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알라딘: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 1999

알라딘: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 (지은이)한겨레출판1999-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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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es Point : 3,554

8.7 100자평(3)리뷰(49)


책소개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라는 자전적 에세이로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파리의 이방인 홍세화 씨의 문화비평 에세이. 지은이는 그 동안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아웃사이더로 머무르지 않고 한국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으로 우리 사회의 핵심을 꿰뚫는 안목을 보여 준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의 모체가 되었던 글은 한겨레신문에 기고했던 '내가 본 프랑스, 프랑스인'이라는 연재물이다. 원고지 다섯 매 정도의 양을 가지고는 표면적인 현상밖에 적어내지 못했는데 이 책에서 다시 사회 문화적인 현상에 대한 분석이나 배경을 밝히며 훑어내려 다시 썼다고 한다.

여기에서 그는 프랑스라는 거울 속에 투영된 우리 사회의 숨기고 싶은 풍경까지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또한 프랑스 사회의 긍정적인 특성뿐 아니라 미처 알지 못한 그 사회의 또다른 이면들이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책의 제목은, 한강은 서울을 강남과 강북으로 가르며 흐르고 쎄느강은 파리를 좌안과 우안으로 가르며 흐르는데,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된 지 반 세기를 넘겼고 프랑스는 현재 좌우 동거 중에 있음을 되새기게 하는 의미를 갖는다.



목차


1. 그도 프랑스야!
개성인가, 유행인가/ 권위주의는 가라/ 5,900만의 개성이 빚은 나라/ 나를 찾아서

2. 프랑스 사람들 이야기
프랑스의 일반사람들/ 우리는 먹고 당신들은 집어넣는다/ 철학 카페에서 토론 한마당/ 삶의 다양한 풍경/ 자동차와 지하철/ 프랑스 사회의 이면

3. 한국 사회와 프랑스 사회의 만남
스승은 수치심부터/ 교육 현실의 두 모습/ 수학과 글쓰기 1/ 수학과 글쓰기 2/ 접촉과 거리/ 불쌍한 한국어/ 외규장각도서 반환문제를 보는 눈/ 서울 평화상/ 똘레랑스에 붙인 두 개의 사족

4. 남북과 좌우
사회정의는 질서에 우선한다/ 고통분담과 `사회적응 최소수당제`/ 사회주의데 대하여/ 쎄느 강은 파리를 좌우로 나눈다

5. 그대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안다
슬픈 대륙의 발라드/ 젊은 벗, 그대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안다



책속에서


한국 사회와 프랑스 사회는 어떻게 만나는가? 나에게 서로 다른 두 사회는 느낌으로 만난다. 자주 안타까움으로 만나고 이따금 분노로 만난다. 두 사회가 부딪히면서 생겨나는 느낌은, 생겨날 때부터 아니 생겨나기 이전부터 나아가는 방향이 항상 한쪽으로 정해져 있다. 받는 쪽에선 나의 느낌이 반갑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친화력이 없으면... 더보기
"서른 명의 학생이 하나의 죽은 정물을 바라보는 모습은 전혀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느 젊은 여교사에게 왜 미술시간에 학생들에게 석고 데생을 시키지 않느냐는 질문에.-85쪽 - 나른한 오후
"당신 말이 전적으로 옳소, 무슈 수상."-시락의 "당신을 무슈 대통령이라고 불러 마당하겠으나 지금은 똑같은 후보의 처지로서 만나는 것이므로 무슈 미테랑이라고 부르겠소."에 대한 미테랑의 대꾸-102쪽 - 나른한 오후
토론자의 무기는 칼이 아니라 말이며, 수사법이며, 정연한 논리이며, 정확한 용어와 발음의 구사이다.
"단결로 인내하는 것은 토론이다"-죠스팽-103쪽 - 나른한 오후
어디서나 난시(亂時)에 살아 남는 데에는 양비론보다 더 좋은 보신책이 없는 것 같다. 행동보다 말로 한 몫 보는 현대의 양비론자들은 비유컨대,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양쪽에서 훈수를 두는 사람과 비슷하다. 자신을 내세우면서 싸움의 현장에서 떠나 있다. 현실이란 좌표 바깥에서 고고한 비판 놀음을 즐기는 것이다.-194쪽 - 나른한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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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홍세화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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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사회운동가, 언론인.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66년 서울대 금속공학과에 입학했으나 이듬해 그만두고 1969년 서울대 외교학과에 재입학했다. 1972년 '민주수호선언문' 사건으로 제적되는 등 순탄치 않은 대학생활 끝에 1977년 졸업했으며 1977~1979년 '민주투위' '남민전' 조직에 가담해 활동했다. 1979년 3월 무역회사 해외지사 근무 차 유럽에 갔다가 남민전 사건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파리에 정착, 20여 년간 이방인 생활을 했다. 2002년 영구 귀국하여 영원한 사병으로서 발로 뛰는 실천적 지식인의 모습을... 더보기

