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23

철학 - 나무위키

철학

최근 수정 시각 : 2016-03-23 
그리스어 : φιλοσοφία
라틴어 : Philosophia
영어 : Philosophy 
한자 : 哲學
"젊은 사람이 철학하기를 주저해서는 안 되며, 늙었다고 해도 철학에 싫증을 내면 안 된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마음의 건강을 얻기에 너무 이르거나 늦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학할 나이가 아직 오지 않았거나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는 사람은 행복을 위한 나이가 자신에게 아직 오지 않았거나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따라서 젊은이건 늙은이건 철학을 탐구해야 한다."
에피쿠로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첫 문장. 오유석 역.

모든 학문을 통틀어 스스로가 무엇인지 묻는 유일한 학문.[1]
모든 서구 학문의 어머니.[2]

1. 기본적 의미2. 철학의 어원3. 철학의 역사
3.1. 서양 철학의 역사
3.1.1. 철학 이전의 시대3.1.2. 고대 철학3.1.3. 중세 철학3.1.4. 근대 철학3.1.5. 19세기 철학3.1.6. 20세기 철학
3.2. 동아시아 철학의 역사
3.2.1. 중국 철학3.2.2. 불교 철학3.2.3. 한국 철학3.2.4. 일본 철학
3.3. 인도 철학의 역사
4. 철학의 대상5. 철학의 특징
5.1. 의심하는 학문5.2.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학문5.3.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원리를 설명하려 하는 학문5.4. 본질을 추구하는 학문5.5. 말장난하는 학문?
6. 철학자7. 철학서8. 철학의 분류
8.1. 순수철학8.2. 응용철학8.3논리학
9. 교육과정/시험에서의 철학

1. 기본적 의미[편집]

근본적인 믿음의 근거에 관한 비판적 검토이자 그러한 믿음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기본 개념들에 대한 분석.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근본은 문제의식에서 비롯된다. "모든 현상과 사물에 대해 왜 그럴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면 또 의문이 생기고... 하는 과정인데, 그래서인지 해답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질문 자체에도 상당한 무게를 두고 있다. 이러한 문제 의식 덕분에 철학은 다른 수많은 학문들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과학 역시 철학의 한 분야에서 시작하였다. 당장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업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보자. 아이작 뉴턴의 유명한 저작인 '프린키피아' 의 풀네임인 Principia Naturalis Philosophiae Mathematicae은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뜻이다. 실제로 자연과학은 꽤 오랜 시간동안 자연철학이란 이름으로 불렸으며, 과학이란 단어가 생긴 것은 뉴턴이나 보일 등에서 100년은 지나 마이클 패러데이의 친구인 휴얼(1794~1866)이 패러데이의 연구성과 및 그동안 발달해온 학문분야를 정리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후이다[3]. 뉴턴같은 똑똑한 사람이 어? 그러고보니 사과는 왜 위로 솟구치는 것도 아니고 아래로 떨어지는 걸까?라는 의문을 품지 않았더라면 만유인력 법칙 같은 게 생겨나진 않았을 테니까. 자연과학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법학과 신학, 의학 등 중세시대에 존재했던 학부를 제외한 학부의 박사는 Philosophiae Doctor(Ph.D., 라틴어로 직역하면 철학 박사)라고 부른다. 철학과 박사도 Ph.D, 물리학 박사도 Ph.D다.

2. 철학의 어원[편집]

철학의 영어 명칭 'Philosophy'는 고대 그리스어 필레인(Φιλιν, 사랑하다)와 소피아(σοφία, 지혜)가 합쳐서 된 φιλοσοφία라는 단어가 변한 Philosophia라는 라틴단어에서 변한 영단어로, 직역하자면 지혜를 사랑한다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4][5]철학이라는 용어는 Philosophy를 다시 일본의 니시 아마네라는 학자가 希哲學으로 번역하여 사용한 것이다. 희철학. 즉 '지혜로워지기를 바라는 학문', '현명해지기를 바라는 학문' 정도의 뜻이 되겠다[6]. 희철학에서 다시 희(希)자가 떨어져 지금의 철학이란 용어가 정립된 것이다.

즉, 철학이라는 용어는

φιλοσοφία(고대 그리스어) → Philosophia(라틴어) → Philosophy(영어) → 希哲學(일본에서 한자로 번역) → 哲學(希가 떨어져 나감)

의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용어인 것이다. 때문에 '철학'이라는 단어가 그 본래의 의미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는 의견도 많고, 실제로도 사학(思學)이나 사상공학(...) 등 다른 낱말로 풀어쓰자는 제안이 있었으나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철학자들이 왠지 철학뿐 아니라 다른 것도 이것저것 막 건드리는 경향은 철학의 근본과 정의를 생각해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현재의 철학이 다른 학문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원래 철학의 하위 분야로 있던 다른 학문들이 점점 발전해 감에 따라 철학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그 분야만의 방법론을 점점 필요로 하게 되고, 이러한 경향이 점점 누적되어 가면서 그리고 원래 철학에서 쓰던 방법론으로 연구하기에는 학문의 내용이 점점 세부화 되어가고 자신만의 논리를 구축하게 되는 바람에 지금은 겉보기로는 철학과 다른 학문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다.

여담으로 현대 기준으로 보면 서양 철학자들 대부분은 수학자, 과학자를 겸업하고 있었고 동양 철학자들 대부분은 정치가, 사상가를 겸하고 있었다.[7]

오늘날은 주로 대학과 대학원에 철학과가 개설되어 철학을 전문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3. 철학의 역사[편집]

철학은 흔히 모든 학문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철학의 흐름이 아니라 철학사 자체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으면 철학사 서적을 참고하라.

3.1. 서양 철학의 역사[편집]

3.1.1. 철학 이전의 시대[편집]

오늘날 철학사를 저술할 때 탈레스부터 저술하는 책은 드물다. 왜냐하면 탈레스의 철학에 대한 자료가 거의 전무할 뿐만 아니라, 고대 철학을 탄생한 바탕에 대해 먼저 다룰 필요가 있음을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기 때문이다.

보통 이러한 맥락에서, 현대의 수많은 철학사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저자로 알려진 호메로스에서 시작된다. 호메로스가 철학과 관계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플라톤 학파,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소피스트들의 저술 중 어느 저작을 보아도 호메로스에 대한 언급은 빼놓을 수 없다. 그 철학자들이 호메로스에게 동의하는가, 아닌가는 이미 문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호메로스 외에 접할 텍스트가 없었으니까. 그리스에서 이루어진 고대 철학을 주도한 학자들은 모두 호메로스를 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점에서 호메로스는 모든 그리스인, 나아가 모든 서양인들의 스승인 것이다. [8]

다음으로 거론되는 것은 헤시오도스인데, 그는 카오스, 가이아, 에로스(거기에 더 추가하자면 에레보스, 닉스, 헤메라, 아이테르)로부터 시작되는 자신의 신화적 내러티브를 통해 당대인의 세계 인식 방법을 후대에 전했다.

보통 철학사에서 더 거론하자면 오르페우스 교단이 언급되는데, 그들의 종교적인 양식과 신화 체계는 기독교에게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3.1.2. 고대 철학[편집]

고대 그리스에서는 자유로운 분위기로 인해 일찍부터 철학이 발달했고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소크라테스 이전에는 자연철학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유명한 인물로는 탈레스가 있었다. 그전까지 사람들은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 신화적인 설명을 제시하였다.[9] 그런데 탈레스는 모든 것의 근원은 물이다.라는 지극히 단순한 말로 세계를 신화적인 것 대신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식의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더불어 탈레스의 말은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묻기 이전에, 세상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즉 가장 철학적인 탐구방법인 '근원의 탐구'를 제시했다. 이런 연유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탈레스에게 지어 준다. 탈레스 이후로 생겨난 자연철학자들은 이렇듯 인간사보다는 세계를 이루는 근원적인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논리에 기반한 사고보다는 드러난 그대로의 현상을 관찰하고 추측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윽고 철학의 가장 크고 중요한 문제가 제기된다.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론과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론이 그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있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만물의 근원이 존재라면 그것은 변화할 수 없고, 하나라고 이야기하였다. 이와 상반되게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에 두번 들어갈 수는 없다.는 말로 만물유전(萬物流轉)을 주장한다. 이 두 상반된 사유는 이후 서양철학 전체를 가로지르는 큰 두 흐름이 된다.

