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26

16 北 등진 '엘리트 여기자'의 탈북 증언 | YTN



[정치]北 등진 '엘리트 여기자'의 탈북 증언 | YTN

北 등진 '엘리트 여기자'의 탈북 증언
Posted : 2016-10-14 15:03


■ 김길선 / 前 북한 제2자연과학원 기자

[앵커]
저희 뉴스인에서 오늘 초대한 분은 김길선 씨, 평양의 엘리트 여기자 출신이죠.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고 연구하는 제2자연과학원을 유일하게 17년 출입했던 기자입니다.

지난달 30일에 저희 뉴스인에 출연해서 그 과정에 대한 생생한 증언도 저희가 들었습니다. 그때 탈북하신 이유를 저희가 듣다가 시간이 다 돼서 자세히 못 들었고요. 시청자 여러분들께서 그 당시에 다시 출연해서 더 들었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많았습니다. 오늘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인터뷰]
감사합니다.

[앵커]
나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인터뷰]
고맙지요.

[앵커]
그때 탈북하신, 그렇게 말하자면 그 체제에서 잘나가던 분이었는데 탈북했었던 게 성혜림 얘기를 하다가 그래서 밉보였다라는 말씀까지만 들었거든요. 자세히 말씀을 해 주시죠.

[인터뷰]
성혜림 얘기거든요. 왜냐하면 제가 잡혀갔던 게 발언죄로 잡혀갔던 게 국가보위부보다 한 수 위에 있는 당중앙 내 조직지도부 10호실에 잡혀갔었어요. 조직지도부 10호실이라고 하면 수령 권위에 걸리는 발언들을 한 사람들만 잡아가는 거예요. 여느 발언들은, 당정책 발언은 국가보위부가 취급하지만 중앙기관 엘리트들, 말하자면 김일성의 말에 의하면 우리 당이 힘들여 키운 핵심 계층 엘리트들 속에서 당의 권위를 훼손하는 발언들이 나온다는데 이걸 철저히 출저를 캐가지고 교양개조할 대상은 개조하고 어떻게 처리하라, 이렇게 교시가 나온 거예요.

교시 지시가 나와서 다시 말해 10호실에 모여졌던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당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10호실의 예심원들은 국가보위부 국장급들이 다 하고 있어요. 저는 성혜림이 이것 때문에 여느 보위부에 잡혀간 게 아니라 이 10호실에 잡혀갔다고 들었어요. 잡혀가서 40일 동안 취조받았죠.

[앵커]
취조를 어떤 식으로 받습니까?

[인터뷰]
취조는 무섭게 잡아가요. 그날 아침에 직장에 출근했는데 출근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사장실에서 부르는 거예요, 출판사 사장이. 당장 나오라고, 가방 다 들고 나오라는 거예요. 내려가니까 중앙당에 들어가서 글쓸 게 급히 제기됐는데 저분들 따라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분들을 보니까 시커먼 사람이 서 있는데, 큰 사람이 서 있는데 아무리 봐도 중앙당 사람이 아니에요. 무섭게 생겼어요. 저승사자처럼. 다들 덜덜덜덜 떨게 돼요. 그때 나는 이 발언이 제기됐다는 걸 알았었거든요. 그때 그 사람 따라가서 누구한테 알릴 새도 없이 잡혀들어갔죠. 그렇게 연행돼서 들어갔죠. 들어가자마자 앉혀 놓고 하는 말이 네가 무슨 죄로 잡혀왔는지 아는가, 그렇게 물어봐요.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으니까 이제는 죽었구나라는 생각밖에 없으니까 계속 울었어요. 너무 떨려서. 답답한지 그 사람도 어쨌든 영창에 들어갔죠.

[앵커]
그래서 40일 동안 거기에 잡혀계시면서 취조를 받으신 거군요.


[인터뷰]
그렇죠. 못 나오죠. 영창에 딱 들어갔는데 아니, 살창이 다 있는데 방 안에 무슨 초상화가 있어요,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가. 이게 감옥인가 나도 헷갈리더라고요. 그런데 바깥으로 못 나가고. 앉아서 한 시간 동안을 계속 하염없이 우는데 그 사람도 나를 잡아다놨으니까 첫날 진술서를 받아놔야 되니까 저한테 말하더라고요. 네가 왜 잡혀왔는지 아는가, 내가 많은 나쁜 말을 했다는 거예요. 수령을 헐뜯고 당 정책을 헐뜯는 엄청난 죄를 지었다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 수령님께서 김일성이 죽기 전에 유언을 남겼대요.

