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04

[북한경제, 어제와 오늘] 농업∙공업 개혁①



[북한경제, 어제와 오늘] 농업∙공업 개혁①



[북한경제, 어제와 오늘] 농업∙공업 개혁①
워싱턴-박정우 parkj@rfa.org
2019-03-11



황해북도 사리원시 미곡협동농장 한 켠에 걸려 있었던 농장원 ‘노력일공시’ 표. 각 농장원들이 얼마만큼 일했느냐를 평가하는 표로 분조 인원수가 21-23명임을 알 수 있다. (2008년 8월)
사진 제공-문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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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언론인이자 학자로서 북한 문제, 특히 경제분야를 중점적으로 다뤄온 문성희 박사와 함께 짚어보는 ‘북한 경제, 어제와 오늘’ 시간입니다. 조선신보 평양 특파원을 역임한 문성희 박사는 현재 일본 도쿄에서 시사 주간지, 슈칸 킨요비(주간 금요일) 기자로 한반도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고 2017년 도쿄대에서 북한 경제분야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 시간에는 북한에 나타나고 있는 시장경제체제의 현황과 그 가능성을 짚어보고 개선돼야 할 점까지 중점적으로 살펴봅니다. 오늘은 북한의 농업과 공업 부문에서 일고 있는 시장화 개혁 움직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대담에 박정우 기자입니다.

<기자> 북한의 주요 산업인 농업과 공업 부문의 개혁에 관해서 문성희 박사와 함께 찬찬히 짚어 보겠습니다. 문 박사님, 북한의 농업정책, 자본주의 사회와 비교해 어떤 특징이 있나요?



문성희 박사 (사진 제공:문성희)



문성희: 네, 아시다시피 북한의 농장은 협동농장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와 달리 개인농이 아니라 농업의 협동화를 실현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노동의욕 저하로 생산성이 낮자) 북한의 협동농장에서는 농장원의 노동의욕을 높이기 위해, 1960년부터 ‘작업반우대제’가 실시돼왔습니다. 작업반우대제란 협동농장의 단위인 작업반을 기준으로 국가가 정한 생산목표를 초과 달성한 생산분을 작업반에 나누는 노동보수제도인데요. 북한 정부는 이걸로 농장원의 노동의욕을 높여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생산 향상으로 잘 이어지지가 않았지요. 그래서 1966년부터 도입한 것이 ‘분조관리제’입니다. 분조라는 것은 작업반의 아래에 위치하는, 협동농장의 말단 단위인데 분조관리제란 각 분조에 일정한 면적의 포전과 노동력, 소나 농기구 등의 생산도구를 할당하고 국가의 계획에 따라 분조마다 정보(ha)당 수확고 기준을 정한 후에 그 기준의 수행정도에 따라 분조에 소속된 농장원의 노동일수를 평가하고 그 평가를 기준으로 농산물을 분배하는 제도입니다. 노력일을 평가할 때에는 작업의 중요성, 힘든 정도, 숙련 정도, 계절적 평가 등이 기준이 됩니다. 1966년 당시 분조 인원수는 15-20명이었답니다.

<기자> 말씀하신 대로 북한 농업은 협동농장을 빼곤 얘기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북한의 협동농장은 어떤 곳인가요?

문성희: 네, 협동농장이라고 하는 만큼 토지를 통합하고 공동경리를 운영하되 토지규모와 노동에 의하여 분배를 하는 곳인데요. 여기서 아까 말씀드린 것 처럼 분배는 노동일수, 노력일을 기준으로 하기로 돼있지요.

<기자> 실제 북한의 협동농장을 방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현장 분위기가 어떻던가요?

