼 여지도 있고, 그러다 후기로 가면서 조금씩 사회 문제에 눈을 뜨면서 이를 작품에 반영하기 시작했지만, 직접적인 정치 참여는 하지 않았던 사람 정도로 해석하는 게 무난해보인다.[58]

어쨌든 오늘날에도 현지에선 반체제적 이미지가 남아있는지, 소련 붕괴와 함께 흘러나왔던 노래가 이제는 정반대의 의미를 지니게 됐다거나 살아있는 푸틴주의자들은 죽은 초이를 두려워한다 따위의 글이 초이 관련 유튜브 영상 댓글에 올라오기도 하며, 친푸틴인지 반대측은 초이는 딱히 정치적인 가수가 아니었다는 식으로 다투는 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7.3. 한국과의 관계[편집]

한국에선 초이의 아버지가 고려인 출신이라는 점에서[59] 어느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엔 소련 국적자이기도 해서 초이도 일단은 한국계 소련 출신 가수라 생각하고 있다.[60]

빅토르 초이 역시 소련인 정체성이 더 강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상기되어있듯 어린 시절 최민이란 가명으로 한글를 썼던 조부에게 동양철학을 배울 정도로 영향을 받았던 걸 보면, 아예 한국에 무관심했던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의 노래엔 남한 또는 북한, 자신의 핏줄에 대한 얘기는 없다는 점에서 나이가 들면서 어느정도 관심이 멀어지긴 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주로 활동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반도까진 너무 멀고 당시엔 인터넷처럼 알아볼 수단이나 기회도 딱히 없다보니 한계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초이가 말년 들어 한국은 물론 전반적인 동아시아 지역에서 음악 커리어를 쌓고 싶어하는 욕심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실제로 초이는 수교가 맺어진 일본에서 공연을 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61] 사망 당시에는 일본의 국민밴드 사잔 올 스타즈와 조인트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으며, 예당엔터테인먼트 측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1990년 겨울 즈음 한국 공연 역시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출처.

실제 당시는 한소 수교가 맺어지기 직전이었고, 한소 수교 후 한국에서 콘서트도 하고 양국의 가교를 상징하는 인물로 부상했더라면 고려인 정체성을 더 드러낼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1990년 8월 15일 요절했고, 수교는 묘하게도 그로부터 약 1달 뒤인 1990년 9월 30일 이뤄졌다.

1980년대 후반 당시 초이의 홍보 담당자이자 프로듀서였던 유리 아이젠시피스(Юрий Айзеншпис)는 회고록에서 초이가 모스크바에 위치한 한 고려인 식당의 단골이었으며, 그 식당에서 초이는 시원시원한 성격에 '한국계 소련인들의 대표'로 여겨졌기에 매우 환영받았다고 서술했다. 또한 키노는 전국적 인기를 얻기 전에 투어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까지는 슈퍼스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곳곳의 고려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는 증언도 있다. 또 초이는 당시 고려인들이 운영하는 숙소를 애용했는데, 숙소를 운영하는 고려인들이 돈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고로 최소한 당시 소련의 고려인들은 그를 히어로로 생각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또한 초이의 가장 가까운 지인 중 하나인 라시드 누그마노프의 Q&A에 따르면 초이는 자신의 한국 혈통에 관심이 있었으며 어떤 한식을 만드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62] 다만 얼마나 관심이 있었는지, 어느 정도인지는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한국에선 1995년 KBS 일요스페셜에서 그의 일대기를 다루면서부터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삼성영상사업단(나이세스) 부곡무역 같은 음반사에서 키노의 노래를 수록한 베스트 앨범이나 정규 앨범 몇 종류를 1990년대 중반에 라이선스로 제작해 발매하기도 했지만 한국어나 영어 앨범도 아닌데다 이미 사후기도 해서 크게 흥행하진 않았다. 참고로 나이세스판 12번 트랙이 'Троллейбус'라 되어 있는데 실제론 'Электричка'가 들어 있다. (첫 앨범 '45'에 실린 것은 아니고 89년에 나온 'Последний герой(마지막 영웅)' 버전.)

한편, 초이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1990년대 한국은 전반적으로 지금보다 민족주의적 기조가 더 강했다 보니, 이로 인해 빅토르 초이에 대한 해석 역시 음악적 업적에 주목하기보다는 '고려인 혈통'에 집착해 가족사를 줄줄이 나열하며 '한국의 피를 가진 러시아 최고의 락스타' 내지는 (상기 문단의 정치적인 시각까지 더해) '소련의 자유화를 이끈 한국의 가수', 혹은 더 과장되어 '칭기즈칸 이래 유럽에서 가장 유명세를 떨친 동양인'[63] 같은 타이틀을 더 강조하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이는 신문 칼럼부터 다큐멘터리 방송까지 대개 일관적으로 보이는 문제점이었으며, 이때문인지 과한 민족주의적 감정 주입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생긴 2020년대에도 키노나 빅토르 초이에 대한 한국 유튜브 영상은 적어도 혈통에 대해서는 설명하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애초에 소련인이라고 중립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영상이더라도 일단 사실 관계인 혈통 관련 부분은 짧게나마 언급할 수밖에 없긴 하다만.

물론 이러한 타이틀이 러시아 음악에 대해 클래식이나 민요, 소련 군가 등을 제외하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국내에서 그나마 키노와 초이의 이름을 퍼트렸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으나, 이로 인해 키노 혹은 빅토르 초이의 한국 팬들 중에서는 이러한 시각을 비판하다 못해 혐오하는 경우도 있다. 단순히 민족주의적 기류를 싫어해서 그러는 경우도 있으나, "초이와 키노의 음악은 그 자체로도 대단한데, 한국에서는 고려인 혈통만 강조하다 보니 오히려 초이의 음악적 성취나 그 의의가 가려져 버렸기에" 초이와 한국을 연관짓는 것을 꺼리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 보니 한국 팬들 중에서는 "빅토르 "라는 표현을 거부하고 대신 "빅토르 초이"라는 러시아어식 표기법을 강박적일 정도로 강조하는 사람들이 보이며, 이 문단의 긴 설명 또한 이런 인식으로 인해 생겨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정리해보면, 빅토르 초이는 소련 국적의 소련인이었지만, 당대 고려인들에게는 한국계의 대표격으로 환영받을 만큼 소련의 소수민족 계열 대표 연예인으로 여겨졌고, 빅토르 초이 본인도 이에 대해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었다. 허나 그것이 강하게 발현되었다고 보기엔 그가 요절하면서 딱히 내용이 채워지지 못했다. 그가 더 오래 살아 동아시아 곳곳에서 공연도 하고 한국에 직접 방문해 얘기를 나눴다면 더 풍성한 이야기거리가 나왔겠지만, 그건 가정의 영역에 머물 뿐이고 현재까지 주어진 그에 대한 정보를 종합했을 때는 자신의 혈통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다 정도로 정리가 될 것이다.

8. 여담[편집]

