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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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예멘 난민이 한국에 쏘아올린 작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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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2018.06.30 오전 6:02
최종수정2018.06.30 오전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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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보기“아빠 여기서 살 수 있나요?” 제주도에 머물고 있는 예멘 난민 모하메드가 8개월 된 아들 함자와함께 제주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정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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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지 8개월 된 함자는 순했다. 태어나서부터 낯선 환경과 사람들에게 익숙해져서일까. 함자는 아빠 품에서 커다란 눈만 깜빡였다. 함자의 눈망울에 비친 푸른 제주 바다가 반짝였다. 함자는 고국의 총성과 폭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대신 이방인을 보는 차가운 시선, 미래를 알 수 없는 불안 가득한 공기 속에서 자라났다.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난 함자의 출생등록증엔 국적은 예멘, 시민권 항목엔 ‘Non-citizen(시민권 없음)’ 글자가 선명했다. 지금 함자의 신분을 증명하는 유일한 수단은 제주도에서 발급한 외국인등록증이다. 앞면엔 난민 신청한 외국인을 의미하는 체류자격 ‘기타(G-1)’ 글자가, 뒷면엔 ‘체류허가지역: 제주’ 도장이 선명하다.

함자는 태어나서 한번도 나라를 가져본 적이 없다. 예멘에 있는 부모 집은 폭격에 날아갔다. 전쟁을 피해 도망쳐간 말레이시아에서 움튼 생명인 함자는 이제 낯선 땅 제주도에 있다. 함자가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한국에 머물 수 있을지, 아니면 또다시 낯선 땅으로 떠나야 할지 알 수 없다. 함자에게 제주도와 한국은 어떤 땅으로 남을까.

모카 커피의 산지로 유명한 곳, 그동안 예멘은 머나먼 이국의 땅이었다. 하지만 제주도에 당도한 예멘 난민 561명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예멘의 실상을 전했다. 3년이 넘는 내전으로 죽음과 빈곤, 질병이 점령한 땅. 제주도에서 만난 난민들은 하나같이 “예멘엔 희망이 없다”고 전했다.

예멘 난민들이 전한 것은 예멘의 참상뿐이 아니다. 이들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배타성 또한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54만명이 넘는 시민이 예멘 난민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국민청원에 동의했다. 다음달 1일은 한국에서 난민법이 시행된 지 만 5년이 되는 날이지만, 그 하루 전인 30일에는 난민 반대 집회가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다. 예멘 난민들은 한국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난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인지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됐다. ‘난민 혐오’, 예멘 난민들이 한국 사회에 쏘아올린 작지만 커다란 공이다.

원본보기한 제주 예멘 난민의 여권에 체류 허가 지역이 제주도로 제한된 도장이 선명하다. 정지윤 기자

■ 폭격으로 사라진 집, ‘희망의 땅’을 찾아서

지난 20일 제주도에서 만난 모하메드(33)는 예의가 발랐다. 사나 공항에서 환승 업무를 담당했다는 그는 영어가 유창했다. 공항에서 일하면서 몸에 밴 친절 때문인지 얼굴에는 엷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모하메드는 2015년 1월 아내와 결혼했다. 신혼의 단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두 달 뒤,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됐다. 2014년 9월 시아파의 맹주 이란의 지원을 받는 후티 반군이 수도 사나를 점령한 뒤 압드라보 만수르 하디 대통령을 끌어내렸고, 2015년 3월 수니파의 맹주 사우디아라비아가 하디 정부를 도와 군사개입을 시작하면서 내전이 격화했다. 사나의 남쪽에 위치한 도시 타이즈에 살던 모하메드는 쏟아지는 폭격과 총탄을 피해 다른 도시 호데이다로 도망갔다. 도망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지어올렸던 집이 폭격을 당해 무너져버렸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들은 다시 사나로, 또 다른 도시로 도망쳤다.