문성희: 네 2003년 여름 조선신보 평양 특파원을 하던 시기, 평양시 사동구역 오류협동농장을 취재한 바 있어요. 여성인 관리위원장의 말로는 당시부터 분조의 인원수는 5-6명이었습니다. 이 인원수로 한 구역을 담당한다고 했어요. 그렇게 되면 분배 몫도 많아지겠죠. 이 해에는 모내기 풍경도 취재했어요. 북한에서 모내기는 5월 중순경부터 시작되는데 황해남도 재령군의 삼지강협동농장을 취재대상으로 삼았어요. 여기 관리위원장도 여성이었는데 “올해는 컴퓨터가 낸대로 해보자”라는 말을 들었어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농업과학원이 낸 영농공정에 따라 씨뿌리기, 모내기 등을 실시한다는 것이었어요. 지난 시기에는 농민들의 경험에 따라 씨뿌리기의 시기와 양도 정하고 있었던데 이제는 컴퓨터에서 나온 시기와 양을 딱 지키고 그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정보 농업’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2008년에는 황해북도 사리원시의 미곡협동농장을 찾았는데 여기도 큰 규모인데요 인상깊었던 것은 개인텃밭을 목격한 것이죠. 농장원의 집도 찾았는데 집안에 컴퓨터가 있어서 놀랬지요.



황해북도 사리원시 미곡협동농장 축산부문 분조가 오리를 기르고 있는 모습. 이렇게 오리를 기르는 것도 각 분조마다에서 진행이 된다. (2008년 8월) 사진 제공-문성희




황해북도 사리원시 미곡협동농장 축산부문 분조가 오리를 기르고 있는 모습. 이렇게 오리를 기르는 것도 각 분조마다에서 진행이 된다.(2008년 8월) 사진:문성희

<기자> 협동농장에 소속된 농부들이 개인텃밭도 갖고 있었고 농장원 집에는 그 당시 북한에서는 귀했던 컴퓨터도 갖추고 있었다는 말인데, 꽤 잘 살았던 듯합니다.

문성희: 네 그런 걸로 보였습니다. 세대주 이야기로는 아이를 위해서 컴퓨터를 샀다고 하더라구요. 아마 어린 학생이었을 아이를 위해서 산 걸로 보이던데 놀이용이거나 학습용이었겠지요.

<기자> 그런데 이미 그 당시에도 현장에서는 농업부문 개혁이 점차 도입되고 있었다면서요?

문성희: 네 그렇지요.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북한에서는 1966년부터 분조관리제가 도입됐는데 이 제도는 분조의 인원수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면 인원수에 따라 분배량이 달라지니까요. 처음 이 제도가 도입됐을 때는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15- 20명으로 하나의 분조가 구성돼있었는데, 1996년 10월에 7-8명으로 축소됐어요. 7-8명이라 하면 조부모, 부모, 아이 뭐 그렇게 생각하면 딱 한 가정의 인원수라고 볼 수 있지요. 즉 분조 자체가 한 가정으로 꾸려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이후에 다시 원래의 인원수, 즉 15-20명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였어요.

그런데 내가 2003년에 오류협동농장에서 들은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벌써 이 시기부터 5-6명으로 분조 인원수가 줄어들었다는 것이지요. 이 인원수라면 한 가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건 하나의 농업개혁정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기자> 그러니까 2000년 대 초반에도 이미 한 가정이 협동농장의 최소 영농단위로 되는 사례가 있었다는 말씀이시군요.

문성희: 그렇죠. 그러니까 분조 인원수를 협동농장 관리위원장이 너무 가볍게 얘기하는 걸 듣고 좀 놀랐어요. 이런 걸 외국에서 온 기자한테 가볍게 얘기하는 구나, 너무 엄청난 개혁인데. 그 때 관리위원장이 말하길, 한 분조의 인원 수가 적어진 만큼 한 사람당 돌아가는 분배 몫이 많아지기 때문에 모두들 좋아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기자> 그러니까 농업 개혁이 이미 시작됐다고 볼 수 있는 거네요.

문성희: 네 그렇지요.

<기자> 이런 초기 농업개혁 조짐에도 북한의 협동농장의 분조 인원수가 줄었다가 다시 늘어난 건 당시 개혁의 후퇴로 볼 수 있지요?

문성희: 좀 얘기가 반복되기는 하는데 김일성 정권 시기에는 분조 인원수가 15-20명이었는데 김정일 정권 시기인 1996년에 한 차례 7-8명으로 되었습니다. 그 후 다시 15-20명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데. 협동농장에서의 협동노동 원칙이라 할까요, 뭐 그런 것을 충실히 실행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요. 즉 북한으로선 과거의 방식인 사회주의 협동농장을 유지할 생각이 컸다고 봅니다. 공업도 계획경제에 따라 기업 경영을 국가가 지휘하는 방법이 취해지고 있었지요.

<기자>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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