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8-18

독립기념관 관장 김형석 경축사 - 정규재

독립기념관 김형석관장의 8.15 기념사다. "광복 80주년을 맞는 우리의 자세"라는 제목으로 쓴 짧은 글이다. 이 글을 놓고 시비가 일어나는 모양인데, 읽어 봤지만, 내 귀에는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로 들리는데......내가 너무 친일화, 극우화 되었나?


Jongin Park -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 스캔돼 있는 관장 경축사 원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 자리에... | Facebook


Jongin Park

otSpndoers6u0m2096tu5mi48at9t1m6m976h60657a8mgl908tt17m72mfg ·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 스캔돼 있는 관장 경축사 원문.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이 자리에 참석하신 내외 귀빈 여러분.

오늘 우리는 광복80주년을 맞아, 이 땅의 국권을 되찾은 그날의 감격을 다시금 기리기 위해 독립기념관에 모였습니다. 우리 독립기념관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1941년중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미우스 신부에게 준 태극기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내용을 현대어로 의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미우사 신부님에게 부탁합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려고 성심껏 도와주고 있으니, 이번에 여행하는 어느 곳에서나 우리 한인을 만나는 대로 이 말을 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망국의 설움을 면하려거든,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거든, 정력 인력 물력을 모두 광복군에 바쳐 힘을 가진 세상의 나쁜 무리인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자." - 1941년 3월 16일. 충칭에서 김구 드림

여기서 우리는 광복절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 배후에는 광복군 활동을 지원한 이름 모를 국내․외 후원자들과 벨기에 출신의 미우사 신부와 같은 세계인이 자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의 광복은 세계사적인 사건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우리 조상들은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36년의 일제 식민지 통치 아래 갖은 핍박과 고통을 이겨내고 불굴의 투쟁정신으로 독립을 쟁취한 날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얼'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던 민족주의 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위당 정인보 선생은 광복의 기쁨을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리. 이날이 사십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정인보가 "길이길이 지키자"라고 부르짖었던 대한민국은 지금 '한강의 기적'과 민주화를 통해 세계가 주목하는 '경제 대국' '문화강국'을 건설했지만, 자랑스러운 역사의 이면에는 '갈등 공화국'이라는 심각한 사회 문제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에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국민 통합'을 강조하면서 "국민 통합은 대통령 책임"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렇게 광복 80주년을 맞이한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가 '국민 통합'인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갈등에는 역사문제가 한 몫을 차지하고, '광복'에 관한 역사인식의 다름이 자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의 '광복'을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로 얻은 선물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해방 이후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들의 필독서이던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는 "해방은 하늘이 준 떡"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해석은 "항일 독립전쟁 승리로 광복을 쟁취했다"는 민족사적 시각과는 다른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세계가 주목하는 3·1운동으로 '자주 독립국'임을 선언하고, 이를 계기로 우리의 독립운동은 국내외에서 다양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임시정부는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과 일제에 맞선 무장 항쟁을 병행하여 국제적인 여론을 환기시켰습니다.

1932년 4월 29일 24살의 청년 윤봉길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장절 및 전승 기념식장에 폭탄을 투척하여 국제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가 의거 직전에 <두 아들에게 남긴 유서>에는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여 에디슨 같은 발명가가 되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윤봉길이 조국 독립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희생하면서도 두 아들은 과학자가 되기를 소망하였던 것처럼 역사의 이면에는 다양성이 존재합니다.

광복은 '과거의 종결'이 아니라 '미래를 여는 책임'입니다. 우리는 오천년의 역사를 공유한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역사를 이해하는 데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지만, 그 다름이 국민을 분열시키는 정쟁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역사전쟁을 끝내야 합니다. 그 바탕 위에서 국민통합을 이루고, 진정한 광복의 완성인 통일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광복 80년을 맞이한 우리가 다져야 할 사명입니다.'

