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홍세화 - 위키백과, 나무위키

홍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홍세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홍세화
洪世和
2012년 통합 당원 대회에서의 홍세화
출생1947년 12월 10일
미 군정 조선 서울특별자유시 종로구 이화동 (現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
사망2024년 4월 18일 (향년 76세)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 녹색병원
성별남성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학력서울대학교 외교학과 학사
직업작가, 사회운동가, 언론인, 정당인
정당노동당
당내 직책대표최고전임위원 겸 당무위원

홍세화(洪世和, 1947년 12월 10일 ~ 2024년 4월 18일)는 대한민국의 작가, 사회운동가, 언론인이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1979년에 벌어진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로 망명했으며, 프랑스 망명 생활 중에 쓴 책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로 유명하다. 2002년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언론인, 작가, 교육인 등으로 활동하였다. 한겨레신문 기획위원, 아웃사이더 편집위원 등을 지냈으며 2013년 계간지 <말과활>을 창간했다. 2011년에는 진보신당(노동당의 전신) 당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1947년 12월 10일 서울특별자유시(現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1] 한때 충청남도 아산군 염치면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고 이후 창경국민학교경기중학교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여 196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하였다.

대학 재학과 졸업[편집]

그러나 1967년 10월 자퇴하였다. 그 뒤, 재수하여 196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에 입학하였고, 이후 문리대에서 연극반 활동을 하였다. 1972년에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제적되었다가 복학하였으며, 1977년에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2]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977년부터 '민주투위' 조직과, '남민전' 조직에 가담하였고, 이후 무역 회사에 입사, 1979년 3월 무역회사 해외지사 근무차 유럽으로 건너갔다.

망명과 저술 활동[편집]

그 해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프랑스 체류 중 망명하였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 따르면 프랑스 정부로부터 사상의 자유 침해에 따른 망명자로 인정받았고, 1982년 이후 관광안내, 택시운전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는 망명 생활을 하며 집필, 기고활동에 종사하였다. 1995년 자서적 고백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발간하고, 1997년 《르 몽드》에 실린 기사 묶음인 〈진보는 죽은 사상인가〉를 번역하여 출간했으며, 1999년 문화비평 에세이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펴냈다.

귀국과 언론, 저술 활동[편집]

2000년 단행본 《아웃사이더를 위하여》, 격월간 《아웃사이더》지의 발간에 참여하였다.

2002년에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아웃사이더》 편집위원으로 선임되었고, 2002년 1월 한겨레신문의 기획위원에 선임되었으며 이후 언론, 강연 등의 활동을 했다.

2010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대한민국판 편집장이 되었고, 2010년 민주노총과 한신대학교에서 기획한 노동자 대학에서 강의를 맡기도 했다. 진보신당의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2011년 11월엔 <진보신당>의 당 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진보신당 비례대표 후보 2번(1번 김순자, 2번 홍세화, 3번 이명희, 4번 정진우, 5번 장혜옥, 6번 티코노프 블라디미르(박노자), 7번 박은지)으로 출마하기도 하였으나 득표율 1.13%를 기록하면서 낙선했다.

2013년 계간지 <말과활>을 창간했다. 이후 2015년 벌금형을 선고받고 돈을 내지 못해 옥살이해야 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비영리 사회단체 일명 '장발장 은행'의 은행장으로 재직했다.

