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27

12 수림문화재단 새 이사장에 취임한 하정웅 박사, 그는 누구인가



::: 세계한인신문 :::





수림문화재단 새 이사장에 취임한 하정웅 박사, 그는 누구인가
김도균 기자 | kdg@oktimes.co.kr





승인 2012.05.04






▲ 하정웅 수림문화재단 이사장


맑은 눈빛, 조금도 가식을 찾아볼 수 없는 선한 얼굴의 노신사, 예술가다운 기품이 첫눈에 엿보이는 자세... 하정웅 박사의 첫 인상이다.
올해 1월에 타계한 재일교포 김희수 수림문화재단 이사장 후임으로 그 자리에 오른 재일교포 하정웅 박사를 인터뷰하기 위해 수림문화재단을 찾았다. 칠순을 넘긴 나이임에도 온화하고 친밀감 넘치는 대화에는 청년의 기백이 뭉실 배어났다.

하정웅 이사장. 그는 현재 광주시립미술관 명예관장을 맡고 있다. 인터뷰 전 그의 프로필과 관련 기사를 대략 살펴보자 미술 컬렉터로서 메세나 운동의 본(本)을 본 것 같았다. 전남 영암과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진 그의 문화⋅예술 활동과 미술을 통한 철학적 성찰의 삶은 피상적 접근을 거부하는 듯 했다.

일제하 날품팔이 막노동자의 가난한 아들로 태어나 화가의 꿈을 키웠으나 곧 허망한 꿈이었음을 깨달은 하 이사장. 이후 전혀 새로운 운명과 맞닥뜨리며 두 조국을 향한 기도의 삶을 살아온 그의 인생 편린에서 재일교포의 삶과 애환 그리고 한 소년의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애절한 소망과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日, 아키타에서의 추억

하정웅 이사장의 부모님 고향은 전남 영암이라고 했다. 아버지 하헌식(河憲植)은 빈농 집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927년 도일(渡日)해 오사카에서 식민지노동자의 삶을 시작했다. 어머님(金潤金)은 18세 때(1938년) 일본으로 건너와 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하 이사장은 1939년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이듬해 부모님을 따라 눈이 많이 내리는 험준한 산악지역인 아키타로 이사를 했다. 상상을 초월한 찌든 고생으로 어머님은 하정웅을 데리고 고향 영암으로 돌아갔다가 3년 뒤 다시 일본 오사카에서 아버지와 재회했다.
광복 후 귀국선을 타고 고향으로 가려고 했지만 귀국선이 끊기는 바람에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서 생을 이어가야 했다. 또 다시 인척의 주선으로 아카타지방으로 옮겨간 부모님을 따라 그곳에서 청소년기를 보내야만 했다.
그림을 좋아했던 하 이사장에게 아키타는 가난하고 고생스런 추억의 깃든 고향만이 아닌 아름다운 풍경 속에 부모님과 같은 시대를 살아간 수많은 교포들의 삶이 깃든 풍랑의 고향으로 남아있다.
“내가 태어나던 해가 1939년인데, 히틀러가 헝가리를 침공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해이고 일본의 강제징용과 창시개명이 시작되었던 해이기도 합니다. 세계역사와 일본의 역사, 나의 탄생을 연결시켜 생각해 보곤 하죠.”
1945년 광복 전 아키타 지역은 광산채굴과 수력발전소 건설 등으로 많은 조선인 징용자들이 있었다. 하정웅 이사장의 부보님들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곳에서 막노동을 해야 했다. 사방으로 둘러싸인 아키타의 타자와코(田澤湖) 호수의 아름다운 풍경이면에 일제강점기 조선인 징용자들의 처절한 아픔의 역사와 고통이 스며든 그곳의 땅은 하 이사장에게 슬픔과 연민의 정이 교차하는 곳으로 지금도 기억되고 있다.
조국 광복 후 어머님은 그곳에서 숨져간 동포들을 위해 명절 때면 돌로 쌓아둔 묘지를 찾아 제사를 드리곤 했다. 하 이사장은 이름 없이 숨져간 동포들의 애환과 민족의 아픈 역사를 어려서부터 가슴속에 새기며 자랐던 것이다.
“불쌍한 이들을 위해 언젠가는 무엇인가 꼭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일본 고향 땅의 추억은 그처럼 동포들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으로 기억되고 있고, 그들을 재조명하는 일은 하 이사장의 평생 사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기도(祈禱)의 미술관’ 건립의 꿈은 그때부터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업을 통해 문화 활동의 길을 열다

