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29

100일 100가정 순례에 나선 권술룡 등불

생명평화결사 ::

 2009/04/19 21:44 생명평화결사
“대한민국의 신명문가를 찾아갑니다”
  - 100일 100가정 순례에 나선 권술룡 등불 -
글 / 수지행(남원)


‘이제 늙은 전사는 만 22년간의 <평화의 마을> 사회복지 현장을 마감하고 내일 12월 31일을 끝으로 퇴임을 하게 됩니다. 아직 잔여임기가 몇 년 남았지만 후진에게 길을 열어주고 아름다운 마무리, ‘오래된 새길’, ‘지속가능한 내일’을 위한 긴 ‘쉼’의 길을 떠납니다.’

작년 12월에 온 권술룡 등불님으로부터 온 한 통의 전자우편이다. 이 편지를 받고 ‘대전에 큰 지각변동이 일어나는구나’ 싶었다.
권술룡 등불님은 강원도에서 태어나 우여곡절 끝에 대전에 정착하여 22년간을 대전지역 사회복지 현장의 최일선에서 헌신하면서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기신 분이다. 아동시설총무로 10년, 복지관장과 노숙자센타, 지역자활센타장으로 모두 20여년, 그리고 사)대전실업국민운동, 지역통화운동 <한밭렛츠>, <인도생명누리공동체> 등의 대표로, 등불님 말씀에 따르면 ‘부귀영화를 누리며 원 없이 잘 살았다’고 한다. 대전지역에서 활동하는 누군가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권총, 늙은 전사, 권 관장님이란 여러 이름으로.
그런 분이 최근까지 헌신해오던 평화의 마을, 대동종합사회복지관, 홈리스지원센터, 사)실업극복시민연대 등 그간 맡고 있던 임직을 다 내려놓으시고 순례길에 나서겠다고 하신 것이다.

편지에 따르면, 새해맞이공동단식과 보름간의 인도생태공동체순례를 마치고 한반도 100일 걷기를 하겠다는 계획. 그리고 드디어 2월 23일 임진각에서 서울까지 걷고, 제주도로 건너가시더니 남해로 지리산으로 봄소식과 함께 올라오신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섬진강을 걷는다.
날이 정말 기막히다. 3월의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속을 잘 아는 애인인 양 부드럽게 볼을 어루만진다. 등불님은 간전교를 건너 어류생태관으로 가는 삼거리에 서 계셨다. 순례자의 보호에 필요한 아무런 장치도 없이 눈에 잘 띄지도 않는 무채색의 셔츠를 입고 계신 모습에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다. 우리 나라 국도가 어디 자동차를 위한 길이지 사람이 걸을 만한 길이던가.
반갑게 해후의 인사를 나누고 섬진강을 따라 걷기 시작
했다. 작은 순례단이 꾸려졌다. 순례단장 권술룡 선생님, 순례단원 도법스님, 백선희 간사가 뒤에 섰다. 맑은 햇볕 아래 노랗게 만개한 개나리꽃이 세상을 더욱 밝게 만들고 있었다. 곳곳에 매화도 지천이다. 가끔씩 보이는 목련꽃은 금방이라도 펑펑 소리가 날 듯 부풀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다.
늙은 전사 권술룡 등불님과 함께 한 하루 순례길은 이렇듯 자연의 환대와 무심한 듯 길게 누운 섬진강의 평화로움 속에서 시작되었다.

‘늙은전사’의 젊은 날의 편력과 방황
권술룡 등불님은 1940년 가을 강원도 삼척에서 어부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목선의 선주였던 부친의 배가 태풍으로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집을 팔고 동해안 일대를 전전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중학교 때 기독신앙에 입문하였는데, 그때 교회학교 교사였던 김종태 선생과의 인연으로 18세에 천안씨알농장에서 함석헌 선생을 만났다. 천안씨알농장은 간디의 톨스토이농장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한 진리파지운동의 아쉬람이었다. 권총님은 이곳에서 똥마차를 끌고 농사를 지었다.


