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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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 -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김태우 (지은이)창비2013-07-27

양장본488쪽

책소개

냉전시기 한국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해당 시기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답습하듯 양극화되어 있다. 2013년 7월 27일로 정전 60주년을 맞게 된 한국전쟁은 그 대표적 사례 중 하나로, 특히 한국전쟁기 미국과 미공군이 수행한 공중폭격에 대한 평가는 더욱 그러하다. 이 책은 한국전쟁기 미공군 공중폭격의 배경과 전개 과정을 분석해 우상화 혹은 악마화되어 있는 미국의 실체를 밝히고 한국전쟁의 참상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국내 최초로 미공군 최하급단위 임무보고서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한국전쟁기 미공군의 공중폭격에 대한 기존 연구들의 주장을 전복해낸 문제적 저작으로, “전쟁 전시기에 걸쳐 미공군은 군사목표 공격에만 역량을 집중했고 민간지역을 폭격하는 따위는 결코 행하지 않았다”는 미국 측 연구자들의 주장을 강력하게 반박한다.

한국전쟁기 미공군 문서 10만여장을 수집·분석하고 당시의 러시아, 중국, 남북한 문서로 교차분석을 진행한 치밀한 연구의 결과인 이 책은 “한 연구자의 자료수집 능력과 문제의식이 도달한 진실탐구의 깊이와 수준을 동시에 보여준다”(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점에서 한국전쟁 연구의 획기적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목차
책을 펴내며

제1부 서막
1장 폭격의 역사: 개관
2장 일제시기 조선인과 공중폭격
3장 냉전과 공중폭격

제2부 북폭
4장 정밀폭격
5장 북폭, 그리고 논쟁의 시작
6장 북한의 피해와 대응

제3부 평범한 임무
7장 폭격의 구조
8장 흰옷을 입은 적들
9장 남한지역 대량폭격

제4부 초토화정책
10장 초토화정책의 결정
11장 불타는 눈밭

제5부 협상하며 죽이기
12장 기계와 인간의 전쟁
13장 항공압력전략

맺음말: 극단의 기억을 넘어 평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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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김태우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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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대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이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과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거쳐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 『평화인문학이란 무엇인가』(공저) 『폭력이란 무엇인가: 기원과 구조』(공저) 등이 있다. 강만길 연구기금과 김진균상을 수상했다. 미래 한반도 거주민들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역사학의 내용과 방법론을 고민하고 있다.
최근작 : <냉전의 마녀들>,<쟁점 한국사 : 현대편>,<쟁점 한국사 세트 - 전3권> … 총 7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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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수영장 도서관>,<안과밖 제50호 - 2021년 상반기>등 총 2,703종
대표분야 : 국내창작동화 1위 (브랜드 지수 2,119,035점), 청소년 소설 1위 (브랜드 지수 956,774점), 여성학/젠더 1위 (브랜드 지수 147,026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냉전시기 한국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해당 시기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답습하듯 양극화되어 있다. 2013년 7월 27일로 정전 60주년을 맞게 된 한국전쟁은 그 대표적 사례 중 하나로, 특히 한국전쟁기 미국과 미공군이 수행한 공중폭격에 대한 평가는 더욱 그러하다. 이 책은 한국전쟁기 미공군 공중폭격의 배경과 전개 과정을 분석해 우상화 혹은 악마화되어 있는 미국의 실체를 밝히고 한국전쟁의 참상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김태우(서울대 HK연구교수)의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은 국내 최초로 미공군 최하급단위 임무보고서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한국전쟁기 미공군의 공중폭격에 대한 기존 연구들의 주장을 전복해낸 문제적 저작으로, “전쟁 전시기에 걸쳐 미공군은 군사목표 공격에만 역량을 집중했고 민간지역을 폭격하는 따위는 결코 행하지 않았다”는 미국 측 연구자들의 주장을 강력하게 반박한다. 한국전쟁기 미공군 문서 10만여장을 수집.분석하고 당시의 러시아, 중국, 남북한 문서로 교차분석을 진행한 치밀한 연구의 결과인 이 책은 “한 연구자의 자료수집 능력과 문제의식이 도달한 진실탐구의 깊이와 수준을 동시에 보여준다”(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점에서 한국전쟁 연구의 획기적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전쟁사 연구의 새로운 이정표이자
미국 측 연구에 대한 대한민국 젊은 역사학자의 강력한 반론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은 독창적인 문제의식으로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기존의 연구경향을 넘어 지금까지 한국전쟁사 연구에서는 없었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다. 기존의 관련 연구들은 한국전쟁기 미공군 작전의 성과만을 긍정하는 방향과 무차별적 공중폭격의 비인도적 성격만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에 저자는 “전쟁 전시기에 걸쳐 미공군은 군사목표 공격에만 역량을 집중했고 민간지역을 폭격하는 따위는 결코 행하지 않았다”라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고, 군사적 목표물 공격을 지향한 참전 초기 ‘정밀폭격정책’의 실상과 해당 정책에서 벗어나 ‘무차별폭격’으로 귀결된 배경과 과정을 냉철하게 짚어본다.
이를 위해 저자는 2000년을 전후한 시점부터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NARA)와 미공군역사연구실(AFHRA)을 통해 공개되기 시작한 한국전쟁기 미공군 문서 약 10만여장을 수집?분석했고, 당대의 러시아, 중국, 남북한 문서와의 교차분석을 통해 전쟁기 유엔 측과 공산 측 주장의 신빙성을 검증했다. 특히 저자가 면밀히 검토한 문서들은 미공군 조종사의 일일임무보고서 단위의 하급문서였다.
하급문서를 살핀 까닭은 한국전쟁기 미공군의 민간지역 폭격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논저의 경우(대표적으로 로버트 F. 푸트렐), 미군과 워싱턴의 고위층 인사들이 작성한 정책문서를 근거로 제시했고, 전쟁 초기부터 무차별폭격이 가해졌다고 강하게 비판하는 논저의 경우(대표적으로 브루스 커밍스, 존 할리데이), 대부분이 한국전쟁 당시 미국과 유럽의 언론기사들을 주요한 근거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의 논저에는 해당 주장을 제대로 검증해줄 실제 폭격 사례에 대한 세밀한 분석이 배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의 저본이 된 저자의 박사논문(서울대 국사학과)은 발표 당시 “과거사 정리와 관련하여 한국근현대사 연구자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성과”라는 호평으로 ‘강만길연구기금’을 받는 등 큰 화제를 낳았다. 저자는 해당 논문을 기초로 하여, 폭격 주체인 미공군 조종사들의 개인정보에서부터 사상에 이르는 종합적인 분석과, 미공군의 폭격이 대량학살 양상으로 나아가는 데 직접적인 원인이 된 ‘초토화정책’과 ‘항공압력전략’에 대한 연구를 더해 이 책을 완성했다.

한국전쟁기 미공군의 폭격정책: ‘군사목표 정밀폭격’에서 ‘초토화정책’으로

이 책은 비행기 발명과 함께 시작된 공중폭격 역사에 대한 개론과 한국전쟁기 공중폭격의 주체인 미공군의 설립과 공중폭격정책 형성과정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다룬 제1부 ‘서막’을 시작으로, 북한과 남한 전역에서 이루어진 폭격의 실제 사례를 면밀히 검토한다. 그리고 한국전쟁 초기 북한지역 전략폭격과 북한의 대응을 그린 제2부 ‘북폭’, 한국전쟁 초기 미공군의 남한지역 민간인 공격의 배경과 양상에 대한 제3부 ‘평범한 임무’, 1950년 11월 북한지역의 모든 도시와 농촌을 불태워버리기로 결정한 ‘초토화정책’의 배경과 진행과정에 대한 제4부 ‘초토화정책’, 그리고 정전협상이 중국과 미국 간 세력전으로 더디게 진행되는 사이 꾸준히 계속된 폭격, 북한주민들을 죽음의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철도차단작전과 항공압력전략의 성격에 대해 분석한 제5부 ‘협상하며 죽이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을 통해 저자는 미공군이 초기에 ‘정밀폭격정책’을 지향했음에도 ‘무차별폭격’의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상세히 규명하고, 무차별폭격으로 전이한 미공군의 공중폭격 양상과 정책 변화를 체계적으로 분석한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49년 미국에서는 전략폭격의 무차별적 성격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게 일고 있었다. 때문에 미공군은 향후 전쟁에서 순수 군사목표만을 폭격한다는 원칙을 엄격히 준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발발한 한국전쟁 초기 북한지역 폭격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미공군은 ‘군사목표 정밀폭격정책’을 준수했다. 그러나 민간인 희생은 불가피했다.
기술력 부족으로 레이더 조준을 통한 폭격은 오폭률이 높았고, B-29기 등의 전폭기는 항속거리가 짧아 목표지역에서 정찰 후 폭격을 수행하기가 어려웠으며, 전폭기를 목표지역으로 안내.통제하는 전술항공통제씨스템은 불안정했다. 더불어 착륙시 안전을 위해 일단 탑재된 폭탄을 모두 소진해야만 했기에 조종사들은 짧은 시간 내에 육감과 우연, 자의적인 판단에 의지해 표적을 식별.공격해야만 했다. 이러한 기술적인 요인에 더해 저자는 기존 연구를 살펴 폭격 수행자인 미공군 조종사들의 출신계급, 교육 정도와 참전 목적 및 동기, 미공군 내 문화 등을 입체적으로 분석했다. 또한 미공군의 폭격현장 피해분석 보고서를 살펴본 결과, 폭격목표에 대한 피해만을 다루고 해당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는 분석 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폭격 성과에 대한 군의 인식 역시 민간인 희생을 야기한 원인이었음을 밝혔다.
이후 남한지역까지 확대된 공중폭격은 이러한 상황에 전쟁에서 최대한 빨리 승리하려는 전술적 목표까지 더해져 무차별폭격 양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전황이 악화되자 1950년 11월 5일 맥아더는 미공군 사령관들에게 북한 민간인들이 거주하는 도시와 농촌지역 자체를 군사적 목표로 간주하고 소이탄으로 불태워 없애버리라는 공세적 명령을 하달했다. ‘초토화정책’의 시작으로, 더이상 후방이란 없었다. 정전협정이 중국과 미국 간 이해다툼으로 지연되면서 민간인 피해는 지속적으로 늘어만 갔다. 그리고 1953년, 미공군은 ‘항공압력전략’이라는 새로운 공군전략을 실행하게 된다. 이는 공군력에 가해진 기존의 정치적?군사적 제한요소를 해체시키고, 오히려 공군력을 ‘정치적 압력수단’으로 직접 활용하는 새로운 개념의 공군전략이었다. 북한군에는 치명적인 철도차단작전이 개시되고, 극동공군의 공군력을 ‘파괴’작전에 집중시켜 정전체결을 불과 2개월 앞둔 시점에서는 파괴의 정도가 최고치에 달했다. 미공군은 이미 초토화된 땅에서 민간인을 포함해 적의 전쟁수행 의지를 꺾기 위해 교통을 차단하고, 식량 생산수단인 저수지와 전답을 폭격했다.