“전쟁으로 집도, 직업도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전기도 끊기고, 물도 충분치 않았죠. 그들은 끊임없이 우리 편이냐, 다른 편이냐고 물었어요. 저는 어떤 편에도 속하고 싶지 않았어요. 군대에 끌려가고 싶지 않았어요. 정신이 불안하고 미칠 지경이 됐죠.” 모하메드는 전쟁이 본격화한 지 6개월 만에 탈출을 결심했다. 길고 위험한 여행이 될지도 몰랐기에 그가 먼저 출국한 후 아내를 데려오기로 했다. 2015년 9월 예멘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오만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말레이시아에서 최장 3개월간 체류할 수 있었던 그는 계속해서 돈을 내고 체류 비자를 연장했다. 1년 뒤, 정부군과 반군이 한 달 동안 휴전기를 가졌다. 아내를 데려올 좋은 기회였다. 정부군이 점령하고 있던 아덴에서 아버지와 함께 머물고 있던 아내는 2016년 10월 인도 뭄바이를 거쳐 모하메드가 있는 쿠알라룸푸르로 왔다. 전쟁을 피해 예멘을 벗어났지만, 말레이시아는 ‘희망의 땅’이 아니었다.


원본보기청소년 난민인 하산이 구글 번역기에 “무기를 들고 싶지 않아 예멘을 떠났다”는 말을 아랍어로 적었다. 정지윤기자

“Difficult, Terrible, Dangerous.(힘들고 끔찍하고 위험했어요)”

모하메드가 말레이시아에서 보낸 3년을 세 단어로 요약했다. 말레이시아는 난민은 받았지만, 이들에 대한 어떤 지원도 하지 않았다. 집을 구하는 것도, 돈을 버는 것도 모두 힘들었다. 아내가 결혼 예물을 팔았지만, 그것으론 모자랐다. 모하메드는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어야 했다. 어렵사리 식당에서 그릇 닦는 일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하루에 17시간씩 일했다. 집에 와서 잠만 자고 다시 출근하는 삶이 이어졌다. 1주일에 하루도 쉬지 못했다. 그렇게 일하고 한 달에 1200링깃(약 30만원)을 손에 쥐었다. “월급을 잘 받은 편”이라고 모하메드는 말했다. 지난해 10월 아들 함자가 태어났다. 공공병원을 이용할 수 없었던 모하메드는 사립 병원을 이용하느라 많은 돈을 써야 했다.

삶은 점점 악화됐다. 몹시 덥다가 갑자기 추워지는 말레이시아의 날씨는 적응하기 어려웠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한 탓에 허리는 아팠고, 물에 젖은 채로 일하다 보니 발은 염증으로 부어올랐다. 길에서 난민들은 범죄자처럼 숨어 다녀야 했다. “거리에선 사람들 뒤에서 걷거나 뒷길을 이용했어요. 경찰은 수시로 검문을 했죠. 몸과 마음이 모두 아팠어요.”

그런 와중에 장모가 세상을 떠났다. 심장병을 앓던 장모는 전쟁으로 의료체계가 붕괴된 예멘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7~8곳의 병원을 전전한 끝에 지난 1월 임종했다. “아내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사진으로만 봐야 했죠. 아내는 하루 종일 오열했어요.” 모하메드의 눈가도 함께 붉어졌다.

절망 속에 제주도라는 이름이 희망처럼 날아들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친구들로부터 제주도에 무사증 입국이 가능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은 그에게 친숙한 나라다. 사나 대학에서 함께 공부한 한국인 부부로부터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멘 방송에서는 한류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 그의 가슴은 희망으로 부풀었다. 하지만 아내는 망설였다. 또다시 낯선 곳으로 이주한다는 것이 두려웠던 탓이다. “여기서 우리는 완전히 안전하지 않아. 집에선 안전하지만 밖은 아니야. 어느날 내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모하메드는 아내를 설득했다.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표와 체류비를 마련하기 위해 주변에서 돈을 빌리고, 남은 예물을 다 팔았다. 그렇게 지난 5월15일 제주도에 왔다. 비행기엔 모하메드 가족 외에 30명의 예멘인이 있었다.


원본보기예멘 난민을 돕고 있는 제주시 삼도동 천주교제주교구 이주사목센터에서 한 예멘 난민이 한글을 배우고 있다. 정지윤기자

“할랄푸드 꼭 안 먹어도 돼요, 우리는 채식주의자가 될 수 있어요”