숲에 들다 
그러나 1959년 딱 1년 만에 큰 절로 스승께 작별을 고하고 천안 씨알농장공동체를 떠나 강원도 평창의 소위 ‘600마지기’라 불리는 해발 1,300고지 위에 펼쳐진 분지로 찾아들어갔다. 미국의 현자인 헨리 데이빗 소로우에 매료되어 그가 쓴 불후의 명저 『숲속의 생활』(월든)을 실제 ‘뫔’으로 살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네 형과 화전민들이 쓰던 빈집에 들어가 살면서 묵정밭을 일구기 시작했으나, 동네 형이 부모님께 실토해버린 바람에 부모님께로 돌아가야 했다. 당시 부모님은 작은 정치망 어장을 하셨는데, 등불님은 바닷일에 젬병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농사가 체질이었다. 아버지를 졸라 1,300평의 큰 밭 하나를 빌리고 흙벽돌을 찍어 초가 3칸을 손수 지었다. 동네에서 1.5km 정도 되는 리어카도 못 들어가는 밭에 ‘자나깨나’ 똥지게를 지고 오르내리는 일은 보통 힘든 게 아니었지만, 제법 농사를 잘 지었다고 한다. 배추농사를 잘 지어 그것을 몽땅 팔아 청계천으로 가서 헌책을 몇 박스 사왔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안반덕 씨알개척농장과 ‘고성산불의 원조’
그러다가 1961년 강원도 일대를 헤매다가 고성군의 오지 안반덕에서 선배들과 옛 화전민 터를 개간하기 시작했다. 김종태 선생을 리더로 서부개척시대 이야기를 밤새들으며 ‘개척자의 참 바라는~ 줌 가리 가리 가리~’ 노래를 부르던 그 때. 등불님은 그때를 참으로 가슴 설레던 때였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움집을 꾸리고 개간을 시작한 초입, 1961년 3월 31일 고요한 아침에 묵밭의 마른 풀을 태우고 괭이질을 시작하는데 남은 불씨가 회오리바람으로 인해 산으로 번져올라 큰 산불이 났고, 그로 인해 5,16 군사쿠데타 3일 전에 구속이 되었다. 그 소식을 듣고 강원도까지 함석헌선생님이 달려오는등, 두어달이 못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고 그해 여름 군 입대를 하게 되었다.
3년 후 만기제대한 그는 동해안 최북단 마을 외진 곳에 밭을 빌리고 다시 흙벽돌을 찍어 집을 짓기 시작했다. 낮엔 일하고 밤에 올라와 벽을 바르곤 했는데, 밤은 왜 그리 짧은지 어느새 새벽닭이 울고 교회 새벽종소리가 울리고 지쳐 스러진 기억... 그렇게 해서 동해안 최북단 대진항의 바닷가 마을에서 향우야학을 열게 되었다. 그곳은 안반덕 씨알개척농장에서 100여리쯤 떨어진 곳이어서 일 년에 두어 번씩 안반덕의 씨알농장에 오시곤 하셨던 함석헌 선생님께서 대진항의 향우야학원에 들러 토담집에 묵어가곤 하셨다고.
그 후 향우야학원은 후배들이 하고 다시 천안씨알농장으로 오셨지만, 머지않아 씨알농장은 문을 닫게 된다.
한편 막막한 농사를 집어던지고 서울 청량리의 도농직거래 운동의 <금지게 상회> 행상을 하기도 했고, 개간지의 친구가 베트남에서 큰 부를 쌓았으나 패전으로 빈손으로 나와서도 가진 돈을 몽땅 주면서 사업을 해보라고 해서 사업에 손을 댔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도산과 방황을 거듭하게 되었다고.

대전으로 오다
그러던 중 1986년 12월 서울 상계동에서 호떡장사를 하던 중 빚더미에 앉은 아동시설을 선배와 친구의 도움으로 운영을 맡아 총무로 일하게 되었고, 분화 발전하는 사회복지의 흐름을 잘 잡아 그로부터 22년여의 세월 동안 권술룡 등불님의 인생은 평화의 마을을 중심으로 대전지역에 펼쳐졌다.
이러한 젊은 시절의 편력과 방황의 길에 언제나 스승과 친구들이 영혼의 동반자로 함께 했기에 빛나는 날들이었다. 참으로 고난의 세월이었지만, 등불님은 그에 대해 소로우처럼 삶으로, 그리고 한 문장으로 간단히 요약한다. ‘이 풍랑 인연하여 돛단배는 더 빨리 가고, 헤매면서도 벌판을 가로질러 갈 것이다.’ 


