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明의 수사학 : 남다른 사이였던 백제와 고대 일본
- by 解明
- 2015/05/04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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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년 7월,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기습 공격했습니다. 계백(階伯, ?~660)이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맞아 분전했으나, 끝내 방어선이 뚫려 버렸고, 사비성과 웅진성이 잇달아 떨어졌습니다. 백제의 의자왕(義慈王, ?~660, 재위 641~660)은 적에게 사로잡혀 당(唐)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쓸쓸히 죽었습니다. 이렇게 백제는 멸망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백제는 아직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도성과 왕을 잃었지만, 백제 땅 곳곳에서 나라를 되살리려는 부흥군이 들고일어나 나당 연합군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부흥군은 일본에 있던 왕자 부여풍(扶餘豐)을 데려와 왕으로 삼고 나당 연합군을 더 세게 압박했습니다. 백제가 다시 일어서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습니다.
663년 3월, 일본은 부흥군과 함께 나당 연합군과 싸울 2만7천 명이나 되는 대군을 한반도로 보냈습니다. 같은 해 8월, 일본 수군은 부흥군의 근거지인 주류성을 치고자 바다를 건너온 당의 수군을 백강 어귀에서 맞아 싸웠습니다.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일본군은 당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패하며 4백 척에 이르는 전선을 잃었습니다. 중국과 한국의 사서들은 이때 불탄 일본의 전선들에서 나는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환하게 했고, 바닷물을 붉게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싸움, 백강 전투 또는 백촌강 전투의 참패로 부흥군은 무너졌고, 백제는 정말로 멸망했습니다. 부여풍이 고구려로 망명했다는 풍문이 떠돌았고, 많은 백제인이 정든 고향을 등진 채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이와 같은 백제 최후의 날 풍경을 보면, 물음표 하나가 우리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일본은 무엇 때문에 당시 동아시아 최강국인 당과 전쟁을 벌이는 것도 마다치 않고, 백제를 도왔을까요?
일본에서는 백제가 일본의 속국이었으므로 속국의 멸망을 막고자 원군을 보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한국에서는 백제를 돕기로 마음먹은 사이메이덴노(斉明天皇, 594~661, 재위 655~661)를 비롯한 일본의 지배층이 백제 출신이기 때문에 조국을 부흥하고자 출병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조국부흥전쟁설인데, 여기에는 사이메이덴노가 의자왕의 누이였다는 근거 없는 상상까지 덧붙습니다. 다른 듯하지만, 다르지 않은 이 주장들을 사실로 받아들이기란 어렵습니다. 백제가 일본의 속국도 아니었지만, 속국이었다고 하더라도 정권이 무너지면서까지 속국을 돕는 나라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요? 또 일본의 지배층을 백제 출신으로 만들고자 억지로 사료를 비튼 조국부흥전쟁설도 설득력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고대 한일 관계의 역사를 연구한 김현구 교수는 앞의 두 주장을 모두 비판하면서 일본의 백제 부흥군 지원이 일종의 공세적 방어 전략이었다고 말합니다.
"일본은 당의 침입을 앉아서 기다리다 혼자서 싸우기보다는 한반도에 와서 백제·고구려와 연합전선을 펼치는 길을 선택했다. 일본이 왜 전쟁터를 한반도로 설정했는가는 1894년 청일전쟁의 장소를 한반도로 설정한 것이나, 제2차 세계대전 때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진주만(眞珠灣, Pearl Harbor)을 선제공격하여 전쟁터를 미국 쪽에 설정한 사실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반도로 와서 백제·고구려와 손을 잡고 당·신라와 싸우기로 한 이상, 일본은 백제가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정권의 운명을 걸고 백촌강싸움에 출병하게 된 것이다."
백제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바다 너머에서 들려오자 일본 열도는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백제에 이어 고구려까지 무너진다면, 머지않아 나당 연합군이 일본으로 쳐들어오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적들이 올 만한 곳에 성을 쌓아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했지만, 막상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인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물론 당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은 적잖은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것은 자신들도 백제처럼 멸망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크지 않았습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부흥군을 돕기로 한번 결정하자 일본은 통 크게 부흥군을 지원했습니다. 수만이 넘는 병력과 많은 군수 물자를 한반도로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앞에서 살펴봤듯이 일본군은 나당 연합군에 패했고, 주류성까지 함락되면서 백제 부흥 운동은 끝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이때 백제인들이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겼다"라며 한탄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백제와 왜는 특수한 용병 관계였다
김현구 교수의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관련 정보)는 제목만 보면 왠지 고대 일본이 백제의 속국이었다는 주장이 튀어나올 듯하지만, 실제로 책을 읽어 보면 그런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김 교수는 이 책에서 백제와 왜가 "특수한 용병관계"이자 "맹우"로서 대등한 사이였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백제는 일본에 필요한 선진문물을 제공하고, 일본은 백제에 필요한 군사원조를 제공하는 특수한 용병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용병관계는 기본적으로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왕의 역할이 절대적이던 당시로서는 용병관계의 이전 단계에서 이루어진 양국 왕실간의 오랜 혼인관계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오랜 인적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양국은 단지 용병관계로만 설명할 수 없는 관계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두 나라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 관계가 훨씬 깊었습니다. 고구려의 남진으로 위례성을 잃고 위기에 빠졌던 백제를 중흥한 군주인 무령왕(武寧王, 462~523, 재위 501~523)은 일본에서 나고 자랐다고 하는데, 나중에 무령왕이 죽어 무덤에 묻힐 때 쓰인 관이 일본의 특산종인 금송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백제와 왜가 남다른 사이였음을 암시합니다.
