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21

북한에 사과하지 않으려 했던 미국, 결국엔



북한에 사과하지 않으려 했던 미국, 결국엔



북한에 사과하지 않으려 했던 미국, 결국엔
[푸에블로호와 치욕적 북미협상] <3> 북한의 호통과 미국의 꼼수

이재봉 원광대학교 교수
2018.06.21 10:17:13

북한에 사과하지 않으려 했던 미국, 결국엔

3. 미국의 전방위 외교

1968년 1월 23일 푸에블로호가 나포되자 미국 국무부는 그날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관에 전보를 보냈다. 그로미코 (Andrei Gromyko) 소련 외상을 만나 미국 배와 승무원들이 빨리 풀려날 수 있도록 북한에 강력하게 항의하며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부탁하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모스크바를 방문 중이던 윌슨 (Harold Wilson) 영국 수상에게도 연락했다. 코시긴 (Alexi Kosygin) 소련 수상에게 선처를 부탁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로미코는 소련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대꾸했다.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 때문에 한반도에서 긴장이 생기고 있으니 미국이 북한과 직접 대화하라고 충고했다. 미국은 푸에블로호가 공해상에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소련은 미국 배가 북한 영해를 침범했다는 북한 주장을 편들었다.

러스크(Dean Rusk) 국무부 장관이 그로미코 외상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존슨 (Lyndon Johnson) 대통령이 코시긴 수상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특히 존슨은 "일본해 공해상에서 빚어진 북한 당국의 푸에블로호 나포라는 비이성적 행위"에 소련의 책임이 없다는 주장에 실망스럽다고 했다. 소련도 한반도 주변 공해상에서 푸에블로호와 비슷한 정보함을 운항하고 있지 않느냐며 북한이 배와 승무원을 즉각 풀어주도록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코시긴의 답장은 싸늘했다.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를 침범했기에 억류된 것 아닌가. 그런 터에 미국이 핵 항공모함과 구축함 등을 북한 쪽으로 보내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북한의 주권과 독립성을 인정해라. 북한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문제를 복잡하게 할 뿐이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은 사토 (佐藤榮作) 일본 수상에게도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무렵 일본이 북한과 상당한 교역을 하고 있던 터였지만 허사였다. 유엔 사무총장에게도 중재를 부탁했지만, 북한은 유엔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대꾸했다.

나중엔 푸에블로호 사건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하기도 했지만, 소련의 반대로 결의안조차 채택하지 못했다. 국제 적십자사를 통해보는 것도 허사였다.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려다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는 꼴이라 포기하고 말았다.





▲ 평양에 전시돼있는 푸에블로호 ⓒ위키피디아
4. 북한의 호통

미국은 북한을 겨냥해 핵 항공모함과 구축함들을 동해에 배치한 데 이어 전투기를 거의 200대까지 한반도에 더 보냈다. 그와 동시에 남한 군부에겐 1.21 청와대 기습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북한에 대해 어떠한 적대 행위도 하지 말라고 했다.

박정희 정부는 분통을 터뜨렸다. 국가 원수가 죽을 뻔한 청와대 기습 사건에 대해서는 미국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다가 미국 정보함을 나포한 사건에 대해서는 다양한 대응을 즉각 준비하는 게 불만스러웠다.

대통령을 살해하려고 한 데 대해 북한과의 전쟁도 불사하며 보복하고 싶던 터에 미국도 당했으니 미국이 화끈하게 폭격해주기를 기대했는데, 협상을 통해 사건을 처리하려는 것도 못마땅했다.

게다가 미국은 판문점에서 남한을 빼고 북한과 1대1 비밀 협상을 벌이고자 했으니, 특히 박정희는 분노를 억누르기 힘들었다. 이에 미국은 한미방위조약에 따라 남한의 안보를 강화하고 군사 원조를 늘리겠다는 약속으로 남한 정부를 달랬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북한이 1968년 2월부터 판문점에서 본격적으로 비공개 협상을 갖기 시작했다. 미국은 그 배가 북녘 해안에서 약 16마일이나 떨어진 '공해'상에 있었고, 대낮이었기 때문에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은 1%도 되지 않는다며, 즉시 승무원들과 군함을 되돌려달라고 항의도 하고 위협도 했다.

북한은 그 첩보선이 원산항 앞의 여도로부터 약 8마일 떨어진 '영해'에 불법으로 침입하여 북한군의 동태를 염탐했다며, 미국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앞서 북한은 푸에블로호 나포 이틀 만에 함장이 북한 영해를 침범해 정탐을 했다는 사실을 자백했다며, 그가 자백서에 서명하는 사진과 함께 이 사실을 발표했다. 미국은 그게 고문이나 약물에 의한 자백일 것이라며 승무원들이 돌아온 뒤 객관적인 조사를 실시해 미국의 잘못이 인정되면 '유감의 뜻'을 표명하겠다고 제안했다. 북한은 미국이 먼저 '사과'하면서 앞으로 영해 침범을 하지 않겠다고 '담보'해야만 승무원들을 돌려보낼 수 있다고 못 박았다.

2월 중순 협상 중에 미국 대표가 북한이 청와대 기습 사건이나 푸에블로호 나포 같은 "침략적 도발 행위"를 중단하라고 큰소리로 요구하자, 북한 대표는 책상을 치며 다음과 같이 호통쳤다.

"당신은 지금 조선 사람인 우리가 조선에서 침략 행위를 한다고 떠벌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지금 어디에 와서 누구와 마주앉아 있는 지나 알고 함부로 입을 놀려대고 있는 것입니까?

