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제국의 위안부'인가
일본군 慰安妇 2015/12/06 18:03 김 혁노벨문학상까지 거론되는 이창래 프린스턴대 교수의 대표작 중 하나가 장편소설 '척 하는 삶'(1999)이다. 세 살 때 부모 따라 미국 간 1.5세 작가가 일본군위안부의 참상(慘狀)을 뒤늦게 알고 충격받아 쓴 작품인데,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2년 동안 꼬박 쓴 500쪽 분량을 버리고 처음부터 새로 썼다는 점이다. 최초 버전의 주인공은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일제 패망 후 돌아온 한국 여성, 두 번째 버전 주인공은 그 만행을 옆에서 지켜본 한국계 일본인 군의관이었다.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관점이라는 게 차이였다.
이 작품을 떠올린 이유는 세종대 박유하(58) 교수와 그의 학술 연구서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논란 때문이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우리 검찰은 박 교수를 기소했고, 일본 친한파 인사들이 기소에 대한 항의 성명을 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성명 중 특히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다. '이 책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위안부 할머니들이 경험한 슬픔의 깊이와 복잡함이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의 독자들에게도 전해졌다고 느끼는 바입니다.' 성명 참여자 54명 중에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한 '고노 담화'의 주인공 고노 전 관방장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사죄한 무라야마 총리가 있다.
사실 박 교수를 친일파로 비난하는 일은 쉽고 또 통쾌하다. 우리가 남인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엉뚱한 소리 하는 사람을 어찌 옹호하나.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자. 우리끼리는 시원하고 유쾌한데, 다른 나라에는 어떻게 비칠까. 학문 연구에 대해 국가가 나서 처벌하겠다는 나라, 표현 자유를 법으로 막겠다는 나라를 국제사회가 과연 엄지손가락 들어 올리며 인정해줄 것인가.
오독과 오해의 소지가 있는 몇몇 구절과는 별도로 '제국의 위안부'를 읽고 나면 박 교수 주장의 핵심이 새로운 담론적 중간 지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차피 아베 총리로 대표되는 위안부 부정론자, 부인론자는 무슨 소리를 해도 소 귀에 경 읽기다. 설득해야 할 사람은 양심적 일본인이고, 당사자인 우리와 일본을 넘어 전 세계 시민인 것이다.
우리는 전후(戰後) 일본과 독일을 종종 비교한다. 진심으로 사과한 독일과 달리 일본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피해 당사자인 한민족과 유대인의 차이는 어떨까. 우리는 과연 유대인처럼 치밀하고 현명한 전략을 구사했을까.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유대계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고, 쉰들러의 선행은 기억하지만 그 쉰들러가 처음에는 독일인 기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가해자의 인격에만 의존하는 건 순진한 일. 참고로 주인공을 바꿔 다시 쓴 이창래의 '척 하는 삶'은 아니스필드-볼프 등 4개 문학상을 받으며 미국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환기(喚起)시켰다.
/어수웅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