제주도에 당도하는 순간 가진 돈은 빛의 속도로 바닥나기 시작했다. 호텔에 한 달 숙박료를 지불해야 했다. 제주도는 물가도 비쌌다. 다른 난민들과 숙소를 함께 쓰기 시작했다. 지금은 제주도민의 도움으로 한 부부의 아파트에 함께 머물고 있다. 아내는 급격한 기온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감기에 걸려 몸이 좋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파산했어요. 하지만 주민들이 거처를 제공해주고, 제주도의 도움으로 취업이 알선돼 많은 분들이 일터로 갔어요. 무슬림은 할랄푸드만 먹지만, 상관없어요. 우리는 채식주의자가 될 수 있으니까요.” 모하메드의 가족은 현재 출도제한을 해제해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제주도엔 모하메드를 비롯해 네 가족이 아이와 함께 지내고 있다. 제주도는 아이가 있는 가족에 한해 출도제한을 해제할 방침이지만, 아직 허가가 나지 않았다. 모하메드는 “직업도 구하고 돈도 벌고 싶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우리를 나쁜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을 원치 않는다. 열심히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원본보기제주도에 홀로 입국한 여성 난민인 나질라가 히잡을 쓰고 있다. 정지윤기자

■ 여성, 난민, 나질라

난민은 젊은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난민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젊은 남성 난민들이 일자리를 빼앗고, 성범죄 등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고 우려한다. 올해 난민신청한 예멘인 552명 가운데 90%가 남성이다. 김성인 제주 예멘난민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젊은 남성들이 징집 대상이다보니, 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탈출을 하고, 가족 가운데 남자가 먼저 나와 자리를 잡고 가족을 부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난민 가운데엔 혈혈단신으로 입국한 여성, 청소년도 있다. 현재 출도제한으로 제주도에 발이 묶인 예멘 난민 486명 가운데 여성은 24명, 이 중 가족 단위가 아니라 홀로 입국한 여성 난민은 4명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은 최근까지 천주교 제주교구 이주사목센터의 숙소에 머물다가 취업을 하거나 주민이 제공해준 거처로 흩어졌다. 나질라(34)도 그중 한 명이다.

나질라는 지난해 8월 예멘을 떠나 말레이시아를 거쳐 지난 4월18일 제주도로 왔다. 제주도로 예멘 난민이 몰려들기 전이다. 나질라는 “내가 거의 처음 온 예멘 난민이었다”고 말했다.

나질라는 예멘에서 2년을 전쟁 속에 살았다. “전쟁이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어요. 상황은 점점 나빠졌죠. 직업도 구할 수 없었고, 전기도 가스도 없었어요. 집에서 음식을 해먹기도 힘들었죠. 나무를 때서 음식을 해먹고 촛불로 불을 밝혔어요. 돈이 있는 사람들은 작은 태양광 발전기를 이용하기도 해요. 하지만 비싸서 많은 사람들이 쓰진 못해요.” 화장품 가게를 운영했던 나질라는 전쟁 때문에 가게 문을 닫았다.

나질라가 전한 예멘은 죽음의 공포로 가득했다. 나질라는 “친구 오빠가 총에 맞아 죽었다. 후티 반군이 젊은 남자들을 죽였다. 이건 예멘에서 자주 벌어지는 ‘작은 일들’이다. 납치, 살인, 총격, 폭격이 계속된다”고 말했다.

나질라는 전쟁이 발발한 지 1년 뒤 결혼했다. 하지만 포화 속의 결혼생활은 쉽지 않았다. 집을 구하기도, 직장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나질라 부부는 어머니 집, 남편 가족 집에 번갈아 머물며 불안정하게 지냈다.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고 나질라는 말했다. 결혼생활은 1년을 넘지 못했다. 이혼한 나질라는 6개월 뒤 사촌 여동생과 함께 말레이시아로 향했다. 먼저 말레이시아로 떠났던 여동생과 셋이서 지냈다. 일자리는 없었다. 여동생만 어렵게 일을 구했다. 나질라는 친구의 제안으로 함께 제주도로 왔다. 여동생은 낯선 나라로의 이주를 두려워해 함께 오지 않았다. 하지만 법무부가 예멘인의 제주도 무사증 입국을 막으면서 여동생을 만나는 일은 요원해졌다.


