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29

송필경 - 왜 쿠바인가? 나는 왜 쿠바에 가는가?



송필경 - 왜 쿠바인가? 나는 왜 쿠바에 가는가?




송필경
11 hrs ·



왜 쿠바인가?
나는 왜 쿠바에 가는가?

Ⅰ.
1970년대 말 지하 동아리 모임에서 보건의료에 대해 공부를 할 때 쿠바 의료 체계에 묘한 매력을 느꼈다. 그 당시에는 학생이어서 의료 체계가 무슨 의미인지 구체적으로 아는 게 없었지만, 유신 시절 대학에서는 사회주의적 이론을 금지했기 때문에 오히려 호기심이 일었다. 무엇보다 카스트로, 체 게바라가 이끌어 성공한 쿠바 혁명의 명성을 막연하게 흠모했던 것도 호기심을 보인 가장 큰 원인이었다.
당시 존스 홉킨스 의과 대학의 빈센트 나바로 교수의 사회주의 의료 이론을 공부했는데 근사하다고 생각했을 뿐 이론의 의미를 깨달을 능력은 없었다.

1990년대 소련이 해체되자 미국에게 경제 봉쇄 당하고 소련 원조에 전적으로 의지하던 쿠바 경제는 곤두박질 쳤다. 소련의 원유 공급이 끊겨 거의 모든 차는 굴러갈 수 없었다. 농업도 사탕수수 수출에만 의지했다. 소련에서 이를 값비싸게 구입해 주었으나, 이마저 거래가 뚝 끊겨 국가 주 수입원이 사라졌다. 농업 구조를 단박에 바꿀 수 없어 식량난이 곧바로 닥쳤다. 쿠바 인민은 굶주림에 허덕이는 엄청난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1993년쯤인가 94년쯤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KBS에서 쿠바 특집을 3시간가량 방영했다. 밤이면 온 나라가 캄캄해지는 혹독한 경제난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겨우 겨우 명맥을 유지한 수단은 유럽 관광객들이 뿌리는 돈이었다. 가장 참혹했던 장면은 여자가 유럽 여행객을 유혹하여 자기 집안에 끌어들여 윤락행위를 하는 모습이었다. 여행객과 흥정을 마치고 집안으로 들어가면, 남편은 아이 손을 잡고 집밖으로 나오는 장면이 TV에서 생생했다. 온 식구가 아내이자 엄마의 매춘에 의지하여 산 셈이었다.

나라가 이쯤 되면 뒤집혀야 하지 않겠는가. KBS 기자가 나이 어느 정도 있는 쿠바인과 인터뷰하며 미국이 하자는 대로 순종해서 미국의 경제 압박에서 벗어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자 쿠바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우리는 대단히 고통스럽다. 그러나 미국 체제에 편입을 절대 원 하지 않는다. 우리는 미국 체제에서 살아 봤다. 카스트로 정권은 미국 체제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성과를 이룩했다. 지금 쿠바에서는 교육과 의료는 완전 무상이다.”

KBS 기자의 마지막 언급은 이랬다. “아무리 쿠바가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카스트로 정권은 망하지 않을 것이다.”

교육과 의료에 어떤 체계를 세웠길래 혹독한 조건 속에서도 체제가 흔들리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일었다.
어쨌던 쿠바는 1990년대 위기를 전화위복으로 삼아 2000년대 부터 안정하기 시작했다.

2010년 1월 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했을 때, 시내 사거리에서 외국인 동상을 보게 되었다.
베트남 역사 2천년 동안 외세에 저항한 영웅이 즐비하다. 그래서 베트남의 웬만한 주요 거리에는 애국 선열의 동상이 거의 있다. 외세에 그토록 자부심이 강한 베트남에서 외국인 동상이라니... 호기심이 일어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귀국해서 동상 인물에 관한 설명판의 사진을 베트남 유학생에게 부탁해 번역해 보니 이름이 '호세 마르티'란 쿠바인이었다. 이 인물에 대해 인터넷에 뒤져 보니 카스트로가 평생을 입에 달고 존경한 쿠바의 독립 영웅이었다. 호세 마르티는 우리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쿠바 뿐만 아니라 19세기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뛰어난 지성인이요 혁명가였다.

쿠바와 베트남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미국의 침력으로 동병상련을 느꼈다. 젊은 혁명가 체 게바라는 노련한 혁명가 호찌민을 가장 존경하였다. 카스트로도 베트남전장을 찾은 적이 있었으며 베트남에 가능한 도움을 주기도 했다.

