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30

다석과 씨알/咸錫憲 翁을 생각한다-장성환 > 회상(일화) | 바보새함석헌

다석과 씨알/咸錫憲 翁을 생각한다-장성환 > 회상(일화) | 바보새 함석헌

다석과 씨알/咸錫憲 翁을 생각한다-장성환

작성자 바보새 14-05-07 07:51 조회723회 댓글0건

다석과 씨알장성환

 
다석(多夕)을 일컬어 측근의 사람들도, 기인(奇人)이니, 도인(道人)이니 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기인도 도인도 아닌, 너무나 당연한 진리를 찾아 나선 사람이요, 어떻게 보면 하느님께서 오는 ‘소리’를 들은 사람입니다.
  그분은 크고 높은 산(山)과도 같아서, 더듬어 올라가 알고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간디가 자기의 깨달음을 ‘실험된 진리’라고 했지만, 다석의 글이란 깨달음에서 흘러나온 글이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이야말로 하느님의 음성의 수신기(受信機)가 되어, 들은 말씀을  적었을 뿐입니다. 
  그는 칸트가 ‘실천이성비판’ 머리말에서 한 이야기처럼 “하늘의 반짝이는 별과 자기 양심을 열어 보려고”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칸트의 이 이야기가 어릴 때부터 그 분 어머니에게 들은 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석은 하느님께서 들은 소리가 있어서 제 소리를 한 분입니다. 
  그는 동경물리학교도 다녔으니 수학이나 천문에도 조예가 있었고, 또 인간의 깊은 심성에도 이해가 깊었습니다. 
  그가 늘 하시는 말처럼 천철(天徹)하는 마음하고 지투(地透)의 정신을 가지고 자기와 진리를 찾았던 사람입니다. 
  “씨알”이라는 말은 다석의 말에서 유래되고 그것을 함석헌 옹이 “씨알의 소리”라고 해서, ‘소리’를 붙여서 널리 모든 사람에게 알리려고 한 것입니다. 
 이 ‘씨알'이라는 말은 나락의 종자(種子), 즉 곡식의 씨를 말합니다. 
  비근한 보기를 든다면, 라이프니츠라는 사람이 현미경이 발견될 무렵, ‘모나드’라는 이론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나드’속에는 하느님이 처음 우주와 세계, 그리고 모든 동물과 씨앗을 만들 때, 창조의 기운이 어디에나 다 들어있다는 내용의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석은 ‘씨알’에 깊은 관찰과 유래를 보아냈습니다. 
  농가에 가보면 처마 끝에 내년 씨뿌릴 씨앗으로, 제일 잘 여문 종자를 달아매 두었다가, 그것을 땅에 씨뿌립니다. 그래서 더  좋은 곡물로 생장하게 하지요. 
  그래서 ‘씨알’은 모든 것이 처음  생장하는 시작과 근거가 됩니다. 
  ‘씨알’! 그 종류의 다양함과 그 생장의 모습, 그리고 섭취하는 영양, 또는 흙이나 기후의 여러 조건도 수반이 됩니다. 
  그러나 이 ‘씨알’의 개량이나 생장시키는 사료나 조건도 문제되겠습니다만, 평범하게는 그 토양과 기후가 제일 문제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다석을 이 ‘씨알’을 놀고,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의 계절을 두고, 이 ‘씨알’을 이야기합니다. 씨앗은 시간과 많은 연관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봄에는 씨를 뿌리고 여름에는 자라고, 가을에는 열매맺고, 겨울에는 거두어들여, 다음 해의 씨로 종은 다시 저장합니다. 
  다석이 물리학이나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이신데, 왜 농경시대의 ‘씨알’로 진리를 비유하고 있을까? 의심도 됩니다. 
  그러나 ‘씨알’로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자신의 생각과 뜻을 잘 피력할 수 있다고 해서 한 것인 줄 압니다. 
  봄에 씨를 뿌린다. 춘종(春種)입니다.
  여름에 자란다. 하성(夏盛)합니다. 
  그리고 가을에 추수(秋收)합니다. 
  마지막 겨울에 동장(冬臧)한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 마지막 겨울에 동장(冬臧)한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 마지막 겨울에 ‘씨알’을 등장시키는데, 다석은 큰 뜻을 두었습니다.
  동장(冬臧)이야말로 ‘씨알’의 최후의 생명이 결판이 나는 때입니다. 