그게 유훈교시인데 요새 발언죄로 잡혀가서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는 핵심 군중들이 많은데 철저히 캐라. 이거 잘못하다가는 소경 제 닭 잡아먹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문고리 먼저 잡고 먼저 통보하는 놈 말만 듣지 말고 다 싸잡아 잡아다 놓고 출처를 정확히 캐라, 그렇게 해서 그게 다 밝혀진 다음에 개조할 대상은 개조하고 안 되는 대상은 정치범 수용소에 보내야 한다. 핵심 군중 하나를 잘못 처형했다가는 20, 30명이 있대요, 핵심 계층이. 그러면 이거 진짜 핵심 계층을 약화시킨다는 거예요.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교양개조하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전달해 주더라고요. 그다음에 좀 진정되더라고. 내가 핵심인 줄은 아는갑다 하고서 그다음에 취조에 응하지 시작했죠.

[앵커]
그때 가족들도 다 있는 상태였죠? 남편도 있으시고.

[인터뷰]
딸고 있고, 남편도 있고요.

[앵커]
그러니까 얼마나 아찔했겠습니까? 두고 온 가족들 생각하면.

[인터뷰]
저는 그날 그말하면 저녁에 갈 줄 알았어요. 40일 동안을 쏟을 눈물 다 쏟고요, 말도 못해요.

[앵커]
제일 힘든 것, 고통스러운 것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인터뷰]
제일 고통스러운 게 계속 비판서를 쓰게 해요. 무슨 발언을 했나. 네가 나쁜 말을 많이 한 걸 우리가 다 종합했다, 너가 다 그거 쓰고 비판해야 내보낸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이 묘하더라고요. 나도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인데요. 아니, 이틀 쓰고 나니까 쓸 게 없어요. 내가 나쁜 말 했다는 게. 그런데 마지막에 너 제일 중요한 게 뭐, 그때까지는 내가 성혜림이 건은 안고 있었어요, 뱉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도대체 이게 어떻게 돼서, 나도 좀 똑똑했던 것 같아요. 우리 아버지가 보위 지도원이었으니까 이거 잘못하다가는 나도 죽고 옆 사람도 죽을 것 같더라고요, 성혜림이 말은. 그걸 계속 입 다물고 있었더니 3일째 되는 날에 하도 답답한지 이만한 묶음을 꺼내서 놓더니 네가 잡혀온 주 죄가 성혜림이 때문에 왔다고 그때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때...

[앵커]
가슴이 철렁하셨겠군요.

[인터뷰]
감은 잡고 있고 만반의 준비는 울면서도 다 했어요. 그다음에 어떻게 나의 죄를 최소화하고 주변 사람들을 안 다치게 하는 방향에서, 이게 왜 그러냐 하면 보위부에 잡혀가서 막 취조할 때 겁이 나면 제가 한 말 남이 한 말 헷갈려한대요, 사람들이. 그리고 막 지어낸대요. 자기 죄를 덜기 위해서 그래서 말을 뱉어놓은 이상 예시문을 들고 계속 확인하러 다니는 거예요. 그러면 마지막에 이 예심원도 죽게 고생하고 엉뚱한 사람들이 많이 걸려들면 너 죽어라 하고 잡아간다는 거예요. 그리고 정치범수용소로 넘긴대요. 이래 똘똘한 놈이 내놨다가는 더 큰 일 저지를 것 같다고 그렇게 처리하는 경우가 있다고 내가 분명 들은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나는 내가 살자고 내가 한 말은 내가 철저히 뒤집어 쓰고 그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한 말은 거기 가서 알아보십시오. 나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이렇게 딱 선을 그었어요. 그렇게 한 40일을 조사를 받았죠.

[앵커]
40일 끝난 다음에 어떻게 됐습니까?