‘위생 처리’되지 않은 공중폭격 기록의 증언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은 미공군의 기록으로 그들의 공중폭격정책을 밝히는 명민함이 돋보이는 책이다. 또한 실제 폭격을 수행한 조종사들의 무미건조한 기록 속에서 이 땅의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와 분노, 무고한 죽음을 생생하게 읽어낸 저자 특유의 예민한 감성이 빛난다.
이 책에 풍부하게 실린 실제 전폭기 조종사들의 임무보고서들은 한국전쟁 초기 남한지역에서조차 민간지역 폭격이 매우 ‘일상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미군 측의 용어를 빌리자면, 문서들은 하급문서로서 “위생 처리된”, 즉 적절히 가공된 자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 극동공군은 문서작성 과정에서 ‘민간지역’을 향한 공격을 ‘군사목표’를 향한 공격으로 표현을 ‘순화’하여 기록하라고 지시해둔 상태였다. 그러나 매일 임무보고서를 작성해야만 했던 전폭기 조종사들은 자신의 임무를 ‘마을’(village), ‘도시’(city), ‘흰옷을 입은 사람들’(people in white: 민간인을 의미)에 대한 폭격으로 여과 없이 표현하고 있었다. 즉 이 문서들은 한국전쟁기 공중폭격이 인도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의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가장 적나라한 자료였다.
공중폭격 기록을 통해 입증해낼 수 있는 사실은 미공군의 민간인 대량학살만이 아니다. 중국 역시 ‘그들을 위한 전쟁’을 수행했음을 엿볼 수 있다. 당시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지도부는 북한지역의 폭격피해가 이미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다고 판단했다. 지칠 대로 지친 북한지도부는 정전협상에서 미국에 커다란 양보를 하고서라도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길 소망했으나 중국의 입장은 단호했다. 당시 정전협상에서는 공산 측의 자동(강제)송환원칙과 미국 측의 자원송환원칙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고, 중국은 자국의 위신을 지키고자 했다. 폭격피해와 관련된 북한지도부의 지속적 호소에도 불구하고 전쟁포로 논쟁은 15개월이나 계속됐고, 그사이 미공군의 항공압력전략은 대규모 민간인 희생을 낳았다. 조선인들을 돕기 위한 전쟁이라는 중국의 이른바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의 실체 역시 반증된다.

한국전쟁 정전협정 60주년. 하지만 한반도의 전쟁 위기는 여전하다. ‘제5조 부칙’을 포함해 전체 5개의 조문으로 구성된 군사정전협정의 제반 조항들은 전후 양측의 불성실한 협정 이행에 의해 사실상 와해된 상태다. 북한은 지속적으로 핵실험을 강행하며 동북아의 평화를 위협하고, 미국은 한국전쟁기의 B-29기에 상응하는 B-52 폭격기와 B-2 스텔스 폭격기를 한반도 상공에 출격시켜 긴장을 고조시켰다. 2013년 3월 북한은 ‘정전협정 완전 백지화’를 공언했고, 실제 3월 11일 한.미 대규모 군사훈련인 키리졸브 훈련이 강행되자 “오늘부터 이 땅에서 간신히 존재해오던 조선정전협정이 완전히 백지화되었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상황에 이 책은 한반도에서 전쟁과 공중폭격 문제는 반세기 전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명백한 오늘의 문제이며, 대량학살전쟁으로 귀결된 한국전쟁을 비추어 그같은 비극을 막아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묵직하게 되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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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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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훌륭한 기획입니다. 올 해 정세에도 잘 맞고, 평화를 염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역사를 바로 볼 수 있는 든든한 징검다리가 되어 줄 것입니다. 
책에봐라 2013-08-07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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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책다방때문에 알게 된 책. .
참혹한 전쟁.
불의한 권력자였던 사람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집회에 항상 등장하던
태극기와성조기가
생각난다..  구매
샹그릴라 2017-04-12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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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임무에서 돌아온 조종사들이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가는 여인을 쏴서 그녀의 몸이 터지는 장면을 보았다고 으스대는것을 보았습니다˝ 태평양전쟁때 일본이 당한 융단폭격을 3년간 한반도가 당했는데. 만약 미국이 자신들의 내전이라면 이런 무차별 폭격은 안했겟죠. 한국전의 민간인희생을 알게됨  구매
라벤나 2014-09-10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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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런 쥐xx같은 놈이 책도 안보고 발광이야.....zzippa야 책은 읽었냐.....너 RO멤버냐...  구매
kiki 2013-09-21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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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kiki한테 실수로 공감 눌렀네,공감 하나 취소 ㅋㅋ
일베놈,여기 까지 원정와서 설치는군. 참 굳이 책으로 써서 설명을 해줘도 못 알아 먹는...ㅉ 
zzippa 2013-09-20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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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는 군사전략을 생각하면 이미 항공기의 우수성에 따라 달려있다. 항공기의 우수성에 의존한다는 것은 현대전쟁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개되던 백병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병전ㅇ의 양상은 20세기 걸프전에서 보듯이 완전히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확실하게 못을 박은 사례는 이라크 오사마 빈 라덴 제거작전이다. 항공기로 이용한 적의 기지 타격, 지하기지의 붕괴, 무인 전술기를 이용한 암살, 공중정찰을 위한 조기경보통제기 등, 현대사회 공군력은 전쟁의 우위를 바꿀 수 있는 큰 힘이 되었다.

 

전쟁에서 항공작전은 비단 전투기의 성능만이 아니라 조종사, 정비사, 군사시설을 관리하는 시설인, 공중작전을 지원하는 관제사 등의 역량으로 이어졌다. 공군이 차지하는 전체 군사력에서 인원은 적으나, 공군 장병 및 장비에 들어가는 예산은 엄청나다. 전투기 1대의 가격은 수 백 억에 호가하며, 전투기 조종사 1명 양성하는데 수 십 억이 소요된다. 전투기에 들어가는 각종 무기하고, 전투기를 공중에 보내기 위한 활주로공사는 많은 예산과 공사기간을 요구된다. 서평을 쓰는 본인 역시 공군출신 예비역이고, 활주로를 비롯한 항공작전시설을 유지보수 및 시공을 맡은 건설기술자로 활동했다.

 

한국에서 징병제를 추진하고 있기에 일반 남성들은 육군에 자동적으로 입영하게 된다. 그러나 공군의 경우 지원으로 입대하고, 공군에 많은 부대 및 특기가 있으나, 항공기에 대한 로망 때문에 공군 지원자들이 제법 많다. 물론 항공기를 운영하는 점에서 기지시설이 평지에 위치하고, 지원시설이 타 군에 비해 좋은 편이며, 교통이용도 편리하기에 여러모로 공군에 입대한 장병들은 그런 혜택을 받는다. 공군비행장에 배속 받으면 가장 눈에 보이는 게 역시 비행기다. 한국의 군사공항은 민간공항에 입주하여 활주로를 같이 사용하고 있다. 민간항공기 전용 공항은 군사공항 수보다 적다.

 

비행기를 직접 눈앞에서 나는 장면과 이착륙하는 장면을 보기란 쉽지 않다. 항공기를 탑승할 때 항공기까지 이동할 때 옆에서 보겠지만, 직접 눈앞에서 커다란 항공기가 이착륙하는 모습은 상당히 박진감과 멋진 장관을 보여준다. 그러나 생각하면 항공기는 높은 고도에서 운항하고,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기계이다. 이런 기계가 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공군복무에서 공군의 작전은 1분 1초 먼저 항공기를 이륙시켜 적의 군사기지를 타격하는 것이다.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공군전투기이다.

 

한국에서 공군이 처음 창설되어 운영된 것은 한국전쟁에서다. 한국전쟁에서 북한의 남침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고, 적을 무력화시키는 방도로 당연히 항공기의 운영이다. B-29 폭격기의 등장은 다량의 폭탄을 투하하여 적의 기지를 무용화 시키는 무서운 전략이다. 그러나 폭격의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지금처럼 레이더가 발달하거나 위성에서 실시간적으로 조종사에게 정보를 주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운항거리가 그렇게 긴 것도 아니다. 결국 부정확한 정보와 작전수행 중의 변수는 본래 원하는 방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전을 수행하게 만든다.

 

폭격의 가장 무서운 점은 수 천, 수 만에 이르는 폭탄을 지면에 충돌하여 엄청난 파괴력을 자랑한다. 폭탄이 터지면 우선 열에 의해 화상을 입게 되고, 폭발에 의한 공기압으로 폭풍이 몰아치며, 폭탄에 의해 건물이 붕괴된다. 군사작전지역과 민간인거주시설은 장소와 때에 따라 같이 붙어 있기도 혹은 분리되어 있기도 하다. 한국의 경우 육군을 제외한 나머지 공군이나 해군은 도심지 및 항구, 교통이 용이한 곳에 자리 잡은 경우가 많다. 지리적인 특성과 보급물자의 수급에서 육군과 공군은 한정된 위치에서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도심지 내부에 군부대가 있거나, 혹은 군부대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문제는 전쟁이 발발하면 공격 목표가 되는 장소는 군사기지가 아닌 민간인이 사는 장소까지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폭격의 역사를 본다면 폭격은 단순히 적의 전투력을 마비시키는 것만이 아니다. 민간인들을 폭격할 경우 상대국의 사기가 저하되고 혼란에 빠진다는 점이다. 제 아무리 군인들이 작전을 수행해도, 군인들이 입고 먹는 식량과 의복은 민간인의 생산력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이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킬 경우 많은 군사기지와 더불어 민간공장들도 폭격으로 대파되었다. 민간공장에서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금속, 기계, 화약 등을 다루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는 군인이 아니라 군수물자를 생산하기에 공중폭격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전설적인 패배는 결국 미공군이 떨어뜨린 2개의 핵폭탄이다. 핵폭탄으로 손해본 것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 더 많았다. 전쟁에서 민간인을 가해지는 비인도적인 살상은 국제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일들이다. 그러나 전쟁에서 늘 피해보는 인간들은 군인보다 민간인이었다. 군인에게 정보가 있었고, 저항할 수 있는 무기도 있었지만, 민간인에게 가진 것이란 상황을 파악할 수 없는 순박함이다. 공중폭격에서 민간에게 가해진 잔인함은 보통 윤리적인 의식을 가진 인간이라면 이해불가다.

