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22

알라딘: 나의 1960년대 - 도쿄대 전공투 운동의 나날과 근대 일본 과학기술사의 민낯


알라딘: 나의 1960년대 - 도쿄대 전공투 운동의 나날과 근대 일본 과학기술사의 민낯


나의 1960년대 - 도쿄대 전공투 운동의 나날과 근대 일본 과학기술사의 민낯  

야마모토 요시타카 (지은이), 임경화 (옮긴이) | 돌베개 | 2017-07-15











반양장본 | 427쪽 

7.3

일본사 주간 18위
역사 top10 2주
Sales Point : 1,618


도쿄대 전공투 운동의 나날과 근대 일본 과학기술사의 민낯.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전공투’의 상징적 인물로 1960년대 말 도쿄대 투쟁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다. 대학사회를 떠나 줄곧 재야에서 살아온 그가 5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안보 투쟁을 거쳐 전공투 투쟁에 이르렀던 1960년대의 치열한 일본사회사와 학생운동의 흐름을 술회했다. 한 개인의 역사적 회고담을 넘어 고도경제성장기 일본에서 자본과 국가권력이 대학과 과학기술계를 포섭해 전후 총력전체제를 이루어 나간 실상을 과학사가로서 탁월하게 분석 해설한 인문사회비평서이기도 하다





한국어판 저자 서문 | 머리말

1 대학 입학 직후의 60년 안보투쟁
2 고도성장과 이공계 붐
3 우주개발이라는 정치 쇼
4 62년 대학관리법 반대투쟁
5 지구물리학이라는 학문
6 처분 철회 투쟁과 시계탑 앞 농성
7 물리학회의 미군 자금 문제
8 과학기술의 진보를 둘러싸고
9 도쿄대 베트남반전회의 활동 무렵
10 오지 투쟁의 충격과 도코로 씨의 죽음
11 그리고 도쿄대 투쟁의 시작
12 본부 봉쇄와 강당 해방을 둘러싸고
13 나와 도쿄대 전공투
14 일본 과학기술의 시작
15 군학 협동의 시작에 대해
16 전시하 과학기술에 대해
17 특히 도쿄대 공학부의 경우
18 고도성장의 그림자와 전후 민주주의





첫문장
나는 1960년대에 도쿄대에 입학했다.

현재 출구가 보이지 않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위험한 배외주의 사상의 침투는, 평화헌법을 지켜 왔다고는 하나 과거의 제국 일본에 대한 진지한 비판과 반성을 결여한 채로 경제성장을 추구했던 전후 일본에 대한 통절한 반성을 우리 일본인들에게서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경제...
당시의 논의를 회고해 보면, 현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대신에 무엇이든 곧바로 미국에 대한 일본의 종속과 식민지화라는 상투어로 정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경향은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그러한 안이함이 그 이후 사태의 진행을 전망하는 것을 방해했다.(...) (...
그러나 이미 1960년대 단계에서 히로시게 데쓰는 지적했다. ‘이공계 붐‘이라는 이름으로 화학이나 물리뿐만 아니라 수학 같은 순학문적인 학과에 이르기까지 이학부 졸업생들에게 민간기업들이 수많은 유혹의 손길을 뻗치던 이 시기에 ˝이미 이학부는 옛날처럼 학문이 밥보다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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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17년 7월 13일자





지은이 : 야마모토 요시타카 (山本義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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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나의 1960년대>,<후쿠시마, 일본 핵발전의 진실>,<16세기 문화혁명> … 총 5종 (모두보기)
소개 :
1941년 오사카에서 태어나 1960년 도쿄대에 입학했다. 1964년 도쿄대 이학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 뒤에는 도쿄대 베트남반전회의 활동과 도쿄대 투쟁을 이끌었고 도쿄대 전공투 의장을 맡았다. 1969년 야스다강당이 함락되기 직전 지하로 잠복했으나 그해 9월 히비야공원에서 열린 전국전공투연합 결성대회 회장에서 경찰 당국에 체포되었다.
소립자론을 전공하며 물리학자로서 장래를 촉망받고 있었던 그는 수감생활이 끝나고 박사과정을 중퇴한 뒤로는 대학 안의 연구자로 돌아가지 않았다. 전공투 시절에 관한 매스컴 취재에는 일절 ...