최근작 : <청소년을 위한 두 글자 인문학>,<교사는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하나요>,<생각의 좌표> … 총 123종 (모두보기)
SNS : http://twitter.com/hongshenx


출판사 소개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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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분포

8.7






왜, 우린, 모든 것의 기본인 '대화'조가 시도할 수 없는가?
루시아 2008-05-22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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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보다 조금 자세히 기술한 문화 차이 그리고 한국사회 문제점
삐약삐약 2009-10-12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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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감성이라면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는 지성
신나 2023-09-04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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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처음 접했던 홍세화씨의 책

이 책은 대학 1학년 시절 마지막 세미나 '교재'였고, 따라서, 내가 처음으로 '완독'한 홍세화씨의 책 되겠다. 책은 '문화비평 에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듯, 한국의 문화를 전적으로 프랑스-구체적으로는 프랑스의 '똘레랑스'문화-의 문화와 비교하며 비판하고 있다. 저자가 '본의아니게' 프랑스에서 줄곧 생활해 온 터라, 프랑스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그렇다고해서 그가 덮어놓고 프랑스를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사회의 선진성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우리나라의 정치, 사회적 병폐를 거론하기 위한 '도구'로 복무하고 있으며, 그러한 프랑스 똘레랑스의 이면-인종문제-에 대해서도 충분히 거론하고 비판되고 있다.

또한 '제1세계'에서의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 한국을 비판하다보면 쉽게 빠지는 오류, 즉 한국에 대한 폄하나 원망은 이 책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그것은 아마도 저자가 '제1세계'의 휘향찬란한 외향과 스타일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뚜렷한 주관과 신념에 의해 서술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모국 사회에 대한 비판이 질시보단 애정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세미나가 끝나고, I형이 했던 한마디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근데 우리는 도대체 왜 이모양일까? 얘들이라고 특별히 잘난것도 아닐텐데." 글쎄, 지금 내 생각엔 한국의 독자적인 '근대'는 고작 50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프랑스도 '똘레랑스'가 자리잡기 위해서 오랜 기간과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했다), 그 초입부터 좌우파간의 '전쟁'-이러한 극단적인 정치행위(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정치의 끝으로 보았다지?) 속에서 중간파가 살아남을 여지는 없다-으로 인해 극우 일변도의 정치교의가 '교조화'되는 속에서 시작했다는 점, 50년이 지나도록 국가보안법 같은 다른쪽을 배제하려는 법적 장치가 그대로 온존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장구한 사회적 합의를 통한 똘레랑스 문화가 자리잡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는 점이 그 원인이 아닐까 싶다.

홍세화씨의 문장은 다소 문학적(?)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의 글에는 '이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 낙관하려는'한 인간의 노력이 보인다. 시간이 꽤 지난 책이지만, 읽어보지 않으신 분이 있다면 한번쯤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관용과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정의라는 가치가 그때나 지금이나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돌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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率路 2006-11-13 공감(1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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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홍세화님의 강연(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모색 - 국가주의 교육과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청강할 기회가 생겨서 다시 읽어본 책이다. 문화비평에세이로 되어있지만 프랑스에서 오래 살면서 긴 기간안 돌아올 수 없었던 저자가 프랑스와 한국을 비교하며 적은, 생각할 거리를 많이 안겨주는 책이다.