그리스의 유망한 폴리스였던 아테네에서는 민주 정치가 발달하여, 정치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어필하고 세력을 얻으려면 뛰어난 언변술이 필요했다.소피스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언변술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에게 돈을 받고 강의를 했다. 소피스트들이 주로 가르치는 것은 진지한 학문이기보다는 말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수사술에 불과해서 소크라테스와 같은 이들에 의하여 궤변가로 낙인찍혔다. 하지만 소피스트의 진정한 의의는 그리스 철학을 자연철학에서 인간 철학으로 변화시켰다는 데 있다. 게다가 철학의 본질인 논리를 발굴하여 내었다. 다만 논리를 궤변에 이용할 뿐이지 그것을 통해 철학적 진리를 탐구할 생각이 없었을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저작이 남아있지 않고 다만 제자 플라톤의 저술에 등장한다. 플라톤의 저술은 모두 대화체로 되어 있어서 자신의 주장을 어필하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빌리곤 했기 때문에 어떤 부분이 소크라테스 자신의 주장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는 델포이 신전에 써 있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문구를 인용하여 아테네에 만연한 미신과 타락을 비판하였다.그는 소피스트들과 시민들의 반발로 사형당하고 말았고 저작이라 할 것도 없지만 철학자와 (비유적으로) 동의어와 같이 사용된다. 이를테면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그의 학풍을 이어받았다. 그의 저술은 모두 대화체로 되어 있고 문학적으로 뛰어나다. 또 엄밀한 논리보다는 비유와 상징으로 철학을 논하였다. 이데아는 그의 철학의 핵심으로 등장하는 개념이다. 이데아는 언어와 사물의 관계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세계가 존재하는 의미까지 설명한다. 감각을 불신하였지만 자연 철학에 흥미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의외로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아 영혼불멸설을 믿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카데미아라고 불리는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academy의 어원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이나 그에 대한 반발로 뛰쳐 나갔다. 그는 플라톤의 학문과 대립하여 의식하였지만 실제로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철학에서 나타나는 에이도스란 개념도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는 플라톤이 잘 다루지 못하였던 논리학을 발달시켰다. 19세기가 되기까지 논리학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칭하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각종 학문의 분과와 그 명칭을 그가 거의 만들다시피 하였다. 플라톤과 달리 감각을 어느 정도 신뢰하기 때문에 자연 철학에도 관심이 많았다.(물론 현대에 와서는 엉터리이지만...) 또한 스승처럼 리케이온이라 불리는 교육기관을 설립하기도 했는데 이는 흔히 리세움이라 불리는 교육과정의 어원이 된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와 또 그의 제자는 그대 그리스 철학의 정점을 찍어서 서구 학문의 기둥을 세웠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시기에 이르러 고대 그리스 철학이 최고조로 발달하였지만 소크라테스에 이르러 이미 아테네는 쇠락하고 있었고 아리스토텔레스 시기에는 거의 몰락을 맞이한 채였다.

그 후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이나 로마 제국 시기를 거치면서 쾌락추구와 이로 인해 사회적 문제가 심해지면서[10]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11]에 의해 금욕과 절제,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는 학파들이 유행했고 제정 후기에는 신플라톤주의도 나타났다.

로마 말기, 기독교가 등장하면서 그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졌다. 유물론을 주장하는 그노시스파와 친기독교적인 테르툴레아르누스가 대립했는데 이 논쟁은 후에 아퀴나스 때까지 해결되지 않는다.

3.1.3. 중세 철학[편집]

4세기 무렵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며 고대 그리스 철학은 기독교 안으로 포섭된다. 특히 기독교를 믿는 이민족들이 교회는 공격하지 않는 암묵의 룰을 세우면서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기독교를 믿는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때는 제국 전역이 불바다가 되면서 많은 기록들이 소실되어 서유럽의 철학은 기독교의 교리를 증명하는 '시녀'의 역할에 치중하게 된다.[12] 카롤루스 대제와 같이 글을 모르는 야만인 군주들 밑에서 성직자들은 당시 유일한 지식인이다시피 하였고 고대 유산을 근대인들에게 계승하여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기독교는 극초창기부터 그리스 철학을 수용하면서 출발하였는데, 사도 파울로스의 경우는 그 자신부터가 그리스 철학에 능통하였으며, 요한복음의 경우 1장부터 로고스 개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였다.[13] 또한 서기 2세기 교부인 오리게네스 아다만티우스는 본래 그리스에서 호메로스의 작품을 해석하는데 쓰던 '알레고리아' 개념을 성경 해석에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장 애호되던 철학은 플라톤주의였고,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초기 교부들도 플라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극단적으로 플라톤 철학을 추구할 경우 영지주의 이단으로 변질될 수 있기에, 기독교에서 플라톤을 전적으로 수용한건 아니다. 기독교적으로 플라톤을 재해석하여 수용하였다고 표현하는게 정확할 것이다. 또한 기독교는 초창기부터 유대교와 구분되던 독특한 교리인 삼위일체론을, 철학적으로 엄밀하게 합의하기 위해서도 그리스 철학의 개념을 대폭 수용한다. 삼위일체론을 엄밀하게 합의하는 과정에서, 그리스 가면극에서 쓰던 용어인 페르소나(위격)를 도입하고 실체, 본성, 본질 등의 어휘를 사용하게 된다. 이러한 초기 기독교의 철학을 교부 철학이라 하며, 대략 8세기까지를 그 시기로 꼽는다. 교부 철학은 전체적으로 '기독교는 어떠한 면에서 다른 종교와 구분되는가?', '하느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에 주목하였다.

이후 교부 철학은 스콜라 철학이 계승한다. 스콜라 철학은 다소 불분명하게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진다. 스콜라 철학은 교부 철학과 비교할때 신학과 철학의 분리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14] 그렇기에 신학과 구분하여, 철학 고유의 문제 등을 다루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중세 철학의 최대 떡밥 중 하나인 보편논쟁이 생겨난다. 보편논쟁은 실재계에 대한 보편 개념의 관계, 즉 우리의 추상적이며 보편적인 인식과 우리의 인식밖에 있는 사물과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의 문제에 관한 논쟁이다. 쉽게 말하자면, 과연 보편(혹은 보편자)이라는게 정말로 '실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는 없는 것인데 그냥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에 불과한지에 대한 논쟁이다.[15]

초기 스콜라 철학의 경우, 안셀무스(Anselmus) 등의 초기 스콜라 철학자들은 여기에 대해 극단적 실재론을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개체들에 앞서서 ‘개체들 이전의 보편자’(universale ante rem)가 실재한다. 여기에 대해 소수이지만 유명론이라는 반대 의견이 존재했다. 로셀리누스를 비롯한 유명론자들에 의하면, 보편은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 뿐이며, 실재하는 것은 개체들뿐이다. ‘개체들 뒤의 보편자’(universale post rem)라는 관점에서 보편을 인간이 만들어낸 이름으로만 볼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신앙과 이성은 일치된다고 보았다.

중후기 스콜라 철학에서는 신앙과 이성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신앙은 이성을 보완하고 완성시킨다고 보았다. 또한 이 시기에 이슬람 세계에 남아 있던 고대 철학[16]이 라틴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이 시기엔 교리와의 이질성으로 인해, '신학에 쓰기에는 위험하고, 철학으로서는 흥미롭긴 한데 뭔가 찜찜하다'는 다소 애매한 반응을 얻었다. 하지만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대 알베르토)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적극 수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그의 신학과 철학에서 상당 수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였다. 그리고 알베르투스의 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계승하여 <대이교도대전>, <신학대전> 등의 그의 저서에서 스콜라 철학을 집대성함과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적극 인용한다. 그리고 알베르투스와 아퀴나스의 노력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로소 기독교 신학 및 철학에서 본좌 대접을 받게 된다.

알베르투스와 아퀴나스는 보편논쟁에 있어서, 중도적 실재론을 주장했다. 그들에 의하면 보편 자체들 안에는 아무런 실제적 및 실질적인 보편들이 없지만, 인간의 이지(理智) 속에는 실질적인 보편개념들이 있으며, 이 개념들은 사물의 진정한 종류들에 속한 개체들의 실재적인 유사점들 내부에 하나의 객관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보편은 천차만별한 개체들에 내재하는 본질적인 것에 뿌리박고 있다는 의미에서 ‘개체들 속에 있는 보편자’(universale in re)라고 부른다. 또한 보편은 신의 정신 속 이데아로선 개체들에 앞서고 형상으로선 개체들 속에 추상적인 마음속의 개념으로서는 개체들 뒤에 실재한다, 이 중도적 실재론은 가톨릭 철학에서는 현대까지도 가장 대세를 이룬다.