옮긴이 : 임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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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분단생태계와 통일의 교량자들>,<일본 신민족주의 전환기에 『국체의 본의』를 읽다>,<1905년 러시아 혁명과 동아시아 3국의 반응> … 총 14종 (모두보기)
소개 : 현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도쿄대학 대학원 인문사회계연구과 문학박사이며, 전공은 코리안 디아스포라 비교연구와 일본사회운동사 연구이다. 저서는 『1905년 러시아혁명과 동아시아 3국의 반응』(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7, 공저)가 있으며, 역서로는 『나는 사회주의자다』(교양인, 2011), 『나의 1960년대』(돌베개, 2017) 등이 있다.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1960년대
―장래를 촉망받던 물리학도는 왜 투쟁에 뛰어들었고, 대학사회를 떠나 재야로 향했나

왜 ‘나의 1960년대’인가? 『나의 1960년대』의 저자 야마모토 요시타카에게 그 시간은 안보 투쟁(미일안보조약 개정 반대 투쟁)이 한창인 캠퍼스에 갓 입학했던 1960년부터, 베트남 반전 운동, 전공투 운동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끝에 박사과정을 중단하고 학교를 떠난 1969년까지의 십 년이다. 수학과 물리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도쿄대에 입학해, 학생운동 중에도 줄곧 학문에 대한 추구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면서도 국책 엘리트 대학이라는 시스템 자체와 그 안에서 공부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어 마침내는 대학사회와 결별하기까지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는 어쨌든 엄청나게 뛰어난 사람이라서 모두가 우러러봤다. 이대로 쭉 가면 도쿄대 이론물리를 짊어질 인물이라는 데 대해선 우리뿐만 아니라 교수들도 동일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가 운동에 뛰어든다는 건 장래를 버린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커다란 쇼크였다. 야마모토가 나왔기 때문에, ‘이건 [섹트 등의] 직업적 혁명가가 지도하는 학생운동이 아니다’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408쪽)
―사이슈 사토루(생물학자, 1968년 당시 도쿄대 교양학부 조수)

야스다강당의 함락과 전공투 운동의 종결 이후로 그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미디어와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을 뒤로한 채, 입시학원 물리과 강사로 생계를 유지하며 과학사 관련 저술 작업과 전공투 운동 관련 자료집 편찬 등에 몰두해 왔다. 이른바 ‘운동권’ 출신들의 흔한 행보인 주류화와 현실정치 참여, 각종 사회ㆍ문화 문제들을 둘러싼 대중투쟁이나 의회 안팎의 정당정치를 추구하지도 않았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학계의 일원으로 남지도 않았으며, 정치평론 등으로 스컴에 이름을 팔지도 않았다. 본래의 급진성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철저히 음지에 몸을 두었던 그는 왜 거의 반세기 만에 운동을 회고하는 책을 내게 되었을까. 그 이유 속에 세계적 1968의 흐름 속에 있던 일본 전공투가 우리에게 남기는 교훈의 핵심이 담겨 있다. 그들의 뜨거운 1960년대를, 그리고 이제는 노년이 된 저자와 동료들의 삶을 관통해 온 것은 대학에 대한 개혁과 해체의 요구를 넘어 전후 일본이라는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 그리고 그 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자기 자신들에 대한 근본적 반성이었다.

전공투는 무엇을 문제 삼았나
―자극적 이미지 뒤에 가려져 있던 전공투에 대한 생생한 증언

전공투라 하면, 한국에서는 전공투는 이후 ‘적군파’로 이어지는 과격한 극좌 학생운동의 대명사로, 또 무라카미 하루키 등의 작품들에서 묘사되는 특정 시대의 사회문화적 상징 같은 것으로 연상되곤 한다. 60년대의 일본 대학생들이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도쿄대에서는 학생들이 ...




초록비 2018-07-05
이렇게 감동적인 책에 별 점이 한 개라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지요. 이 책은 감상적인 학생운동 회고록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 의식의 각성을 촉구하는 현재적인 책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감동적인 것은 엘리트 과학자로서의 일체의 특권을 거부한 채 지식을 권위적인 대학만의 것이 아닌 시민 사회의 공동 재산으로 돌리고자 헌신한 저자의 올곧은 삶 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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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드너 2018-08-16

현재 출구가 보이지 않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위험한 배외주의 사상의 침투는, 평화헌법을 지켜 왔다고는 하나 과거의 제국 일본에 대한 진지한 비판과 반성을 결여한 채로 경제성장을 추구했던 전후 일본에 대한 통절한 반성을 우리 일본인들에게서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제 경제성장과 국제경쟁을 대신할 새로운 길, 저성장 속 민중 국제연대의 길을 찾아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9)

