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1

전쟁과 인간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분석 노다 마사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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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인간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분석
노다 마사아키 (지은이), 서혜영 (옮긴이) 길(도서출판) 2000-06-30



8.7
100자평 0편
리뷰 6편
세일즈포인트 225

원제 戰爭と 罪責400쪽
148*210mm (A5)



책소개

정신분석 전문의인 저자가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참가했던 일본군 장교, 일반사병, 군의관 등 다양한 이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군국주의가 이들에게 어떤 정신적 상처를 남겼는지를 분석한 책.

저자는 일본군이 난징 대학살 때 30만에 이르는 중국인을 학살하고 '731부대'를 통해 일반인을 생체실험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무고한 농민들을 초년병의 총검술 연습의 대상으로 삼아 살해하는 등 많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역사적 사실 앞에서 한가지 의문을 던진다. 바로 '그런 잔혹극에 동원됐던 일본군들은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던 걸까?'라는.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해 전후 일본 사회가 의도적으로 "죄의식을 억압해왔다"고 주장한다. 일본군이 저지른 학살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보다는 자신들도 '전쟁의 피해자'라는 논리를 펴며 책임을 회피해왔다는 것. 그는 이 같은 일본사회의 극우적 분위기와 경직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군국주의 시대의 잔혹극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 이들을 찾아 그들을 인터뷰했다.

731부대의 군의사 유아사 켄, 중국인들을 총검술 훈련대상으로 삼았던 고지마와 잔학한 고문을 자행했던 만주국 특무헌병 미쓰오 등의 증언은 일본 군국주의의 잔혹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책에서 저자는 결론적으로 말한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죄의식이야말로 우리들의 귀중한 문화이며, 죄의식을 억압해온 일본문화의 모습을 통해 우리들은 자신의 내면의 얼굴을 알 수가 있다"라고.



목차


- 한국어판 서문
- 서장 죄의식을 억압해온 문화
제1장 집단으로의 매몰
제2장 길 아닌 길
제3장 마음이 병드는 장병들
제4장 전범 처리
제5장 탄바이, 죄를 인정하다
제6장 슬퍼하는 마음
제7장 과잉적응
제8장 복종으로의 도피
제9장 죄의식 없는 악인
제10장 세뇌
제11장 "시켜서 억지로 했다"가 아니라
제12장 공명심
제13장 탈 세뇌
제14장 양식
제15장 아버지의 전쟁
제16장 계승되는 왜곡
제17장 감정을 되찾다
- 후기
- 옮긴이의 말
- 찾아보기
접기



밑줄긋기
진냥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은, 인간은 변화할 수 없는 사악한 존재라고 해명하는 것이다. 이 재판의 피고들은 자신이 한 행위를 변명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서도 냉혹하고 잔인한 행위들이 있었다는 증거물을 제출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형식적인 권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논거는 될 수 없다. 타인의 죄를 끌어들여 자신의 죄를 부인하는 것은, 제대로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

우리의 죄를 작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죄를 자각한 상태에서 삶을 이어갈 때, 비로소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존경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인간적 존경을 얻을 수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이미 살 가치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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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장정일 (소설가, 시인): <장정일의 독서일기 6> (범우사 刊)



저자 소개
지은이: 노다 마사아키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최근작 : <전쟁과 죄책>,<떠나보내는 길 위에서> … 총 17종 (모두보기)
태평양전쟁이 한창이었던 1944년 태어났다. 홋카이도대학 의학부 졸업 후 나가하마적십자병원 정신과 부장, 고베시외국어대학 교수, 간사이가쿠인대학 교수 등을 역임했다. 급격한 사회변동, 전쟁, 재해와 같은 충격적인 경험을 한 사람들을 조사하고, 소련-러시아의 사회변동 과정에서의 정신 건강 연구, 중국·베트남·동유럽의 전쟁 가해자·피해자의 정신병리학 연구 등을 수행했다. 정신의학의 기반 위에서 비교문화, 문화인류학, 사회학을 접목하고, 의사, 평론가, 논픽션 작가, 사회운동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며, 『컴퓨터 신인류 연구 コンピュ-タ新人類の硏究』로 오야 소이치 논픽션상,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 喪の途上にて』로 고단샤 논픽션상을 수상했다.

