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03

알라딘: 이회영과 젊은 그들 - 아나키스트가 된 조선 명문가

이회영과 젊은 그들 - 아나키스트가 된 조선 명문가

이덕일 (지은이)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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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15,000원
판매가 13,500원 (10%, 1,500원 할인) | 무이자 할부
반양장본 | 360쪽 | 223*152mm (A5신) | 504g | ISBN : 9788993119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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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강제로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자 여섯 형제 일가를 모두 이끌고 만주로 가 전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민족해방을 위해 바친 이회영과 동지들에 관한 책이다. 세칭 삼한갑족三韓甲族(예로부터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으로 불린 명문대가 출신인 이회영이 독립운동을 어떻게 펼쳐나갔는지를 담고 있다.

저자는 이회영이 중국으로 망명하기까지의 과정과 망명 후 그의 활동,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한 모습, 어떻게 아나키즘을 받아들여 아나키스트가 되었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극심한 가난으로 인한 고통을 참고 견뎌내며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최후를 맞이해야 했던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생생하게 그려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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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글

1. 왕조의 마지막 두 풍경
이완용의 밀사 이인직 /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으나 / 떠나는 사람들 / 횡도촌, 망명자들의 촌락

2. 일가 망명
망국을 막기 위해 / 헤이그 밀사사건 / 북풍 부는 만주로

3. 독립군의 요람, 신흥무관학교
모든 것을 버리고 만주로 떠나다 / 이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 작위와 은사금에 환호하는 집권 노론 /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라면

4. 고종이 망명한다면
밀입국을 단행하다 / 고종 망명이 갖는 폭발성

5. 북경과 상해를 오가며
임시정부를 둘러싼 파문 / 독립운동가들의 단골 거처 / 임시정부도 사회주의도 버리고

6. 아나키즘의 깃발
양명학과 아나키즘 / 아나키즘으로

7. 의열단과 다물단
의열단의 직접행동과 유자명 / 조선총독부 폭파와 다나카 대장 암살사건 /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 / 다물단의 밀정암살이 준 충격

8. 극도의 곤경 속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발족하다 / 극심한 자금난 / 일제의 체포를 피해 수만 리를 걷다

9. 만주운동의 새바람
김좌진과 연합하다 / 일본 조계지의 은행을 털다 / 자유연합적 지방자치에 대한 반발

10. 1930년대, 상해의 풍경
일제를 공포에 빠뜨린 아나키즘 조직들 / 백정기와 윤봉길의 엇갈린 운명

11. 무장투쟁의 길과 순국
무장투쟁의 길로 / 운명의 만주행 / 밀고자들

12. 망명자들의 최후
만주로 간 선비들 / 신채호의 순국

13. 남은 동지들
죽기 위해 제비를 뽑는 사람들 / 공포의 서간단 / 재일 거류민단장 사살사건 / 일제가 점령한 상해에서 / 무장투쟁으로 최후의 승리를 / 미완의 과업 / 되살아나는 역사

이회영 가계도
이회영 연보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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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 : 이회영의 생애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고위층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의 실천이라는 말로는 그 의미를 전달하기가 부족하다. 이회영의 만주행은 국망 직후 집단 망명한 것과 같은 또 다른 승부수였다. 22년 전(1910년) 온몸을 던져 일제와 대결했던 것처럼 다시 일제와 대결하겠다는 신념의 표출이었다. 온몸을 던지지 않고서 어찌 일제를 구축驅逐하고 인간해방과 광복을 실현하겠느냐는 신념의 실천이었다. 만 65세 노인이 무장투쟁을 결심하고 상해 황포강 부두에서 영국 선적의 남창호南昌號 제일 밑바닥 4등 선실에 자리를 잡는 광경에 어찌 비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비장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뛰어넘는 진정한 인간의 길인 것이다.

P.54 : 한일합병 조약체결 소식을 듣고 매천 황현이 고향 구례에서 목숨을 끊던 1910년 8월 하순, 이회영은 북쪽으로 향했다. 이동녕과 장유순 그리고 이관직李觀稙(1882~1972년)이 함께 하고 있었다. 종이장수 차림인 이들은 다락령(659미터)을 통해 강남산맥을 넘어 초산진에 다다랐고, 초산진에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향했다. 이제 남은 길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뿐이었다. 나라를 되찾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군사를 길러 일본군을 내쫓는 길과 교육으로 후세를 길러 독립하는 길이었다. 양자택일의 방법이 아니라 양자결합의 길을 택해야 했다. 군사를 기르는 것은 지금의 급선무이고 교육은 미래를 위한 준비였다. 무장투쟁과 교육사업은 우당 이회영이 평생에 걸쳐 일관되게 실천한 이념이 되었다.