당시의 논의를 회고해 보면, 현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대신에 무엇이든 곧바로 미국에 대한 일본의 종속과 식민지화라는 상투어로 정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경향은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그러한 안이함이 그 이후 사태의 진행을 전망하는 것을 방해했다.(...) (23)



그러나 이미 1960년대 단계에서 히로시게 데쓰는 지적했다. ‘이공계 붐‘이라는 이름으로 화학이나 물리뿐만 아니라 수학 같은 순학문적인 학과에 이르기까지 이학부 졸업생들에게 민간기업들이 수많은 유혹의 손길을 뻗치던 이 시기에 ˝이미 이학부는 옛날처럼 학문이 밥보다 좋은 은자가 가는 곳이 아니게 되었˝고, ˝1956년 무렵부터 표면화되어 더욱더 격렬해진, 과학기술에 대한 독점자본의 요구 앞에 대학 연구자들은 급격히 자주성을 상실하고 있˝었으며 ˝‘학문의 자유‘, ‘대학 자치‘라는 관념은 그저 빈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역으로 학문의 독점에 대한 복무를 변호하는 슬로건으로까지 영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53)



26 과거 장기간에 걸쳐 식민 지배를 한 한반도 국가에 대한 국교 수립은 무엇보다도 35년간의 식민지 지배 책임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고 전후 일본에게 중요한 과제인데, 1965년에 일본 정부는 한반도가 분단국가가 된 가운데 당시 반공군사정권 지배하에 있던 남부 대한민국하고만, 분단을 고정시키는 식으로 조약 체결을 도모했다. 그것은 또한 이후 동아시아 개발독재형 친미반공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만들어 그들을 일본의 수출시장에 편입시킨다는 일본 자본주의의 일관된 목표에 기초한 것으로, 한일조약 반대 투쟁은 그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과거에 식민지 지배를 했던 한반도 북구국가와 여전히 국교가 없다는 것은 역시 비정상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68)



그 결과, 한편에서 군은 과학자가 19세기 SF소설에서 묘사되곤 하는 실무에 어두운 공상적 인종이 아니라 실제로는 대단히 유능하고 도움이 되는 인종이라는 것을 알고, 전후에도 과학자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과학자의 포위를 도모했다. 다른 한편에서 윤택한 연구비의 맛을 안 과학자도 전전의 빈곤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고 통 큰 스폰서인 군과의 우호관계 유지를 희망하게 된다. 돈이라는 것은 마약과 같은 것이어서, 한번 받아들이면 이윽고 그 돈 없이는 헤쳐 나갈 수 없게 된다. 일본에서 원전을 받아들인 지자체가 이윽고 원전의 교부금 없이는 헤쳐 나가지 못하게 되어 결국 2기째, 3기째 계속해서 늘려 갈 수밖에 없게 된 것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1950년 무렵까지 미국에서 과학 연구의 전후 구조는 완성되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군산학 그리고 국가의 일체화다. (73)



전쟁을 선동한 정치가와 전쟁을 지도한 군인이 패배의 책임을 ‘과학‘에 돌린 건 전쟁책임 추궁이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것을 교묘히 회피한 것이라 불쾌한 마음이 드는데, 매스컴을 비롯해 그것을 비난하는 논조는 없었던 것 같다. 그뿐인가, 매스컴이나 지식인이나 자신들이 침략전쟁에 가담한 것에 대한 반성도 없이 ‘일본은 과학전에서 패배했다‘는 논의에 동참했다. 특히 미군에 의한 원폭 투하는 그야말로 그 ‘과학전의 패배‘를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
그것은 또한 일본의 패배가 정확히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의 패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미국에 대해서만 패배한 것처럼 잘못된 이해를 초래함으로써 그 이전에 일본이 중국에 패배했다는 사실, 얕보았던 중국인들에게 졌다는 현실을 은폐하는 것이기도 했다. (77)



니시나는 원폭 투하 직후 히로시마의 지옥도를, 그리고 나가이는 원폭 투하 후 나가사키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다. 그 학적 경력으로 보나 특이한 경험으로나 당시 일본에서는 방사선의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는 입장에 있었지만, 그 두 사람조차도 20세기가 낳은 과학기술인 ‘원자력‘의 장래에 대해 이 정도의 신뢰를 갖고 있었다. 과학자가 미증유의 살상력과 파괴력을 가진 무기를 만들어 냈다는 데 대한 회한이나 죄의식, 공포의 감정 같은 것은 편린도 찾아볼 수 없다. (81)



