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14

나당연합군에 패한뒤 정권 흔들… 백제와 운명 같이한 倭



나당연합군에 패한뒤 정권 흔들… 백제와 운명 같이한 倭

나당연합군에 패한뒤 정권 흔들… 백제와 운명 같이한 倭
주성하 기자 , 허문명 기자
입력 2015-07-02 03:00

[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11>백강(白江)전투
금강은 말없이… 탁 트인 금강(백강) 하구의 모습. 1300여 년 전 이곳에서는 신라-당 연합군과 백제-왜 연합군 총 22만여 명이 맞붙은 대전인 ‘백강 전투’가 벌어졌다. 동아시아 최대 해전으로 기록된 이 전투에서 숨진 병사들이 흘린 피로 바다가 핏빛으로 물들었을 정도였다고 문헌들은 기록하고 있다. 지원군으로 파병된 왜군 4만여 명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어 이후 정권의 존립 기반까지 흔들리게 된다. 동아일보DB
수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김용운 전 한양대 교수는 최근 펴낸 ‘풍수화(風水火)-원형사관(原型史觀)으로 본 한중일 갈등의 돌파구’라는 책에서 663년 백강(白江·지금의 금강 하구)에서 신라-당(唐) 연합군과 백제-왜(倭) 연합군이 맞붙은 ‘백강 전투’가 오늘날 한중일 관계의 틀을 만든 핵심적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소한 데다 우리 역사교과서에서조차 거의 언급되지 않는 전투를 그는 왜 이렇게까지 주목한 것일까. 여기에는 그럴 만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전투에 참여한 백제군(5000명) 왜군(4만2000명) 신라군(5만 명) 당군(13만 명)의 수만 해도 총 22만7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였다. 김현구 선생은 ‘백강 전투는 당시 가장 많은 국가와 군사가 참전해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동북아 최초의 대전이었다’고 평한다.


백제는 이 전투를 계기로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신라는 당과 더욱 가까워지고 왜와는 멀어진다. 한반도와 왜는 각자 통일국가를 형성하면서 독자적인 정치체제와 문화를 갖게 된다. 중국은 백강구(白江口), 일본은 백촌강(白村江) 전투로 기록하고 있는 백강 전투가 일어났던 1300여 년 전 한반도로 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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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항전(抗戰)


우리는 흔히 의자왕 하면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삼천궁녀에 둘러싸여 나라를 망친 망국의 대표 인물로 생각한다. 하지만 백제는 멸망 직전까지 융성했고 막강한 국력도 갖췄었다. 의자왕은 즉위 이듬해인 642년부터 659년까지 총 8차례 신라를 공격했고 대부분 승리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에는 “백제를 치자”고 건의하는 김유신에게 진덕여왕이 “큰 나라를 침범했다가 위험하게 되면 어찌 하려는가”라고 말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당시만 해도 백제가 큰 나라, 신라는 작은 나라였던 것이다.

655년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하자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신라 북부를 침공해 30여 개 성(城)을 무너뜨린다. 659년 4월 백제가 다시 신라를 침입해 2개 성을 함락하자 신라는 당에 구원을 요청한다. 당 소정방은 이듬해인 660년 6월 13만 대군을 이끌고 내려온다. 당군(唐軍)은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 병사 5만 명과 함께 백제 도성인 사비성을 공격한다. 계백 장군이 5000여 병사와 황산벌에서 결사항전했지만 결국 사비성은 함락된다. 의자왕은 왕자와 장군 88명, 백성 1만2807명과 함께 당의 수도 장안으로 끌려간다.

이 사비성의 함락 시점을 백제의 멸망 연도로 보지만 사실 백제의 저항은 이후 3년이나 이어질 정도로 끈질겼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운 ‘백제부흥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백제 유민들은 사비성 함락 4개월 만인 660년 10월 주류성(周留城·용어 설명)을 임시 왕성으로 삼는 한편 왜에 긴급지원군을 요청한다. 20년 넘게 왜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왕자 풍(豊)을 급거 귀국시켜 달라는 청도 함께였다.