미국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혁명적 우호 관계를 두 나라는 아주 돈독히 유지했다. 그래서 베트남은 쿠바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쿠바에서 국부라 숭상하는 호세 마르티의 동상을 세우지 않았을까.

19세기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혁명가 호세 마르티의 체취를 쿠바에서 꼭 맡고 싶었다. 그런 호세 마르티의 후예들이 1990년대 특별시기(북한 측 용어로는 고난의 행군)를 이겨내고 2000년대에 들어서 교육과 의료에 있어서 선진국보다 더 우수한 체계를 수립했고 사탕수수에 의존한 농업에서 탈피하여 전 국토를 생태 친화적인 농업구조로 바꾸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보편적 의료 복지를 지향하는 '문재인 케어'를 발표하자, 많은 의사들이 발끈하며 사회주의 의료를 운운하며 문재인 정부를 색깔론으로 몰고 있다. 일부 의협 지도부 의사들이 천박한 행태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을 반박하기 위하여 쿠바의 의료 체계에 대해 수박 겉핥기식이라도 견학하게 쿠바 여행을 벼르고 있었다.

2018년 3월에 베트남 중부지방에서 한극군이 저지른 주민 학살 50주년 위령제가 있어 한베평화재단에서 강우일 이사장님을 비롯해 30여 명이 베트남을 방문했다. 이때 서강대 정치학과 손호철 전 교수와 한 방을 쓰게 되었다. 손교수께서 7월 초에 쿠바에 가는데 자기 일행과 같이 가자고 권유하셔 두말 않고 승락했다.
그토록 동경하던 쿠바 여행을 드디어 하게 되었다.

Ⅱ. 호세 마르티

1. 베트남의 새벽 거리
나는 해외여행을 가면 술을 어지간히 마시지 않았으면 일찍 일어난다. 숙소에서 빠져나와 새벽 거리를 어슬렁거리다 보면 그 나라의 속살을 얼마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2010년 3월 20일 오전 5시, 베트남 하노이 구시가지에 있는 호아빈 호텔에서 아직 종업원이 일어나지 않아 로비문이 잠겨 있었지만, 잠금 장치를 찾아내 풀고 거리로 나섰다. 구름이 짙고 아직 해가 뜨지 않아 거리는 어두웠다. 드문드문 지나가는 오토바이와 짐을 가득 실은 자전거가 지날 뿐이다. 보통 베트남 도시의 도로는 오토바이가 주인이며 러시아워 때면 물론 늦은 밤까지 군무하는 새 떼가 하늘을 가득 메우듯 거리는 온통 오토바이 물결이다. 새벽만큼은 오토바이가 썰물에 쓸려간 것처럼 조용하니 논라를 쓰고 가인항에 과일을 넘치게 담은 여인이 차도로 지나고 있다.

***‘논 라(Non la)’는 나뭇잎을 말려 만든 삿갓 모자이며 ‘가인 항(Ganh Hang)’은 단단한 대나무 장대 양쪽에 바구니를 달고 장대 중간을 어깨에 올려 놓는 운반 도구를 말한다. 여자들이 주로 열대 과일을 넣고 다닌다. ‘논라’와 ‘가인항’은 순결하고 아름다운 옷 ‘아오 자이(Ao Dai: Ao는 옷이라는 단어, Dai는 길다는 뜻, 즉 긴옷)'와 함께 베트남을 대표하는 상징이다.***

호텔에서 조금 걸어가니 도로에는 많은 인부들이 차량이 뜸한 심야에 도로 보수공사를 했고 이 새벽에 공사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파헤친 도로에 메울 뜨거운 김이 나는 아스팔트를 작은 수레에 담아 실어 나르는 일은 대부분 여자의 몫이라는 게 특이했다. 여자가 인부의 1/3 되는 것 같았다. 동 틀 무렵이 되니 인부들은 밤새 흘린 땀을 닦아내고서 장비를 추스르고 귀가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남쪽 나라의 엄청 더운 낮에 비해 해뜨기 전 쌀쌀한 이른 아침은 이 사람들에게는 매우 소중한 시간이다. 하루 일과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도 있고, 작은 공원 주위에 달리거나 빠른 걸음으로 빙빙돌며 체력 다지기에 열중하는 남녀들이 적잖게 있다. 일부 남자들은 웃옷벗고 반바지 차림으로 뛰면서 헉헉 거친 숨을 내쉬며 땀을 줄줄 뱉고 있다.