  100가족 순례, 한국의 신명문가 찾기

섬진강가의 빈집 마루에 앉아 쉬면서 등불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순례는 어떠시냐고 여쭈니 그저 좋기만 하다고 하신다.
“그런데 굳이 100일 100가정 순례라고 하신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평화의 마을과 더불어 20여년 동안 참으로 많은 분들을 만났지. 평화의 마을 영성공동단식, 회보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평화의 마을 회보, 세계생태공동체순례, 청소년모험조국기행, 소록도방문단, 그리고 사회복지와 관련한 여러 사람들… 그 지인들의 가정들과 미래의 싹을 틔우는 곳을 찾아서 미처 깨닫지 못한 세상에 다시 눈뜨고 철들어가고 싶은 거지.”
그래서 <먼길 떠나기… 한반도 순례 100일> 100가정 순례라고 이름을 정했다고 했다. 그렇다고 100일 동안 만날 사람들의 지역을 조사하거나 매일 일정을 짜놓은 것은 아니다.  그냥 대충 10개의 구역으로 나누고 ‘어디쯤에 누가 산다고 했지’라는 정도의 정보만을 갖고 걷는 것이다. 가면서 연락을 하기도 하고, 소식 듣고 전화가 오기도 하고…. 순례는 그렇게 진행된다. 역시 권술룡 등불님다운 방식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순례는 미지의 세계로 안내하는 신비로운 힘을 가졌다. 설령 같은 장소를 가더라도 순례라는 이름으로 다가서면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된다. 권술룡 등불님도 그러하셨단다.
“그런데 순례에 나서니 실로 엄청난 세계가 열리더라고. 순례길 자체에서 만나는 무한한 세계도 있었지만, 더 감동으로 왔던 것은 역시 사람이었어. 처음부터 미래의 싹을 틔우는 곳을 찾는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실제로 삶의 현장에서 만난 느낌은 그 이상이야. 새삼스럽게 ‘아, 우리 사회의 희망이 이런 식으로 존재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냥 생각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 환하게 떠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어. 그런 거 있잖아. 똑같은 것을 보고도 예전에는 못 느꼈는데, 어느 순간 진실을 본 것 같은 거.”
권술룡 등불님은 그러한 가정에 ‘대한민국의 신명문가’라는 명칭을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전의 명문가들은 권력과 재물을 기본으로 학문의 독창성, 삶의 방식에 대한 특별한 고집, 청렴성 등 특별한 가치관과 명예의식을 특징으로 한다. 물론 권력과 재물이라고 하여 지금과 같이 냄새가 나는 권력과 재물이 아니다. 그리고 단순히 권력을 가진 사람이나 재산이 많은 사람을 명문가라 부르지는 않았고, 무엇보다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의 이행이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서양식으로 말하자면 노블리스 오블리주다.
“굳이 신 명문가라고 새로운 이름으로 칭하는 것은 과거의 명문가와 어떤 차별성을 두고 하신 말씀이실 텐데요.”
“지금은 생명평화위기의 시대잖아. 지금 시대의 명문가는 생명평화위기의 시대에 희망을 키우는 곳, 평범함 속에서 미래의 싹을 키우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말하자면, 대안적인 삶을 가꾸고 있느냐가 기준이 될 수 있겠지.”
등불님은 한편으로 그분들이 그렇게 훌륭한 대안적인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너무 겸손하기만 한 것이 아쉽다고 했다.
“겸손은 훌륭한 삶의 자세지만, 자신의 현재 삶에 좀더 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만나는 가정마다 등불님께서 느끼신 바를 가지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하게 되더라고 했다. ‘생명평화의 삶을 살겠다는 결의와 실천을 더욱 자기정체성으로 확인하며 살자’는 당부와 같은 것이리라.
그 말씀을 들으면서 문득 생명평화결사 등불님들에게 ‘생명평화신명문가’라는 문패를 달아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될 것 같은 게 그동안 권술룡 등불님이 방문한 가정들을 살펴보니, 우리 등불님들의 가정과 많이 겹치고 있었다. 일부러 등불님들 댁을 찾아간 게 아닌데도 말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되새긴다. 우리 등불님들이 현장에서 가꾸고자 하는 삶, 그 ‘단순소박한 삶’이야말로 생명평화위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도덕적 의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섬진강 둑에 앉아 햇빛 아래 밝게 빛나는 모래톱을 바라본다. 부서지고 작아져서 과거의 기억마저 희미해지면 저렇게 밝게 빛날 수 있을까. 그 작아진 존재들이 너와 내가 없어진 경계에서 서로를 껴안고 누워있는 모습이 새삼 느껍게 다가온다. 그 모래톱 위에서 생을 이어가는 앙상한 작은 나목은 갠지스강에서 기도하는 사람들 같다. 생명평화명문가들의 모습이 잠깐 스쳐간 듯도 하다.  


누구나 생에는 빛나는 무언가가 있다.

권술룡 등불님의 70평생 삶은 파란만장한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얼핏 보면 매우 엉뚱하고 무모하게까지 보이는 삶의 역정이다. 