P.115 : 이회영은 북경의 자금성 북쪽 후고루원後鼓樓園의 한 가옥을 빌려 살았는데, 이곳은 곧 수많은 독립운동가들로 북적거리는 사랑방이 되었다. 북경에 온 독립운동가들은 일단 이회영의 거처에서 몇 달을 보낸 후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북경에서 이회영과 함께 지낸 아들 이규창은 “그 당시 국내에서 맘을 품은 인물, 즉 청년들은 중국 북경에 오면 반드시 나의 부친을 뵙게 되고 대체로 우리 집에 거주하게 된다”고 회상했다. 북경의 이회영 거처는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한번씩은 거쳐 가는 필수 코스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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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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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10년 강제로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어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여섯 형제 일가를 모두 이끌고 만주로 가 전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민족해방을 위해 바친 이회영과 여러 동지들에 관한 것이다. 세칭 삼한갑족三韓甲族(예로부터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으로 불린 명문대가 출신인 이회영이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기까지의 과정과 망명 후 그의 활동은 물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한 모습, 어떻게 아나키즘을 받아들여 아나키스트가 되었는지, 극심한 가난으로 인한 고통을 참고 견뎌내며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최후를 맞이해야 했던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조국의 독립과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동지들, 그 100년의 기억!

1910년 8월 22일 강제로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한 일제는 그해 10월 7일 대한제국이 망하는 데 큰 공을 세운 76명의 조선인들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내려주었다. 일본 귀족과 유사한 공·후·백·자·남의 작위를 수여해 귀족으로 임명하고 은사금도 주어 작위에 걸맞은 경제생활을 하도록 보장한 것이다. 비록 군사력으로 영토를 점령했다고 해도 이들 매국 사대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일제가 그리 순조롭게 대한제국을 병탄할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다. 이른바「한일병합조약문韓日倂合條約文」제5조에는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勳功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게 영작榮爵을 수여하고 또 은급恩級을 부여한다”고 명기해놓기도 했다. 수작자授爵者들 대부분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유력 가문 출신으로, 국망國亡의 위기를 맞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는커녕 오히려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는 데 적극 협력했던 것이다. 이렇게 매국 수작자들이 일제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지 두 달 후, 대륙에서 불어오는 차디찬 바람을 무릅쓰고 만주로 떠나는 40여 명의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우당 이회영과 그 형제 일가였다.
최근 역사의아침에서 펴낸『이회영과 젊은 그들』은 1910년 강제로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어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여섯 형제 일가를 모두 이끌고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펼치며 전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민족해방을 위해 바친 이회영과 여러 동지들에 관한 글이다. 이 책에서는 세칭 삼한갑족三韓甲族(예로부터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으로 불린 명문대가 출신인 이회영이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기까지의 과정과 망명 후 그의 활동은 물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한 모습, 어떻게 아나키즘을 받아들여 아나키스트가 되었는지, 극심한 가난으로 인한 고통을 참고 견뎌내며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최후를 맞이해야 했던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뿐만 아니라 엄형순, 유자명, 이을규, 이정규, 정화암, 백정기, 김대락, 오면직, 김종진, 유림 등의 아나키스트들에게 사상적 구심점이 되어주고 함께 독립운동을 펼친 모습과 당시 중국에서 이루어진 독립운동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재조명했다. 조국의 독립과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몸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동지들의 일생은 현재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해줄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 우당 이회영.『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개정판 출간!

한일합병 조약체결 소식을 듣고 매천 황현이 고향 구례에서 목숨을 끊던 1910년 8월 하순, 이회영은 이동녕과 장유순 그리고 이관직과 함께 북쪽으로 향했다.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무관학교 설립의 적지를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일행은 한 달 남짓 남만주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귀국했다. 이회영은 형제들에게 전 가족이 만주로 이주해 일제와 싸우자고 하며 “이것이 대한 민족된 신분이요, 또 왜적과 혈투하시던 백사白沙(이항복) 공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한다. 여러 형님들과 아우님들은 나의 뜻을 따라주시기를 바라노라”고 설득했다. 여섯 형제는 모두 가산을 정리했는데, 급하게 팔다 보니 제값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회영 형제 일가가 가산을 정리해 마련한 자금은 약 40만 원의 거금이었다. 당시 쌀 한 섬이 3원 정도였는데, 이를 2000년대 쌀값으로 단순 계산하더라도 약 600억 원이나 된다. 이회영은 여섯 형제 중 넷째인데, 위로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이 있었고 아래로 이시영과 이호영이 있었다. 가문 배경으로 보면 그 누구보다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을 것 같으나 이회영을 비롯한 형제들은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평생 동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이회영을 재조명한『이회영과 젊은 그들』은 2001년 웅진닷컴에서 펴낸『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을 개정한 것이다. 전작에서는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아나키즘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기술한 반면, 개정증보판『이회영과 젊은 그들』에서는 이회영의 아나키스트적 색채보다는 그가 아나키즘을 사상적 바탕으로 어떻게 독립운동을 위한 기초를 다졌으며, 여러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갔는지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당시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생생한 컬러사진 50여 컷을 새로 넣었으며, 최근 발표된 자료를 근거로 이회영이 대련 수상경찰서 유치장이 아닌 여순감옥에서 고문사당했다는 사실을 추가로 밝혀냈다.