 

그러나 전쟁에서 가해지는 군사적 이익과 전에 대한 심리적인 압박에서 민간인을 제거하는 것보다 효과적인 게 없었다. 일단 자원을 모울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여 건장한 남성은 징병할 수 있으며, 민가에서 은신하여 적의 눈을 속일 수 있다. 게릴라전법에서 민간인들 사이에 잠복하여 적을 불시에 공격을 가하는 방식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민간인에 대해 무차별적인 살상, 피난민에 대한 공격은 인간의 의식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비윤리적인 영역으로 가버렸다.

 

한국전쟁에서 폭격으로 확실히 북한국은 많은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21세기에 도래하면서 당시 공군력이 없던 북한이 공군력을 가지게 되었고, 언제라도 조종간의 스위치를 누르면 강력한 미사일이 지면을 강타한다. 문제는 지면의 강타가 적의 소탕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북한의 전쟁사를 <폭격>에서 본다면 미공군의 폭격작전은 북한을 정전을 하고 싶게 만든 원인이 되었으며, 현재도 북한의 반미의식이 되게 만든 트라우마였다. 미군정과 미국무부의 비밀문서를 참고하면 당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의식을 충분히 볼 수 있다.

 

미군이 한국전쟁에서 수행하던 방식과 의식수준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상대로 폭격하던 양상과 거의 흡사했다. 인종주의적인 마인드와 공군조종사들의 자질이 일반 육군과 해군보다 못했다는 점이다. 현재 공군 조종사들은 우수한 두뇌와 신체를 소유한 인재이나, 당시 한국전쟁에서 미공군의 조종사는 학력이 매우 낮고, 인문사회적 지식이 적었으며, 위스키를 언제나 입에 달고 다닐 정도로 방탕했다. 체계화된 전투조직보단 개인의 출세와 이익에 치중한 나머지 군인의 본분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중에 하나가 민간인 폭격에 대한 부분이다.

 

분명 적군에 대한 살상과 타격은 군사작전에서 추구하는 제일의 목표다. 그런데 민간인들에게 퍼붓는 총격과 폭탄은 군사작전이 아니라 단지 학살에 불과한 일들이다. 여름철 하얀 삼베옷을 입은 마을부락에 폭탄을 투하하는 사진과 군사문서 기록을 <폭격>에 접하면서 전쟁의 섬뜩한 모습을 다시금 느낀다. 폭격의 잔혹성은 철학자의 서적에서도 나온다. 20세기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자유주의 철학자 선구자로 손꼽히는 존 롤즈는 2차 대전 시 장교로 출전하여 개인적 회고를 <만민법>에서 다룬 적이 있다.

 

이때 롤즈는 폭격이 가해지는 지역의 민간인에 대한 인권이 무참하게 외면된 점을 목격했으며, 제 아무리 일본이 군사적 저항이 심해도 미군에 의한 원자 폭격은 옳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권력이 없이 폭압적 조치에 의해 움직이는 신민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점이다. 물론 어떤 혜택과 지위를 보장받았다면 그 죄를 물어야 하겠으나,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강요로 움직이는 인간에게 과연 죄를 물어야 하는가이다. 그 인간들도 압제의 의한 희생자였던 것이다. 전쟁은 이런 인간의 기본적 원칙을 무시한다. 단지 적을 더 죽이거나 어느 순간 전쟁이란 이름 아래 인간은 전투기계로 변하고, 오늘 폭탄을 민간인이든 적에게 투하하는 것은 자동차정비소의 노동자가 차의 타이어를 교환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전쟁은 인간의 도덕심을 무디게 만들며, 인간에게 기만적인 자세까지 만들어 버렸다. 민간인을 폭격한 조종사들은 모두 적의 스파이 내지 적의 은신처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북한의 조사만이 아니라 세계피해조사단이 방문한 결과 죄 없는 민간인이 다수였고, 대부분 어린아이, 여성, 노인 등과 같이 폭력에 저항할 수 없는 약자들이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수행한다고 하나, 그 이면에 가려진 민간인의 희생은 한국전쟁의 신화를 창조했다. 만약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라면 민간인들이 그 가치의 수혜자이다.

 

국가와 정부는 다르다. 정부는 국가의 한 부분이고, 국가의 구성이 되는 것은 국민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입장은 국민이 아니라 정부에 의해서다. 미정부나 한국정부가 보여준 행태는 국민의 국가가 아니라 단지 어느 특정집단의 이익을 위한 국가였다. 20세기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1차 및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베트남전쟁과 더불어 잊을 수 없는 전쟁이다. 이 모든 전쟁의 슬픔은 가장 많이 피해본 사람은 민간인이란 점이다. 무기체계가 발달되면 전쟁의 신속하게 끝낼 수 있지만, 전쟁의 후속조치는 신속하지 못하다.

 

전쟁의 시기에 타국을 점령한 군부대가 그 나라의 국민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잘 생각해야 한다. 설사 그 국가의 정부가 독재자 내지 전제군주라고 할지어도 국민들의 시선은 다른 방식으로 볼 필요가 있다. 16세기에 이르러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전쟁을 일으킬 경우 점령국가의 국민에게 공포를 심어줄망정 그들의 안정된 생활을 파괴하면 안 된다고 했다. 칼과 방패를 두르며 싸우는 시대에는 농작물을 건들지 못하도록 했다. 어째 보면 식량의 보급에서 장거리 운송이 힘들기에 정해진 조치다. 현대전은 수송이 언제라도 가능할 정도로 교통이 발달했다.

 

생산력의 발달은 군수물자를 신속하게 제작하여 내보낼 수 있다. 사람보다 기계에 의한 전투는 백병전이 아닌 첨단장비의 성능차이에서 판가름이 난다. 그래도 군인보다는 민간인의 피해가 심각하다. <푹격>에서 제시한 것처럼 21세기는 분단이 60년을 지나가고 있다. 앞으로 40년 후면 100년이 된다. 한국과 북한이 같은 민족이라 하나, 그것은 심리적으로 같은 동족이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친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문화적인 동물이기에 살아온 체제와 경제, 사회 등이 존재하므로 이미 북한과 한국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책에서 1952년 폭격으로 가족을 잃은 북한주민이나 혹은 최근 전쟁박물관에 방문한 북한주민이 본 폭격의 참상은 모두 피해자의식을 만들어낸다. 즉 역사라는 것은 어느 정치적 입장에서 하나의 내러티브(Narrative)를 생성시킨다. 내러티브는 평화로운 세계에 적의 침입으로 어떤 해결사가 등장해 해결한다는 패턴적인 요소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흔히 우리가 보는 전쟁 혹은 액션장르가 눈에 선한 스토리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폭력이란 이름을 마치 정당한 것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우리의 가장 큰 착각이 있다. 분명 북한은 독재국가이고, 북한 국민들은 가난과 압제에 시달리고 있어도 대부분의 북한주민들은 군사교육을 받는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예비군제도가 있어서 만약 전시에 준하는 상황이 발령되면 예비군들은 소집되어 전쟁에 투입된다. 한국의 남성에서 현역(여군, 보충역)과 예비역(민방위)을 포함하면 인구의 30% 정도 될 것이다. 한국에서 전쟁병력이 이 정도면 군국주의적인 정치체계를 가진 북한은 이보다 더 많은 수의 군사력을 보유한 셈이다. 결국 전쟁이 나면 북한 주민 대부분이 전쟁에 동원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인명살상이 일어날 것은 분명한 일이다.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과 현실적인 관계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폭격>이란 책을 본다면 과연 그 생각을 버릴 수 없을 것이다. 사료를 정리한 부분에서 북한은 미국과 사이좋게 지낼 수 없는 형태가 되었다. 한국 외교정책이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의 관계망에서 형성된다는 점에서 먼저 그 날카로운 증오의 칼날을 해결하지 않으면 정리되기가 어렵다는 생각만 든다. 북한과의 외교문제는 단순히 정치적 이익만이 아니라 국내 경제까지 침체시킨다. 한국의 자본주의 시장이 한국만이 아니라 타국의 자본을 오고가는 점에서 한국이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사라지지 않으면 발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강경론자이 주장하는 북한의 도발도 고려해야 하나, 전쟁이 발발할 경우 과연 누가 가장 피해를 보는지 생각하면 다소 신중할 필요가 있다. 주변 사람들이나 사회생활을 하면 전쟁영화나 전쟁게임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들은 자신이 커맨더가 되어 지휘하는 것으로 생각하나, 막상 전쟁나면 커맨더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모두 졸병이나 혹은 전쟁터에서 무참하게 죽어나가는 행인 A, B 정도만 될 뿐이다. 왜냐하면 폭격기에서 떨어지는 폭탄은 목표물이 되는 대상이 누구냐를 가라지 않고, 있는 그 자리를 파괴시키기 때문이다. 전쟁은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거기에 당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머저리 같은 일이라고 저승에서 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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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비평 2016-02-05 공감(14)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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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서막



1장 폭격의 역사 : 개관



"(공군이론의 창시자로 평가되는) 줄리오 두에는 국가의 모든 자원이 전쟁에 집중된 1차대전의 새로운 전쟁양상에 주목하면서, 지형에 국한되지 않고 언제나 공격에 임할 수 있는 공군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더불어 그는 공군력의 가장 핵심적 요소로 '제공권'의 장악을 강조했다. 두에의 주장에 따르면, 현대전에서 제공권의 상실은 곧 지상작전과 해상작전의 실패를 의미했다. 두에는 제공권 장악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현대 '전략폭격'의 효시가 된 생각들을 최초로 개념화했다." "두에는 적의 저항의지를 말살하는 것이야말로 전쟁의 주요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공군력에 의한 적의 핵심지역(vital centers) 무력화를 강조했다. 두에는 심지어 "군사목표보다 공업목표를 중시해야 하며, 적국의 도시에도 인정사정없이 타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군사작전의 핵심 파괴 대상이란 적 병력이 아니라 오히려 적 점령지역의 민간인들이었다."(28)



# 전략폭격과 전술폭격

1. 전략폭격(strategic bombing) : 적의 전쟁수행능력과 전쟁의지를 없애기 위해 적의 주요 도시나 생산시설, 정치·군사의 중추부 등을 파괴하는 폭격작전