2023년 2월부터 전립선암으로 투병해 오다가 2024년 4월 18일 사망했다. 한겨레신문 재직 이력으로, 장례는 한겨레 사우장으로 진행된다.[3]

저서 및 역서[편집]

저서[편집]

공저[편집]

  • 《거꾸로 생각해봐! 세상이 많이 달라보일걸》
  •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 작은책 스타가 바라본 세상)》
  • 《21세기 첫 십년의 한국: 우리시대 희망을 찾는 7인의 발언록)》
  • 《진보가 보수에게: 민주노동당의 희망과 약속》

역서[편집]

  •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 (조제 보베, 프랑수아 뒤푸르 지음)
  • 《인종차별, 야만의 색깔들》 (타하르 벤 젤룬 지음)
  • 《보거를 찾아 떠난 7일간의 특별한 여행》 (질베르 시누에 지음)
  • 《진보는 죽은 사상인가》 (막스 갈로 지음)
  • 《민주주의의 무기, 똘레랑스》 (필리프 사시에 지음)

학위[편집]

수상 경력[편집]

  • 2002년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민주시민언론상

가족 관계[편집]

  • 아버지: 홍승관
  • 부인: 박만선
    • 슬하: 홍수현, 홍용빈

같이 보기[편집]

서적[편집]

  • 인물과사상사, 《인물과 사상 2002년 6월호》 (인물과사상사 편집부 지음, 인물과사상사, 2002)

각주[편집]

  1.  1948년 이후 서울특별시로 명칭이 바뀐다.
  2.  동숭동에서 관악캠퍼스로 이전하면서 사회과학대학 소속으로 변경
  3.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별세…향년 77세 - 뉴스1

외부 링크[편집]

전임
(권한대행)김은주
김혜경
제4대 진보신당 대표
2011년 11월 26일 ~ 2012년 4월 12일
후임
(노동당 공동대표)홍세화·안효상
전임
(진보신당 공동대표)홍세화·안효상
제4대 노동당 대표
2012년 4월 13일 ~ 2012년 10월 28일
후임
(권한대행)김종철




====

홍세화

최근 수정 시각: 
역임한 직위
[ 펼치기 · 접기 ]

진보신당 흰색 로고







노동당(대한민국) 흰색 로고






















홍세화
洪世和 | Hong Se-hwa
HSHJB
출생
본관
남양 홍씨 (南陽 洪氏)
사망
2024년 4월 18일 (향년 76세)
학력
가족
배우자 박일선[1]
장남 홍용빈
장녀 홍수현
최종 당적
노동당(대한민국) 흰색 로고타...
 
녹색당(대한민국) 흰색 로고타...
[2]
경력
장발장 은행 은행장
노동당 후원회장(이백윤 후원회장)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편집국장
대통령 예비후보자 이백윤 후원회장
외부 링크
X Corp 아이콘(블랙)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운동권 활동2.3. 망명2.4. 귀국 이후 한국에서의 활동2.5. 사망
3. 논란
3.1. 대통령 기자회견 횟수 오류 논란
4. 선거 이력5. 소속 정당6. 여담


1. 개요[편집]

나는 살아서 즐거운 '아웃사이더'이고 싶다. 시어질 때까지 수염 풀풀 날리는 척탄병이고 싶다. #[3]
한국의 정치인언론인. 김규항, 박노자, 오세철 등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정당인으로서 줄곧 진보정당 소속으로 활동해왔지만 현 세대 거의 모든 진보정당의 효시인 민주노동당이 2000년 창당할 때는 참여하지 않았다. 사회주의를 강령으로 내걸고 활동하는 정당을 원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1947년 12월 10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에서 태어났다. 6.25 전쟁의 여파로 부모님은 이혼하고 외조부모 밑에서 성장했다.

서울창경초등학교, 경기중학교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금속공학과에 입학했지만 1967년 10월 자퇴했다.

대학 1학년 시절이던 1966년 9월 추석 때 겪은 일을 ‘사유체계의 바탕을 무너뜨린 인생의 분기점’이었다고 술회했다.[4][5] 친척에게 6.25 전쟁 중인 1950년 9월 아산 황골에서 국군에 의해 일어난 학살 당시 3살이었던 본인이 어머니, 동생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남양 홍씨 문중 사람들이 가족 단위로 몰살당했으나 홍세화 가족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6] 홍세화의 아버지는 아나키스트 활동을 하다가 도피한 상황이라 사건 당시엔 없었고 이 사건의 여파로 부모님이 이혼한 데다 얼마 후 동생 홍민화가 홍역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7]

이후 방황과 낙제를 거듭하다가 대학을 중퇴했고 196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외교학과에 입학했다.