헤이그 밀사파견을 주도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이른바 을사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서울에 온 1905년. 이회영의 집에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의정부 참찬 이상설과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활약하는 이동녕 등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의논 끝에 조약 체결을 막기 위한 여러 방책을 세웠으나 일제의 방해로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조병세와 민영환이 자결했고, 이 소식을 들은 이상설도 자결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이상설과 이회영은 새로운 운동방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이상설은 만주 용정촌으로 망명해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서전서숙을 열었다. 1907년 4월 3일 이상설은 이동녕, 정순만과 함께 용정촌을 떠났다. 혼춘에 학교를 하나 더 세우겠다는 것이 명목이었다. 그러나 이상설의 목적지는 혼춘이 아니었다. 그가 가려는 곳은 만국평화회의가 열릴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였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사람은 고종의 특사 자격으로 헤이그로 향했는데, 이 헤이그 밀사사건의 배경에도 이회영이 있었다. 당시 일제는 궁내 곳곳에 일본의 간자를 심어두고 고종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으나 이회영은 대신 조정구와 내관 안호형을 통해 고종에게 밀사파견을 주청했다. 고종은 헐버트에게 신임장을 전달했고, 이회영은 헐버트에게 신임장을 받아 비밀연락망을 통해 간도에 있는 이상설에게 전했던 것이다. 헤이그 밀사사건은 알려진 대로 구체적 성과를 이루어내지 못했고,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고종의 국외 망명을 추진하다!

국내에 남아 독립운동을 벌이던 이회영은 1910년 여섯 형제 일가를 모두 이끌고 만주로 집단 망명했는데, 1913년경 그곳을 떠나야 했다. 일제가 이회영을 비롯해 이시영, 이동녕, 장유순, 금형선 등을 체포 또는 암살하기 위해 형사대를 파견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이회영은 일제의 허를 찌르기 위해 국내로 밀입국을 단행했고, 고종을 국외로 망명시키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중 드디어 방안을 찾아냈다. 아들 이규학의 신부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규학은 1917년 어머니 이은숙과 함께 국내로 왔다. 이회영이 5년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자 이회영을 찾아 귀국했던 것이다. 신부례 상대인 조계진은 조대비의 친족이자 고종의 조카딸이었다. 이미 결혼한 지 3년이 지난 1918년 11월에 신부례를 올린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때 고종의 망명계획에는 이회영·이시영 형제와 이득년, 홍증식, 민영달, 조완구 등이 가담했다. 이회영이 고종의 시종 이교영을 통해 의사를 타진하자 고종은 선뜻 국외 망명계획을 승낙했다. 고종이 국외 망명을 결심하던 1918년 말, 10년에 가까운 일본의 무단통치는 한계에 봉착해 있었다. 고종이 개전조칙을 내리면 전국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전 민족적 결전의 날이 무르익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자금이 마련되고 행궁까지 준비되어 구체화되어 가던 고종의 망명계획은 의외의 사태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다. 당사자인 고종이 예기치 못하게 급서한 것이다. 이회영은 고종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진 조국을 떠났다. 두 번째 망명이었다.

백성을 깨우치기 위해 교육기관을 설치하다!

이회영이 중국으로 망명한 목적은 항일무장투쟁과 교육입국을 위한 것이었다. 항일무장투쟁으로 나라를 되찾고, 되찾은 나라를 바로세우기 위한 교육이 이회영이 평생에 걸쳐 실천한 삶이었다. 1911년 이회영과 이동녕, 이상룡 등 집단 망명가들은 대고산 아래에 이주 동포들의 안착과 농업생산을 지도하는 자치기관으로 경학사를 조직했고, 서둘러 무관학교를 설립했다. 그들이 고구려의 옛 고토를 찾은 이유는 광복군을 양성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이회영과 이동녕 등은 현지 중국인의 옥수수 창고를 빌려 신흥강습소 개교식을 강행했으나 현지 중국인들의 비협조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학교 이름을 강습소라 한 이유도 중국인들의 의혹을 피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그런데 이회영은 당시 누가 보더라도 무모한 일이었지만 중국 총리대신 원세개를 만나 담판을 짓고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12년 6월 합니하에 새로운 교사를 완성하고 신흥무관학교 낙성식을 열었다. 정신적으로는 국사관으로 무장하고, 육체적으로는 군사훈련으로 무장한 독립전사를 배출하는 곳이 신흥무관학교였다. 이철영, 이동녕, 이상룡, 여준, 이광 등이 교장을 역임한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12월 김연, 변영태, 이규봉, 성주식 등 40여 명의 청년들을 특기생으로 배출한 것을 비롯해 1919년 11월 안도현 삼림지역으로 이동할 때까지 약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중국은 물론 국내에서 벌어진 수많은 항일무장투쟁의 현장에서 주축으로 활약했다.

독립운동가들의 벗이 되어 사상적 기틀을 제공하다!