이후 왜가 보여준 대응은 마치 혈육을 대하는 듯 헌신적인 것이었다. 당시 왜왕은 사이메이 여왕(齊明天皇·재위 655∼661년)이었는데 여왕은 백제와 가까운 후쿠오카로 직접 가서 구원군을 준비시키고 오사카로 가서는 무기를 준비시킨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 동분서주하니 몸에 무리가 올 수밖에 없었다. 여왕은 661년 1월 6일 오사카 항을 출발해 여러 곳을 돌며 군사를 모으다 7월 24일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 혈맹이었던 백제와 왜

출병은 아들 덴지 왕 대(代)에서 이뤄진다. 덴지(天智) 왕은 어머니의 시신을 당시의 수도였던 아스카로 옮긴 다음 11월에 상을 치르자마자 출병 준비를 한다. 그리고 2년 뒤인 663년 총 4만2000명이나 되는 왜군을 주류성으로 파견한다.

육로는 신라군이 지키고 있어 부득이 바다로 갈 수밖에 없었다. 신라의 요청을 받은 당나라 수군은 663년 8월 27일 주류성과 가까운 금강 하구(백강)에서 백제와 왜군 연합군을 맞닥뜨린다. 일본서기는 당시 왜군의 전투 과정을 이렇게 전한다.

“당나라 장군이 전선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백강)에 진을 쳤다. 일본의 수군 중 먼저 온 군사들과 당 수군이 대전했다. 일본이 패해 물러났다. 당은 진을 굳게 해 지켰다.…다시 일본이 대오가 난잡한 병졸을 이끌고 진을 굳건히 한 당의 군사를 나아가 쳤다. 당은 좌우에서 군사를 내어 협격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관군(왜군)이 적에게 패했다. 물에 떨어져 익사한 자가 많았다.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 없었다.”(김용운 책에서 재인용)

당시 동원된 왜 수군의 배는 무려 1000여 척에 이르렀다고 한다. 중국의 ‘구당서(舊唐書·당나라 왕조의 정사를 기록한 책)’는 ‘왜국 수군의 배 400척을 불태웠는데 그 연기가 하늘을 덮었고 바닷물이 왜군의 시체들로 핏빛이었다’고 적고 있다.

막대한 희생을 치른 덴지 왕은 정권 자체가 흔들린다. 그가 죽자 아들 고분(弘文) 왕이 이어받지만 곧 작은아버지 덴무(天武)에게 살해당한다. 덴무는 백강 전투를 치른 지 9년 만인 672년 왕위에 올랐다.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한국판 세조가 된 것이다. 일본 역사학계는 이를 ‘진신(壬申)의 난’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 백제인들의 집단 이주

나라를 잃은 백제인들은 너도 나도 배를 타고 일본 열도로 건너간다. 3년 전 사비성이 함락되었을 때에도 왜로 건너간 백제인이 많았지만 대거 집단 이주가 시작된 것은 백강 전투가 결정적 계기였다는 게 역사학자들의 주장이다.

일본 고고학회 회장을 지낸 니시타니 다다시(西谷正) 규슈대 명예교수는 “백제 멸망과 유민의 대규모 이주는 일본 역사를 새롭게 쓰는 계기가 됐다”며 “백강 전투를 치른 7년 뒤인 670년에 왜는 국호를 일본(日本)으로 바꾸고 새롭게 태어난다”고 전했다.

김용운 선생도 왜로 망명한 백제인 중에는 왕족은 물론이고 귀족들과 지식인이 많았는데 이들의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왜가 통일국가 수립에 박차를 가한다고 전한다. 그는 앞서 언급한 책에서 “전투 이후 한반도(통일신라)와 일본 열도가 각각 통일정권을 이룬 것까지는 공통적이었지만 신라는 당 눈치를 살피느라 군사력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은 개척과 확대의 노선을 택하게 돼 한일 민족 간의 원형은 크게 갈라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반도와 열도라는 지형적 차이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국과 일본은 백강 전투 후 각각 율령제와 봉건제, 문(文)과 무(武), 중국으로의 질서 편입과 이탈이라는 정반대의 국가 체제로 갈라진다는 것이다.


다시 그의 말이다.

“백강 전투 후 한국인들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인들을 거의 잊었으나 일본인들의 집단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멸망한 백제에 대한 한과 복수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663년 일본서기는 ‘오늘로서 백제의 이름은 끝났다. 고향땅 곰나루(웅진)에 있는 조상의 묘를 언제 다시 찾을까’라는 비통한 글로 ‘백제의 한’을 기록하고 그 좌절감을 일본신국론으로 조작해 억지스러운 우월의식으로 전환한다. 이는 조선과 중국(신라와 당) 땅을 뺏어야 한다는 정한론으로 이어진다.”