2. 전술폭격(tactical bombing) : 지상부대나 해상부대의 작전을 돕기 위해 실시되는 공중폭격



"1942년 2월 아서 해리스의 영국공군 폭격기사령관 임명은 영국 공중폭격정책의 전환점을 의미했다. 당시 영국정부와 공군은 공중폭격 결과의 미미함에 대해 국내 여론의 심한 질타를 받고 있었다. 영국공군의 사기는 떨어졌고, 공군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수는 날로 증가했다. 처칠은 공중폭격 여론에 내몰렸다. 그로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1942년 초 영국정부와 공군은 마침내 과감한 해결책을 뽑아들었다. 영국정부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정치적으로는 좀더 솔직하고 군사적으로는 좀더 효율적인 '지역폭격'이라는 공중폭격정책을 제시했다. 지역폭격은 '목표구역폭격'(target area bombing)이라고도 불리는데, 명확하게 분리된 다수의 목표를 단일 목표로 취급하는 방법이다. 즉 군수공장이나 항구, 철도조차장 같은 군사 용도 시설과 주변 주거구역 등 시가지 '전체'를 하나로 묶어 군사목표로 간주해 일정 지역을 통째로 융단폭격하는 방식의 폭격작전이다."(35)



"태평양전쟁 당시까지만 해도 미군은 유럽에서와 동일한 정밀폭격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공군과의 공조 속에서 지속되었던 유럽에서의 정밀폭격과는 달리, 일본 군사·산업시설을 향한 정밀폭격은 그 효율성에서 적잖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1945년 1월, 헨리 아널드 미 육군항공대 사령관은 태평양지역에서의 국면전환을 위해 중국과 인도에 배치된 미공군 부대들을 전면 철수하고, 모든 B-29기들을 마리아나기지에 집결시켜 하나의 지휘통제 아래 둘 것을 명령했다. 더불어 조직개편의 일환으로 정밀폭격을 주장하던 헤이우드 한셀을 대신해 커티스 르메이를 제21폭격기사령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미공군의 전략폭격 역사에서 독보적이고 상징적인 인물이 된 르메이는 2차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에 이르기까지 미군의 민간지역 무차별 폭격작전의 상징적 존재로 역사에 기록되었다."(40-1)



2장 일제시기 조선인과 공중폭격



"일본군의 전략폭격은 서구 중심의 공중폭격 역사 서술에서 빈번히 제외되거나 망각되었으나 1937년 게르니카 폭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전략폭격이 같은 해 중국대륙의 주요 도시들에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일본군은 일본의 대만·조선·중국의 저항세력을 향해 무차별폭격을 가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 예로는 1920년 간도출병 당시의 조선인 거주지 폭격과 1930년 대만에서 발생한 항일무장봉기 우서(霧社)사건 진압시 공중폭격 등을 들 수 있다. 간도출병이란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 남동부 간도지방에서 조선인 무장독립운동단체 결성이 급증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일본이 제19사단 시베리아 출병군 등을 간도에 투입한 사건을 일컫는다." "당시 일본군은 폭격의 효과와 관련해 "지금까지 한번도 비행기를 보지 못했던 선지인(鮮支人, 조선인과 중국인에 대한 멸칭)에게 많은 효과가 있었다"라고 평가했다."(47-8)



"일본군은 1910년대 이래 다양한 공중폭격 경험을 기초로 1930년대에는 선진적인 항공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더욱이 1930년부터는 일본산 비행기 시대를 열었고, 미쯔비시중공업 등에서 생산된 각종 신형 폭격기들은 1937년 중일전쟁에서 가공할 위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 발발 시점부터 다음 해 10월 27일 우한(武漢) 점령에 이르기까지 16개월 동안 일본 해군항공대(육군항공대 제외)만 무려 1만대의 비행기를 참전시켰고, 약 3만 5000발의 폭탄과 32만발의 지상 총격용 총탄을 소비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그 이전 시기 동서양을 통틀어 어떤 공중폭격 양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 공군력의 발현이었다.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는 「전전긍긍한 남경시민, 공습 후 침묵의 일야(一夜)」 「비행대는 적 후방시설 폭격, 상해전선 공육군 활약」 같은 화려한 제목의 신문기사들이 단 하루의 예외도 없이 일본의 공군력을 찬양하고 있었다."(48-9)



3장 냉전과 공중폭격



"(전후 수립된) 합동참모본부의 비상전쟁계획은 유럽지역 적극공세와 극동지역 전략방어라는 큰 틀 속에서 '공군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소련에 대응하고자 했다. 미군은 이러한 전쟁계획하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제어할 수 있는 소련 주변부 공군기지 확보 문제에 당면하게 되었다. 1945~46년 중국 서부지방과 이탈리아의 공군기지들이 미국의 전쟁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공내전 상황과 중공군의 진격으로 인해 중국의 공군기지는 고려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이탈리아 또한 소련 공격에 대한 취약성 때문에 합참의 계획에서 빠지게 되자 합참은 새로운 지역들을 미군 전쟁계획의 주요 거점으로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1947년 합참은 일본과 류큐열도를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제어하기 위한 주요 공군기지로 선정했다. 더불어 미국의 여러 주요 인사들은 류큐열도에 위치한 오키나와를 극동지역 전략방어의 거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71-2)



1948년 6월 8일 벌어진 독도폭격사건에서 한국전쟁과 관련한 사실들을 짚어보면 "우선 냉전 초기 독도폭격훈련은 소련과 북한을 향한 미군의 '위력과시용'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적시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독도폭격사건이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의미심장하게 읽히는 대목 중 하나는 대규모의 민간인 희생에 관한 부분이다."(78-9) "2차대전기 일본인 혹은 아시아인에 대한 미국의 인종주의적 편견은 현재 학계에서도 통용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독도폭격사건이 2차대전 종료 후 불과 3년 뒤에 발생했다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처럼, 독도폭격사건 2년 후에 발발했던 한국전쟁 중에도 아시아인을 향한 미군의 인종주의적 편견은 결코 현격하게 줄어들지 않았다." "우리는 한국전쟁 발발 불과 5년 전 극동지역에서 무차별 대량폭격을 수행했던 주체들이 자신의 무대를 고스란히 한반도로 옮겼을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82)



제2부 북폭



"1950년 7월 7일 전선에서 북한군의 전황은 겉보기에 상당히 낙관적이었다. 7월 5일 북한군은 오산에서 미 지상군과 최초로 교전하여 그 병력의 3분의 1을 몰살시키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기까지 했다. 기존 학계의 한국전쟁 서술에 따르면, 당시 북한지도부는 승리의 축배를 들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당대 소련 문서에서 보듯, 김일성을 포함한 북한지도부는 소련대사 앞에서 자신의 불안과 당혹감, 좌절감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당대 소련 문서를 통해 알 수 있는 전쟁 초기 북한지도부의 불안과 좌절의 표면적 원인은 전쟁 초기부터 본격화된 미공군의 북한지역 대량 폭격 때문이었지만, 좀더 근본적으로는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전면적으로 전쟁에 개입한 미국의 결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는 그들의 식민지기(期) 경험을 통해 획득한 다양한 공중폭격 관련 지식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86-7)



4장 정밀폭격



북한지역 공중폭격을 수행하기 위해 1950년 7월 8일 창설된 "극동공군 폭격기사령부의 전쟁 초기 주요 임무는 북한군의 전투력에 기여하는 북한지역 산업시설과 군수창고, 유류저장소, 한강-삼척 라인 북쪽의 도로·철도·항만과 항공시설 등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즉 한강에서 압록강 사이에 있는 북한군 수송망을 차단하고, 북한군 병참보급에 도움을 주는 산업시설을 파괴하는 것이 폭격기사령부의 주임무였다." "한국전쟁 초기 극동공군 폭격기사령부의 북한지역 폭격 목표는 거의 모두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다. 폭격기사령부는 북한지역 출격 이전에 목표물을 구체적으로 배정했는데, 대부분은 평양, 원산, 흥남, 함흥, 청진, 나진, 성진 등 북한의 대도시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초기 미공군의 북한지역 폭격이 대도시지역에 국한된 이유는 폭격사령부의 작전 자체가 '차단작전'과 '전략폭격'이라는 2가지 작전개념하에 전개되었기 때문이다."(104)



# 차단작전(interdiction) : 적의 병력과 물자가 전선으로 이동하지 못하도록 적 후방의 교통중심지, 도로, 철로, 병력이동로, 이동병력의 숙소 등을 폭격하는 항공작전



5장 북폭, 그리고 논쟁의 시작



"전쟁 초기 양측의 목표물 인식은 극단적으로 판이했다. 미 극동공군은 군사목표 정밀폭격이라는 폭격정책에 따라, 원산의 조선정유공장·조차장·선착장 등의 목표물을 공격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군 폭격기의 타깃이 5년 전 일본 본토 폭격 당시처럼 도심의 민간지역을 향한다고 주장했다."(117) "원산은 1950년 7월 초부터 약 한달가량 지속된 폭격에 의해 핵심 산업시설과 교통시설의 상당부분을 상실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원산지역 민간인 주택 수백채와 북한주민 수천명이 함께 희생되었다. 미공군은 전쟁 발발시점의 폭격정책에 따라 군사목표 정밀폭격을 모색했으나, B-29기를 이용한 고공폭격은 필연적으로 대규모의 민간인 희생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초기 군사목표만을 정밀폭격했다는 미공군 측 주장과, 도시지역 전반에 무차별 폭격피해를 입었다는 북한 측의 주장은 모두 나름의 근거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119-20)



# 그 외의 폭격 지역 : 흥남·평양·청진·나진·함흥·겸이포·성진



"한국전쟁 초기 B-29기의 폭격양상에서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조종사의 시야가 완전히 가려진 상태에서 진행된 맹목포격이 매우 빈번히 수행되었다는 사실이다. B-29기 조종사들은 기상악화로 인해 목표물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1만피트 이상의 고공에서 대량의 파괴폭탄을 도심 목표물을 향해 투하하곤 했다. 이런 경우 조종사와 폭격수는 매우 세밀한 목표물 판단근거를 지녀야 했는데, 실상 그들은 지극히 초보적 수준의 레이더장치만을 유일한 목표인식의 근거로 갖추고 있었다. 조종사들은 이러한 맹목폭격 방법을 레이더폭격이라 불렀고, 원산과 평양 등의 목표물을 향한 대량폭격에서 이 방식을 빈번히 활요했다. 실상 B-29기는 굳이 레이더폭격이 아닌 주간육안폭격을 수행한다할지라도 필연적으로 주변지역 상당부분을 동시에 파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B-29기의 높은 '오폭률' 때문이었다."(144)



