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26

김길선's평양만사 - YouTube



김길선's평양만사 - YouTube








김길선's평양만사36.2K subscribers


SUBSCRIBE

해외 후원(paypal)



HOME
VIDEOS
PLAYLISTS
COMMUNITY
CHANNELS
ABOUT

Description70년 이상의 인의적 분단으로 형성된 북한의 모든 이질적 장벽들을 구석구석 성의껏 알려드리는 것으로써 언젠가는 도래할 북한 자유화와 한반도자유통일 시(時) 남북민 사이의 이해와 소통에 작게나마 도움을 드리고자 이 창을 개설하였습니다. 대내외 많은 분들의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궁금한 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 메일(pyongyangmansa@gmail.com)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후원계좌: 우체국 300129 - 01 - 006004 한지우(평양만사) 해외후원: 페이팔계정 https://www.paypal.me/pymansa
------------


김길선


최근 수정 시각: 2019-06-18 11:07:35


분류


1955년 출생
선양시 출신 인물
기자
북한이탈주민
유튜버


1. 개요
2. 탈북 동기


1. 개요[편집]

김길선은 북한 기자 출신 탈북자이다.1955년 중국 선양에서 출생, 1979년 김일성 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를 졸업한 후 1995년 말까지 제2자연 과학 출판사 정치선동부 기자로 일했다. 이후 1997년 8월 가족 (남편, 딸)과 함께 탈북, 1999년 1월 남한에 정착하였다.
이후 각종 방송과 언론에 출연해서 북한정권의 실체에 대해 알리는 한편, 김정은 도당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운동을 하고 있다. 최근엔 유튜브도 개설했다. #

2. 탈북 동기[편집]

본인이 수기나 방송 등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동료들과 성혜림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이 문제가 되어 고초를 겪은 것이 발단이라고 한다. 이후 추방을 당하고 내려온 곳에서 지방 사람들의 참혹한 현실과 북한의 실상을 깨닫고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추방지에서 이웃해 살던 노인이 "일제시대 때보다 못하다. 그때는 일본인은 쌀밥 먹고 조선인은 조밥 먹는게 배알이 꼴렸지만 굶지는 않았다."고 한탄할 정도였다고. 이후 여러 가지 일을 거쳐서 탈북을 결심하고 실행하였다고 한다.
최근 본인의 유투브에 밝힌 바에 따르면 중국에 체류할 당시 작성하였던 수기가 계기가 되어 남한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중국에서 작성한 수기는 여기서 확인 가능하다.
탈북 여기자 통한의 수기

http://systemclub.net/bbs/zb4pl5/zboard.php?id=p_3&page=83&sn1=&divpage=5&sn=off&ss=on&sc=on&select_arrange=name&desc=asc&no=2899

11/26/2019 [독점입수]탈북 여기자 통한의 수기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olivemana/100039381701

1/1 (44)은 97년 8월 남편·딸과 함께 북한을 탈출한 후 중국에서 15개월 동안 피신생활을 거쳐 99년 1월 한국에 귀순한 북한의 여기자 의 가족은 5월부터 한국의 시민으로 정착해 새로운 인생을 열어가고 있다. 김일성종합대 고전문학과 졸업 후 79년부터 95년까지 관련한 기초이론을 제공하는 제2자연과학원 산하 제2자연과학출판사의 엘리트 기자로 재직한 바 있는 그는 정기간행물 등을 통 및 군수관련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각종 글을 써왔으며, 현존 북한 군수산업계의 최고봉이자 서열 6위인 중앙당 군수공업부 전병호 성실기(김일성·김정일과의 접견을 기초로 한 개인적 칭송 기록)’를 집필했다.

그는 북한 고위층의 사생활 및 정책 방향 등과 관련해 만연한 비난을 사적인 자리에서 언급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위부에 연행돼 엄중 취조를 받고 평양에서 추방돼 함경도의 김책화물공 로 쫓겨난 뒤 탈북했으며 북한 국방과학 계통 종사자이자 기자로서는 드물게 보는 탈북 귀순자다. 그는 목숨을 건 탈북이 성공한 뒤 탈북자들과 마찬가지로 중국 땅에서 중국과 북한 당국의 이중 추적에 쫓기는 가운데 조선족 동포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세 가족이 은신하는 고통의 나날을 보내다 양국을 왕래하는 한 사업가의 도움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이 수기는 그가 현지에서 숨죽이며 보 갱지에 틈틈이 써두었다 지난해 한국으로 보낸 피눈물의 기록이다. 경황중에 쓴 이 수기는 6월호 ‘신동아’ 인터뷰에서 술회한 내용 보완되었으며 일부 북한식 어법은 한국식 용어로 수정되었다. <편집자>


----------------------------------------------------------------------



[독점입수]탈북 여기자 통한의 수기

“북한은 큰도둑과 좀도둑의 나라”


내 가 국가보위부에 연행된 것은 1995년 8월28일이었다. 수개월간 나를 괴롭혀오던 불안이 드디어 발등에 떨어진 날이었다. 그날 아침 보통 때와 같이 평양의 출판사에 출근한 나는 미처 원고를 책상에 펼쳐놓기도 전에 사장의 부름을 받았다.

‘무슨 일일까?’

사장실에 들어서던 나는 주춤 멈춰섰다. 막 출근한 듯 가방을 책상 위에 놓은 채 서 있는 사장 건너편으로 꽤 키가 크고 거무튀튀한 얼굴색의 웬 중년남자 하나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사장은 조심스레 들어서는 나를 힐끗 보더니 건너편 손님에게로 눈길을 주며 소개삼아 말했다.

“중앙당 조직부 부부장 동지요. 동무는 오늘부터 중앙당에 가서 글을 써야겠소. 바로 부서로 올라가 준비하고 빨리 내려오시오.”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가슴이 얼어붙었다. 지금껏 중앙당 조직지도부에서는 선전부나 기타 부서와는 달리 기자들을 불러들여 글을 쓰게 하는 일이 없었다. 장기간 제2경제위원회와 제2자연과학원 당위원회에 동원돼 글을 썼고 당시 중앙당 군수공업부 전병호 비서의 ‘덕성실기’를 편집하면서 중앙당 선전선동부나 군수공업부 출입이 잦았던 나는 어쩐지 이 손님이 당중앙 일꾼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육감은, 내가 몇 달째 걱정해온 무서운 일이 닥쳐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손님의 얼굴에 내비친 어둡고도 냉랭한 표정과 작은 눈에서 흘러나오는 살기는 나의 생각을 더욱 굳혀주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옮겨놓으며 나는 부서로 돌아왔다. 책상을 마주하고 앉으니 딸애의 모습이 눈에 꽉 차올랐다.

‘이 애한테 엄마의 일을 알려주어야겠는데… 애가 집에 혼자 있을 수 있을까….’

지방에 취재를 나갈 때도 엄마가 없어서 외로워할 딸이 걱정돼 학교 들어갈 나이까지 부득부득 데리고 다니던 나였다.

무거운 마음으로 망연히 앉아 있는데 부서의 전화가 요란스레 울렸다. 누군가 전화를 받더니 차가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내려오란다고 알렸다. 그 자리에서 급사를 하지 않는 한 가야 할 운명의 길이었다. 집에 혼자 남아 엄마를 걱정하며 밤마다 울 딸애의 일이 마음에 걸리고 또 걸렸다.

나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들고 천천히 정문으로 나갔다. 중앙당 부부장이라던 사람이 승용차 뒷문을 열어주었다.

‘국가보위부가 분명한데 한번 겪어보자. 죽기밖에 더하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승용차에 태워 점잖게 데려가는 것을 보면 혹 제기된 문제의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돌려보내려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굴리면서 심신을 가다듬고 있는데 차는 옥류교를 건너 평양역 앞을 지나 보통강 역전에 채 못미처 되타령에서 정부 부총리급들이 사는 야산 기슭의 고급주택가 옆으로 난 한적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길 입구에는 호위사령부의 초소가 있었다. 나는 평양에 30여 년을 살아오면서도 시내 중심에 이처럼 울창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새들이 지저귀고 인적이 드문 심심야산이 있는 줄 몰랐다.

차는 산굽이를 돌고돌아 포도넝쿨로 뒤덮인 아담한 독립가옥 앞에 멈춰섰다. 겉보기에 별장 같은 집이었다. 아마 이 산 속에 홀로 있는 집인 듯했다. 깨끗한 마당 안에 중년 여인네 하나가 강냉이 이삭이 담긴 삼태기를 들고 오가고 있었다. 그 정경을 보니 별 큰 위험을 없을 것도 같았다.


김일성·김정일의 초상화 걸린 국가보위부 감방
나는 차에서 내려 이제는 손님이 아니라 내 목줄을 쥐고 있을 그 사람을 따라 가옥 안의 한 방으로 들어갔다. 바닥엔 주단을 깔고 창문엔 고급 커튼을 치고 수입제 선풍기가 벽모서리에서 빙빙 돌고 있는 잘 꾸며진 방이었다. 그 사람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본인을 데려다 놓았습니다”고 보고했다. 천천히 뜸을 들이더니 그 사람은 가방 자크를 쭉 열어젖히고 문건 같은 것을 꺼내 놓았다.

“요새 무슨 글을 쓰고 있는가?”

그가 처음으로 내게 건넨 말이었다.

나는 긴장감으로 꽉 막혀버린 목을 가까스로 축이며 힘겹게 대답했다.

“전병호 비서의 덕성실기를 편집하고 있습니다.”

그는 의자 등받이로 몸을 젖히면서 계속 물음을 이어나갔다.

“그건 그렇고. 이제부터 묻는 말에 대답해. 이름은?”

“김길선입니다.”

“생년월일과 출생지는?”

“1955년 10월3일. 중국 심양시 남시구에서 출생했습니다.”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 고전문학과입니다.”

“현직은 뭐야?”

“제2자연과학출판사 강연선동편집부 기자입니다.”

“취미는 뭐야?”

“음악과 탁구입니다.”

“병은 없어? 왜 몸이 그렇게 약하나.”

“없습니다.”

“지금까지 쓴 글에서 대표적인 것은 뭐지?”

“1992년에 쓴 녹음강연제강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는 경애하는 수령님의 주체적 국방과학사상을 조국땅 위에 꽃피워 나가시는 위대한 충신, 지극한 효자이시다’, 1994년에 쓴 녹음강연 ‘위대하여라, 자위의 보검이여!’입니다.”

“세 건 다 지도자동지의 친필 방침을 받았다지….”

나는 머리를 푹 수그렸다.

그는 잠시 무슨 생각인지를 하더니 문건을 덮으면서 엄하게 말했다.

“여기가 어덴지 알 만해? 여기는 국가보위부야. 너는 지금 사상적으로 변질되어가고 있어. 그건 네가 최근년간에 한 발언들이 증명해주고 있다. 너는 암암리에 수령의 권위를 크게 헐뜯었고 당정책을 시비했단 말이야. 여기는 너같이 변질된 자들이 들어와서 사상개조를 하는 곳이야. 사상개조를 제대로 해서 사회에 내놓아도 위험이 없겠다고 인정될 때에야 여기서 나갈 수 있어. 그렇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종신 격리돼 있어야 해. 너도 대학을 나오고 사상전선의 일선에 서 있는 기자니 잘 알 테지만 발언이란 사상의식의 표현이야. 이제부터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잘못 생각하고 발언한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동안 나를 선생님이라 불러!”