강연을 들을 준비작업으로 책을 다 읽고 가고자 하였으나, 강연을 듣고 난 후에야 비로서 읽기를 마치게 되었다. 존재를 스스로 배반하는 의식화를 탈의식화하는 꾸준한 교육과 편을 갈라 조직하고 존재로서 바로 서고자 운동하며 공공의 가치를 세울 수 있음을 꼭꼭 힘주어 말하던 모습은 간결하면서도 명쾌했다. 프랑스에서 빈곤한 생존과 싸워가며 자녀를 교육함에 프랑스 국가가 담당하고 제공한 무상교육의 기회를 통해 당당하게 성장한 자녀들을 소개하면서 '늠름하게' 라는 형용사를 강조하였다. 살아온 인생을 하나의 형용사로 대치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가슴에 와닿았다. 나는 나의 삶을 어떤 형용사나 부사로 설명할 수 있을까? '당당하게' - 30대까지의 내 삶에는 가능한 단어이나 지금은 아닌듯, '열심히' - 너무 모호하고.... '치열하게' - 자주 쓰는 단어이기는 하지만 글쎄...

고민을 많이 하면서도 나를 변화시키는데엔 인색한 모습을 발견하면서 자기 허물을 벗는데 어려움을 느끼며 비판에 대해서 수긍하면서도 가슴 속으로는 반발이 치밀어 오르는 나는 '공격성마저 띤 뻔뻔스러움과 약삭빠른 냉소 혹은 절망과 체념의 신음'(pp.9-10)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남북한의 대치상황 속에서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란 말에 두드러기가 날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해오던 우리의 정치현실을 무시한 채 프랑스의 공공성과 토론문화를 이식할 수는 없을 것이며, 우리의 현실 속에서 개선의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좌파의 적극적 개선을 통해서이지 보수우파의 개선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강연과 독서를 통해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뚜렷하게 금그어보면서 인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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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우 2005-04-14 공감(9)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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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바꿔가기.



책 제목이 정형화된 느낌이지만, 뜻을 새겨보면 참 아픈 제목이다. 전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것도 아프지만, 남한 내에서도 극심한 대립으로 할퀴고 뜯는 모습을 지금도 너무 쉽게 보기 때문이다. (이글을 쓰는 시점은 지방선거를 앞둔 상태)

전작 빠리의 택시 운전사가 보다 감상적인 느낌이었다면 이 책은 좀 더 감정을 빼고 객관적으로 글을 쓰려고 노력한 느낌이 난다. 프랑스와 프랑스인을 얘기하면서 우리의 사회를 투영해보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는데, 부럽고 안타까운 기분이 많이 들었다.

우리나라가 해방 이후 민주주의가 급속도로 들어오는 바람에, 그것도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해서, 혹은 타국 주도로 들어왔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자체적으로 정착한 서양보다 정치의식 혹은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본다.(정치인이 존경 받는 대한민국을 오매불망 꿈꾼다.)

또 트집 잡기 위한, 상대를 꺾어내기 위한 정책 우선의 모습이 많은 것도 기막히고, 언론이 정치와 유착하여서 주구 노릇을 하는 것은 화딱지 나고, 거기에 휘둘리는 대중의 모습은 눈물날 지경이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오는 프랑스 시민들의 모습에 많이 감탄했다. 대통령일지라도, 실업자일지라도, 그들의 의견을 내놓는 자리에서는 똑같은 자격의 프랑스인이라는 것을, 언론이 먼저 걸러내고 시민들이 인정하는 모습이 눈부시기까지 했다.