  그것을 인생에 비유해서 다석은 동정(冬貞)이라는 말을 자주 썼습니다. 
  그 뜻인즉, 인생의 마지막에 잘 고디를 지켜서, ‘씨알’로 잘 제 기능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동장(冬臧)에서 동정(冬貞)을 지키느냐 못지키느냐에서 ‘씨알’의 승부가 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결정(潔淨)·결정(決定)·결정(結晶)이라는 말을 늘 사용했습니다. 
  물론 첫 결정은 구체적인 몸을 깨끗이 하는 일이요, 두 번째 결정은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은 결정하면서 사는데 그 기준이 늘 진리의 궁극적 실재여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 인격이 영그러져 갑니다.(結晶)
  그래야 〈제〉, 참 하느님 앞에서의 〈나〉가 드러나고 나타나 옵니다.
  다석은 한국말이 가장 신학적이라고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영어로 ‘I’라고 하는 이 〈나〉, 독일말로 ‘Ich’보다도 〈제〉와 〈나〉의 두 가지 말이 한국말에는 있는 것을 몹시 귀하게 여깁니다. 
  그것을 설명하면서, 이조시대의 양반과 상놈계급이 있을 때 쓰던 말같지만, 〈제〉라고 하는 말은, 실은 태아시절이나 또는 관뚜껑이 덮였을 때, 절대적인 생명의 주인 앞에 선 〈제〉, 즉 〈나〉가 선 자리라고 봤습니다.   그러니 이 ‘제가 무얼 압니까?’라는 말은 실로 하느님 앞에 선 자의 말이요, 유아로 남아있는 바른 자아에 붙인 이름이라고 봤던 것입니다. 
  그래서 겨울을 지내면서, ‘씨알’의 본성을 그대로 지니는 것을 다석은 ‘씨 ’의 소임으로 여겼습니다. 
  이 동장(冬臧)에서 동정(冬貞)을 지키는 이가 신앙을 지키는 이라는 뜻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마다 퍼즐놀이처럼 각기 제나름대로의 본 것이 있고 또 그렇게 있게 하신 분을 향해 살아갈 당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석의 ‘씨알’은 그것이 민초니 하는 또 민주주의에 있어서 한사람 한사람이니 하는 뜻보다도, 루터가 말한, ‘우리 크리스챤은 만민을 섬기는 머슴이면서, 동시에 만인의 제왕이다’라고 했던 생각에 더 가깝다고 하겠지만, 거기에 고답적인 뜻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 씨알로 표시되는 〈나〉, 즉 〈제〉라고 하는 의미에는, 〈제소리〉, 〈제자리〉, 〈제나름〉이라는, 하느님 앞에 선 자기를 말하니 그 뜻은 근대철학에서 말하는 자아관(自我觀)하고는 다릅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하는 고로 있다’ ‘고기토 에르고 숨’도 아니요, 타자와 나를 구분하는 그런 객관에 대치되는 주관(主觀)도 아닙니다. Sein과  Dasein의 관계도 아닙니다.
  차라리 모세에게 나타난 하느님,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느님이라고 하는, 히브리적 개념이 더 농후합니다. 
  그래서 ‘씨알’은 농경시대의 말투같고, 어딘가 컴퓨터 인터넷의 시대에 미달된 용어같지만 생명과학에 있어서 놓쳐서는 안되는, 생명의 불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베르그송이 말하는 또는 M·Buber에게서 보는 것 같은 〈나와 너〉 또는 생명철학에서의 ‘순수지속’적 생명만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씨알’속에는 단순한 것 같으면서, 세미한 모든 의미가 함축이 되어 있습니다.
  그 ‘씨알’의 내용의 깊이에 감득한 함석헌 옹은 스승의 ‘씨 ’에다가 마치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선구자가 되어 길을 알리는 것처럼 거기에 ‘소리’가 되겠다, 그 이치를 펼치겠다고 해서, ‘씨알의 소리’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니 이 ‘씨알’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말하는 민중이다. 또 그 ‘소리’는 민중의 소리 , 민주주의의 한 사람 한 사람을 뜻한다고 하는, 평면적인 용어만이 아니라, 위에서 배형(配亨)되어진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의미가 더 농후합니다. 