중후기 스콜라 철학은 알베르투스 등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철학과 신학이 분리되고, 자연철학 즉 후대 자연과학의 원형이 되는 학문이 출현한다.[17] 그러나 철학(자연철학)이 신학과 대립한다는 식의 관점은 비주류였고, 이 이질적인 학문들은 서로를 돕고 보완한다는 관점이 우세하였다.[18] 
이 시기 오컴의 면도날로 유명한 '오컴의 윌리엄' 역시도 활약하였다. 오컴은 보편논쟁에 있어서 유명론적 입장을 취했고, 후대 경험주의 철학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그의 철학은 로저 베이컨 등의 소위 '오컴주의자'들에게 계승된다. 로저 베이컨은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에 있어서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한편 중세 말기에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면서 그리스어 원본들이 직접 서구 지식인들에게 전달되게 된다.

3.1.4. 근대 철학[편집]

중세철학의 기조를 무너뜨리고 다음 시대의 포문을 연 학자로는 일반적으로 르네 데카르트와 토머스 홉스가 꼽힌다. 간혹 한 세대 앞의 프랜시스 베이컨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데카르트는 의심을 근간으로 하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장 자크 루소는 인간의 평등한 자연 상태를 전제로 하는 '사회계약론'을 통해 결과적으로 계시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적 사유체계에 균열을 내었다. 이 두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재미있는 아이러니는, 본래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신의 존재를 명징하게 증명하고자 했고, 홉스는 사회계약론을 가지고 절대왕정을 옹호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고심하여 창안한 학설이 나중에는 주인의 의도와 정 반대의 결과를 내놓은 셈.
이들의 영향으로 인간의 이성이 가진 능력을 통해 세계를 탐구하려는 경향이 강해지는데 이는 주로 영국에서 일어난 경험론과 이에 반발하여 주로 독일에서 일어난 합리론이라는 두개의 틀로 분할되어 서로 발전하게 된다. 영국에서는 베이컨의 영향으로 경험론이 대세를 타 로크버클리에 의해 계승되었고 대륙에서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라이프니츠 등이 합리론을 계승, 발전시켰다. 이 시기 철학은 인간 중심적으로 돌아서게 되었고 인간의 이성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19] 
이후 이마누엘 칸트라는 거인에 의해 근대 철학은 집대성된다. 그는 합리론과 경험론을 아우르는 거대한 체계를 만들고 그 한계를 정의하였다. 그의 사상은 계몽주의의 정점이 되었으며, 그 이후의 모든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3.1.5. 19세기 철학[편집]

부르주아라는 계급의 성립은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철학은 18세기까지도 남아 있던 종교와의 연을 완전히 끊어버렸고, 산업 혁명을 계기로 다른 학문들과도 분화되기 시작되었다. 전 시대를 집대성한 칸트의 철학은 세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고, 결국 모두 칸트 사상과 대립하게 된다. 첫번째 흐름은 칸트 특유의 관념론을 발전시킨 방향으로, 이 흐름은 독일 관념론으로 발전하여 피히테, 셸링, 헤겔로 이어진다. 두 번째 흐름은 관찰이 가능한 감각으로만 철학의 범위를 국한시키자는 칸트의 생각을 확대한 흐름으로, 이는 실증주의, 유물론으로 발전하게 되어 콩트, 밀, 스펜서까지 이어지게 된다. 마르크스의 경우는 앞의 두 흐름을 섞은 '유물론적 변증법'을 제창하였다. 마지막 흐름은 칸트 철학의 특징 중 하나인 이원론적 구분 자체에 저항하는 흐름으로, 이는 합리주의 자체에 반발하는 흐름이 되어 낭만주의, 생철학 등으로 발전하여 프리드리히 니체에 이르게 된다. 물론 이러한 요약은 19세기 철학 전체에 대한 하나의 분석일 뿐이며, 시대가 점차 현대에 가까워짐에 따라 철학 사조의 경향성을 하나의 흐름으로 묶는 것이 점차 어려워짐에 유의해야 한다. [20]

19세기의 전반에는 프랑스 혁명의 여파와,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전 유럽을 휩쓰는 사건으로 인해 민족주의가 대두한다. 이 무렵에 활동한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역사에 대한 변증법적 해석과, 게르만 민족주의 등의 개념을 주창한다. 특히, 변증법적, 민족주의적 사관은 피히테 등을 통해 독일 관념론의 밑바탕을 이루게 된다.
19세기 중반에는 철학이 기존 종교, 국가 체제 등과 크게 멀어지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포이에르바흐의 테제를 시작으로 해서, 그의 테제에 대한 카를 마르크스의 해석, 그리고 마르크스와 베른슈타인[21]의 논쟁 등이 사회주의의 초석을 놓게 된다. 특히, 마르크스의 등장 이전에도 실험적이거나 이상주의적인 형식의 사회주의(이 쪽은 아예 아나키즘 중 조합주의 등과 유사한 면을 보인다.)가 시도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연구 시도와 함께 철학에서 사회학정치학 등의 분과학문들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다. 오귀스트 콩트는 처음으로 '사회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으며, 제레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은 공리주의와 자유주의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철학과 종교의 결별은 포이에르바흐의 테제로 시작해, 프리드리히 니체에 의해 이루어진다. 니체는 종래의 기독교적 선/악 이분법, 더 나아가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같은 형이상학적 철학이 인간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라 보았으며, 그에 따라 이분법적 사고방식("노예의 도덕")에서 벗어나, 개개인이 자신의 윤리와 철학을 스스로 세워 나가는 "위버멘쉬"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창했다.[22] 기존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이 가장 크게 함축된 그의 발언이 유명한 신은 죽었다이다.

3.1.6. 20세기 철학[편집]

20세기 들어서 서양 철학은 과학과 수학의 발전에 영향을 받아 매우 큰 변화를 맞이하기 시작한다. 그전까지 중시되던 인간의 이성은 심리학이 무의식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면서 그 절대적 입지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특히 두 차례의 끔찍한 세계대전은 인간의 이성과 과학에 의한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는 그전까지의 믿음을 송두리채 뒤집어 놓았다. 현대 철학은 환경 철학이나 언어분석철학포스트모더니즘까지 그 다루는 범위가 광대하지만 현대 이전의 철학들이 결국 설명하는 데 실패한 부조리들을 탐구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에 중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3.2. 동아시아 철학의 역사[편집]

3.2.1. 중국 철학[편집]

중국에서 철학이란 개념은 서양에서 일컫는 철학과는 성격을 달리하며 대체로 실용적이고 도덕적인 성향을 띈다. 그렇기에 서양철학 전공자들은 종종 동양 철학이라는 용어 사용을 꺼려하며, 그 대신에 동양사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서양철학에는 증명이라는 개념이 있지만[23] 동양철학에서는 '증명'이 중시되지 않는다. [24] 그래서 철학이라는 개념은 동양과 서양에서 차이를 갖는다. [25] 

서주가 중국의 지배력을 상실한 이후 중국 대륙은 윤리 도덕이라곤 없는 희대의 막장 상태였다. 고사성어를 공부해 본 사람들은 이 당시에 얼마나 많은 막장 에피소드가 있었는지를 알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죽이고 국가들은 민초의 고생과는 상관없이 전쟁을 계속했으며 신의는 박살나고 윤리는 죽었고 정의는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현실에 지옥이 도래해버렸다.
이 시대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맹자의 비판이 이렇다.
"땅을 빼앗기 위해 싸우는 통에 사람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고, 성벽을 빼앗기 위해 싸우는 통에 사람 시체가 성안에 가득하다."
『맹자』 중