애당초 1966년에 미국 자금 도입을 꾀한 것은 소니연구소 소장 하토야마 미치오...와 도쿄대 물리교실 교수 우에무라 야스타다...였고, 미군과의 사이를 중개한 것은 전 도쿄대 총장 가야 세이지였다. 즉 연구비가 가장 풍부한 위치에 있는 연구자들이었다. 그에 비해 연구비가 부족한 지방 대학 연구자일수록 윤리적으로 결벽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구비가 적으니까 미군에 자금 원조를 요구했다는 건 거짓말이다. 오히려 역으로 연구비가 풍부해지는 만큼 돈맛을 알아 돈에 대한 감각도 마비된 것 같다. ‘부자와 재떨이는 쌓이면 쌓일수록 더러워진다‘는데 정확한 말이다. (84)



결국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라는 건 실은 군정하의 오키나와에 미군기지를 억지로 떠맡겨 일본이 극동에서의 냉전체제 유지에 관련을 맺으며 아시아 각국 민족해방 투쟁의 암살에 가담함으로써 존립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10.8에 벌어진 야마자키 군의 죽음이 제기한 것은 그것이었다. (97)



돈벌이라는 점에서, 일본의 고도성장은 1954년 말에 시작된 진무경기부터 74년 오일쇼크까지 실로 20년 가까이 지속되었고 그것은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드문 사건인데 그 고도성장의 시작을 뒷받침한 것이 한반도 특수, 그리고 그 후반을 뒷받침한 것이 베트남 특수였다. 66년부터 71년까지 베트남 특수로 일본 기업에는 매년 10억 달러의 돈이 들어왔다. ...
오컨대 전후 일본의 ‘평화와 번영‘은 한반도와 베트남 사람들이 흘린 피로 얻어졌으며, 오키나와를 미군정하에 맡겼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99)



즉 그 학생은 마루야마 마사오를 사상과 행동이 일관된 인물로 간주한 후에 비판하라고 한 것이다. 그에 비해 나는, 아아 마루야마도 도쿄대 안에서는 법학부장과의 개인적인 관계, 동료와의 관계, 오코치 가즈오나 문학부 교수와의 교우관계, 그러한 것을 고려해 결국 그러한 굴레 속에서 사는구나, 쉽게 말해 도쿄대는 편한 곳이구나 생각했다. 그는 요컨대 보통사람이었던 것이다. (120)



진정한 의미의 ‘전공투‘를 만들어 낸 것은 니혼대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68년 6월에 투쟁이 시작된 후 극히 단기간에 각 학부에 강력한 행동대를 조직했을 뿐만 아니라, 11개 학부로서 사실상 11개 대학이 있다고 일컬어지는 초매머드 대학의 전학적인 사령탑으로 정보국을 형성한 역량은 괄목할 만한 것이다. 니혼대 전공투만의 데모로 니혼대 경제학부 앞 미사키초... 도로가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 물리적으로 흔들렸는데, 니혼대 전공투는 단순히 그 압도적인 동원력이나 기동대, 무장 우익을 상대로 한 실력행사에 강했다는 점에서만 대단했던 게 아니다. 니혼대 투쟁은 학생 대중의 정의감과 잠재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시킨 투쟁이었으며, 그 의미에서 에누리 없이 전후 최대의 학생운동이자 최고의 학원투쟁이었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대단했다. 지금도 눈물이 난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은 전투에서뿐만 아니라 운동을 조직하는 면에서도 대단히 유능했다. (149)



즉 19세기 중엽에 물리학은 교과서화되는 중이었고, 무에서부터 흡수할 수 있는 문호가 형성되어 있었다. 바로 그 타이밍에 일본이 근대화를 개시하여 서구 과학 학습을 시작했던 것이다. 더욱이 그 시기는 완전히 새로운 20새기 물리학인 원자 원자핵 물리학,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이 출현하기까지는 아직 조금 시간이 있었다. 마침 그 시기에 서구 물리학의 저작과 흡수에 착수한 일본에게는 서루에 비교적 빨리 다가갈 기회가 남겨져 있었던 셈이다. 이리하여 일본의 이론물리학 제1세대라고 할 만한 나가오카 한타로...나 이시하라 아쓰시...가 정말 겨우겨우 첨단에 손이 닿을 정도의 작업을 할 수 있었고, 후속세대인 유카와 시대키나 아사나가 신이치로가 최첨단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일본의 개국이 반세기 빨랐다면, 혹은 반세기 늦었다면 일본의 물리학이 이토록 급속히 서구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167)