원본보기나질라가 주민이 마련해 준 거처에서 기도를 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게스트하우스를 전전하던 나질라는 최근 제주도민의 도움으로 작은 집에서 당분간 지낼 수 있게 됐다. 나질라의 방엔 작은 침대와 소파, 싱크대 등이 갖춰져 있었다. 오후 8시30분, 기도시간이 되자 나질라가 하얀 천을 꺼내 기도를 했다. 선반엔 보라색 코란과 미니 사이즈의 초록색 코란이 있었다. 나질라는 작은 코란을 가리키며 “친구가 선물해 준 것이다. 어딜 가나 나와 함께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질라는 집 주인이 운영하는 커피숍에서 주말에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나질라에게 여성 혼자 난민으로 지내는 게 어렵지 않으냐고 물었다. “저는 나 자신과 삶을 돌볼 줄 알아요. 많은 여성 난민들이 남편과 가족에 속해 있지만, 저는 자유롭죠.” 나질라가 답했다.


원본보기청소년 난민인 하산이 여권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정지윤기자

■ 18살 기계공학도의 꿈은 이뤄질까

21일 오전, 하산(18·가명)이 이주사목센터에 들어섰다. 제주도에서 만나 함께 지내는 모하메드(23)와 같이 왔다. 곱슬머리에 마른 체구, 큰 눈을 가진 하산은 앳돼 보였다. 하산은 지난 2월 예멘을 떠나 오만을 거쳐 말레이시아로 왔다. 하산에게 왜 예멘을 떠났냐고 물었다. 영어가 서툰 하산은 스마트폰을 꺼내 구글 번역기에 아랍어를 적었다. 영어로 번역된 말에는 “나는 무기를 들고 싶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다.

하산에게 청소년도 군대에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하산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예스”라고 답했다. “열다섯살 안팎만 되면 군대에 끌려가야 한다”며 “엄마가 ‘빨리 빨리 떠나라’고 했다”고 말했다. 제주도엔 하산과 같이 홀로 입국한 청소년이 5명인 것으로 파악된다.

하산은 지난해 학교를 졸업했다.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갈 수가 없었다. 지난 2월 어머니와 함께 말레이시아로 왔다. 하산에게 ‘왜 엄마와 함께 있지 않았냐’고 하니 “돈이 없었다. 엄마는 나를 데려다주고 다시 예멘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하산은 “나도 총을 들고 싶지 않다. 나는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공부’라는 말을 할 때, 하산의 눈이 반짝 빛났다. 하산은 “기계공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산의 어머니는 “공부를 해라, 일을 해서 돈을 벌어라”라고 당부했지만 둘 다 아직은 요원하다. 하산은 양식장에 취업했지만, 사흘 만에 쫓겨났다. “사장이 너무 어리다며 그만 나가라고 했다.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함께 일자리를 구했던 모하메드 역시 사흘 만에 돈 한 푼 받지 못한 채 쫓겨났다. 두 손에 피부가 벗겨져 생긴 상처자국만이 그가 일을 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모하메드는 “첫날엔 장갑도 주지 않고 그물을 손질하게 했다. 둘째날 장갑을 달라고 하니 그제야 줬다”고 말했다.

한 주민이 제공하는 숙소에서 난민 12명과 함께 지내던 하산은 최근 또 다른 주민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엔 하산 또래의 아이가 두 명 있다. 주민은 하산에게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라고 했다.


원본보기예멘 난민 모하메드가 양식장에서 일하다 생긴 손바닥의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정지윤기자

■ 우려의 시선 속 주민들의 환대

제주도의 예멘 난민 사태는 한 고비를 넘긴 상태다. 500명이란 숫자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제주 길거리에서 난민을 마주치기란 쉽지 않았다. 체류비가 바닥난 난민들이 거리로 나와 노숙을 하기 시작하자, 제주도는 뒤늦게 이들에게 취업을 알선했다. 약 400명의 난민이 양식업, 어업, 요식업 등에 취업했다. 이들이 일터로 떠나면서, 노숙을 하는 예멘인도 없어졌다. 하지만 고기잡이나 양식장, 농장 등 힘든 일터에 난민들이 쉽게 적응하지 못해 일을 그만두고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많다.

지난 20일 저녁 제주 시내 ㄱ호텔 앞에서 젊은 예멘 남성 예닐곱명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ㄱ호텔에는 한때 170명 가까운 예멘 난민이 묵었다. 하지만 제주도가 취업을 알선하고 주민들이 난민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주면서 현재 투숙객은 30여명으로 줄었다. 호텔 앞에서 만난 메그디(26)는 고기잡이 배를 타는 일자리를 구했다가 사흘 만에 돌아왔다. 메그디는 “멀미가 너무 심해 일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ㄱ호텔의 김우준 사장은 난민들에게 숙박료를 할인해주고, 돈이 부족한 난민들이 호텔에서 취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해줬다. 김 사장은 “처음엔 난민인 줄 모르고 관광객이겠거니 생각하고 받았다. 그런데 우르르 밀려오기 시작하더라”고 말했다. 김 사장에게 난민들이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냐고 물었다. 김 사장은 “무슬림들은 술을 안 먹는다. 난민들이 시비를 걸거나 혐오스럽게 행동한 적은 없다. 오히려 지나가던 한국 사람들이 시비를 거는 경우가 있었다”고 말했다.