베트남의 대부분 서민들은 아침을 길에서 파는 음식으로 해결한다고 한다. 그래서 베트남의 모든 아침거리는 거대한 뷔페 또는 레스토랑을 연상하게 한다. 컴컴한 새벽 한 아낙이 우리나라 목욕탕 플라스틱 의자 같은 작은 의자에 앉아 가져온 음식들을 척척 손질한다. 육수가 가득한 큰 찜통을 숯불에 올려 데우는 아낙, 다른 아낙은 쌀국수에 넣을 닭고기를 잘게 찢고 또 다른 아낙은 갖은 야채와 양념을 써는 데 그 손놀림이 몹시 빠르다. 가까운 곳에는 긴 바게트 빵, 샐러드, 소지지를 담은 발통 달린 작은 수레를 끌고 오는 아낙이 있다. 거리를 조금 더 걷다 보면 작은 숯불 화로, 석쇠, 염소고기, 돼지고기, 야채 담은 소쿠리 그리고 큰 대야에 가득한 밥을 준비한 아낙이 아침 식사 손님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따끈한 차와 베트남 커피를 파는 좌판을 편 아낙도 분주한 아침을 기다리고 있다. 베트남은 천혜의 자연환경 덕분에 식재료가 풍부해 음식문화가 다양하다.

아내와 함께 여행을 할 때도 아내와 따로 다녀도 내 목에 카메라가 떠나는 적이 없다. 나같이 기억력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는 디지털 사진기의 매력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무엇보다 필름 걱정을 하지 않고 셔터를 마구 누를 수 있다. 순간순간 이미지를 만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셔터에 손가락 힘이 주어져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날아 가버리는 이미지를 붙잡아 맬 수 있기 때문이다. 문인들이 메모지를 항상 곁에 두고 생각이 떠오를 때 즉시 메모하는 것처럼 디지털 사진기는 나의 훌륭한 메모장이다. 디지털 사진들은 찍은 시간을 초단위까지 기록 저장하니 기억이 혼란하는 불편을 완전히 해소해 준다. 이런 문명의 이기에 맛 들면 그 유혹에서 좀처럼 헤어나기 힘든다.

우리 일행이 호텔에서 아침 뷔페 식사하기로 약속한 시간은 7시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무작정 천천히 걸어갔다. 어둠이 어느새 걷히면서 밝아졌다. 후레쉬를 사용하지 않고 사진을 찍을 만큼 빛이 생긴 것이다. 길거리 레스토랑의 모습을 찍으며 걸었다. 웬만큼 가니 쭉 뻗은 길 끝에 로터리 같은 장소가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도로 교차로 가운데 마련한 작은 공원이었다. 타원형 둥근 공간이 100평 쯤 될까? 가운데 머리 조각상을 얹은 자줏빛 대리석 기둥이 있고, 그 기둥 사방으로 보도블록을 깐 폭 6m 남짓한 십자형 길이 있다. 사방 나머지 자투리는 잔디와 나무가 심어 있다. 보도블록 위에서 20여명 남짓한 중‧노년의 남녀들이 종횡으로 정열하여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체조에 열중하고 있다. 중국의 태극권처럼 보였다. 태극권은 원래는 싸움질하는 권법이었지만 요즘 중국에서 아침마다 남녀노소가 공공장소에 모여 건강증진하는 체조로 즐기고 있다고 한다. 베트남도 그런 것 같았다. 누구의 선창이나 시범 강사 같은 사람도 없이 조용조용 일정한 리듬으로 느릿한 움직임을 모두 같이 취하고 있다. 이 부근 주민들이 오랫동안 몸놀림을 맞춘 것 같았다. 멀리서 줌 렌즈로 이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궁금증이 하나 보였다. 공원 가운데 머리 조각상이 아무래도 베트남 사람 같지 않았다. “당신이 찍은 사진이 불만이라면 그것은 당신이 찍을 대상에게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보도 사진의 전설적 대가 로버트 카파의 말이 있다.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대상에 가까이 가야 했다. 길을 건너 공원에 들어갔다. 얼굴 조각상은 마르고 카랑카랑한 골격, 근사한 콧수염, 단호한 눈빛을 지닌 서양인이었다. 대리석 기둥 중간에 그 사람에 대한 해설판이 쓰여 있다. 베트남어로 된 해설판에 읽을 수 있는 것은 딱 다섯 소절, José Martí Pérez, Cuba, Habana, 1853, 19-5-1895 이었다. 베트남어로 이름을 읽으니 ‘호세 막티 페렛’이었다.