백강은 오늘날 금강이 서해와 만나는 군산 앞바다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 주변은 가을이 되면 은빛 갈대밭이 장관을 이루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국과 일본 고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던 주변에 표지판이라도 하나 세워 한일 관계의 과거와 현재를 성찰하는 장소로 만든다면 이것이야말로 미래의 신(新)한일관계를 만드는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주류성 ::

백제의 마지막 거점. 위치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지금의 충남 서천군 한산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지만 충남 청양군 정산이라는 주장, 전북 부안군 위금산성이라는 주장도 있다.

허문명 angelhuh@donga.com / 다자이후=주성하 기자


※12회 ‘수성과 다자이후’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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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백강전투#나당연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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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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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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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서간
2015-07-02 10:02:17
백제는 큰나라 신라는 작은 나라였는데 어떻게 백강 전투에서는 백제군은 5천, 신라군은 5만으로 10배인가? 왜와 백제 연합의 신라 침략은 정당하고 나.당연합은 어떻게 외세 의존 동족 침략인가? 북한이 신라를 부인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것은 분명한 역사 왜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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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kh7788
2015-07-03 22:23:13
백촌강을고래로부터"하구스기노에"라고읽어왔다백석촌의만이라는뜻일본에서는냇물이름에강을쓰지않는다강을강이라하는예는없다강을천또는하라함금강.동진강의강자를쓰지않고천또는하자를쓴다강을에라고읽음은만을말하는것백강전투는만에서의전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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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k815
2015-07-02 10:43:22
꽤 똑똑한 분들이 많은 동네이나
작은 이익에 눈앞을 가려서
소탐대실하는 어리석음
나주에 귀향살이 몇년했던
교려멀 조선초의 정삼봉도
이런 특질을 '풍전세류'라는 짧은 사자성어로 지적한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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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k815
2015-07-02 10:38:13
지금 지방특색을 보아도
왜 그 강력하던 백제가 약한 신라에게 망했는지 알수가있는 대목이 많다
그 내용이야 그들은 물론 온 국민들이 다아는 일이다
부안이 결국 소요끝에 핵저장고를 수용하지못했을 때 경주는 거의아무런 문제가 없이 조용히 핵하치장을 접수한 일도 그 작은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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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서간
2015-07-02 10:02:17
백제는 큰나라 신라는 작은 나라였는데 어떻게 백강 전투에서는 백제군은 5천, 신라군은 5만으로 10배인가? 왜와 백제 연합의 신라 침략은 정당하고 나.당연합은 어떻게 외세 의존 동족 침략인가? 북한이 신라를 부인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것은 분명한 역사 왜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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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각수
2015-07-02 09:00:37
엉터리 글을 잔뜩 써놓으면 나중에 감당할 자신이 있나? 금강 하구에 22만 명이 들어앉아 있을 장소가 되는 거야? 강 말이 나왔으니 말을 하겠는데 양자강은 장강(長江)이라고 불렀으며 길이는 무려 6300킬로미터. 강(江)은 대하(大河)와 더불어 매우 큰 강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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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각수
2015-07-02 11:27:54

낙동강 하구에서 - 다시 강조한다. 낙동강 하구에서(수정)
육각수
2015-07-02 11:25:00

낙동강 하구에서 김해와 부산은 좀은 떨어져 있고 그 하구에 아주 작은 마을이 있을 순 있지마는 김해나 부산의 개념은 아니다. 그러나 백촌이라면? 白은 무엇인가? 百(백)에서 하나를 뺀 99촌(村)... 부락... 촌장이 살 거고... 이건 무조건 장강 하구이다.
육각수
2015-07-02 11:22:52

백촌강... 백촌강... 백촌강 ... : 강 하구에 매우 큰 촌락 (백촌)이름을 따서 백촌강... 白(백)은 百(백)에서 하나가 모자라는 99를 의미한다. 99촌(村)이라면 이건 엄청나다. 엄청난 부락이다. 두말도 필요 없이 백촌강은 양자강 하구이다.
육각수
2015-07-02 11:15:47

말이 길어지다 보니 죄송. 주제에 벗어난 부분은 스스로 자삭하였습니다.
어떤 특정 직업群(군)에게 밥벌이 수단? 지장을 줄 수 있는 문제라서. 분명한 것은 전 그러한 계통을 전혀 알지 못하며 매우 멀리하고 있습니다.
육각수
2015-07-02 10:25:32