이 시기 제자백가라는 집단이 나타나는데 이들의 목표는 단 하나, 이렇게 막장이 된 중원의 혼돈을 멈추고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였다. 즉 그리스철학이 세상에 대한 '왜?'라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면, 중국철학은 어떻게 이 지옥을 끝장낼까?라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에서 출발한 학문이다. 그리고 이 지옥을 종결시키기 위해서 부국강병, 정교한 법 시스템, 고도의 훈련을 받은 지식인들의 정치공동체, 백성에 대한 보편복지, 권력의 근본을 백성에게서 찾는 움직임, 침략전쟁에 대한 적극적 반대 등 온갖 대안들이 나오게 된다.[26] 그러나 어떻게 질서를 자리잡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제자백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공자를 중심으로 한 유가들은 인의와 덕에 의한 통치를, 노자를 비롯한 도가는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도에 의한 통치를, 법가들은 법에 의한 통치를, 묵가들은 겸애 사상에 바탕을 둔 보편적 복지를 주장했다. 또한, 전란의 시대에 대한 해결책으로 아예 통치 개념과 국가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현대의 반전 평화주의나 아나키즘에 가까운 주장 역시 등장한다. 장자묵자[27]양주 등이 이러한 성향을 가진 사상가들로, 이들의 후학은 제 왕조 직하학사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당시의 유가 및 법가 사상과들과 열렬한 키배 비판과 논쟁을 거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왕조의 통일 이후 이들에 대한 기록은 반달리즘 많이 남지 않거나, 상당히 비판적으로 서술된 것만 남게 된다. 물론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에 대해 남겨진 비판적 서술이 춘추/전국시대 당대에 이들이 누린 인기와, 이들의 사상이 가진 특징을 가장 확실하게 알려주는 사료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맹자의 경우 묵적/양주를 함께 비판하는 텍스트를 남겼는데, 이 텍스트 덕분에 후세의 연구자들은 당대에 묵자의 겸애론과 양자의 위아론이 가진 위상과 그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는 상앙, 이사의 법가식 통치에 의해 질서가 잡혀 강성해진 진나라가 통일왕조를 세우면서 법가가 대세를 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직 지옥은 끝나지 않았다. 진시황과 이사의 냉혹한 법가식 통치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해 진 왕조와 함께 단명했다. 이후 한나라가 건국되면서 초기에는 도가적 무위 통치가 시행되었으나, 동중서 이후 유가의 관학화를 통하여 중국의 주요 통치 철학으로 자리매김한다.[28] 결국 유학이 춘추전국시대부터 이어진 지옥을 끝장내버리고 질서를 확립하면서, 제자백가중 압도적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이다.

당나라 시기에도 유학은 그 위치가 굳건했으나 이 시기부터 중국이 국제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불교같은 외래종교가 유행하면서 새로운 철학계의 경쟁자로 떠오른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당나라는 멸망하면서 또다시 혼돈의 시기가 오자 유학은 위기를 맞이하는 듯 했다. 그러나 송 시기 고전 찾기 운동으로 다시 유가는 부활하기 시작했고 이 시기 유학 역사상 공자와 함께 더불어 빠도 많고 까도 많기로도 유명한 주희가 주자학을 창시하면서 불교를 주류에서 밀어낸다. 그러나 주희의 주자학은 동시기 심즉리설을 주장한 육상산에게 지나치게 이론적이라는 비판도 받았으며 명 시기에 왕양명도 육상산을 계승한 양명학을 창시하였다.

그리고 청나라가 건국되면서 유교는 형이상학적인 기존 학풍을 버리고 고증학 시대에 접어든다. 하지만 청 말엽 아편전쟁이 벌어지면서 중국 철학은 역사의 격동에 휩쓸리게 된다. 처음에는 '중체서용' 정신으로 개혁하려 했으나 그럼에도 중국은 서구 열강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근현대 중국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유학이 서양 철학에 비해 열등해서 이렇게 된 것이니 유학을 버리고 서양 철학으로 무장하자!!는 주장이 퍼지기 시작한다. 소수의 학자들이 유학과 서양철학의 공통점을 찾으며 이것이 지나친 것 아니냐며 반박해보기도 했지만 대세는 거스를 수 없었다. 중국 유학이 다시 재조명을 받는 데에는 긴 세월이 걸렸으며, 무엇보다 일부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으로 이 주장을 하기도 한다.

한편 중국은 기존의 유학을 폐기하고 중국인들을 이끌 새로운 사상으로 어떤 것이 좋은지 찾기 시작했다. 영미권의 철학자들이 중국에 와서 강연을 하기도 했으나 영국은 아편 전쟁으로 국민 감정이 남아 있었고 당시 중국은 침략받던 현실이였기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이때 러시아에서 공산 혁명이 일어나면서 러시아의 공산주의가 중국으로 수입되었고 공산주의의 반제국, 반계급 사상은 당시 중국의 현실과 맞물려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29] 소련이 중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모조리 파기하는 등 공산주의 확산에 노력을 기울였고 천두슈리다지오 등의 적극적인 지지로 공산주의는 중국 지식인들의 중심 사상이 된다. 그리고 결국 국민당과의 전쟁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중국은 공산주의 이념이 모든것을 지배하는 시대가 온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등을 거치면서 중국에서는 과연 과거 유학을 무조건 타파한 것이 옳은 것이였나 하는 회의가 나오기 시작한다. 특히 서양 철학계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서양 철학자들이 중국 철학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30] 중국 철학계에서는 반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현대의 중국은 과거 자신들이 잃어버렸던 중국 철학을 다시 복원, 연구하고 있다.

여담으로 현대 중국철학은 물론 중국 학문의 중심지는 베이징에 있는 베이징대학이다. 베이징 대학의 위상은 5.4 운동시기에 중심이 되면서 공고해졌고 대부분의 중국 지도자들이 이곳 출신이기도 하다.

3.2.2. 불교 철학[편집]

불교는 석가 족의 왕자인 석가모니가 부처가 되면서 세워진 종교이다. 불교의 내용은 기존 브라만 교의 인간 불평등을 부정하고 브라만 교의 신화도 부정하였다. 한때 불교는 아소카 왕의 도움으로 인도 전역을 지배하는 사상으로 성장했지만 브라만 교가 힌두교로 개혁하면서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 이슬람교가 쳐들어오면서 인도에서 불교 신도는 사실상 전멸했고 불교 관련 유적들만 남아 있을 뿐이다.[31]

그러나 불교는 인도에서 세력이 쇠퇴하기 전 이미 외부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이 시기 불교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뉘게 되는데 먼저 기존의 승려 계급 위주로 이루어진 학파는 소승 불교라고 하여[32] 동남아 지역으로 전파되었고 신진 승려들과 일반 신도들로 이루어진 개혁파들은 대승 불교라고 하여 동북아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불교는 정치적인 이유로 그 본질이 계속 변질되었고 동북아에서는 유학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불교는 국가를 지배하는 사상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고 산속으로 숨어들게 된다.

3.2.3. 한국 철학[편집]

한국[33]은 근대 이전엔 유불선의 강력한 영향으로 체계화된 고유 사상이 등장하지 않았으나 근대에 들어오면서 여러 사상가들에 의해 한국 고유의 사상들이 꽃 피웠다. 

삼국시대가 되면서 고대 왕국이 성립되자 기존의 토속 신앙들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의 수입이 시작되었다. 또한 노장 사상에서 비롯된 도교 또한 불교와 함께 전래되면서 삼국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34] 물론 삼국시대 말엽부터 유학을 새로운 지배 체제로 하자는 논의는 나왔으나 이미 대부분의 백성들은 불교 신도였기에 이러한 시도는 대부분 무위로 돌아갔고 오랜 세월동안[35] 한반도의 사상은 불교가 지배하였다.[36]

그러나 고인 물이 썩는 법. 불교는 세월이 지나면서 세속화되고 부패해 폐단이 늘어났다. 이에 대해 정치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불교계를 개혁을 하기 위해 의천지눌요세등의 노력이 있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한편 고려의 유학은 경전을 공부하는 경학보다 글이나 시를 짓는 제술 중심으로 발전해 실천성이 떨어졌으며, 무신정변 이후 유학은 침체기에 들어선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경학 중심의 진흥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안향에 의해 성리학이 받아들여진다. 고려말에 들어서 유학자들이 정치적 주류로 들어서면서 부패한 불교를 몰아내자는 운동을 시작했고[37] 결국 조선이 세워지면서 불교는 쇠퇴하고 유교 국가가 된다.

조선조에는 유교이념이 체계화 및 정리가 되었으며 성리학이 융성했다. 전기에는 현실 중심의 개혁을 강조한 관학파들과 도학 중심의 인간내면과 현실을 중시한 사림파들에 의해 발전하기 시작한다. 사림파의 집권 이후 성리학은 도학을 바탕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집요한 탐구로 "주자학은 중국에서 나와 조선에서 완성되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많은 성과물을 내었다. 이황의 뒤를 잇는 퇴계학파이이 이후의 율곡학파간의 논쟁, 그리고 율곡학파 내부의 여러 논쟁들은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그러나 이는 성리학 이외의 학문이 쇠퇴하게 하는 반작용을 낳기도 하였으며, 이는 양난과 기근으로 시련을 겪었던 17세기에 성리학의 경직화로 두드러진다. 후에 기존 성리학의 지나친 이론화에 의한 경색을 비판한 사상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15세기에 이미 들어와 있던 양명학을 공부하는 강화학파, 성리학의 실천적 모습을 상실한 것을 비판하며 등장한 성호학파와 북학파, 그리고 이들의 사상을 종합한 정약용의 등장과 더불어 청의 고증학이 유입되기도 했다.