  • 초이가 태어났을 당시, 어머니인 발렌티나 구세바는 초이의 이름을 드미트리로 짓기를 원했다. 그러나 아버지인 로베르트 초이는 초이의 이름을 빅토르로 짓기를 원했고, 이를 강하게 주장했기에 초이의 이름은 빅토르가 되었다.
  • 전(前) 대한민국 쇼트트랙 국가대표이자 현(現) 러시아 쇼트트랙 국가대표인 안현수가 러시아로 국적을 바꾸면서 빅토르 초이의 이름을 따서 빅토르 안으로 개명했다. 소치 올림픽 기간 중 한국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승리를 뜻하고, 러시아에서 대표적인 한인인 빅토르 초이를 기리기 위해 빅토르라는 러시아 이름을 골랐다고 한다. 더불어 이때 빅토르 초이가 재조명되기도 했다. 빅토르 안은 2017년 10월 29일자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도 아내, 딸과 함께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빅토르 초이 추모 벽화가 그려진 곳을 방문하였다.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 안현수가 금메달을 딸 당시 러시아 기자 게스킨은 “빅토르 최는 변혁과 저항의 상징, 빅토르 안은 노력과 성공의 상징”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 초이의 몇몇 인터뷰 영상을 보면 당시 소련인들과 비교해서 유창하진 않아도 간단한 대화가 가능할만큼 영어를 약간 할 줄 아는 편이였다. 10대 때부터 즐겨듣던 서구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독학한 점도 있지만, 80년대 중반에 조안나 스팅레이[64][65]라는 미국인 여성과 친하게 지내면서 영어를 배웠다.
  • 이소룡의 광팬이었다. 학창 시절 길거리에서 고프닉들에게 종종 인종차별성 괴롭힘을 당했는데, 이러한 이유로 영웅이 되기를 꿈꾸었고, 그런 그에게 이소룡은 그야말로 취향 저격이었을 것이다. 학창 시절 밀수된 이소룡의 영화를 즐겨봤는데 그중 용쟁호투는 수십번 시청할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이소룡을 롤모델로 삼고 그의 동작, 포즈를 따라하기도 했는데, 실제 콘서트를 보면 이소룡과 비슷한 표정이나 액션을 취할 때가 있다.
  • 색깔 중에 검은색을 가장 좋아했고, 그 다음으로는 동양철학과 관련 있는 노란색을 좋아했다고 한다. 때문에 검은 옷을 즐겨입어, '검은 옷을 입은 남자(Человек в черном)'라는 별명이 있었다. 꽃 중에는 노란 장미를 가장 좋아했다.
  • 좋아하는 계절은 소련 날씨 기준 여름이였고 겨울을 상당히 싫어했다. 그가 살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여름이 짧고 겨울 날씨가 길고 우울했던 탓이 커보인다.[66] 이런 기후 환경이 작품 세계에도 영향이 미쳤던지라 계절을 주제로 한 노래가 여러곡 있다.
  • YB는 1999년 발매된 4집 '한국 록 다시 부르기'에서 '혈액형'을 한국어로 번안하여 앨범에 실었고, 2010년에는 일렉트로니카 팀인 RRM과의 합작 앨범에서 번안이 아닌 원어로 그대로 불렀다.# 팬들 사이에서는 후자가 조금 더 유명한 듯. 2014년 윤도현 솔로 콘서트에서 팬 앵콜 때문에 갑자기 부르게 된 후 한동안 락 페스티벌같은 곳에서 불러 보기도 했지만 러시아어의 벽을 넘지 못하고 일반인들에게는 어필 실패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간주 동안 화면에 나오는 빅토르 초이의 사진에 경의를 표하는 퍼포먼스는 인상적이었다는 평이었으며 러시아 현지에서는 윤도현의 목소리를 들은 팬들이 "빅토르가 살아 돌아왔다."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했다. 2019년 홍대 버스킹 라이브에서도 부른 적이 있다. 영상.
  • 빅토르 초이와 동시대에 중국에서도 최건이 록 음악의 선구자로 큰 활약을 하였다. 묘하게 둘 다 최씨다.
  •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고려인 여가수 아니타 초이(Anita Tsoi)와는 아무런 혈연 관계가 없다. 애초에 이 사람의 원래 성씨는 킴(Kim)이다. 초이라는 성씨를 가진 고려인 정치인과 결혼해 성을 바꾼 것이다.
  • 디시인사이드에 빅토르 최 마이너 갤러리가 있다. 주로 대부분 부재중인 빅토르 초이 카페의 자료를 정리하고 있으며 빅토르 초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 소련(소비에트 연방) 시절 사람이다 보니, 극단적인 경우 오늘날 온라인에선 러시아 팬들은 초이의 고향이 샹트페테르부르크니 러시아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우크라이나나 기타 지역 팬들은 당시 연방에 참여한 모든 국가의 자부심이라며 초이는 오히려 지금의 러시아를 싫어할 거라고 싸우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 2018년 9월 26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빅토르 초이 유품 관련 경매가 열렸는데, 빅토르 초이의 소련 여권(가격 900만 루블, 수수료를 포함하면 1035만 루블)과 친구들의 전화번호가 적힌 공책(300만 루블), "I Want Changes!"라는 노래의 원고(360만 루블)가 팔렸다. 물건들은 그가 콘서트 후 자주 들린 친구들의 아파트에서 사망 후 발견되었다고 한다.
  • 레닌그라드 기술전문학교에 다니던 시절 네츠케라는 일본 전통 공예품을 만드는 법을 배웠으며, 취미로 자주 만들어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사후 해당 작품들을 전시하는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 대중들 앞에서 공연을 할 때마다 최선을 다해서 열정적으로 진행했었다. 이게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었는지 공연이 끝나면 너무 지친 탓에 10분 동안 무대 위에서 드러누운 일이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말년의 그는 무리한 콘서트 일정에 스트레스도 쌓였을 것이다.
  • 빌이라는 스코티시 테리어와의 재밌는 일화가 있다. 초이가 빌의 견주인 마리안나 초이와 동거하면서 빌과 함께 살게 되었는데, 초이는 어린 시절부터 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빌과 친해지기 위해 빌에게 먹이를 주고, 산책을 시켜주는 등의 노력을 했었다. 하지만 빌은 초이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으며, 때때로 초이를 물기도 했다.[67]
  • 빅토르 초이의 전기(Виктор Цой. Последний герой современного мифа)에 따르면, 1983년(20대 시절)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한창일 당시 병역기피를 위해 일부러 정신병동에 입원한 전력이 있다.[68] 당시 러시아에는 외모가 동양인스러우면 아프가니스탄에 끌려가기 쉽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실제 소련군은 전쟁 초창기때 아프간 현지 여론이나 투입의 용이성 등을 고려하여 중앙아시아 군구나 투르케스탄 군구 병사들을 선발적으로 투입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일선 전투부대의 피해가 누적되자, 소련은 전국 각지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전투부대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당시 소련 청년들은 베트남 전쟁 때 미국과 유사하게 대학으로 진학하여 징병을 면제받거나, 기타 여러가지 방법으로 징병을 기피하는 현상이 늘어났다.[69] 초이 본인 또한 군생활을 하며 락앤롤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기에 징병을 기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2주 동안 입원 예정이었던 정신병동 입원은 1달 반으로 늘어났고,[70] 병원 내에서 여럿 좋지 않은 경험을 겪었는데, 이는 초이의 음악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알렉세이 리빈이나 마리안나 초이 등이 증언한 바 있다. 실제 그의 1집 앨범과 2집 이후 앨범의 가사는 큰 차이를 보인다. 관련 곡으로 '캄차카의 지배인(Начальник камчатки)' 앨범에 수록된 '신경 안정제(Транквилизатор)'라는 곡이 있다. 또한 1집의 '엘렉트리치카' 또한 정신병원에 들어가기 위한 정신감정을 받으러 정신병원에 자주 들락거리던 당시 자신의 감정이 투여된 곡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당하고, 청소부나 야채 장수, 보일러공 등 여러 직업을 거치며 생활비를 벌게 된다.
  • 활동 당시 ДДТ의 리더 유리 셰프추크(Юрий Шевчук)와 사이가 나빴다는 설이 있다. 그 이유로는 셰프추크가 초이의 캄차카로 곡을 가지고 오지 않아서라는 설이 따라붙는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 초이와 인터뷰를 한 적 있는 저널리스트 예브게니 도돌레프(Евгений Додолев)는 초이와 셰프추크의 관계가 서먹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 지인이자 영화 이글라의 감독이었던 라시드 누그마로프는 초이 사후 FAQ에서 이 설에 대해 근거가 없다며 일축했다.
    • 셰프추크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초이가 입고 있던 티셔츠 문구 때문에 가벼운 말싸움이 붙은 게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초이의 티셔츠에는 당시 조안나 스팅그레이와 함께 하던 공연 제목 "Спасем мир(세상을 구하자)"가 적혀 있었는데 셰프추크가 "엥? 네가 세상을 구할 수나 있겠냐?"라고 말한 게 계기. 지금이야 성격 좋고 푸근한 호호 할아버지지만 80년대의 깡마른 수염쟁이 셰프추크는 직설적인 가사와 독설, 그리고 한 성깔로 유명했다. 80년대 초반 발매한 앨범 "협상(Компромисс)"의 앨범 아트는 셰프추크가 싸우다 깨먹은 금 간 안경 사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초이 사후 유작 앨범인 "Чёрный альбом" 발표 당시 셰프추크는 류베의 리더였던 니콜라이 라스토르구예프와 주먹질 싸움을 한 전력이 있다.[71]
  • 2014 소치 동계올림픽 선수입장 BGM 중 하나로 '여름이 끝난다(Кончится лето - '검은 앨범'에 수록)'와 '혈액형(Группа крови - '혈액형'에 수록)'이 사용되었다.
  • 2019년 튜멘 대학교 연구진이 새로이 발견한 진딧물에 초이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학명은 trachyoribates viktortsoii 다만 이에 대해 부친 로베르트 초이는 떨떠름한 반응(정확히 말하자면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이 없다. 세상에 무슨 이런 바보가 많은지 원'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무슨 별의 이름도 아니고 작은 벌레 이름으로 자신의 아들 이름을 붙이는 게 유쾌하게 받아들여지긴 어려울 것이다.
  • 2022년 1월 15일에서 4월 15일까지 모스크바 마네즈에서 Путь Героя(영웅의 여정)이란 이름의 빅토르 초이 관련 전시회가 열렸다. 초이와 관련된 그림, 조각, 옷, 출연 영화, 영상, 기타 등 다양한 희귀 자료들이 전시되었다. # #
  • 2020년대에도 러시아어권에선 키노의 노래를 커버한 여러 영상들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심지어 한 팬은 빅토르 초이의 생일을 기념해 그의 노래 90곡을 모조리 재생하며 기타를 연주한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이쯤되면 진짜 초이는 살아있는 모양.
    Play: Video
  • 빅토르 초이 노래 커버자들 중에선 초이와 목소리가 흡사한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이 사람이나 2018년 영화 레토에서 빅토르 초이의 노래를 대신 한 표트르 포고다예프 등이 있다.

8.1. 위작 음악 문제[편집]

빅토르 초이가 작성하고 부른 모든 노래의 목록

원체 유명하다 보니 실제 초이가 부르지 않은 노래들도 "빅토르 초이"나 "키노"의 이름을 달고 유통되는 경우가 아주 빈번하다. 초이의 경우 그 유명세로 인해 수많은 전문가들과 팬들이 관련 자료를 파낼 대로 파낸 상태이며, 위 목록에 없는 노래인데 초이의 이름을 달고 있다면 일단 의심을 해봐야 한다.[72] 팬들의 착각으로, 혹은 고의적으로 초이의 이름을 달고 유통되는 짝퉁 노래들이 많으니 조심해야 한다.

이 가짜 노래들 중에서는 키노의 이미테이션 밴드들이 만든 노래가 많으며, 특히 이반 쿠르나예프의 밴드 노비 덴(Новый день)이 발표한 노래들이 유명하다. 쿠르나예프는 10대 시절이던 1990년대[73] "노비 덴"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당시 그의 목소리가 초이와 원체 흡사하다보니 그의 노래들이 키노의 미공개 노래라는 식으로 유통되는 일이 아주 빈번했다.[74] 심지어 2020년대 이후에는 "빅토르 초이와 세르게이 쿠료힌이 정부의 탄압을 피해 비밀리에 수많은 노래를 작업했으며, 그 프로젝트 이름이 '노비 덴'이다"라는 출처 불명의 루머까지 유포되고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초이와 쿠료힌이 친한 사이였던 것은 맞으나, 이들이 이런 프로젝트 아래 같이 활동한 적은 없다.

짝퉁 노래들은 거의 대다수가 그루파 크로비 이후의 음악 스타일을 모방하고 있으며, 가사 또한 사회적 · 정치적 · 철학적 메시지를 과할 정도로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앞서 언급했듯 사회적 · 정치적 메시지를 투영하는 것을 초이가 피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런 가사를 가지고 있는 노래는 의심부터 하고 봐야 할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초이와 키노의 음악 또한 서구권의 영향을 많이 받다 못해 표절의 영역까지 나아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특히 더 스미스듀란 듀란더 큐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러웹에서도 많이 지적되는 사실이며, 가장 유명한 사례가 Перемен(변화)의 멜로디이다.[75] 이에 관한 알렉세이 비시냐의 영상.