추정 - 증명(수정) 일식 기록을 과학적으로 분석한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는 훨씬 더 길었을 것으로 판단이 되며 삼국의 서울이 모두 지금의 중공에 오랜 세월 동안 있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매우 분명하게 알 수 있고 증명이 될 것으로 본다.
육각수
2015-07-02 10:24:01

'고려사' 원본이 나와야 되며 일식이나 월식 등... 그러한 기록을 찾아서 대한민국 고대사에서 보는 나라의 서울을 과학적으로 추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육각수
2015-07-02 10:23:52

이 海君(해군)은 당시에도 상당한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손바닥 같은 신라와 왜 평화공존하겠는가? 고려사절요가 아닌 109권의 방대한 역사서라고 하는
육각수
2015-07-02 10:21:47

이 평화가 오랫동안 이루어진 것을 보면 통일신라의 막강한 국력을 알 수 있다. 당(唐)이 수군(水軍)을 가졌다는 것은 지금의 해군(海軍)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육각수
2015-07-02 10:21:25

그 이유는 통일신라는 상하가 화합하고 부모와 자식이 공경 및 사랑하며 풍속과 문화가 밝고 예의가 바르며 군사들은 질서졍연하면서 정예화가 되어 있고 임금과 신하가 서로 믿고 따르며 존경하는 사이가 되어 있어서 당이 쳐들어오지 못하고 평화를 택한 것으로 보아야.
육각수
2015-07-02 10:21:10

그런 감정도 있고 해서 당은 다시 힘을 길러서 통일신라를 치려고 하였으나 통일신라로 쳐들어가지를 못했다.
육각수
2015-07-02 10:15:41

당을 멀리 쫓아내는 과정에서 의자대왕을 다시 당으로부터 귀환을 시켰거나... 다른 양보를 당에게 하고. 당이 망할 지경이 되니까 휴전을 제의하고 패전 배상을 하는 과정에서...
육각수
2015-07-02 10:14:11

결국... 나당연합군은 깨어져서 결별이 되고 통일신라가 백제 유민들과 힘을 합쳐서 당을 멀리 몰아내고 당과 육지 경계를 지었다고 보아야 한다. 날조된 지도상에 보는 육지 국경이 전혀 없는 그런 모습이 아니고.
육각수
2015-07-02 10:12:14

그러면 낙양(洛陽)도 통일신라의 영토이며 平陽(평양)도 통일신라의 영토이다. 장안(長安)에 웅크린 당(唐)을 인정하더라도.
육각수
2015-07-02 10:10:02

의자대왕은 낙양에 무덤이 있었는데... 낙양에 묻혔다는 것은 대단한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대단한 대우는 통일신라가 아니면 할 수 없었을 것이며 통일신라가 망국의 왕 의자대왕을 보호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각수
2015-07-02 10:06:47

일본의 기록에서 백촌강이라고 한 것을 보면 백의민족... 삼족오(三足烏) : 다리가 셋인 새는 우리 민족 전체가 성스러운 새로 모두 생각했다. 백두산... 흰색깔 선호...
육각수
2015-07-02 10:03:18

것것을 - 것을(수정) 강 하구는 범람이 잦아서... 집단 부락을 이루고 살았다면 매우 큰강 하구를 의미한다. 낙동강 하구 쪽에 김해나 부산을 생각하면 그렇다. 낙수라고 부르는 작은 강도 그러한데...
육각수
2015-07-02 10:02:33

지금 금강하구에 백촌강이 존재하지 않으며 있을 수도 없다. 이것은 한반도 안의 모든 강 하구에 따로 지명이 존재하는 村江(촌강)이 없는 것것을 보니 그렇다.
육각수
2015-07-02 10:02:11

잘 알지 못한다 - 모른다(수정) 그러나 분명한 것은 白江(백강)이 백촌강(白村江)이라고 동일하게 부를 순 없거나 장강 하구 어느 지점이 '백촌강'으로 불러졌을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육각수
2015-07-02 10:01:09

22만 명 - 22만 7천 명(수정) 일본의 역사서 기록에 보이는 백촌강(白村江) : 일본의 고대사에 대하여 난 평소 관심이 없고 당연히 잘 알지 못한다.
육각수
2015-07-02 09:50:26

외국어 이면 - 외국어이면(수정) 무명민초인 내가... 늘 무명민초이니까 세상이 다 그렇게 가는 모양이다.
육각수
2015-07-02 09:49:06