어마어마한 위협이었다. 가슴이 답답해오며 아프기 시작했다.

“그러면 우리 딸은 어찌합니까. 그애는 지금 집에 혼자 있습니다….”

너무도 속이 떨리고 울음이 북받쳐서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자식에 대해서는 걱정을 안 해도 돼. 출판사 초급당에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를 했어. 그러니 네 일이나 생각해. 네가 비판을 제대로 하고 빨리 개조되면 빨리 여기서 나갈 수도 있다.”

황당한 일이었다. 나는 남들이 대체로 알고 있는 사실들과 쉬쉬하면서 주고받는 말들을 듣고 말했을 뿐 내 자신이 생소리를 지어낸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스스로의 변명일 뿐, 수령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발언에 대해서는 말한 사람은 물론 들은 사람까지도 다 잡아가두는 것이 국가보위부였다. 죄가 있든 없든 간에 잡혀들어만 가면 살아나오기 힘들다는 보위부, 죄가 부족하면 만들어 씌워서라도 종신 감옥생활을 시키며 자손 대대로 그 죄를 계산하는 막강한 악권을 가진 국가보위부에 걸려들었으니….

‘나는 죄가 없다. 나를 발언죄로 잡아넣는다면 조선사람 절반 이상은 잡아넣어야 한다. 왜 나만 붙들고 이 야단인가.’

반발이 머리끝까지 솟구쳤지만 애원에 찬 눈초리로 ‘선생’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 심리를 가늠하는지 좀 누그러진 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우리가 할 일이 없어서 이러는 줄 알아? 이 일은 국가안전과도 관련된단 말이야. 지금 남조선 안기부놈들은 우리 내부에 간첩·암해분자들을 계속 들여보내 수령의 권위를 훼손시키고 민심을 소란시키는 요언비어를 돌리고 있어. 놈들은 그렇게 해서 수령·당·대중의 통일단결을 내부로부터 허물어뜨리려 하고 있다. 여기에 바로 너 같은 불건전한 자들이 말려들어서 맞장구를 치고 있어. 그래서 우리는 너 같은 자들을 격리해 놓고 사상개조를 시키는 동시에 요언비어의 출처를 끝까지 조사해간단 말이야. 그러노라면 진짜 나쁜 놈들을 잡아낼 수 있어. 그런 실례는 많아. 그러니 먼저 허심하게 반성을 하고 간첩들을 잡아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주어야 해. 그러니 우선 비판을 잘하고, 듣고 전달한 말의 출처를 정확하게 알려주어서 빨리 수습하도록 하자. 용서는 내가 하는 것도 아니고 당에서 하는 것이니 당을 믿자구.”

나는 가슴이 메어올랐다. 위대한 김일성과 친애하는 김정일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서슴없이 바쳐야 한다고 30년 동안이나 교양을 받아왔고 내 자신 얼마든지 그리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더랬는데 막상 이렇게 죽는다는 것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선생은 일어나서 내 앞으로 오더니 두툼한 16절지 묶음을 내밀었다.

“이제부터 저 동무가 안내하는 방에 가서 비판서를 쓰기 시작해.”

뒤를 돌아보니 언제 들어왔는지 웬 청년이 서 있었다. 나는 맥없이 그를 따라나갔다. 청년은 맞은편 방문을 열고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은 방이 아니라 기다란 복도였다. 나는 온 몸이 싸늘하게 식어들어갔다. 거기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살창이 달린 독감방들이 주르르 늘어서 있었다. 나는 그 첫방에 갇혔다. 그곳에는 침대와 책상·의자가 있었고 책상을 마주한 벽에는 김일성·김정일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가느다란 희망이 나를 비추었다. 내 비록 옥살이는 못 해보았지만 감방에 대한 귀동냥 지식은 좀 있었다. 감방에 걸린 초상화는 살아날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상징물과도 같았다. 자기가 지은 죄는 누구보다 자신이 제일 잘 아는 것이다. 아무리 여러모로 생각을 해도 나의 발언죄라는 것이 죽임을 당할 만큼 엄중한 것은 아니었다.


‘소경 제닭 잡아 먹는’ 보위부
나는 이미 이러저러한 나의 발언이 어느 한 경로를 통해 국가보위부에 기소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근심했으며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논거도 세워뒀더랬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이 “최근 국가보위부의 전략이 많이 달라졌는데, 특히 발언죄에 대해서는 종전처럼 무조건 잡아없애는 것이 아니라 경중에 따라 교양 훈계하는 방법으로 될수록 적을 적게 만드는 것”이라고들 해 마음이 좀 놓이기도 한 터였다. 그러나 잡혀온 이상 그것이 사실인지는 겪어보아야 알 일이었다. 국가보위부는 내가 어려서부터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일’을 내놓고는 세상에 못 하는 짓이 없는 살인악마의 집단이라고 선전을 들어온 남조선 중앙정보부 못지않게 무서운 존재였다.

돌덩이처럼 무거운 생각을 안고 감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데 문 밖에서 감시하던 청년이 살창을 두드리며 어서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라고 손시늉을 하였다. 머리를 돌려 그를 훑어보니 민간복 차림에 옆구리에는 권총을 차고 있었다.

나는 맥없이 책상에 다가가 앉았다. 머릿속이 윙윙거렸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딸과 남편·부모님에 대한 산더미 같은 걱정이 나를 내리눌렀다.

과묵한 일꾼들도 오류를 범하고 사상투쟁무대에 오르기만 하면 잠자리에서 한 발언까지도 들추어내어 반당·반혁명·반국가적이라는, 온갖 덤터기를 다 씌워서 가족과 함께 추방해버리는 체제에서 나처럼 자유주의가 심하고 보고 듣고 느끼는 대로 고려없이 탕탕 말하는 풋망아지에게 죄를 씌우기는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하물며 그런 일을 전업으로 하는 국가보위부에 걸려들었으니…. 내가 매장된다는 것은 내 목숨보다도 소중한 딸자식과 남편을,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정치범 가족수용소로 밀어넣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나는 책상에 얼굴을 묻고 슬피 울기 시작했다. 나 자신이 야속했다. 다른 사람들은 별의별 말을 다 하고도 안 걸려드는데 유독 나만 머저리같이 잡힌 것이 절통해서 울었고 딸애와 부모님께 엄청난 재난을 씌우게 된 것이 너무나 가슴 아프고 죄스러워서 울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문이 벌커덕 열리면서 “지금까지 쓴 것을 들고 나와!” 하는 칼칼한 음성이 울렸다. 나는 울음을 그치고 글 한자 쓰지 않은 백지묶음을 들고 처음의 그 방으로 들어갔다. 선생은 백지묶음을 보더니 대뜸 얼굴이 푸르딩딩해졌다.

“왜 한 장도 안 썼어. 뻗치기를 하는 거야? 이 간나새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있어! 젊잖게 말할 때 듣는 게 좋아. 너 같은 건 원래 비판서구 뭐구 죽여줘야 해. 그러나 당에서 키운 사람이고 또 공로도 있고 해서 개전할 기회를 주자는 건데 배은망덕하게 놀아. 도대체 글 한 자도 안 쓴 이유가 뭐야, 엉?”

무섭게 귀청을 때리는 소리였다.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간신히 대답했다.

“무엇부터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선생은 나를 한동안 쏘아보더니 타이르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 아까도 말했지. 우린 너를 안기부가 파견한 간첩이나 그놈들에게 매수된 자로는 보지 않아. 그러나 네가 말한 소리는 놈들의 선전과 똑같단 말이야. 생각 같아서는 너 하나쯤 죽여 치우면 되겠지만 그렇게 되면 네 친척들이 다 피해를 본단 말이다. 너 하나 때문에 죄없는 숱한 사람들을 적의 편으로 밀어뜨릴 수 있어. 그래서 우리는 너에게 개전의 기회를 주자는 거야. 그리고 혹 네가 하지 않은 말도 네가 했다고 억울하게 기소됐을 수도 있잖아? 이런 것도 다 바로잡아서 공명정대하게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자는 거야. 너는 지금 아주 엄중하게 기소되었어. 그러나 수령님께서 ‘보위부에서 문고리 먼저 쥐는 사람의 말만 믿고 문제를 처리하다가는 소경 제 닭 잡아먹는 결과를 빚어낼 수 있다’고 하시었기에 우리는 기소된 내용들을 덮어놓고 다 믿지 않아. 그러니까 네 손으로 비판서를 써서 자기의 죄를 철저히 깨닫고 또 잘못 기소된 것은 바로잡아 놓아야 해. 그래야 여기서도 빨리 나갈 수 있어. 이제 가서 점심식사를 하고 허심하게 쓰라구.”

그 소리에 머리를 들고 벽시계를 보니 어느새 오후 1시가 되어오고 있었다. 나는 경비병을 따라 다시 감방으로 왔다. 책상 위에 점심 끼니가 담긴 쟁반이 놓여 있었다. 쌀밥에 김치·배춧국이었다.

‘어떻게 이밥을 다?…’

김일성 사후 평양시에서는 식량공급이 점점 떨어지더니 1995년 여름부터는 한 달 분량을 다 공급하지 못하고 보름분을, 그것도 전부 콩이나 통강냉이로 내주었다. 그래서 중앙당이나 인민무력부·사회안전부·국가보위부의 공급대상에 들지 않는 시민들은 쌀밥을 먹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희귀하게도 쌀밥을 나 같은 죄수들에게 주고 있었다. 그러나 쌀밥이 아니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옥류관 냉면을 준다 해도 전혀 먹을 생각이 없었다.


“수령이 남의 유부녀나 가로채 살 것 같애?”
좀전에 선생이 한 말을 곰곰이 새겨보니 비판서만 잘 쓰면 오늘밤에라도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황당한 미련이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슬픈 웃음이 난다.

나는 점심식사를 밀어놓고 백지에 글을 담기 시작했다. 내가 평소에 지겨운 마음으로 비평했던 발언들을 조심스럽게 써나가며 서서히 보위부에 기소된 내용으로 접근해갔다. 그러면서 자신을 정치사상적으로 심각하게 분석비판하였다.

이미 대처했던 문제들인지라 2~3시간 내에 두툼한 비판서를 작성했다. 나는 경비병을 찾았다. 언제 교대를 했는지, 온 얼굴이 수염투성이인 늙수그레한 사람이었다.

“글을 다 썼습니다. 선생님을 만나게 해주세요.”

경비병은 투박스럽게 “가지고 있어!”라고 내뱉고는 그냥 덤덤히 감시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속이 달아올랐다. 날은 어느새 저물어 어둠이 깃들이기 시작하였다. 저녁이 들어왔지만 늦더라도 집에 가서 먹으려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드디어 찍―하는 전기벨 소리가 울리더니 철창문이 벌커덕 열렸다. 나는 비판서 묶음을 안고 경비병을 따라서 선생 앞으로 갔다. 나의 참회가 시작된 것이다.

국가보위부 별장에서의 첫날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가을을 알리는 풀벌레들의 야무진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슬퍼지는 마음을 애써 누르면서 내가 쓴 비판서를 한장한장 읽어내려가는 선생을 눈여겨 보고 있었다. 선생의 얼굴은 갈수록 심각해졌고 미간에는 내 천(川) 자가 새겨졌다. 이윽고 선생이 마지막 장을 덮으며 얼굴을 들었다. 그는 잠시 두 손을 턱에 괴고 무엇인가를 생각하더니 하늘색 표지의 두툼한 문건을 던지면서 말했다.