우리나라에서 아나키즘은 독립운동의 한 형태로 수용되었다. 귀족 출신의 이회영이 아나키스트가 된 것은 개인적 성향 외에도 아나키즘이 독립운동 이론으로나 해방 후의 정부 수립 이론으로 적합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회영의 아나키즘 이론은 ‘만인이 평등하다’는 원리를 실천해나가면서도 공산주의처럼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빠지지 않고 개인과 사회의 자유를 확장할 수 있는 현실적 방책이었다. 이회영이 아나키즘을 자신의 사상으로 확정지은 때는 1923년 9월로, 이회영은 이미 57세로 환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회영은 여러 청년들과 교류하며 아나키즘이란 사상이 자신의 평소 지론과 맞다고 생각을 굳힌 뒤 아나키스트를 자처한 것이다. 이회영은 천진에서 살던 1927년 김종진이 방문하자 토론 끝에 그를 아나키스트로 전향시킬 정도로 단단한 이론적 토대를 갖추고 있었다. 이회영이 아나키스트가 된 것은 젊은 아나키스트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이회영과 북경의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조직적 운동을 전개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1924년 4월 말 북경에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무련)을 조직했다. 그들은「정의공보」를 발행해 자신들의 운동노선을 천명했는데, 이회영이 극도의 궁핍 속에서도 그 발행자금을 부담했다. 후일 이회영과 젊은 아나키스트들은 남화한인청년연맹(남화연맹)이라는 아나키즘 조직을 건설해 상해의 일인들과 친일 주구들을 공포에 몰아넣는다. 만주사변 발발과 때를 맞추어 결성된 남화연맹은 무련의 산하 기관으로 이회영, 유자명, 백정기, 정화암, 이강훈, 엄순봉, 오면직, 김동우, 김광주, 나월환, 이용준, 박기성, 원심창, 김광주, 이규창 등이 참석한 창립대회에서는 이회영을 의장에 추대했으나 이회영은 한사코 거절했다.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만주로 떠나다!

중국으로 망명한 뒤 이회영은 상해와 천진을 오가며 의열단, 다물단, 흑색공포단, 남화한인청년연맹 등을 조직하고 일제의 고관, 군부 수뇌, 친일파 거두, 기관을 공격하는 등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그러던 중 1932년 윤봉길이 홍구공원에서 일본군 최고사령관 시라카와 대장을 비롯해 여러 명을 암살하는 거사를 일으켰다. 이 사건은 한인들의 항일의지를 세계에 과시한 쾌거였다. 그렇지만 상해를 점령한 일본군은 물러가지 않았고, 독립운동가들의 활동공간은 더 좁아졌다. 이회영은 여러 동지들과 중국의 아나키스트들과 상의한 후 상해를 떠나 만주를 새로운 운동무대로 삼으려 했다. 만주로 가서 중국 당취오 부대와 연계해 암살단을 조직해 일본 천황 등을 제거하고 무장부대를 조직해 만주를 점령한 일본군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1932년 11월 초, 이회영은 상해의 황포강 부두에서 영국 선적인 남창호에 올랐다. 허름한 중국옷을 입은 이회영이 자리 잡은 곳은 제일 밑바닥인 4등 선실이었다. 이회영은 흔들리는 남창호 밑바닥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1910년 망명한 때로부터 만 22년의 장구한 세월을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살아온 이회영은 그간 숱한 고초를 겪었지만 이제 새로운 투쟁의 역사가 열릴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회영은 일제 밀정의 밀고로 대련 부두에서 체포되어 여순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여순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은 이회영은 마침내 1932년 11월 17일 고문사하고 말았다. 일제는 고문사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이회영의 시신을 서둘러 화장하고 이회영의 딸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이회영은 고문받는 동안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죽음을 각오한 항거였고, 젊은 동지들을 지키기 위한 칠순 노인의 외로운 투쟁이었다. 이렇듯 이회영은 여순감옥에서 인간해방, 민족해방의 제단에 자신의 몸을 바쳤다. 삼한갑족의 후예로 태어나 전 재산과 생애, 목숨까지 인간해방, 민족해방에 바친 것이다.

이회영에 대한 동료들의 회고!

“우당 형제들은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여섯 형제의 절의는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독립운동가)

“우당 집에서 밥 얻어먹지 않은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다.” - 금산錦山 유석현劉錫鉉(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은 1931년 해마다 여러 차례 동북의 화인, 신빈, 통화, 해룡, 유하 등 한국인이 많은 곳에 오셔서 독립운동을 지도하셨다. 신분은 점쟁이, 상인으로 가장해 다녔고, 학교를 세우고 자금을 지원하셨다.” - 김소묵金小?(동북의용군 대원)

“집 안에 거느리고 있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놓기도 했고, 남의 집 종들에게는 터무니없게도 경어를 썼다. 당시의 양반들이나 판서의 집안으로서 이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당치 않은 짓’이었다.” - 권오돈權五惇(다물단 단원)

“쌀이 없어 종일 밥을 못 짓고 밤이 다 되었다. 때마침 보름달이 중천에 떴는데 아버님께서 시장하실 텐데 어디서 그런 기력이 나셨는지 처량하게 퉁소를 부셨다. 하도 처량하여 눈물이 저절로 난다며 퉁소를 부시니 사방은 고요하고 달빛은 찬란한데 밥을 못 먹어서 배는 고프고 이런 처참한 광경과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 이규창(이회영의 아들)