  그래서 다석은 일제에 의해 오산학교의 교장직에서 쫓겨나신 후 평생 세검정에서 사시면서 YMCA 성경연구반에서 몇 사람을 놓고 자신의 소신을 이야기했지만, 그것이 하느님이 주신 ‘제소리’이기에 무게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덧 ‘씨알’은 곡식의 씨알만이 아니라 나도 모르게 인격의 씨,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아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신 ‘imagoder’, 하느님의 형상의 씨앗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늘 우리는 결정(潔淨)·결정(決定)·결정(結晶)하면서, 하느님의 아들이 보여준 부활의 씨를 지닌, 영생하는 하느님 나라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 이해에 있어서도 제나름대로의 생각이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사)
 
 
咸錫憲 翁을 생각한다2003년 1월 21일 퀠른에서
   명산(名山)이나 영산(靈山)을 보자면 산록에서부터 능선이든 계곡을 따라 한 걸음씩 올라가며 봐야 어느 정도 봤다고 하겠다.  그와 같이 남을 이해하고 그려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데, 함선생님을 내가 생각한다고 했는데, 그 말 자체에 어패가 있다.  나에게 비쳐온 인상이라고 하는 것이 정직한 표현이다.  언젠가 어린 시절 나에게 영향을 미친 분이여서 한번 기록해 두고 싶었고, 다음 세대의 젊은이에게도 알리고 싶었는데, 내가 독일에 온다고 하니 그 손자가 되는 현필군이 틈이 나면 함선생님에 대한 소감을 써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펜을 들기는 했지만, 나와 함선생님의 나이가 30년이라는 차이가 난다.  그리고 또 나는 독일에 17년 있는 동안 선생님과는 많은 단절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직접 만났거나 대면 한 때의 인상만이라도 적는 것이 훗날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세 번 38선을 넘었다.  첫 번은 1946년 해방된 다음해이다.  친구와 같이 서울에 나왔다가 친구가 병이 나서 고향 회령으로 데려다 주고, 난 다음해 47년에 남하하였다.그러니 세 번인데, 그때 예성강(禮成江)을 넘던 일이 문뜩 생각난다.47년 그때 서울대학이나 경기고등학교나 다 학생이 부족하고 누구나 다 학교에 가서 수강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서울대학에서 영문학 강의하는 교실에도 특히 일인들이 많았다.  경기고등학교도 가서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숙식도 할 수 없는 처지여서 늘 들린 곳이 옛날 벽돌로 지은 서울 YMCA였다.  거기에는 난로도 있고 따스하고 금요집회라는 광고가 있는데, 늘 오후 2시면 함선생님의 강연이 있고, 뒤이어 유영모 선생의 말씀의 시간이 있었다. 그때 함선생님의 말씀을 조금씩 들려오는 것이 있었지만, 유선생님 말씀은 한국말인데도 나에게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특히 겨울이면 그것이 따스하고 좋아서 늘 들렸다. 실은 그때 나는 함선생님을 멀리서 보곤했다.  그때 함선생님은 50을 좀 넘은 나이였으리라.  그런데 고무신을 신고, 흰 두루마기에 그 독특한 수염, 그리고 책보를 끼고 다니시던 모습이 유달리 멋이 있었다.
  늘 뒷자리에 앉았다가 누구보다도 빨리 이야기가 끝나면 나오는 17세 소년에게 선생이 눈길을 돌려 줄 리가 없다.  함선생님 강연에는 100여명이 몰렸다가도, 유선생님의 걍연에는 그 10분의 1도 못되는 10명 이내의 사람들이 늘 듣곤 하였다. 그러나 함선생님이 역전 세브란스 병원 강단에서 말씀 할 때는 800명도 몰렸던 기억이 나고, 특히 6.25동란이 나던 때는 예언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다.  꿈 이야기인데, 솥가마가 남쪽으로 기우려졌더라고 하면서, 부산피난의 예고까지 하신 일이 있다.
  그러나 그때 나는 함선생이 어떤 분인가를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나 혼자서는 마음으로 스승으로 모실만하다고 생각했고, 남에게도 그 분의 이야기를 한 것만 같다.
