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27

'시어도어 젤딘' 혹은 감성과 삶의 역사 - 교수신문



'시어도어 젤딘' 혹은 감성과 삶의 역사 - 교수신문
'시어도어 젤딘' 혹은 감성과 삶의 역사

이영석 광주대
승인 2011.05.02

[Cogitamus] 이영석 광주대 서양사

내가 옥스퍼드의 역사가 시어도어 젤딘을 알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다. 1995년 무렵인가 런던의 한 서점에 들렀다가 베스트셀러 서가에 진열된 책 ??인간의 내밀한 역사??를 샀다. 이 책의 모티브는 만남과 대화다. 젤딘은 저명한 방송인에서부터 어린 여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프랑스 여성과 대화를 나누면서 더 넓은 인간 경험의 세계로 나아간다.

사실 이 책은 시작도 끝도 분명하지 않다. 25개 장 가운데 어느 것을 먼저 읽어도 책을 이해하는 데 지장이 없다. 한동안 나는 이 책에 깊숙이 빠져 있었다. 그의 재치 있는 농담이 한 줄기 섬광처럼 가슴에 파고드는 경우도 있었다.

이 책 4장 ‘일부 사람들이 고독에 대해 면역성을 얻게 된 경위’를 보자. 그는 콜레트라는 세무서 직원과 대화를 나눈다. 그녀는 장학금을 받아 상급학교에 진학해 나중에 공무원이 되었다. 비록 성공한 여성이지만, 직장에서 승진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남성의 독점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과 단란한 가정을 꾸려나가면서도 다른 사람의 관심을 얻으려고 한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고독이다. 이 시점에서 젤딘은 인간의 삶에서 외로움이 갖는 의미에 관해 역사의 바다를 항해한다.

고독은 오래 전부터 낯익은 것이다. 힌두교 신화는 창조주가 외로움 때문에 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옛날부터 사람들은 고독에 대한 면역을 기르려고 노력했다. 은자의 삶을 동경하고 자기성찰에 매진하기도 했다. 유머와 웃음으로 고독에 대한 면역을 기르거나 내면적인 신앙을 갖는 것 모두가 고독 면역법의 전통이 되었다.

이와 달리 현대인은 외로움을 두려워한다. 여기에서 젤딘은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다. “외로움으로부터 고통을 당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일반론에서 벗어나야 한다. 거꾸로 생각하면 외로움은 모험이다.” 혼자 있을 권리나 예외로 남을 권리 또한 다른 사람과 만나 교제할 권리 못지않게 삶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고독은 고통일 뿐이라는 일반론을 떨칠 수 있다.

나는 젤딘의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의 이전 책들도 읽었다. 원래 젤딘은 19세기 프랑스 정치사를 전공한 사람이었다. 그의 연구가 대중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프랑스인의 일상생활에 녹아 있는 감성과 정감을 다룬 다섯 권짜리 책 ??프랑스 1848-1945??를 펴낸 이후의 일이다. 여기에서 그는 프랑스인 특유의 감성과 정감을 탐사한다. 각권은 ‘야망과 사랑’, ‘번민과 위선’, ‘지성과 자존심’, ‘정치와 분노,’ ‘맛과 부패’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들 부제만 보더라도 그의 작업이 기존 역사학의 통념을 과감히 벗어나려는 시도임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젤딘은 일반적인 역사서술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실험을 계속했다. 그가 역사서술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지금 여기에서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같은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해 성찰하는 데 있다.

박식한 역사가 젤딘은 유럽중심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인간의 내밀한 역사'에는 동양의 지적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그는 동아시아 사람들의 감성에 대해서도 자신의 스케치를 보여준다. 이 지역 사람들의 삶의 세계는 중국인의 '恥', 한국인의 '恨', 일본인의 '忍'으로 대변된다. 이는 각기 부끄러움, 후회와 쓰라림, 더 나은 시대를 대망하는 기다림을 나타낸다. 젤딘에 따르면, 동아시아인의 감성은 유럽인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포용력이 있으며 부드럽다.

결국 젤딘이 추구한 것은 삶의 의미에 대한 그 자신의 해답을 얻는 작업이다. 그는 이성과 지식보다 감성과 정감의 영향을 받는 삶의 영역을 더 중시한다. 그의 저술에서 역사지식은 인간의 감성이나 삶에 관한 갖가지 질문의 해답을 추구하는 여정의 방향타이자 나침반이다. 그는 전문적인 역사지식을 추구한다기보다, 그 지식을 통해 삶의 지혜를 얻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젤딘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오랫동안 계급이나 산업화 같은 거시적인 주제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다가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지켜보면서 이들 주제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었다. 젤딘의 책은 지적 방황을 거듭하던 내게 역사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알려준 나침반이었다. 나는 역사 연구의 지향점이 삶의 성찰에 있으며, 그것은 일상에 대한 섬세한 관찰에서 이루어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요즘 나는 의식적으로 삶의 섬세한 측면을 확대해 보려고 노력한다. 알게 모르게 젤딘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이영석 광주대 서양사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지난 몇 년간 19세기 후반 영국인의 삶의 세계를 미시적으로 조명하는 글을 써왔다. 저서로는 『사회사의 유혹』, 번역서로는『잉글랜드 풍경의 형성』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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