“민족주의 태내胎內에서의 무정부주의의 성장, 그 사상적 성숙, 그 투쟁단계 그리고 전시戰時의 전투체제로 전환 등의 과정을 우리는 우당이란 한 사람의 생애에서 읽어낼 수 있다. 우당의 최후는 이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의 장렬한 산화였다.” - 하기락(아나키즘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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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있어요 (1)
읽었어요 (44)



총 : 1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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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빼앗기는 과정과 독립투사들에게 감정이입이 되어서 읽었습니다.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석! 이책을 통해 역사를 되씹어 봅니다.읽어보세요.
missa ㅣ 2016-06-03 l 공감(1) ㅣ 댓글(0)



너무도 재미있고 감동적인데, 재미없다고 하는 사람은 도대체 왜? 재미가 없을까? 혹시 보수라서??
강나루 ㅣ 2014-11-27 l 공감(2) ㅣ 댓글(0)



별로 재미없다..조금 읽다 던져두었는데...막돼먹은 이종걸이 보고나서 책을 갈기갈기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내 방에 둘 가치가 없어서...
청보리 ㅣ 2012-06-27 l 공감(2) ㅣ 댓글(0)



그의 아름다움 삶은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많은 반성을 하게 한다
jaehun32 ㅣ 2011-09-11 l 공감(1) ㅣ 댓글(0)



이회영, 그가 있어 우리의 역사가 자랑스럽다.
ho089 ㅣ 2010-09-14 l 공감(2) ㅣ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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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19편




우당을 발견하다. saint236 ㅣ 2016-12-19 ㅣ 공감(7) ㅣ 댓글 (0)
예전에 역사e를 통하여 우당에 관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 놓았던 이회영 평전이 내 서재에 꽂혀 있었다.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이덕일의 이 책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책을 먼저 읽고, 바로 이어서 이회영 평전을 읽었다. 이회영 평전은 이회영이라는 사람의 일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 책은 이회영과 그를 출러싼 아나키스트 그룹의 성장과 몰락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청산리 전투를 비롯해서 한국의 독립 운동사에 있어서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던 항일 무장 행동들의 대부분이 이회영이라는 사람을 통하여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왜 이 사람을 아직까지도 몰랐던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흥무관학교라는 학교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이 학교가 이회영 일가가 세운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우당이 그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며, 북한과 남한 양쪽에게서 조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산주의 진영에 투신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승만을 필두로 하는 이들의 입장에 선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광복을 맞기 전에 중국에서 임종을 맞이 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을 새삼 다시 깨닫게 된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제도권 밖의 길을 묵묵히 택했던 이회영과 그의 동지들, 그리고 그와 함께 조선을 등지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주로 떠난 많은 이들. 우리가 그들에게 빚진 것은 너무 많은데 아무도 그들을 몰라준다. 오히려 나라를 팔아 작위를 하사받고 보상금을 두둑히 챙긴 사람들, 나라를 넘기고 가문을 유지하는데 관심을 기울인 조선의 왕가에 대한 이야기들만 넘쳐난다.

얼마 전 덕혜 옹주라는 영화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영화를 통하여 사람들이 역사적인 사건을 잘못 알게 된다는 말을 하면서 입에 게거품을 물고 평론을 해대던 많은 평론가들이 있었다. 그들의 글을 보면서 이렇게까지 반응을 해야하는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 영화를 영화 이상으로 포장하여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려는 사람들도 참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난 영화는 그냥 영화로 생각해야지, 그것을 현실로 가져오려고 하는 순간 영화를 이데올로기라는 감옥에 갇힐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덕혜옹주를 재미있게 본 사람으로서 난 그 영화를 현실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힐 뿐이다. 이름만 빼고 무엇하나 역사에 근거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덕혜 옹주를 보고 영화 평론을 통하여 사람들을 계몽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대중들의 생각을 너무 짧게 봤다고 말하고 싶다. 약간 각도가 다르긴 하지만 그들도 대중을 개돼지 정도로 보는, 계몽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엘리트 주의에 경도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이야기가 옆길로 샜지만 학교에서 이 책을 한번 읽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독립 운동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치려면 공산진영, 자유진영, 그리고 아나키스트 그룹의 독립운동사까지 전부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더군다가 이 세 그룹이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리고 모든 독립 운동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장소의 주인이자, 그 장소를 마련해 준 이회영이라면 더더욱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언젠가 독립운동을 다루는 영화가 또 나온다면, 이회영을 중심으로 제작해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회영 평전이 이회영 개인의 삶에 집중한 경향이 있다면 이 책은 이회영을 둘러싼 아나키스트 그룹에 대해서 폭넓게 다루고 있다. 이덕일답지 않게 날카로운 비평은 없지만, 이회영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아나키스트라는 독립 운동의 잘 알려지지 않은 부류에 대해서 알게 해준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잘못된 역사를 정면으로 바라보게 하는 책! 강나루 ㅣ 2014-11-27 ㅣ 공감(1) ㅣ 댓글 (0)


1. 행복

우리역사에서 과연 노빌레스 오빌리쥐를 실천한 사람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있다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이회영 일가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든 부와 명예를 버리고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서 만주로 중국 대륙으로 가신 분! 이러한 분이 있기에 행복한다.