또 파업 이야기에서 너무 쓰라렸는데, 우리 사회의 이기적인 모습 때문에 마음이 영 불편했다. 우리나라에서 파업이 발생하면, 시민들의 반응은 "또?"이며, 불편하다라는 이유로 파업자들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모습을 본다. 그들이 왜 파업을 했으며 무엇을 요구하는지, 그들이 받은 부당한 대우가 무엇인지 언론은 말해주지 않는다. 수구 언론과 부자 신문들은 앞다투어 시민들이 얼마만큼 불편했고, 그로 인해 받은 경제적 손실이 얼마인가를 요란한 수치로 떠들어댈 뿐이다. 그러다 보면 시민들의 옹호와 지지를 받지 못한 파업 세력은 결국 그들의 요구를 관철시키지 못하고 또 다시 불평부당한 대우를 감내하며 일자리로 돌아간다(끝까지 버틴 사람은 공권력을 맛보거나 실업자가 된다.ㅡ.ㅡ;;;)

내가 기억하는 범위 안에서 우리 사회가 하나되어 똘똘 뭉친 기억은 월드컵 때 온 국민이 거리로 뛰쳐나와 하나된 응원을 했던 그때 뿐이었다. 과거 80년대에 서울에 봄이 왔다고 외치던 시절, 힘 닿는 데까지 민주화를 위해 애썼던 우리의 윗 세대분들이 계셨지만, 내가 어른이 되어서 기억하는 범위 안에서는 사회적 착취와 부당함에 대항해 하나되어 싸우고 국민이 지지했던 기억이라고는 전무하다.

여기에 우리 사회의 한계점이 보이는 듯하다. 아무리 개인화되었고 삭막한 정서적 환경 속에 놓여 있다지만, 공공선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회에 어떤 미래가 있을 수 있는가.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와 외국인 노동자 문제 등등, 우리가 속해 있거나 혹은 관련되어 있는, 전혀 무관하지 않은 사회적 문제에 노출되어 있다. 내 일이 아니라고 나몰라라 한다면, 내가 같은 일을 당했을 때 나를 몰라라 하는 사회에 대해 뭐라고 항의할 것인가. 잠깐의 불편을 감수하여 더 많은 사람이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에 살 수 있도록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은 정녕 가질 수 없는가 말이다.

이 책에서 또 부끄러웠던 부분은, 우리나라 뉴스의 보도 능력 혹은 태도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프랑스에 방문했을 때 뉴스에서 중요 보도를 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아무 공적인 이유 없는 사적인 방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대통령이 어디를 가면, 반드시 그 정황을 보도해주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해왔다. 늘 그런 뉴스를 보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문제가 있는 지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갑자기 눈이 커진 느낌이었다. 우물 안 개구리. 딱 그 기분

잠시 역사 이야기를 해보자. 조선시대에 사림 세력은 훈구 세력에 대항하여 네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도 끝끝내 살아남아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반대파가 사라진 다음엔 자체 분열하여 당파 싸움을 하였다.(우리만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좀 더 오래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 것은 심히 유감이다.) 그때 율곡 이이는 우리가 "싸울 때가 아니라 개혁해야 할 때"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동인들에 의해 서인 편들기로 몰려가면서 공허한 외침이 되고 말았다. 당시의 국제 정세는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해 가던 무렵이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꺾고 전국을 통일해 가는 과정이었다. 내부 싸움에 바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귀기울이지도 눈여겨 보지도 못한 조선은 "임진왜란"이라는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우리 사회도 그렇지 않을까. 좌파니 우파니, 중도니 하면서 서로 편가르기를 하면서 세력 다툼을 할 때, 중국은 고구려가 지네 역사라고 하고, 일본은 지치지도 않고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긴다. 봄만 되면 중국에서 황사가 불어오는데, 우리는 눈과 귀와 코로 다 받아낼 뿐, 무엇도 대처하지 못한다.

한 번은 학생들에게 물은 적이 있다. 통일의 당위성을 아느냐고. 통일을 왜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안 되었으면 바란다고 답한다. 이유가 뭐냐고 묻자, "대학 가기 더 힘들어지잖아요."라고 대답한다.

단지, 그네들이 어린 탓에 철없는 대답을 한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아는 까닭에 씁쓸했다. 지금도 이럴 진데, 더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아예 서로 다른 길을 가지 않을까. 왜 남과 북이 하나되어야 하는지, 그 까닭을 떠올릴 수 없지 않을까.

딱 집어서 어느 하나를 고쳐야 한다고는 말 못하겠다. 그런 게 가능하다고도 보지 않는다. 모든 것은 동시에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고치고 다듬고 바꿔나가야 한다.