아버지는 군의관으로 참전했지만, 전쟁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의대에 입학했을 때 전쟁을 경험한 선배 의사들 역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는 병든 사회의 병든 사람들을 연구하며 아버지의 전쟁을 조사하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비로소 진실을 말하기 시작한 아버지뻘의 노병들을 인터뷰해 이 책을 완성했다. 그는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표현하는 능력, 슬픔을 느끼는 능력에 있다고 보았다. 인간을 국가의 목적을 위한 소모품으로 만드는 군국주의 체제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압하고 마비시켰다. 이 책에서 그는 전범들에게 잔인하리만큼 집요한 질문을 던지며 그들이 ‘상처 입을 수 있는 인간’ ‘슬픔을 느끼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건조하고 절제된 문체로 담담하게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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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서혜영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일어일문학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현재 전문 일한 번역가 및 통역가로 활동 중이다.
역서로는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굿바이, 헤이세이』 『반상의 해바라기』 『펭귄 하이웨이』 『거울 속 외딴 성』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레몬일 때』 『쉬 러브스 유-도쿄밴드왜건』 『하드보일드 에그』 『오로로콩밭에서 붙잡아서』 『도쿄밴드왜건』 『말해도 말해도』 『작은 인연』 『보리밟기 쿠체』 『반딧불이의 무덤』 『시노다 고코의 요리와 인생 이야기』 『번역어 성립 사정』 『그네타기』 『사라진 이틀』 『매리지 블루』 『사이좋은 비둘기파』 『명탐정 홈즈걸의 책장』 『명탐정 홈즈걸의 사라진 원고지』 『지상에서 런치를』 『수화로 말해요』 『소리나는 모래 위를 걷는 개』 『하노이의 탑』 『가출 기차』 『빌라 매그놀리아의 살인』 『헌책방 어제일리어의 사체』 『춘정 문어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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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다 마사아키(지은이)의 말
언제부터인가 나는, 침략전쟁을 재검토하지 않고, 그 시기에 어떤 전쟁범죄를 거듭 저질렀는가를 검증하지 않고, 그 시대를 부인과 망각에 의해 넘겨버리고자 하는 자세가 얼마나 우리들의 문화를 가난하게 만들어왔던가를 고찰해보고 싶어졌다. 죄를 자각하고 전후를 살아온 소수 사람들의 정신을 통해 다수 사람들의 그림자를 부각시켜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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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 2019-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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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전 이후 일본인들의 반응

1. 무벌화(無罰化) : 전쟁 가담자에게도 피해자에게도 전쟁은 비참한 것이므로 모두를 벌하지 않고 함께 평화를 제창하자는 평화운동으로 치환

2. 물질주의로 '바꿔치기' : 경제 부흥으로 미국의 경제력을 따라잡으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자세로, 부국강병의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를 경제성장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 치환




"나는 지금까지 전범으로 중국의 수용소에 잡혀 들어간 많은 일본군들을 만나왔는데, 그들에게 공통된 점은, 〈나는 중국인을 학살했다. 그러므로 사정이 어찌됐건 그들도 나를 죽일지 모른다〉고 하는 두려움이 없었다는 점이다. 윤리적인 죄의식이 없는데다, 중국쪽에 기대려는 어리광 심리마저 있었다. 죄라고 자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죄라고는 느끼지 않는다 하더라도, 많은 중국인을 학살했으니까 자신도 죽임을 당할 거라고 생각할 법도 한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기에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집단에 준거해서 사는 인간의 정신적 강인함이 잘 나타나고 있다. 자아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집단으로 있는 한 불안하지 않다. 집단이 혼란상태에 빠질 경우 자신도 혼란에 빠지지만, 그것은 일과성일 뿐이다. 집단은 끊임없이 개개인이 한 행위에 대한 책임을 모호하게 흐리고, 모든 행위에 동의하는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다."(42-3)




"유아사 씨 등이 중국 대륙에서 생체해부에 대한 죄목을 추궁 받던 시기에, 생체해부 및 인체실험의 추진자였던 기타노 세이지, 후타키 히데오 등 전 731부대(관동군 방역급수부)의 중추와 나이토 류이치 전 육군 군의학교 방역연구실 교관은 1951년 '일본 블러드뱅크'를 만들었다. 그들은 전쟁 중에 실시한 인체실험으로 터득한 혈액의 동결 건조 기술을 사용하여, 산야, 가마가자키, 고토부키쵸와 같은 싸구려 여인숙 거리에서 혈액을 싸게 사들여 만든 건조혈액을 미군에 팔아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한국전쟁 특수는 전쟁범죄 의학자들을 윤택하게 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1964년 '미도리십자'로 발전한 이 회사는 미국의 매혈을 다량 수입하여, 후생성과 한몸이 되어 일본을 혈액제제의 소비대국으로 만들어갔다. 한편 후생성의 중심 연구소인 국립예방위생연구소의 역대 소장과 각 연구부문의 책임을 맡고 있는 부장의 대부분은 전 육군 방역급수부나 군의학교의 의사였다."(54-5)




"오가와 씨는 의료 전도의 뜻을 버리지 않고 펑티엔으로 돌아와 만주의과대학에 재입학했다. 이 의학생 시절, 기타노 교수로부터 〈현지 원숭이를 사용한 발진티푸스 예방 왁진 개발 실험〉 강의를 받았다. 기타노는 731부대에서 부대장 이시이 시로 다음 가는 자리에 있으면서 당시 군의 대좌였으나, 칙명에 의해 만주의대 미생물학교 교수가 되었다. 후에 기타노는 731부대장(소장)이 된다. 기타노 교수는 온화한 얼굴로 칠판에 그림을 그리며 〈장기의 병변이 이와 같이 나타나고, 체온이 이와 같이 내려가 죽었다〉고 설명했다. 오가와 씨는 〈만주에 현지 원숭이가 있었나?〉하고 의아해했으나, 그것이 중국인이나 러시아인을 사용한 인체실험이었고, 실시된 장소가 의대 미생물학과 교실과 해부실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82) 기타노 세이지는 39년 2월, 13명의 중국인을 발진티푸스에 감염시킨 뒤 그들을 생체해부해 얻은 지식을 토대로 발진티푸스 예방 왁진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오가와 씨는 강한 척하는 인간의 어쩔 도리 없는 나약함을 줄곧 보아왔다. 만주사변 직후 펑티엔에서 경비를 서던 학생들의 공포심과, 공포를 견디다 못한 살인.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의 초년병 교육 시절, 인격이 퇴행하여 죽음에 빨려들어가는 병사들의 모습. 스지아주앙과 베이징 제1육군병원에서 전쟁 영양실조증으로 말라비틀어지고 왜소하게 오그라들어 죽어가는 병사들. 혹은 자살하는 병사. 그들은 약탈전쟁에 적응할 수 없음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도망죄로 총살당하기 직전의 병사들. 오가와 씨에게는 〈인간을 여기까지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있다. 전쟁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일으킨다. 그러나 전쟁터의 현실은 관념을 넘어선다. 관념은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나지만, 전쟁터의 시간은 길고, 그것을 견뎌야 하는 자에게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기나긴 비인간적인 시간 속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격이 해체되는 위기를 맞이한다."(105-6)