8.2. 불운의 러시아 록음악 단명사[편집]

희한하게도 이 시절 레닌그라드 투소프카를 포함한 러시아 록 음악가들은 단명하거나 러시아를 떠나버린 케이스가 꽤 되며, 밴드 또한 해체 및 멤버 교체가 잦은 편이었다. 심지어 이런 사건들이 대부분 소련 해체 이후인 1990년대에 일어났기 때문에, 러시아 록 팬들은 이 시기를 참 암담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 마이크 나우멘코 : 뇌졸중으로 1991년 사망.
  • 안드레이 '스빈' 파노프(Андрей 'Свин' Панов)
    : '스빈'은 러시아어로 '돼지'를 의미. 빅토르와 마이크의 동료였던 레닌그라드의 펑크 락 음악가. 영화 '레토'에서 씬 스틸러로 등장했는데, 텔냐시캬 입고 뾰족한 머리를 가진 그 사람이다. 같이 동료로 친하게 지내기도 했고 자신의 밴드에 빅토르를 넣어주기도 했기에, 카메오 식으로 넣어준 듯하다.
    : 1998년 복막염 수술 중 의료사고로 사망. 마취제 종류에 알레르기가 있었던 걸로 추정되는데 수술 당시 이를 인지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파노프의 모친인 리야 페트로노바는 의사들이 자기 아들을 죽였다며 비난했다.
  • 알렉산드르 바실라초프(Александр Башлачёв)
    : 러시아 바르드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평가받는 음악가 러시아 음유 시가에 영향을 받아 시 낭송에 가까운 포크 음악을 했으며, 러시아에서는 상당히 높이 평가 받는 인물이지만 가사가 현지인들이 해석하기에도 난해한 부분이 있어서 해외에서는 별로 알려져있지 않다. 정규 레코딩을 하지 않았지만 개인 녹음본 복각본이 나와있다. 27세 클럽에 속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예카테린부르크 출신이지만, 레닌그라드를 오가면서 활동했기에 레닌그라드 투소프카에 같이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
    : 1988년 아파트 9층에서 떨어져 투신자살.
  • 게오르기 블라디미로비치 오르다놉스키(Георг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Ордановский)
    : 레닌그라드의 락밴드 '로시야녜'(Россияне, 러시아어로 '러시아 사람들)의 리더.
    : 1984년 밴드 멤버들과 신년 축제를 즐기다 행방불명되어 지금까지도 생사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결국 201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법원에서 사망 선고를 받았다.
  • 얀카 댜길레바(Янка Дягилева)
    : 러시아의 여성 가수.
    : 1991년 2월 노보로드니코보(Новородниково) 역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이냐(Иня) 강에서 익사체로 발견.
  • 이고르 레토프(Игорь 'Егор' Летов)
    : 이고리 '예고르' 레토프. 이고리가 본명, 예고르는 예명. 러시아어 강세에 따르면 '예고르' 또한 실제로는 '이(이)고르'로 발음되는데, 본명과 예명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 보통 '예고르 레토프'라고 표기한다. 시베리아 쪽 옴스크에서 활동한 노이즈 펑크 락 음악가. 독실한 사회주의자였는데, 이 사회주의라는 게 소련 민족주의적 색채가 가미된 등 당시 소련 정부의 사회주의와는 어딘가 거리가 멀었기에 소련 말기 3개월 간 정신 병동에 수감된 적이 있을 정도로 어딘가 '똘끼'가 보였던 인물. 다만 예고르 레토브는 생애 내내 LSD와 같은 약물을 달고 살았고, 태생적으로 몸도 약했기에 단명으로 끝을 맺은게 크게 이상하진 않다.
    : 잠을 자던 중에 심부전증으로 사망.
  • 유리 '호이' 클린스키흐(Юрий 'Хой' Клинских)
    보로네시의 펑크 락 밴드인 섹토르 가자의 리더이자 보컬.
    : 2008년 간암으로 갑작스럽게 사망
  • 미하일 '고르쇼크' 고르셰뇨프(Михаил 'Горшок' Горшенёв)
    : '고르쇼크'는 러시아어로 병, 요강, 단지 등을 의미. 레닌그라드의 호러 펑크 락 밴드인 카롤 이 슈트의 원년 멤버이자 리드 보컬.
    : 2013년 헤로인을 포함한 다수의 약물 중독으로 사망. 그의 사망으로 밴드는 해체되었다가 2014년 '북양 함대(Северный Флот)'라는 이름으로 부활.
  • 바실리 슈모프(Василий Шумов):
    : 모스크바 출신의 락밴드 첸트르(Центр)의 리더. 첸트르는 '센터(중심)'라는 뜻의 러시아어. 활동 당시 기행이 많았던 밴드였는데, '우리 밴드에서 연주하기엔 너무 잘한다'는 말과 함께 기타리스트를 해고했다든지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에드가 앨런 포 같은 서구권 시인들과 조이 디비전를 흠모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다만 이 때문인지 러시아 내 인기는 열광적 컬트 수준에 그쳤다고 한다. 러시아 내에서도 정보가 의외로 빈약한 편.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2009년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으며, 이후 보르지킨처럼 푸틴과 극우파를 비난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
  • 아크바리움(Аквариум): 레닌그라드의 락밴드이자 레닌그라드 투소프카의 대선배격 존재. 1984년에 녹음한 '주야평분시(Равноденствие)' 앨범 이후 그룹 내에서 분열이 일어나고, 이후부터는 보리스의 솔로 프로젝트에 가깝게 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상 밴드가 해체된 상황. 덤으로 당시 바이올린을 담당하던 멤버 또한 단명하였다.
  • 알리사(Алиса): 레닌그라드의 하드 락 밴드. 원래 스뱌토슬라프 자데리(Святослав Задерий)가 리더였는데 이후 들어온 콘스탄틴 킨체프(Константин Кинчев)와 갈등을 빚다 리더가 킨체프로 바뀌었고, 자데리는 밴드를 나갔다가 이후 사망했다. 일단 밴드 자체는 지금도 잘 활동하고 있다.
  • Аспид(Aspid) : 1992년 Extravasation이라는 앨범 딱 하나만 발매하고 없어진 러시아의 메탈 밴드. 이 앨범 이후로 밴드의 행방을 아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앨범 하나의 무시무시한 완성도 덕분에 국내외를 막론하고 스래시 좀 듣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밴드이다.
  • ДДТ: 원래 러시아 우파(Уфа)에서 결성되었는데, 1986년 리더이자 결성자였던 유리 셰프추크(Юрий Шевчук)가 가족 전체와 레닌그라드로 이주한 뒤 동명의 밴드를 다시 만들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으므로 레닌그라드 투소프카에도 끼워주는 편이다. 여기는 아예 밴드 자체가 바뀌었으며 멤버 변동이 심한 편이다.
  • 미하일 보르지킨(Михаил Борзыкин): 레닌그라드의 락 밴드 '텔레비조르(Телевизор)'의 원년 멤버이자 리드 보컬. 이 밴드는 콘서트 도중 경찰과 정치 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콘서트가 중단된 일을 겪었을 정도로 소련의 체제에 반항적이었으며, 정치적인 색채가 강해서 레닌그라드 투소프카 내에서도 다소 겉돌던 왕따였다. 당시 레닌그라드 투소프카는 가능한 한 노래나 평소 발언에서 노골적인 정치적 색채를 투과시키지 않으려 했으며, '자유와 변화를 외친 투사' 정도의 이미지가 있는 빅토르 초이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음악 성향 또한 당시 레닌그라드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일렉 쪽에 가까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평단에서는 이들을 언급하며 아예 조이 디비전이나 토킹 헤즈 등을 같이 언급할 정도다.
    1990년대 보르지킨과 다른 멤버들 간의 내분이 일어나 일시적으로 해체된 뒤 보르지킨이 다른 멤버들을 모아 다시 재결성하였다. 보르지킨은 지금도 푸틴과 극우파 무리를 비판할 정도로 강한 정치색을 유지하고 있으며 노래 또한 다를 바 없다. 그 예로, 2010년에는 자신들의 곡인 '니 애비는 파시스트 새끼다(Твой папа — Фашист)'를 헌정했는데 제목에서 감이 오듯 가사가 딱 푸틴을 욕하는 내용이다. 곡 자체는 푸틴 집권 전에 만든 곡이다.

9. 대중매체에서[편집]

  • Grand Theft Auto IV에 등장하는 가상 방송국인 블라디보스토크 FM(동구권 음악 전문방송)에서 '혈액형'의 영어판이 나온다. 커버 버전은 아니고, 초이가 직접 부른 버전이다. 사후 발매된 리믹스 앨범 'Последние записи'에 'Blood Type'라고 제목까지 영어로 바뀐 채로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발음 때문에 러시아어로 들리며 몇몇 단어는 실제로 러시아어다. 지금은 저작권 만료로 나오지 않는다.
  • 김경진의 소설 데프콘 한중전쟁편에 암호문으로 나오는 "내가 잠들면 누가 밤을 노래하리."는 키노의 곡 '전설(Легенда)'의 가사에서 차용한 것이다.[76]
  • 대체역사물인 일 베티사드에서는 '브루노 문'이라는 이름으로, 비틀즈 패러디로 추정되는 NoMoreEagleZ라는 밴드의 멤버라고 되어있다. 이 세계에서는 소련 대신에 적백내전에서 승리한 백군 러시아계열의 또 다른 독재국가인 SNOR에 저항하는 밴드라고 나와있다. 이름으로 봤을 때 이쪽 역시 고려인이라고 추정된다. 재미있게도 1980년대 이후 "브루노는 죽었다(Bruno is Dead)"라는 음모론이 돌고 있는데,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 사망설을 패러디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사고로 사망하지는 않았지만, 밴드가 해체된 2000년대 이후에는 이혼하고 새로 뜬 여배우와 결혼한다. (위에 나왔지만 초이도 1987년 별거한 상태), 골프도 하고, 상당한 부동산도 소유하고, 정계에 발을 걸쳤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 1996년에 한국에서 빅토르 초이의 삶을 다룰 영화를 제작하려고 했었으나 결국 엎어졌다. 감독은 정지영(부러진 화살감독). 그리고 빅토르 초이 역할을 가수 신성우가, 그를 취재하는 기자역할을 당시 은행나무 침대로 스타배우 반열에 오른 진희경이 맡아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삼성영상사업단에서 제작비를 지원하겠다고 했으나 결국 백지화가 되었다.
  • 영화 스탈린그라드 엔딩 크레딧 첫부분 BGM은 '전설(Легенда)'을 젬피라(Земфира)라는 뮤지션이 리메이크한 버전이 나온다.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그의 죽음에 대한 의혹들과 죽음에 대한 굉장히 수상한 점들에 대해 설명해준다.
  • 게임 스토커: 콜 오브 프리피야티 의 모드 중 하나인 미저리에서 스카드보스크와 야노브 역의 라디오에서 키노의 노래가 여럿 흘러나온다. 동구권 게임 특유의 분위기와 잘 맞아 엔딩을 볼때 쯤이면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있다.
  • 빅토르 초이, 나아가 1980년대 러시아 록 씬에 대한 영화가 2018년 칸 영화제에서 공개되었다. 제목은 레토. 참고로 초이의 곡 중에서도 동명의 곡이 있다. '알려지지 않은 노래들'에 수록. 스튜던트로 유명한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감독하며 유태오가 초이 역을 맡는다. 감독은 2017년 횡령 혐의로 자택 구금 중인데, 워낙 푸틴 정권에 반대하는 영화나 사회 운동을 자주 해와서 횡령은 핑계고 정치 탄압이라는 설이 대다수다.
  • 포스트 아포칼립스 게임 메트로 엑소더스에서는 라디오를 틀어서 노래를 들을수 있는데, 빅토르 초이의 노래가 여러 곡 나온다. 위 게임들 특유의 분위기와 꽤 잘 어우러진다. 한국 유저들도 노래가 좋아서 찾아보니 빅토르 초이였다는 걸 안 사람도 있고 빅토르 초이를 몰랐던 이들도 이런 쪽으로 유입되기도 한다.