이곳은 미국이 아니고 조선의 판문점입니다. 당신들은 우리가 초청해 온 손님도 아니며 우리나라에 찾아온 관광객도 아닙니다. 당신들은 우리나라에 불법적으로 기어든 침략자입니다. 당신들은 20년이나 우리나라 절반 땅을 강점하고 조선의 통일을 가로막으면서 민족 분열을 강요하고 있는 조선 인민의 불구대천의 원수입니다.

(중략) 이제는 미국의 전문적인 무장 간첩선 푸에블로호까지 끌어들여 우리나라 영해를 침범하고 노골적으로 우리 공화국을 도발하고 나섰습니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제 침략자들은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을 계기로 광란적 전쟁 소동을 벌이면서 남조선과 공화국 북반부 동해안 일대에 수많은 침략 무력을 집결시켜놓고 공화국을 침공하겠다고 떠들고 있소.

오늘날 영웅적 조선인민군과 무장한 전체 조선 인민은 당신 등 미제국주의자들의 어떠한 도발이나 침공에도 대처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바라지 않지만 결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신들 침략자들의 도발은 징벌로, 보복은 보복으로, 전면 전쟁은 전면 전쟁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며칠 후엔 박성철 부수상이 평양에서 다음과 같이 거친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만약 미 제국주의자들과 박정희 도당 (clique)이 감히 어떤 보복 행위를 시도한다면 그건 즉각 전쟁 시작을 의미한다. 미 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들 (stooges)이 현실을 직시하고 분별 있게 행동해야 한다.

조선반도에서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지 여부는 전적으로 미 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들의 태도에 달려있다. 미 제국주의자들이 위협과 공갈 그리고 전쟁을 더 외칠수록 현 상황은 더 복잡해질 것이다. 이로부터 얻는 게 있다면 그건 오로지 시체와 죽음뿐일 것이다."

5. 미국의 꼼수와 굴욕

미국은 북한과 판문점에서 거의 1년이나 지루하게 실랑이를 벌이다 속임수 한 가지를 생각해냈다. 북한이 만들어준 사과문에 대각선으로 승무원들을 돌려받는다는 문장을 집어넣고 바로 그 밑에 서명하겠다는 것이었다. 북한이 주장하는 영해 침범과 불법 정탐 행위를 인정하는 게 아니라, 승무원을 인수한다는 자체만 인정하겠다는 술수였다.

처음에는 미국의 의도를 몰라 그냥 넘어갈 듯하다 미국의 속셈을 뒤늦게 알아차린 북한 대표는 노발대발하며 사과문에 진정으로 서명할 용의가 있을 때 회의장에 나오라고 소리쳤다.

미국은 다시 꾀를 짜냈다. 사과문 끝에 승무원들을 인수한다는 문장을 집어넣고 서명하되, 서명하기 직전에 그 사과문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부정하는 성명을 발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4년 전에 써먹었던 수법과 비슷하다. 1964년 미군 헬기가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 영공에 들어갔다가 격추되었는데, 미국은 북한에 대해 정탐하고 북한 영공에 불법으로 침입한 범죄를 인정하며 앞으로는 그런 범죄 행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보장한다는 문서에 서명한 뒤 다음날 이를 공개적으로 부인했던 적이 있다.

북한은 미국이 사과문에 공식적으로 서명한다면 말로 부인한다는 게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느냐싶어 이 옹색한 제안을 받아들인 것 같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푸에블로호가 나포된 지 정확하게 11개월 만인 1968년 12월 23일 미국은 다음과 같은 사과문에 서명하고 판문점을 통해 승무원 82명과 시체 1구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서명 직전 미국 대표는 "이 문건에 서명하는 유일한 이유는 인도적 견지에서 승무원들을 돌려받기 위해서이지, 북한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사과문 내용에 서명하는 것은 아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 앞:

(중략) 미국 함선 푸에블로호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령해에 여러 차례 불법 침입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중요한 군사적 및 국가적 기밀을 탐지하는 정탐 행위를 이 함정의 승무원들의 자백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 대표가 제시한 해당한 증거 문건들의 타당성을 인정하면서, 이 미국 함선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령해에 침입하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반대하는 엄중한 정탐 행위를 한 데 대해서 전적인 책임을 지고, 이에 엄숙히 사죄하며 앞으로 다시는 어떠한 미국 함선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령해에 침입하지 않도록 할 것을 확고히 담보하는 바입니다. (중략) 본 문건에 서명하는 동시에 하기인은 푸에블로호의 이전 승무원 82명과 시체 1구를 인수함을 인정합니다.

미합중국 정부를 대표하여 미 육군 소장 길버트 우드워드 1968년 12월 23일."

비록 미국이 진심으로 사과한 게 아니라는 성명을 발표하긴 했지만, '미국 역사상 최초로' 사과문에 서명했다는 자체가 미국으로서는 끔찍한 치욕이었다. 게다가 함정과 거기에 설치된 비밀전자 장치는 끝내 되돌려받지 못했으니 그 때문에 암호 체계를 완전히 바꿔야 하는 엄청난 손실도 당했다.

미국은 그 때까지 어느 나라에든지 해안에서부터 3마일까지를 국제법상 영해로 인정하고 있었고, 설사 어느 선박이 다른 나라 영해를 침범하더라도 해당 국가는 그 선박에게 영해를 떠나도록 요구하는 게 국제법상 유일한 권리라고 주장해왔는데, 미국이 받들어온 국제법이 무너지게 되었으니 위신이 말이 아니었다.

또한 1960년대 미국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대외정책을 세웠지만, 북한을 동등한 협상 상대로 대하지 않을 수 없었던 데다, 협상 과정에서 북한 대표로부터 '북한 (North Korea)'이라는 호칭 대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라는 공식 호칭을 쓰도록 '심각한 경고'를 받고 이를 쓰지 않을 수 없었으니 북한을 제대로 인정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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