“아주 점잖게 썼는데? 솔직하지 못해… 교만하단 말이야. 내가 뭐라고 했어. 들었거나 한 발언들을 덜지도 말고 보태지도 말고 표현한 그대로 쓰라고 했지! ‘그 새끼’라고 했으면 ‘그 새끼’, ‘부화했다’라고 했으면 ‘부화했다’라고, 말한 그대로 쓰란 말이야. 이렇게 썼다고 해서 네 죄가 덜어질 것 같애? 내 이제 네가 한 발언 가운데서 한 건을 읽어주겠으니 귓구멍을 후비고 똑똑히 들어!”


자료:1994년 10월9일 김길선 집에서 김모·박모·추모가 주고받은 말.

추모:지도자 동지께서는 보천보 전자악단 배우 김광숙이를 매우 사랑하신다. 어딜 가나 데리고다니기 때문에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지도자 동지의 부인인 줄로 알고 있었대. 그이께서는 광숙이가 노래를 잘 불러서 기쁨을 드리면 선물도 아낌없이 주신다. 광숙이네 집에는 선물로 받은 피아노만도 3대나 된다고 한다.

박모:그이께서는 영화배우 오미란이도 좋아하신대. 그래서 쩍 하면 집무실로 부르시는데 그 혼자만 자꾸 부를 수가 없어서 아버지까지 함께 부르신대. 그리고 국가연회에도 빠짐없이 참가시킨대.

김:너희들 다 모르는 소리다. 지도자 동지께서 진짜로 사랑하신 건 배우 성혜림이다. 성혜림은 원래 작가 리기영의 며느리인데 그이께서 가로채서 살았대. 그는 나이도 지도자 동지보다 위래. 후에 수령님이랑 온 집안이 반대를 해서 뭉터기 달러를 주어 외국에 내보냈대.


나는 귀를 의심했다. 우리집에 도청장치를 했는가? 너무도 무서웠다. 이 발언 내용이 보위부에 고발된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받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소된 줄은 몰랐다. 속이 얼어들면서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선생의 고함소리가 방안을 팍 때렸다.

“야, 네 생각에는 수령이 남의 유부녀나 가로채서 살 것 같애? 어디서 사람 같지도 않은 것들이 모여들어서 개소리를 쳐! 너 같은 년들은 원래 비판서구 뭐구 다 총살해치워야 해. 개 간나새끼들…. 어디다 대고 수령을 함부로 헐뜯어? 이제부터 1994년 10월9일에 있었던 네 명의 대화를 네손으로 그대로 써라. 그리고 성혜림 이야기를 누구에게서 들었으며 누구누구에게 옮겨놓았는가도 똑똑히 밝혀라.”

밤 10시경에 나는 절망에 싸여 감방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책상 위에는 저녁식사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종일 굶었는데도 배고픈 감은 전혀 없었다. 허탈감이 온몸을 휩쓸었다. ‘종신 감옥귀신이 되어야겠구나….’ 나는 맥을 잃고 의자에 무너져 앉았다. 그리고는 눈을 들고 벽 위의 김정일 초상화를 올려다보았다. 잘생긴 얼굴이었다. 두렵고도 가증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때 나에게는 김정일에게 죄스럽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지금까지 ‘기쁨조’요 뭐요 하면서 김정일의 여성관계에 대해 내남없이 쉬쉬거리는 속에 나도 참여하곤 했지만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이상 그 사실여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김정일의 뒷생활에 대한 말들은 뒷골목에서 많이도 돌았다.

‘그이께서 성혜림이와 부화하긴 한 모양이구나. 그이도 부처님이나 신이 아닌 이상 분명한 남자로서 마음에 드는 여자와 부화할 수도 있지 않은가. ‘임금은 무치’라는데 부화했으면 했지, 그 말을 했다고 이렇게 잡아가두고 못살게 굴어….’

이런 생각이 불기둥처럼 치밀어올랐다. 문득 어느 유명한 우화에서 자신의 귀가 말귀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사람들을 위협하며 조폭하게 날뛰던 그 어리석은 임금이 생각났다. 지금도 나는 국가보위부에서 사람들의 발언을 놓고 잡아가두고 문초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본다. “귀신 소문도 석 달은 안 간다”고, 가만히 내버려두면 절로 가라앉을 일을 국가정치보위부가 사람들을 잡아가두고 수습을 한다고 하면서 들쑤셔놓아서 그 여운을 더 길게 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유치하고 염증나는 칭송곡들
별장에서의 둘째 날이 시작되었다. 나는 가져온 아침식사에서 시래깃국만 쭉 들이키고 책상에 마주 앉았다. 정신을 가다듬고 1994년 10월9일에 박·추와 내가 나눈 대화를 기억나는 대로 적어나갔다. 나는 성혜림 건을 전해들은 경위에 대해서도 그대로 진술했다. 성혜림 이야기를 얼마나 반복해서 썼는지…. 국가보위부 선생은 이 발언 하나를 놓고 거의 3일 동안이나 문초하고 비판서를 쓰게 했다. 그럴수록 나는 단순했다. 우연한 기회에 희귀하게 전해듣고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동무들 사이의 대화가 그 방향으로 흐르다 보니 나도 얻어들은 대로 말했다, 그러니 잘못했다.―이것이 전부였다.

아마도 김정일은 성혜림의 일로 해서 무척이나 속을 썩였던 것 같다. 그것은 이 일이 한때 문화예술계를 들었다 놓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리라. 이 연애사를 알고 말로 번져놓은 사람들은 거의가 보위부에 연행돼 경중에 따라 매장되거나 지도자 동지의 권위를 목숨으로 담보하겠다는 손가락 지장을 찍고서야 풀려나왔다고 한다.

1970년대에 김정일에게서 과업을 받고 성혜림 사건을 수습하느라고 전력을 기울인 국가보위부로서는 90년대까지 이 입소문을 막지 못했으니 악이 날만도 했다. 내가 국가보위부의 신세를 진 것은 사실상 성혜림 사건 때문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나의 참회는 계속되었다.


자료:1994년 2월 집필실에서 김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지도하시는 보천보전자악단 창작가들을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작가들이 친애하는 그이를 칭송하는 노래를 어른용·아동용을 가려서 지어야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히려 수령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내가 가깝게 지내는 언니네 동네에는 90세가 넘은 할머니가 계시는데 인민학교 학생들이 아침마다 집단등교를 하면서 ‘자랑하자 김정일, 우리의 지도자’ 노래를 제멋대로 부르는 소리를 듣고 ‘김정일이가 누군지 재수가 없겠다. 애들까지 저렇게 이름을 마구 불러대는 것을 보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수령을 형상한 노래일수록 점잖고 품위있게 지어야지, 김광숙이가 부르는 노래 ‘그리워’는 꼭 애인을 그리는 노래 같은 게 듣기가 다 거북하다.”


선생은 하늘색 뚜껑의 자료철을 밀어놓으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그런 발언도 수령의 권위 훼손죄란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보천보전자악단에서 김정일을 형상하는 새로운 노래를 내놓을 때마다 가끔 염증을 느끼곤 했다.

“그리워. 그리워 자애로운 그 품이…” “자애로운 그 미소를 생각합니다” “따뜻한 그 미소 그립습니다…” “그품에 안기어 흐느낍니다…”

아첨도 별나게 한다 싶었다. 내가 보기에 그이의 미소는 부드럽고 자애롭기보다는 권력을 쥔 자만자족감, 남을 내리누르고 있다는 오만한 희열에 찬 방자호황한 미소였다. 아마도 김정일은 그런 유형의 노래를 좋아하는 것 같다. 배우들이 자기의 코 앞에서 그런 노래를 부를 때 그의 감정이 어떠했을까? 흡족했을까, 쑥스러웠을까? 여하튼 나 개인의 견해로는 한 나라의 지도자를 칭송하는 노래 치고는 너무나 유치하다는 것이다. 나는 김정일을 헐뜯은 것도 아니요, 하도 듣기가 딱해서 수령 묘사 노래를 품위있고 점잖게, 그리고 어린이들이 부를 노래를 따로 창작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말했을 뿐이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란 말 그대로 나는 선생의 방조하에 스스로를 회개하였다.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들으시고 좋다고 하신 것은 다 명곡·명작입니다. 내가 그렇게 발언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지도자동지의 하늘 같은 사랑과 배려를 가슴 뜨겁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효성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조선말기 같은 북한 현실
밤낮없이 쓰고 문초받고 또 쓰고 문초받는 속에서 날들이 흘렀다. 기일이 지나면서 나는 점차 별장생활에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광복거리 ― 송신행 궤도전차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저녁 퇴근시간이 되면 궤도전차 안에서 서로 비좁다고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까지도 들려오는 듯했다. 별장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럴 때면 철창에 부딪혀 부서지고 싶을 정도로 지척에 있는 집이 그리웠다. 딸애가 피마르게 보고 싶었다. 딸애와 만나서 “이 엄마를 기다리지 말고 네 길을 개척하면서 살아라”라는 말 한마디만 전할 수 있다면 아무리 긴 옥살이라도 시름놓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생각이 못 견딜 정도로 파고들 때면 나는 창문의 쇠창살을 부여잡고 하늘에 대고 엉엉 소리를 내 울었다. 경비병이 문을 두드리고 걷어차며 위협해도 무관했다. 오래오래 실컷 울고나서야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곤 했다.

밤 9시경에는 반드시 불려나갔다. 선생은 염라대왕같이 도사리고 앉아서는 꼬박꼬박 따져 물었다.

“1995년 ×월×일. 너는 강모에게 취재길에서 들은 이야기라고 하면서 지방사람들이 ‘김정숙 동지의 공로는 뭐니뭐니 해도 빨리 서거하신 것이고 지도자 동지의 공로는 뭐니뭐니 해도 김성애를 제낀 것이다’고 말한다면서 그럴 듯한 소리라고 했지! 누가, 언제, 어디서 그런 개수작을 했는지 써”

물론 있었던 일이었다. 하도 신통한 평이어서 내 자신도 이마를 쳤다. 역시 인민은 속일수 없다고….


자료:1994년 ×월×일. 강동 제2경제위원회 회관에서 김과 박은 사회주의경제관리체계인 대안의 사업체계를 시비하며 망언을 하였다.

김:대안의 사업체계는 유명무실하고 종잇장에 지나지 않는데 어째서 해마다 숱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대안체계 토론회를 하는지 모르겠다. 머저리들인지, 아니면 아첨을 하는 건지….

박:수령님께서 자꾸만 하라고 한대. 우리 나라 경제가 앞으로 어떻게 될까?

김:어떻게 될 게 있는가? 자력갱생, 간고분투하다가 망하지. 수령님은 대대손손 농민가정 출신이시기에 경제관리도 농민식으로 한단 말이다. 구두쇠 농민들이 남에게서 꾸지도 않고 꿔주지도 않고 흥하든 망하든 제 고집대로만 밀고나가는 것처럼 말이야….

“너는 언젠가 집필실에서 ‘동방 은둔국에 밤도 길다’고 말했다는데 무슨 뜻이야?”