"황허가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산동성 내륙부에서, 고지마의 중대는 당시의 일본 육군이 범한 모든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촌락을 습격하여 빼앗고 태우고 몰살시켰다. 초년병을 단련시키기 위해 중국 농민을 나무에 매달아두고 총검으로 찌르는 훈련도 시켰다. 나무에 매단 중국인의 흉부를 5~6명의 병사들에게 차례로 찌르게 하는 것이다. '토끼사냥'이라 불리던 중국인 강제연행 작전도 펼쳤다. 1942년 9월부터 연말에 걸쳐 중국인 일꾼사냥이 실행됐다." "한 개 중대(고지마 중대는 150명)가 죽 늘어서서 4km에 걸친 지역을 맡는다. 일본 병사 한 명에 경비원 10명 정도를 붙여서 물샐틈없이 좁혀 들어간다. 중심이 되는 분대장의 소재지에는 일장기를 세우고, 반경 16km의 커다란 포위망을 만든다. 이 포위망을 좁혀가면서 중국 농민을 잡아들였다. 하늘에는 비행기가 날면서 각 중대의 진행을 조정했다."(115-6)




"(패전 후) 일본 포로들은 마음이 흔들렸다. 누구 한 사람, 자신이 형법상의 죄를 저질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들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알고 있는 중국인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점, 생존자나 유족의 신고에 의해서 반드시 보복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두려워했다. 저마다 굳은 얼굴 표정 아래 불안, 분노, 절망, 변명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5년간이나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혹사당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려 죽어갔지만, 나는 견뎌냈다. 그만큼 괴롭힘을 당한 우리들을 이제 또 다시 전범이라고 보복하다니, 너무나 불공평하다. 전쟁은 국가와 국가가 벌이는 사투다. 전범이란 전쟁을 명령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지,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이렇듯 그들의 사고는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의심은 감정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폭력적 성향, 인간에 대한 불신, 권위주의는 중국 쪽에 투영되어, 거꾸로 자신들을 덮쳤다. 자기자신의 인간관, 사회관에 포위되어 있었던 셈이다."(118-9)




"관리소쪽에서 보자면 고지마 씨는 이른바 '완고(頑固) 분자'였다. 딱딱한 변명의 갑옷을 두르고 웅크리고 있는 수인들에게 중국 쪽이 취한 방침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일본군이 저지른 일들을 알려주는 것, 군대 하나하나는 자신이 관여한 전쟁터밖에 모른다. 게다가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지금 당장 직시하는 일은 괴롭다. 그래서 중국쪽은 중국 각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지금도 전쟁 피해가 얼마만큼 지속되고 있는지를 알리는 방법을 취했다. 다른 하나는 충분한 보살핌이었다. 둘 다 우순 전범관리소에 배속된 혁명군 병사들이 해방군이 되어 배우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인간관계였다. 거기에 하나 더, 이 두 가지 방침을 지탱해준 것은 '시간'이었다. 천천히 시간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릴 것. 이렇게 기다려줌으로써 전범들의 태도변화에 대비하고자 했다." "희생자와 그 가족, 그리고 그들의 동포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고지마 씨는 겨우겨우 깨달아갔다."(127-8)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자신은 중대장이었으니, 부하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른다. 고지마 씨는 '내가 죽였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고 결정하고, 우선 고백서 비슷한 것을 써서 내기로 했다. 몇 월 몇 일, 몇 명을 이끌고 어디어디로 가서 팔로군 몇 명과 전투를 했다. 적의 유기 사체 몇 명, 전과는 소총 몇 정, 기관총 몇 정. 우리 편의 손해는 ····· 하는 식으로 서너 편 써냈다. 마치 전투보고서 같았다. 서류를 내면 바로 오 지도원이 불렀다. 담화실에 들어가면 〈고미자, 너는 제국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다.〉 그것으로 끝. 다른 아무런 설명도 없이 반장을 불러 다시 방으로 돌려보냈다. 이렇게 되자 불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돌아갈 수 있게 해 봐야지'하고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보고서를 내면, 바로 호출됐다. 〈너는 제국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다.〉 오 지도원의 답은 그것 뿐. 뭐가 제국주의 사상인가?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고지마 씨는 더욱 더 움츠러들 뿐이었다."(133-4)