정치인은 정치판에서, 경제인은 경제를 이끌어가는 구조 속에서, 언론인은 살아있는 정직한 필력으로, 학생들은 자신들의 본분인 공부에서, 모두모두 제 일에 최선을 다하고 바르게 살아야 하고, 사회의 부당한 모습에 적극적으로 개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고 했다. 내 주변에 우리 사회에, 당장은 나와 무관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책이야기를 하다가 많이 흥분했다..;;;; 그만큼 이 책을 읽으면서 감탄과 탄식을 병행했다는 이야기이다. 정치 선진국 대열에 대한민국도 속히 들어가기를 바라며... 나 자신도 업그레이드 된 사회의식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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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4-12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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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 "왜?"라고 물어보기.



2011.11.21



나에게는 되도록 지키고자 하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책을 접할 때, 저자에 대해 미리 알고 들어가지 말자는 것이다. 때문에 책날개가 별도의 커버에 붙어 있고, 그곳에 저자소개가 있는 책이라면 보통 뒷날개에 있는 해당 출판사의 여러 추천도서목록들만 (나중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살짝 옮겨 적어놓고, 커버는 버린다. 책 읽을 때 거추장스럽게 덜렁거린다는 이유도 분명 있지만 나는 독서에 앞서 되도록 저자에 대한 편견이 없는 ‘나’를 책과 대면시키도록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모든 노력이 성공하진 못한다. 제목에서부터 “나는 이런 사람이고, 저런 생각을 지지하여 요런 내용을 썼고, 결론은 고로 이렇소.”라고 말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한 일단 한 번 접한 작가의 성향은 쉽게 잊히지 않기 때문에 그 작가의 책을 연이어 읽을 때에는 위의 노력이 거의 시도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글 자체로만 판단하려는 시도가 올바른 것이라 배워온 나에게 저자소개와 서문은 항상 맨 마지막에 접해야 하는 정보 즈음이 된다. 브랜드 이름만 보고 옷을 사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런 까닭에서일까? ‘홍세화’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한겨레’가 어떤 성향의 언론인지도 몰랐을 때, 내가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읽고 받은 충격은 그야말로 “뺨을 한 대 얻어맞고도 기분이 상쾌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나를 냅다 던져버렸다. 내 앞가림도 하기 힘들고, 사회를 포용하고자, 혹은 판단하고자 하는 능력 자체가 부족했던 탓에 홍세화氏가 한국과 프랑스 사회를 비교하며 펼쳐놓은 예리한 통찰력은 사실 내겐 언감생심이었다. 물론 나에게 어떤 문화집단 사이를 비교할 만한 판단능력이나 경험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 달이 조금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고등학생 무렵, 나는 시드니대학교 기숙사에 머물며 낯선 문화를 온몸으로 느껴본 적이 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다행이도 “짧았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문화에 중화되지 않을 수 있었다. 외국에 나가야 우리나라의 위상이 보인다는 것은 예삿일이었고, 당시 득세하던 백호주의, 풀어 쓰자면 ‘백인 호주사람 우월주위’의 냉담한 시선 탓에 상처받은 것은 지금도 외상(外傷)으로 남아 있다. 나는 그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안 그런데.”라는, 정에 이끌린 판단을 하는 우를 범했고, 한국에 돌아와 훗날 홍세화氏, 진중권氏, 박노자氏, 그리고 강준만氏의 신랄한 책을 읽었을 때에 그 ‘우’가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민족’이라는 단어를 도타운 정보다는 회의적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물론 ‘민족’은 좋은 단어이다. 그러나 극우주의자들의 ‘민족’이라는 단어는 결코 올바른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서도 언급된 극우주의자들의 득세가, 발매로부터 10년은 더 지난 어제 KBS 다큐멘터리를 통해 다시 한 번 문제시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대체로 어떤 시기와 상황에 ‘민족’이라는 단어를 제멋대로 꺼내놓을 수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는지를 상기시켜주기에 충분했다. 나치와 파쇼는 사실상 히틀러처럼 “우리민족의 결정적 순간”에 나타나 이 상황을 타개할 방책이 있다며 민족적 이데올로기를 잘 선전할 수 있는 달변가만 있다면 언제든지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다. 어제 방영된 KBS 다큐멘터리는 그런 보고서들이 최근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사실과 함께 이 문제가 어느 정도 위험수준에 돌입했다는 잠정적 해석을 내놓았다. 