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30

Yeongmook Choi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을 반대하는 모임



(4)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을 반대하는 모임







Yeongmook Choi
7 hrs


한국에서 인식되고 있는 "노예" 이미지 배경에는 복잡한 임금 계산 법"『 의도적인 민족 차별 』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 라고 한국인 연구자가 결론.
일본 통치하, 일본의 탄광 등에 동원된 조선인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노예"처럼 일했다.
급여가 없거나 있어도 소액에 불과했다. 이런 일방적인 시각이 한국 내에서는 일반적인 인식이다. 국제 사회에서도 나치 독일의 유대인 강제 노동과 같은 수준이었다고 하는 이메지가 확산일로에 있다.
과연 이것이 "진실"인가하는 의문이 들어 終戦前의 자료를 바탕으로 조사한 한국인 연구자가 있다. 일본 통치가 조선 반도의 근대화에 미친 영향을 조사하는 落星台経済研究所 연구원 이 우연(李宇衍 50)씨다.
그는 임금 지급 실태를 무시한 연구에서는 당시의 실상을 왜곡한다고 보았다. 탄광이나 금속 광산에서 일했던 조선인 노동자의 임금이 어느 정도 지불되었고, 일본인 노동자와의 임금 격차는 얼마였던가. 그는 탄광 회사나 업계 단체의 자료를 중심으로 한반도 출신자의 일본내 노동 상황을 꼼꼼히 조사했다.
그는 일본내의 탄.광산에 있어 대우상황에 관한 쇼와 15년(1940년) 『 조선인 노무자에 관한 조사 보고 』(일본 광산 협회 발간)에서 46곳의 탄광 사업의 평균 데이터를 발췌했다.
식비, 세금이나 노동자의 낭비를 막기 위한 "강제 저축"등 고정비를 공제하면 임금 중 평균 43.5%가 "용돈"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고 계산했다.
당시 정부와 탄광 회사 측은 조선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이나 저금을 권장했지만, 음식비나 도박, 양복 구입에 충당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 내에서 인식되고 있는 "노예 노동"과는 다른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면 조선인 노동자와 일본인 사이에 임금 격차는 있었나.
거부하면 벌금, 징역이 부과되는"징용"도 포함하여, 조선 출신자에 적용된 노무 동원은 급여가 지불되었다.
더욱이, 차관급 통달이나 각료회의 결정을 통해서 일본 정부는 "대우에 관해서 가능한 일본인 근로자와의 사이에 차별이 없도록" 하는 취지를 국내 고용주에게 지침으로 하달했다.
개별 탄광에서도 이우연씨가 임금 지급 표를 확인한바, 큰 임금 격차는 보이지 않았다.
쇼와 17년(1942년) 히타치 광산(이바라키 현)에서는 조선인 출신자의 하루 평균 수입은 2.42엔으로 2.39엔의 일본인을 조금 넘었고, 메이지 광업 아카 이케 탄광(후쿠오카 현)의 쇼와20년(1945년) 1월~ 같은 해 7월 평균 임금은 4.82엔으로 격차는 없다.
이우연씨는 연구성과를 논문 『戦時期 일본에 노무 동원된 조선인 광부(석탄, 금속)의 임금과 민족간의 격차 』로 묶어 3월 말 발행의 규슈 대학 기록 자료관 에너지사 연구 제32호에 게재됐다.
그가 이끌어 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전쟁 중의 조선인 탄광원 임금은 일본인의 임금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이 『 임금에 따른 민족차별 』이 있었다고 할 수 없다"
×××
왜 당시의 탄광에서는 "한반도 노동자가 노예처럼 일했다 "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을까.
그는 임금 지급의 복잡한 계산 방식을 꼽는다. 일본어가 미숙한 조선인 근로자에게 이해하기 어렵고, 일본인 선배 노동자와의 임금 차이에 대해서 오해를 일으킬 여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강제 연행설"이 퍼지게 된 계기는 조선 대학교 강사, 박 경식(朴慶植)이 쇼와 40년(1965년)에 발간한 『 조선인 강제 연행의 기록 』(미래사)이라며 지금까지도 학계의 "통설"이 되어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박경식은 이 책을 통해서, 전쟁 시기에 사용되었던 "징용"이나 "노무 동원"라는 말을 "강제 연행"으로 대체하고 이 문제를 널리 퍼뜨리는데 "성공" 했다.
박경식은 경험이 일천한 조선 출신자의 임금이 일본인보다 낮았던 점을 거론하며 근속연수도 고려하지 않은 "민족 차별"이라고 주장했다.
예를 들면, 홋카이도의 한 탄광에서 2017년에 실시한 임금 조사에서 일본인의 82.3%가 1개월 당 50엔 이상 지급됐지만 조선 출신자는 25%에 불과했다는 데이터를 꼽는다.
하지만, 근속 연수에서는 일본인 57.2%가 2년 이상인 반면 조선 출신자는 불과 10.7%에 불과하다. 탄광노동에서는 한 명당 채탄량에 따라서 임금이 지불됐다."근속 기간의 길이는 작업 능률에 반영되어 있다"라고 그는 반박한다.