전시하에서는 많은 이공계 학생이 절대적 천황제와 국가주의 사상 아래 국가를 위해 일신을 바치도록 교육받았다. 전후에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아마도 대다수 학생은 일신을 바칠 대상을 기업으로 바꾸어 의욕을 가지고 정력젹으로 일했을 것이다. 기술자란 기술 자체에 관심을 가지므로 사상적인 갈등도 별로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이렇게 제국헌법에 의한 전시 중이든, 신헌법의 전후든 상관없이 눈앞의 일에 자기 지식과 재능을 쏟은 ‘성공자‘의 ‘성공담‘이 각광을 받고, 전전과 전중의 과학 교육이 전후에 과실을 낳았다는 이런 식의 값싼 스토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되고, 나아가 전시의 기술자 교육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흔히 외치곤 한다. 그에 대해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렇게 해서 전전과 전중에 발생한 공학 이학 교육의 전쟁책임을 불문에 부치고 있다는 점이다. (211)



‘과학‘은 가치중립적이고 전쟁 때나 평화 시에나 파시즘에든 데모크라시에든 똑같이 유용하다는 논의가 가능하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파시점에 협력하는 것과 데모크라시에 협력하는 것은 똑같지 않다. 전시하에 전쟁 수행을 위한 과학 진흥을 운위하던 과학자가, 전후가 되어 상황이 바뀌니까 별 심각한 반성도 없이 이제는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과학 진흥을 말하는 따위는 내게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 식이라면 상황이 바뀌면 또 간단히 바뀌게 될 것이다. (215)



...... 무리학의 기본법칙은 이와 같이 그대로의 자연에는 있을 수 없는 인위적으로 이상화된 상태, 즉 현상의 본질적인 부분만을 부각하기 위해 환경과의 상호작용, 환경과 물질 에너지 운동량 간의 교환을 차단하고 자연 과정에서 비본질적 요인으로 판단되는 요소를 제거한 상태에서 발생하는 현상의 법칙으로 만들어졌다. (229)



이러한 예를 보면 기술에 대한 유일하게 유효한 비판은 ‘외재적 비판‘, 다시 말해 ‘이해가 느린 비전문가의 완고한 비판‘이라 했던 무라오 고이치나 우이 준의 지적...이 역시 핵심을 찌르고 있는 것 같다. (238)



만약 대학의 개개 학문분야가 직접 국가 내지 기업의 보조를 받아 이러한 자금원과의 계약관계를 갖거나 확대하거나 하면 그 결과가 어떠한 것이 될지는 거의 자명하다. 이렇게 대기업체제에서 관심을 받은 테마가 대기업체제의 필요에 반응하면서 편중된 성장을 할 뿐만 아니라, 그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계약 상대인 정부기관이나 기업의 목표에 갈수록 공명하게 될 것이다. ... (256)



도쿄대 투쟁의 뚜렷한 특징은 특히 대학원 차원에서 대학에 대한 어떠한 비판이든 그 비판이 동시에 대학공동체를 뒷받침하던 자신들 자신에게도 향한다는 사실을 자각했던 것, 혹은 그 자각을 요구했다는 점에 있다. (261)



따라서 우리의 투쟁은 연구실 운영의 민주화를 추진하거나, 대학 운영에 대한 대학생과 대학원생의 참가 권리를 인정해 달라는 차원의 문제에서 얼마간의 타협을 이끌어 내 승리로 총괄하고 자기당파의 세력 확대에 운동을 집약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학의 연구와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를 요구했던 것이다. (265)



그리고 지금 국립대학에서 인문계, 사회학계 학부 ‘폐지‘ 전망을 비롯한 난폭한 논의가 문부과학성에서 나오는데, 그 모델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전시하에서 만들어진 오사카제대와 나고야제대이며 그것은 바로 전쟁 수행을 위한 대학이다. 그 전쟁이 군사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본질적으로 차이는 없다. (272)



보석이 되었을 때 앞으로도 물리학 학습은 계속하리라고 생각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물리학 학습은 그만둘 수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연구실로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물리학 학습은 어디에 있더라도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281)



원전에 대해서는 가끔 반대의 견해를 표명해 왔지만, 3.11 후쿠시마를 막을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전쟁과 파시즘의 전야처럼 되고 말았다.
젊은 시절 우리는 패전 이전을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 왜 일본의 그런 전쟁이나 파시즘을 막지 못했는가를 물어 왔다. 솔직히 똑같은 말을 우리에게 지금의 10대나 20대 사람들한테서 듣지 않을까 생각한다. ...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결과적으로는 3.11의 파국을 막지 못했다.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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