구한말의 한국의 철학사상은 성리학의 계승을 기치로 내세운 위정척사파와 개화론,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동도서기론과 서구사상의 급진적 수용을 주장하는변법적 개화론과 더불어, 애국계몽사상과 민족주의적인 신흥종교로 나뉘게된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인한 서구 문물과 기독교의 유입으로 서양철학이 한국철학계의 대세가 되었으나 최근 한국철학계는 동양철학유교성리학을 연구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 철학은 조선의 학자들이 보여준 경이로울 정도의 성리학 체계와는 철학적 접근 방법과 목표가 심하게 괴리되어있고, 이는 일제 강점기 당시 독자적인 국내 학계의 사멸로 인한 것임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이루어진 철학'이나 '조선의 성리학'이 존재할지라도 그것이 광복 후 새로운 국가인 대한민국만의 철학이라고 볼 수 없어 한국철학의 독자성의 기반이 약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국내의 많은 학자들이 이 점을 주목하고 있으며,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전쟁을 거치며 먹고사는 문제가 우선이 되다보니 현대에 와서 돈이 되는 실용 학문으로써는 이미 한 물 간 데다가, 별로 알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고 하다보니 기껏해야 철학관 같은 점집에서나 볼 수 있는 이름이 되어가고 있다. 워낙 심원한 철학적 영향력을 가진 역사가 긴 독일을 포함한 유럽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 소피의 철학이란 책이 유럽에서 대히트를 치는 것과 대조적이다.[38]

3.2.4. 일본 철학[편집]

일본의 철학사는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비슷하게 따랐으며 한국의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고구려를 통해, 삼국시대가 끝나갈 때는 견수사, 견당사를 보내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였고 고려말~조선 중기까지는 왜구의 난리와 임진왜란으로 한반도와의 교류는 소원했으나 임진왜란 후 통신사를 통해 문물을 전해받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동아시아에서 서양 문물을 가장 먼저 가장 활발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일본으로 들어온 사상이나 철학들은 원래의 내용과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 예컨데 형이상학적인 주자학에서 일본의 주자학자들은 형이상학적인 부분을 부정했고 맹자에서는 역성혁명 부분을 빼버렸다. 또한 서양 기독교도 일본에서는 원래 기독교 신도들이 보기엔 괴이하게 변질되었다.

이것은 일본이 해외 문물을 받더라도 오리지널 그대로를 받지 않고 일본의 사정에 맞게 그들 특유의 전통신앙과 문화, 사상을 기반으로 외래 문물을 해석하고 변형시켰던 것이다. 오리지널을 그대로 받아들이려 노력하던 한국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게 좋은 면에선 일본만의 독자적인 수용성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나쁘게는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변질된다는 점이 있다. 여기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딱히 선악의 가치가 아니지만 일본만의 것으로 변질된 문물은 보편성이 사라지고 일본내에서만 한정적으로 유통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중국과 인도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유 사상이 오래전 부터 체계화 되어 있었다는 것 역시 중요하다. 중세시대의 엔노 오즈누가 슈겐도를 설립한 뒤에 그에 영향을 받아 신토도 체계화 되기 시작했다. 허나 이러한 일본의 고유 사상전국시대 즈음 계속된 전쟁으로 발전이 둔화 되었지만 에도 막부 시대때 국학으로써 일본 고유의 사상이 활짝 피게 된다. 허나 국학에 베여있는 국수적인 측면 때문에 후에 일본의 군국주의화와 그로 인한 일제 멸망에 대한 초석을 깔아놨는 부정적인 측면 역시 있다.

여담으로 한국에서 일본 철학이나 전통 사상[39]을 가르치는 학과가 별로 없다. 철학계에서도 동양철학 하면 중국, 한국, 불교만 가르치지 일본철학은 배울 기회가 별로 없다. 아래의 철학자들 목록에 일본인 철학자가 거의 없는 것도 이러한 현실이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3.3. 인도 철학의 역사[편집]

인도 철학은 크게 브라흐마나 계통과 슈라마나 계통으로 구분지을 수 있는데, 브라흐마나 계통의 철학은 브라만 교의 성전인 베다의 권위를 바탕으로 그 뜻을 밝히고 보존, 계승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되었으며, 슈라마나 계통의 철학은 베다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깨달음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브라흐마나 계통의 사상은 브라만 교의 사제인 브라만 계급의 주도로 전개되었고, 따라서 브라만 계급의 특권을 합리화하는 카스트 제도의 계급 질서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특별히 엄선된 제자들에게 비의적으로 전수되었는데, 그들의 사상은 베다의 부록인 브라흐마나, 아란야카, 우파니샤드에 나타나 있다. 이에 대해 슈라마나 계통의 사상은 非 브라만 계급 출신의 자유 사상가들의 주도로 전개되었고, 따라서 베다의 권위 및 브라만 계급의 특권에 도전적 태도를 취했으며, 각지를 떠돌면서 여러 사람을 모아 놓고 공개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설파했는데, 이러한 흐름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아지비카[40]의 선구자인 아지타 케샤캄발라, 자이나 교의 개조인 바르다마나(마하비라), 그리고 불교의 개조인 고타마 싯다르타(석가모니)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브라흐마나 계통의 사상과 슈라마나 계통의 사상은 공통적으로 종교적, 탈세속적, 출세간적 경향을 나타냈고, 이러한 경향은 인도 철학의 고유한 특징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석가모니 붓다가 입적한 후 붓다의 가르침은 경(經), 율(律), 논(論) 삼장으로 결집되는데, 이 과정에서 불교 교단은 상좌부(테라바다)와 대중부의 분열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분열을 겪게 된다. 이들 부파들은 제각각의 삼장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팔리어로 기록된 상좌부 불교의 삼장(니카야)이다. 불교 부파들 가운데 특히 사상적으로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부파는 설일체유부로서, 이 부파의 논사들은 "발지론",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아비달마 구사론" 등 주요 논서를 저술했는데, 이들은 대체로 '무아(無我)'를 인정하면서 법(法)의 고정 불변성, 실재성 또한 인정하는 경향을 나타냈는데, 이러한 경향은 자연히 교리의 배타성, 경직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에 2~3세기 경 나가르주나(용수)는 당시 흥기한 대승불교의 흐름에 따라 자아는 물론 법 역시 고정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자아니 법이니 하는 것들은 어디까지나 이름으로써 가립된 것(名言所立)에 불과하다는 이른바 절대적 공(空) 사상을 주장함으로써 대승 불교의 이론적 바탕을 정립했다. 이후 바수반두(세친)는 나가르주나의 절대적 공 사상을 발전시켜 마음 밖에 그 어떠한 실재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마음이 유일한 실재라는 유식(唯識) 사상을 정립한다. 바수반두 이후 인도 불교는 니야야, 상키야, 미망사 등 브라만 교에 기초한 사상들의 도전에 맞서 치열한 논쟁을 전개했고, 디그나가(진나) 등 탁월한 논사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결국 몰락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그리고 밀교로서 명맥을 유지하던 인도 불교는 10세기 이후 이슬람의 침입에 결정적인 타격을 받아 인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한편 브라만 교는 불교와 자이나 교의 도전에 직면하여 대대적인 혁신을 단행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쉬바 신앙과 남근(링가) 숭배, 요가 등 민간 신앙적 요소들이 브라만 교에 편입되었고, 인도의 고전 서사시인 "마하바라타"의 일부분인 '바가바드 기타'가 경전으로 승격되었다. 따라서 브라만 교는 인도-아리아인의 민족 종교적 성격에서 탈피하여 범 인도적 종교인 힌두교로 개편되기에 이른다. 힌두교의 사상가들은 이전의 비의적 방식에서 탈피하여 공개적 방식으로 가르침을 설파하는 한편, 불교, 자이나 교 및 브라만 계열의 다른 학파들과 논쟁을 벌임으로써 그들의 이론적 허점을 공격하고 자신들의 이론의 우월성을 선양하고자 했는데, 이때 등장한 대표적인 학파들이 카필라의 상키야(수론), 파탄잘리의 요가, 가우타마의 니야야(정리론), 카나다의 바이셰쉬카(승론), 자이미니의 미망사(성론), 바다라야나의 베단타로서, 이들을 한데 묶어 육파 철학이라고도 한다. 니야야와 바이셰쉬카는 이들 육파 철학 가운데 형이상학적으로 다원론적, 원자론적 경향을 대표하며, 이성적 추론을 통해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보고 그에 따라 정교한 논리학을 개발했다. 한편 상키야와 요가는 세계는 다수의 자아(푸루샤)와 단일한 원질(프라크리티)의 결합으로 생성되며, 자아는 원질로부터 파생된 지성(붓디)을 통해 외부 대상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 지성이 이그러지거나 혼탁해지면 대상이 있는 그대로 인식될 수 없으므로, 요가 수행을 통해 지성을 항상 맑고 교요한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미망사는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바탕을 니야야, 바이셰쉬카와 대체로 공유하지만,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 및 유사성의 원천을 과거 및 전생의 경험이 아닌 선험적인 보편상에서 찾는다는 점 등에서 서로 구별된다. 베단타는 유일무이한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으로부터 현상 세계가 산출되었다는 일원론적 형이상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러한 브라흐만과 현상 세계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는가에 따라 샹카라의 절대적 일원론과 라마누자의 제한적 일원론으로 구분된다. 샹카라는 불교의 유식 사상을 수용하여 브라흐만을 고정 불변하며 어떠한 작용을 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고 현상 세계를 브라흐만의 환영에 불과하다고 보는 반면, 라마누자는 브라만 교의 전통적인 전변설에 기초하여 브라흐만을 세계의 궁극적 원인으로 간주하고 현상 세계는 브라흐만으로부터 산출되어 나온 것으로 본다. 이들 학파들은 서로 자신들이 베다, 브라만 교 사상의 이론적 정통임을 강조하면서 브라만 교의 다른 학파들 및 불교 등 비 브라만 사상과 논쟁을 별였으며 그 결과 니야야는 바이셰쉬카와 연합하고 베단타는 상키야, 요가, 미망사를 흡수한다.