10. 둘러보기[편집]

[1] Viktor Robertovich Tsoi [ˈvʲikt̪ər ˈrobʲɪrt̪əvʲɪtɕ ˈtsoi̯][2] 영화 등을 찍어서 흥행에도 성공한 바 있다. 다만 전문배우는 아니고 가수가 주긴 했다.[3] 당시 소련의 많은 아파트 및 건물은 중앙난방식이었기에 보일러실이 따로 있었고, 초이는 여기서 보일러에 석탄을 공급하는 화부로 일했다. 국가에 등록되지 않은 관제 예술가가 아닌 이상 예술가라는 직업을 인정받지 못하고 공식적인 수익을 창출하지 못했던 소련 특유의 환경으로 인해 초이는 이름을 날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화부로 일했다. 그가 일하던 곳은 이른바 '캄차트카'라고 불렸으며, 초이 사후 그를 기념하는 음악 카페로 지금도 남아 있다.[4] 초이는 자신의 동양계 혈통에 관심이 많아 아들의 이름을 티무르로 지으려 했으나 아내 마리안나의 강한 주장으로 알렉산드르로 지었다고 전해진다.[5] 현재도 알렉산드르 빅토로비치 초이는 사샤(알렉산드르의 애칭) 초이로 음악 활동을 하는 중이다. 이후 인터뷰를 보면 아버지가 죽은 후 빅토르 초이의 팬들이 초이의 죽음을 자기 어머니에게 풀며 폭행까지 하려고 했고(...) 학교에서도 초이의 아들이라며 아버지와 비교당하며 살며 음악을 하는 지금도 악플에 시달린다고 한다. 다만 노래 '나의 일부(나에겐 없는)'에서 생전 빅토르 초이와 자신이 같이 찍었던 어린 시절의 짤막한 비디오들로 뮤비를 만드는 것으로 보아 아버지에 대한 악감정은 많이 사라진 듯. 키노와 협업하기도 한다.[6] 키노의 전신[7] 'Цой жив'는 '초이 지프'라고 읽으며, 러시아인들이 빅토르 초이의 음악을 들으면서 그를 기릴 때 제일 많이 하는 말이다. "초이의 정신은 영원히 우리 가슴 속에 살아 있다"고 의역할 수 있다. 빅토르 초이가 한국계라는 것을 아는 팬들은 이 문장을 한국어 번역기로 번역하여 써놓곤 하는데, 오역이 나올 때가 많다. 과거 구글 번역에 ‘Цой жив'를 입력하면 ‘최살아’라는 오역이 나왔는데, 한국 팬들 사이에서 재미로 이를 따라하는 경우가 많다.[8] 학술적으로는 콘체비치 표기법에 따라서 어두에서의 ㅈ을 Ч, 통상적인 ㅊ을 Чх로 전사한다. 그래서 '주체사상'은 'Чучхе'로 표기한다. 다만 러시아어 원어민들 입장에서는 'Чх' 같은 자음쌍이 상당히 이질적이고 발음하기 힘든 데다 발음을 잘못하는 문제가 있어 그냥 Ч로 전사하는 사례가 많다. 'Чучхе'만 보더라도 원래 의도는 'Чу-чхе'인데 많은 러시아인들은 'Чуч-хе'로 읽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9] 크즐오르다는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를 온 곳으로, 홍범도 장군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 유명하다.[10] 이것을 근거로 카자흐스탄에서는 초이를 카자흐스탄인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 외 위키에 따르면 출생은 상트페테르부르크지만 어린 시절 크즐오르다에서 성장했다는 식의 말도 있는데, 사실인지는 확인이 필요한 부분.[11] 참고로 빅토르 초이의 아들인 알렉산드르 초이는 쿼터이기도 해서인지 외모가 거의 백인이다.[12] 사실 몽골-타타르의 멍에 등 따지고 보면 그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13] 여담으로 러시아 현지에서는 초이의 동아시아인스런 외모 때문인지 농반진반 사하 공화국처럼 극동 지방 출신인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14] 1990년 모스크바 잡지 "무지칼니 올림프"(Музыкальный Олимп) 인터뷰 중.[15] 초이의 증조모의 성씨 '유가이'는 유씨 성을 의미하는 '유가(-哥)'를 러시아식으로 표기한 성씨. 즉, 원래 유씨였다는 소리다. 고려인이나 한국계 러시아인 중 성씨가 '-가이'로 끝나면 다 이 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16] 일각에선 빅토르 초이 가명이 최민이란 말도 있는데, 실제론 할아버지 가명으로 보인다. 사실관계 확인이 필요한 부분.[17] 초이의 유치원 교사는 초이의 부모에게 초이를 미술학교에 보내라고 말하기도 했다.[18] 의외라면 의외로 당시 소련은 서구와는 거리가 먼 제2세계 국가였지만, 암시장이나 다양한 루트로 서방의 음반(또는 해적판)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나 빅토르 초이가 살았던 레닌그라드는 지척에 핀란드가 있어서 서방의 음반을 구하기가 더욱 쉬웠다.[19] 종종 초이를 다룬 글에서 '시콜라/쉬콜라(школа/shkola)'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그냥 러시아판 중고등학교 혹은 중등 교육 과정이다.[20] 보일러공이라고 퉁치기도 하지만, 화부는 주로 석탄이나 나무 등을 보일러에 투입하여 불을 때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의미하고, 보일러공은 보일러의 유지 보수 및 관리를 담당하는 직업이라 좀 차이는 있다. 보일러 자동화 시설이 발달한 21세기엔 잘 보기 힘든 직업.[21] 물론 젊은층에선 알게 모르게 인기가 있었는지 1950~60년대 동구권에 방문한 서유럽 기자들에게 젊은이들이 끊임없이 "로큰롤 레코드를 구해다 줄 수 있느냐"를 묻거나 일렉트릭 기타를 만들기 위해 공중전화를 부숴서 전화기 수화기를 훔쳐가는 사건이 빈발했다는 일화가 있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자체 '빽판'까지 만들어 듣기에 이른다. 당시 속어로 '갈비뼈(рёбра, 료브라)'라고 불리던 이 빽판의 재료는 (놀랍게도) 병원에서 쓰고 버린 X레이 필름이었는데, 특수 기계에 넣어 가운데 구멍을 뚫고 실제 LP처럼 가장자리를 둥글게 처리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다만 재료가 재료다보니 고작해야 5-10회 재생이 한도였다고 한다. 이 빽판은 이후 카세트테이프로 대체되었다. 키노의 정규 1집 '45'의 수록곡 '당신도 한때는 비트닉이었잖아요(Когда-то ты был битником)'에 등장하는 가사 'Ты готов был отдать душу за рок-н-ролл, Извлечённый из снимка чужой диафрагмы(당신도 한때는 락앤롤에 영혼까지 바칠 정도로 심취해 있었잖아요, 다른 누군가의 횡격막 사진(X-레이 필름)으로 찍어낸 그 락앤롤 말이에요 - 의역)'에서 언급된다.[22] 재즈의 경우도 스탈린 시절에는 '즈다노프시나'(Ждановщина)로 대표되는 상당한 탄압을 받았으나 스탈린 사후에는 그 인기로 인해 사실상 정식 장르로 편입되었다.[23] 러시아 표기법상 '조파르크'가 맞겠으나 한국에서는 영어로 해석한 건지 '주파르크'로 알려져 있으며(참고로 이 단어는 영어가 아니라 'Зоологи́ческий па́рк'의 축약어이다), '조(오)파르크'라는 표기법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실제 발음은 'a'에 강세가 들어가 '[zɐɐˈpark](자아파르크)' 정도이다.[24] 그런데 웃기게도, 몇 년 뒤 빅토르가 앨범 '밤'을 찍다 영 아니다 싶어 프로젝트를 폐기하자 당시 사운드 엔지니어였던 안드레이 트로필로가 이를 멜로디야로 가져가 좀 손을 본 뒤 발매했고, 이는 무려 20만 장이 팔리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멜로디야 측에서 키노에게 지불한 저작권료는 0루블이었다.[25] 엘렉트리치카는 한국의 광역전철 개념과 비슷한, 러시아의 대도시 근방을 잇는 전기철도를 가리킨다. 통근용으로 애용된다.[26] 한국 웹에서는 이로 인해 공공장소에서 공연을 금지당했다는 설이 퍼지기도 했으나, 실제로는 당국에 제재를 받은 전적이 없다고 한다. 키노는 85년 이전엔 딱히 당국의 제재 운운할 큰 유명세도 없었고, 유명해진 이후엔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당국의 제재 자체가 느슨해졌기 때문.[27] 초이는 사망할 때까지 가수 겸 보일러공으로 일했다. 당시 소련의 아파트들은 중앙집중식으로 난방되었고 초이의 업무는 아파트 지하에 있는 보일러실에 석탄을 퍼넣는 화부 역할이였다. 소련 시절에는 무직이 금지되어 있었고 보일러공은 업무 시간이 짧다보니 초이가 음악 활동에 전념할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28] 다만 후술되어있듯 초이 본인은 다른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촉구하는 뜻으로 이 노래를 듣고 싶다면 그건 그 사람의 자유라며 그러라고 밝히기도 했다.[29] 마리안나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일부.[30] 대충 의미가 한국의 마티즈 드립과 비슷하며, 유사한 상황에서 쓰인다.[31] 다만 이미지에 비하면 덜 피는 편이라, 하루 한갑 미만이었다고 한다.[32] 다만 2019년 재결성한다.[33] 공연으로도 거의 수익을 얻지 못했지만 초이는 이에 대해 큰 불만은 없었으며 자신들의 노래를 좋아하는 대중들을 위해 서비스 개념으로 진행한 것에 가깝다. 언론과의 인터뷰 질문에서도 늘 유명세나 상업적 성공에 대해선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었다.[34] 根付. 일본식 나무 조각 공예품. 학창 시절 배웠다고 한다.[35] 이 외 소련 담배 "벨로모르"도 즐겨 피웠다는 기록이 있다.[36] 마리안나는 키노의 무대를 꾸미거나 초이의 의상을 디자인하는 등 키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초이 사후 번역가로도 활동했고, 키노 콘서트 주최, 앨범 제작에도 참여했으며 남편에 대한 책도 냈다.[37] 현재 사샤는 아버지를 이어 뮤지션 일을 하고 있다. 키노 콘서트 제작에도 참여한 바 있다.[38] 빅토르는 아들을 매우 아꼈다. 죽음의 원인이 된 낚시 여행 당시에도 원래는 같이 데려가려 하였으나, 사샤가 유난히 잠에서 깨질 않아서 빅토르 혼자만 여행을 갔기에 역설적으로 사샤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39] 아버지라고 해도 5살 당시 사망했으니 그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빅토르 사망 이후 한국 다큐멘터리 팀이 빅토르에 대해 유족을 찾아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갓 초등학생이었던 어린 사샤가 카메라에 대고 아버지의 얼굴이 달린 배지를 자랑하는 안타까운 장면을 보여주었다.[40] 초이 사망 이후 일부 과격한 팬들이 집까지 찾아와 마리안나에게 욕설을 하고 폭행까지 하기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지금도 러시아 웹에서는 "아버지와 닮지 않았다"(일단 모친을 더 닮은 편으로, 인종도 아버지와 달리 백인 모습에 가깝다), "돈 때문에 키노를 예토전생시켰다", "아버지의 이름을 팔아 음악 활동을 하면서 성씨도 갈아치웠다", "키노의 저작권을 전부 꿀꺽했다" 등 인신 공격 수준의 댓글이 심심찮게 보일 지경이다.[41] 빅토르에 대한 이야기는 집에서 거의 오가지 않았다고 한다. 모친 마리안나와 외조모 발렌티나는 빅토르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꺼내지 않았고, 기분이 좋은 날에나 가끔씩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42] 영화 후반부에 등장해 Дальше действовать будем мы (우린 계속 행동할 것이다)를 부른다. 