"B-29기 정밀폭격의 수행절차와 위력 및 한계는 한국전쟁 초기 미공군 공중폭격의 역사적 실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본 전제들이다. 미공군은 군사목표 정밀폭격을 정책적으로 분명히 했다. 하지만 이 정책은 사실상 실행 불가능한 목표나 다름없었다. 폭격목표물들이 대부분 도시 인구밀집지역 부근에 위치한 반면에, 폭격을 수행할 B-29기들의 목표물 적중률은 터무니없이 낮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기 미국은 자신의 폭격기들이 군사목표만을 정밀폭격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상 현실과 거리가 먼 수사에 불과했다. 한국전쟁기 북폭에 동원된 수많은 폭격기 조종사들은 대량의 폭탄을 한꺼번에 쏟아부어 타깃 인근의 민간지역 전반을 완전히 괴멸시키는 방식으로 폭격을 진행해야만 자신의 군사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 그러한 방식으로 폭격을 수행했다."(146-7)



6장 북한의 피해와 대응



"1939년 일본군의 충칭폭격을 목격하고 에드거 스노우가 표현한 "완전히 개인적인 증오"는 당대 북한의 사진과 문헌들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1950년 9월 9일 9일 『로동신문』은 미공군의 평양폭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사를 게재했다. "높이 솟았던 선암리 교회당과 고아원 및 기타 문화시설들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폭연 속에서는 잃어버린 가족들을 부르는 비통한 목메인 목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으며, 구호대원들은 이곳저곳에서 무너진 벽돌을 헤치고 어린이와 늙은이들의 시체를 끌어내고 있었다." 폭격 현장에서 아내와 아이를 잃은 김리익은 다음과 같이 미국을 향한 증오를 표현했다. "우리는 원쑤들의 이 만행을 영원이 잊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다하여 골수에 사무친 이 원한을 갚고야 말 것이다." 미공군의 공중폭격은 한국전쟁 초기부터 "누구도 진실로 이해할 수 없는 완전히 개인적인 증오"를 북한 곳곳에서 만들어내고 있었다."(152-3)



제3부 평범한 임무



7장 폭격의 구조



"한국전쟁기 제5공군의 전술항공작전은 기본적으로 미공군의 일반적 전술항공작전 개념 속에서 작동했지만, 한국전쟁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일정한 차별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요컨대 공군의 보편적인 전술항공작전은 크게 제공권 장악, 전선지역 차단, 지상병력 화력지원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중에서 미공군은 일반적으로 제공권 장악을 가장 중시했고, 다음으로 병력과 물자의 이동을 막는 차단작전을 중시했으며, 지상군에 대한 화력지원은 이상의 작전이 완수된 후에 이행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1950년 남한에서는 이러한 단계설정이 상당정도 와해되었다. 북한 공군력이 열악했기 때문에 미공군은 가장 중요한 목표였던 제공권 장악을 단기일 내에 완수할 수 있었다. 또한 지상전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차단작전보다 전선의 지상군에게 직접적인 화력지원을 제공하는 근접지원작전(Close Air Support)이 중시되기 일쑤였다."(170)



"한국전쟁 초기 매우 불안정했던 전술항공통제시스템 속에서 속출했던 미공군의 유엔지상군 공격 사례들은 명백히 '오폭'으로 분류 가능한 사건들이지만, 당시 미공군 전폭기들의 임무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남한지역 도시와 농촌에 대한 폭격은 대부분이 이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수많은 임무보고서들은 미공군 전폭기들이 전술항공작전에서 전선 인근의 촌락들을 애초부터 타깃으로 설정했음을 생생히 보여준다." "노근리사건조사반은 노근리사건 발생을 전후한 시점의 미공군 전폭기 임무보고서들을 전반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적잖은 당혹감과 충격 속에 해당 결론에 도달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당대 미공군 전폭기들의 임무보고서들 대부분이 남한의 도시와 농촌, 혹은 흰옷을 입은 피난민 행렬을 향한 전폭기의 무차별적 공격이 일상적인 임무인 듯 너무도 태연하게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180-1)



"기초교육과 훈련과정에서 기능주의적인 전쟁기계로 육성된 미공군 조종사들의 전시 행동양식은 폭격의 구조와 양상을 살피는 데 중요한 분석대상이다. 과거 2차대전기 상당수의 미군 조종사들이 자신들의 전쟁을 인종우월주의, 군국주의, 광신적 민족주의, 팽창주의에 맞서는 숭고한 성전(聖戰)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한국전쟁에 지원한 공군 조종사들은 달랐다. 조종사 선발, 교육, 임무브리핑, 작전 과정에서 정치적 요소들은 오히려 탈색되었다. 조종사들에게 강조되는 제일의 덕목은 오로지 유능한 비행술과 폭격술뿐이었다. 조종사 개개인의 전투 동기부여도 마찬가지였다. 2차대전 당시 나치의 인종주의와 일본군의 진주만공격, 미군포로 학대 등은 비행기 조종사들에게 커다란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한국전쟁에 참전한 조종사들은 개인적 출세와 성공과 같은 원인들에 이끌려 매일 조종간을 잡고 있던 셈이다."(188-9)



"개인적 성공이라는 목표 외에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중요했던 비행 동기부여 요소는 '동료들의 압력'이었다. 조종사들은 일단 공격을 위한 진입대열에 서면 동료들에게 창피한 꼴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투공격을 회피할 수 없었다. 공격을 중단시킬 권한은 대개 전투경험이 풍부한 편대장만이 갖고 있었다. 편대원들은 용맹한 편대장들의 통솔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 출세나 동료들의 압력은 모두 지극히 개인적인 동기부여였다. 2차대전기 조종사들에게 강조된 파시즘의 축출 같은 정치적 구호들은 한국전쟁 과정에서는 완전히 논외였다." "전폭기 조종사들은 그저 정찰병의 지시를 기계적으로 따르거나, 무감각하게 임무 구역 내에 폭탄을 소진하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했다. 그들은 자신의 타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자신의 작전이 어떤 성격의 군사작전이며, 왜 그 같은 공격을 수행해야만 하는지 되묻는 경우가 없었다."(190-1)



"조종사들은 기계로 양성되었지만 결코 완전한 기계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신의 인격과 개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차별적인 민간지역 폭격이나 민간인 공격을 정당화시켜야만 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살상이나 민간지역 폭격과 관련하여 조종사들이 제시한 가장 상투적이고 전형적인 자기정당화 논리는 크게 2가지다. 첫째는 북한군 점령지역의 모든 민간인이 궁극적으로 북한군의 군사활동을 돕는 세력으로서 사실상 적과 동일시될 수 있다는 논리고, 둘째는 군인으로서의 직업정신을 강조하는 논리로, 자신의 민간인 공격을 부대 상관이나 정찰병의 지시에 의한 직업적 업무수행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셔우드의 인터뷰 분석결과에 따르면, 조종사들은 살인으로 이어지는 자신의 공격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전투원과 민간인 사이의 구분을 흐리게 만드는 경향이 강했다고 한다."(192-3)



8장 흰옷을 입은 적들



"전술항공통제반(Tactical Aircraft Control Parties, TACP)이나 모스키토 정찰병의 유도에 의한 공중폭격은 전폭기의 전술항공작전 수행에서 가장 원칙적·보편적으로 활용되는 폭격절차다. 전선지역에 배치된 통제관의 유도에 의한 폭격은 목표물 발견이 힘든 전폭기 입장에서는 매우 효율적인 공격방법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기 전술항공작전의 성격 규명에서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정찰병의 유도에 의해 공중폭격을 실시하는 경우, 일단 공격지시가 하달되기만 하면 모든 전폭기 조종사는 공격지점의 적 병력이나 민간인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진행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기 미공군이 직접 작성한 수많은 임무보고서와) 전쟁 중 실시된 조종사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실제 전폭기 조종사들은 연료부족에 따른 심리적 압박감 때문에 전술항공통제반이나 모스키토 정찰병의 공격지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반문하지 않고' 공격을 실시했다."(198)



적 병력이나 보급품의 존재를 전혀 확인할 수 없는 민간지역에 대한 무차별적 '시험폭격'에 대해 증언한 "전폭기 조종사들은 대낮에 전선 인근의 북한군 병력을 찾아내는 데 많은 곤란을 겪었다. 빠르게 비행하는 전폭기 내에서 산속에 은신한 적을 찾는 일은 어려웠다. 이런 까닭에 미공군 조종사들은 점차 적 병력이 거주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특정지역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투하하는 것을 점차 당연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같은 '의심지역 시험폭격'에서 민간인 거주지역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다수의 조종사들은 오로지 자신의 '육감'(hunch)에 의존해 남한의 도시와 농촌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조종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빠른 시간 내에 적 병력을 찾아내 살상하는 것뿐이었다. 이들은 네이팜탄 투하나 기총소사로 인한 시험적 공격으로 인해 해당 지역의 민간인이 다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205-7)



9장 남한지역 대량폭격



"미 극동공군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B-29기를 북한지역 전략폭격과 차단작전에만 활용할 예정이었으나, 지상전의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자 B-29기를 남한의 지상군 '교전지역'까지 불러들였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는 지상군의 수세상황에 맞서 공군의 근접지원작전을 매우 강조했다. 특히 파병시기가 가장 빨랐던 미 제24사단이 위험에 직면하자 7월 9일 맥아더는 B-29 중폭격기 전부를 출동시켜 악전고투하는 지상군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폭격기사령부 B-29기들의 근접지원작전이 절정에 이른 시점은 1950년 8월 중순이었다. 8월 중순 북한군은 낙동강전선을 돌파하여 부산을 점령할 목적으로 낙동간 북안의 경북 칠곡군 왜관읍 주변에 병력을 결집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8월 13일 극동공군사령관을 자기 사무실로 불러 적의 대병력이 집결하고 있는 지역을 B-29기 '전부'를 동원하여 융단폭격하라고 지시했다."(229-30)



"극동공군은 1950년 7월 한강 남안을 따라 최초로 폭격선을 설정했는데, 이 폭격선이 유엔군 후퇴와 함께 결국 낙동강 인근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스트레이트마이어는 조종사들에게 폭격선 남쪽의 목표물 공격시에는 공격 이전에 적극적으로 목표물을 확인할 것을 요구했지만, 폭격선 북쪽의 목표물에 대해서는 제한없는 공격을 허락했다. 폭격선은 전선의 남하와 함께 남쪽으로 이동했고, 제한없는 공격의 범위는 남한지역 전반에 걸쳐 점차 확장되었다." "(열차, 차량, 탱크, 병력의 이동을 막기 위한) 남한지역 교량 공중공격은 필연적으로 많은 민간인 희생을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포화를 피해 길을 떠난 민간인들이 피난행로의 병목과도 같은 교량에 대거 운집한 상황에서 북한군의 전선 진입을 차단하고자 했던 유엔 지상군과 공군은 피난민들에게 사전 경고 없이 교량을 폭파하곤 했다."(238-40)



