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29

12 원불교신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나비되어 날다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나비되어 날다


 원불교신문 [1628호] 2012년 08월 24일 (금)
 이성심 기자 lss@wonnews.co.kr






올해로 해방 67주년을 맞았다. 이번 광복절은 우연찮게도 수요일이다. 15일 낮12시 굵은 빗줄기가 하염없이 내렸다. 우중임에도 사단법인)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세계연대행동의 날 연대집회'를 개최했다. 이날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진행된 수요 집회는 1035차로 특별집회로 열렸다. 매주 수요일 낮 12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과 사과를 요구하는 할머니들의 시위'가 열리는 셈이다.

이와 관련해 17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전시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방문하면서 위안부 삶의 처절함을 알게 됐다.

서울 성산동에 위치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은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이 겪었던 역사를 기억하고 교육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하는 공간이다. 또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전시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대하며 전쟁과 여성폭력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행동하는 박물관이다.

배봉기 할머니를 만나다

박물관 맞이방. 3천 원을 내고 입장권을 구입했다. 입장권 뒷면에는 배봉기 할머니의 사진과 이력이 안내되어 있다.

박물관 측에서는 "요일마다 티켓의 사진이 다르다. 다섯 할머니의 증언이 영상으로 준비되어 있다. 최소 다섯 번은 박물관을 방문해야 한다"고 안내했다.

오늘은 박물관에서 배봉기 할머니의 증언을 듣는 날이다. 그는 1914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남쪽 섬에 가면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일본인의 취업사기에 걸려들어 1943년에 오키나와 도카시키 섬으로 끌려갔다. '빨간 기와로 된 위안소'에서 일본 군인들의 성노예로 몇 달을 지내던 중, 미군의 공습으로 위안소가 불타면서 산 속으로 피난 다니다가 일본군의 취사반에 투입됐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미군에 투항한 일본군과 함께 진지를 나와 미군의 민간인수용소에 수용됐다. 수용소를 나온 후에는 성매매와 온갖 궂은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간신히 살았다. 1975년 지역신문에 사연이 보도되면서 세상에 알려진 후 1991년 77세에 오키나와에서 생을 마감했다.

쇄석 길. 이 길을 따라 역사 속으로 걸어갔다. 전쟁의 포화소리와 함께 거친 돌길을 걸으며 피해자들이 겪어야 했던 전쟁과 고통의 시기에 들어선 것이다. 양쪽 벽면의 일그러진 얼굴 형상과 살고자하는 손바닥이 몸서리 쳤다. 그 맞은편에는 고개 숙인 검은 그림자가 긴 어둠의 터널을 향해 이끌려 가고 있다.

지하 전시관. 전쟁터와 위안소를 배경으로 피해자들의 고통스런 삶이 녹아있는 곳이다. 전시관 벽면에서 그녀의 증언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입장권 뒷면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증언한 영상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때론 울먹이는 목소리로 당시를 기억해 냈었다. 암울하기만 했던 당시의 역사, 그의 목소리를 통해 육중하면서도 힘겨운 역사의 무게감을 느꼈다.

계단을 따라 지하에서 지상으로 오르는 벽, 호소의 공간. 피해자들이 절규하는 고통의 목소리가 사진과 함께 거친 벽 곳곳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 박물관 내부의 추모관.벽돌 사이로 들어오는 밝은 햇살과 사람들의 관심이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치유한다.

"내가 바로 살아 있는 증거인데, 일본 정부는 왜 증거가 없다고 합니까." "한마디라도 진실한 사죄의 말을 듣는 게 소원이죠." "그걸 다 기억하고 살았으면 아마 살지 못했을 거예요." "그 놈들 한 걸 생각하면 보상이라는 것으로도 한이 안풀린다." "원통해서 못살겠다 내 청춘을 돌려다오." "나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여성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어요." 밝은 공간으로 나아갈수록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자신과 같은 일을 다시 겪지 않기를 바라는 호소와 함께 희망의 목소리로 변해갔다.

"우리 역사를 보고 배워서 다시는 전쟁 없는 세상, 폭력 없는 세상을 만들어 주세요."

박물관 2층에서는 전쟁이 낳고 키운 기형적 제도인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관과 운동사관, 생애관, 평화비 소녀상을 만날 수 있다. 가슴 찡한 눈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

특히 2층 베란다에는 추모관을 만들었다. 고인이 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얼굴과 사망 날짜가 검은 벽돌을 채우고 있다. 배봉기 할머니에게 꽃 한송이를 바쳤다.

당시 일본군 위안부가 된 여성들은 한국, 대만,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미얀마, 동티모르 등 일본에 점령당한 지역과 전선에 동원됐다. 그 수는 20만 명을 비롯해 여러 추정치가 있으나 관련 자료가 전면 공개되지 않아 정확한 수치를 알기 어렵다고 한다. 한국인 생존 여성들의 경우 동원 당시 나이가 11세의 어린 나이에서 27세 까지로 보고되고 있다. 14~19세 때 동원된 경우가 가장 많았다.

정대협 허미례 간사는 "우리나라에 현재 생존자는 60여 명이 있다. 그들이 매주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시위를 하는 것은 전쟁범죄 인정, 진상규명, 공식사과, 법적배상, 전범자 처벌, 역사교과서 기록,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 등 일곱 가지 요구사항이다"고 설명했다.

▲ 일본대사관 앞의 평화비 소녀상.

나비기금, 전시 성폭력 여성 희망

정대협에서는 전시 성폭력 여성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나비기금'을 모금 중이다. 전쟁의 한가운데서 무자비한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어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이제 그들이 세상에 역사의 진실을 증언하며 평화와 여성인권을 외치는 당당한 사람으로 변했다. 이제는 아프리카 내전에서 고통 받고 있는 여성들의 손을 잡아주고 싶어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다. 그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을 받으면 그 돈을 전액 콩고의 전시 중 강간 피해 여성들을 돕기 위해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김복동 할머니는 "열다섯 살에 일본군 성노예가 되어 대만, 남양군도 등 여러 전쟁터로 끌려 다녔다. 지금 나보다 더 딱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위해 앞으로 내가 받게 될 배상금을 써 달라"고 호소했다.

길원옥 할머니 역시 "열세 살에 끌려갔다. 내가 아파봤기 때문에 나와 같은 아픔을 당한 여성들이 얼마나 아픈지 알고 있다. 우리와 같은 아픔을 겪는 여성들에게 힘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들 스스로 '나비'가 된 것이다. 나비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함께 모든 여성들이 차별과 억압, 폭력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날개짓하기를 염원하는 의미를 담은 상징물이다. 나비는 고치를 뚫고 나와야만 세상을 향해 날 수 있다. 마찬가지다. 세상의 편견, 어둠의 공포에 힘겨워하는 여성들이 치유의 과정을 극복하고 벽을 뚫고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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