배경으로 당시 초이가 화부로 일하는 장면 등이 스쳐 지나간다.[43] 세르게이 리센코 감독의 대학 졸업 작품용 단편 영화. 키노의 4곡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44] 소련의 록씬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빅토르 초이가 화부로 일하는 장면이 나온다.[45] 엔딩 부분에 등장해 Перемен!(변화!)를 부른다. 초이와 키노의 유일한 등장 장면이지만 유명세 문제 + 상당히 인상깊은 연출로 인해 이 부분만 기억하는 사람들도 많고, 아싸가 초이 주연의 영화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참고로 이 영화의 주연은 당시 레닌그라드의 음악가였던 세르게이 '아프리카' 부가예프(Сергей 'Африка' Бугаев)이며 실제 삽입곡도 아크바리움 노래 등이 주(主)이다.[46] 알렉산드르 부르체프 감독의 작품으로 1988년 버전과 1990년 버전으로 나뉜다. 88년도 버전은 부르체프 감독의 대학원 졸업 작품용 단편영화로 런닝타임은 대략 40분 정도이다. 90년도 버전은 88년도 버전을 바탕으로 러닝타임을 83분 장편 영화로 확대했다. 1988년도 버전은 원래 알렉산드르 바실라초프를 주요 등장인물로 찍으려 하였으나 바실라초프가 자살하며 엎어졌고 대신 초이가 특별 출연했다. 이후 1990년 초이를 주요 등장인물로 장편으로 재촬영하러 하였으나 초이도 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데데테의 유리 셰프추크가 대신 출연하였다는 뒷이야기가 전해진다.[47] 저녁 식사 와중에 주연들 집을 방문하여 본인의 노래 '전설'(Легенда)을 부른다.[48] 라시드 누그마노프 감독과 미국의 SF작가 윌리엄 깁슨이 공동 기획한 미소합작 SF 사이버펑크 영화. 1990년 가을에 촬영 예정이었으나 주연을 맡을 빅토르 초이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취소되고 말았다.[49] 물론 상기되어있듯 키노 이전에도 록밴드들은 있었기 때문에 좀 과장은 있다. 다만 키노만큼 메이저 밴드로 큰 케이스는 키노 이전엔 매우 드물긴 했다.[50] 일반적으로 사하인 계열이라고 말한다.[51] 매우 현실적인 삶, 살기 힘들고 부조리한 현실을 의미하는 러시아어 관용어구.[52] 이 때문에 초이와 키노의 라이브 공연은 대부분 '아파트' 혹은 '나이트클럽' 녹음이 많다.[53] 텔레비조르의 1987년 노래 Три-четыре гада(개자식 서넛)이라는 노래를 들어보면 느낌이 빅토르 초이와 확연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54] 2018년 영화 레토 역시 이런 빅토르의 초창기 모습에 집중하고 있다.[55] '트롤리버스'를 이렇게 해석하는 시각은 특히 영미권에 아주 널리 퍼져있다. 영어로 kino trolleybus만 쳐도 중간중간 아프간 전쟁 관련 편집이 보일 정도. 상기했듯이 백수같은 스타일의 '46' 이나 '캄차트카의 지배인' 버전보다는 '마지막 영웅'의 리믹스를 틀어놓은 경우가 대부분이다.[56] 물론 이는 지역보단 개인차가 더 크긴 하다. 서구권에서도 정치 문제에 적극적인 연예인이 있는가 하면 반대도 있기 때문. 다만 후진국일수록 정치가 권위주의적일 확률도 높기 때문에 탄압을 우려해 더 거리를 두는 것일수도 있다. 빅토르 초이 역시 당시 소련이 점진적 자유화를 취하던 상황이었다곤 해도, 일당독재 국가라는 점엔 변함이 없었기에 대놓고 감방 갈 배짱으로 반정부적 포지션을 취하는 것 아닌 이상에야 인터뷰에선 내용을 자제하는게 자연스럽다.[57] 1990년 모스크바 잡지 "무지칼니 올림프"(Музыкальный Олимп) 인터뷰 중.[58] 여담으로 한국에서 빅토르 초이와 비슷한 작품 세계를 보여준 뮤지션이 양희은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녀도 빅토르처럼 초기에는 정치적인 요소에 무관심한 편이었고, 이후로도 직접 정치 논객으로 활동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부른 아침 이슬 등으로 대중들로부터 진보 성향의 민중가요 가수로 인식되어왔고, 스스로도 이를 인지하고 의식하는 모습은 꾸준히 보여왔다.[59] 상기되어있듯 어머니는 러시아인이다.[60] 여담으로 러시아권에선 역으로 소련 가수긴 하지만, 그의 독특한 음악 세계는 그의 집안이 동양(한국계) 출신으로 각 문화의 정반합이 가능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포커스를 맞추는 시선도 있다.[61] 당시 일장기가 그려진 티셔츠를 구매했는데, 그 유명한 올림픽 공연 당시 이 티셔츠를 입고 나와 "반자이!"를 외친 영상이 지금도 남아 있다.[62] 이 요리의 정체는 알 수 없지만 혹자는 마르코프차로 추측하기도 한다. 요리를 아는 한국 사람들은 흔히 '당근 김치' 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근을 얇게 채썰어 기름 등에 무친 일종의 샐러드인데, 사실 한국 고유의 특별한 요리는 아니지만 고려인들에 의해 시작되었기 때문에 한국식 요리나 반찬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현재는 러시아에서 주류 반찬으로 자리잡았으며, 짜장면과 라멘 그리고 캘리포니아 롤처럼 '본국과 크게 괴리된 본국 요리'의 사례로 꼽힌다.[63] 실제 모 라디오 방송에서 사용한 과장된 수식어구.[64] Joanna Stingray (~1960). 로스앤젤레스 출신, 1984년 첫 소련 방문을 시작으로 키노아크바리움, 알리사 등 여러 음악가들과 교류하며 소련 락 음악을 서방 국가로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아버지는 반소 다큐멘터리를 제작할만큼 극성 반공주의자였다고 한다. 80년대 초중반엔 미소관계가 험악했을 때라 마치 오늘날 외국인들이 북한을 여행하듯 미국인의 소련 여행이 최대 일주일간 매우 제한적인 단체 여행으로만 이뤄졌는데, 음악가들을 만나기 위해 여행 도중 이탈하거나 소련 음악이 녹음된 카세트를 몰래 미국으로 가져오기도 한 용감한 여성. 미국과 소련을 너무 자주 오가다보니 FBI와 KGB 양쪽에서 간첩으로 의심을 받기도 했다고, 1990년 8월엔 절친이였던 초이의 사망 소식을 듣고 오랫동안 공허함에 괴로워했다고 한다. 이후 1996년까지 러시아에 머물며 음악가 및 방송 관련 활동을 하다가 미국으로 귀국.[65] 초이가 미국을 여행한 것과 키노의 일부 노래가 영어로 발매된 것도 그녀의 도움으로 이뤄졌다. 특히 초이가 처음 디즈니랜드에 놀러갔을 때 어린 아이처럼 정말 즐거워했다고 한다.[66] 냉대기후인 발트해 연안은 겨울이면 늘 춥고 습한데다 흐리고 눈과 비가 자주 내린다. 반면 여름은 15~25도 정도의 기온에 맑고 건조해서 야외활동하기 좋다보니 여름을 낭만적인 계절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사족으로 우연의 일치인지 초이는 하지에 태어났다.[67] 한 예로 1982년, 초이와 마리안나는 모스크바에서의 크바르티르니크를 위해 집에서 떠나려고 했다. 이때 빌은 그들이 자신을 버리고 간다고 생각해 긴장하여 초이의 손바닥을 세게 물었다. 초이의 손이 크게 다쳤고, 고통은 모스크바로 떠나는 기차에서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이는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무리를 지었다.[68] 초이는 피 공포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신병원 입원을 위해 손목을 긋기도 했다.[69] 초이의 대표곡으로 유명한 혈액형 역시 직접적으로 전쟁을 언급하지 않지만, 당시 명분도 없는 침략전쟁에 투입되어 상부의 명령으로 원치 않는 살인을 저지르고 죽을 지도 모르는 전투에서 싸워야 했던 소련 청년들의 심정을 잘 나타낸 반전가요로 평가받는다.[70] 최종적으로는 조울증 진단을 받아내서 징병을 피하는데 성공했다.[71] 도돌레프의 증언에 따르면 발표 이후 있었던 연회에서 라스토르구예프가 술잔을 들고 건배사를 하자 "여기 팝이나 찍어내는 놈들은 설 자리가 아니다, 진짜배기 락커들만이 초이를 추모할 수 있다, 나머지는 입이나 닥치고 있어야 한다"(попсовым фонограмщикам здесь не место, скорбеть по поводу Цоя смеют лишь истинные рокеры, а остальные обязаны помалкивать)"라며 셰프추크가 덤벼들었다고 한다. 동료 음악가인 알렉산드르 스클랴르(Александр Скляр)가 둘을 떼어놓았다고 한다. 약 두 달 뒤에 코냑을 거하게 마시고 같이 풀었다고.[72] 위 목록의 노래들은 "실제로 초이가 작곡했으며, 본인이 부르거나 노래로 취입한 경우"에 한정한다. 초이가 가사는 썼지만 멜로디는 붙이지 못한 노래들도 상당히 많으며 이들의 원고가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들도 많은데, 해당 노래들까지 위 목록이 포괄하고 있지는 않다.[73] 1980년대 후반부터 활동했다는 설도 있다.[74] 현재 쿠르나예프는 고로트(Город)라는 이름의 밴드를 이끌고 있는데, 현재 그의 목소리는 초이와 많이 달라진 상태이다.[75] 해당 노래의 멜로디, 특히 시작 부분의 리프는 더 스미스의 "Barbarism begins at home"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의견이 있다.[76] 본문에 빅토르 초이의 노래라고 언급된다. 그러나 이는 오역인 듯 하다. 원래 가사는 "А кто будет петь, если все будут спать?"로, 해석하면 "모두가 잠들면 누가 노래하리"에 가깝다.[77] 본명이 안나 빅토로브나 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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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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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초이
Виктор Цой
초이(1986년)
기본 정보
본명Виктор Робертович Цой
로마자 표기Viktor Robertovich Tsoi
출생1962년 6월 21일
소련 러시아 SFSR 레닌그라드
사망1990년 8월 15일(28세)
소련 라트비아 SSR 투쿰스구 투쿰스
성별남성
거주지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직업싱어송라이터영화배우
장르록 음악뉴 웨이브포스트펑크
활동 시기1979년~1990년
악기기타
학력전문대학 중퇴
배우자마리야나 이고리예브나 초이
가족할아버지 막심 초이(최승준)
아버지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초이(최동열)
어머니 발렌티나 바실리예브나 초이
아들 알렉산드르 빅토로비치 몰차노프 초이
레이블앤트롭, 멜로디야
서명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러시아어Ви́ктор Ро́бертович Цой러시아어 발음: [ˈvʲikt̪ər ˈrobʲɪrt̪əvʲɪtɕ ˈtsoi̯]1962년 6월 21일~1990년 8월 15일)는 소련의  가수싱어송라이터배우이며 록 음악 밴드 키노의 공동 창설자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어계 성 '초이(러시아어Цой)'의 원어 발음을 살린 빅토르 최로도 알려져 있다.