2.2. 운동권 활동[편집]

이때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고 문리과대학 연극반 활동을 하며 학생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1970년 이후 본격적으로 운동권에 투신해 교련반대 투쟁에 앞장섰고 1972년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제적되었다. 1974년에는 군 복무 중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국군보안사령부에서 고문을 당했다.

1970년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과 1975년 인민혁명당 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집행을 접하며 그의 저항정신은 더욱 급진적으로 변했다. 1977년 대학 졸업 후 한국민주투쟁위원회 맹원을 거쳐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의 전사가 되었다. 한편 생업전선에도 뛰어들어 무역회사 '대봉산업'의 뒤셀도르프파리 지사에서 근무했다.

2.3. 망명[편집]

파리 지사에서 근무하던 1979년 남민전 사건이 터지자 프랑스에 망명을 신청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프랑스에서 20년간 망명 생활을 하였다.[8] 이 당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인지도가 그다지 높지 않았던 시절이기 때문에, 프랑스 이민국의 망명 담당자가 했던 질문이란 게 "당신은 그저 당신의 정치적 의견을 표명한 것뿐인데[9] 왜 이게 문제가 되느냐?" 이에 대한 홍세화의 대답은 "그렇게 하면 잡혀가니까..." 이후 한동안 파리에서 택시기사 생활을 했다.[10]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한겨레신문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고, 당시엔 인터넷도 없고 해외여행 자유화도 막 되던 시기라 아직 해외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프랑스와 유럽 상황을 신속히 전달하는 언론인 역할도 했다.

1995년 프랑스에서의 택시기사 생활 경험과 프랑스 사회에 대한 소개, 본인의 성장기와 한국 사회의 과제를 담은 책 [11]《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출간했고 국내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9년 일시적으로 귀국하면서 출간한 문화비평 에세이《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역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2.4. 귀국 이후 한국에서의 활동[편집]

2002년 1월 영구귀국했고[12] 2월 한겨레에 입사해 기획위원과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

한겨레 기획위원으로 있을 때 다양한 시민들의 목소리와 의견을 담는 지면 ‘왜냐면’을 만들었다.

2002년
3월,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12월 5일, 민주노동당 측 패널로 MBC 100분토론에 출연했다가 한겨레에서 징계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언론인들의 중립성과 개개인의 양심과 관련한 여러 논의가 일었다. 당시 기사

2008년
2월 5일, 민주노동당을 탈당했다. 탈당 사유로 '오늘의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이 아니'라는 점을 들었다. 기사 탈당의 변

2009년
한겨레가 발행하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인을 지냈다.

2011년
11월 25일, 진보신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 진보신당 비례대표 2번으로 출마했지만 당 득표율이 3%를 넘지 못해 낙선했다.

2012년
10월 27일, 진보신당 상임대표직에서 사퇴했다. 기사

2013년
'말과 활' 발행인을 지냈다.

2015년
벌금형을 선고받고 돈을 내지 못해 옥살이를 해야 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사회단체 장발장 은행을 설립하고 은행장으로 재직했다.

2018년
김길오 등이 연루된 '노동당 언더조직 폭로 사건'의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

2020년
2월 14일 더불어민주당의 임미리 교수 고발 사건에 대해 "민주당은 자유한국당보다 배타적이며 비관용적"이라며 비판했다. #

2021년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문재인 정부를 "내용은 없고 수사(꾸미고 다음어진 말)만 있는 정부", "남은 임기 동안에도 임금님이 아닌 대통령으로 돌아오길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2022년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현재는 스페인 포데모스 식의 선거 연합이 불가능한 구조다.[13] 칠레를 눈여겨보고 있는 것도, 5년 전 한국의 촛불보다 좀 더 강한 저항을 통해 제헌의회를 열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개헌 정도로는 안 된다. 지금의 구조는 과도한 기득권 중심의 금권 정치다. 정당법이나 선거법에 의해 소수 정당이 약진할 수 있는 길이 완전히 막혀있다"라는 발언으로 기존 선거제를 비판하였다.