김 사장은 “이 친구들이 예멘에서 중상층은 살았던 것 같다. 손을 잡아보면 나보다 보드랍다. 이 중엔 기술자도 많고, 유명 식당에서 일했던 셰프도 있다”며 “제주도는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산업 기반이 없는데, 선별적으로라도 출도 제한을 해제해 이들이 알맞게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마련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원본보기예멘 난민 자말씨 가족이 머물고 있는 제주의 한 가정집 부엌에서 점심을 준비하고 있다. 정지윤기자

난민들을 위해 자신의 집을 기꺼이 내주는 주민들도 있다. 하현용 목사는 자말과 그의 아내, 딸 다섯 명까지 일곱 식구를 받아들였다. 하 목사는 “모두 처음 겪는 일이다. 자말 가족도 원래 다른 가정에 머물기로 했지만, 그곳에서 어렵다고 해 우리 집에 머물게 됐다”며 “네 식구가 살던 곳에 11명이 살게 됐으니 불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자말 가족은 좋은 사람들이고, 이들에게 좋은 기운을 얻기도 한다”고 말했다.

기독교인인 그는 무슬림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을까. 하 목사는 “이슬람에 대해서 들었던 왜곡된 정보들이 문득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포교하러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들. 하지만 그런 편견들을 자말 가족에 대입하는 건 부적절하다. 이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하 목사는 난민 혐오 정서에 대해 “이번 사태는 우리 사회가 난민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들을 받아들이기위해 어떤 시스템을 갖춰야 할지 마련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가짜 난민’이라고 하는데 자말 가족을 보면 장을 보러 가서도 그냥 싼 걸 사는 게 아니에요. 그램 수 대비 가격을 따져서 가장 싼 걸 사요. 한정된 자원 안에서 살아남는 게 몸에 밴 거죠. 난민들 싫으니까 나가라고 해선 배울 것이 없어요. 한국이 경제 대국 11위라고 하는데, 난민 500명이 들어왔다고 해서 난민법을 폐지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죠. 편견을 갖지 말고, 실제 난민들을 만나보고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현재 무엇을 하는 게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를요.”


원본보기예멘 언론인 출신 난민인 하니가 본인이 과거에 쓴 정부비판 기사 내용을 휴대폰으로 보여주고 있다. 정지윤기자

■기자 출신 난민 하니가 전하는 예멘의 실상 “정부군이든 반군이든 동조 안 하면 고문·살해…고국엔 희망 없어”

지난 21일 저녁 제주 시내에서 가까운 주택가에도 어둠은 찾아들었다. 집에 머물고 있는 5명의 예멘 난민 중 한 명인 하니(37)는 똑바로 앉아 있지 못했다. 연신 기대거나 눕는 자세를 취했다. 하니는 정부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끝에 허리를 다쳤다.

하니는 예멘의 신문 기자였다. 하지만 시아파 이란의 지원을 받는 후티 반군이 사나를 점령하고 내전이 시작되면서 2014년 9월 신문은 폐간됐다. 하니는 “정부군이든 반군이든 무장세력은 자신의 입장에 동조하지 않는 언론을 탄압하고 학자, 지식인뿐 아니라 일반 시민도 무차별적으로 납치·고문·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니는 그러나 펜을 꺾지 않았다. 페이스북에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기사를 계속해서 썼다. “진실을 알리는 건 기자의 의무”였기 때문이다. 하니는 극단주의 반군 세력이 16살 소년을 살해했다는 내용을 취재해 기사로 썼다. 반군은 하니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북서부 지역의 타이즈와 사나에 머물던 하니는 남부 도시 에덴으로 도망갔다. 이곳은 후티 반군에 쫓겨 퇴각한 정부군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곳에서 하니는 정치운동 조직을 만들어 활동했다. 정부군의 눈에도 하니는 곱게 보이지 않았다. 보안국은 하니가 속한 조직의 우두머리를 암살했다. 카페에 복면을 한 세 명의 암살범이 와서 리더를 쏴 죽였다. 장례식장을 찾았던 하니와 동료들도 보안국에 납치됐다. 2016년 5월에 벌어진 일이다.