전문가들의 진단처럼 정말 세계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일까?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각종 전쟁과 내전, 사회주의의 몰락과 신자유주의의 타락이 벌어졌고, 다시금 제 2차 세계대전 이전의 상황으로 내몰리는 듯하며, 극우주의와 전체주의가 각 국가의 불편한 경제상황 속을 비집고 나오려는 중이다. 지젝은 월가 시위대들 앞에서 한 연설을 통해 그의 ‘극강 공산주의’를 재차 주장하며, 실패한 사회주의의 전략이 아닌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써 사회주의가 다시금 세계의 조류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여전히 ‘월가’는 건재하다. 신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로써” 사람들을 모으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돈이 그러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강요와 억압을 받는 피해자로써의 삶을 살면서도 저항할 수 없는 까닭은 “원칙이 있는데 지켜지지 않는다.”라는 회의적 평화주의 때문이다. 반면, 극우주의와 전체주의는 분명한 타겟과 방법을 지닌 명확한 행동을 한다. 히틀러가 다시 등장한다면 그가 이길 수밖에 없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이런 진단들을 여러 칼럼을 통해 읽어봤다. 독일에서 최초의 공화정이 실패하고, 온갖 정당들이 루머와 자기고집으로 집권하려고 했을 때, 그 때 나치가 나오지 않았던가. “독일인의, 독일인에 의한, 독일인을 위한”, 아니 “독일인만의” 움직임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도, 다시 말해 극우주의자들이 나치를 반복하려고 한다는 거센 비난이 독일 사회 전면에서 제기되면서도 그들의 활동은 현 정권 내에서 유지되고 있다.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천하의 고집쟁이가 극우주의를 만나, 만약 노르웨이의 참혹한 총기난사 사건을 훨씬 뛰어넘는 계획을 세운다고 한다면 오늘날 ‘평화로운’ 사람들이 그 앞에서 어떤 저항을 해볼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대원칙에 입각한 판단을 견지하며 우리의 문화를 다른 나라의 문화와 비교함으로써 상대론적인 입장에서 우리의 부족한 점과 잘못된 점을 고쳐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는 그런 면에 있어서 매우 탁월한 책이다. 박노자氏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은 “한국의 바깥에서 들어온 사람이 한국 안에서 한국을 바라본 시선(그럼에도 그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잘 안다는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과 자기반성의 기회를 줬다.)”이라면 홍세화氏의 이 책은 “한국에서 타국으로 나간 사람이 한국 바깥에서 한국을 바라본 시선”이다. 그런데 두 책은 많은 부분에서 일치를 보인다. 다시 말해 “모로 봐도” 한국사회와 문화에는 우리가 자부하는 것 자체마저도 비난받을 수 있는 일련의 잘못된 코드, 혹은 DNA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홍세화氏는 특유의 명료한 문장과 신랄한 주장, 그리고 되도록 양비론을 지양하는 태도로써 독자들이 ‘쎄느강’과 ‘한강’ 사이의 균형 잡힌 시각을 갖도록 독려한다. ‘쎄느강’을 마냥 칭찬하는 글이 아니라는 점은 책의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 때문에 만약 그가 프랑스인들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쓴다면, 비유컨대 그 글은 프랑스인들이 읽은 ‘박노자氏의 책’이 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홍세화氏는 프랑스문화에서 본받을 것들을 추출해서 이 책을 엮었다. 겨냥된 독자가 한국인일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프랑스의 긍정적인 면들이 우리 사회의 병폐를 치료할 약이 될 것이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개성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는 사회, “어떤 돈인가? 어떤 권력인가?”에서 ‘어떤’이 자주 생략되는 사회, 사람이 아닌 직분을 만나는 사회, 토론문화가 퇴보된 사회(우리나라 정치인들 토론회 하는 것을 한 번 보라. 이따금 대학생 토론대회라고 방영하는 케이블방송의 TV토론회를 보라. 그러나 정작 창피한 것은 나 자신도 토론의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해본 적은 거의 없고, 배운 기억도 없다. 이 점에 있어서 홍세화氏는 프랑스 방송편성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는데, 예능 프로그램을 줄이고 토론 프로그램을 살린다고 한다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권리’와 ‘인권’ 등을 주장하며 반대하겠지만 토론 프로그램의 활성화는 분명 좋은 토양을 만들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잘못된 언어생활과 ‘언어’의 수능화로 점차 떨어지는 한글사랑, 그럼에도 영어 공용어화론이 정말 심각하게 논의될 수 있었던 사회, 언론의 양비론과 부족한 윤리의식, 상(賞)이 갖는 권력의 재확인, 똘레랑스가 부족한 사회, 좌우편향이 심해 지진이 일어나는 사회, 세대 간 공유되는 인식이 현저히 부족한 사회.