또한 이백윤 후보와 사표론에 대해 '이백윤 후보가 얻는 표만큼 사회가 변화할 가능성이 커진다. 민주당이 다급해지면서 결선투표제 이야기를 꺼냈다. 결선투표를 실시하는 프랑스에서는 절대 사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1차 투표는 사표 걱정 없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투표하기 때문에, 그것의 분포가 사회 구성원의 정치지형을 그대로 드러낸다. 결선투표제가 없는 현재 상황에서, 이백윤 후보의 표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이만큼 지지를 받았구나’라는 가능성이 될 것이다. 이번 사회주의 대선 후보의 출마는 사회주의의 씨앗이라고 생각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

11월 3일 녹색당에 입당하여 이중당적을 가졌다.#

2023년
1월 12일을 마지막으로 한겨레 칼럼 연재를 중단했다마지막 당부: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 당시 한겨레 간부과 김만배 간의 뇌물 사건이 보도되며 이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그만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으나 글 말미에 이와 무관하다고 밝혔다.[14]

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이 즈음에 전립선암이 발견되었고, 이 글이 사망 전까지 마지막 글이었기 때문에 건강 문제로 인한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2.5. 사망[편집]

‘똘레랑스’ 일깨운 홍세화 별세… 마지막 당부 ‘성장에서 성숙으로’

2023년 2월 전립선암이 발견되었고 12월경 암이 몸 전체로 퍼지면서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당시 노동당에서 투병 후원을 모집하기도 했다.

2024년 4월 18일 녹색병원에서 별세했다. 가족들이 한국에 입국하여 임종의 순간을 지켰다.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차려졌다.

사망 전 4월 14일에 한겨레와 생애 마지막 인터뷰를 진행했다고 한다.

3. 논란[편집]

3.1. 대통령 기자회견 횟수 오류 논란[편집]

2020년 11월 19일 한겨레신문 칼럼을 통해 '기자협회보' 자료를 인용하며 역대 대통령의 직접 브리핑과 기자간담회를 합친 횟수는 김대중 150회, 노무현 150회, 이명박 20회, 박근혜 5회, 문재인 6회라는 수치를 제시하며 문재인 당시 대통령의 소통 부족을 비판했다. 국민의힘을 비롯한 야권과 정부 비판 세력에서는 이 수치를 꾸준히 인용하며 비판의 근거로 삼았다.[15]

그러나 홍세화가 출처로 제시한 '기자협회보'를 발간하는 기자협회에서는 대통령 기자회견 횟수를 조사한 적은 없다. 어떤 경로로 우리를 출처로 제시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밝혔다. 더군다나 기자회견 횟수를 어떤 기준으로 집계하더라도 홍세화가 제시했단 수치는 나올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즉 홍세화는 잘못 알려진 수치를 기반으로 하여 칼럼을 썼고, 이것이 팩트체크도 되지 않은 채 수도 없이 인용되어 왔던 것이다.[16] 본의 아니게 오류를 범한 홍세화는 물론 국민의힘 역시 비판을 받았다.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12
비례대표
진보신당 흰색 로고타입
242,995 (1.13%)
낙선 (2번)

5.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민주노동당 흰색 로고타입
2002 - 2008
입당
2008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진보신당 흰색 로고타입
2008 - 2012
창당
2012
정당 해산
진보신당연대회의 흰색 로고타입
2012 - 2013
창당
노동당(대한민국) 흰색 로고타...
2013 - 2022
당명 변경
노동당(대한민국) 흰색 로고타...