라마누자 이후의 베단타 철학은 종교적 색채가 한층 강화되면서 철학이라기 보다는 힌두교 신학에 가까운 양상을 나타내게 된다. 게다가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진 후 이슬람이 침입하여 그 빈 자리를 대체하게 되는데, 이들은 비록 무력으로 인도를 정복했지만, 정교한 교리보다 독실한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적 특성상 불교와 같은 이론적 철학적 파괴력을 몰고 오지 못했다. 힌두교 신앙은 비슈누 신앙과 쉬바 신앙이 대표적인데 쉬바 신앙은 비슈누 신앙에 비해 대중적이었으나 철학적으로 그다지 두드러진 활동을 나타내지 못한 반면, 비슈누 신앙은 비록 대중적이지 못했으나, 마드바, 님바르카, 발라바, 차이탄야, 라마크리슈나 등 걸출한 사상가들이 배출되었다. 한편 라마난다, 카비르 등의 사상가들은 힌두교 전통을 거부하고 이슬람의 유일신 사상과 샹카라의 절대적 일원론을 절충하여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회통을 도모했고, 이러한 정신은 시크교의 개조인 나나크 및 무굴 제국의 왕자였던 다라 쉬코에 계승되었다. 이후 서구(특히 영국) 세력이 인도에 침입하면서 정신적 충격을 겪게 된 인도의 사상가들은 힌두교의 개혁을 두고 서구화와 전통의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데, 람 모한 로이는 서구 문화를 수용하여 힌두교 전통을 개혁하고자 했던 반면, 다야난다 사라스와티는 힌두교의 개혁이 서구화가 아닌, 전통을 재발견함으로써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영국의 식민 지배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인도 민족주의는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간디는 영국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을 인도 철학이 전통적으로 지향해 왔던 해탈과 연결시킴으로써 정치적 자유와 정신적 자유를 동시에 추구하고자 했다. 그 밖에 라마크리슈나의 제자인 스와미 비베카난다, 인도의 시성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슈리 오로빈도 고슈, 인도 대통령을 역임한 라다크리슈난 등이 근대 인도의 주요 사상가로 꼽힌다. 그리고 인도의 초대 법무장관을 역임한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는 만년에 인도에서 오랫동안 그 명맥이 단절된 불교를 부흥시키는 운동을 폈다.

4. 철학의 대상[편집]

일반적으로 철학은 세계의 근원적인 의미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라고 정의되지만 실제로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가 학파마다 사람마다 모두 다르기때문에 사실상 어떤 대상이 있다고 보기에는 매우 힘들다. 실제 이는 몇천년간 논의된 내용이지만 아직까지 통일된 답이 나오지 않은 부분이기에 이에 대한 답은 보류될 수 밖에 없다. 심지어는 철학은 자신을 정의하는 것까지 자신의 활동영역에 속한다.

물론 오랜 역사 동안 수많은 철학자들이 자신이 그 대상과 방법에 있어서 철학을 완성했다고 주장해왔지만 이는 모두 정식화되지않은 개별적 논리이기에 하위 항목의 철학의 분류에 나온것처럼 제각각인 경향이 크므로 사실상 철학의 대상은 아직까지 정의되지 못했다고 이야기 될 수 있다.

즉 보편적인 의문을 해명하고자 하는 학문이지만,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현상 대부분이 과거 철학에 의해 거의 해소된 경향이 있다보니, 현대에 와서는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것들만 남았기 때문에 이러한 모호함이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과학이나 사회나 종교 분야에서 철학이라는 접미사를 마구 갖다 쓴다고 까는 사람도 있지만, 일단 '현상과 문제를 인식하고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사색한다'라는 의미에서 보면 철학이라는 말은 아직 유효하다. 실제로 아이작 뉴턴도 중력 법칙에 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자연 철학이라는 용어를 쓰곤 했다.

이 논란은 철학이 해결하려는 의문이 다른 분과학문들과 달리 가장 보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한 분과학문이 성립하기 위한 고유의 주제, 개념, 방법론들이 철학에서는 있을 수가 없다. 널리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개념들도 항상 각기 다른 철학자들이 변형해 쓰기도 하며 그 이전에 한 학문이 성립하기 위한 보편적인 방법론 자체가 합의되지 않고 2000년 철학의 역사 내내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 캄캄한 방에서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보이지 않는 검은 고양이를 찾는 것과 같다. 여담으로 찾지도 않은 고양이를 찾았다고 하는 것이 종교라는 말도 있다. - 서양 속담. (이 속담의 정확한 인용은 철학이 아니라 형이상학이다)
자세한 사항은 각각의 항목과 밑에 있는 '철학의 분류'에서 확인.

5. 철학의 특징[편집]

5.1. 의심하는 학문[편집]

철학의 분과학문들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철학이란, 일반적으로 학계 혹은 일반에 의해 수용되거나 당연시되는 개념들에 대해 재고하거나 비평해보는 성격을 띄는 학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었고, 칸트는 서적이나 전문가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은 채로 스스로 판단할 것을 요청하였으며[41], 니체 또한 '의심하는 것'을 자신의 천성으로 이해한다.

5.2.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학문[편집]

철학이 갖는 하나의 특징은 이 세계와 우주를 질서 있고 조화로운 곳으로 전제하고, 감정이 아닌 이성의 관점에서 이 세계를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헤라클레이토스는 세계의 가장 핵심적인 이법, 보편원리를 로고스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로고스는 감각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세계 전체가 이성의 질서에 의해 유지된다고 보는 시각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 전까지의 사람들이 세상 일을 설명할 때 여러 신들과 여러 인간들 사이의 신비적, 비합리적 관계를 갖고서 설명하려던 것과 대비되는 것이다.

5.3. 총체적이고 근본적인 원리를 설명하려 하는 학문[편집]

철학이 갖는 하나의 특징은 낱낱의 현상에 대한 개별적인 이유가 아니라 총체적인 관점에서 어떤 근본적인 원리를 찾으려 한다는 점에 있다.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이 아니라, 전체를 아우르는 어떤 것을 지향하며, 나름의 체계를 세우려 한다는 것이다. 

5.4. 본질을 추구하는 학문[편집]

철학이 갖는 하나의 특징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에 현혹되지 않고, 그 본질을 탐구하려 한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세상에 버림 받는 느낌을 갖고 외롭게만 살아가던 자가 어느날 갑자기 냉소적인 마음을 버리고 긍정적인 세계관을 갖게 된 뒤부터 행복해졌다고 해서 그 현상만을 갖고 진리라 말하지는 않는 게 철학이라는 것이다. 철학은 아무런 통찰도 분석도 없이 그저 여기저기서 주워 듣거나 수박 겉핥기의 산발적 경험을 갖다 옮기는 그런 학문이 아니다. 어떤 현상이 있었을 때, 그 원인과 이유를 알려 하고, 이를 통해 궁극적인 진리를 알려 하는 것이다.