그런 말을 했었다. 해도 공개적으로 여러 번이나 했다. “동방 은둔국에 밤이 길다”는 글귀는 박태원 선생의 장편역사 소설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의 제3부에서 나오는 소제목이다. 어렸을 때 이 소설을 읽은 뒤 몇 년 전에 다시 읽어보았다. 그때 나는 우리 나라의 현실이 꼭 소설에 형상된 이조 말기의 재판 같았다. 그래서 동료들이 모여 앉아서 우리도 개혁개방해야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할 때마다 “동방 은둔국에 정말로 밤이 길다”고 개탄하곤 했다. 나는 이 발언에 대해서도 허심하게 비판을 하였다.

“수령님께서는 ‘우리 나라는 이미 오래 전에 개혁할 것도 다 하고 개방할 것도 다 했다. 그래서 개혁개방할 필요가 없다. 동무들은 절대로 지금 주변나라들에서 한다는 개혁개방에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수차에 걸쳐 교서하였는데 수령님의 사상을 신조화하지 못하다보니 적들의 선전과 꼭 같은 허튼소리를 했습니다”라고.

언젠가 나는 우리 출판사 문헌편집부의 차모와 함께 인민대학습당 비공개열람실에서 1945년부터 1955년까지의 신문들을 열람하다가 6·25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차모는 어디서 얻어들었는지 “조국해방전쟁은 우리가 먼저 일으켰다. 수령님께서 스탈린에게 남으로 밀고나가겠으니 승인해달라고 하자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중국의 승인 아래 쭉 밀고 나갔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때 ‘4·15문학창작단’의 한 작가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는 이미 작고한 선배작가의 1950년 4~6월까지의 취재록에서 수령님과 황해남도 농민대표 사이의 담화기록을 보았는데 거기에 농민대표가 “지금 대포와 인민군대가 계속 38선 쪽으로 나가고 있는데 장군님 혹시 전쟁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장군님께 물으니 그이께서 아무 말씀 없이 웃기만 했다는 내용이 씌어 있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이 내용을 차모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이 대화도 나의 죄 목록에 들어있었다.


사형수를 기관단총 시험사격용으로
그 하늘색 뚜껑의 자료철에는 내가 연간에 한 엄중한 발언들이 거의 다 기록되어 있었다. 김일성이 자기 아들을 ‘김정일 동지’라고 치켜세우며 그의 생일 50돌에는 ‘광명성 찬가’라는 송시까지 지어서 공화국의 밥술드는 사람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외우도록 한 것을 보고 김일성의 ‘노망’이라고 발언한 것. 김일성이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동족상잔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여기서는 그 누구도 도덕적 책임을 말할 수 없다”고 쓴 대목을 보고 ‘수령님의 참회’라고 한 것. 김정일이 공화국 원수 칭호를 받았을 때 “전쟁판에 한번도 서보지 못한 분이 어떻게 원수 칭호를 받는가? 아이 때에 군사놀이를 잘해서 주는 것인가?” 하고 야유한 것. 또 김정일이 “동무들은 두 가지를 하고 싶어도 내가 하나를 하라고 하면 하나를 해야 한다” “내가 검은 것도 희다고 하면 동무들도 그렇게 알고 있어야 한다”고 한 지시를 놓고 “두 가지를 해서 더 좋게 되면 두 가지를 하는 것이고 검은 것은 엎어치나 둘러치나 검은 것이 진리인데 그이 한 분이 지시를 한다고 해서 어떻게 멀쩡한 사람들이 검은 것을 희다고 하겠는가”라고 발언한 것….

어느날 밤 10시경 나는 또다시 선생 앞으로 불려갔다. 근 수십일간 그 한 사람만을 상대해서 끈질긴 문초를 받고 나니 이제는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지긋지긋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생은 눈에 익은 문건철을 펼쳐놓고 정력적으로 문초에 들어갔다.

“1994년 12월×일 너는 출판사 도서편집실에서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문헌정리사업을 시비하면서 엄중한 비밀을 누설했다.”

선생은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나를 쏘아보았다. 당시 중앙당군수공업비서의 개인적성실기를 편집하느라고 군수공업부 종합과에 자주 드나들면서 김정일의 비공개 문헌들을 열람하던 나는 어느날 김정일이 개들을 목표물로 해서 신형기관단총(대남공작사업에 쓸) 시험사격을 했다는 보고를 받고 “개를 목표로 해서는 성능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내가 국가보위부장에게 지시를 할 테니 사형수들을 데려다가 다시 시험사격을 하라”고 지시한 내용을 보게 되었다. 그것을 읽는 순간 나는 속이 비릿해짐을 느꼈다.

‘사형수들을 총기 시험대상으로 쓰다니, 지금이 어느 때인데…. 죄수건, 사형수건 사람을 총기시험 대상으로 하는 것은 국제법상으로 금지되어 있지 않은가? 설사 그런 지시를 내렸다 해도 훗날에 무슨 지탄을 받자고 그 말씀을 문헌화해 놓는가?…’ 이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발언한 것이 비밀누설죄에 걸려서 얼이 쑥 나가게 문초를 당했다.

1989년 생화학무기 개발에 대한 자료가 일본의 어느 출판물에 게재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김일성이 대로해서 제2자연과학원 보위부에 당장 사건을 해명하라고 명령을 했었다. 그 시기에 나는 과학원 사적자료실에서 자료 취재를 한 것이 연루가 되서 어지간히 시끄러움을 당한 적이 있다.

끝이 없을 성싶던 내 발언죄는 20일도 되기 전에 밑창이 드러났다. 출판사 보위지도원이 ‘성혜림 사건’을 기소받고 나를 대단한 반당반혁명분자로 지목하고 이단적 발언 등을 주워모으느라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밀어붙이고 온갖 비열한 수법을 다 썼지만 고작해서 30여 건밖에 적발해내지 못했다. 별장에 연행되어와서 25일째 되는 날부터는 불려나갈 일이 없었다.

별장에서의 40일은 정열적이고 가벼웠던 김길선이라는 인간이 죽어없어지고 음흉하고 독하고 야심만만한 새 인간이 생겨나는 나날이었다. 내가 살 운명이었는지, 아니면 국가보위부의 전략이 정말로 달라졌는지 나는 95년 10월6일 머리가 허옇게 세고 체중이 7kg나 줄어서야 그 지긋지긋한 옥살이에서 풀려났다. 다시는 당과 수령 앞에 죄를 짓지 않겠으며 친애하는 김정일을 옹호보위하는 길에서 맹수와 같이 앞장서 투쟁하겠다고 서약을 할 때 나는 살려주는 것이 너무나도 고마워서 주저앉아 땅을 치며 울었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나는 그 40일 동안에 나로서도 주체할 수 없는 뼛속 깊은 증오와 복수심을 키워가지고 사회에 나왔다. 나의 운명은 이때부터 달라지게 되었다. 인간을 부당하게 패배시키려는 것은 독재자의 유치한 복수심이다. 미국작가 헤밍웨이는 말했다. “그대가 그를 소멸할 수는 있지만 그를 패배시킬 수는 없다.”


30년 살던 평양으로부터 추방
믿지 않으려야 믿지 않을 수 없는 숙명이 있다. 우리집은 평양시 중구역 대동문동 7번 14호였다. 우리가 이사를 오기 전에는 북조선에서 김일성 다음으로 높은 직위에 있었던 최용건의 부관이 그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무슨 죄를 지었는지 국가보위부에서 하룻밤새에 온 가족과 가산을 어디론가 실어갔단다. 그후 나의 시할머니가 항일혁명열사 유가족이라 이 집에 들었다. 나는 시집을 와서 그 이야기를 듣고 “집터가 나쁘구나. 후에 추방을 당할 게 아니야?” 하고 남편에게 농담삼아 이야기한 적이 있다.

95년 12월29일 설을 3일 앞두고 추방령을 받던 날 나는 오래 전에 한 이 농담을 생각했다. 나는 국가보위부에서 풀려나온 뒤 심하게 앓았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절망했던 어머니와 딸애를 얼싸안는 순간 40일 동안이나 견지했던 초긴장도가 일시에 풀리면서 까무러쳤다. 후과는 폭발적이었다. 잇몸이 들리고 곪아 터져서 입에서는 고름이 질질 흘러나왔고 지금껏 붓는다는 걸 몰랐던 몸이 부었다 내렸다 하며 조화를 부렸다. 게다가 별장에서 얻은 불면증 때문에 하루 한 시간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부모님과 동생들은 나를 간호하느라고 있는 밑천을 다 털어냈다. 국가보위부에서 나온 후 보름 만에야 나는 출판사로 나갔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치고박고 농도 곧잘했던 얼굴들이, 정문으로 들어서는 나를 염라국에서 살아돌아온 귀신 대하듯 두려워하며 슬슬 피했다. 그럴 만도 한 일이다. 내가 잡혀들어가서 예심을 받는 기간 나와 불손한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다 보위부나 당위원회에 불려가서 며칠씩 사상검토를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서 초급당비서방을 찾았다. 기자들의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관계없이 손아래 동생처럼 하대하던 초급당비서는 엉거주춤 일어서서 나를 맞아주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윽고 초급당비서가 입을 열었다.

“동무가 자기 비판을 잘하고 나왔으니 더 긴 말은 하지 않겠소. 이번 일을 평생의 교훈으로 삼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고 일을 잘하시오. 우리 당은 관대합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또 울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당과 수령에게 충실하고 일을 잘하겠다는 결심을 다졌다. 그로부터 40일 후 우리집은 불시에 추방령을 받았다. 어느새 공민증의 퇴거수속을 했고 고등중학교에 다니는 딸애의 전학증까지도 다 떼가지고 누워 앓고 있는 나를 찾아와서 내일 당장 떠나가란다. 딸은 내가 또 심장발작을 일으킬까봐 내 손을 꼭 쥐고 눈물을 떨구면서 울고 있었다. 나는 딸애의 머리를 끌어안고 등을 가만히 다독이면서 속시원하게 눈물을 흘렸다.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뭔가 더 있을 것 같아서 속을 죄었는데 추방령을 받으니 한편으로는 ‘이제는 고통을 더이상 주지 않겠지!’하는 생각에 가쁜하였다.

남편의 직장과 출판사에서 인원이 동원되어 온밤 이삿짐을 꾸렸다. 나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그 광경을 새겨보았다. 다음날 오후 우리 가족은 추방지로 가려고 평양역에 나갔으나 떠나질 못했다. 사회안전부 주민조절 그룹에서 평양역전에 지령을 떨구지 않아서 기차표를 팔 수 없단다. 북의 행정체계는 항상 이런 식이다. “유배가기도 힘이 들구나.” 나도 모르게 입에서 야유가 삐져나왔다.