제4부 초토화정책



"(중국군의 참전 가능성 여부를 묻는 질문에) 맥아더의 대답은 단호했다. "거의 없습니다. (···) 우리는 한반도에 우리의 공군기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만약 중국이 평양으로 밀고 내려오려 한다면 최악의 대량학살(greatest slaughter)이 벌어질 것입니다." 트루먼은 "대량학살"이 벌어질 것이라는 맥아더의 발언에 특별히 토를 달지 않았다." "중국군이 참전할 경우 최악의 대량학살을 벌이겠다는 맥아더의 발언은 실제 1950년 11월 초 중국군의 한국전쟁 참전이 공식화되면서 구체적인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1950년 11월 5일 맥아더는 북한의 모든 도시와 마을을 군사목표로 간주하는 '초토화정책' (Scorched Earth Policy)을 명령했다. 이후 한국전쟁 발발 이래 워싱턴의 정밀폭격정책에 따라 금지되어오던 B-29기의 소이탄 투하가 한반도 상공에서 현실화되었다. 1950년 겨울, 유난히 추웠던 북한 도시와 농촌의 눈밭 위에 불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268-9)



10장 초토화정책의 결정



"중국인민지원군의 본대는 한국군이 평양을 탈환했던 바로 그날, 10월 19일 저녁부터 안둥(지금의 단둥), 장전하구, 지안을 통해 압록강을 건너 각각 신의주, 삭주, 만포진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최초로 한반도에 진입한 중국인민지원군은 제13병단 예하 4개 군 12개 사단을 포함해 총 병력 26만명에 달했다. 애초 이들은 예상방어지역을 확보하여 일정기간 방어 후 공세로 전환한다는 작전방침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작전방침은 유엔군의 북한지역 전진 방식에 조응하여 급속히 변경되었다." "모든 유엔군 부대들은 성과달성을 위해 마치 국경선까지 경주대회라도 하듯 정신없이 전진하면서 적에게 자신의 취약점을 고스란히 노출시켰다. 중국군은 이렇듯 고립된 상태로 접근해오는 유엔군 부대들을 개별적으로 철저히 "각개격파"해나갔다. 1950년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중국군을 만난 미군과 한국군은 여지없이 그 병력의 상당수를 잃었다."(282)



"(초토화정책을 결정한) 맥아더는 (만주 국경 8킬로미터 이내 지역을 폭격에서 제외한) 합참의 지시에 즉각적으로 반발했다. 그는 만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인력과 물자가 유엔군에 "엄청난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고 위협하며, 합참 명령의 즉각적인 재검토를 요구했다. 같은 날 맥아더는 합참에게 보내는 다른 전문을 통해 병력 증원을 요청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궁지에 몰리거나 여태까지 얻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다시 한번 협박했다. 결국 합참은 "기존에 계획했던 신의주 표적과 압록강 철교 끝부분을 포함하는 국경 인근 북한지역 폭격을 허용한다"고 맥아더에게 전문을 보냈다. 합참은 국경지역 폭격을 허용하는 전문에거 "미국의 국익 차원에서 볼 때 한반도 분쟁을 국지화하는 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표현을 추가했다. 그러나 해당 전문에서 '한국인들을 위해' 민간지역 폭격에 신중해야 한다는 표현은 어디에도 없었다."(290)



11장 불타는 눈밭



"(2차대전기 일본 도시지역에 투하된) M-69는 석유를 기본으로 하는 소이탄인 반면, (한국전쟁기 도시지역에 주로 투하된) M-76은 석유와 금속의 장점이 넓은 방사성(放射性)과 분말금속 소이탄 매개체의 화력상승효과가 합해진 강력한 무기다. M-76 내에는 '굽'(goop)이라는 마그네슘과 원유의 화합물이 들어갔다. 분말 마그네슘과 만난 석유는 진한 농도의 반죽 덩어리로 변한다. 불타는 마그네슘은 으레 강철도 녹일 수 있는 섭씨 1980도까지 온도가 상승하기 때문에, 굽은 목조건물뿐만 아니라 차량·열차·철로·공장 등의 파괴에도 유용한 폭탄원료였다. 마그네슘은 물과 융합되면 폭발성이 있는 수소 등의 가스를 형성시키기 때문에 진화도 어렵다. 불타는 마그네슘은 밝은 불꽃을 내며 인체에 해로운 흰색의 산화마그네슘 연기까지 형성시킨다. 신의주폭격 사진에서 유난히 하얗던 연기는 산화마그네슘의 존재를 증명한다."(303-4)



"미공군은 극도로 인화성이 강한 소이탄을 도시지역에 투하한 후, 화염이 수일 동안 불탈 수 있도록 (도시주민들을 목표로 삼은) 기총소사를 쏟아부으면서 진화작업을 방해했다. 진화작업의 방해를 위한 또다른 활동은 소이탄 투하 직후의 도시 전지역에 대한 시한폭탄 투하였다. 국제연맹 조사단은 미공군 폭격기들이 주로 소이탄 투하 후에 시한폭탄을 투하했다고 주장한다. 조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시한폭탄은 다양한 시간대에 폭발했는데, 낙하 후 20일 이후에 폭파하는 것들도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1950년 8월과 11월 극동공군은 남북한 도시의 민간인을 대상으로 비인도적인 시한폭탄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했던 것이다. 작전은 민간인을 희생시키고 그들 사이에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주요한 목적으로 했다. 북한주민들은 기총소사 및 시한폭탄이 두려워 소이탄의 화염을 감히 끌 엄두를 못 냈다."(307-8)



"제12전폭대대 F-51 전폭기편대들의 임무보고서는 중국군 개입 이후 미공군 전폭기들의 작전양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폭기 편대들은 적 병력이나 보급품을 찾아내기 위해 각별히 애쓸 필요가 없었다. 이들 대부분은 임무구역에서 적 병력이나 보급품을 수색하다가, 적절한 목표물을 발견하지 못하면 해당 구역 내의 마을과 도시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적 병력이나 보급품의 존재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민간인 거주지역은 그 자체로 훌륭한 공격목표였다. 기지로 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마을은 탑재한 무기를 모두 "소진"할 수 있는 좋은 목표물로 인식되었다. 실제 대부분의 전폭기 임무보고는 회항 직전의 마을 폭격에 대한 묘사에서 "공격"(attack)이나 "폭격"(bomb)이라는 표현 대신 "소진"(expend)이라는 표현을 빈번히 사용했다. 전폭기들은 탑재한 무기들을 마을에 모두 쏟아붓고 난 후에야 기지로 돌아왔다."(312)



제5부 협상하며 죽이기



"1953년에 접어들며 미공군은 더이상 값어치 있는 목표물을 찾아낼 수 없는 북한의 도시와 농촌 지역을 향해 폭격의 강도를 한층 더 높이기로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민간지역을 향한 대량폭격을 통해 정전회담장에 정치적 압력을 행사한다는 소위 '항공압력전략'이 더욱더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같은 결정은 대부분 토굴생활로 어렵사리 살아가던 북한 도시와 농촌의 무고한 민중들에게는 또다시 커다란 재앙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폐허 아래 지하 토굴마저도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하게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는 시점까지 생존은 모든 북한주민들의 최대 당면 과제가 되었다. 정전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양측 대표들은 공히 인도주의적 원칙을 내세우며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강력히 호소하고 있었지만, 협상기간 내내 폭격을 견뎌내야 했던 북한주민들에게 2년의 협상 기간은 그저 비인도적인, 생존을 위한 투쟁의 기간에 불과했다."(336)



12장 기계와 인간의 전쟁



"한국전쟁기 미공군 작전사를 다룬 기존의 연구들은 정전협상이 시작된 후 1년여의 기간(1951년 6월~52년 6월)을 철도차단작전의 시기로 정리한다. 실제 이 시기 북한지역 철도차단은 미공군의 가장 중요한 군사목표 중 하나였다. 38선 인근의 전선에서 싸우는 공산군은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식량과 무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전투를 수행하고 있었기에 열차는 가장 중요한 보급품 이동수단이었다." "북한이 화물과 여객 수송에서 (각각 90퍼센트와 62퍼센트를) 철도에 절대적으로 의지하게 된 역사적 배경에는 과거 일제의 대륙침략정책에 따른 대대적인 철도부설정책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제는 철도건설에서 군사적 측면을 중요하게 고려하여 항만집중적이고 남북종단적 성격을 띤 철로를 건설했다. 물론 이 같은 특징은 일본의 전쟁수행뿐만 아니라 북한의 한국전쟁 수행과정에서도 주효하게 활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339-40)



북한지도부는 말 그대로 철도 및 교량 복구사업에 전쟁의 사활을 걸었다. "1951년 8월부터 12월까지의 스트랭글작전과 1952년 3월부터 5월까지의 쌔처레이트작전으로 대표되는 미공군의 집중적 차단작전은 사실상 '기계와 인간의 전투'에 다름없었다. 전선이 고착되고 전투 자체가 1차대전기의 참호전처럼 치열하게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 후방으로부터의 원활한 보급은 전쟁의 사활을 가르는 문제가 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유엔군은 일본과 남한의 후방지역으로부터 보충병력, 물자, 무기를 어려움 없이 공급받을 수 있었지만, 중국군과 북한군은 미공군의 북한지역 폭격으로 인해 후방에서 또다른 치열한 전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후방의 북한주민들도 미공군의 폭격으로 인해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는데, 특히 야간 철도복구와 노무활동에 종사하기 위해 상당수가 밤낮을 바꿔 살아야 했다."(347)



13장 항공압력전략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북한지역 폭격피해에 대해 직접 보고했던 1952년 7월은 극동공군작전사에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7월의 북한지역 공습은 기존의 차단작전과는 상이한 목적하에 수행되었다. 극동공군은 차단작전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기존의 폭격전략에 큰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소위 '항공압력전략'(air pressure strategy)이라는 전략개념이 이 시기부터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항공압력전략은 공군력에 가해진 기존의 정치적·군사적 제한요소를 해제시키고, 오히려 공군력을 '정치적 압력수단'으로 직접 활용하는 새로운 개념의 공군전략이었다."(359) "(랜돌프와 메이오는 '항공압력전략'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철도와 노반을 가장 낮은 수위에 배치했다. 동시에 중요 목표물 리스트를 새로 작성했는데, 그 첫번째는 "보급품"(supplies)이 제시되었고, "후방의 병력과 인력"(rear area troops and manpower)과 "도시와 마을의 건물들"이 주요 타깃으로 추가되었다."(361)