2. 고민

그러나 한편으로는 행복해 할 수만은 없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가면서 이루려했던 새로운 대한민국의 모습이 지금의 모습은 아니기 때문이다. 친일파가 권력을 잡고,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를 무시하고 음해하고 모해하는 현재의 상황을 보면서, 너무도 가슴이 아프고 씁쓸해진다. 친일을 두둔하고, 강자의 편에서 약자를 괴롭히는 것을 즐기는, 일베충들을 보면서 과연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밀려든다.

3. 아쉬움

이책을 읽기 전에, 이덕일의 ' 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 전前사'와, '근대를 말하다.'라는 책을 읽었다. 이러한 책과 상당 부분이 '이회영과 젊은 그들'이 겹친다. '왕조의 마지막 두 풍경', '일가 망명', '독립군의 요람 신흥무관학교'는 '근대를 말하다'와 일치하는 부분이 많고, '만주 운동의 새바람'과 '신채호의 순국'은 '잊혀진 근대, 다시 읽는 해방전사'와 일치한다. 한 개인이 쓴 것이기에 책을 읽다가 겹치고, 이전에 읽었던 부분인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알고 싶었던 나에게는 조금 아쉽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므로 해서 이전에 읽었던 두책이 다시금 제대로 이해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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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과 젊은 그들 자네 ㅣ 2011-10-24 ㅣ 공감(1) ㅣ 댓글 (0)
경술국치 이후 앞서 합방을 부르짖었거나 그것을 방조했던 76명의 관리들이 일본으로부터 귀족, 후작의 작위를 받아 염치를 모르고 뻔뻔하게 잘 살아가는 동안 “우리 형제는 나라와 안락과 근심을 같이할 위치에 있다. ... 당당한 명문 호족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서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이는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갚하며 험난한 망명의 길을 택했던 사람들. 우당 이회영 일가였다. 같은 사대부지만 어떻게 이렇게 다른 삶을 살았을까. 이회영 일가의 삶은 다큐나 책을 통해 많이 알려졌지만, 김대락, 이상룡, 김동삼과 같은 다른 사대부들의 집단 망명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많이 아쉽다. 이 책에서는 그 일차적 책임이 해방 이후 친일세력에 대한 청산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데에 있다고 보는데, 아.. 너무 안타깝다.

이회영이 무장 항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데에 헤이그 밀사사건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좀 놀라웠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한데도 그동안 수업에서는 헤이그 밀사사건과 신민회의 활동을 같이 설명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회영은 적극적으로 고종 망명을 계획했는데, 고종 망명이 갖는 폭발성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고종 망명은 일제가 모든 것을 걸고 막아야 하는 식민지 통치의 제1대 원칙이었다. 고종이 국외로 망명해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다면 3.1운동 보다 훨씬 더 대규모의 조직적인 운동이 일어났을 것이고, 자발적으로 합병했다고 주장한 일본의 허위성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터였다. 하지만 자금이 마련되고 행궁까지 준비되어 구체화되어 가던 계획은 고종이 갑작스럽게 급서하면서, 실패로 돌아간다. 일본이 고종 사망을 하루 뒤에 발표하면서 갖다 붙인 병명은 뇌출혈, 사망 전날 숙직한 인물이 ‘개호로자식’ 이완용이었다는 사실은 고종 독살설에 확신을 갖게 했다.
어쨌든 고종 망명을 주도했던 인물이 바로 이회영이었다.

이회영을 존경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그가 권력욕으로부터 자유로웠다는 점이다. 독재하다가 비참한 말로를 보여준 누군가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
임정 임시의정원에서 헌법을 만들려고 할 때, 이회영은 정부가 아닌 독립운동총본부를 조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부를 조직하면 지위와 권력을 다투는 분규가 끊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정부 조직을 반대했던 것이다. 책에 따르면 이때까지는 이회영이 ‘아나키즘(자유연합주의)’에 대해 잘 몰랐다고 한다.

“목적이 수단과 방법을 규정짓는 것이지 수단과 방법이 목적을 규정할 수 없다는 확고한 견지에서 볼 때 한 민족의 독립운동이랑 그 민족의 해방과 자유의 탈환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확고한 자각과 목적의식이 투철한 사람들이 하는 독립운동은 운동 자체가 해방과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오직 운동가들의 자유합의가 있을 뿐이니 이것은 이론으로도 당연한 것이다”(p144)

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이회영은 아나키즘을 알기 전에 이미 아나키스트였던 것 같다.