물론 왕실 사람들만 두 나라를 오갔던 것은 아닙니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간 사람도 많았지만, 왜에서 백제로 온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백제로 온 사람들 가운데에는 관료로 활약한 이도 있었습니다. 학자들이 흔히 왜계 백제 관료라고 부르는 이들은 일본에 군사 원조를 청하러 가는 사절단에 한두 사람씩 꼭 끼였는데, 왜계 백제 관료들이야말로 백제와 일본 간의 특수한 용병 관계를 만드는 주인공이었습니다. 뒷날 일본 지배층이 백제 부흥군을 통 크게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은 공세적 방어 전략 차원에서 일본 열도가 싸움터가 되는 것보다 한반도로 군사를 보내 싸우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두 나라가 오랫동안 깊은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백제가 멸망하고 일본이 제 갈 길을 가면서 백제와 왜의 인연은 거의 다 잊히거나 비틀렸습니다. 특히 고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다스렸다는 임나일본부설은 왜곡의 절정이었습니다. 일제는 실상과 다른 임나일본부설을 내세워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도 했고, 그 후유증은 여태껏 남아 한일 관계를 어지럽히곤 합니다.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에서 김현구 교수는 왜곡된 고대 한일 관계의 역사를 바로잡아 쉽게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임나일본부설 문제도 책에서 빠뜨리지 않고 다루었는데, 후속작이라고 할 만한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관련 글)는 임나일본부설의 맹점을 더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이 두 책을 함께 읽으면 임나일본부설이 왜 사실이 될 수 없는지 확실히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밖에도 책에는 신라와 일본의 관계를 다룬 글도 실렸고, 도래인(渡來人)들의 흔적이 남은 고대 일본의 유적들을 답사한 내용도 볼 수 있습니다. 책 구성이 조금 느슨해 보이지만, 비교적 적은 분량 속에 고대 한일 관계에 관한 이모저모를 풍성하게 담았습니다. 한때는 아주 가까웠던 백제와 고대 일본처럼 오늘날 한국과 일본도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 볼 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663년 3월, 일본은 부흥군과 함께 나당 연합군과 싸울 2만7천 명이나 되는 대군을 한반도로 보냈습니다. 같은 해 8월, 일본 수군은 부흥군의 근거지인 주류성을 치고자 바다를 건너온 당의 수군을 백강 어귀에서 맞아 싸웠습니다.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일본군은 당군과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패하며 4백 척에 이르는 전선을 잃었습니다. 중국과 한국의 사서들은 이때 불탄 일본의 전선들에서 나는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환하게 했고, 바닷물을 붉게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싸움, 백강 전투 또는 백촌강 전투의 참패로 부흥군은 무너졌고, 백제는 정말로 멸망했습니다. 부여풍이 고구려로 망명했다는 풍문이 떠돌았고, 많은 백제인이 정든 고향을 등진 채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이와 같은 백제 최후의 날 풍경을 보면, 물음표 하나가 우리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일본은 무엇 때문에 당시 동아시아 최강국인 당과 전쟁을 벌이는 것도 마다치 않고, 백제를 도왔을까요?
일본에서는 백제가 일본의 속국이었으므로 속국의 멸망을 막고자 원군을 보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한국에서는 백제를 돕기로 마음먹은 사이메이덴노(斉明天皇, 594~661, 재위 655~661)를 비롯한 일본의 지배층이 백제 출신이기 때문에 조국을 부흥하고자 출병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조국부흥전쟁설인데, 여기에는 사이메이덴노가 의자왕의 누이였다는 근거 없는 상상까지 덧붙습니다. 다른 듯하지만, 다르지 않은 이 주장들을 사실로 받아들이기란 어렵습니다. 백제가 일본의 속국도 아니었지만, 속국이었다고 하더라도 정권이 무너지면서까지 속국을 돕는 나라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요? 또 일본의 지배층을 백제 출신으로 만들고자 억지로 사료를 비튼 조국부흥전쟁설도 설득력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고대 한일 관계의 역사를 연구한 김현구 교수는 앞의 두 주장을 모두 비판하면서 일본의 백제 부흥군 지원이 일종의 공세적 방어 전략이었다고 말합니다.