[인터뷰]
40일 끝난 다음에 나는 잡아가는 것도 우습게 잡아가는데 풀어놓는 것도 우습게 풀어놔요. 밤에 잤거든요. 눈물 줄줄 흘리며 잤는데 밤 12시에 사람을 깨워요, 철창문을 열고, 나오라는 거예요. 덜덜 떠는데 이제 정치범 수용소에 가나 하고 나간 거예요. 나가니까 예시문을 다 갖다 놓고 너를 용서해 주기로 했다는 거예요, 당에서. 너는 안 올 놈이 왔다는 거예요, 여기에. 쓸데없는 말을 해 가지고 여기 잡혀왔나, 너 아버지도 다 우리 쪽에서 일했고 그래서 너는 용서해 주기로 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무슨 소리인지 얼떨떨했어요. 놔준다는 소린지 다른 데로 잡아간다는 소린지, 분명히 용서 같은데. 그랬더니 그럼 물어볼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내가 두고 온 출근가방을, 40일 전에 잡혀갔을 때 가져갔던 출근 가방을 주면서 막 차에다 태워서 내 집 앞에서 뚝 떨어뜨려놓고 가는 거예요. 여기 와서 보니까 옛날에 중앙정보부가 그랬다 하대요. 그런 것들은 다 비슷한 데가 있는지. 그래서 내가 살아났죠.

[앵커]
지금 1990년대 얘기인가요?

[인터뷰]
그렇죠.

[앵커]
90년대 초반인가요?

[인터뷰]
95년도 얘기죠.

[앵커]
95년도이군요. 그리고 탈북하신 것은 97년이고 그러면 그 2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인터뷰]
그다음에 나왔는데 분명히 그 예심원은 나보고 당에서 너를 용서해 줬다는 거예요. 그래서 맡은 바 일을 잘하라고 그래서 갔는데 내가 보위부에 잡혀 갔다 나와서 엄청 앓았어요. 완전히 나는 사람이 그렇게... 피고름이 줄줄 흘러요. 너무 혼이 나서 나오다 보니까. 그런데 또 직장은 출근해야 돼요. 보위부에서 내놓을 때 오늘 몇 월 며칠에 밤 12시에 너를 내보냈는데 네가 4일 후 부터는 직장에 출근하라, 이렇게 지시문을 줘요. 그리고 이걸 쓰게 해요. 너 보위부에 와서 있은 일, 겪은 일을 어디 가서 하나라도 발설할 경우에는 다시 여기 끌려온다, 그러더라고. 그래서 다 자필까지 쓰게 해요. 그래서 나왔는데 나흘 만에 다시 출근했죠.

그런데요, 출근하고 나니까 그 후에 주변분들이 말하는데 내가 보위부에 잡혀갔다 나온... 잡혀갔다 나와서 첫 출근을 하는데 우리 출판사 사람들이 나를 저승사자로 보더라고요. 저승에서 살아온 사람으로. 그렇게 무서워하고 접근도 안 해요. 그런데 또 주변사람들이 말하는데 내가 나왔는데 독기가 펄펄 나더래요. 하도 악이 나가지고. 왜냐하면 40일 동안을 이걸 받아낸다면 너는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다, 이 말만 계속 하는 거예요. 내가 하기에 달려 있다는 거예요.

[앵커]
생사의 기로를 40일 동안 왔다갔다하신 거예요.

[인터뷰]
그게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당이 하기에 달려 있는데 하나라도 쥐어짜서 뭘 알아내려고 그랬는지 나도 그 사람도 참 밥 먹고 할 일이 없는지 멀쩡한 사람이... 그 사람도 속은 그랬을 거예요.

[앵커]
그러면 계속 힘들더라도 직장도 있고 가족들도 있고 그러니까 계속 거기 계실 수도 있을 법한데 탈북하시게 된 결정적인 다른 계기가 또 있었습니까?