한편 이 책은, 당시의 독립운동가들이 일제라는 공동적과 싸웠지만, 그들 내부에서는 엄청나게 치열한 사상 갈등을 해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나키즘과 연합하여 새로운 전선을 만들 희망에 부풀어있었던 민족주의자 김좌진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일제로서는 쾌재를 부를 일이지만,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윤봉길의 의거 역시, 임시정부보다 자유연합주의자들이 먼저 계획했던 것인데 임정이 선수친 것에 대해 무척 안타까워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어떤 경쟁관계에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해방 직전까지 특히, 10년대와 20년대의 주요 사건들과 사상의 흐름은 이회영을 빼놓고서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독립과 이상사회 건설을 위해 투쟁하다 거리에서 죽어간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사형당하면서도 꿋꿋했던 오동진, 김동삼 같은 젊은 동지들을 꼭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아래는 1932년에 이회영이 만주로 떠나기 전에 동지들에게 남긴 말이다.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네. 이 목적을 달성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이 또한 행복 아닌가. 남의 눈에는 불행일 수도 있겠지만 죽을 곳을 찾는 것은 옛날부터 행복으로 여겨왔네. 같은 운동선상의 동지로서 장래가 만리 같은 귀중한 청년자제들의 죽음을 제 집에 돌아가는 것으로 여겨 두려움 없이 몇 번이고 사선을 넘고 사지에 뛰어드는데, 내 나이 이미 60을 넘어 70이 멀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대로 앉아 죽기를 기다린다면 청년동지들에게 부담을 주는 방해물이 될 뿐이니 이것은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바요,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는 일이네.”(252)

책의 중간 중간에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여사가 남긴 <서간도시종기>의 내용이 삽입되어 있는데 읽다 보면 눈물이 난다.


* 이인직에 대해.. “한글로는 ‘피눈물’, 한자로는 ‘血淚(혈루)’라고 써야 할 것을 일본식으로 ‘혈의 누’라고 쓴 것은 그의 친일 성향을 말해준다. ... 안중근을 ‘악한’이라고 지칭한 이 사내를 해방 후에도 ‘한국 현대 문학의 선구자’로, <혈의 누>를 ‘한국 최초의 신소설’로 가르쳐온 것은 단순한 우연인지, 거대한 힘이 작용한 기획의 결과인지 생각해볼 일이다.”(p20)


우리가 큰 빚을 지고 있는 분들의 거룩한 삶의 기록 이장님 ㅣ 2010-02-02 ㅣ 공감(3) ㅣ 댓글 (0)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인 이덕일 선생과 우리 시대의 보물 같은 작가 조정래 선생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책의 구성이 어떻고 내용이 어떻고 하는 사치스런 말을 하고싶지 않다.

얼마 전 TV에서 아마 '역사스페셜' 이던가 아니면 '한국사 전' 이었던가 하는 프로그램에서 이회영 선생에 대한 조명이 있었다. 그 전에도 들어본 적은 있었던 이름이었지만 그가 이정도로 큰 사람이었는지는 몰랐었다. 당시 선생의 손주며느님 인터뷰에서 끼니를 거르면서도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던 선생과 그의 가솔들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 눈시울이 뜨거웠던 기억이 있다. 반면에 지금 우리사회는 어떠한가? 고 노무현 대통령 집권기에 그렇게 노력했던 과거사 진상규명의 노력은 지금 어찌 됐는가? 과연 과거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 다 지나간 과거에 발목 잡혀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 쓸데없는 짓거리나 하자는 것인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정말로 8.15 직후 매국적 인사 60만명만 제대로 댓가를 치르게 했더라면 지금 이 나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리라고 확신한다. 그런 점에서 미군정 기간을 나는 또다른 식민시대라고 부른다. 이 책을 읽는 내내 8.15 이후 지금까지의 우리 역사를 확 뒤집어 놓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통쾌할까)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동안 조정래 선생의 역작 '아리랑'에 나오는 수많은 장면들이 자꾸만 떠올라 눈물이 나왔다. 이덕일 선생은 역사학자로서 소위 '노론사관', '식민사관'과 외롭고도 힘겹게 싸워오고 있는 분이다. 왜 이런 사람이 각광받지 못하고 하계의 메이저가 되지 못하는지 한탄스럽다. 그나마 최근 그의 저작들이 서점가에서 주목받고 있음을 위안삼아야 하는가?

제2, 제3의 젊은 이덕일이 계속해서 나올 때 우리의 역사가 그야말로 바로 서는 날이 올 거라고 믿고 있다. 아직은 이 나라의 수준이 거기까지는 아닌 것이 너무나 한스럽다.

이 책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인 이회영 선생을 중심으로 한국인 아나키스트를 재조명한 책이다. 개인적으로 인물사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너무 좁은 서술일 것 같아서) 이런 지금까지의 생각이 바뀌게 해 준 책이다. 인물사도 충분히 읽어 볼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이덕일 선생처럼 제대로 된 시각을 갖춘 사람이 써낸 책이어야 하겠지만.