1962년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나 청소년기에 작곡을 시작했고 이후 음악인으로 활동하면서 10개의 앨범을 포함해 다수의 음악들을 작곡했다. 1987년 소련의 영화 아사에 키노가 출연하고 6번째 앨범 혈액형을 발표하면서 "키노매니아(영어Kinomaina)"의 시대가 열렸고 그는 1988년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예술 영화 이글라에서 주연을 맡았다. 1990년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콘서트를 진행한 후, 초이는 동료 유리 카스파랸과 함께 키노의 새로운 앨범을 만들기 위해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정착했다. 콘서트를 진행한 지 2달 뒤 초이는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1]

초이는 자신의 음악과 가사에 인생의 철학을 담았다는 평가를 받았다.[2] 그는 1980년대와 1990년대 러시아의 록 음악을 개척한 가장 중요한 인물들 중 한 명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록 음악이 소련의 청년들에게 확산되는데 기여했다. 그는 소련 해체 이후에도 러시아인들에게 기억되고 있으며 러시아 음악사에서 중요한 인물들 중 한 명으로 여겨지고 있다.[3][4][2]

생애

어린 시절

빅토르 초이는 1962년 6월 21일소련 레닌그라드에서 고려인 아버지 로베르트 막시모비치 초이(최동열)와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슬하 무녀독남 외동아들로 출생하였다. 친조부 막심 초이(최승준)는 본래 대한제국 함경북도 성진 출생이었고 후일 일제 강점기 초기에 러시아 제국으로 건너간 고려인 출신이었다. 소련 레닌그라드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소련 카자흐스탄 사회주의 자치공화국 키질로르다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7세 때부터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초기 곡들은 레닌그라드 거리에서의 삶, 사랑과 친구들과의 어울림 등을 다루고 있다. 노래의 주인공은 주로 한정된 기회만이 주어진 채 각박한 세상을 살아나가려는 젊은이였다. 이 시기에 은 레닌그라드에서만 태동하고 있던 언더그라운드의 한 움직임이었으며, 음악 차트 등의 대중 매체들은 모스크바의 팝 스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소련 정부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가수들에게만 허가를 내 주었고, 집과 녹음실 등 성공이 필요한 많은 것들을 제공하여 길들였다. 그러나 록 음악은 그 당시 소련 정부에게 너무도 마땅치 않은 음악이었다. 록은 자본주의 진영의 록 그룹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외에도 젊은이들을 반항적으로 만들었으며, 의사 표현의 자유 등 표현 관련 가치를 중시했다. 따라서 록 밴드들은 정부로부터 거의 원조를 받지 못했고 관영 매체에 의해 마약 중독자나 부랑자라는 편견으로 그려지는 수준이었다.

빅토르 초이는 레닌그라드에 있는 세로프 미술전문학교에 입학였으나, 결국 낮은 성적 때문에 1977년에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 후 레닌그라드 기술전문학교에서 목공업을 공부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또 중퇴하였다(이와 같은 사항들로 인하여 그의 학력은 전문대학 중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이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록 음악에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이 시기에 이르러 그는 보일러 수리공으로 일을 하면서 파티 등의 장소에서 자신이 만든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한 연주를 록 그룹 아쿠아리움의 멤버였던 보리스 그레벤시코프가 보게 되어, 그레벤시코프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의 밴드를 시작하게 된다.

데뷔 초기

레닌그라드 록 클럽은 록 밴드들이 연주할 수 있던 소수 장소에 속했다. 이곳의 연중 록 콘서트에서 빅토르 초이는 처음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그는 두 명의 아쿠아리움의 멤버들이 연주를 맡은 가운데 솔로로 연주한다. 그의 혁신적인 가사와 음악은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가 유명해지기 전에 그는 음악하는 사람들이 도전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실험적으로 가사와 음악을 만들었다. 이런 시도는 성공을 거두고, 데뷔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멤버들을 모아 키노(러시아어로 영화, 극장이라는 뜻이다)를 결성한다. 그들은 빅토르 초이의 아파트에서 데모 테이프를 만들고, 이 음반(데모 테이프)은 애초, 그 처음엔 레닌그라드, 그리고 나중에는 전국의 록 매니아들에게 퍼지게 된다.

데뷔 이후

1982년 키노는 첫 앨범인 45(소로크 피아트; 러시아어로 45라는 뜻)를 발표한다. 이 앨범의 이름이 45로 정해진 것은, 이 앨범의 재생시간이 총 45분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46(쏘록 쉐스찌)라는 앨범도 냈다.) 이 앨범에서 빅토르 초이는 음악에 정치적 목소리를 내려는 의지를 내비친다. "엘렉트리치카(Elektrichka, 소련의 광역 전철)"이란 노래는 원치 않은 곳으로 가는 전차에 끼여 끌려가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런 가사는 분명히 당시의 소련에서의 삶을 은유한 것이었으며, 이 노래는 공연이 금지된다. 이 노래의 메시지로 노래는 반항운동을 하던 젊은이들 사이에 유명해지며 키노와 빅토르 초이는 그들의 우상으로 떠오른다. 제2회 레닌그라드 록 클럽 콘서트에서 키노는 자신의 정치색을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키노는 빅토르 초이의 반전음악 작품인 "내 집을 비핵화지대로 선포한다."으로 1등을 차지하고, 이 노래는 당시 수만의 소련 젊은이들의 목숨을 빼앗고 있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더욱 더 유명해진다.

전성기

1987년은 키노의 해였다. 7집 앨범 《혈액형(Gruppa krovi)》은 "키노매니아"로까지 불리는 사회현상을 불러일으킨다. 글라스노스트로 조금 더 개방적이 된 정치상황은 그의 가장 정치색이 짙은 앨범인 "혈액형"을 만들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앨범의 메시지만이 청중을 사로잡은 것이 아니었고, 앨범에 담긴 음악 또한 이전에는 듣지 못하던 것이었다. 대부분의 곡은 소련의 젊은이들을 향한 외침이었으며, 능동적으로 나가서 국가를 변화시키라고 호소했다. 몇 개의 노래는 소련을 옥죄고 있던 사회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앨범은 빅토르 초이와 키노를 러시아 젊은이들의 영웅으로 등극시켰다. 1988년에는 영화 《이글라》의 주연으로 영화배우 데뷔를 하기도 하였다. 이후 몇 년간 그는 몇 편의 성공적인 영화를 찍었으며 영화제에 그의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몇 개의 앨범이 더 나왔으며, 대부분이 정치적 메시지를 담았으며 밴드는 인기를 유지했다. 그는 당시 소련 젊은이 모두의 우상이었지만, 그런 것에 비하여 그는 소위 비교적 보통 수준의 삶을 살았다. 그는 계속 아파트 빌딩의 보일러 실에서 살며 일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즐기고 있으며 정부의 보조를 받지 못하고 있고, 자신들의 앨범은 공짜로 복제되어 퍼지기 때문에 밴드를 유지하기 위하여서라도 금액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런 소박한 삶의 방식은 대중들이 그와 더욱 친밀감을 느끼기에 매우 충분했다.