녹색당(대한민국) 흰색 로고타...
2022 - 2024
입당[이중당적]
사망

6. 여담[편집]

  • 영남패권주의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이다. 박정희 정권 이래로 성장한 영남 출신 보수 정치 세력이 기득권층으로 빠르게 성장했고 패권화되었다는 뜻이다.
  •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을 지나오며 느낀 대학생들에 대한 비판을 담은 "그대 이름은 무식한 대학생"을 글을 2003년 2월 18일 기고 하였다. 그 글이 속칭 20대 개새끼론의 포문을 연 글이라고 평가받을 뿐만 아니라, 점점 스노우볼이 굴러 세대갈등의 시작, 원류로 홍세화와 함께 이 글이 늘 인용된다.
  • 2000년대 초중반, "당적"을 갖고 소신을 얘기하는 언론인으로 화제를 모았으며, 몇몇 대학교에서 초청 강연을 하기도 했다.
    • 당시 홍세화가 자주 언급하던 내용은 한국 사회의 부의 양극화가 심화된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SUV 렉스턴의 마케팅 문구가 처음부터 대놓고 '대한민국 1%가 타는 차'라 하는 것(유튜브 광고영상)을 예로 들며, 한국은 사회적으로는 참살이(well-being)가 화두로 떠올랐지만, 실제론 점점 부(富)의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는 모습과 여기에서 촉발될 악영향을 우려하였다.[18]
  • 2018년 이후 가발을 쓰는 모양이다.
  • 여성 듀오 무키무키만만수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곡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가사는 책의 내용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데, 이는 이 노래를 작사한 멤버 무키가 그저 앨범에 들어갈 수록곡을 고민하면서 방 청소를 하다가 바닥에 떨어진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보고 그냥 쓴 곡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1] 박만선이라는 보도도 있다.[2] 이중당적[3] 생전 자신이 황골 새지기 민간인 학살사건의 생존자임을 고백하였다.[4] 가족이 국군에 의한 학살 피해자임을 알게 되기 전까지 자신의 사고방식은 '반공교육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고 밝혔다.[5]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계속 몰랐다면, 그냥 얼렁뚱땅 대학 졸업하고 세상에 무관심한 채 편하게 살았을 것이다."[6] 홍세화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친척은 인민군에 강제로 징집당한 상황이었는데 그래서였는지 이 사건으로 부인과 자녀들을 포함한 일가족 14명이 모두 살해당했다.[7] '세화'와 '민화'는 아나키스트였던 아버지가 각각 '세계평화'와 '민족평화'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역사의 질곡에 휩쓸려 이름과 정반대의 운명을 맞은 셈.[8]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보면, 처음 발급받은 망명자 신분증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한다. '갈 수 있는 나라 모든 나라, 갈 수 없는 나라 꼬레'[9] 홍세화씨 본인이 제출한 신문자료와 달리 면담에선 자신은 공산주의가 아니라고 하자 앞뒤가 안 맞지 않다며 물어본 거라고 한다.[10] 남민전은 이적단체 논란이 있으나 엄연히 법원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받은 사건이다. #1 #2 #3 이념 논쟁을 떠나 당시 정권이 학생운동을 반인륜적으로 탄압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사노맹 사건 등 엄연히 극좌적 지하당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까지도 민주유공자로 인정받은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남민전이 이적단체나 극좌 단체였던 사실 자체가 뒤집히는 건 아니며 이 사건의 관계자들은 무고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도상해를 저지른 것도 사실이다.[11] 2006년에 개정판이 나왔다.[12] 아주 어려서부터 프랑스에서 살아온 그의 딸과 아들은 프랑스 국적을 취득해 그곳에 남았고, 아내는 한국과 프랑스를 왔다갔다한다고. 한국 국적의 홍세화가 한국에 오지 못하는 동안, 프랑스 국적의 딸은 한국학을 전공한 뒤 한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고 한다.[13] 일단 총선에서 '어느 당이 이기든지', '어느 쪽 후원자들이 더 부유한지?' 여부와 무관하게, 절대다수의석 정당이 출현하기 어려운 선거 구조가 전제되어야 한다. 수많은 이권과 옥사(獄事)까지 다룰 권한이 주어지는 정계(政界)인만큼, 이 정도 상황은 되어야, 자의 반 타의 반 협의(協議)에 나선다는 것이다.[14] 그럼에도 동시에 한겨레가 프티부르주아 언론으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15] 김, 노 150회 이명박 20회, 박근혜 5회 수치는 박근혜 정부 당시에는 반대진영으로부터 활용되어 비판의 소재로 사용됐다.[16] YTN의 팩트와이 기사가 나온 것은 한겨레 칼럼 게재 후 2개월이 지난 후였다.[이중당적] #[18] 참고로 홍세화가 망명 생활을 했던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홍보 문구가 성립되기 어렵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과 7월 혁명 그리고 2월 혁명을 거치면서 상류층, 부유층들이 거센 풍파에 휩쓸리며 "목숨까지" 잃은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프랑스제 고급 브랜드를 걸친 세련된 도시인들 모습은, 마케팅 및 미디어로 만들어진 환상에 가깝다고 한다.
===