"1954년 10월, 가족들의 편지를 받고 고지마 씨는 〈나는 중국에 억류되어, 따뜻한 방에서 따뜻한 옷을 입고 쌀밥을 먹고, 무엇 하나 어려움 없는 생활을 보내고 있다〉고 썼다." "이에 대해 오 지도원은 이렇게 말했다. 〈고지마, 네가 쓴 편지는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오랫동안 헤어져있던 사람이 쓰는 편지가 아니다.〉 〈오랫동안 못 만난 일본인은, 편지 서두에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다', 이렇게 쓰는 것이 습관 아닌가? 네 편지는 중국을 칭찬하는 것으로 시종일관하고 있으니, 요컨대 관리소쪽에 잘 보이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고지마 씨는 심경에 변화를 일으켰다. 〈더 이상 저항해봤자 소용없겠다.〉" "고지마 씨는 방으로 돌아가, 이번에는 기억나는 모든 악행을 종이에 쓰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고백에 값한다고 생각되는 것을 모두 정서하여 오 지도원에게 제출했다. 이렇게 해서 1955년 봄 다른 병사들보다 늦게, 드디어 고지마 중대장의 '인죄(認罪, 죄를 인정함)'가 성립했다."(139-40)




"고지마 씨가 모든 것을 다 고백한 뒤, 오 지도원은 각 마을에서 올라온 고소장을 한 장 한 장 읽어줬다. 한 장에 한 건씩 적힌 고소장이 두꺼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있었다." "중국쪽은 독자적으로 조사한 것과 전범이 자백한 것이 일치하면 죄를 인정한 것으로 판정했다. 그들은 자백을 유도하는 일도 없었고, 자백에 기초하여 조사하지도 않았다. 이와 같은 배려 아래 양자가 접근했을 때, 죄를 자각한 것으로 인정했다. 〈전쟁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시오. 그것만으로도 좋소.〉 〈전쟁이란 이렇게 잔혹한 것입니다. 당신이 한 행위는 중국 인민에게 커다란 재난과 그 뒤에 남는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것을 알기 바라오.〉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중국쪽은 그렇게 말했다. 그 뿐, 고소의 내용을 듣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지마 씨 내면의 감정까지 묻는 일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가해와 피해의 사실에 대한 인식을 요구했을 뿐이었다."(140-1)




"마침내 기소 면제 결정을 듣는 순간, 그저 '돌아갈 수 있다'는 환희가 가득 차 올라왔다. 지금까지의 죄의 자각도, 어떤 형벌이든 달게 받겠다던 반성도 한 순간에 날아가버렸다."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에 11년간 억류되었다 돌아온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세뇌 당한 남자', '빨갱이'라는 낙인이었다. 취직이 안 되고, 공안경찰의 정기적인 방문을 받아야 했다. 그를 받아주겠다고 열성인 곳은 증원을 서두루고 있던 자위대뿐이었다. 대학 시절의 교수님과 선배가 애를 써줬지만, '중국 귀환자'라는 이유로 아무데서도 일을 시켜주지 않았다. 그런 한편, 자위대에서는 제국 군인이 그대로 살아 돌아왔다는 이유로 입대할 것을 권했다. 고지마 씨는 이런 일본의 현실을 마주하고, 〈과연 중국에서 말한 것이 틀림없구나〉하고 생각했다." "전범관리소에서 배운 사상과 일본의 현실에 비추어보며 생각하는 나날이 한동안 계속됐다. 고지마 씨가 개인으로서 전쟁범죄와 맞서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148-50)




"우리들은 전쟁 중의 잔학행위에 대해 들었을 때, 〈전쟁이란 그런 거다. 인간을 짐승으로 만든다〉고 일반화하기 쉽다. 〈영국과 미국도, 소련도, 중국까지도 다 그랬다〉는 반론을 덧붙이면서 자기 나라의 범죄를 중화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개개의 사례를 검토한 뒤의 귀납이 아니라, 미리 해버린 일반화이며, 사실을 잊으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다." 야전 소대장에 임명된 도미나가 씨가 살인이라는 입사식(入社式을 치를 때 "〈상관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자기변명을 했던 것도, 미리 해버린 일반화였다." "자신의 부하가 될 하사관, 병사는 모두 버젓이 한 사람 몫의 군인 노릇을 해내고 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들의 지휘관으로서 아직 검증되지 않은 나에게 상관은 〈베라〉고 말한다. 귄위에 의한 명령, 그리고 부하에게 약점을 잡히고 싶지 않다는 생각, 이 두 가지에 힘입어 그는 순순히 제국 육군에 적응하는 길을 선택했다."(189-90)




"1938년 난징을 침략했을 때, 누가 먼저 1백 명을 베어 죽이느냐는 경쟁을 벌여, 일본 군인의 무용담으로 일본 국내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던 무카이 도시아키(전 육군소좌, 1946년 1월 난징에서 총살형당함)와 노다 쓰요시(전 육군소좌, 1948년 1월 광동에서 총살형당함)의 유서는 다음과 같다. 무카이의 유서는 〈나는 천지신명께 맹세코 포로와 주민을 살해한 일이 전혀 없습니다. 난징 학살사건의 죄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 내가 죽음으로써, 중국 항전 8년이 패배로 끝난 데 대한 한을 씻고, 일·중 친선, 동양 평화의 단서를 이룬다면 이렇게 버려짐을 행운으로 알겠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노다도 마찬가지로 유서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포로, 비전투원의 학살, 난징 학살사건의 죄명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거부하겠습니다. 죽음이 선고된 것에 대해서는 하늘의 명이려니 체념하고, 일본 남아의 최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드리겠습니다. (···)〉"(214-5)