2025년 8월 15일 독립기념관장 김 형 석























====
찬반여부를 떠나 이런 이야기를 민주당 정부에서 할 수 있기때문에 건설적인 대화가 가능하다.
박유하씨의 책이 민주당 정부에서 출간됐으면 지금같은 막장극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해방은 자력투쟁의 결과라는 망상은 박근혜 때 시작되었다

(추신에 추가한 내용)
정당들이 역사를 놓고 전쟁을 벌이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강자의 전리품으로 전락한다면 역사는 한낱 소설로 격하될 뿐이다.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지만 바로 그런 태도 때문에 역사학조차 "주장하는 것이 역사요 선"이라는 악성 상대주의적 세계관에 사로잡혀 길을 잃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좌파정당은 종종 역사를 무기로 삼는다. 아니 전체주의자들이 그렇다고 바꿔 불러야 한다. 그들은 '대화'이기 때문에 과거를 고쳐 오늘의 투쟁의 동력으로 삼으려는 유혹을 받는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해방의 과정이다. "해방은 연합국 전쟁의 결과요 산물"이라는 독립기념관장의 주장에 대해 민주당은 "사퇴하라"며 반발하고 있다. 아니 이 엄연한 이야기에 무슨 토를 달며 시비를 건다는 말인가.

1. 문제는 87헌법이다.
일단의 임정주의자들이 헌번 개정 과정의 핵심 통로에 접근해 헌법 전문에 '상해임정 법통'이라는 단어를 집어넣는데 성공한다. 이자들은 일본에 유학가 학도병이 되자, 탈영이라는 방법으로 해방후 정국에서 명성을 날렸다. 그들은 왜 학도병으로 지원해 갔을까.

2. 해방은 투쟁을 거쳐 자력 쟁취했다는 주장의 진실여부
이 주장은 내가 기억하기로는 박근혜 대통령의 8,15기념사가 처음이었던 것같다. 이명박 대통령은 상해임정을 거론하거나 독립운동을 자찬하면서 내부의 요인만을 말했을 뿐 세계전쟁이나 일본의 패전 등은 언급하지 않았다.

3. 이것을 박근혜 대통령이 "해방은 우리가 (일제와) 싸워서 쟁취한 것"이라고 (아마도 2016년 연설에서부터) 명백하게 언급하고 말았다. 오류의 출발이었다. 박의 오류는 문재인 정권이나 이재명 정권에서 되풀이 되고 있다.

4. "우리가 싸워서 독립을 쟁취했다"는 주장은 검증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세계인의 웃음거리가 된다. 식민지 조선은 미국의 '작은 소년(리틀 보이)'과 '뚱뚱이(팻맨) 두방에 일본이 두 손을 들면서 아무도 모르게, 마치 도둑처럼(이는 함석헌 선생의 표현이다) 주어졌다.
투쟁하여 쟁취한 일을 아무도 모를 수가 없다. 투쟁 지도부가 팡프르를 울리면서 역전의 용사들을 앞세워 개선해야 마땅하다. 꼭 무력투쟁이 아니어도 투쟁이랄 수 있다고 주장하려면 무언가의 구심점 혹은 정치적 실체가 있어야 한다.

5. 그러나 투쟁의 구심점도 주체도 지도부도 없었다
해방 직후 남한은 미군의 군정으로, 북한도 소련군의 지도하에 장악되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남북이 모두 아무런 구심의 준비도 없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쟁취한 나라를 다시 외국 군대의 점령과 통제에 맡긴다는 우스운 말을 하자는 것인가.

6. 일본 총독부는 여운형에게 혼란을 막기 위해 건준의 준비를 요청할 정도였다. 스스로 쟁취한 투쟁의 결과가 여운형에게 상당한 자금과 권력을 쥐어주면서 일본인 퇴로와 거주의 안전을 부탁하는 지경이었다는 말이 안되는 말이 된다. 상해임정은 어떤 조직적 군사 역량도 없었기 때문에 아예 접촉의 대상도 아니었다.

7. 상해임정은 처음부터 대표성도 없었고 분열과 사실상 와해, 지도부 부패, 무분별하게 테러리즘에 경도된 노선 등이 문제로 지적되어 정치적 자격과 지위를 전혀 갖지 못했다. 그 때문에 결국 조직의 이름 아닌 개별 자격의 자유 귀국만 가능했던 것이다.

8. 일본조차 불시에 맞은 항복이었다. 그 때문에 식민지내 일본인 사회는 적지않은 혼란이 발생했고 뒤늦게 지역마다 일본인 자치회같은 것들이 조직된다.

9. 식민지 조선 사회도 첫날엔 조용했다.
해방의 함성이 터져나왔다고 가르치지만 첫날에는 서로 눈치를 보면서 조용했다. 이것은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한 국가의 모습이 아니었다. 일본서 병사한 이구의 장례도 동대문 운동장에서 성대하게 잘 치러졌다.