남민전 사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깃발

남민전 사건(南民戰事件)은 1979년 대한민국 유신 말기 최대 공안 사건이자 논란은 있지만 일부 관련자들이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된 사건이다1978년부터 1979년 4월 동아건설 회장 최원석의 자택 등 서울 강남 일대에서 벌어진 강도·절도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확대됐다.

1976년 2월, 이재문신향식김병권 등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를 비밀리 조직한다. 1977년 1월,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 민중의 소리를 여러 차례 배포하는 등 반유신 투쟁을 전개하고 민청학련을 위시한 학생운동권을 중심으로 청년학생위원회를 조직한다.

무장 혁명을 목표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과 연락을 시도하고 예비군 훈련장에서 총기를 밀반출해 비축하고 폭탄을 사제하던 중 민투위 강도 사건으로 수사당하게 된다. 1979년 10월 4일부터 11월까지 이재문이문희차성환안재구이수일김남주이재오를 비롯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조직원 84명이 구속당하였다. 공안 기관은 이것을 '북한 공산 집단의 대남 전략에 따라 국가 변란을 기도한 사건', '북한과 연계된 간첩단 사건', '무장 도시 게릴라 조직' 등으로 발표하면서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등의 협의로 처벌하였다.

후일 KBS에서 방영되었던 인물현대사에서 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늘푸른한국당 대표를 지낸 이재오나 당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관련자들이 한 증언을 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맹목으로 추종하는 조직이었다기보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등한 처지에서 협상하려고 했던 진보성을 띤 민족주의 성향 단체였다고도 한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을 역할 모델로 삼은 자생한 사회주의자, 진보성을 띤 민족주의자의 조직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맹목으로 추종하지는 않았더라도 냉전이 한창이었던 당시로서는 1970년대 민주화운동 세력들 중에서도 상당히 이질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재오 자신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관련자가 아니고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 소속으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는데 유신정권이 비슷한 시기에 체포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와 엮었던 것일 뿐이라 주장한다.

2006년 3월, 노무현 정권에서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 관련자 중 29명을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했다. 남민전 주도자로 사형 선고를 받고 1981년 옥사한 이재문과 1982년 사형당한 신향식은 제외되었다.

홍세화는 이 사건이 알려지기 전 모 기업의 프랑스 파견 직원으로 프랑스에 갔다가 이 사건이 알려진 뒤 프랑스로 정식으로 망명하였다. 홍세화 처지에서 바라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는 후일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 실렸다.