"둘 다 중화민국 정부에 의해 처형당했는데,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든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누구나가 같은 논리다. 자신은 〈일본 군인 혹은 군속으로서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고, 전쟁범죄는 저지르지 않았으며, 중국인을 괴롭히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에 진 이상, 일·중 평화를 위해 희생자가 되어 죽는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자신이 저지른 잔학한 행위를 상기하고 후회스러워 치를 떨며, 다른 사람들의 비난과는 관계없이,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은 인간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의 공격성을 전혀 자각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자기자신의 공격성은 부인하고 있다. 그 대신 적에게 강한 공격성이 있었고, 자신은 그러한 상대의 공격성에 고스란히 희생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투사'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교묘히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상대에게만 공격성이 있다고 느끼고 있으므로, 거기서 죄의식이 생겨날 리 없다."(216)




타이위앤 전범관리소에서 지내면서 점차 중국쪽의 요구를 알게 된 나가토미 씨는 "'이미 사형으로 정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거꾸로 살고 싶은 욕구가 강렬해졌다. 그러나, 〈내 죄행은,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밖으로 끌려나가 대중재판에서 욕설을 들으면서 죽는 것만은 싫다. 그것만은 봐줬으면 좋겠다. 어차피 죽는 거라면 모두가 있는, 온정을 느낄 수 있는 이 방에서 죽고 싶다.〉 나가토미 씨는 이렇게 생각하고, 목매어 죽을 끈을 만들었다. 내일은 죽자고 결심한 날 밤, 감방의 창틀로 내리비추는 달빛을 보고, 그는 '살고 싶다'는 생각에 어쩔 줄을 몰랐다."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로 만들어진 갑옷을 입고 있던 감정이, 억제를 뚫고 '괴롭다'고 외쳐댔다. 〈그토록 악행을 거듭해온 사내가 이 무슨 어리광이냐〉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가토미 씨의 자아는 죽음에 직면해서야 비로소 자신의 적나라한 감정의 부르짖음을 들었던 것이다."(237-8)




"판결은 13년의 금고형. 체포 이후의 기간이 형기에 포함되어 남은 기간은 7년이었다." "판결 뒤에 타이위앤에서 우순 전범관리소로 이송된 나가토미 씨 등은 오전에는 책을 읽고 학습하고, 오후에는 양계, 야채 재배, 논 개발 등에 종사했다. 이른바 교육형(敎育刑)을 받은 것이다." "그는 1963년 9월에 석방되어 26년 만에 귀국했다. 취직은 어려웠다. 공안 경찰의 미행, 잠복이 계속되었다. 겨우 취직한 일본도로공단의 사무실에도 전화가 걸려오고, 때로 연행되기까지 하는, 집요한 추적을 견디지 못하고 퇴직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익 나가토미 청년이 폭력으로 일궈온 일본이란 사회가 어떠한 곳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 뒤 나가토미 씨는 침뜸치료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반전 평화와 일·중 우호를 호소해 왔다. 나가토미 씨는 요청하는 곳이 있으면 전국 어디든, 아무리 작은 집회라 할지라도 기꺼이 갔다. 육중한 풍채, 걸걸한 목소리로 자신이 중국에서 얼마나 잔혹한 짓을 했는지 얘기했다."(240-1)




"'731부대'는 세균전 수행을 위해 일본 육군이 1933년에 창설한 '관동군 방역급수부' 본부의 약칭이다. 전후에는 부대장 이시이 시로 중장(군의)의 이름을 따서 이시이부대라고도 불렸다." "본부인 핑팡에는 1939년부터 패전 때까지 약 3천명이 실험용으로 보내졌다. 어린이를 포함한 중국인, 러시아인, 조선인, 몽골인, 소수의 구미인이 실험동에 격리되어, 인체실험과 실험 후의 생태병리해부에 의해 죽어갔다. 이들 731부대로 이송되는 희생자를 관동군 헌병대는 '특이급'(특별이송취급)이라고 불렀다. 군사경찰인 헌병대는 용의자를 체포, 조사한 뒤에 만주국의 법원(삼심제)에 송치해야 한다. 법제상 재판을 하지 않고 살해 결정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 731부대 이송은 단 한마디의 통첩으로 실행에 옮겨졌다." "「특이급에 관한 통첩」을 보면, 특이급 인물에 대해 〈죄상이 가벼우나 석방불가〉란 글귀가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헌병에 체포된 자는 누구라도 특이급이 될 수 있었다."(253)