그날 우리 가족은 중구역 외성동에 있는 나의 친정집에서 30년 가까이 살아온 평양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냉돌처럼 앉아 있는 나를 보다못해 어머니는 커다란 컵에 술을 채워서 내 입에 가져다댔다. 그것을 마시고 속도 풀고 밥도 좀 먹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컵의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 모양을 보고 아버지가 나앉으시며 훈시를 했다. “지방에 나가서 생활을 잘해야 한다. 이제 한 3년 동안은 보위부가 계속 감시를 할 수 있으니 발언을 꼭 주의해야 한다. 이제 다시 죄를 지으면 그땐 정말 온 가문이 살아남지 못한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참고참던 나는 벽을 향해서 들고 있는 술잔을 힘껏 던지며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하고 오열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내가 추방령을 받던 날 이삿짐을 꾸리는 현장에 나타났던 안전원을 보고 “내일 모레가 설날인데 설을 쇠고 보내면 안됩니까?” 하고 공손히 물어보았더랬다. 그런데 그 사람은 내가 평양에 하루라도 더 있는 것이 국가안전에 큰 위협이라도 되는지 “그렇게 할 수 없다. 내일 당장 평양을 떠나야 한다!”라고 냉랭하게 내뱉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학설을 읽고 나서 “진리는 참 좋은 진리인데 차디찬 진리로구나”라고 말했다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극악무치한 수령독재의 칼에 쓰러졌는가. 나는 사돈의 팔촌도 없는 생소한 함경북도 땅으로 옮겨져 1년 남짓 생활하였다. 이 생활에 나는 감사한다. 여기서 나는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범죄적인 기만 속에서 살아왔는가를 똑똑히 깨닫게 되었고 우리 인민의 하층 생활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눈뿌리가 패도록 새겨보는 기회를 가졌다.


“일제 때만도 못해…”
평양에서 살 때 우리집은 저축은 크게 없어도 생활은 그다지 궁하질 않았다. 남편이 과학자로서 해외생활을 오래 했고 내가 또 여러 해 동안이나 중앙당군수공업비서의 개인글들을 써주었기에 그 집에서 우리 생활을 정상적으로 돌봐주었다. 그래서 식생활에서는 큰 걱정이 없었다.

식생활이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기에 나는 동료들이 출장을 다녀와서 지방인민들의 긴박한 식량사정에 대해 말해도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1988년 초부터 제2자연과학원에서 현대무기 개발을 위한 각종 명칭의 ‘과학자돌격대’가 무너졌을 때 과학자돌격대 지휘부의 정치분과에 동원돼 취재집필활동을 벌이느라 지방출장이 거의 없었다. 우리 과학원지구가 기본은 평양시 용성구역에 있었기에 그 골안에서 맴돌았다. 또 1992년부터 중앙당군수공업비서를 따라다니면서 그의 글을 써주었기에 더더욱 지방에 나가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가 추방지로 쫓겨나서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을 무수히 보고 내 자신도 눈꺼풀을 들어올릴 맥조차 없을 정도로 굶어보고서야 배고픈 설움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식량을 철저한 공급제로 제한하고 있다. 식량공급제는 무료의무교육제·무상치료제와 함께 북의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규정짓는 하나의 기둥이었다. 개인이 쌀을 팔고 사는 것은 법적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수십년 동안 이 식량공급에 적응되어온 사람들에게 공기·물과 같이 생존에 필수적인 식량을 90년대 초부터는 전혀 공급하지 않았으니 범죄라면 이보다 더 무서운 범죄가 어디에 있겠는가.

북에서는 지금 의무적으로 공급하게 되어 있는 식량을 김일성·김정일 생일 때에만 ‘배려쌀’이라고 이름붙여 공급하고 있다. 지방사람들은 그 거룩한 ‘태양절’과 김정일의 생일인 2월16일을 이제는 ‘배급절’이라고 명명했다. 세상에 ‘배급절’이라는 명절이 있는 나라는 북한밖에 없다.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뼈만 남은 몸에 다 해진 누더기를 걸치고 흙먼지 날리는 길거리에 쓰러져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불쌍한 아이들과 인정많기로 동방에 이름났던 그 인민들이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면서도 모른 척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던 모습들이….

어느날 우리 윗집에서 살던 할머니가 먹지 못해서 퉁퉁 부은 얼굴로 소금을 얻으러 우리집에 왔다. 그 할머니는 역시 굶고서 맥없이 누워 있는 나를 보고는 눈물이 글썽해서 “기자선생, 이렇게 살 바엔 살아서 뭘 하겠나.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나는 일제 때에도 살아보고 6·25전쟁도 겪어보았지만 지금처럼 굶어보기는 처음이요. 일본놈 때에는 그놈들만 이밥을 먹고 조선사람들에게는 좁쌀만 주는 것이 괘씸했지만 배를 곯지는 않았어. 일제 때만도 못해….”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공장·기업들이 원료난·동력난으로 거의가 멈춰섰으니 일을 하고 싶어도 일감이 없고 설사 일을 한다고 해도 응당한 보수가 없는 상황에서 누구에게 이 죄를 지워야 하겠는가? 옛날부터 “나라가 가난하면 도둑이 많아지고 도둑이 많아지면 법이 많아지고 법이 많아지면 난이 일어난다”고 했다. 북조선에는 정말 법이 많다.

이 법들 중에서 가장 악법은 통행증 제도다. 평양은 물론 지방의 도와 도 사이도 이 통행증이 있어야 오갈 수 있다. 그런데 태반의 사람들이 식량구입을 위해 유동하니 통행증을 떼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안전부에서 통행증을 발급하는 부서(2부라고 한다)는 이것을 빌미로 통행증을 신청하는 사람들에게서 하다못해 담배 한갑이라도 받아먹고서야 통행증을 내어준다. 얼마나 더러운 것들인지 부모가 사망해서 당장 제사에 가야 할 대상까지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통행증을 제때에 떼주지 않아서 어떤 사람들은 3일장까지도 다 지난 다음에야 초상집에 들어선다고 한다.

이외에도 별의별 법이 다 있다. 이 법들을 실행하자니 사로청과 공장들까지 나서서 인원을 선발하여 ‘질서유지대’요, ‘노동자규찰대’요 하는 것들을 잔뜩 만드는데 그 사람들도 식량공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개적인 도둑으로 쉽게 전환된다. 목숨을 부지하겠다고 식량구입을 위해 정신없이 헤매는 사람들에게 당조직에서는 시간을 보장해주는 대가를 내라고 요구하고 안전부에서는 ‘통행증’을 떼준 턱, 위법을 눈감아주는 턱을 내라고 등껍데기를 벗긴다. 여기에 숱한 ‘유지대’ ‘규찰대’라는 것들까지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뜯어내고 있다.


늘어나는 것은 도둑떼와 검열
북조선에서 제일 큰 골칫거리의 하나는 김정일 장군의 군대, 조선인민군이다. 크건 작건 간에 인민군부대가 지나간 지역에는 개·염소의 종자도 남지 않는다고 한다. 강제로 털어가면서도 당해 지역의 정부에다가는 아무개, 아무개가 지원을 했다고 하고 떠나간다. 하기는 돌멩이도 먹으면 삭인다는 이팔청춘 나이에 죽을 먹고 삶은 강냉이를 세어 먹으면서 훈련과 강도높은 노동을 하자니 오죽하겠는가? 양반도 사흘을 굶겨놓으면 도둑질을 한다는데…. 북은 지금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야말로 생지옥이다.

법이 얼마나 유별난지 좀도둑들은 잡아다가 당장 총살시키면서도 관직을 가지고 공개적으로 강도질하는 자들은 재판을 하지 않는다. 이런 속에서 부익부·빈익빈이 심화하고 있다. 지주·자본가들을 때려부순 기초 위에 사회주의 노동귀족들이 기세좋게 서식하고 있다.

배고픈 것은 그래도 참고 견딜 수가 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은 “인민대중 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를 지킨다”며 이 밝은 세상에서 인민들의 눈과 귀를 집요하게 막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망상이다. 아시아에서 경제강국으로 부상한 한국과 중국의 소식은 북조선으로 끊임없이 새들어오고 있으며 어디서 녹음을 했는지 ‘서울의 찬가’ ‘아파트’ ‘사랑의 미로’ ‘칠갑산’ 같은 한국 노래 테이프들이 청년들의 옷자락 속에 숨겨져서 나돌고 있다. 정치강연 같은 수령찬가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주입받다가 곡도 통속적이고 가사도 생활적인 그런 노래들이 머리에 새겨지니, 마흔이 넘은 나도 흥얼거리곤 하였다.

김정일은 이런 추이를 막아보려고 당일꾼·안전일꾼 등으로 구성된 검열대들을 소위 ‘불량도서’ ‘황색비데오’ ‘수정주의 날라리 노래테프’ 등을 색출하기 위한 마라톤에 내몰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검열에 습관이 든 사람들은 참빗으로 岵어낸다 하더라도 쉽게 걸려들지 않는다.

1997년 초봄에 내가 집에서 김정일의 선물녹음기로 왕재산경음악단에서 만든 외국노래들을 듣고 있는데 불시에 문이 열리면서 웬 낯선 사람이 인민반장을 앞세우고 들어왔다. 무슨 손님인가고 인민반장에게 물으니 녹음기 검열을 나온 사람이라고 했다.

그 사람은 나를 보고 이제 금방 듣던 녹음테이프를 다시 돌려보라고 했다. 나는 어서 들으라고 녹음기를 크게 틀어놓았다. 이전 소련의 예술영화들인 ‘검과 방패’와 ‘17일 동안에 있은 일’에서 나오는 노래 ‘조국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는가’ ‘순간이여 순간이여 순간이여!’ 그리고 노래 ‘베사메무초’, 러시아 민요 ‘올가의 마부’ 등 김정일이 아주 좋아하며 평가한 노래들이 기세좋게 흘러나왔다.

노래를 다 듣고난 그는 그 녹음테이프를 달래서 종이에 싸더니 가방에서 용지 한 장을 꺼내서 “1997년 ×일 김책시 신평동 김아무개는 녹음기로 불량한 외국노래 등을 들었다”라고 쓰고는 나를 보고 수표를 하라는 것이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동무, 이 노래들은 친애하는 김정일 장군님께서 직접 조직한 왕재산경음악단에서 그이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면서 만든 노래란 말이오. 그런데 뭐가 잘못돼서 이러는 겁니까?”하고 항의를 하니 그런 말은 자기네 책임자한테나 가서 하란다.

나는 책임자를 만나기는 싫었지만 좋은 노래들이 들어 있는 그 녹음테이프를 그저 빼앗길 수가 없어서 할수없이 그를 따라나섰다. 책임자를 만나니 더욱 기가 찼다.

“이 외국노래들은 비록 지도자 동지의 지도 밑에 만들어졌지만 어디까지나 외국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일반 주민들이 들으라는 것은 아니다. 동무는 과오를 범하고 지금 혁명화 기간인데 또 이런 일은 빚었으니 문제를 더 엄중하게 보아야겠다.”

더 맞서보아야 ‘죄’만 불어날 것 같아서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서 나오는데 복도에는 라디오가 달린 녹음기나 녹음테이프를 몰수당한 사람들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 이놈의 나라는 통째로 싫구나!” 창천에 대고 온 몸으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텅빈 국경경비대 초소
나는 황장엽 선생의 탈북소식을 1997년 3월6일경 노상에서 들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하도 잡소리가 많이 나도는 나라여서 보위부의 말 그대로 우리의 내부를 동요와해시키려고 남조선의 안기부가 돌린 ‘요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이란다.

나도 가리라!

그러나 내가 북을 탈출하기까지는 많은 심리적인 언덕을 넘어야 했다. 나의 경력이 나를 더욱 주저하게 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3대 혁명소조생활을 거쳐 제2자연과학원에 기자로 배치받았다. 그리고 17년간 군수·국방과학부문에서 활동했다. 그 기간 나의 모든 행동은 군사비밀 보장이라는 명목으로 통제받아왔으며 내가 받은 교양이란 ‘우리식 사회주의를 버리면 적들의 제일차 학살대상이 된다’는 것이었다.