[인터뷰]
그런데 직장에 나갔는데 나와서 그때 10월달에 나와가지고 12월 말에 출근 제대로 하고 어쩌고 저쩌고... 알음 해서 출근했는데 12월 30날에 추방통지서가 내려온 거예요. 지방 추방통지서. 어디로 간답니까, 나는 듣고 속이 다 시원합디다. 추방한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나는 많이 불안했어요. 이게 이걸로 끝날 일이 아닌데. 우리아버지도 그러더라고요. 그걸로 끝나지 않을 거다, 좀 더 고생해야 될 거다. 우리 아버지가 그때 생존해 계셨으니까. 추방명령을 받고 나니까 속이 다 편안해요. 속이 다 시원해집디다. 끝났구나. 그래서 12월 30날에 추방명령을 받았는데 31일날에 가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어디로 추방받았습니까? 함경북도 김책시로 간다는 거예요. 나는 그때 김책이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몰랐어요. 거기 일제 때 성진이라는 곳도 몰랐고. 그래서 직장에서 나와서 짐도 많고 사람들도 많고 개고생했죠. 추방짐을 꾸미느라고. 그런데 나가서 추방돼서 김책에 갔죠. 김책에 도착하니까 집이 있을 게 뭐예요. 생 땅에다가 어느 여관에 들어갔는데 그 추운 겨울날, 난방도 하나도 없었어요. 평양에서 내려왔다고 주인이 쳐들어와서... 말도 못해요.

[앵커]
그때 제일 북한 체제에 대해서 아주 정이 떨어진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면서요?

[인터뷰]
사건이 많죠. 내가 취조받으면서 했다는 발언들을 곰곰이 보니까 그건 내가 한 게 틀림없고 그게 하나하나가 내가 북한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게 되는 하나하나의 디딤돌이 됐던 것 같아요. 제가 제일 북한에 대해서 이 체제는 진짜 이건 아니겠구나, 안 되겠다, 20세기에 이런 발상을 하는 체제가 있나 지도자가 있나, 그 생각을 하게 된 게 90년도부터 제가 언젠가 말씀드린 것처럼 군수담당 비서 전병호 글을 쓰려고 제가 당중앙위원회 군수공업부에 계속 출입을 했어요.

그 군수공업부는 김정일이가 무기 부문, 군수 부문에 대해서 준 지시들이 다 정리돼 있는 곳이에요. 거기에 들어가서 관련 자료들을 보거든요. 그 자료를 뒤지다가 보려고 해서 본 게 아니라 눈에 띄어서 봤는데 거기에 그런 게 있데요. 내가 지시를 받았는데 동영상도 다 받아봤는데 대남용 무기래요, 살상 무기인데 이 살상무기를 동무들이 보니까 개를 매달아놓고 쏜 것 같은데 개를 매달아 놓고 쏘면 그 성능을 정확히 알 수 없다. 교시문이 딱 그렇게 되어 있어요, 지시문에. 내가 국가보위부장한테 지시하겠으니까 정치범들을 데려다가 다시 시험하라, 이렇게 돼 있어요. 정치범들을 데려다가 살아 있는 사람한테 총기 성능시험을 하라는 거예요. 그거 보니까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얘들이 이렇게 우습게 나가도, 세습을 하면서 나가도 공산주의 이념은 그래도 고상한 줄 알았어요. 공산수령 같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까 막 피비린내가 몸에서 올라오더라고요. 입만 벌리면 미국이 화학실험해서, 남조선이 뭐 해서 하던 것들이 이따위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앵커]
김정일이 육성으로 지시를 했다는 말이죠?

[인터뷰]
김정일이 지시한 것을 문서화한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 체제는 안 되겠구나, 이거... 그런데 이것 때문에도 혼났어요, 잡혀가서. 이거 어디 가서 발설하지 말라고. 그런데 내가 발설을 약간 했거든요. 그런 것도 있대 하고서. 그런데 그것 때문에 첫째 그랬고. 그다음에 제가 결정적으로 탈북하게 된 동기는 물론 그중에 많지만 이 체제가 죽기보다 더 밉지만 뜰 방법이 없는 거예요. 어떻게 뜨나... 그런데 제가 97년도인가 그때 해산으로 가다가, 식량 구입하러, 배급을 안 주니까. 해산으로 가다가 기차 안에서 황장엽 선생 망명 소식을 들었어요. 황장엽 선생, 김덕홍 선생이 대한민국으로 정치망명을 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평양에 있었으면 들었겠는데 추방돼 있다 보니까 추방되면 평양공화국이에요, 북한은. 지방 식민지, 거기에까지 그렇게 안 가요. 그런데 내가 기차간에서 대학생들한테서 들었어요. 평양 김책공업 대학생, 실습가는 대학생들에게서 내가 들었거든요. 맨처음에 믿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듣고 나니까 야, 그날 저녁에 그분들이 배가 고파서 달아났겠나, 이 체제는 안 된다.