5.5. 말장난하는 학문?[편집]

다만 현대사회에서 철학은 각종 사회현상과 시스템에 대한 구체적 이해를 결여한 채 공리공론 내지 말장난이나 일삼는 학문 비슷하게 폄하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철학의 위와 같은 특징들, 합리성, 총체성, 본질성, 비판성 등이 철학자들에게 너무나 무거운 과제를 안겨주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실제로 요즘 세상에선 자칭 철학자란 사람들이 과학, 경제학, 회계학, 법학 등을 어거지로 인용해 모순된 주장을 하다가 웃음거리가 되는게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자크 라캉이나 슬라보예 지젝모리스 메를로퐁티를 읽는 것보다는 차라리회계원리나 C 언어를 배우는 게 현대의 세상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많이 된다는 비아냥도 존재하고 있다. 이 모든 게 철학이 지나치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는 것, 지나치게 총체성을 지향한다는 것, 지나치게 본질적인 것을 탐구하려 한다는 데 기인한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일부 철학자들이 이론과학의 개념들을 멋모르고 현학적인 목적만을 위해 잘못 사용한다며 비판을 한 사람이앨런 소칼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6. 철학자[편집]

국내외 유명 철학자들은 철학자 항목 참조.

7. 철학서[편집]

8. 철학의 분류[편집]

철학의 학습 방법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그 첫번째는 개별적인 철학자들의 사상을 공부하는 것이다. 이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전통적으로 중시되는 방법이라 할 수 있겠으며, 현대 한국 대학 등에서도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학습 방법이다. 흔히들 말하듯, 공자맹자 사상을 공부한다, 칸트를 읽는다, 라고 하는 방법이 바로 이러한 방법에 속한다. 현대에는 주로 대륙철학, 철학사조연구와 같은 분야에서 주로 이러한 방법이 시도되고 있다.

그리고 두번째는 철학자들 한 명 한 명에 구애받는 것이 아니라, 철학의 하부 영역들 각각에 대하여 공부하고 탐구하는 것이다. 이는 동양철학에서는 자주 이루어지지 않는 학습 방법이며, 한국 학계에서는 주로 첫 번째 방법을 통해 어느정도 철학적 역량이 쌓인 후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나, 현대 철학의 큰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영미권 철학계의 경우 이른바 "분석철학"이라 하여 각 분야에 대한 연구방법론은 물론 철학적 글쓰기, 철학적으로 생각하기, 철학의 대상을 정하기 등에 대한 대략의 합의를 바탕으로 널리 쓰이는 방법이다. 최근에는 그 중에서도 흔히 "LEMMings"라고 불리는 분석철학의 분과학문들, 즉 언어철학(Language), 인식론(Epistemology), 형이상학(Metaphysics), 심리철학(Mind)[42], 과학철학, 논리학 등에 더하여 정치철학, 윤리학 등의 가치론 분과 등이 주된 연구분야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일반인들이 철학을 인생에 대한 학문, 혹은 철학자의 사상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 등으로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현대 철학은 몇 가지의 하부 학문분야로 나뉘어져 전문적으로 연구된다. 이러한 현상은 근대 이후부터 가속화되었으며, 한번에 여러 분야로 나뉘어진 것이 아니라, 제각기 형성시기가 다 다르다. 예를 들어 형이상학의 경우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때 정립이 되었으며, 인식론은 데카르트 이후 사실상 형성되어 헤겔 시기에 정식으로 인식론이라는 명칭이 붙었고, 과학철학과 같은 경우에는 20세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형성된 분과이다. 

철학 하부분야의 분류는 각 철학자마다 미묘하게 다르나, 철학자 대부분이 동의하는 개략적인 분류를 서술해보고자 한다.

8.1. 순수철학[편집]

말 그대로 다른 분야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철학적 사변에 의존하여 이루어지는 분야를 일컫는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과학기술적 방법론의 발달에 따라 점점 그 영역이 줄어들어가고 있다. 고대의 자연철학이 과학적 방법론에 따라 자연과학으로 독립하고, 인식론적 논의의 상당부분이 심리학에 의해 대체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

8.2. 응용철학[편집]

철학이 아닌 타 학문 분야에 대하여 그 학문 분야의 '내용'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원리와 방법론에 대하여 반성하고 고찰하는 철학 분야. 근현대에 접어들면서 순수철학의 영역이 줄어듦에 따라 이러한 응용철학의 중요성은 한층 더 부각되고 있다.
'OO철학'에서 OO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아무 것이나 넣으면 된다. 심지어 스탠포드 철학 백과에는 'philosophy of music(음악철학)', 'philosophy of humor(유머철학)', 'philosophy of statistics(통계철학)', 'philosophy of chemistry(화학철학)', 'philosophy of dance(무용철학)' 등의 항목도 있다.

8.3. 논리학[편집]

논리학은 순수철학으로도, 응용철학으로도 혹은 철학이 아니라고도 분류되는 조금 미묘한 분야이다. 기본적으로 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눔을 시초로 하여 순수철학적 논의로 이루어졌으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프레게,버트런드 러셀쿠르트 괴델등의 철학자 겸 수학자들이 논리학과 수학의 형식적 유사성을 바탕으로 하여 형식논리학을 고안해냄에 따라 철학과 수학 양 분야 모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9. 교육과정/시험에서의 철학[편집]

  • 고등학교 과정 사회 과목에서 윤리와사상생활과윤리가 출제되고 있다.
  • 고등학교 교양과목 중 철학이 있다.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그냥 개설을 안 한다.[44]
  • 대학교에서 철학을 배우는 곳은 철학과이다. 논리학은 수학과나 수학교육과에서 개설되는 집합 관련 과목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다.
  • 독학사 시험의 1단계 교양인정 영역에서 '철학개론' 과목이 출제된다.
  • 고시에서 과거 '국민윤리' 과목이 출제되었으나 현재는 폐지되었다.
  • CFA 시험에서 경영윤리가 출제된다.