"극동공군은 항공압력전략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공산측 지도부와 주민들에게 심리적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첫번째 타깃으로서 북한지역의 수력발전소에 주목했다. 수풍·부전·장진·허천·부영·금강산 등의 수력발전소들은 일본 최고 기술자들이 20년 이상의 공사기간을 통해 수립한 당대 최고 수준의 시설들이었다. 이들은 한반도 전력의 90퍼센트 이상을 생산해냈다." "1952년부터 미공군 정보보고서들은 북한의 산업시설들이 전국적으로 분산된 지하시설을 통해 재건되고 있다는 분석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극동공군은 지하갱도를 따라 재건된 북한 산업시설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동시에 산업시설 직접 파괴가 아닌 동력원 파괴가 좀더 효율적인 작전으로 부상했다. 동력이 없는 암흑 속에서 북한의 생산시설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었다. 수력발전소의 파괴는 어느새 극동공군의 시급한 해결과제로 부상하고 있었다."(363-4)



"1950년대 미공군 역사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미 제24사단장 윌리엄 딘의 묘사를 인용했다. "공산군의 마을 보급품 집적소(supply dumps)와 '예전에 건물들이 존재했던 흔적만이 남아 있는 눈 덮인 공터'에 대한 딘 장군의 묘사는 이 같은 보급품(supply), 병력(personnel), 통신센터(communication centers) 파괴의 실질적 영향력을 잘 보여준다." 딘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폭격피해의 대상을 그저 "소도시"(towns)와 "마을주민"(villagers)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에 작성된 수많은 미 극동공군의 문서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전후 미공군은 여전히 북한의 도시와 농촌 폭격을 보급품 집적소, 병력, 통신센터에 대한 공격으로 묘사했다. 전쟁기에도 적극적으로 정당화되었던 미공군의 비인도적 군사작전에 대한 묘사가 전후 미군의 공식 역사에서 더욱 치밀하게 합리화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였다."(382-3)



맺음말 극단의 기억을 넘어 평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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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 2019-12-09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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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미공군 공중폭격 공식 기록과 자료를 중심으로 다시 살폈다. 맹목폭격, 무차별폭격, 초토화폭격, 차단폭격, 항공압력폭격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폭격 전략 구현 과정에서 한반도 남과 북의 민간인들은 정말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겪었다. 책 말미, 한반도에 전쟁이 또 일어난다면 그(강대국)들을 위한 것이 될 뿐이라는 경고가 섬뜩하다. b29등의 폭격으로 인한 결과를 찍은 사진 자료가 많은데, 보면서 그보다 더 큰 살상력을 지닌 b52나 b2같은 요즘 폭격기들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새삼 생각했다.
ENergy flow 2016-07-30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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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허모씨와 변모씨는 마음대로 말해도 된다니까 새창으로 보기
영화 국제시장에 대한 말이 많다. 낡아빠진 진영 논리를 가져와 트위터에서 쓸데없는 말이 오가는 꼴을 지켜보는 것은 지겨운 일이다. 나는 보지 않았지만 부모님을 보여 드렸다. 영화를 보신 어머니는 재미있었다고 하시면서 “옛날 그런 고생한 거 보니까 마음이 짠하더라”고 하셨다. 뒤에 덧붙이신 말씀은 “차라리 님아 인가 그거를 예매하지 그랬냐?”라고 하셨다. “엄마 님아 그 영화가 더 짠해요”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내 부모님이 살아오신 이야기를 알지 못한다. 내 부모님 세대 다른 분들보다 늦은 나이인 서른, 스물아홉에 결혼하신 부모님은 아버지의 직장이 있는 곳으로 내려 오셨다. 충청북도 단양에서 경상북도 포항까지. 지금이야 도로도 좋고 자가용도 있어서 3시간 정도면 오갈 수 있는 거리지만 당시 명절을 맞아 포항에서 단양까지 가기 위해서는 어린 내 손을 잡고 나보다 2살 어린 내 동생을 업고 두 분 양 손에 집채만 한 짐 보따리까지 챙긴 후 포항 단칸방에서 포항 시외버스터미널까지 버스를 타야 했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경주 터미널까지 간 후 버스를 타고 경주역으로 가야 했다. 부산에서 청량리까지 가는 비둘기호 완행열차를 타고 단양역까지 5시간을 가야 했다. 밤 8시쯤 도착한 단양역에서 할아버지 댁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할아버지 댁에 오가는 길에 대한 기억은 안동역쯤에서 먹었던 가락국수 정도인 내게 부모님의 고달픔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피곤한 일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세대 갈등에 대해서 많은 책과 기사, 보도와 논평이 쏟아졌다. 십년쯤 된 것 같다. 친구들과 모여 앉은 대화 자리에서도 그런 말을 많이 한다. “우리 부모님 세대가 마지막으로 부모를 봉양하고 본격적으로 손주를 돌보는 첫 세대래”라고. 쉽게 말한다.

추운 겨울, 개울가 얼음을 깨고 시집 식구를 빨래를 해야 했던 이야기, 단칸방에서 아들 둘을 키우며 정신도 없이 곤로에 밥을 하고 연탄을 갈고 천기저귀를 빨아야 했던 이야기 같은 것들은 나는 손톱만큼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세대 갈등은 어쩌면 당연하다.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이다. “아니 말이야~ 멀쩡한 중소기업이나 조그만 회사 놔두고 왜 그렇게 대기업이나 공무원 될려고 그래~ 젊은 것들이 고생을 안 해서 그래!”라고 말하는 기성세대는 지금 청년세대가 겪는 절망과 좌절의 이야기를 알지 못한다. 그렇게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대 갈등은 어쩌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이 책 「폭격」을 읽으며 왜 아직도 박정희를 추억하고 암울하고 뒤틀렸던 60-70년대를 2014년 현재로 부활시키려 하는 세대가 많은 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영화 국제시장을 놓고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는 허모씨나 변모씨가 차라리 이 책을 함께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광범하나 지역에 자그마한 토굴들만이 밀집해 있는 이곳을 놈들은 군사적 목표라고 한다. 죽은 부모와 오빠, 동생의 원쑤인 미제국주의자들에게 어찌 죽음을 주지 않고 참을 수 있겠는가! 죽음은 죽음으로, 피는 피로 갚아야 한다.”

 

 

미 공군의 공중 폭격으로 가족 6명이 모두 사망하고 홀로 남은 안영실이라는 이름의 여성이 종군 기자들을 향해 토로한 내용이다. 책을 읽으며 가장 충격 받았던 내용은 흰 옷을 입은 무리에 대한 무자비한 폭격이다. 그리고 미 공군은 적군인 북한군과 중공군을 향한 폭격, 북한의 군수시설과 보급시설에 대한 폭격에 그친 것이 아니라 북한 주민들에 대한 폭격. 그리고 대한민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참전했다는 명목상의 이유를 집어던진 채 한국의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한국전쟁기 미공군 공중폭격의 배경과 전개과정에 대한 역사학적 분석을 통해 지나치게 우상화 혹은 악마화된 미국의 실체에 다가가고자 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2000년 즈음부터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와 미공군역사연구실을 통해 공개되기 시작한 한국전쟁기 미공문 문서 약 10만 장을 수집·분석했다.” (p.6)


 

이 책은 쉽게 쓰이지 않았다. 저자는 처음 미공군의 한국전쟁 당시 폭격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부터 10년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이것과 관련된 각종 자료와 문서를 분석했다. 10년이 걸렸다. 전쟁이 발발한 지 50년이 지난 후에야 공개된 한국전쟁 당시 문서를 뒤졌다. 책에 덧붙인 주석과 참고문헌의 양이 70페이지에 이르는 것을 보면 그 과정이 얼마나 험난하고 지루하며 골치 아픈 것이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저자와 같은 연구자들이 있어서 나와 같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한국전쟁 당시의 진짜 실체에 한발 더 다가설 수 있으니 충분한 고마움을 표현해도 마땅하다. 단순히 몇 가지 자료와 책을 발췌하거나 끼워 맞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의 이 연구에 대한 가치는 이미 충분히 증명되고 많은 연구자들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한국전쟁에 대한 많은 책이 출간되고 자료가 소개되었지만 이 책을 읽으며 한편으로는 ‘한국전쟁을 연구하고 분석하는 학자들이 너무 게으른 거 아냐~’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시차를 두고 공개된 미국과 옛 소련의 군사기밀들에 접근하는 것이 물론 어려운 일이지만 학자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덤벼들면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아 보이는데, 아직 우리는 한국전쟁에 대해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어느 정신 나간 단체에서 내게 연구비를 지원해 준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럴듯한 논문 한 편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흐흐흐. 말도 안 되는 얘기겠지? 흐흐흐.


 

 


“당대 전폭기 조종사들은 북한군 점령하의 남한지역 도시와 농촌을 향해 일상적으로 폭격작전을 수행했고 흰옷을 입은 민간인 무리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기총소사를 가하곤 했다. 조종사들은 그 같은 자신의 행위를 군사적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정당화했다.” (p.166)

“독도폭격사건이 발생했던 1948년 6월 8일, 오끼나와 카데나기지에서 1분 간격으로 이륙했던 B-29기들은 카미노시마 북단에서 회합하여 11시 47분에 첫 번째 폭격시발점인 울릉도 상공에 도착했다.” (p.77)


 

거대한 폭격기 B-29기는 한반도의 북쪽과 남쪽을 가리지 않았다. 책의 단 한군데만 발췌했지만 책에 실리지 않은 무고한 양민을 향한 폭격은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 기독교가 가장 안정적으로 정착해 성장한 평양지역과 북한의 서북지역 주민들은 미군의 B-29기가 자기 머리 위를 날아다녀도 미국 선교사가 세운 교회당 안에 대피하면 당연히 무사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너도나도 집을 버리고 교회당으로 피신했지만 그곳은 공중에서 보기에 가장 좋은 폭격 대상이었다. 소이탄과 네이팜탄을 가리지 않은 미공군의 공중폭격은 교회당과 민가, 피난민들이 모여 있는 공터를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독도와 울릉도에 대한 폭격, 나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레이더 기술이 온전치 않아 미공군은 자체 관제시스템이나 조종사 각자의 육안식별로 폭격을 가했다. 울릉도와 독도는 그들에게 북한 폭격을 위한 연습 대상이었다. 분명히 작은 배와 민간인으로 식별 했음에도 공중 폭격은 멈추지 않고 이루어 졌다.