어려서부터 천부적으로 그림을 잘 그렸던 그는 학창시절에도 각종미술대회에 나가 상을 받는 등 두각을 나타냈지만 끼니조차 잇기 힘든 찌든 가난 때문에 그의 꿈을 접어야 했다. 하 이사장은 돈을 많이 벌게 되면




나중에라도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고 한다. 하루라도 빨리 사회에 진출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에 그는 아키타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에 있는 배선기구 회사에 취직을 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디자인학교를 다니며 주경야독의 생활을 하던 중 영향실조로 가벼운 실명을 하게 돼 3개월 요양생활로 회복은 했으나 해고를 당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이후 동포들의 권익을 지키는 활동에 전념하면서 일본의 경제구조와 북한의 실상, 재일동포들의 권익에 눈을 뜨게 된다.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1963년)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다. 6개월 후 전자제품 판매점을 시작했다. 1963년은 도쿄올림픽이 열리기 직전 이여서 텔레비전, 세탁기 등 가전제품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돈을 셀 시간도 없을 정도로 물건이 팔려 나갔다. 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사업의 성공으로 하 이사장은 동생들의 뒷바라지와 가정의 경제문제를 해결하기는 했지만, 지난날의 꿈을 접을 수 없었다. 사업을 통해 번 돈은 생활비와 친척들 보살피는 돈을 빼고는 아끼고 아껴서 그림을 한 점씩 사 들였다. 학교 선생이 되겠다는 꿈도 화가의 꿈도 좌절된 그는 대신 재일교포출신 작가들의 그림을 수집하고 그들을 후원하는 일에 매달렸다.
“재일교포 작가들의 그림에는 재일교포들의 역사와 고뇌 슬픔, 애환, 한이 서려 있습니다. 민족의 역사가 담긴 그 그림들을 모아 역사의 자료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그는 재일교포 화가들의 그림을 수집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림에는 예술성(영혼)이 있어야 하는데, 재일교포 작가들의 그림에는 영혼과 살아 숨 쉬는 역사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언젠가는 미술관을 만들어 후대에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예술⋅문화 활동과 메세나 운동은 이런 꿈속에서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기도의 미술관 건립을 향한 집념

하 이사장은 일제강점기 징용자의 희생, 관동대지진의 조선인 희생자, 전쟁터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영혼들의 한을 달래고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과 전 세계에 이런 비극적 역사를 알리기 위해서라도 역사의 흔적이 서린 그림을 전시할 미술관 건립이 필수라고 생각했다.
어려서 보았던 아픈 역사의 현장, 고향 아키타에 미술관을 건립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죽어간 이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수집한 작품들을 전시함은 희생자들을 추도하는 위령단 같은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키타 지방의 위정자를 찾아 미술관 건립을 상의하자, ‘대단한 휴머니즘과 인류애가 담긴 사업’이라며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 길로 하 이사장은 건립부지 매입과 설계도 제작, 더 많은 작품을 수집하는 등 미술관 건립에 만전을 기했다. 그러나 한일협정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 징용자 문제, 원폭피해자 문제 등이 애매하게 정리되자 아키타 시장은 미술관 건립 지원을 하루아침에 중단했다. 하 이사장은 투자한 돈을 날리고 미술관 건립이 수포로 돌아갈 뻔한 아찔했던 당시를 회상했다.
그 후 하 이사장은 여러 방법으로 아키타 타자와코에 미술관을 건립하려 했지만 16년간의 노력은 결국 무산되고 만다.





그러나 하정웅 이사장의 ‘기도의 미술관’ 건립의 꿈은 또 다른 조국에서 다른 형태로 결실을 맺게 된다. 하정웅 컬렉션 ‘기도의 미술’과 광주와의 인연은 운명처럼 이어졌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은 중년의 하정웅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시 일본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이 TV에 그대로 방영되고 있었다.
“TV에 방영되는 광주의 참상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하는 조국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시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어나가고 다치는 모습을 보니 양심상 그냥 있을 수 없었어요. 시민들이 왜 희생당해야 하는지... 우리는 일본에서 인권이 짓밟히며 고생을 많이 하고 있다고 하지만, 조국에서는 왜 시민들이 그토록 인권이 짓밟히고 처참한 희생을 당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하 이사장으로 하여금 인권에 깊은 관심을 갖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군화에 짓밟힌 시민들,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 광주 민초들의 절규와 눈물 그리고 고향에 대한 운명적인 그리움은 하정웅 미술 컬렉션과 기막히게 매치되고 있다. 어쩌면 하정웅 이사장의 미술 컬렉션의 특징인 위령과 기도, 진혼을 담은 ‘기도의 미술’은 상처 받은 광주, 아픈 현대사를 간직한 조국에 대한 위로의 의미였는지도 모른다.