외국인 동상이 있는 작은 공원에서 소중한 아침을 보내는 베트남인을 본 것이다. 우리나라는 거리에 있는 동상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정도가 아닐까. 물론 기념공원이나 학교 같은 데는 더러 있지만 대구에만 해도 거리에 있는 동상은 한 군데밖에 없다. 베트남 거리에는 동상이 무척 많다. 2천년 중국에 저항하고 100년간 프랑스‧일본‧미국 같은 초강대국과 싸운 역사에서 탄생한 영웅이 하늘에 별 만큼이나 있다. 베트남의 역사를 어느 정도 알면 마을마다 유관순 누나 같은 사람은 수 십 명 씩 있다는 것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런 베트남에서 외국인의 동상이라니 그 주인공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놀라움이 솟았다.

본명을 우리식으로 읽으면 ‘호세 마르티 페레즈’를 카메라에 꾹 눌러 담고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7시 가까이 되니 오토바이 물결은 갑작스런 썰물처럼 거세지고 길거리 뷔페 마다 엉덩이만 겨우 붙일 수 있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아침을 해결하는 사람들이 빼곡하다. 얼큰한 육수에 담긴 쌀국수를 젓가락질 하는 사람, 샐러드와 소시지를 넣은 바게트 빵을 양 볼이 불룩하게 꾹꾹 씹는 사람, 석쇠에 굽은 돼지고기에 야채를 곁들은 밥을 담은 접시를 턱 밑에 들고 숟가락으로 밥을 입으로 나르는 사람, 벌써 식사하고 커피나 찻잔을 손에 쥐고 느긋하게 배를 쓰다듬으며 담배 연기를 뿜는 사람. 길바닥에서 취향대로 아침을 손쉽게 해결하는 베트남 사람들이 무척 정겹게 보인다.

2. 관타나메라
나는 2010년 베트남 방문이 2001년부터 해서 9번째 이다. 방문할 때마다 무언가를 얻고 배웠다. 그것들은 충격적 감동이었다. 민족 자존심만큼은 하늘에 닿을 듯한 하노이에서 외국인 동상을 본 것 역시 충격이었다. 하노이 시내 중심 공원에는 레닌 동상이 버젓이 있는데 레닌을 러시아보다 소중히 하는 나라가 베트남이다. 이는 붓다가 본 고장인 인도보다 스리랑카나 미얀마 같은 나라에서 더 귀한 대접을 받는 것처럼 말이다.

레닌 동상은 그렇다 치다. ‘호세 막티 페렛’(Jose Marti Perez)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귀국해서 인터넷 검색에서 제일 먼저 열어본 항목이 이 인물에 관한 사항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인물이었다. 동상의 주인공은 일반적으로 호세 마르티로 부르는 쿠바인이었다. 젊었을 때부터 잘 알던 노래, 쿠바의 아리랑이라 할 수 있는 ‘관타나메라’의 작사자였다.

‘라 팔로마’와 함께 ‘관타나메라’는 쿠바 음악 특유의 리듬과 애수를 담은 노래라 좋아했다. 그럼에도 가사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어 아예 몰랐는데 이번 일로 애절한 가사를 알게 되었다. 노래 가사의 원래 시 제목은 ‘소박한 시’라 한다.

『소박한 시

호세 마르티
나는 종려나무가 자라는 곳에서 온 정직한 사람입니다.
죽음을 맞기 전 나는 내 영혼의 시를 노래할 것입니다.
나의 시는 푸른색에서, 불타는 분홍색에서부터 나온 것입니다.
나의 시는 숨을 곳을 찾아 산을 헤매는 상처입은 사슴입니다.
땅위의 가난한 사람들과 나의 운명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깊은 산에서 졸졸 흐르는 시냇물은 바다보다 더 큰 기쁨을 줍니다.』

삶의 진정성과 강고한 의지를 소박하고 단순한 언어에 담은 이 시를 바탕으로 만든 노랫말은 이렇다.