10. 광복군의 조선반도 진격이 준비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질문은 실로 상해 임정에 대한 오날날의 상상이 겹쌓인 결과였다.
우선 광복은 장제스가 정해준 단어였다. 장제스는 "조선인으로 구성된 광복군이 포함된 중국군"을 투입해 조선을 해방하고 다시 청제국 시대의 속국의 지위로 돌려놓는다는(광복) 허황된 계획을 세웠을 뿐 실제로 실행된 적이 없고, 일부 미군에 편성돼 한반도 진입을 준비한 소규모 전투 조직이 있었지만 역시 실행된 적이 없다.
장제스는 이를 위해 자신도 자금난에 허덕이면서 김구와 상해임정 광복군 등에 적지 않은 자금을 지속적으로 지원해서 상해임정을 극력 유지했던 것이다. 속국을 되찾기 위해?

11. 이것을 독립역량이 누적되면서 자력투쟁을 통해 해방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12. 오히려 일본군에 포함된 조선인들 문제로 한국은 자칫 동경전범 재판에서 전범국가로 몰릴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조선은 일본의 항복조건을 규정한 샌프란시스코 협정의 서명 당사자조차 되지 못하는 비운을 겪었다.
자력투쟁? 독립을 쟁취했다는 주장은 국제사회를 우롱하는 망상이다.

13. 샌프란시스코 협정의 당사자는 당연히 미국, 중국(대만), 필리핀,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버마, 스리랑카등 아시아국들과 미국 캐나다 쿠바 멕시코 등 미주국가들, 영국 프랑스 터키 등 모두 49개국이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영국 등에 강력히 항의하였으나 협정 서명 자격을 얻지도 못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부풀릴 일조차 아니다.

14. 차제에 김구를 영웅화하고 해방전후사를 전설로 만든 과정은 이승만을 질시했던 박정희의 다양한 노력 덕분이었다. 김구와 상해임정을 계속 부풀려서 무언가 항구적인 투쟁조직으로서의 정규조직 더구나 준정부적 성격을 가진 한국인의 단일적 투쟁조직인 것처럼 분식하면서, 이를 기초로 다시 자력투쟁론을 만들어 이어 붙이는 것은 실로 오류에 오류를 가설하는 것이다. 요새는 소설로도 안쓰는 몽환적 작법에 불과하다.

15. 김구에 대한 영웅화를 넘어서 최근 김구에 대한 실체도 서서히 구체화되고 있다.

16. 문제는 해방이 주어진 선물이나 행운이라는 초라한 정황을 못견디는 점이다. 그러나 그런 사정이 지금 우리들이 만들어 올린 대한민국의 위대성을 단 일획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들은 모른다.

17. 족보가 거창하지 않아도, 조상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하는 일과 행동이 진정 우리를 규정하게 된다.

추가1: 루부르 박물관에서 어떤 한국 교수가 우리 조상은 저런 위대한 그림 한장조차 남기지 못했다고 개탄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말했다. "무슨 말씀. 저 그림을 열심히 찍고 있는 사람들이 들고 있는 저 수많은 갤럭시 핸드폰을 보세요. 조상은 위대하지 못했지만 지금 우리는 위대한 국민이다"
나는 조상의 역사를 부끄럽게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의 우리가 위대한 것에 도전하는가 아닌가가 하는 그런 문제인 것이다.

추가 2;
위 10번 항목에서 썼듯이 장제스는 김구를 통해 한반도에 대한 구 청 제국의 지도력과 장악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에 관심이 지대했다. 때문에 김구와 상해임정을 유지하는데 거금을 주었고 광복군이라는 내부조직을 중국군 내에 두도록 독려 했던 것이다.
이런 정황은 김구에게 파견된 유어만의 보고서에도 잘 나와있듯이 김구로 하여금 이승만의 부통령으로 가면 어떻겠는지를 타진하는 경교장의 대화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김구는 북한과의 연공노선으로 돌아서면서 그리고 암살사건이 터지면서 김구는 장제스에게 실망만 안기게 된다.
장제스는 49년 본토에서 완전히 축출되기전 진해로 찾아와 이승만과 표면적으로는 반공아시아연대를 구성하자는 제안을 들고 정상회담을 갖게 된다. (8월초)
여기서 장제스는 중국국민당의 도피처로 제주도 할양설, 인천항구 중국에 허용 등의 요구도 내놨다고 하지만 이는 비공식적인 풍문. 김구의 정치역정은 장제스의 청 제국적 발상을 제외하면 이해불가한 측면이 많음.
jkj
===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