내가 연희전문 신학원(48년)에 들어가면서부터 좀 뜸했고, 다시 선생을 찾은 것은 52년 6.25동란이 나서 의지할 곳이 없어서, 의무병 간부후보생(5기)에서 포병장교가 되어 (포병학교 18기) 일선으로 가기 전, 선생의 충정로 집을 찾았을 때이다.  일선으로 간다고 하니 그때 하시던 선생의 말씀이 지금도 귀에 들리는 것 같다.  나는 무슨 귀한 가르침이라도 주는 줄 알았는데, 한마디로 일선에 가는 나더러, "오입하지 말라". 나는 처음은 귀를 의심하고, 또 선생님이 그런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데 실망도 느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은 적중했다. 부임한 당시 11사단은 위안부들이 와서 장병들을 위로한다고, 천막을 십수개 쳐놓고 성행위를 하는 것이다.  아마도 장교도 사단참모도 다 그 일을 하는 것을 보고 선생은 인간을 알고, 전쟁의 참상을 알고 계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 후에 생각한 일이지만 선생은 나에게 정곡들 찌르는 이야기를 하셨다고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우리 나이 또래의 학도병장교들이 그 후 얼마나 많이 전사한 이들이 많고, 또 살아 남았다해도 성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6.25동란 동안 (22-27세) 정말 몸을 깨끗이 간직한 일을 고맙게 생각한다.
나는 다시 57년에 학교 (그때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에 복교하고서는 공부를 하느라, 또 교회의 중, 고등학교 교사노릇을 하느라 선생님과의 접촉은 별로 없었다.대학과 대학원을 나오고 1960년부터 서울복음교회 목사로 시무하면서 이따금 선생님을 교회에 모신 일이 있어서 사귀게 되었다.
어느 해인가 Abingthon 출판사에서 Interpreters Bible 이 출판되었다는 광고가 나고, 한달 후 충정로선생님 댁을 찾았을 때, 그 1권이 책상 위에 놓인 것을 보고, 이 어른이 참 학구열이 강하다는 사실을 느낀 일이 있다.
  그 후 추운 겨울이었는데 선생님이 전화를 걸어왔다.  요건은 말씀하시지 않고, 종로에 있는, 사상계사로 지금 나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곳으로 갔더니, 처음 장준하씨 사무실에서 선생을 만나고, 셋이서 같이 국일관이란 곳에 가서 점심을 먹자는 것이다.
그때 선생님을 '사상계'라고 하는 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어떻게 보면, 그 사상계 때문에 함선생님의 명성이 높아졌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이야기는 좀 새여나가지만 놀란 사건이 하나있다.  장준하라는 분이 대한 이야기이다.  아주 추운 겨울이였는데, 나는 외투를 입고, 단 장갑도 끼였는데, 장선생은 양복만 입고 이 추운 날 맨손으로 나서기에, 내가 선생님 춥지 않습니까? 라고 하니, 중국에서 탈출할 때의 생각을 하고, 그 후 늘 그때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견딘다는 이야기에 (장준하의 '돌베게')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그리고 사상계사를 운영할 때의 이야기에서, 그 책에서 나오는 수입은 원고를 쓰신 분과 직원들과 다같이 나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함선생님도 장준하씨를 아낀 이유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함선생님과 같이 사귀이게 된 것은 독일(72-89)에 가서 있을 때 부터이다.
함선생님이 두 번 유럽 여행에서 우리 집을 찾아오셨다.  한번은 영국정부가 초청해서 다니실 때이고, 단 한번은 미국 국무성초청으로 유럽도 오셨을 때이다.첫 번은 안병무박사가 동반하고, 두 번째는 퀘이커교도라고 하면서 젊은 청년과 같이 왔을때이다.혼자 오셨을 때 내가 목회하던 교회(Aachen, Duisburg, 그리고 몇 교회)에서 말씀을 하시라고 했더니, 선생님은 확실히 사람들의 심정 깊은 곳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시라는 생각이 든다.
Aachen에서 이야기를 하시라고 하니, 찬송가를 접어놓고 '나의 살던 고향을' 선생님이 선창하시는 것이 아닌가?  이야기 전에 아버지를 만나기나 한 듯이 이쪽 저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리고 이야기를 듣기전에 모두가 눈물바다가 된일이 있었다.  그것은 무슨 기술이 있어서가 아니다.  젊은 나이에 남의 땅에 노동하러온 젊은 남녀들의 일생을 생각하고, 아버지가 되어서 우신 그 분의 측은한 마음의 단편이라고 생각이 든다.