'특고(特高, 특별고등경찰)의 하느님'이라고 불리던 쓰치야 씨는 "1934년 4월에 관동헌병대의 헌병이 된 뒤 12년간 쭉 치치하얼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도 특고 외길로, 부대 부속 소위로까지 승진했다. 한 번도 전근하지 않은 헌병은 예외 중에서도 예외이다. 그만큼 역대의 대장이 그를 신뢰하고 놓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294) 전쟁이 패전으로 막을 내리고 소련군의 진격이 코앞으로 닥쳐오자 "그의 장래를 보장하던 문이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래서인지 그의 의식은 과거로 향했다. 헌병 제복을 입고 자랑스런 계급장을 달고, 말 위에서 등을 곧게 편 자세로 거리를 지나간다. 그는 혼자서 치치하얼의 거리 전체와 마주할 생각이었다. 그에게 치치하얼은 하나의 대상물이며, 하나의 생명이었다. 그의 의식에서 치치하얼은 살아 있었지만, 그 거리의 인간은 죽어 있었다. 살아서 생활하는 개개의 인간을 그는 몰랐다."(297-8)




"그의 인간관을 서서히 서서히 변화시켜 간 것은 중국인 관리소원의 태도였다. 결코 모욕하지 않고, 소리치지도 않았다. 식사는 정성들여 요리해서 가져다 주었다. 산책도 체조도 하게 해주었다. 머리가 길어지면 이발도 해 주었다. 병에 걸리면 헌신적으로 치료와 간호를 해주었다. 보살핌을 받을수록 차차 마음이 괴로워졌다. 이러한 중국인의 태도 하나하나가, 그에 대응하는 과거의 그의 행위를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다." "쓰치야 씨는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이런 대접을 받아도 좋을리가 없다. 이런 후한 대접에 만족해하는 자신은 어떤 인간일까? 그는 개인으로 존중받는다는 것, 즉 전범과 관리자라는 관계이기 이전에 대등한 인간으로 교류한다는 것을 처음을 체험했다. 지금까지 일본인으로서의 인간관계에는, 도움이 됐든 안 됐듯, 효율과 타산의 관점밖에 없었다. 신뢰도, 도움이 되냐 안 되냐에 따라 고려됐다. 가족관계는 애정이 넘쳤지만, 그것은 가족 내에서의 일일 뿐이었다."(300-1)




귀국 후 반전평화운동에 참여한 쓰치야 씨를 두고 세뇌당했다는 둥, 일본공산당이라는 둥 비난이 쏟아졌다. 그에게 쏟아진 우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말로 속죄할 마음이라면, 그것을 깨달았을 때 깨끗이 자기 몸을 처분하는 것이 전해져 오는 무사의 자세다. 젊어서 그 기회를 놓치고 지금도 배를 가를 용기가 없다면, 행각승이라도 돼서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인 피해자의 혼을 위로하는 공양 행각이라도 하는 게 어떠냐?〉 〈대동아전쟁의 대의명분은 아시아 약소 민족을 미국과 영국의 질곡으로부터 해방하는 데에 있었으나, 일본은 결국 패했다. 그러나 전후 40년, 아시아가 해방된 사실을 너는 어떻게 보느냐?〉 이 글들은, 쓰치야 씨가 진술한, 헌병들이 혐의를 두고 체포하여 고문하는 과정을 관철하는 사고 그 자체를 보여준다. 자신이 지목한 자는 혐의가 있는 자이며, 혐의는 확증이 있는 사실로 갈아치워지고, 자백하지 않는 자는 공산당원이기 때문인 것으로 된다."(309)




"전후 세대(전후에 태어난 사람만이 아니라, 나와 같이 전쟁 중에 태어났더라도 전후에 자아 형성을 한 사람을 포함하는 개념)가 부모나 친척으로부터 들어온 전쟁은, 전사 통지, 공습의 공포, 소개(疏開), 전쟁 때와 그후의 식량난 등이었다. 이와 같은 얘기는 부모 세대가 즐겨 얘기했다. 그것은 곤란을 극복해온 자기 긍정의 감정과 함께 전해졌다. 그러나 부모들은 결코 자신이 저지른 침략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전후 세대는 부모에게 묻지 않았다. 공습의 공포, 소개나 철수 때 고생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당신은 전쟁 때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무엇을 했습니까? 묻지 않았다. 확실히 그들이 굳게 입을 다문 것도 그 원인의 하나일 것이다. 온 나라가 나서서 문제의 본질을 얼버무리기도 했다. '비참한 전쟁'이라고 틀에 박힌 표현을 써서, 침략전쟁의 구체적인 사실을 피해 갔다." "전후 세대의 교과서 『민주주의』(1949.8)를 보면,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음에 아연해진다."(332-4)




"전쟁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민주주의와 세계평화」란 절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면, 다수의 국민은 군인이 되어서 전쟁터를 향하며, 죽음의 위험에 직면한다. 그뿐만 아니라, 근대전에서는 국내의 후방도 폭격을 받아, 여자와 아이들도 희생당한다. 집이나 재산이 불탄다. 막대한 전비를 부담하여 경제생활은 커다란 타격을 입는다〉고 전쟁의 피해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전제주의라고 서술한 뒤, 정말 놀랍게도 일본의 전쟁 확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독일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런 서술은 오늘날 일본인의 전쟁관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하고 있다. 천연자원은 거의 없지만 일본인의 근면과 기술은 장래에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식의 비슷한 주장을 반복해서 싣고 있는 교과서 『민주주의』의 페이지들을 넘기면서, 전후 세대의 사상 형성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잘 알 것 같았다. '전후 민주주의'와 '침략전쟁에 대한 부인'은 하나의 세트였다."(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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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200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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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그리고 가해자의 심리에 관한 가장 탁월한 분석이다.