국립국어원은 언어의 제왕(국어사전을 기속하고 있다) 노릇을 하면서 횡포를 생각보다 많이 부리고 있고 아무리 항의를 해도 묵묵부답. 특히 '사이시옷용법'의 횡포는 극에 달한 느낌이다.
육각수
2015-07-02 09:47:54

이런 것은 필요 없는 불편을 주는 게 아닐까? '돐'을 '돌'로 만든 사람들이... 이것은 언어의 횡포에 가깝다. 우리는 흔히 막말을 언어의 횡포라고 말을 하나 진짜 횡포는 이런 것들이다.
육각수
2015-07-02 09:46:54

그런데 이렇게 규정을 둘 필요가 없어 보인다. 어린이난, 소식란, 가십 난... 한글을 어렵게 하고 있다. '난(란)도 순수 한글이거나 외국어 이면 띄어서 표시하게 하고 한자어라면 붙이게 한다.
육각수
2015-07-02 09:46:49

사족 같은 말이지만... '아무르강'은 흑강(黑江)이라고 몽골인이나 퉁구스인(퉁구스어족)들이 불렀는데 외국어가 붙는 지명은 따로 떼어서 구분하였다. 서울시, 뉴욕 시...
육각수
2015-07-02 09:20:53

대학교수들은 엉터리 말이나 엉터리 글을 마구 주어도 되는 특권이라도 가졌나?
육각수
2015-07-02 09:20:22

엉터리 글을 쓰다 보니 주류성? 그런 것을 찾을 수도 당연히 없다. 장보고의 청해진이 완도가 아니듯이(양자강 하구 조금 위의 지점으로 보인다. 상하이 조금 위의 지점이라고) 백강은 금강이 아니고 양자강 즉 장강인 것이다.
육각수
2015-07-02 09:18:52

강도 모르면서 금강하구를 백강이라고 마음대로 정하고 거기에 맞추면 자꾸 엉터리 글만 쓰게 될 것이다.
육각수
2015-07-02 09:18:11

압록강은 두말도 필요 없이 아무르강(黑江)인 것이다.
육각수
2015-07-02 09:17:33

다 미친 사람들이 아닌 다음에야 지금의 중공과 경계를 천하3대강이라고 하겠는가?
육각수
2015-07-02 09:17:10

옛날 사람들이 눈은 더 밝고 정신은 더 맑았을 것이다. 호연지기...
육각수
2015-07-02 09:16:43

메콩강이 4020킬로미터이다.
육각수
2015-07-02 09:16:10

압록강을 찾는다면 아무르강밖에 없다. 아무르강이 4350킬로미터이다.
육각수
2015-07-02 09:15:35

택도 없지.
육각수
2015-07-02 09:15:27

황하가 5464킬로미터. 압록강이 803.3킬로미터. 도대체 맞나?
육각수
2015-07-02 09:14:41

중공은 오랫동안 압록강을 천하3대수라고 하였다. 많은 기록에 그렇게 보인다. 천하三大水(삼대수)는 3大江이란 뜻이다. 江(강)은 大水(대수)이다.
육각수
2015-07-02 09:12:47

백강(白江)은 장강(長江 = 양자강)의 長(장)이 뭉개져서 만들어진 강 이름이다.
육각수
2015-07-02 09:11:45

장강(長江)의 長(장)을 글자를 뭉개면 백(白)으로 만들기가 용이하다.
육각수
2015-07-02 09:10:57

금강은 하구 이름을 유독 따로 백강(白江)이라고 부를 이유는 꿈에도 없을 것이다.
육각수
2015-07-02 09:10:20

이 압록강도 패수(浿水)라는 이름 외에 염난수(鹽難水), 마자수(馬訾水 : 여기서 訾(자)는 泚(자)라고 해야 맞는데... 의문이다), 청수(靑水) 등으로 불렸다. 압록강이 이렇게 강보다 더 작은 水(수)로 불릴 정도이면...
육각수
2015-07-02 09:04:50

금강은 한수(漢水)보다 작은 강이며 낙동강이라고 부르는 낙수(洛水)보다 더 작다. 압록강을 대한민국에서 제일 크고 긴 강이라고 하나 길이가 불과 803.3킬로미터이다.
육각수
2015-07-02 09:02:54

. 강보다 작은 것은 수(水)를 붙였다. 한수(漢水) 낙수(洛水) 패수(浿水)...
여기서 한수는 한강이며 낙수는 낙동강이고 패수는 북이 중공과 경계를 이룬 현재 명칭의 압록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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