사실 이우연씨가 이용한 자료의 대부분은 "강제 연행론자"가 편찬한 것이다. 그는 산케이 신문의 취재에 이렇게 단언했다.
"(박경식등이)편찬한 자료는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는커녕 그들의 선입견과는 전혀 다른 史実을 말하고 있다. (이우연)경제학자로서(사실을) 은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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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연씨는 조선인들의 노동환경에도 주목하여, 『戦時期、일본이 朝鮮人労務動員과 炭鉱의 労働環境』(2015년 12월 27일 발행)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완성했다.
쇼와 14년~19년(1939-44년)에 동원된 조선인 중 약 반수가 탄광에 동원되며 대부분 갱내노동에 종사했다. 일본인의 갱내 탄광부가 6할 정도였던데 반해 , 조선인은 9할 이상이었다. 이것을 가지고 "의도적인 민족 차별"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이우연씨의 주장은 다르다.
"일본 청년들이 빠진 탄광 노동 수요를 충족시킨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더욱이 그는 갱내에서의 작업 상황에도 눈을 돌린다."강제 연행론자"가 원자료로 사용한 규슈와 홋카이도의 11곳의 탄광을 대상으로 한 『 조선 노무자 근로 상황에 관한 조사 보고 』(재단 법인 노동 과학 연구소)를 읽고 해석한 이우연씨는 "갱내에서 조선인만 따로 작업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부분은 일본인과 함께 작업했다 "라는 증언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숙련된 일본인이 채탄하고 경험이 부족한 조선인은 후방에서 석탄을 긁어모으는 "분업 체제"가 있었다. 『 조사 보고 』에 따르면 홋카이도의 한 탄광에서는 "(한반도 출신자만)동일 작업장에 배치하는 것을 인정할 정도에 이르지 못했으며, 그들이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은 현재 혼란을 동반한다 "라고 판단하였다. 탄광에 동원된 조선인의 대부분이 농부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조선인을 의도적으로 위험하고 열악한 작업에 배치하고 차별했다는 통설은 사실과 다르다 "라고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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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경식의 연구를 본격적으로 부정한 획기적인 논문이다"라고, 이우연씨의 논문을 읽은 규슈대학 교수, 미와 무네 히로三輪宗弘씨는 높이 평가했다.
미와三輪 교수는 박경식들처럼 강제 연행을 주장하는 연구자에 대해 ,자신을 포함한, 탄광노동에 해박한 전문가들이 "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 만으로 공공연한 반론을 자제했던 과거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미와三輪교수도 많은 통계를 조사했지만 "민족 차별적인 임금 체계가 없었다"라고 말한다.
다만 미와三輪교수는 이우연씨의 논문을 가지고, 노무동원을 둘러싼 한국내의 "일본 비판"은 가라앉지 않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은 학계에서조차 도의적 이념에 지배되기 쉽상. 이우연씨의 연구가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주장과 다르면, 자료 자체가 틀렸다고 우긴다. 역사를 입맛대로 재단하는 행위는, 그야말로 당시를 산 사람을 우롱하는 행위이다"

서울에 이어부산에도 위안부 동상이 설치되는 등 한국의 역사 이용은 끝나지 않는다.위안부 문제, 그리고 강제 징용 문제의 현황을 보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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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이권희, Bum Choi and 4 others
Comments

김영규 이제 우리는 과거 역사를 왜곡하는 연구들이 일제하 위안부에 이어 노동자들의 처우에 대해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간 일제하 식민지 조선의 노동자들이 민족 차별적 임금등 노예나 다름없는 비인간적 처우에 시달렸다는 일부 학계의 연구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성질이 아니라는 연구에 대해 귀를 기울어 균형잡힌 역사 인식을 대중이 보유할 것을 나는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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