하정웅 이사장의 광주와의 또 다른 인연은 재일교포 원로화가 전화황(全和凰)의 작품전시회와 연관돼 있다. 전화황의 작품에는 망향(望鄕)과 일제강점기의 조선, 6.25한국전쟁 등 조국의 역사와 사회의 아픔을 담은 주제들이 나타난다. 1982년 ‘전화황 화업 50년 전(展)’을 기획한 하 이사장은 도쿄와 교토, 서울-대구-광주에서 순회전을 가졌다. 광주 전시회에서 과로로 쓰러진 하 이사장은 1주일간 맹인 안마사를 만나 회복할 수 있었다. 마지막 날 상담을 요청한 맹인 안마사는 하 이사장에게 광주지역 맹인들을 위한 회관 건립을 요청했다.
하 이사장은 “치료에 대한 고마움과 맹인들의 열악한 환경을 전해 듣고 맹인들 스스로 모금활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아이디어를 내 맹인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했죠. 도와주는 조건으로 ‘눈이 안 보인다는 이유로 무조건 남을 의지하려 말고 먼저 마음과 행동으로 보이라’는 것을 내 걸었습니다. 1년 후 2백만 원을 모금해 온 것을 보고 회관 건립에 필요한 대지 구입과 한국맹인복지협회 광주지부 설립, 관공서와의 협력을 얻어내며 맹인복지회관 건립에 도움을 주었습니다.”라며 감동의 울림을 전해줬다.
광주시립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하게 된 것도 1993년 맹인복지협회의 초청을 받아 광주를 방문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광주민주화운동과 맹인들과의 휴머니즘의 인연은 ‘기도의 미술관’이 미술품 기증의 메세나운동으로 이어진 힘의 원천이었다.

1992년 당시 광주시립미술관이 건립되었지만 전시할 작품은 턱없이 부족했다. 광주시립미술관 관계자들은 하 이사장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도와달라고 청했다.







“미술관은 문화의 성당입니다. 건물만 있고 미술품이 없는 것은 영혼 없는 껍데기이지요.”
하 이사장은 평소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마음이 다운(down)된 시민들을 위로할 미술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랑해 주라, 키워주라, 도와주라’는 3마디가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렸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하 이사장은 사내답게, 수집한 미술품을 몽땅 기증하기로 했다. 1993년 재일교포 화가 전화황 송영옥 곽인식 등의 작품 212점을 기증을 시작으로 19년간 다섯 차례에 걸쳐 2300여점을 기증했다. 그 후 각 지방에 미술관이 생겼으나 건물만 있고 미술품은 없는 곳이 많았다. 기왕 도와줄 것 광주뿐만 아니라 지방문화 진흥의 발판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전국 8개 미술관에 총 7천여 점 이상을 기증했다. 하 이사장은 수집한 작품들은 20세기의 역사이자 민족의 유물이라는 안목에서 수집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의 두 조국