[1] 자연과학과 같은 다른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자신이 연구하는 학문이 무엇인지 묻고 연구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철학의 영역이다. 즉, 과학적 방법론이 무엇인가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과학이 아닌 과학철학이라는 소리. 학문이 추구하는 목표와 학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묻는 것은 오직 철학뿐이다.[2]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철학자로 알려진 탈레스는 현대인의 생활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학문 중 하나인 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로서 정전기를 발견했으며, '가장 순수한 학문'(by 칸트)이라는 수학조차도 시작은 자연철학이다. 그렇기에 피타고라스가 수학자이기도 하며 철학자이기도 하다. 진리가 수적질서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 물론 학생들의 수학적 고통을 증가시켰다.[3] 엄밀히 말하면 휴얼은 '과학'이란 단어 자체를 창조한 건 아니고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과학자(scientist)'라는 단어를 최초로 만들어냈다.[4] 비록 소피아가 지식이 아니라 지혜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 상식처럼 되어 버렸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많다. 철학의 인식론적 전통에 비중을 두는 측에서는 지혜가 아니라 지식에 가깝다고 본다. 애초에 지식을 배제한 지혜란 것이 임기응변과 별다를게 없고 보면,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해석은 어쩌면 철학에 대한 모독일지도.[5] 고대 그리스에서 단어로 존재하는 사랑은 크게 네 가지로, Philia, Storge, Eros, Agape가 그것인데,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보다 선대였다면 Erosophia가 되었을 것이란 학설도 존재한다.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던 Eros는 성적인 욕망 뿐 아닌 신화적 존재의 에로스 그 자체의 의미인 풍요와 결핍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다시 말해 풍요를 끝없이 추구하나 끝없이 결핍되어있는 갈망적 사랑의 형태로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롯해 플라톤이 추구하던 사랑의 형태와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플라톤이 지혜, 진리를 에로스의 형태로 사랑했을 것이라는 추측에 기인하여 생긴 학설인듯 하다.[6] 참고로 저 니시 아마네란 학자는 과학, 학술, 기술 등의 용어도 만들어냈다.[7] 이는 현대 서양철학이 수학과 과학의 근간이기도 한 논리학 중심인 점과, 동양철학이 주로 윤리학 중심으로 이루어져있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8] 다만 호메로스가 실재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9] 파도가 높게 치면 '포세이돈이 분노하고 있군' 하는 식. 이를테면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신통기라고도 함),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디세이아가 있다.[10] 이때 쾌락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최고의 선은 사망이였다. 그러니깐 자살을 권장하고 다닌 것이다(...).[11] 많은 사람들이 쾌락주의로 번역해서 에피쿠로스주의를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데 에피쿠로스가 이야기하는 건 정신적 쾌락이지 육체적 쾌락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내용을 보면 기존의 쾌락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 철학의 내용을 간단하게 서술하자면, 동물과 인간이 모두 느낄 수 있는 쾌락이 있고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쾌락이 있다면 후자 쪽이 더 수준이 높은 쾌락일 것이므로 후자를 지향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쾌락주의와 인격수양을 동시에 노리고 있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12] 그러나 이 말을 단순히 '철학은 신학보다 하등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 항목 참고[13] 참고로 비슷한 시기에, 유대교의 경우도 필론이 그리스 철학을 수용하려는 시도를 하였다.[14] 교부 철학 시대에 기독교가 그리스 철학을 수용하기는 했지만, 그 시기에서도 신학과 철학은 엄밀히 구분되지 않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기독교가 '경쟁자'인 그리스 철학을 필터링하여 흡수 하였다고 보면 대강 맞을 것이다.[15] 보편논쟁 자체는 그냥 중세에 있었던 철학 논쟁이지만, 사실 중세 철학을 계승한 근현대 철학에서도 이 논쟁은 엄밀히 말해 현재진행형이다. 개인주의,사회주의전체주의자유주의민족주의 등의 정치적 논쟁 및 관념론유물론논쟁 등은 모두 보편논쟁의 확장판이라 할 수 있다.[16] 특히 이븐 시나(라틴어로 아비켄나)와 이븐 루시드(라틴어로 아베로에스)에 정리된 아리스토텔레스 저작들은 서양의 신학자들에게 상당한 지적 충격을 주었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경우는 이슬람으로부터 다시 건너오기 전부터, 이미 유럽에서 널리 사용되었다.[17] 자연과학에 대한 이 공로 덕에, 알베르투스 마뉴스는 오늘날 가톨릭 교회에서 과학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 받는다.[18] 이 관점은 계몽주의 사조가 나타날때까지 주류를 이룬다.[19] 다만 아직까지는 철학이 신에게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해 위에 언급한 많은 철학자들 역시 -중세보다 그 접근 방법은 다양해졌지만- 신의 존재성에 대한 논의 자체는 지속하였다.[20] 세계철학사-한스 요하힘 슈퇴리히 참조[21] 사회민주주의와 복지정책의 수용을 통해, 기존 사회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노동자의 권익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비판"을 통해, 사민주의적 방법론도 결국 소유와 지배의 논리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그를 비판한다.[22] 더 상세한 비유로, 기존의 도덕 체계에 순응하는 사람은 "낙타"에 비유될 수 있으며, 이러한 사람은 일단 "낙타"에서 "사자"로 거듭나, 기존의 노예 도덕에 저항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사자"로 거듭난 사람은 "어린 아이"로 또 한번 거듭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름의 도덕 관념을 세워가야 한다고 보았다.[23] 수학적 증명처럼 엄밀한 형태의 증명은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논증'이라는 개념은 포함되어 있었다. <생각의 지도>를 보면, 수사학은 수학적 증명의 기본 형태를 띈다고 서술된다. 플라톤의 대화록들을 참조한다면 초기의 서양철학이 수사학의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모든 철학은 실용적이고 도덕적이며 논증이 없는 철학도 존재할수 없다.동서양의 철학은 개성의 차이를 보이지만 철학으로서의 본질은 같다고보아야 할것이다.[24] 이런 기초적인 차이가 시간을 두고 큰 차이로 발전하여 서양에서는 증명을 기초로 하는 과학이 발달한 반면, 동양에서는 엄밀한 이론에 기초하지 못한 기술만이 발달했을 뿐이었다.[25] 제자백가 이전에 주역이나 시경 등이 있긴 하지만, 이것을 철학적 텍스트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주역의 경우는 원시 신앙으로 점을 치는 책으로 출발했으나 후대의 많은 학자들의 철학적인 작업을 거쳐 철학적 텍스트가 된다. 정이의 의리역이 대표적인 주역의 철학화 작업이다.[26] 이러한 현실적 이유 때문에 이 시기 철학들은 인식론이나 형이상학보다 윤리학, 사회 철학에 더 전문성을 보인다. 또한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문제점에서 출발했다보니, 이들의 서적은 기초적인 배경지식만 갖춰진다면, 2000년전의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읽기가 쉽다.[27] 다만 묵자의 경우는 다분히 공동체주의적인 면모를 띠기 때문에, 아나키즘적이라고 해석하기에는 껄끄러울 수도 있다. 애초에 묵가 후학들 중 법가와 함게 율령을 정비하는 쪽으로 간 사람들도 있고, 묵가가 주장한 '보편적 복지'는 법가와 유가에서 어느정도 받아들이고 흡수하였으며, 묵가의 겸애론은 양주의 위아론과는 정반대의 방법론을 취한다. 물론 둘 다 국가주의에 대한 저항을 표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28]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의 기록과, 사마천 본인의 사기를 대조하면 이 헤게모니의 변화를 간단히 알 수 있다.[29] 이건 중국 뿐 아니라 대부분의 식민지배를 받은 국가들에게서 일어났던 현상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이 시기 공산주의 세력이 커진다.[30] 다만, 확실한 근거보다는 그냥 뜬소문같은 이야기일뿐이다. 실제로 서양은 중국/인도철학등에 대해 평가 이전에 별 관심이 없으며 애초에 자료가 부족하다. 몇개 없는 중국고전 철학 번역서의 번역도 그야말로 왈도체 수준인것이 많으며, 어떤 서양철학자는 자신들이 중국/인도철학등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가장 큰 이유가 언어차이라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31] 현대 인도의 불교 신도들은 정말 과거 극소수의 신도들이 살아남아 근근히 명맥을 지킨 것이라던다, 그게 아니면 해외 불교 교단의 선교로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 신자가 된 경우이다.[32] 사실 소승 불교니 대승 불교니 하는 건 다 대승 불교에서 이름 붙인 것으로 소승불교측은 스스로를 상좌부불교라고 칭하고 있다.[33] 이는 현재 대한민국만이 아닌 한국 전체 역사를 말한다.[34]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청룡이나 주작 등에서 도교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35] 고구려 소수림왕 때 불교를 받아들이고 공인한(372년) 이후 숭유억불을 내세운 조선이 건국될 때(1392년)까지 무려 1천년이 넘는다.[36] 고구려 말에 연개소문에 의해 도교를 국교화하기 위해 당나라의 힘을 빌려 도교를 강화하려 했지만, 이에 반발한 승려들은 고구려를 떠나버렸다.[37] 이때 승려들의 부패는 만만찮은 수준이었다. 신돈에 대해 20세기까지 민간에 퍼져 있던 야사를 생각해 보자[38] 역사의 '길이'와는 별 상관없는 문제다. 서양철학의 도입역사가 짧은 것 뿐이지 우리나라도 철학의 역사가 결코 짧지 않다. 한국에서의 동양철학, 그 중에서도 유교철학은 한 국가의 통치원리까지 지배했을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사상이었고 역사도 길었다. 다만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격변을 거치면서 구시대적 가치가 몰락하고 실질적으로 먹고사는 문제에 급급해하게 되자 사회에서 '철학'이라는 막연하다고 생각되는 주제에 대한 담론자체가 쇠락하였고, 이러한 역사를 배경으로 발생한 현상일 뿐이다.[39] 대학에 따라 메이지 유신 이후 들어온 서구 철학과 그 이후 영향을 받은 사상만을 철학이라고 하며 일본 전통사상과는 따로 구분한다. 크게 교토대파와 도쿄대파로 나뉜다.[40] 불전에서는 사명파(邪命派), 사명외도(邪命外道)로 나와 있다.[41] <계몽이란 무엇인가> 참조[42] 주로 대학 등지에서 LEMMings라고 칭하는 것은 여기까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43] 사실 연구분야만 보면 미학 안에 속하는 분과학문이나, 엄격히 따지자면 두 학문은 다르다. 위치상으로 볼때 예술철학은 미학보다는 예술학에 더 가깝다.[44] 일부 종교관련 학교는 개설할 수도 있다. 이때는 이수여부로만 성적이 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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