갑작스러운 사망, 그리고 음모론

모스크바 빅토르 초이 추모 그라피티 2
1999년 러시아에서 발행된 빅토르 초이 추모우표 (Michel 762, Scott 6548)

1990년 키노는 모스크바의 레닌 스타디움에서 콘서트를 열어 관중 약 6만 2천여의 팬들을 모았다. 1990년 8월 14일 다음 앨범의 녹음을 마쳤으며, 레닌그라드에서 다른 멤버들이 녹음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초이는 결국, 다음날(8월 15일), 레닌그라드로 행선지를 바꾸어 행선길을 행보하려던 찰나에, 당일(8월 15일) 아침 소련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리가를 경유하여 행선하던 가운데 투쿰스에서 빅토르 초이가 운전하던 차가 마주오던 트럭과 충돌하였고 결국 하여금 그 사고로 인하여 죽고 말았다. 그가 운전하였던 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망가졌으며, 타이어 하나는 결국 찾지 못했다.

음모론에 따르면, KGB가 의도적으로 초이를 살해했다고 한다. 평소 반전과 평화 사상을 주장하던 초이가 러시아 권력자들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실제로 트럭 기사가 종적을 감추고, 초이에게 유리한 목격자들의 증언이 기각되었으며(초이는 졸지도 않았음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운전 규칙을 어기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트럭 기사가 그에게 돌진했다는 사실), 시체가 봉인된 관에 담겨 서둘러 매장되었다는 사실 등 의문스러운 점이 한두 곳이 아니지만, 현재 러시아 경찰과 정부는 27년 동안 이 사안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1990년 8월 17일 소련의 유력 잡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다음과 같이 그의 의미를 간추린다.

빅토르 초이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에게 다른 어떤 정치인들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한번도 거짓말하거나 자신을 팔아먹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빅토르 초이였고,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그를 믿지 않을 수 없다. 대중에게 보인 모습과 실제 삶의 모습이 다름없는 유일한 락커가 빅토르 초이이다. 그는 그가 노래부른 대로 살았다. 그는 록의 마지막 영웅이다.

놀랍게도 교통사고에서 온전하게 건질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다음 앨범에 쓰일 그의 목소리를 담은 테이프이었다. 목소리는 남은 멤버들의 나머지 녹음과 합쳐져 현재는 "블랙 앨범"으로 불리는 앨범으로 남아 있다. 이 유작 앨범은 밴드의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며 러시아 록 역사에 있어서 키노의 자리를 확고하게 했으며, 빅토르 초이를 최고의 영웅이자 전설로 만들었다.

키노가 소비에트 음악과 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들은 이전의 다른 어떤 그룹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음악과 가사로 노래를 만들었다. 키노는 모던 러시아 록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키노는 아직도 러시아 전역에서 흔적을 남기고 있다. 레닌그라드 벽에는 그들에 대한 그라피티가 그려지고 있으며,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가에는 한 벽 전체가 그들에게 헌정되었으며, 그곳에는 그를 기리기 위한 팬들이 모인다. 사망 10주기였던 2000년에는 러시아의 록 밴드들이 모여 빅토르 초이의 38번째 생일을 맞아 빅토르 초이의 헌정 음반을 만들었다.[5]

최근

2010년 8월 16일은 그의 20주기로써, 러시아 곳곳에서 추도식이 있었다고 보도되었다[6]. 또한 2018년에는 그와 그 주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인 《레토》가 개봉하였으며, 대한민국에는 2019년 1월 개봉하였다. 《레토》는 칸 영화제에서 사운드트랙 필름어워드 상을 수상하는 등 쾌거를 거두었으며,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가택 연금 중 만든 작품이라는 특징이 있다.

같이 보기

각주

  1.  “Retour en URSS : gloire du Soviet Rock et de Viktor Tsoï”. 《dispatchbox.net》 (프랑스어). 2013년 7월 14일. 2024년 7월 4일에 확인함.
  2.  “러시아가 사랑한 고려인 가수, 빅토르 최”. 《네이버 뉴스》. YTN. 2016년 7월 17일. 2024년 7월 4일에 확인함.
  3.  이재원 (2014년 2월 16일). “푸틴, 안현수 금메달 축전에 언급한 '빅토르 최'…누구?”. 《네이버 뉴스. 2024년 7월 4일에 확인함.
  4.  지일우 (2015년 5월 14일). “소련 최고 록 뮤지션 빅토르 최 인기 '여전'. 《네이버 뉴스》. 연합뉴스. 2024년 7월 4일에 확인함.
  5.  동아일보 (2000년 8월 16일). “[클로즈 업] 요절한 한국계 록가수 '빅토르 초이'. 2008년 9월 19일에 확인함.
  6.  ‘빅토르 최’ 20주기 러 곳곳 추모행사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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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ktor Ts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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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ktor Tsoi
Виктор Цой
Tsoi in 1986, sitting on the floor and drinking tea
Tsoi in 1986
Born21 June 1962
Leningrad, Soviet Union
Died15 August 1990 (aged 28)
Zentene, Latvia
Cause of deathTraffic collision
Resting placeBogoslovskoe Cemetery, Saint Petersburg, Russia
Occupations
  • Singer
  • songwriter
  • composer
  • actor
Years active1978–1990
Spouse
Marianna Tsoi
(m. 1985, separated)
ChildrenAlexander Tsoi
Musical career
Genres
Instruments
  • Vocals
  • guitar
  • bass
  • piano[7]
Labels
Formerly of
Signature

Viktor Robertovich Tsoi (RussianВиктор Робертович ЦойIPA: [ˈvʲiktər ˈrobʲɪrtəvʲɪtɕ ˈtsoj]; 21 June 1962 – 15 August 1990) was a Soviet singer-songwriter and actor who co-founded Kino, one of the most popular and influential bands in the history of Russian music.

Born and raised in Leningrad (modern-day Saint Petersburg) to a Russian mother and Koryo-saram father, Tsoi started writing songs as a teenager. Throughout his career, Tsoi contributed a plethora of musical and artistic works, including ten albums. After Kino appeared and performed in the 1987 Soviet film Assa, the band's popularity surged, triggering a period referred to as "Kinomania", and leading to Tsoi's leading role in the 1988 Kazakh new wave art film The Needle. In 1990, after their high-profile concert at the Luzhniki Stadium, Tsoi briefly relocated to Latvia with bandmate Yuri Kasparyan to work on the band's next album. Two months after the concert, Tsoi died in a traffic collision.[8][9]

He is regarded as one of the most important pioneers of rock music in Russia and is credited with popularizing the genre throughout the Soviet Union.[10] Becoming popular by combining his music and lyrics with philosophy, he retains a devoted following throughout the former Soviet Union, where he is known as one of the most influential and popular people in the history of Russian music.[11][12]

Life and career

Early years

Viktor Robertovich Tsoi was born on 21 June 1962, in a maternity hospital on Kuznetsovskaya Street in Leningrad. He was the only child of Valentina Vasilyevna Tsoi (née Guseva), a Russian schoolteacher, and Robert Maximovich Tsoi, a Soviet Korean engineer from Kyzyl-Orda, Kazakhstan, where his Korean parents had been exiled after Stalin's 1937 deportation of Koreans in the Soviet Union.[13][14] The family's Korean ancestry can be traced back to SongjinHamgyong, Korea, present-day Kimchaek, North Korea, where Viktor's great-grandfather Choi Yong-nam was born in 1893.[15]

Tsoi's Korean clan was the Wonju Choe clan, sometimes spelled as Choi.[16] Koryo-saram, a term for ethnic Koreans living in the former USSR, preferred the surname Tsoi as a romanization of the cyrillic Цой.[17] Translated from Korean, the surnamed Choi means "height" or "top".[18][19]

Tsoi grew up in the vicinity of the Moskovsky Victory Park. The family lived in the notable "general's house" at the corner of Moskovsky Avenue and Basseynaya Street.[20] For some time, Tsoi studied at a nearby school on Frunze Street, where his mother worked.[21]

From 1974 until 1977, Tsoi attended a secondary art school, where he was a member of the band Palata No. 6 (RussianПалата № 6, English: "Ward No. 6").[22] The only surviving recording of the group is an album titled "Slonolunie".[23] Around the same time, he wrote his first two songs – "Vasya Loves Disco" and "Idiot", though neither were ever performed.[24]

From 1977, he attended the Serov Art School, until he was expelled in 1979 for poor academic performance.[25] Afterwards, he attended SGPTU-61, a secondary city vocational school, where he studied to become a woodcarver.[26][27] In his youth, he was a fan of Mikhail Boyarsky and Vladimir Vysotsky, and later Bruce Lee, after whom he started modelling his image.[28][29] He was fond of martial arts and often sparred "in Chinese" with bandmate Yuri Kasparyan.

First steps in music

Tsoi began writing songs at the age of 17. In the 1970s and the 1980s, rock music was an underground movement limited mostly to Leningrad. Moscow pop stars, endorsed by the Soviet state, ruled the charts and received the most exposure from the media. Rock music was not popular with the government, and rock bands received little to no funding and were given little exposure by the media. The Leningrad Rock Club was one of the few public places where rock bands were allowed to perform.

In the late 1970s and early 1980s, Tsoi was a close friend of Alexei Rybin. Rybin, a member of the hard rock band Piligrimy (RussianПилигримыlit.'Pilgrims'), and Tsoi, who played bass guitar in the group Palata # 6 (RussianПалата № 6lit.'Chamber # 6'), met at the house of Andrei "Svin" Panov, in whose apartment people and musicians often gathered, and also where his own punk band Avtomaticheskie udovletvoriteli rehearsed. By this time, Tsoi began to perform the songs he wrote at parties.