『관타나메라(Guantanamera)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
(관타나모의 여인 관타나모의 농사짓는 아낙네여)

나는 순박하고 성실한 사람
종려나무 무성한 마을 출신
죽기 전에 이 가슴에 맺힌 시를 여기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바치리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

내 시는 화창한 초록색
그러나 불타는 선홍색이려 하네
내 시는 상처 입은 새끼 사슴
산 속 보금자리를 찾는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이 한 몸 바치리라
7월이며 난 1월의 흰 장미를 키우리라
내게 손을 내민 성실한 친구를 위해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

행운을 나누고 싶어
이 땅의 가난한 사람과 함께
골짜기에서 흐르는 시냇물이
나는 바다보다 더 좋아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

관타나메라는 스페인어로 쿠바의 ‘관타나모(Guantánamo) 지방 출신 여자’라는 뜻이라 한다. 과히라는 ‘여자 농부’라는 뜻이니 ‘과히라 관타나메라’는 ‘관타나모의 여자농사꾼’ 뜻이 된다.

1898년 미국은 아바나 항에서 미군함 폭발 사건을 조작해 폭발 책임을 당시 쿠바를 지배하던 스페인 식민당국에 씌우고 스페인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쉽게 스페인을 꺽은 미국은 쿠바를 거머쥐고 아름다운 항구인 관타나모에 미군 기지를 건설한다. 1903년부터 관타나모에 미군 기지를 1년에 2천 달러(1903년도 기준가격)에 영구임대해서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카스트로 집권 후에도 점령을 계속하며 수표로 임대료를 지불하였으나 카스트로 정부는 이 수표를 한번도 현금화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이 기지를 주로 미국에게 저항한 정치범을 가둬 가혹한 형벌로 인간의 존엄성을 조롱하고 인권 유린부터 악명 높은 수용소로 이용하고 있다. 2010년에는 ‘9‧11 사태’로 빌미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서 잡은 알카에다 포로를 가두고 있다.

관타나메라는 자기 땅에서 추방된 지 100년을 훌쩍 넘겼다. 오바마 대통령이 선거 공약으로 관타나모 기지를 폐지한다고 하니, 그 말대로 되어 순박한 ‘과히라 관타나메라’를 볼 날도 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3. 호세 마르티
“게으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성격이 고약한 것도 아닌 사람이 가난하게 산다면, 그곳은 불의가 있는 곳이다.” 호세 마르티의 외침이다.
혁명을 해야 할 이유를 이보다 더 완벽하게 설명할 논리가 있을 수 있는가?

호세 마르티는 1853년 1월 28일 스페인 식민지였던 쿠바의 아바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스페인 군 장교였다. 어려서부터 시와 글쓰기를 좋아했으며 쿠바 독립을 향한 현실에 일찍 눈을 떴다. 마르티가 만 15살이던 1868년 쿠바 최초의 독립전쟁(1868〜1878)이 일어났다. 어린 마르티도 민중봉기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족쇄를 차고 채석장에서 강제 노동을 했다. 그러면서도 ‘쿠바의 정치 감옥’이라는 멋진 글을 썼다. 건강이 악화되어 강제노동에서 해방되었다. 16살 때 <해방조국>이라는 신문을 만들고 조국 쿠바 독립의 정당성과 그 열정을 담은 시를 발표했다. 그리고 ‘쿠바혁명 앞의 스페인 공화국’을 썼다. 스페인과 쿠바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모순을 모두 분석했다. 정말 훌륭한 기록을 그것도 열여섯 살과 열일곱 살 때 썼다고 하니 호세 마르티는 믿기 힘든 재능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1871년 마르티의 인생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독립운동하던 쿠바 의대생 8명이 잔인하고 부당하게 총살당한 것이었다. 이 학생들의 나이는 겨우 열여덟이었다. 마르티는 그 사건과 관련한 멋진 시 “ 11월 27일 죽은 내 형제들에게”를 썼다. 그 해 마르티는 쿠바에서 스페인으로 강제 추방됐다. 스페인 사라고사 대학에서 법률과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다. 신념이 있는 이 지식인은 언제나 꿈을 꾸었다. 새파란 몽상가는 ‘모든 사람이 참여하고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한’ 공화국을 꿈꾸었다.

프랑스 지성을 대표하는 ‘르몽드 디프로마티크’의 편집인 이냐시오 라모네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100시간 이상 카스트로와 인터뷰한 내용을 담은 ‘피델오 스트로, 마이 라이프’란 책이 있다. (피델오 스트로 마이 라이프, 피델오 스트로․이냐시오 라모네, 현대문학, 2008)

위대한 후예 카스트로는 위대한 선배 마르티를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마르티는 지식인이었지만 신념이 있었습니다. 그는 꿈을 꾸었죠. 정말로 존경할 만합니다. 그는 작가입니다. 거의 전기 작가에 가까우며, 모든 위대한 애국자들을 무척 특별한 문체로 찬양했습니다. 그의 연설문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사상들, 즉 사상의 강으로 가득합니다. 나는 가끔씩 그것을 ‘단어의 시내에 있는 사상의 폭포’라고 표현했습니다.”