 

 

“9시 45분에 모스키토 와일드웨스트와 접속되었다. 배정된 목표는 겉보기에 피난민으로 보이는 약 30명의 사람들이었다. 통제관은 그들에게 공격을 가하라고 말했다. 네이팜탄으로 직격탄을 날렸다. 모두 죽었다.” (p.226)


 

네이팜탄으로 피난민으로 보이는 약 30명의 사람들을 모두 죽인 미공군 조종사의 임무보고서다. 짧은 문장이 더 섬뜩하다. 군인이 사용하는 문서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일상적이었다는 것이 충격적이다. 저자는 이렇게 한국전쟁 당시 무차별 공중폭격이 자행되었던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분석한다.


 

 

 

첫 번째는 전선의 상황이다.

 

 

“미공군은 한국전쟁 초기 급작한 전선의 상황 때문에 다수의 B-29기들을 원래 용도와는 달리 지상군 근접지원작전에 대거 동원했다.” (p.237)

“북한 지상군은 짧은 기간 동안 한반도의 90퍼센트 이상을 점령하며 연이어 승전보를 올리고 있었지만, 실제 38선 이북의 전쟁 후방지역에서는 연일 충격과 공포의 절규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p.148)

 

 

전쟁 초기 북한군은 터진 둑의 물처럼 남쪽으로 밀고 들어왔다. 대통령이 도망친 수도 서울이 북한군의 손에 들어가고 제대로 된 준비조차 하지 않았던 남한군은 남쪽으로 도망치기 바빴다. 제대로 된 준비나 훈련 없이 투입된 미공군은 북한 후방지역 폭격에 집중했다. 전선 후방으로부터의 보급과 수송을 차단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일제 식민지 시기 북한에 집중된 공업화는 미공군의 폭격의 주된 대상이었다. 초기 미군과 미공군 수뇌부의 방침은 정밀폭격이었다. 민간과 중국과의 접경지역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기 B-29기 폭탄 하나로 가로 5미터 세로 150미터 크기의 타깃을 적중시킬 수 있는 확률은 0퍼센트에 가까웠고, 최소한 100-200발의 폭탄으로 대량폭격을 가해야만 50-80퍼센트의 타깃 적중률을 기록할 수 있었다.” 는 웃기지도 않는 적중률로는 정밀폭격이 불가능했다. 이후 지역폭격이라는 이름으로 명령이 바뀌기는 했지만 민간에 대한 피해는 줄일 수 없었다.


 

 


“소각과 파괴를 위한 초토화정책 (scorched earth policy to burn and destroy)을 되풀이하여 강조” (p.284) 맥아더

“다른 소도시들도 시험 삼아 불태우고 파괴하시오 (burn and destroy as a lesson any other those towns)” (p.286)


 

전선이 고착되고 중공군의 참전이 이루어진 이후, 미군은 급박했다. 맥아더는 초토화정책을 지시한다. 이미 도시 기능과 산업 기능이 마비된 북한 지역 곳곳에 대한 초토화가본격화 되었다. 앞서 소개한 안영실이라는 북한의 양민도 이 초토화정책으로 인한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한 공중폭격 당시 피해를 입은 사람이다. 이미 집이 없어 토굴 생활을 하던 사람들에게 이전보다 더 참혹한 피해를 안겼다. 연합군 참전과 미공군의 공중폭격으로 압록강까지 차지한 후 종전을 기대한 미군 수뇌부는 워싱턴을 향해 장밋빛 보고를 남발했는데, 중공군 참전으로 다시 전선은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공중폭격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미군과 미공군 수뇌부 몇 명의 즉각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그들 몇몇의 짧고 성급한 판단으로 인해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된 것이다.


 

 

 

또 하나는 미군이 가진 인종차별주의와 미공군 조종사들의 결여된 인간애다.

 

 

“미공군의 공중폭격은 한국전쟁 초기부터 ‘누구도 진실로 이해할 수 없는 완전히 개인적인 증오’를 북한 곳곳에서 만들어내고 있었다.” (p.153)

“기초교육과 훈련과정에서 인문학적·사회과학적 지식을 배제한 채 기능주의적인 전쟁기계로 육성된 미공군 조종사들의 전시 행동양식은 폭격의 구조와 양상을 살피는 데 중요한 분석대상이다.” (p.188)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일본군에 대해 질려버린 미군은 편집증적으로 동양인을 일본군과 동일시했다는 주장이다. 100% 동의할 수는 없지만 설득력 있는 부분이다. 2차 대전 시 유럽 동부 전선에서 겪었던 살인적인 추위보다 적도 인근 수많은 섬과 정글에서 마주한 살인적인 더위와 기꺼이 자살을 감행하는 일본군의 무모한 군인정신에 질려버린 것일까? 미공군 조종사들이 뻔히 보이는 피난민 무리에, 자신들은 민간인이라며 입고 있던 흰 옷을 벗어 흔드는 무리를 향해 기총소사를 가하고 네이팜탄을 투하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군인이 가진 명령복종의 구조로는 이해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폭력이다. 저자는 당시 미군의 상황에 주목한다. 아직 불안정한 유럽의 정세에 더불어 유럽과 미국 본토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극동의 한반도에 공군을 투입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조종사를 선발하고 훈련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에 관련된 다른 책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해석이다. 워싱턴 당국과 미군은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미공군 조종사들에 대한 특전을 제시했다. 일정 정도의 임무를 완수하면 진급을 보장한다거나 하는 것이었다. 특히, 사관학교 출신이 아닌 조종사들은 격추의 위험도 작고 타 대륙의 전선보다 안정적으로 보였던 한국전쟁에서의 임무가 어렵지 않았다. 출격해 미공군 자체 관제시스템의 명령하달을 완수하면 그만이었다. 조종석에서 바라본 폭격 대상이 민가이고 피난민 무리라도 상관없었다. 발사 버튼을 누르고 기지로 돌아가 임무보고서를 작성하면 끝이었다. 저자의 말대로 기능적인 전쟁기계로 양산된 당시 미공군 조종사들에게 어떠한 인간애를 기대한다는 것이 무모한 일이다. 거기에 더해 동양인에 대한 차별과 증오, 내지는 혐오는 이것을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1950년 11월 5일 맥아더는 북한지역의 모든 도시와 농촌을 소이탄으로 불태워 없애버리라는 공세적 명령을 하달했다. 그리고 워싱턴은 맥아더의 조치를 묵인했다.” (p.7)

“소위 ‘한국인의 자유’를 위해 실시되었다는 미공군의 대량폭격은 이렇듯 남과 북에서 대규모의 한국 민간인 희생을 끊임없이 강요하고 있었다.” (p.331)


 

‘한국인의 자유’를 위해 실시되었다는 폭격은 ‘한국인의 자유’도, 그들이 꿈꾼 북한군과 중공군의 섬멸도 성공해내지 못했다. 무고한 대규모 북쪽과 남쪽의 양민 학살은 전쟁이 멈춘 뒤 60년이 지난 오늘에도 제대로 규명해 내지 못하고 있다.


 

 


“폭격의 주체인 미국은 자신들이 치른 모든 전쟁에서 단 한 번도 공중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희생자 수를 밝힌 적이 없다.” (p.385)

 

 

전쟁은 멈춘 상태다. 미국은 한국전쟁 당시 미공군의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희생자 수가 어느 정도인지 밝힌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 숫자가 얼마 만큼인지 파악은 하고 있을까 싶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으로 행해진 민간인에 대한 폭격이니 말이다. 밝힐 수가 없는 게 아닐까 싶다. 모르니까.


 

차마 서평에 삽입할 수 없었던 사진이 있다. 책에 실린 사진인데, B-29기에서 폭탄을 낙하산에 실어 떨어뜨린 장면이다. 공중에서 촬영된 사진인데 민간인 남성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하산과 그 끝에 달린 물체가 신기했던지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린 채 다가오고 있는 장면이다. 그 사진의 장면 이후가 어땠을지 상상하기도 싫다. 그렇게 큰 비행기와 그렇게 무시무시한 폭탄을 처음 본 사람들은 그냥 그 자리에서 폭탄을 맞았다. 눈앞에서 가족이 죽고 친구가 죽는 장면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북한의 정치체제가 어떤 것인지, 세습 왕조의 코미디 같은 독재가 어떤 것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미제, 미군의 비행기, 그 비행기의 폭탄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이 어떤 것인지는 아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미공군의 폭격을 경험한 남쪽도 마찬가지다. 부모와 친지에 의해 비행기와 폭탄과 죽음과 또 비행기와 폭탄과 죽음을 전해 들었던 내 부모님 세대를 나와 같은 세대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들에게 전쟁은 직접적인 것이었다. 직접 폭탄이 터지는 것과 그 터진 폭탄으로 인해 죽은 사람을 보지 못했지만 그것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기억은 수십 년이 지나도 생생한 것이다. 전해진 이야기를 또 한 번 듣게 된 세대는 그만큼 더 알지 못한다. 이것이 한 번 더 전해지면

그만큼 더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영화 국제시장을 보고 나서 무슨 소리를 해도, 그것은 각자의 자유다. 경험하고 전해들은 이야기는 각자의 경험과 기억에 따라 각색되어 체화되기 마련이니까.


- 접기
슈퍼작살 2015-01-21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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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참상과 야만성을 폭로하는 책 새창으로 보기 구매
전쟁의 참상과 야만성을 이토록 철저하고도 사실적으로 그려낸 책은 지금껏 없었다.

 

피상적으로만 또는 지식적으로만 알던 한국전쟁이 사실은 훨씬 더 참혹하고 지옥같은 시간이었음을 이 책은 전율을 느낄 정도로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 와다 하루키의,  박명림의,  정병준 등의 한국전쟁 관련 서적을 읽었지만, 이 책처럼 한국전쟁이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전쟁이 평범한 민간인(특히 여성과 어린아이들)에게 얼마나 참혹하고 치명적인지 이 책은 실제 사례와 기록으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이 책을 통해 강대국 미국의 실체를 다시한번 깊이 생각하게 된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너무 무겁고 착찹했다. 60여년 전의 전쟁의 포화는 멈췄지만 전쟁기간 내내 끊이지 않았던 폭격의 상황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언제든 다시 전쟁이 발발하면 한반도는 다시한번 그때보다 더한 폭격이 이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랴!

 

이 땅에 전쟁이 아닌 평화가 정착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 접기
응돌 2013-08-19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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