“권술룡 님은 65세가 된 젊은 청년, 아니 어린 아이다. 생각이 언제나 파릇파릇하여 엉뚱하고 생뚱맞다. 무모하리만큼 생경하다. 그냥 주먹구구식이 많다. 그런데도 그게 된다. 아주 치밀하게 준비하고 노력하고 계획한 것 이상으로 된다. 그리고 그 일은 그 뒤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때때로 유행이 되기고 하고, 시대를 앞서가는 발상이 되기도 한다. 이번 유럽 여행만 하여도 그렇다. 그분이 생각을 무지막지하다고 할 만큼, 그러나 살곰살곰 밀고 나가지 않았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워낙 오래도록 바닥 생활을 하여 본 체질이라서, 생각을 이루어 나가는 방법을 온 몸으로 다 익히고 있는 듯이 보인다. 우리 시대의 기인이면서 귀인이라고 본다.”
이번에 생명평화결사의 포럼위원장이 되신 한남대 김조년 교수가 몇 년 전에 하셨던 말씀이다. 어떤 분은 “무어든 필요한 일은 그냥 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면서 이리 재고 저리 재는 자신의 모습이 더욱 부끄러웠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권술룡 등불님을 여기까지 밀고 온 힘은 무엇이었을까.
“글쎄, 아마도 첫째는 스승의 존재라고 해야겠지. 함석헌 스승님의 영향이 평생을 지배했던 것 같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젊은 날의 자존감이랄까 그런 것이 있었어. 화재사건 나고 혼자 책임지고 감옥 가던 일, 다시 흙벽돌을 만들어 밤을 새워 집을 짓던 일, 또 곡절이 있을 때마다 있었던 도움들… 살아오는 과정에서 내 생에도 빛나는 무언가가 있음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떠올랐다. 사람 속에는 사랑이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지금 내가 당장 무엇을 해야 할까, 내일은 어떻게 될지를 알만한 지혜가 없다. 그러나 결국 내가 힘들고 지칠 때 결국은 나를 사랑해주는 이들의 마음과 내 안에 있는 사랑으로 다시 일어서게 되는 것이라 했다. ‘내 생에 빛나는 무엇’은 그런 과정에 드러나는 존재감일 것 같다는 느낌.

늙은 전사의 순례는 계속된다
등불님은 생명평화탁발순례를 중심으로 했던 제1기를 지나고 제2기를 시작하는 생명평화결사에도 당부를 잊지 않는다. “생명평화결사가 제2기에는 생명평화의 생활화, 순례문화의 활성화라는 것에 목표를 두었는데, 특히 순례학교를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하면 좋겠다.”
그러고 보니 권술룡 등불님은 작년 생명평화대회에서 생명평화결사 5년과 탁발순례를 평가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5년을 길에서 걸었다는 것만으로도 감동할만한 일이다. 위기의 시대에 흔들리지 않고 이렇게 한결같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다. 저는 예전에 있었던 우리쌀지키기 100일 대장정의 설레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진행하고 있는 탁발순례 5년도 경이롭다. 탁발순례가 끝나면 새로운 과정을 거쳐서 이런 순례운동이 국민운동으로 계속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100일 걷기, 혹은 한 달 걷기 등과 같은 것이 지역에서 계속 이어지면서 계속 불을 지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새로운 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있는 것들에 생기를 불어넣고 엮어내는 것이 정말 생명평화결사가 할 일이지 않겠는가.”
아, 등불님은 대회에서 말씀하셨던 일들을 스스로 이미 실행에 옮기고 계신 것이었다. 권술룡 등불님은 그런 분이다. 마치 목마르면 물마시고 배고프면 밥먹듯이 생각을 실행에 옮긴다.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순례가 끝나고 나면 등불님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실까. 대전지역의 복지관련 일들에서 소임을 내려놓았을 뿐이지 그간 해오던 일들은 계속될 것이었다. 평화의 마을 공동단식, 20년간의 소록도방문, 20년전 대전 애육원 친구들과 시작했던 청소년 조국기행, 그리고 벌써 10회가 된 세계생태공동체 순례, 새롭게 계획하고 계시다는 지구촌인디고청소년여행학교… 지금 대표를 맡고 있는 인도의 원주민농촌마을(달릿.불가촉천민마을)의 여러 마을에서 펼치고 있는 <생명누리공동체>의 제3세계를 향한 모델… 그리고 생명평화결사의 일도 가능한 시간을 많이 내시겠다고 하셨다. 권술룡 등불님은 보다 넓은 세상에서 여러 사람들의 길동무로 어울려 살아갈 것이다.
섬진강의 물결이 나비의 날개짓처럼 흔들리듯 고요하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처럼 오늘도 길을 걷고 계신 권술룡 등불님은 계속해서 조용히 일을 벌일 것이다. 내면에 뜨거운 열정을 안고. 사람들은 또 옆에서 말할 것이다. ‘역시 권총님이셔. 또 일을 벌였군.’이라고.
늙은 전사의 행진은 그렇게 계속 되고 있다.
*권술룡 등불님의 순례길에 대해서는 http://cafe.daum.net/kwonsay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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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지행 등불님은 지리산 산내에서 지역공동체 운동을 하다가 생명평화결사의 사무국장 소임을 맡아 5년간 생명평화탁발순례와 함께 했습니다. 현재 지리산으로 복귀했으며, 점심시간이면 논둑길을 걷거나 나물캐기를 즐길 수 있음에 무척 행복해한다. 
* 이 글은 생명평화결사에서 발행하는 <생명평화등불> 14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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