하니는 그곳에서 구타와 전기 고문을 당해 죽음 직전에 이르렀다. 시민단체와 다른 기자들이 나서 이 소식을 알리고 하니를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정부군은 하니를 석방하며 “당신을 암살하겠다”고 협박했다.

풀려난 하니는 에덴에서 자신이 미행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행을 따돌리며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도망다니던 하니는 지난해 6월 이집트 카이로로 향했다. 1년간 이집트에 머물던 하니는 한국이 난민을 받아준다는 소식을 듣고 말레이시아를 경유해 제주도로 들어왔다. 지난 5월28일, 제주도 땅을 밟았다.

하니가 겪은 일에선 예멘의 현실이 드러난다. 2010년 말 튀니지에서 시작된 민주화 바람인 ‘아랍의 봄’은 예멘에 당도했지만, 예멘은 더 큰 혼란에 빠졌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는 수니파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 대통령의 과도 정부가 후티 반군과 충돌했다. 남부 정부군의 장악력이 약해지면서 알카에다, IS(이슬람국가)와 같은 세력도 암약하며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예멘은 오랜 분쟁 지역이었다. 한국과 같은 분단 국가이던 예멘은 1990년 통일됐지만, 내전 발발로 전쟁의 총성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하니의 아버지는 통일이 되기 전 정파 간 갈등 속에 암살됐다.

3년의 전쟁 동안 최소 1만3600명이 사망했고, 19만명이 국경을 넘었다. 지난해 콜레라로 약 90만명이 감염되고 2000명이 사망했다. 하니는 “예멘엔 미래도 희망도 없다”며 “예멘은 모든 사회 기반이 파괴됐고, 전기도 물도 부족하다. 콜레라와 뎅기열이 창궐하고, 이를 치료할 의약품도, 식량도 부족하다”고 전했다.


방 세 개짜리인 이 집에 한때 17명의 난민이 함께 묵었다. 지금은 일자리를 구해 사람들이 떠나면서 남은 5명이 함께 지낸다. 외국인 원어민 강사가 제주도를 떠나면서 빌린 집을 예멘 난민들을 위해 제공했다. 6월 말까지 남은 계약기간 동안 이들은 여기서 지낼 수 있다. 그 다음은? 기약할 수 없다.


원본보기제주시내 예멘 난민들이 머물고 있는 방의 모습. 정지윤기자

푸근한 인상의 자말이 방으로 들어왔다. 풍체가 좋은 자말은 예멘에서 축구 국가대표 선수였다고 말했다. 그는 무릎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그만둔 뒤 축구단의 코치로 일했다. 초록색의 유니폼을 말끔히 차려입은 선수들과 함께 찍은 사진 속에 그가 웃고 있었다. 자말은 “이 경기장은 이제 전쟁으로 무너져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4살 된 아들과 아내를 예멘에 두고 왔다. 그가 보여준 휴대전화 속 아들은 말을 타고 웃고 있었다. 자말은 난민으로 인정받으면 가족을 데려오고 싶어한다. 그는 “전쟁이 벌어지기 전, 우리는 모두 행복했다”고 말했다.


원본보기예멘 난민 자말이 예멘에 남아 있는 자신의 아들의 사진을 휴대폰으로 보여주고 있다. 정지윤기자

하니와 같은 신문사 기자로 일했던 모니에르가 말했다. “지금 이 순간도 예멘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며 “전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고,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현재 한국 사회에 팽배한 난민에 대한 편견과 반대 여론에 대해 물었다.

“이슬람은 평화를 뜻합니다. 평화와 테러리스트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어떤 종교에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쁜 행동은 좋은 행동보다 더 큰 소리를 냅니다. 우리 중 하나가 나쁜 짓을 하면 예멘 난민은 모두 나쁘다고 할 것이고, 진실은 왜곡될 것입니다. 무슬림 중 하나가 나쁜 행동을 하면 무슬림 전체가 욕을 먹을 것입니다. 예멘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모두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극단주의 세력으로부터 도망친 사람들입니다.”