북을 탈출하려는 결심은 섰지만 잘못하다가는 앞뒤 총알에 맞아죽을 수 있었다. 나는 진정 죽고 싶지는 않았다. 가능한 한 살아서 북의 전도를 꼭 보고 싶었다. 외국노래 테이프 사건은 이어 다른 사건들을 줄줄이 물고 우리집 문턱을 넘어섰다. 더는 주저할 수 없었다. 더는 무지하고 기만적인 체제에서 살고 싶지를 않았다. 가다 쓰러지면 넋이라도 이 나라의 지경을 벗어나서 자유로이 날고 싶었다. 아무렴 이 지구촌에 북조선 같은 나라가 또 있으랴.

1997년 8월 초. 남편을 설복하여 딸애와 함께 김정일의 선물인 ‘삼일포’ 녹음기를 둘러메고 집을 나섰다. 노자가 없었기에 그것이나마 팔아서 요긴하게 쓰려고….

우리 가족은 이미 여러 번 다녀본 적이 있는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에서 탈북하기로 계획했다. 그런데 남편은 여러 달 동안 주저하다가 일단 결심이 서니 단호했는데 나는 먼저 결심하고 남편을 돌려세웠지만 남양에 와서까지 주저주저하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 말썽 많은 녹음기 때문에 또 일이 터졌다. 하늘이 도왔는지 나는 그 녹음기를 중국돈 300원을 받고 한 청년에게 팔게 되었다. 녹음기를 넘겨주면서 가지고 온 녹음테이프도 모조리 그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가 녹음기를 다시 한 번 검사하느라고 그 녹음테이프 중 하나를 선택해서 듣고 있는데 거기에서 뜻밖에도 “여기는 연변방송국입니다. 지금부터 중국말 공부를 시작하겠습니다’하는 소리와 함께 ‘?라?라’하는 중국말이 연방 흘러나왔다. 그것이 지나가던 안전원에게 적발되면서 우리는 녹음기를 지닌 채로 끌려갔다. 안전원은 연변방송을 어디서 녹음했는지 연방 따져 물었다. 안전원은 당장 가서 증명서를 가져오라고 호통쳤다.

나는 한달음에 유숙하던 집으로 달려왔다. 우리 가족은 재빨리 남양 뒷산에 올랐다. 이제는 더 주저할 겨를이 없었다. 그곳에서 밤이 되기를 기다린 다음 2~3시간이나 기어내려와서 강안에 붙었다.

여기서 또 한번 혼이 났다. 칠칠야밤에 남편은 앞에 서고 나는 뒤에 서서 위험을 피해 간다는 것이 아뿔싸! 신통하게도 국경경비대 초소 코앞에 떡 떨어졌다. 우리 셋은 너무도 놀라고 당황해서 숨도 쉬지 못했다. ‘이젠 죽었구나’ 하는 절망에 싸여 죽은 듯 엎드려 있는데 도저히 초소에서 기척이 없었다. 잠시 후 마음을 진정하고 살펴보니 초소가 텅 비어 있었다. 정말로 하늘이 도왔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후두둑 떨린다. 두만강 물을 앞에 두고 우리 세 식구는 갈라졌다. 나와 딸애가 중국돈 100원을 소중히 건사하고 먼저 강물에 들어섰다. 남편은 우리가 안전하게 넘어간 다음에 건너오기로 했다.

1920년대 초에 나의 할아버지·할머니는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살길을 찾아서 어린 자식들의 손을 잡아 끌며 눈덮인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단다. 1960년대 초에는 나의 부모님들이 사회주의 조국건설에 이바지하려는 열의를 안고 조상들이 등졌던 그 땅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비애의 두만강으로 3세인 내가 어린 딸애의 손목을 잡고 저주와 분노의 눈물을 흘리며 들어선 것이다. 저 앞에 무슨 운명이 기다릴지…. 그것은 하느님만 아는 일이었다.


중국땅의 참외밭을 보고 감격하다
우리 모녀가 ‘가다가 죽으면 죽는 게지!’ 하는 비장한 결심을 품고 산을 내려와 두만강물에 들어선 것은 1997년 8월15일 새벽 2시경이었다. 두만강 감탕물을 꼴깍꼴깍 먹으며 익사의 경계선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겨우 중국땅에 올랐다. 누가 볼세라 강기슭의 무성한 강냉이밭에 들어간 우리 모녀는 잠깐새에 국경을 넘었다는 것이 꿈만 같아서 ‘이게 중국땅이 옳긴 옳은가?’하고 의심이 다 생겼다.

강냉이 밭을 헤치며 앞서가던 딸애가 “엄마, 여기 참외밭이 있어” 하고 탄성을 질렀다. 서둘러 다가가서 보니 정말 참외밭이었다. 권투장갑만큼이나 큰 노란 참외가 새벽빛을 안고 여기저기서 그윽하게 빛나고 있었다.

“중국땅이 옳구나!”

북에서는 약에 쓰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그 탐스러운 참외들이 이국의 정서를 풍기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을 피하려고 서둘러 산에 올랐다. 남양이 보이는 산중턱에 앉아 등지고 온 산천을 바라보았다. 그 산천을 배경으로 멀리 평양에 계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렸고 소중한 동생들에게 “이 맏이를 이해하고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 먼곳의 시부모님 묘소를 향해 마음속으로 절을 올리고 또 올렸다.

숨막히는 조롱을 헤치고 넓고 밝은 광대한 세상에 나오니 보고듣는 것마다가 다 희한했다. 세상이 이다지도 변모했는가…. 어렸을 때 때가 낀 청색 솜바지저고리를 입고 볕에 앉아서 이잡이나 하는 것으로 상상했던 중국, 그래서 대학 시절에는 “로신을 내놓고는 통째로 싫다”고 열변을 토했던 중국이라는 나라가 평양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중국조선족 자치주의 연길시는 북조선의 수도 평양을 훨씬 능가하였다. 연길이 약동하는 도시라면, 평양은 숨죽은 괴괴한 도시였다.

가슴이 아팠다. 북조선 사람들이 불쌍했다. 예로부터 총명하고 근면할 뿐 아니라 배우고 발전하려는 의욕이 남달리 강했던 그 인민이 때를 잘못 만나 중국의 개 돼지만도 못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가 갈려서 잠도 오지 않았다.

김정일은 자신을 전지전능한 ‘하나님’으로 신격화하며 영원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북의 인민들을 탱크나 포로 휘두르고 있다. 그리고 세계의 지탄과 압력을 막기 위한 인질로 희생시키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히틀러가 자기의 목숨을 1초라도 더 유지하기 위해서 베를린 지하철에 피신한 독일 인민들을 수장해버린 것처럼, 북한 인민들을 굶어주게 하고 있다.

한치만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면 능히 타개할 수 있는 북의 난국을 김정일 일당은 세습권좌의 영위를 위해 철면피하게 외면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김정일이 북의 지도자로 나선 후 그가 쌓은 업적을 부득이 논한다면 당을 귀족화·관료화한 것, 나라의 제반 경제 모두를 파산시킨 것, 그리고 인민군대를 토비화한 것이다. 그가 김일성 사후에 후계자로서 한 일이란 평양에 김일성 영생관을 지었다가 허물고 또 지은 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

이국땅에서 내가 제일 놀란 것은 해외동포들이 김정일을 민족의 태양으로, 통일조선의 영수로 한결같이 칭송하고 있다고 선전을 들어왔는데, 그들이 감히 위대한 김정일을 말을 더듬는 팔불출로밖에 취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우상을 위해서 청춘의 정열과 재능을 다 바쳐서 칭송하는 글을 썼고 그가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사는 무골충의 길을 걸어오다니….

김정일 세습집단은 무법부덕의 망나니 집단이다. 세상이 우습게 보는 것도 모르고 입만 벌리면 남의 동족을 향해서 줄욕을 퍼붓고 피해망상증에 걸린 사람들처럼 ‘불바다로 만들겠다’ ‘폭파해버리겠다’고 폭언을 하는 이 무리를 어떻게 달리 부를 수가 없다.

최근에는 쇠퇴몰락하는 처지에 누구를 위협해보겠다고 인공위성까지 시험발사했다고 한다. 북의 과학자 집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감탄스럽기도 하고 또 불쌍하기도 하다. 그 돈이면 그 재능있고 충직한 과학자들의 생활을 개선시켜주고 어찌하면 나라의 경제를 조금이나마 일으켜 세우는 데 도움이 되련만, 개발했다 해도 전도가 없는 그런 무모한 행위를 왜 한단 말인가. 모두가 김정일의 소위 ‘대외적 위신’을 과시하려는 데 이용된 도구에 불과하다. 북에서의 인공지구위성 개발은 10년 후에나 그 실제적 위력이 가능할는지….


어느 귀인(貴人)과의 만남
산길을 타고 도문시로 접어들었다. 아무리 아닌 척해도 초라한 우리의 행색은 쉽게 노출됐다. 조선족 하나가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보더니 “탈북자인 것을 알고 있다”고 하며 우리를 자기집으로 데려갔다. 이 귀인의 집에서 며칠을 자고 먹으며 기력을 회복한 우리는 9월1일 연길시내로 나갔다. 흩어져야 안전하다는 생각에 남편은 바로 대련으로 향했다. 딸과 나는 연길에서 활로를 모색키로 하고, 한 식당에 취업했다. 다음해 1월까지 식당 주방에서 그릇 닦는 일을 하던 중 식당이 부도가 나 망하는 바람에 사우나로 옮겨 청소 등 허드렛일을 했다.

98년 6월. 대규모 탈북자 검거선풍이 불었다. 북한 최고인민대의원대회 선거를 앞둔 시점이었다. 회령 등 일부 국경 지방은 투표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탈북자가 많이 발생해 북한과 중국이 모종의 협상을 하고 벌인 탈북자 색출작업이었다.

중국 공안은 탈북자가 취업하고 있을 만한 업소를 아침 저녁으로 휩쓸고 다녔다. 사우나에서 안마사로 일하던 두 명이 붙들려갔다. 인근 노래방에서 근무하고 있던 딸애가 잘있는지 걱정돼 둘러보러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우나의 사장은 나더러 “피하라”고 조언했다. 사장은 불법취업을 묵인한 대가로 2만원의 벌금을 냈다고 했다. 그가 벌금을 내러 연길시 공안국을 찾아가 보니 이미 30여 명의 탈북자가 붙들려와 있었다고 했다. 서너 살배기 어린애들도 있었다고 전했다. 시내에서 마주치는 것이 탈북자였다. 탈북에 성공했더라도 그중 20~30%는 붙들려 다시 소환됐다. 그런데도 또 탈북을 감행해 많게는 4번까지 탈북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북을 뛰쳐나온 유랑 청소년들을 수없이 만났다. 그중에서도 최근에 만난, 평안남도 순천에서 왔다는 한 소년은 나의 가슴에 아물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 부모를 다 잃고 그 먼 땅에서부터 걸어서 두만강을 넘어왔다가 다시 붙잡혀가서 죽을 만큼 매를 맞았다는 그 소년, 길가의 것을 주워 먹어도 굶어죽을 걱정은 없는 중국땅이 그리워서 또 건너왔다는 그 소년.

“어머니, 돈좀 주세요, 10전도 좋고 5전도 일없어요, 살려주세요.”