  두 번째 오셨을 때의 인상은 두가지 이시다.  하루 아침은 새벽 4시인데 침실에 선생님이 안계시다.  변소를 봐도 없고 해서 미명이어서 창밖으로 봐도 아무것도 잘 않보이는데 우리집(Duisburg Lange kamp 6) 맞은편 500년된 교회가 있는데, 그 숲속에서 나타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독일어 한마디 모르시는 분이 어쩌자고 그 숲속에 계셨는가고 하니, 웬일인지 한국의 사정이 불안해서라고 하시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후 박정희씨의 有故하는 사망사건이 일어났다.선생님에게는 육감이라는 것이 있었나보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우리집 큰아이가 Gymnasium, 1년인가를 할 때인데, 작문시간에 글을 썼는데, 함선생님에 대해 쓴 글이 담임선생님이 우수작이라고 해서 읽어 주었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그때 우리 마을 키야메스(교회축제)가 우리집 앞과 국민학교앞 광장에서 열렸는데, 사람들이 웅성거리니 나가자고 해서 같이 나갔다.  그때 호메이니라고 하는 분이 불란서에서 자기나라(이란)로 돌아가 정치수반이 되어, 유럽에서는 큰 사건중의 하나였는데, 선생님이 나가자고 해서 나갔더니, 호메이니가 왔다고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걷잡을 수 없었다.  그때 선생님이 저에게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쟁쟁하다.
"장목사 모자를 벗어들고 이 분들에게 나를 본 값을 받으라" 고 재치있는 농담을 하시던 유머러스한 목소리와 표정이 떠오른다. 생각해봐라! 한복 흰두루마기 차림, 그리고 그 멋진 수염, 그 위에 미소짓는 듯 웃는 선생님의 얼굴은 누구도 반할만한 미남이시다.선생님이 우리집에 계시다가 떠나가니 아이들이 친할아버지가 가시는 것처럼 아쉬워했다. 그때 찍은 사진이 지금도 내 서재에 있고, 또 유학생들의 모임이 Berlin에 있을 때, 당시 Berlin 개신교회 감독인 Sharp 감독과 같이 찍은 사진도 있다.
그러나 함선생님과 사귀고, 그 어른이 나를 기억한 것은 사소한 일에서이다. '씨알의소리'가 경제란으로 폐간 위기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1000DM(마르크)를 선생님에게 송금한 일이있다. 그랬더니 긴 봉함엽서에 또박또박 큰글씨로 편지를 써 보내주셨다. 거기에서 선생은 나같은 사람도 자신의 제자로 끼여준 것인 줄로 안다.
박정희 정권 시절 한국으로 드나들지 못하다가 WCC 세계교회가 주최하는 인권회의 때, 독일 대표단과 같이 가서 선생님 댁(그때는 충정로가 아닌 쌍문동)을 찾은 일이 있다.아마도 그 무렵 선생님의 전집도 나오고 해서인가? 온실에 화초도 많은 그런집에서 지냈는데, 방문하니 자신의 책에다가 서명을 해서 몇권 주었다.
나도 외국 상황이 바쁜지라 선생님과의 교신(交信)을 못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꿈에 함선생님이 나타나더니, 어디론가 간다고만 이야기했다.  이상하다고 해서 수소문하니 선생님이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해 계시다고 한다.  그래서 친구에게 알려서 한번 병원으로 찾아보라고 했더니, 그 친구의 말이, 선생님의 임종하던 날, 비망록 마지막에 내 이름과 자기의 이름이 기록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이세상에서 스승 만나기, 그리고 제자 만나기란 정말 어렵다.  그런데 선생님에게서는 어떻게 생각할는지 몰라도 나의 17세부터 지금 내 나이에 이르는(74세) 이때까지 스승이라고 하면 두서너분 들 수 있는데(한국인) 그중의 첫머리에 서 계신 분이다.
多夕, 함선생님, 白永欽목사 그리고 長空선생을 잊을 수 없다.
나는 그분의 깊고 높고 오매한 사상을 잘 모르지만, 짐작은 한다.  30대에 '뜻으로 본 한국역사' 그 基底를 成三門을 기저로 하고, 한국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본 참 귀한 史觀이다.그분은 구심력과 원심력의 균형을 잘 잡으신 분이다. 뻗어만 가는 H.G. Well의 사관에, 그 핵을 십자가에 둔 것처럼 成三門이라는 한국종 인간 아니 영원한 인간상에 두었다는 이 두점의 일치이다.