작금의 수치스러운 세태들이 괜스레 오늘날 사회 이곳저곳에서 비판받고 있는 것은 사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며,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라고 묻는 것을 실례라고 여기기까지 한다. 이러니 토론이 없고, 윽박지름만 있으며, 안철수 교수가 말한 “문제인식의 공유”는 세대 간의 차이, 좌우의 차이, 혹은 강남과 강북, 대학교 이름, 아니면 지역 간 차이로 도저히 시도조차 되지 못한다. 이것이 구태의연한 문제제기일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이 문제들이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는 심각성에 대해 추호의 고찰도 해보지 않은 이들이다.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가 출판된 때가 20세기였다는 것을 고려해 봐도 우리 사회는 뭔가 나아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것들은 그대로 있는, 쉽게 말해 사람은 같은데 옷만 바꿔 입은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체질이 변화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혹은 기술적 조류에 맞춰 “트렌디한 것”을 마치 ‘선도’하는 나라인 것처럼 잘못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인식’을 지적하면 민족주의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 사회개혁을 시도하려는 이에게 “빨갱이!”라고 소리치며 목덜미를 후려친 할머니가 어디 이 나라에 단 한 명이겠는가? 전쟁을 일으키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고, 인권을 부마로 삼아 자신이 원하는 바를 타인의 인권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지나치는, 나귀를 탄 양반 같은 이들도 있다.

몇 년 만의 재독인데도 여전히 나 자신은 그대로이고, 문제제기는커녕 뭘 하느라 그리 바쁘고 어지러웠는지 돌아보게 되는 책이 있다. 홍세화氏의 책도 그런 책 중 하나이다. 지식을 소유하게 하는 책들은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지만 의식을 견지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홍세화氏의 글에서 “그래서 어쩔 건데?”라는 회의적 인식이나, 혹은 여전한 편향적 인식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아침에 머리를 빗고 나갔는데 도저히 오늘 나의 머리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친구에게 물어본다. “오늘 머리 괜찮아?” 그러면 친구는 “괜찮아.”, “앞머리가 조금 이상해.”, “왁스를 너무 많이 바른 것 아니야?” 등등 의견을 말해준다. 이 의견은 우리의 행동방향을 정해준다. 남이 좋다고 하니 하루를 당당하게 살든지, 아니면 어디가 이상하다면 화장실에 가서 열심히 손질해본다. 조언과 수정은 일상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문제는 그것이 ‘사회’라는 수준에서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는 우리가 대개 아파트 위층에는 누가 살고, 그 이웃의 아들딸은 몇 살이고, 집주인의 직업은 무엇인지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무관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뭔가를 고치기 위해서는 사회를 허상이 아닌 ‘실체’로써 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그것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고, 그 생각을 나눠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게끔 하는 토론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물론 이 공간에 이 생각을 적어놓는다고 해서 내가 누군가와 활발한 토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절반 남은 대학생활 중 얼마나 많은 건강한 토론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이며, 특히 어느 부분에 관심을 가져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 상태, 내가 그런 선상에 서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선상에 서 있다.”는 것을 뚜렷하게 재확인했다는 것이고, 홍세화氏의 책이 많은 독려를 해줬다는 것이다. 프랑스인들과 같은 역량, 용기, 그리고 집요함을 갖고자 하는 바람이야말로 ‘행동하는 지성’의 유일한 꿈이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고 할까. 마땅히 곁에 둬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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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기 2011-11-21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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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학을 넘어 자기비판의 장으로