1878년 마르티는 쿠바로 다시 돌아왔지만 정치활동을 한 이유로 1년 뒤 다시 스페인으로 쫓겨났다. 마르티는 스페인을 빠져 나와 멕시코, 과테말라, 베네수엘라로 돌아다니다가 1880년 미국 뉴욕에 정착하면서 <조국(La Patria)>이란 신문을 간행하였다. 기자생활하면서도 집필활동과 정치활동으로 멈추지 않았고 그 명성이 라틴 아메리카 전역으로 퍼졌다.

1882년에 시집 <이스마엘리요(Ismaelillo)>를 펴내고, 1891년에는 관타나메라의 노랫말의 소재가 된 <소박한 노래(Versos sencillos)>를 출판했다. 마르티의 시는 소박한 감정이 넘치면서도 근대적 감각 표현해 세계문학사에서 근대주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이 모든 활동은 조국 쿠바의 독립혁명을 위한 부업일 뿐이었다.

1892년 뉴욕에서 ‘쿠바혁명당’을 결성하고 설교하면서 기금을 모았다. 이어서 미국, 멕시코, 중미 및 카리브 지역에서 혁명군을 모집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할 준비를 하였다. 세상일에서 참전 군인을 모으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더욱이 마르티는 전쟁 경험이 전혀 없는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감탄할 만한 확고한 사상과 신념을 지녔고 독립의 철학과 보기드문 인문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사람이었다. 이런 명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명분에 따랐고 당에 동조했다.

다음은 카스트로가 한 인터뷰 내용이다.
“나는 쿠바 애국자들이 쓴 책을 읽었습니다. 나는 그들과 그들의 투쟁에 애정을 느낍니다. 물론 학교에서는 그들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미국인들이 우리 공화국을 독립시켰다고 말했기 때문에, 우리는 독립전쟁에서 애국지사들이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나는 청년기에 들어서자마자 독립전쟁에 관한 글과 마르티가 쓴 책을 가장 먼저 읽었습니다. 그의 작품을 읽고 그의 동조자가 됐습니다. 마르티는 예측했죠. 제국주의, 즉 신흥 제국주의에 관해 가장 먼저 언급한 사람이 바로 마르티입니다. 그는 팽창주의와 멕시코 전쟁을 비롯한 다른 많은 종류의 전쟁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것을 신랄하게 비판한 치열한 반대자였습니다.
또한 그는 선구자였어요. 레닌에 앞서 마르티는 혁명을 하기 위한 당을 조직했습니다. 바로 ‘쿠바혁명당’이죠. 그건 사회당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얼마 안 되는 자유인과 애국자들이 독립을 위해 싸우던 노예주의에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척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반노예주의자였고, 독립주의자였으며, 본질적으로 인본주의자였습니다.
서양의 모든 인문사상처럼, 마르티에게도 기독교 윤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는 매우 윤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신앙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죠. 하지만 최고의 가치들, 이를테면 이 지구상에서 벌어진 독립전쟁들, 유럽의 투쟁과 프랑스 대혁명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언론이었고 작가였고 시인이었으며, 정치가였고 몽상가였습니다. 본질적으로 마르티는 평화로우며,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전쟁을 찬성하긴 했지만, 그것은 ‘빨리 끝내야 하는 필요한 전쟁’이었습니다. 마르티는 증오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스페인 사람에게 증오를 품지 맙시다.’
그리스도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고, 물고기들과 빵의 개수를 늘였습니다. 우리도 이와 마찬가지로 물고기와 빵을 몇 배로 늘리고자 합니다.
그리스도는 특정 순간에 폭력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장사치들에게 채찍을 내리쳐서 그들을 사원에서 쫓아냈습니다.
종교적 관점이 아니라 사회적 관점에서 나를 기독교인이라고 한다면, 나 역시 기독교인이라고 확신합니다.
기독교는 야만의 시절에 나온 최초의 교리였고, 거기에 아주 인간적인 가르침이 나옵니다. 그 윤리적 가치와 사고가 이바지한 사회정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태여 기독교인이 될 필요는 없습니다.
나는 처음에는 마르티를 따랐고. 나중에는 마르티와 마르크스와 레닌을 따랐습니다. 내 첫 번째 정치사상은 마르티의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1953년에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을 때, 이미 나는 사회주의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고, 더 발전된 마르티 사상이 있었으며, 게다가 급진적 사회주의 사상도 있었죠. 그래서 1953년 7월 26일 혁명이 시작됐을 때, 우리는 그 혁명이 이미 1868년 10월에 시작됐고, 그것이 역사를 통해 이어져왔다고 했습니다.”