  '수평선 넘어'라는 그의 시를 읽고, '종달새에게 부침'이라는 시를 쓴 셀리에 버금하는 그의 시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선생은 장자나 '바가바드기타'에도 심취하고 계시다.  한마디로 말하면 정말 志士이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라는 찬송을 두루마기 옷고름을 여미시고 부를 때에의 그분의 모습은 정말 그분의 생각이 몸밖으로 무지개처럼 피어나는 것이 아닌가?  그는 사람의 가슴에 먹물이 아닌 고통과 맥박과 피로 쓰는 영혼의 산파이시다.
선생 생전에는 한마디 고맙다는 인사도 못한 내가 오늘 이 독일땅 퀠른 땅의 집에 와서 선생님을 생각하면서 고맙다는 절을 머리 숙여 드립니다.  늘 평안하소서.
 장성환 올림

더욱 솟아 있는 두어른,  유영모 함석헌
 나이 60이나 70이 되어도 남의 책을 옮기는 이들은 무엇인가  찾고 있는 이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개 50이 되면 자기 나름의 것을 체계화하거나  자기소리를 냅니다.  그래야 또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상한 일도 있는데, 남을 것을 정말 좋아해서 그거에 전력을 다하는 이들을 봅니다.
위그리프라고 하는 분이 영어성경을 번역한 일이나, 루터가 독일말로 성경을 옮긴 일은 그것을 정말 심취해서라기보다 그것이 진리라고 믿고, 죽을 듯 살 듯 모르고 혼을 기울인 덕택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뜻에서 저는 유영모선생의 <늙은이>(노자의 도덕경)을 참으로 진기한 책으로 봅니다.  개중에 사본의 차이로, 또 해석의 약간의 흠이 있는데가 있다고 해도 유선생님을 이해하는데 이<늙은이>를 제외하며는 그분의 참 진면모를 모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6년 넘어 그 분이 옮겨 놓은 <늙은이>를 읽어갑니다만 티끌만치도 다른 소리가 없이 곱게 그리고 정확하게 노자의 깊이를 후대의 누구에게 알리고 싶었는지 유언처럼 옮겨놓은 글인데, 그것이 유선생님의 진실인 것 같아 자꾸 돋보입니다.
안회가 공자님을 보고, 선생님의 생각을 뒤쫒아 간 듯이 생각이 될 때, 선생님은 또 위에 계시더라는 이야기가 있읍니다만, 유선생님이 그런 어른이신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분의 제자라고 하는 함옹에 대해 타고난 천재적  소질이 계신분이요, 어느 신문사의 논설을 쓴다면 사람들을 많이 감동시킬  분이신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 그 분이 60이 되는 때 Khalil Gibran의 예언자를 옮겼습니다. 저는 그 책을 보고 싶은 생각이 난 것은 영어로 번역된 것을 이번 독일방문길(2003년)에서 읽고, 함옹의 구도력에 놀랐습니다. 그 어른이 누구의 책을 번역할 어른이 아닌데, '예언자'를 옮겼습니다.
그래도 30대 40대에 한 것이 아니라, 두어른이 다 60, 70대에 한일이라는 생각을 하니 머리가 숙여집니다.  그 나이가 되어도 마음에 와 닿은 소리가 있으면 견딜수 없는 진리의 흔적에 대한 감동이 있어서의 일입니다.
<늙은이>를 마치 자기의 유언장처럼 옮기신 다석, <예언자를>를 마치 자기의 최후의 말씀처럼 옮기신 두분의 진리를 향한, 구도력에 대해 그리고 <늙은이>의 첫장(도)와 마지막장의 (덕)에 대한 끝맺음이 그렇게 희안한 책이 또 어디에 있는가 싶고, 함옹의 '예언자' 지브란의 마음을 통해 선생의 인생의 끝을 마무리지는 것은 아닌가 싶으면서, Gibran의 '죽음에 대하여'를 읽고서는 정말 머리가 숙여지는 느낌을 받아서 한자 적습니다.
인생의 다 가는 날에도 이세상을 가는 사람들에게 정말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그것이 누구의 것이 였든지간에 마음으로 혼으로 옮겨서 밝히시는 두 어른, <늙은이><예언자>는 다석과 함옹을 이해하고 귀하게 여겨야하는 이생에서 저생으로  가는 가장 정확한 이정표같게 여겨집니다.
표현이나 말씨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수 없다'고 하신 분을 둘러쌓고 있는 인생의 북극성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2003년 11월 1일  독일에서   장성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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