사건[편집]

당시 내무부 장관 구자춘은 1979년 10월 9일 건국 후 반국가 활동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인 74명이 가담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의 총책 이재문(45)을 위시한 20명을 경찰이 검거한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잔당 54명에 대한 검거령을 내렸다고 하면서 이들이 "북괴의 적화통일 혁명 노선에 따라 폭력으로 대한민국을 전복하고 종국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전위대로서 지하에 반국가단체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학생, 지식인, 긴급조치 위반 수형자 등을 포섭하여 대정부 투쟁을 선도 조종하고 도시게릴라 방법에 의한 납치·강도 행위를 자행, 학원 및 사회의 혼란을 조성하고 민중 봉기에 의한 국가 변란을 획책해 온 자들로서 이들이 사용한 사제폭탄 소총 및 실탄 도검류 통신 문건 공작 장비 등 증거물 1374점을 압수했다."라고 밝혔다.

구체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가 당시 대한민국의 군사독재정권을 전복하려고 점조직으로 지하조직을 구축하고 10대 강령, 9대 규약, 10대 생활 규범, 4대 임무 , 3대 의무 등을 제정한 후 인공기를 모방하여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깃발을 만들고 혁명 투사로서 가입할 때 선서하게 했다고 하면서 5명에서 12명을 일당으로 한 혜성대라는 결사 행동대를 조직하고 봉화산작전, 땅벌작전 등 암호를 사용해 서울시 강남구의 재벌 집과 동대문구 휘경동의 G모 사장 집에 침입하여 3회의 강도 행위로 당시 500,000여 원에 상당한 금품을 털고 추적하는 수위를 단도로 찌르기도 하였다.

구성[편집]

  • 이재문 1964년 7월 인민혁명당 중앙상위조직부책으로 군사독재정권 전복 획책하다가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민청학련 사건을 주모한 여정남을 배후에서 조종했으며 1976년 2월 이만성(가명), 김병권(가명 김경인) 등과 함께 소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를 결성, 위원장으로서 취임하여 점조직으로 학생, 교직자 등 74명을 포섭했다.
  •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 조직 기구로 중앙위원회와 그 아래에 총무, 조직, 교양선전선동, 출판, 통일전선, 무력, 대외연락, 정보, 재정 등 9부, 검열위원회, 서기, 서울과 경북, 호남 등 3개 지역책을 두고 중앙위원회 직속 하부 조직으로 민주투쟁국민위원회(한민성 가명)을 설치하여 산하에 청년,농민, 노동, 학생, 연합, 교양 등 6부와 지도요원 및 221개조 편성 암약하며 김일성에게 "피로써 충성을 맹세"라는 서신을 보냈다.

재판[편집]

대법원(주심 이일규)은 남민전 피고인 58명 중에 이재문 등 57명의 상고를 기각하고 신동규에 대해 원심파기 환송하였다. 이에 따라 신향식과 이재문 사형, 안재구, 최석진, 이해경, 박석률, 임동규 5명에게 무기징역, 차성환, 이수일, 김병권, 김남주, 박석삼, 황금수, 김종삼에게 징역15년 자격정지15년, 임규영, 노재창, 김부섭, 김영옥에게 징역10년 자격정지10년, 이문희, 윤관덕, 김봉권에게 징역7년 자격정지7년, 이계천, 이재오, 임준열, 심영호, 이학영, 김흥, 최광운, 김명, 백정호, 정만기에게 징역5년 자격정지5년, 임기묵, 전수진, 최평숙, 권영근, 김정길, 이강, 김재슬, 김특진, 황철식, 최강호, 권오헌에게 징역3년 자격정지3년이 선고되었으며 남민전 관련 전체 피고인 73명 중에서 김세원 등 6명은 상고를 포기했고 상고한 67명 중에 김승균 등 9명은 상고이유서를 기한 내에 제출하지 않아 항소심 형량이 확정됐다.

같이 보기[편집]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