마르티는 마르크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1883년 3월 29일 뉴욕에서 보낸 편지」에서 마르크스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가난 어느 (약자)들의 편에 섰기에 높이 살만하다.’
마르크스가 사망하자 1883년 5월 13일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신문 <라 나시온>.에 이렇게 추모했다. ‘최근에 세상을 떠난 비단결 같은 영혼과 강철 같은 손을 지닌, 유명하기 그지없는 독일인 칼 마르크스를 기념하면서’

반란의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지역은 독립전쟁을 원했다. 마르티는 산토도밍고로 가서 ‘몬테크리스티 선언문’을 작성했다. 그 글은 독립주의 혁명을 대표하는 마르티의 사상을 집약했다.
동지를 모은 호세 마르티는 1895년 4월 11일 무장 투쟁을 위해 바하마 군도의 이과나 섬을 출발하여 관타나모 부근의 마리시 곶에 상륙했다. 그리고 식민군대와 싸우던 중 그 해 5월 19일 도스 리오스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숨을 거두었다. 자신이 말 한대로 글 쓴 대로 살다가 눈을 감았다.

죽기 전 미완성으로 남은 편지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오늘날까지 내가 했고, 앞으로 내가 할 모든 일은 쿠바의 독립을 바탕으로 미국이 아메리카의 나머지 국가들로 뻗어나가려는 시도를 막는 것이네’ ‘나는 이 생각을 밝히지 못하고 침묵해야 했어, 밖으로 알려지면 자칫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지.’ 이것이 그가 남긴 유산이다.

호세 마르티가 숨을 거둔 3년 뒤인 1898년, 미국은 쿠바를 식민지배한 스페인에게 전쟁에 승리하여 쿠바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미국은 곧이어 쿠바에게 명목상 독립을 허용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쿠바인들은 미국의 신식민지 상태에 빠진 것을 알아차렸다.

미국은 쿠바가 순종적인 섬이 되기를 원했다. 미국은 바티스타라는 인물을 내세웠다. 지극한 친미적 성향을 제외하면 어디 하나라도 쓸모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이승만처럼 말이다. 미국은 바티스타를 통해 도시 상층계급을 미국 기업의 행복한 예속집단으로, 기생집단으로 만들어 미국이 허락한 지위에 만족해하며 소수 게릴라들의 저항을 잠재우고자 했다.

호세 마르티 후예들인 쿠바 민중은 마약과 매춘이 춤추는 미국의 뒤뜰이 되기를 완강히 거부했다. 영화 ‘대부2’를 보면 마피아가 지배하는 쿠바의 모습을 실감할 수 있다.

호세 마르티가 남긴 시와 글들은 혁명의 건실한 씨앗이었다. 1956년 11월, 호세 마르티가 약 60년 전 그랬던 것처럼 피델 카스트로를 비롯한 투사 82명은 ‘그란마’호라는 조그만 배를 타고 멕시코에서 쿠바로 떠났다. 몇 번의 봉기가 실패하고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은 게릴라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지역에 기지를 마련하였다. 57년부터 작은 승리를 거두며 58년에는 기지를 더 마련하고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1959년 1월 1일,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이끈 호세 마르티의 후배들은 인간을 착취하는데 능수능란한 미국 마피아의 등에 업힌 바티스타 독재라 권을 무너뜨리고 호세 마르티가 그토록 염원했던 혁명의 꽃을 피웠다.

선배 못지않게 훌륭한 후배들은 자신의 이름을 앞세우지 않고 선배의 거룩함을 기리기 위해 쿠바의 하늘 관문을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이라 부르고, 아바나 시내 중심 광장을 호세 마르티 광장이라 이름 짓고 그를 기리는 거대한 기념탑과 동상을 세웠다. 나는 이제 쿠바를 생각하면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보다 호세 마르티가 먼저 떠오를 것 같다.

하노이에 있는 호세 마르티의 동상에 있는 해설판 사진을 대구에서 베트남어 통역하고 있는 아가씨 레티비츠다오가 번역한 내용은 이렇다.