24살 되던 1973년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일본어도 잘 못하시는 부모님은 평소 고향에 가고 싶다는 말을 일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아버님이 작고하기 한해 전 미친 듯이 고향에 가고 싶다고 했다. 사업이 번창하며 바쁜 시절이었으나 하 이사장은 부모님을 모시고 고향 땅을 찾았다. 46년 만에 조국 땅을 밟게 된 부모님이 흥분한 것은 당연하지만 그때까지 아무 관심도 없던 자신까지 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는지... 고향 땅을 밟은 후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고 했다. 제일먼저 찾은 곳은 조상의 묘였다. “산소(묘)라는 것이 인간에게 생기를 준 것 같았습니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 이사장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조상의 묘 앞에서 평생 흘려보지 못한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말도 필요 없고 고마움만 전해지는 뭔지 모를 가슴에 흐르는 감동의 눈물이었다고 말한다.
그 다음해 영암에 있는 ‘도갑사’라는 절을 찾았을 때, 처음 본 스님 한 분이 ‘마사오상!’이라 불러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자신의 일본 이름을 어떻게 알고 그 스님이 불렀는지... 이야기인즉, 일본에 있는 자신을 위해 할머님(申 氏)이 절에서 정성을 드리며 기도를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역사와 조국 그리고 가족이라는 것을 한꺼번에 다 배운 듯 했어요”라며 그 때의 진한 감동을 잔잔히 전해주는 하 이사장의 두 눈가엔 어느새 진한 눈망울이 맺혀 있었다.
그 후 아버님은 고향에 영주귀국 하고 싶다며 손을 잡고 애원하듯 논 100마지기를 사달라고 하셨다. 상당한 금액이었으나 당시 사업이 잘 되던 때라 선뜻 사드리기로 하고 귀국 준비를 했으나 갑자기 아버님이 작고하시는 바람에 소원을 풀어드리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 연유인지 하 이사장은 아버님 고향 땅에 대한 애절함이 더 간절해졌다고 토로했다.

하 이사장에게 ‘두개의 조국이 어디 어디를 말하느냐?’고 물어봤다. 혹 남과 북을 말하는 가하고. 하 이사장은 스스럼없이 자신이 태어난 고향 땅 일본과 부모님의 고향 한반도라고 말한다. 부모님이 그토록 찾고 싶어 하던 고향 땅을 가지 못한 채 40년간 자식들을 키우고 가르치신 것을 생각하면 부모님의 심정이 절절히 느껴졌고, 감사와 존경의 마음도 솟구쳐 ‘부모님의 고향도 잊을 수 없는 나의 고향’임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하 이사장의 두 고향, 조국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이렇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하 이사장은 “재일교포들이 고향이 있음에도 가지 못하고,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채 이방인처럼 살아가고 있지만, 선조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고향을 그리는 기도의 마음이 있다”라고 말했다.

‘기도의 미술’과 메세나 운동

재일교포 화가들의 작품을 위주로 한 미술품 컬렉션 그리고 기증, 이것은 하정웅 이사장에게 나타나는 표면적인 모습이다. 미술의 세계를 넘어 올바른 삶과 의지, 상생의 정신이 그의 ‘기도의 미술’에 나타나고 있다. 두 조국을 안은 채, 작품 활동을 통해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며 한일의 역사 속에 잊힌 동포들의 이야기와 양국의 가교역할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는 ‘기도의 미술관’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이제는 한일 양국이 이웃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과 방향을, 역사가 담긴 미술품을 통해서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 이사장에게서 진정한 메세나 운동을 느낄 수 있음도 이런 연유에서다.






하 이사장은 맹인복지활동과 문화 활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한국정부로부터 지난 1990년 제1호 맹인복지공로상을 수상했고, 1994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지난 3월에는 부산시립미술관에 하정웅 동상이 제막되었고, 4월에는 광주광역시에 자신의 이름을 딴 ‘하정웅 명예도로’ 명명식이 있었다. 오는 9월에는 전남 영암군립미술관 내 하정웅 기증관도 개관될 예정이다. 또한 그는 현재 ‘여수세계박람회’ 홍보대사로도 활약 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모든 활동과 업적들은 일생을 두고 이뤄지고 있는 일들이다.

하 이사장이 수림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수림문화재단 창립자 고(故) 김희수 이사장과는 30년의 남다른 인연을 가지고 있다. ‘재일한국인문화협회’을 만들 당시 평소 존경하던 김희수 이사장을 도와 부회장을 맡아 설립에 일조했다고 한다. 양가 부인들도 같은 모임 활동을 하고 있어서 그 인연은 더욱 깊다. 한국에 수림문화재단을 설립한다고 했을 때도 이에 일조했다. 고(故) 김희수 이사장의 유지를 받들어 수림문화재단이 외부의 입김에 흔들리지 않도록 기반을 더욱 튼튼히 다지는 역할을 다하겠다고 했다.
그의 지나온 삶의 여정이나 추구하는 이상, 그의 눈빛에서 수림문화재단의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
중학교 3학년 시절 선생님이 통지표에 써 준 “사회에서 약한 자를 돕고, 정의를 지키며, 좋은 일을 하라”는 글귀를 가슴에 새겨온 그 이기에 메세나의 흔적은 길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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