매맞은 어혈이 그대로 남아 있는 얼굴로 조그마한 손을 내밀고 구걸을 할 때 나는 사지가 부들부들 떨리고 목이 꽉 막혀서 말을 못 했다. 이 애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애들이야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사랑해주면 그것이 위대한 품이고 조국이라 하지 않겠는가…. 절통했다. 이 애들을 다 걷어안고 싶지만 나 역시 부평초 신세….

내 주머니에는 용돈이 20전…. 나는 그것이나마 그의 손에 쥐어주며 “너나 나나 같은 신세! 우리 죽지 말고 꼭 살아남아서 좋은 세상을 보자”고 그애보다도 내 마음에 더 힘을 주며 말했다.

나는 그토록 적대시하던 한국에서 온 사람도 여러 명 만났다. 확실히 피는 물보다 진했다. 사상과 제도는 적대적이었지만 우리의 만남에는 장벽이 없었다.

우리 모녀는 이국땅에서 많은 체험을 하였다. 식당 주방에서 그릇도 닦고 사우나에서 남의 때도 밀어보았으며 강냉이밭에서 땀을 철철 흘리며 김매기도 하였다. 노동의 진가, 땀의 값을 늦게나마 깨달았다.

위험을 피해 동분서주하며 닥치는 대로 일하는 속에서 1년이라는 세월이 살같이 흘렀다. 그러나 이 마음 한구석에는 맷돌보다도 더 무거운 짐이 언제나 나를 괴롭혔다. 언제면 위험이 없는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이 방랑의 길이 어디에서 막을 내릴까? 언제든지 끝은 있겠지….

나는 당초 한국으로 올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서로 헐뜯는 남과 북이 모두 싫었기 때문에 여생을 그런 아수라장에서 보내기가 싫었다. 그러나 탈북해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나라가 없다는 것, 공민권이 없다는 것은 내 존재 자체가 없다는 것임을 그제서야 알게 되었다.

98년 9월. 고심 끝에 나는 한국을 오고가는 한 사업가를 통해 틈틈이 써둔 수기를 한국으로 보냈다. 그 수기가 언론사에 전해져 나의 신세와 탈북자 일반의 처지가 전해지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12월. 나는 한국으로 갈 수 있는 서광이 비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평생군관 아버지의 좌절...김길선씨 思父曲
http://nk.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3734

승인 2000.11.05


딸자식은 어머니 편이라지만 저는 다릅니다. 어머니는 질색하시는, 술주정까지 포함한 아버지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존경해 왔습니다. 아버지는 술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취기가 오르면 노래도 즐겨 부르고 말씀도 곧잘 하시던 분이 50줄에 들면서 말수도 적어지고 우시곤 하는 것을 보면서 측은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

추방돼 굶주린 저에게 "평생 모은 훈장 다 갖다줘도 쌀 1kg과 못바꾸는구나" 탄식하며 우셨죠

32년 함북 나진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조부모님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6.25때 18세 청년이었던 아버지는 중국인민지원군 탐지기부대에 자원 입대했습니다. 무슨 부대인지 국방군이나 미군은 콧등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 아버지는 하얼삔 공업대학에 입학해 분석화학을 전공했고, 동창생인 어머니와 결혼했습니다. 왜소하고 가무잡잡한 어머니의 약을 올리느라 아버지는 취기가 오르면 “너희 엄마가 머리가 빨리 돌고 엉치가 가벼워서 데리고 살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64년 제가 9살 되던 해 아버지는 북한으로 들어와 조선인민군 군관(장교)이 되었습니다. 군내 정치보위부에서 조선인민군 대좌(대령)까지 올랐다가 89년에 제대했습니다. 저는 군관복을 입은 아버지의 모습에서 남다른 긍지를 느끼며 자존심을 키워 왔습니다. 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은 특별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병이 나면 아버지 등에 업혀 병원 출입을 한 유일한 자식이었습니다. 학생시절 학교에서 열리는 학부형회의에는 아버지가 직접 나오곤 했습니다. 집안일을 도맡아 하느라고 늘상 바쁜 북한의 어머니들을 아버지들은 학부형 회의에도 떠밀어 보냅니다. 아주머니들 아니면 꼬부랑 할머니들만 주른히 앉아 있는 학부형 회의를 가부장적 위신을 중히 여기는 북한의 아버지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지요.

아버지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이 부탁하신 일들을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고 수단껏 풀어주셨습니다. 5형제 중 저에 대한 특별한 애정에 어머니가 항의를 할라치면 “맏이가 잘 되면 그 밑의 것들은 저절로 잘 돼”라는 한 마디로 일축해 버리곤 했습니다.

이제 시집 장가간 동생들은 아버지와 마주치는 술상에서 어려워져만 가는 생활형편을 두고 “아버지가 힘이 있을 때 다른 집처럼 재산도 좀 모으고 우리를 먹을 알 있는 직업에 밀어 넣어 주셨더라면…”하고 은근히 원망하려 듭니다. 그러면 정의와 양심이 살아있는 아버지는 “그런 놈들은 다 나쁜 놈들이다”고 자신의 처사를 정당화하곤 했습니다.

아버지의 진정한 아픔을 제가 알게 된 것은 탈북하기 일년 전 추방지에서 평양으로 가만치 새어들어가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만났을 때였습니다. 아버지는 햇볕에 타고 굶주려 사람꼴이 아닌 저와 딸아이를 보고는 술을 드시고 마냥 울었습니다.

아버지는 깊은 밤 저를 불러 앉히고 당신께서 30여년의 헌신적 군관복무 기간에 김일성 김정일로부터 받은 한 바가지나 되는 훈장과 메달을 앞에 자르르 쏟아 부으며 탄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평생 받은 댓가다. 그런데 이 훈장을 다 털어 주겠대도 쌀 한 키로 내놓을 사람이 없구나…”

인생의 4/4분기에 와서 감수한 그 허무한 마음이, 그렇게도 정성을 쏟아 부은 맏딸의 추방과 탈북으로 더 무거워졌을 아버지…. 지금은 어디에 계실까.

달빛이 스며드는 창가에 서서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은 아버지를 그려보노라면 어디선가 아버지의 아픔이 제 손에 와닿곤 합니다. 그것은 나무람도 원망도 아닌 저를 향한 기원과 구원의 호소입니다.

아버지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생사조차 모르고 있어도 언제나 사랑하던 이 딸을 굽어보시며 걸어간 가시밭길을 헛되이 하지 말고, 민족을 위해 뜻있는 일을 하라고 축복을 뿌려주고 있을 것입니다.

복잡하고 긴장된 하루일과를 마치고 침상에 들 때마다 저는 아버지를 만나 뵙길 기대하곤 합니다. 그리고는 귀를 기울여 어린 시절 듣던 아버지의 구수하고 취기어린 노래 소리를 듣습니다.

“눈이 내린다 흰 눈이 내린다...”
김길선(45)씨는 1955년 중국 선양(심양)에서 출생, 1979년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를 졸업한 후 1995년 말까지 제2자연과학 출판사 정치선동부 기자로 일했다. 이 출판사는 북한 경제의 60%를 차지하는 군수산업 분야를 다루는 비공개 출판물을 제작하는 곳이다. 김씨는 1997년 8월 가족(남편, 딸)과 함께 탈북, 1999년 1월 남한에 정착했다.







------------




탈북자수기


상세아버지생각 - 김길선
동지회 22 7084 2004-11-18 00:02:31
무릇 딸자식은 어머니편이라고들 하지만 저는 예외입니다.
저는 이날 이때까지 우리 어머니가 생 질색하시는 《술주정》까지도 포함한 아버지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그분을 이해하고 위로해줄 사람은 세상에 나밖에 없다고 찍어 자부하면서 아버지를 받들어 왔습니다. 어머니는 무슨 일에서나 가타부타 없이 아버지를 지지 대변해 나서는 저에게 "노동당에서 되라는 는 걸써 되고 투철한 가 되었다."고 자랑반, 심술반의 욕설을 곧잘 하였습니다. 은 저의 아버지의 이름입니다.
반면에 아버지는 늘 저를 보고 하고 아쉬움과 대견함이 뒤섞인 칭찬을 하셨으며 제가 어른이 되가는데 따라 크게 의지하시었습니다.
우리 5형제중 중학교 졸업 당시까지도 병이 나면 아버지의 등에 업혀서 병원 출입을 한 자식은 막내도 아닌 맏이인 저입니다.
아버지는 외형부터도 키가 크고 헐끔하게 잘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형제들은 튀어나게 체소하신 어머니를 닮아서 하나같이 키가 작고 가무잡잡합니다.
이런 연고로해서 어머니가 제일 싫어하신 것은 한창시절의 아버지가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오롱이조롱이 우리 형제를 쪼르르 세워놓고 낙심천만한 표정으로 "종자는 참 좋은 종자인데 연단씨가 망쳐놨다"고 건주정을 부리시는 것이었습니다.(《연단》 : 어머니 아명)
우리 아버지는 술을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오랜 음주생활을 지켜보면서 날로 측은하게 여긴 것은 아버지가 50대 이전에는 취기가 오르면 노래도 즐겨 부르고 말씀도 곧잘 하셨는데 그 후부터는 점차 자주 우시고 말씀이 적어지신 것입니다. 존경하는 아버지의 해가 다르게 쇠잔해 가시는 모습을 대하면서 저는 인생이란 과연 《일장춘몽 이구나》하는 아쉬움과 허무감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1932년에 함경북도 나진에서 쌍둥이 형제로 태어나셨습니다. 일제시대에 조부모님을 따라서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신 아버지는 9살 때 벌써 소를 몰고 밭갈이를 하며 조선이 지척인 개산툰에서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하시었습니다.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터졌을 당시 아버지의 나이는 18세였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중국공산당의 《항미원조 보가위국》호소에 따라 중국인민지원군 탐지기부대에 자원 입대하여 전쟁에 참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탐지기부대가 무슨 부대인지, 아버지는 전쟁 전기간 국방군이나 미군의 콧등도 보지 못했답니다.
전후 부대와 함께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 아버지는 제대배낭을 메고 할빈시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자습을 한 실력으로 할빈 공업대학에 입학하여 "분석화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서로 대학동창생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1955년 1월에 결혼하셨습니다.
언젠가 아버지는 역시 술을 마시고 취기가 잔뜩 오른 상태에서 어머니와의 결혼 담을 묻는 저에게 "네 엄마가 머리가 빨리 돌고 엉치가 가벼워서 데리고 살게 되었다."고 말해주셨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대학졸업 후 에서 일하다가 1964년초에 북조선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평양에는 김일성과 함께 만주에서 투쟁을 하였던 아버지의 누님 내외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연줄로 아버지도 즉시 조선인민군 군관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군내 정치보위부에서 조선인민군 대좌로까지 승진하시었다가 1989년에 제대되었습니다.
《미제의 가슴팎에 복수의 총창을 박는 심정으로!》,《한손엔 총을, 다른 한손엔 낫과 마치를!》이라는 호전적인 주민의식 속에서 자란 저는 군관복을 입으신 아버지의 모습에서 남다른 긍지를 느끼며 자존심을 키워 왔습니다.
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은 제 또래 아이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특별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저의 학생시절에 학교에서 조직하는 학부형 회의에 거의 빠짐없이 참가하신 사실 하나만으로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만해도 학부형 회의에 아버지들이 참가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들은 집에서 낮잠을 자면서도 집안 일을 도맡아 하느라고 늘 바쁜 어머니들을 우격다짐으로 학부형 회의에 떠밀어 보냈습니다.
그럴만도 한 것이 자식들의 성화에 못 견디어 어쩌다가 학부형 회의에 가보면 거의가 아주머니들 아니면 꼬부랑 할머니들만 주른히 앉아 있으니 가부장적 위신을 중히 여기는 북한의 아버지들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지요.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학부형 회의에 즐겨 참가하셨습니다. 그리고 학교 선생님들이 부탁하신 일들을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고 수단껏 풀어주시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열성을 보고 선생님들은 9살에 귀국해서 늦게야 한어를 배운탓에 학업 성적이 겨우 보통수준이었던 저에게 계속 《최우등》을 주어서 진급시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정성과 관심은 우리 5형제중 저에게만 행해지는 일변적인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이에 대해 항의를 하러들면 아버지는 "맏자식만 잘되면 그 밑의 것들은 저절로 일이 잘돼!"하고 그분만의 논리로 일축해 버리곤 하셨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자식들이 다 자라서 당시 일정한 직위에 있은 아버지에게 직업문제를 의논하러들면 단마디로 "네 능력으로 해결해라!"아니면, "국가에서 보내주는데로 가라!"고 결론을 주시었습니다. 오늘날 시집, 장가를 간 동생들은 어쩌다가 아버지와 마주하는 술상에서 날로 어려워지는 생활형편을 두고 "아버지가 힘이 있을 때 다른 아버지들처럼 재산도 좀 모으고 우리를 먹을 알 있는 직업에 밀어 넣어 주셨더라면...》하고 은근히 아버지를 원망하려 들곤 합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아직까지도 정의와 양심은 살아서 "그런 놈들은 다 나쁜 놈들이다!"고 자신의 처사를 정당화하곤 하십니다.
제가 아버지의 진정한 아픔을 알게 된 것은 탈북하기 일년전 추방지에서 평양으로 가만히 새여 들어가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만났을 때였습니다. 그날 아버지는 햇볕에 타고 굶주려서 사람 꼴이 아닌 모습으로 딸자식과 함께 나타난 저를 보고 너무나 기가차서 술을 마시고는 그냥 우시었습니다.
아버지는 깊은 밤 저를 불러 앉히고 당신께서 30여년의 헌신적 군관복무 기간에 김일성, 김정일로부터 받은 한바가지나 되는 훈장과 메달을 앞에 쫘르르 쏟아 놓으며 탄식에 젖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내가 받은 대가이다. 그런데 이 훈장을 다 털어 주겠대도 쌀 한키로 내놓을 사람이 없구나..."
우리 아버지의 뼈 저리는 아픔은 그 말씀속에 있었습니다.
인생의 4/4분기에 와서 감수한 그 허무한 마음에 그렇게도 정성을 쏟아 부은 이 딸의 추방과 탈북으로 아픔과 고통이 더 무거워 지셨을 우리 아버지.
지금은 어디에 계실까...
달빛이 스며드는 창가에 서서 보고싶고 또 보고싶은 아버지를 그려보느라면 멀리 어디선가 아버지의 분명한 아픔이 저의 가슴에 와 닿곤 합니다. 그것은 나무람도 원망도 아닌 저를 향한 기원과 구원의 호소입니다. 지금도 서울시내를 거닐다가 저의 아버지 나이의 늙은이 아닌 늙은분들을 대할때면 저는 어두운 마음으로 반성하곤 합니다.