어두워진 밤, 한국에서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젊은 아랍 남성들이 답했다. 취재를 마치고 집을 나서면서 생각했다. 진정 공포와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들이야말로 공포와 두려움에 짓눌린 사람 쪽에 가까워 보였다.

<제주|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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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sy4****댓글모음
아무리 기사를 길게쓰며 감성팔이해도 제주예멘 난민신청 불허해야 한다 언제부터 우리 언론들이 난민들 인권에 그리도 관심이 많었던건데? 아무리 언플해도 제주도 예멘 청년들 떼로 몰려와 난민 신청한건 받어주면 안된다 최대한 빨리 난민 심사해 전부다 본국으로 돌려 보내라 우리 나라도 북에는 2천만 예비난민이 있으며 소년소녀 가장들 독거노인 폐지줍는 노인들 사회적 약자들 많습니다 그분 들에게 먼져 도움을 줍시다 혈세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사용 해야 합니다
2018-06-30 06:57:59신고
답글148
공감/비공감공감19909비공감632
anfl****
다 맞네. 취업을 위해 왔고. 반체제 인사에 병역 거부자. 난민 인증 받으면 가족들 우르르 딸려오고. 어디 하나 틀린게 없네.
2018-06-30 06:33:58신고
답글58
공감/비공감공감10126비공감214
duca****댓글모음
저들의 말이 다 거짓은 아니겠지만, 저 중 테러를 꿈꾸는 자의 거짓각본도 있을 수 있단 걸 절대 넘기지 마세요. 무조건적인 반대도 위험하지만, 온정주의로 판단이 흐려지면 안됩니다.왜 미국, 일본 등이 난민을 불허하는지.. 잘 생각해보세요.가지 말란 곳에 굳이 가서 선교활동 하다 참수 당한 한국인을 생각해보면 알 겁니다.좋은 취지가 늘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닙니다.
2018-06-30 06:17:35신고
답글44
공감/비공감공감8430비공감137
pink****댓글모음
스웨덴 다문화정책 40년 실행후 현시점. 범죄증가율 약300%증가 성폭행율1472%증가 범죄자중 무슬림인구70% 스웨덴 국가에서 낸 거의 정확한 통계자료입니다
2018-06-30 06:31:37신고
답글78
공감/비공감공감7823비공감207
ly70****댓글모음
기자 양반 당신 집에나 들이세요.
2018-06-30 06:18:21신고
답글60
공감/비공감공감5502비공감133







bsy4****댓글모음
아무리 기사를 길게쓰며 감성팔이해도 제주예멘 난민신청 불허해야 한다 언제부터 우리 언론들이 난민들 인권에 그리도 관심이 많었던건데? 아무리 언플해도 제주도 예멘 청년들 떼로 몰려와 난민 신청한건 받어주면 안된다 최대한 빨리 난민 심사해 전부다 본국으로 돌려 보내라 우리 나라도 북에는 2천만 예비난민이 있으며 소년소녀 가장들 독거노인 폐지줍는 노인들 사회적 약자들 많습니다 그분 들에게 먼져 도움을 줍시다 혈세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사용 해야 합니다
2018-06-30 06:57:59신고
답글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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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fl****
다 맞네. 취업을 위해 왔고. 반체제 인사에 병역 거부자. 난민 인증 받으면 가족들 우르르 딸려오고. 어디 하나 틀린게 없네.
2018-06-30 06:33:58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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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ca****댓글모음
저들의 말이 다 거짓은 아니겠지만, 저 중 테러를 꿈꾸는 자의 거짓각본도 있을 수 있단 걸 절대 넘기지 마세요. 무조건적인 반대도 위험하지만, 온정주의로 판단이 흐려지면 안됩니다.왜 미국, 일본 등이 난민을 불허하는지.. 잘 생각해보세요.가지 말란 곳에 굳이 가서 선교활동 하다 참수 당한 한국인을 생각해보면 알 겁니다.좋은 취지가 늘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닙니다.
2018-06-30 06:17:35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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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k****댓글모음
스웨덴 다문화정책 40년 실행후 현시점. 범죄증가율 약300%증가 성폭행율1472%증가 범죄자중 무슬림인구70% 스웨덴 국가에서 낸 거의 정확한 통계자료입니다
2018-06-30 06:31:37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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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70****댓글모음
기자 양반 당신 집에나 들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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