2차대전 당시 학살과 폭력에 가담했던 대부분의 일본군 가해자들은 이렇게 변명한다.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 여기에서 가라타니 고진 같은 이는 그 명령 체계의 최상위에 있는 천황이 면책됨으로써 전 국민이 책임을 회피하게 되었다고 본다. 반면에 저자는 그 개개인의 윤리적 불감증을 하나의 증상으로 간주하고 그 경험을, 기억을, 감정을 분석해나간다. 그리고 치료해나간다.

얼마 안 가 목숨이 끊어질 할아버지에 대해 집요하게 죄의식을 추궁하는 저자의 태도는 때로는 잔인하게 여겨질 정도다. 그러나 사실이 그렇다. 가해자의 폭력성을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폭력의 가해자가 폭력을 인정하고 나아가 피해자의 입장에서 폭력을 추체험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 이건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다.

"죄의식은 스스로의 공격성을 타자에게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을 공격하는 것에 의해 생긴다. 그러므로 지나친 죄의식은 우리들을 자살이나 정신장애로 몰아갈 위험성이 있다."(216쪽) 즉, 가해자의 내면을 지배하는 것은 방어의식이다. 가해자가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피해자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감정, 그때, 피해자의 목을 베었을 때, 그의 눈빛을 기억해낼 수 있는 능력, 비단 일본만이 그런 감정과 능력을 억압해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나아가, 비단 미국만이 그런 감정과 능력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이 책이 2차대전 당시의 일본군의 폭력에 대한 자기반성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은 무엇보다, 폭력, 그리고 가해자의 심리 일반에 관한 가장 탁월한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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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明 2019-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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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적잖은 일본인은 일본 제국이 침략 전쟁을 벌였다고 인정하지 않을까요? 전쟁을 일으켜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괴롭힌 일을 어쩌면 그리 쉽게 잊었을까요? 게다가 한술 더 떠서 자기들도 전쟁 피해자라고 우기는 일본인들의 저의는 무엇일까요? 일본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되풀이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정신 의학자인 노다 마사아키[野田正彰]는 일본군으로 동원되어 중국 등지에서 복무한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정리해, 침략 전쟁을 부인하는 일본인들의 물구나무선 논리, 그 밑바닥에 깔린 심리를 분석한 책인 『전쟁과 인간 -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분석』(원제는 '戰爭と罪責')을 펴냈습니다.

글쓴이가 만난 이들은 대부분, 전쟁을 기획하고 주도한 A급 전범들 아래에서 전쟁을 직접 수행한 B급 전범이나 C급 전범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범'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에 걸맞지 않게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글쓴이는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괴물'이 되었다가 '인간'으로 되돌아왔는지 알아내고자 그들이 걸어온 삶을 성장 과정부터 하나하나 되짚어갔습니다. 전범들이 글쓴이에게 털어놓은 죄들은 하나같이 큰 충격을 줍니다. 이를테면 중국인 부하에게 '염라대왕'이라고 불린 한 병사는 다음과 같은 짓을 저질렀습니다.

"근처 상사아구코우(上下峪口) 마을에서는 농민 8명을 빨간 술이 달린 창으로 엉덩이를 찔러 죽였다. 3명을 그가 찔러 죽이고 나머지는 부하들에게 흉내내도록 했다. 또 원시현 헝쉐이진(橫水鎭)에서는 남자 한 사람을 고문한 뒤, 마차 뒤에 밧줄로 묶어 질질 끌고다녀 죽게 했다. 불에 달군 젓가락으로 음경을 자르거나, 물고문으로 부풀어오른 배를 발로 짓밟는 고문도 즐겼다. 또 비위애현(泌源縣) 정중(正中) 마을에서는 겁에 질려 굴 속에 숨어있는 여자와 아이 열두 명을 찾아내, 마른풀로 태워 죽였다. 그가 죽인 중국 농민은 특별군사법정에서 기소된 사건만 해도 111명이다. 그 자신은 200명이 넘는다고 말하고 있다. 실로 염라대왕이 따로 없을 뿐더러, 본인도 그렇게 불리는 것이 아주 싫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온갖 만행을 저지르던 일본군 장병들은 일제가 패망하자 하루아침에 포로 신세가 됩니다. 그래도 이들은 스스로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몰랐습니다. 죄책감은 없었습니다. 일본군 포로들은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흔하고 자기들은 높으신 분들이 내린 명령을 따랐을 뿐인데, 그런 자기들을 전범으로 취급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여기며, 되레 불만을 품었습니다. 만주 사변(1931)과 중일 전쟁(1937) 그리고 태평양 전쟁(1941)으로까지 이어지는 '15년 전쟁'이 침략 전쟁이었음을 부인하는 논리가 전쟁이 끝나자마자 나왔던 것입니다.





난징 대학살 당시 중국인을 참수하려는 일본군의 모습(위키백과)

그러나 중화 인민 공화국의 '이인자'인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 총리는 일본군 포로들에게 관대 정책을 베풀라고 지시하였습니다. 포로들을 고문하거나 폭행하는 따위의 가혹 행위는 전혀 없었고, 포로들이 배가 고프다고 하면 밥을 더 주고, 아프다고 하면 귀한 약을 아낌없이 썼습니다. 당시 웬만한 중국 인민들보다 일본군 포로들이 더 대접을 받은 셈입니다. 그동안 중국인들을 벌레 보듯 하며 멋대로 죽인 자기들을 손님처럼 따뜻하게 보살피는 중국 지도원들의 태도에 일본군 포로들은 크게 당황합니다. 처음에는 전범이 된 게 억울해서 허세를 부리며 반항하던 일본군 포로들은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내림을 느끼며, 하나둘씩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고백합니다. 이른바 탄바이[坦白, 죄행의 고백]였습니다.