확실히 한국은 자아비판이 부족한 사회는 아니다. 즉, 한국사회의 단점들이 자기를 비판할 줄 몰라서 초래된 것은 아니다. 자칭타칭 지식인에서부터 외국에 좀 살다 왔다는 다양한 개성의 사람들, 신문의 조그만 박스기사에까지 우리는 외국과 우리를 비교하여 우리를 비판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었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국과 찌개는 환경오염이 심하니 외국 어디처럼 국물요리 대신 음료로 대체하자는 위대한 비판도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생산적이었는가? 그리고 얼마나 정당했는가? 단언하건데, 이것들은 대부분 쓰레기였다. 자기가 조금 알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혹은 외국에 살면서 외국인을 목격했다는 자랑과 투정 이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한국사회에 통용되는 사회비판과 대외인식의 문제점은 자학은 있되 자기비판은 없었던 것이다. 매저키즘은 이유를 가리지 않는다. 그냥 고통당하는 게 좋을 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언로에서 글쓴이들의 매저키즘은 객관적인 사회비판인 것처럼 행세해 사람들을 기죽여왔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홍세화 선생이 외국물 먹은 매저키스트의 또 다른 출현으로 여겨지기도 했던 것은. 내가 홍세화 선생의 책이 나온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지금에서야 읽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아니,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강의 위치까지 트집잡아서 애꿎은 한강을 비난해?'하는 반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박노자 교수가 그랬다시피 어떤 사회를 비판할 때는 역사적, 사회적으로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며 다른 사회와 비교할 때는 더욱 더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 대해 말한 국내외의 어떤 논객보다 더 사려깊게 그 작업을 했다.

이제는 유명해진 '똘레랑스'나 '사회정의'같은 개념은 그가 무분별하게 수입한 외제품이 아니다. 한국에는 많은 과일이 있는데도 바나나가 없어서 이 모양 이 꼴이라는 뜻으로 한 말도 아니다. 그는 그것이 프랑스라는 아무개 나라의 그럴듯한 '제품'이 아니라 프랑스라는 사회에 살았던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획득해온 역사의 성과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회에 전해져 그 사회를 깨우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그것은 반대로도 가능하다. 예들 들어 프랑스가 자랑으로 여기는 자국의 문화가 실은 다른 문화를 침략, 약탈하면서 발전한 바가 크다는 것. 그 과정에서 일제를 능가하는 만행을 저질어왔고, 고도로 발전한 토론문화와 수다문화에도 그런 역사적 오점에 대한 토론은 거의 없다는 것.한국의 문화는, 조선의 문화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에 나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 땅의 문화는 자기를 지켜오면서 만들어간 문화지 남을 침략해가면서 만든 문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화대국이라 자랑하는 프랑스에 전해줄 우리의 소중한 역사적 성과는 그런 것이다.

결국, 문명은 서로에게 스승이다. 우리가 지난 세기동안 너무도 격렬했던 역사적 도전과 격변 속에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우를 저질렀더라도, 그래서 현사회가 결코 사람 살기에 좋은 사회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것을 쓰레기처럼 방치해 악취를 더해가지 말고 거름으로 삼아 인권이 존중되고, (홍세화 선생의 말대로) '홍익인간'과 '중용'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곳으로 만들어가면 되지 않겠는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우리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제발 SM클럽에나 가주기 바란다. 자학은 우울하고 음습할 뿐이지만 정당한 자기비판은 즐겁다. 비젼이 되기 때문이다. 1,2세기 후에,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똘레랑스나 사회정의를 말하듯 홍익인간과 중용을 말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떤가? 그러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 우리사회는 많이 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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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yahan1 2004-01-05 공감(2)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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