제가 아버지의 소원을 플어드린 것이 있다면 환갑상을 차려드린 것도 아니요, 1989년 7월에 제수단껏 우리 아버지를 제2자연과학원 대표단에 망라시켜서 중국과 마카오를 여행시킨 것입니다.
돈만 있으면 갈 수 있는 것이 외국 여행인데 그게 뭐가 대단한 일인가고 의아해 할 수도 있는데 북조선이라는 나라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돈에 팔촌까지도 조사하는 신원확인, 업무확인, 여행목적 확인으로부터 시작해서 홍문까지도 보여주어야 하는 신체검사, 적성연령여부 등 그야말로 열두 대문을 거쳐야 들어가는 옛말속의 보물궁전처럼 거의 한달동안 심사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김정일의 까지 받아야 여권을 쥐게 됩니다. 서민들은 돈이 한 마대가 있어도 꿈을 못 꾸는것이 외국 여행입니다. 게다가 그때 저의 아버지는 이미 군에서 연령 제대되어 집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만족스럽게 치른 김정일이 무슨 꿈을 꾸었는지 연이어 모든 부, 위원회, 단위들에서 외국의 연줄들을 찾아내어 교류를 활발히 벌이고 외화벌이도 할 데 대한 혁신적인 지시를 내렸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사돈간이 되는 중국 북경의 《동방경제기술개발공사》총 이사의 연줄로 아버지를 제2자연과학원 원장에게 소개시켜 드렸습니다. 외국의 힘있는 줄들을 잡지 못해 적극 수소문하던 원장은 우리 아버지를 불시에 제2자연과학원 대표단에 망라시켜 북경을 거쳐 마카오까지 보름간이나 함께 동행했습니다.
1964년에 북조선으로 들어간 후로 25년만에 처음으로 나라밖을 벗어 나온 아버지는 비행기를 타고 중국의 수도 북경과 유명한 마카오를 여행한 것을 두고두고 자랑하시었습니다. 그 일은 철통같이 폐쇄된 북조선에서 제가 우리 아버지께 드릴 수 있는 제일 큰 기쁨이고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께 준 제일 큰 슬픔은 무엇일까.
제가 탈북으로부터 한국으로 이어진 1년 5개월이라는 방황의 길에서 속이 타서 술을 마실때마다 자주 떠올리고 가슴을 허빈 것은 저의 가족이 추방령을 받고 친정집에서 평양의 마지막 밤을 보내던 날, 하늘같이 받들던 아버지에게 난생 처음 통곡을 하며 밸 풀이를 한 일입니다.
그날 저는 어머니가 정신을 차리고 밥을 좀 먹으라고 따라준 술 한 고뿌를 맹물처럼 들이키고는 저의 일을 두고 "이제 보위부가 몇 년동안은 감시를 하니 발언을 특별히 주의하고 사람을 잘 사귀라"는 등을 안타깝게 훈시하는 아버지를 향해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기에 아버지까지도 그러는가"고 악을 쓰며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때 억장을 뿜어내듯 깊은 한숨을 쉬며 슬퍼하시던 아버지의 초라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버지가 지으라고 해서 진 죄도 아닌데, 아버지의 잘못은 정녕 하나도 없었는데 저는 북한사회에 대한 분노와 저주를 가뜩이나 마음 아파하시는 아버지께 퍼부었던 것입니다.
이 시각도 저는 울먹이며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아버지의 이야기를 쓰게 된 진의도는 전혀 다른데 있습니다. 세상에는 인간의 지혜와 과학의 힘으로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일들이 많은 줄로 압니다. 그런데 그런 희한한 사건이 제에게서도 벌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저의 아버지가 우리 가족이 1997년 8월 탈북하기 며칠전과 1999년 1월 한국으로 떠나오기 전날 밤에 저의 꿈에 나타나셔서 제가 갈 길과 맞닿을 일들을 하나하나 똑똑히 예언해주신 일입니다.
아버지의 꿈속 예언은 하나도 빗나가지 않고 현실과 맞아 떨어졌습니다. 저에 대한 아버지의 정성과 관심은 이처럼 시간과 공간까지도 초월한 위대한 것입니다. 오늘날에 와서 아버지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지어는 서로 생사여부조차 모르고 있어도 푸른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언제나 사랑하던 이 딸을 굽어보시며 걸어간 가시 길을 헛되이 하지 말고, 통일을 위해, 민족을 위해 뜻 있는 일을 하라고 축복을 뿌려주고 계십니다.
복잡하고 긴장한 하루일과를 마치고 깊은 밤 침상에 들때마다 저는 항상 꿈속에서 아버지를 만나 뵈올 것을 기대하곤 합니다. 그리고는 귀를 기울여 어린 시절에 듣던 아버지의 구수하면서도 취기 어린 노래 소리를 가려내며 눈을 감습니다. 그러면 어데선가 석쉠한 아버지의 노래 가락이 자장가처럼 들려옵니다.
눈이 내린다.
흰 눈이 내린다.

1999년 김길선
좋아하는 회원 : 22명
king왕 이민복
좋아요
신고 0명 게시물신고

---
탈북자 동지회

http://nkd.or.kr/news/story/view/400


김봉윤 ip1 2017-08-27 01:23:36

저는 평안북도 영변군(現 향산군)을
원적지로 하는 1955년생 실향민2세
입니다. 北에 어머님이 다른 누님 2분,
그곳 막내 해방동이 형님이 계십니다.
여기 5남 1녀 동생들 존재를
그분들은 모르실겁니다.
아버님께선 어릴적 고향친구
(평안도 출신 피난민)분들끼리
늘 술자리 만들어 개장국, 되비지등등
안주에 고향, 음식얘기, 월남계기등등
사연과 하소연 끝에 金일성과 공산체제
성토와 남한의 타향살이를 애닯아 하며
끝을 맺고 슬어져 잠드시곤 하셧죠
평안도사람 특유의 뼈마디 굵은
호방한 대륙적 기질등등,,,
당대 통일과 회향의 꿈은
월남패망후 역력히 낙심하고
공산화에 긴장해 하시던 모습들들,,,
'우리대는 고향' '못가가서' '야들때나
통일돼갖지' '통일되면 뭐하간 알아야
찾아 가지'하시며 한분 두분 쇠락해
가시던 그 모습들,,,
내나이 現60初老 통일이 잡힐듯 하던
공산권 붕괴時 혈기왕성한 30중반이었는데,
,,
北에서는 한류가 어쩌네 저쩌네 하면서
그게, 문화전의 승리라고 자아도취 夢中望,,,
우리는 올림픽 전후로 민주화라 자부하던게
종북분자에게 노획당해 사상내전의 시작이고
더욱더 음험, 교활, 악랄히 기승을 부리고
그 선전선동전 해방구 문화계 총동원령의
돌격대인 영화가 위선과 가증스레 판친다.
아주, 주기적으로 치밀하게 깊이 침투중이다.
민주화는 진보탈 쓴자에게 도적질, 촛불은
똥통좌파에게 강탈당한지도 모르고 사명과
책임안지는 보수는 광장에서 능멸이나
당하고 무지한 헛똑똑이 앞에 고상한
속물들은 관음증에 도취되어 깰 줄 모르고
그나마 바른 아가리들도 똥통 從金들이
들이미는 친일, 민주화, 촛불에 역주행
공격이 두려워 주눅들어 時勢와 타협해
사이비로 타락해 가고,,,
지금, 보수가 각성하고 전열을 정비하고
결전에 나서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동북아에서 흙먼지 처럼 사라진다.
인류역사상 급성장해오던 세계 10위권
국가가 급속히 소멸해 버린 인류역사
초유의 어리셔근멸망사를 달랑 한장
남기고 알바없이 사라질 것이다!!!
이건 십수년래 도래할 우리들 예언서다.좋아요 한 회원 0 좋아요 답변 삭제
김봉윤 ip1 2017-08-27 01:27:29
에그머니~~~ 최근에 종편에서 뵙든
분이라 쓰다보니 1999년 글에 사족을
달았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