"리우 반장은 싱긋싱긋 웃으며, 우리들의 맨 앞에서 걷고 있었다. 마음의 빗장이 열렸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것 같았다. 눈물이 넘쳐흘렀다. 스스로도 주체할 길 없었다. 눈앞이 희뿌옇게 흐려졌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휘청휘청 리우 반장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무너지듯 주저앉으며 양손을 바닥에 대고 무릎을 꿇었다."

전범들은 죄를 죄로 인식하는 능력을 겨우 갖추게 되었습니다만, 아직 그것은 머리로만 생각해서 나온 결론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죄가 아니었지요. 이들이 쓴 반성문을 읽으면, 설명과 분석이 너무 많아서 반성문이라기보다 마치 보고서를 보는 듯합니다. 오랫동안 군국주의 문화에 젖어 감정이 마비된 이들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피해자가 죽으면서 느꼈을 슬픔과 아픔은 추상화되어 희미하게 다가왔을 뿐이고, 원한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중국인들이 보여 준 인내심이 아니었다면, 전범들이 죄를 자각하는 일조차 불가능했을지 모릅니다.

중국 정부는 전범들의 인죄(認罪, 죄를 인정함)를 받아들여서 한 사람도 사형하지 않고, 1956년부터 1964년까지 약 8년에 걸쳐서 일본군 포로들을 모두 일본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일본 사회는 고국으로 돌아온 귀환자들을 세뇌된 빨갱이로 낙인찍었습니다. 귀환자들은 자기들이 꺼내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일본 사회의 공감력 결핍에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악명 높은 731 부대에서 생체 해부를 해서 전범이 된 군의관 유아사 겐[湯浅謙]은 패전 후 11년 만에 본 동료 군의관이 생체 해부를 한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것에 놀라서 일본이 처한 현실에 눈을 떴습니다. 유아사를 비롯한 귀환자들은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중국인들이 자기들을 바라보며 느꼈을 감정을 비슷하게나마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옛날에 마음속에서 사라진 '슬픔을 느낄 힘'을 되찾은 것이지요. 귀환자들은 '중국귀환자연락회(중귀련)'라는 모임을 만들어 일본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기들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며 평화 운동에 앞장섭니다.

명령자가 시켜서 억지로 한 전쟁이 아니라 스스로 한 전쟁임을 뒤늦게 깨닫고 실행자로서 자기가 지은 죄를 짊어지고 사는 귀환자들과 달리 대부분의 일본인은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만든 전후 일본 사회는 경제 발달로 풍요로웠지만, 죄의식을 억압하고 공격성을 강화하는 문화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글쓴이는 "직접 전쟁에 관여한 자를 모두 우순 전범관리소에 넣는 것 이외에는, 표면적이나마 그들 일본인을 바꿀 길이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라며 절망감을 드러내면서도, 지금이라도 전후 세대는 그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전쟁에 나가 무엇을 했는지 묻고 알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는 '강한 인간(책에서 자주 나오는 '강함'이라는 개념은 일상적인 쓰임새와 다르게 부정적인 뜻을 품고 있습니다)'이 되기보다는 울고 웃을 줄 아는 '느끼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버지 세대가 숨겨왔고 때로는 폭력으로 왜곡시켜온 침략전쟁의 사실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음침한 일이다. 그 음침함은 사실인 자학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부인하려 했던 아버지 세대의 자세로부터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이 음침함을 청명하게 벗겨내지 않는 한, 감정의 풍요로움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감정의 풍요로움이 없는 한, 상처 입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을 능력은 생기지 않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강제로 연행하고 학대하고 죽인 데 대해서도, '듣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상하느냐 마느냐, 보상액을 얼마로 하느냐만이 문제가 된다. 피해자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그러면 눈을 돌려서 우리를 살펴보면 어떨까요? 일제 강점기를 겪은 우리는 이 책을 번역한 서혜영 씨의 말대로 우리 스스로를 피해자 자리에 앉히는 데 익숙하지만, 과연 그럴 수만 있을까요? 윤해동 교수는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에서 "제국 일본 속에서 이등국민의 가능성을 엿보던 조선인들은 제국주의자로서의 욕망을 가슴속에 감춘 '새끼' 제국주의자"였다며, 이런 '새끼 제국주의자'들을 낳은 "식민지 분열 현상은 해방 후 민간인 학살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될 수 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 현대사가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는 역사임을 말한 것이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국민 보도 연맹 사건(1950)이나 거창 사건(1951) 같은 해방 후 한국 전쟁 시기에 일어난 민간인 학살을 잘 알지 못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데, 피해자의 마음을 알기란 더더욱 어렵습니다. 침묵을 깨고 슬픔을 느낄 힘을 키워야 하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군국주의 일본의 심리를 분석하는 일은 우리의 심리를 분석하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2014년 9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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