이회영과 젊은그들 꺼맹 ㅣ 2010-01-31 ㅣ 공감(2) ㅣ 댓글 (0)


학창시절 학교를 다닐때 역사점수는 잘 나왔었다... 왜냐하면 암기를 나름 잘 했으니까
그러나,,, 그 시험이 끝나고 나면 내 머리속은 백지로 변해버렸다...그래서 역사를 잘
아는 구들을 보면 정말 신기할 따름이다...특히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내 친구를 보면
더 신기할 따름이었는데... 책을읽고,,,, 역사 사극을 통해서 역사를 알아야 겠구나 라는
생각을 많이한다...그래서 요새는 역사 관련 책을 읽으려고 노력중이다~~

일제치하에 있던 우리의 역사,,, 그역사속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이책을 통해서 이회영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봤지만,,,그의 삶은 정말 대단했다.
일제치하에서 자산의 가족을 이끌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중국으로 망명하고,
망명후의 그들의 활동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읽으면서 나라면
저렇게 할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품으면서 읽었다...

특히 여기에서 이회영이 1932년, 만주로 떠나기 전에 동지들에게 남긴말이 맘에
와닿았다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누구나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있네, 이목적을
달성한다면 그 보다 더한 행복은 없을 것이네.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자리에서 죽는다 하더라도 이또한 행복 아닌가, 남의 눈에는 불행일수도 있겠지만
죽을 곳을 찾는 것은 옛날부터 행복으로 여겨왔네. 같은 운동선상의 동지로서
장래가 만리 같은 귀중한 청년자제들이 죽음을 제 집에 돌아가는 것으로 여겨
두려움 없이 몇번이고 사선을 넘고 사지에 뛰어드는데, 내 나이 이미 60을 넘어
70이 멀지 않았는데, 그런데 이대로 앉아 죽기를 기다린다면 청년동지들에게
부담을 주는 방해물이 될뿐이니 이것은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바요,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는 일이네" 이부분은 책의 뒷면에도 나와있는 구절로... 왠지 이런생각을
가지고 산다면 이세사을 살아가는데 정말 후회없이 살수 있지 않을까 하는생각도 들었다. 책을 통해서 정말 역사속의 인물을 통해서 배울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은거 같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통해서 옛 선조들의 지식과 그 의식을 받아들일수 있는 그런
좋은 경험을 이책을 통해서 얻을수 있었던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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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총 : 1편


▩ 숨겨지고 잊혀진 아나키스트 독립운동사의 복원 ▩
befreepark | 2010-01-27






총 : 9편




2010.06.28 <이회영과 젊은 그들>... 레드캡 ㅣ 2015-04-07 ㅣ 공감(1) ㅣ 댓글 (0)
2010.06.28

<이회영과 젊은 그들> 이덕일, 역사의 아침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있다.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와 선행을 뜻한다. 우리 나라에도 이를 실천한 명문가가 있었으니 바로 이회영과 그의 형제, 가족들이었다.

500년 왕조의 끝자락, 망국지탄의 신음이 강토 여기저기서 새어 나오던 1910년이었다.홀연히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노비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멀고도 차가운 만주 땅으로 떠난
삼한갑족(명문가를 뜻하는 말)이 있었다. 백사 이항복의 후손이며 조상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낸 이들을 숱하게 배출한 이회영 집안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지금 돈으로 치면 수백억에 달하는 재산을 갖고 만주로 떠나서 독립운동의
기지가 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다. 한 때는 귀족이었지만 추위와 배고픔에 이를 악물며
나라의 해방을 꿈꾸었을 이회영과 젊은 그들. 이들의 대척점에는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나라를
일제에 넘긴 고관대작들이 있었다.

엄혹한 시절 내내 싸우던 이회영은 노인이 되어서도 독립운동의 새로운 기반을 닦기 위해
상하이에서 만주로 간다. 그러다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안중근 의사도 갇혔었던 뤼순감옥에서 운명을 달리한다.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조국으로 보낸 부인과 떨어져 지낸지는 7년이 될 쯤이었던 그때, 그의 나이는 만 65세였다. 그날은 이제껏 일제에 져본 적 없는 그가 아마 저승으로 가 통한의 눈물을 흘렸을 날이었으리라....

재야역사 학자 이덕일 씨는 한국사의 이슈를 쉽고 친근하게 풀어쓴다. `조선왕 독살사건`,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도 많은 인기를 얻은 작품이다. 그는 식민사관을
탈피하고 한국사의 대륙성과 해양성을 복원하는데 초점을 두며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150227 우당 이회영 展 여울 ㅣ 2015-02-28 ㅣ 공감(5) ㅣ 댓글 (0)










































뱀발.



1. 총괄기획한 서행성작가를 통해서 설명을 듣다. 구한 난이 5점 밖에 되지 않는다. 증손녀의 이야기를 건네 듣는다. 란에 쓰인 동생의 말들을 보다나니 마음이 뭉클해져 눈가가 시큰거린다. 몇 바퀴 자꾸 거닐다. 고마웠다. 전시회는 내일까지다. 덕수궁 중명전, 정동극장 옆.














-2. 란은 대원군 이하응보다는 덜 화려하지만 단아해서 좋았고, 떨어진 난초꽃은 처음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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