Tsoi and Rybin, as members of Автоматические удовлетворители (Avtomaticheskie udovletvoriteli), went to Moscow and performed punk-rock metal at Artemy Troitsky's underground concerts. During a similar performance in Leningrad on the occasion of Andrei Tropillo's anniversary, Tsoi and Rybin first met Boris Grebenshchikov. Later, after a solo concert by Grebenshchikov, they met up and Tsoi played two of his songs to him.[30] Grebenshchikov, who had already been a relatively established musician in the Leningrad underground scene, was very impressed by Tsoi's talent and helped him start up his own band.

Beginnings of Kino

At the Leningrad Rock Club, Tsoi played as a solo artist supported by members of the band Aquarium. Tsoi's lyrics and music impressed the crowd. In the summer of 1981, Tsoi, Rybin, and Oleg Valinsky formed the band Garin i giperboloydy (RussianГарин и Гиперболоидыlit.'Garin and the hyperboloids'). The name was a homage to the classic Russian novel The Hyperboloid of Engineer Garin by Aleksey Tolstoy. In autumn 1981, the band was admitted to membership of the Leningrad Rock Club. Not long after, Valinsky was conscripted into the army, leaving only Tsoi and Rybin, who renamed the band to Kino. Kino began recording its debut album in the spring of 1982.

First albums

In the spring of 1982, Kino began recording its debut album 45 at Andrei Tropillo's studio. Members of Aquarium took part in the recording, with Boris Grebenshchikov directing the album. By the summer, the album was completely finished. Its duration was 45 minutes, after which the album was named 45. The album got some distribution and Kino performed in many apartment concerts in Moscow and Leningrad.

On 19 February 1983, a joint concert with Kino and Aquarium took place. After the concert, Yuri Kasparyan was invited to join the band as a guitarist. In the spring, Rybin left Kino due to disagreements with Tsoi. Tsoi and Kasparyan spent the summer on joint rehearsals. As a result, Kino recorded the album 46, which was initially thought of as a demo for Nachalnik Kamchatki (RussianНачальник Камчаткиlit.'Chief of Kamchatka'). 46 was widely distributed and was considered to be a full-fledged album. In the fall of 1983, Tsoi went to a psychiatric hospital in Pryazhka, where he spent a month and a half. As a result, Tsoi was not conscripted into the army.[31] After being discharged from the psychiatric hospital, he wrote the song "Trankvilizator" (RussianТранквилизаторlit.'Tranquilizer').[32]

"Peremen!/"My zhdyom peremen" ("Changes!"/"We are waiting for changes"), first performed by Tsoi in the summer of 1986, quickly became an important political song, an embodiment of the spirit of the Perestroika. It remains a powerful political song, prominently used during 2020–2021 Belarusian protests.

Rise to fame

1987 was a breakthrough year for Kino. The release of their 6th album Gruppa Krovi (RussianГруппа кровиlit.'Blood Type') triggered what was then called "Kinomania". The open political climate under glasnost allowed Tsoi to make Gruppa Krovi, his most political album, yet it also allowed him to record a sound of music that no one before him had been able to play.

Most of the tracks on the album were directed at the youth of the Soviet Union, telling them to take control and make changes within the nation; some of the songs addressed the social problems crippling the nation. The sound and lyrics of the album made Tsoi a hero among Soviet youth and Kino the most popular rock band ever. In the diverse Soviet republics, fans translated his originally Russian lyrics into their native languages as well.

Over the next few years, Tsoi appeared in several successful movies and also travelled to the United States to promote his films at film festivals. Several more albums were released, their themes were once again mostly political, further fueling the band's popularity. Even though Tsoi was a huge star, he still lived a relatively ordinary life. He kept his old job in the boiler room of an apartment building, called Kamchatka, which is currently a museum/club dedicated to the singer.

The fact that he worked at a boiler plant surprised many people. Tsoi said that he enjoyed the work and he also needed the money to support the band, as they still received no government support and their albums were copied and passed around the nation via magnitizdat free of charge. This made Tsoi even more popular among the people because it showed that he was down to earth and they could relate to him. He also went on tour in 1988–1989 to Italy, France, and Denmark. Kino's finest hour came in 1990 with a concert at Moscow's Luzhniki Stadium; 62,000 fans filled the stands to celebrate the triumph of the USSR's most successful rock group. It also was one of the four times the Luzhniki Olympic Fire was ever lit.

Film appearances

In 1987, the band Kino, along with other Russian rock bands, appeared as themselves in Assa (RussianАсса), a film by Sergei Solovyov. However, the film as a whole has nothing to do with rock music, and Kino simply appears as a cameo in the end.

In 1988, Viktor Tsoi starred as the protagonist in The Needle (RussianИглаromanizedIgla), directed by Rashid Nugmanov and written by Aleksandr Baranov and Bakhyt Kilibayev. The plot is centered around the character Moro, who returns to Almaty, Kazakhstan, to collect money owed to him. While waiting out an unexpected delay, he visits his former girlfriend Dina and discovers she has become a morphine addict. He decides to help her quit and fight the local drug mafia responsible for her condition. But Moro finds a deadly opponent in "the doctor," the mafia kingpin who is exploiting Dina.[33] Tsoi was nominated for an award for his role in the film.[31]

The film's soundtrack, including original music by Tsoi's band Kino, contributes to the overall feeling of the movie, in addition to the film's use of post-modern twists and surreal scenes.

The movie was officially released in February 1989 in the Soviet Union.

Death

Tsoi's fans mourning in Leningrad

On 15 August 1990, in Latvia, Tsoi was driving on the Sloka – Talsi highway, near Tukums and Engure. At 12:28 p.m., Tsoi died in a car collision. The investigation concluded that Tsoi had fallen asleep while driving, possibly due to fatigue.[34][35] He had not consumed alcohol for at least 48 hours before his death.[36]

At the time he fell asleep, Tsoi was driving at a speed of at least 100 km/h (62 mph), causing his dark blue Moskvitch-2141[37] to turn into the oncoming lane and collide with an Ikarus 250 bus, 35 km (22 mi) on the highway from Sloka.[38] Tsoi was pronounced dead at the scene. Neither the driver or the bus were badly injured or damaged. Tsoi's car was completely destroyed, to the point that one of its tires was never found.

Tributes left at Tsoi's grave in St. Petersburg on the first anniversary of his death.

The death of Viktor Tsoi was a shock to many fans, with several reportedly killing themselves out of grief.[39] On 17 August, Komsomolskaya Pravda, one of the main Soviet newspapers, had the following to say about Tsoi and his meaning to the youth of the nation:

Tsoi means more to the young people of our nation than any politician, celebrity or writer. This is because Tsoi never lied and never sold out. He was and remains himself. It's impossible not to believe him... Tsoi is the only rocker who has no difference between his image and his real life, he lived the way he sang... Tsoi is the last hero of rock.

On 19 August, he was buried in a closed casket at the Bogoslovskoe Cemetery in Leningrad. Thousands of people came to the funeral.[40]

Kasparyan left for Leningrad prior to the collision, with a tape containing the only recording of Tsoi's vocals for the band's next album. The remaining members of Kino finished and released the Black Album in December. It later became one of the band's most popular albums.[citation needed]

Personal life

Viktor lived with his wife, Marianna Tsoi, and his son Alexander (born 1985). Tsoi lived a poor life, with Marianna saying that they could not even afford a proper wedding dress. The apartment building boiler room he worked at was nicknamed "Kamchatka", and is now the site of a museum and rock club dedicated to Tsoi.[41] He also previously worked in Kiev, Ukrainian SSR, but after the authorities found out he was working illegally, he was sent to Moscow.

During the filming of Assa, Tsoi met Natalia Razlogova, the director's assistant. Tsoi later fell in love with Razlogova and separated from Marianna. However, they did not divorce, for the sake of their son.[42]

Legacy

The Tsoi Wall in the Arbat District of Moscow
A Russian stamp devoted to Viktor Tsoi, 1999

Portraits of Viktor Tsoi are displayed today in many places around Russia, from graffiti on the fences of Saint Petersburg to an entire wall dedicated to Viktor Tsoi in a bylane of the famous Arbat Street in Moscow, where fans still gather to remember their hero. Other Tsoi Walls can also be found in Minsk, Belarus and in some regions of Kazakhstan. In 2000 some of the nation's top rock bands came together and released their interpretations of Kino's best songs as a tribute to Viktor Tsoi on what would have been his 38th birthday.[citation needed]

In 2012, on what would have been Tsoi's 50th birthday, the remaining members of Kino gathered to record the song "Ataman" (Russian«Атаман»), with his vocals that were recovered from his car crash but never used because of its poor quality. The drummer Georgiy Guryanov died in July 2013, making "Ataman" the last song recorded by Kino and its members.[citation needed]

On 15 August 2020, the 30th anniversary of Tsoi's death was marked. In memory of Tsoi, the Palace Bridge in St. Petersburg was lifted to his songs. Fans across the country commemorated his death, especially in his home city of St. Petersburg where a number of events and concerts were organised, as well as at the Tsoi Wall in Moscow. The day before, a 4-metre (13 ft) tall monument dedicated to Tsoi was erected in St. Petersburg in his memory.[43][44]

The South Korean rock band YB covered the song "Gruppa krovi" (Russian«Группа крови»lit.'Blood Type'; Korean혈액형) on their 1999 album Korean Rock Remade (Korean한국 ROCK 다시 부르기).[45]

Viktor An, a South Korean-born Russian short track speed skater, chose his Russian name "Viktor" in honour of Tsoi.[46]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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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ed sour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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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algin, V. N. Viktor Tsoi . - Molodaya Gvardiya, 2015. - 368 p. - (The Life of Remarkable People, Small Series; issue 77). ISBN 978-5-235-03751-9 .

Further reading

  • (in Russian) "Виктор Цой, 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 Стихи, Песни, Воспоминания", Eksmo, 2001.
  • Tsoi, Marianna; Aleksandr Zhitinsky (1991). Viktor Tsoi: stikhi, dokumenty, vospominaniya (in Russian). St. Peterburg: Novy Gelikon. ISBN 5-85395-018-5.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5 June 2010. Retrieved 18 April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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