"일본은 당의 침입을 앉아서 기다리다 혼자서 싸우기보다는 한반도에 와서 백제·고구려와 연합전선을 펼치는 길을 선택했다. 일본이 왜 전쟁터를 한반도로 설정했는가는 1894년 청일전쟁의 장소를 한반도로 설정한 것이나, 제2차 세계대전 때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진주만(眞珠灣, Pearl Harbor)을 선제공격하여 전쟁터를 미국 쪽에 설정한 사실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반도로 와서 백제·고구려와 손을 잡고 당·신라와 싸우기로 한 이상, 일본은 백제가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정권의 운명을 걸고 백촌강싸움에 출병하게 된 것이다."
백제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바다 너머에서 들려오자 일본 열도는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백제에 이어 고구려까지 무너진다면, 머지않아 나당 연합군이 일본으로 쳐들어오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적들이 올 만한 곳에 성을 쌓아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했지만, 막상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인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물론 당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은 적잖은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것은 자신들도 백제처럼 멸망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크지 않았습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부흥군을 돕기로 한번 결정하자 일본은 통 크게 부흥군을 지원했습니다. 수만이 넘는 병력과 많은 군수 물자를 한반도로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앞에서 살펴봤듯이 일본군은 나당 연합군에 패했고, 주류성까지 함락되면서 백제 부흥 운동은 끝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이때 백제인들이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겼다"라며 한탄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백제와 왜는 특수한 용병 관계였다
김현구 교수의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관련 정보)는 제목만 보면 왠지 고대 일본이 백제의 속국이었다는 주장이 튀어나올 듯하지만, 실제로 책을 읽어 보면 그런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김 교수는 이 책에서 백제와 왜가 "특수한 용병관계"이자 "맹우"로서 대등한 사이였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백제는 일본에 필요한 선진문물을 제공하고, 일본은 백제에 필요한 군사원조를 제공하는 특수한 용병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용병관계는 기본적으로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왕의 역할이 절대적이던 당시로서는 용병관계의 이전 단계에서 이루어진 양국 왕실간의 오랜 혼인관계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오랜 인적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양국은 단지 용병관계로만 설명할 수 없는 관계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두 나라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 관계가 훨씬 깊었습니다. 고구려의 남진으로 위례성을 잃고 위기에 빠졌던 백제를 중흥한 군주인 무령왕(武寧王, 462~523, 재위 501~523)은 일본에서 나고 자랐다고 하는데, 나중에 무령왕이 죽어 무덤에 묻힐 때 쓰인 관이 일본의 특산종인 금송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백제와 왜가 남다른 사이였음을 암시합니다.
무령왕이 묻힌 무령왕릉과 무령왕이 왜의 남제왕에게 주었다는 거울(한겨레21)
물론 왕실 사람들만 두 나라를 오갔던 것은 아닙니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간 사람도 많았지만, 왜에서 백제로 온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백제로 온 사람들 가운데에는 관료로 활약한 이도 있었습니다. 학자들이 흔히 왜계 백제 관료라고 부르는 이들은 일본에 군사 원조를 청하러 가는 사절단에 한두 사람씩 꼭 끼였는데, 왜계 백제 관료들이야말로 백제와 일본 간의 특수한 용병 관계를 만드는 주인공이었습니다. 뒷날 일본 지배층이 백제 부흥군을 통 크게 지원할 수 있었던 것은 공세적 방어 전략 차원에서 일본 열도가 싸움터가 되는 것보다 한반도로 군사를 보내 싸우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두 나라가 오랫동안 깊은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백제가 멸망하고 일본이 제 갈 길을 가면서 백제와 왜의 인연은 거의 다 잊히거나 비틀렸습니다. 특히 고대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를 다스렸다는 임나일본부설은 왜곡의 절정이었습니다. 일제는 실상과 다른 임나일본부설을 내세워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기도 했고, 그 후유증은 여태껏 남아 한일 관계를 어지럽히곤 합니다.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에서 김현구 교수는 왜곡된 고대 한일 관계의 역사를 바로잡아 쉽게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임나일본부설 문제도 책에서 빠뜨리지 않고 다루었는데, 후속작이라고 할 만한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관련 글)는 임나일본부설의 맹점을 더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이 두 책을 함께 읽으면 임나일본부설이 왜 사실이 될 수 없는지 확실히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밖에도 책에는 신라와 일본의 관계를 다룬 글도 실렸고, 도래인(渡來人)들의 흔적이 남은 고대 일본의 유적들을 답사한 내용도 볼 수 있습니다. 책 구성이 조금 느슨해 보이지만, 비교적 적은 분량 속에 고대 한일 관계에 관한 이모저모를 풍성하게 담았습니다. 한때는 아주 가까웠던 백제와 고대 일본처럼 오늘날 한국과 일본도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 볼 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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