[앵커]
황장엽 선생을 원래 알았습니까?

[인터뷰]
우리 대학 총장님이었으니까요.

[앵커]
김일성대 총장이었고.

[인터뷰]
당중앙위원회 비서라는 건 다 알죠. 김덕홍 선생도 우리 대학 다닐 때 늘상 보던 분이고.

[앵커]
북한에서 차지하는 사상적인, 정신적인 위치가 그 정도로 큰 인물이었습니까?

[인터뷰]
황장엽, 김덕홍 선생님은요, 여기 북한 상위 1%라는 말을 잘 하는데 북한 상위 1%는 당중앙위원회밖에 없어요.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정치국 위원, 정치국 후보위원, 여기에는 북한 수령 세습 체제를 받치고 있는 모든 중요한 시스템의 우두머리들은 거기 다 들어가 있어요. 그들이 사업을 보좌하고 사상독재, 폭력독재까지 다 총괄하는 게 바로 김일성 족속의 북한 혁명의 총참모부라고 하는 당중앙위원회입니다. 당중앙위원회만이 상위 1%에 속할 수 있어요. 당중앙위원회 비서관하고 부실장이 나왔는데 그러면 이거 다 끝나는 체제가 아닙니까? 그리고 또 저는 그때 그후에 황장엽 선생도 그 말씀을 했더라고요. 체제 경쟁에서 남한이 이겼고 둘째는 대한민국 주도로 북한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 그분들은 이 명분을 가지고 오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때 나도 정치적으로 항상 깨어 있었던 것 같아요. 황장엽 선생, 김덕홍 선생 정치 망명 소식을 들은 다음에 내가 제일 먼저 머리를 내려친 게 이 체제는 졌다. 저 두 분들이 갔으니까 이제는 나도 가야 되겠구나. 그러다가 나왔어요.

[앵커]
탈북하는 과정에서는 어려움이 없었습니까? 순탄하게 잘 하신 겁니까?

[인터뷰]
그거는 내가 북한에서 겪은 어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중국에 넘어오니까 눈치껏 피해다니고 또 부지런하면 먹고는 살겠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중국에 넘어와서는 잡혀갈까 봐 그 걱정은 있었지만 험하거나 위험한 것은 없었어요.

[앵커]
그래서 북한의 아주 내밀한 핵심을 들여다 보셨고 그리고 본인도 빨치산 가문에서 아주 혈통이 좋은 분이었고 그런 최고의 엘리트였는데 그래서 와서 대한민국을 보시니까 어떠시던가요, 대한민국은?

[인터뷰]
북한은 빨치산 가문이라고 해도 특별한 것 아니에요. 빨치산도 잘못하면 정치범수용소에 당사에 가고요. 어떤 빨치산은 저기 산간 어디에 추방돼서 10년 이상 있었댔어요. 저도 빨치산 가문이지만 우리 사촌 언니는 빨치산이 자식인데도 정치범수용소에 갔어요. 지금 나왔는지는 모르겠어요. 제가 북한에 있을 때 정치범수용소에 갔고. 내가 축복을 받아서 거기까지는 안 가고 탈북을 했는데...

[앵커]
대한민국에 와 보니까 어떠시던가요?

[인터뷰]
너무 좋죠. 저는 대한민국에 와서 너무 행복해요.

[앵커]
뭐가 제일 좋았습니까?

[인터뷰]
뭐가 제일 좋았냐면요, 내가 북한에서부터 꿈꾼 로망이 있어요. 북한 TV에는 만수대통로라는 영화만 계속 내보내는, 토요일, 일요일날만 내보내는 그런 채널이 있는데 거기에서 외국 영화들이 많이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볼 때는 외국 여자들이 승용차를 몰고, 다 몰고 다니는데 나는 우선 대한민국에 와서 그 로망이 실현됐어요. 내가 내 차를 몰고 전깃줄도 없는 이걸 계속 하고 다니고요. 이것만 해도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어요. 대한민국에 온 보람도 있고.