《호세 마르티 페레스
쿠바의 국민적 영웅
1853년 1월 28일 쿠바의 아바나에서 태어난 그는 기자요, 문필가요, 혁명가였다.
당시 쿠바는 스페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젊은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관여하다가 식민 당국에 체포되어 6년 형을 선고 받았다. 출소 후에도 그는 쿠바 혁명당을 조직하여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항하여 해방전쟁을 일으켰고 식민군대와 싸우던 중 그 해 5월 19일 도시 리오스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숨을 거두었다.
호세 마르티는 19세기 후반 라틴 아메리카에서 민주 해방 사상가의 선지자로 평가된다.
그는 쿠바사람들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그들을 애정으로 보살폈고, 그 사상은 베트남 국민들에게 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말을 행동으로, 글을 실천으로 옮겨 시에서 썼듯이, 죽기 전에 노래를 쏟아놓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의 시 마지막 부분에서 호세 마르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과 나는 나의 신념을 나누고 싶다.”》

“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도 편안하게 잠을 잘 권리가 없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 호세 마르티가 아직 아름다운 땅 관타나모를 미국에게 돌려받지 못하고 미국의 경제보복에 시달리는 후세들을 하늘에서 바라본다면 진정 편안히 잠들고 있을 수 있을까?

4. 쿠바와 베트남
20세기를 가로지른 제3세계혁명 가운데 그 품격의 수준을 따지자면 단연 베트남 혁명과 쿠바 혁명이 으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쿠바 역시 베트남처럼 미국에게 고통을 받았고 미국 앞잡이와 싸워 기어코 이긴 나라이다. 박정희도 자신의 성공한 군사모험을 쿠데타라 하지 않고 5․16 혁명이라 부른 것을 보면 혁명이란 의미는 보수를 두렵게 하거나 해를 끼치는 나쁜 말이 결코 아닌 것이 틀림없다.

카스트로가 쓴 책 <카스트로 아바나 선언>의 서문을 쓴 타리크 알리(Tariq Ali)는 세르반테스의 말을 인용했다.
『돈키호테: 그래서 너는 지금껏 먹여준 주인에게 감히 저항하려하는가.
산초; 나는 왕을 추대하지도 폐위하지도 않는다. 단지 스스로 서려 할 뿐이다. 왜냐하면 나의 주인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종이 순순히 처벌에 응하지 않을뿐더러 오리려 주인의 무릎을 꿇린다면 주인은 얼마나 놀랄까? 산초의 무례하고도 간결한 표현에는 혁명의 전말이 모두 담겨있다고 타리크 알리는 말한다. 주인이나 왕을 미국으로 바꾸어 주면 쿠바의 역사적 상황과 그렇게 똑같을 수 없다.

나는 베트남혁명에 대해 오랫동안 공부했다. 그런데 쿠바혁명도 참으로 감동적이다. 2010년 베트남 다녀와서 호세 마르티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려다가 알지 못했던 위대한 역사를 들춰 보면서 나는 교훈적 희열을 맛보았다. 다시 확인한 것은 쿠바혁명이나 베트남혁명 같은 것을 하루아침에 이룰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쿠바혁명이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같은 피 끊는 젊은 천재들의 무한한 용기에 힘입어 전광석화 같이 성공한 줄 알았다. 100년이나 걸린 베트남혁명과 다르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호세 마르티가 뿌린 씨앗이 한 세대를 지나 수확을 일군 것을 보고 번개에 콩 볶을 수 없고 공부에 왕도가 없듯이 씨 뿌리지 않고 혁명의 꽃을 피울 수는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요즈음에도 동남아시아, 남미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철부지 쿠데타들과 쿠바와 베트남의 혁명은 성격이 분명 달랐다. 쿠바혁명의 성공은 호세 마르티와 같은 선열들이 흘린 피가 역사의 거름이 되어 후손들이 그 토양에서 힘찬 근육으로 노동했기 때문에 혁명의 나무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항거하고 투쟁하며 단합을 되풀이 하는 과정에서 민중은 험난한 고통을 견디며 자기발전의 길을 걸었다. 쿠바 혁명과 베트남 혁명을 공산주의 이념의 단순한 실현으로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치졸하다. 이들이 성취한 혁명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의 확대를 위해 단절 없이, 주체성 상실 없이 역사에 민중의 저력을 축적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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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서강대 교수 손호철 선생님 일행과 7월 3일부터 7월 15일까지 쿠바에 다녀오겠습니다.
쿠바에서 많이 배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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