[앵커]
그러니까 여기에서는 그냥 일상으로 별다른 감흥 없이 느끼는 그런 것들이 그쪽 북한 주민들한테는 로망이, 정말 한 번 해 보고 싶었던 것이군요.

[인터뷰]
그렇죠. 그건 진짜 꿈이죠. 그래서 내가 언젠가 북한에 있을 때 우리 동무들한테 그 얘기를 했어요. 나는 꼭 저렇게 될 것이야 하니까 나보고 무슨 귀신 보듯이, 망상가 보듯이 보는데 얘들아, 내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단다. 아침저녁 그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앵커]
그런데 한두 번은 그게 좋을지 몰라도 계속 차 타고 운전하고 다니시면 차 막히고 그렇지 않습니까?

[인터뷰]
그거는 지금도 좋아요.

[앵커]
그러시군요.

[인터뷰]
지금도 좋고, 이것도 지금도 좋고요. 그리고 기자 출신으로서, 엘리트 출신으로서 제일 좋은 것은 오픈된 정보를 계속 접하는 것. 그거야말로 엘리트한테는 그것 이상 축복이 없어요. 사회 생활 하거나 두루두루 자기 모든 이상을 실현해 나가면서 알권리를 가진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겁니까?

[앵커]
엊그저께 박근혜 대통령이 탈북민들은 먼저 온 통일이다라고 말을 했는데요. 점점 늘고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 더 늘 가능성이 크고요.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탈북민들과 하나가 되고 동화되기 위해서요.

[인터뷰]
탈북민들은 먼저 온 통일이라고 박근혜 대통령이 말씀하셨는데요. 제가 99년도에 대한민국에 와서 어느 방송에 출연했댔어요. 방송 중이었는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탈북자들이 너무 많아서 야단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자리에서 탈북자들이 다른 나라도 아닌 대한민국을 조국으로 여기고 찾아오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에 행운이고 축복입니다. 그걸 언제쯤이면 느낄 수 있을까요, 이 나라 국민이. 그 얘기를 했었어요, 그때.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먼저 온 통일이라는 너무 명언을 말씀하신 거예요. 이건 너무 좋은 거고요. 탈북자들이 남한에 정착하는 문제는요, 탈북자들 중에도 사람이 개개명창 구만층 아닙니까? 층층만층 구만층에 성격이랑 모든 게 달라요. 교육 받는 정도도 다르고. 맞춤형 지원 같은 게 필요한데 저는 만사를 떠나서 먼저 탈북자 자신이 준비돼야 한다고 봐요.

[앵커]
어떤 준비를 해야 되나요?

[인터뷰]
탈북자 자신이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이 체제를 우선 숙달하고 시장경제를 숙달하고, 자기가 부딪치면서 느끼고 자생능력을 갖추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된다고 봐요. 왜냐하면 한국도 탈북자 지원 프로그램이 잘 돼 있어요. 하나원으로부터 나오면 정기적으로 탈북자들을 불러서 무슨 취업 이런 것도 하고 프로젝트가 많더라고요. 그런데 이게 내가 먼 데서 살아보니까 구체화되지를 않고 있어요. 그런 문제가 있는데요. 저는 이왕이면 대한민국이 탈북자를 먼저 온 통일이라고 이렇게 받아들인 이상에는 정착이, 개가 제 발로 못 걸어가면 지팡이가 돼서라도 이 체제의 시스템, 먹고사는 문제부터 자립으로 해결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 이거는 사실 국가가 해 주지 않으면 못하는 거라고 생각이 돼요.

[앵커]
사실 탈북하신 분들이 대한민국 국민이거든요. 헌법상 대한민국 국민이고 우리 여기서 나고 자란 분들보다 어려운 조건에서 더 불리한 조건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지금까지 해 왔던 분들이니까 그만큼을 보충해 주는 것도 마땅히 국가와 사회와 우리 국민들이 해야 할 의무가 아닌가라고 생각을 아마,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오늘 시간 다 됐습니다. 나와주셔서 감사하고요.

[인터뷰]
고맙습니다. 언제나 하고 싶었던 말인데 이렇게 기회를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앵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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