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17

이재봉의 평화세상 북한의 집단주의: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이재봉의 평화세상


북한 집단주의 | 북한 바로 알기
이재봉 2021. 4. 20. 12:37http://blog.daum.net/pbpm21/550
북한의 집단주의: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1.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가 너무 개인주의적 경향으로 흐른다는 소리를 종종 듣게 된다. 남을 의식하거나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풍조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런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혼동해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개인주의가 아닌 이기주의로 치닫고 있다는 뜻이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비슷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이 둘은 크게 다르다. 쉽게 얘기하자면, 개인주의는 말 그대로 '개인'을 중시하는 것이고 이기주의는 '이기' 즉 '자기의 이익'만을 챙기는 것이다. 여기서 개인과 자기는 다르다. '개인'은 집단이나 단체와 반대되는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요, '자기'는 다른 사람과 반대되는 '나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개인주의는 집단이나 단체보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 또는 이익을 중시하거나 앞세우는 것으로, 이에 반대되는 말은 집단주의나 전체주의다. 그리고 이기주의는 남이야 어떻든 나 자신만 생각하고 자기의 이익만을 챙기는 태도나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이에 반대되는 말은 다른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추구하는 생각이나 행위를 의미하는 이타주의다.
개인주의에 대한 오해 또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혼동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는 개인주의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쓰이는 경향이 크지만, 개인주의엔 매우 긍정적인 요소가 있다. 앞에서 개인주의를 "개인의 자유와 권리 또는 이익을 중시하거나 앞세우는 것"이라고 정의했는데, 개인은 '나'뿐만 아니라 '너'와 '그'도 포함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배려한다는 점이다. 즉 나의 자유와 권리 또는 이익을 먼저 추구하더라도, 남의 자유와 권리 또는 이익을 해치지 않으면서 그러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되 남을 배려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남에 대한 배려와 관련하여 다수결제도의 논리도 비슷하다. 다수결제도는 대의민주주의의 기본원칙 또는 필수요인으로 자리 잡았지만, 이에 대한 철학은 널리 알려져 있지도 않고 잘 지켜지고 있지도 않다. 건전한 다수결의 철학은 '다수의 통치 (majority rule)'와 '소수의 권리 (minority right)'가 공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다수가 통치하되 소수의 권리를 배려한다는 것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소수에 대한 배려가 없이 다수의 횡포만 보일 뿐이다.
우리는 서양 특히 미국의 개인주의와 다수결제도를 받아들이면서 다른 사람이나 소수에 대한 배려는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자유와 권리 또는 이익만을 내세우는 이기주의만 키워오고 다수의 횡포만 부려온 셈이다. 세계화를 지향하며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럽고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탕이나 알맹이를 모른 채 껍데기만을 따라하는 짓은 바람직하지 않다. 개인주의를 모욕하지 말아야 하고, 다수결제도를 남용하거나 오용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개인주의가 가장 발달한 나라로 미국을 들 수 있다. 개인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미국에서는 건물을 출입할 때 저만큼 뒤따라오는 사람이 있으면, 일행이나 아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그가 올 때까지 출입문을 잡고 서있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차를 몰고 가다 길을 건너려는 사람을 발견하면, 건널목이 아닌 곳에서도 차를 멈추고 보행자가 먼저 가도록 배려하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우리 사회에서는 바로 뒤에 사람이 따라와도 그를 위해 출입문을 잡아주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뒷사람이 다치기 쉬운데도 말이다. 횡단보도에서조차 신호등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는 길을 건너려는 사람이 보이면 대부분의 운전자들은 속도를 줄이거나 멈추기는커녕 자신이 먼저 지나가겠다며 저 뒤에서부터 경적을 울리고 전조등을 번쩍거리기 일쑤다. 보행자의 자유와 권리가 우선이지만 말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 지정된 주차공간이 많이 있는데도, 몇 분을 걷기 싫어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건물입구에 차를 세워놓는 것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심지어 '주차 금지'라는 표지판이 서있는데도 말이다. 버스나 기차 안에서 주위 사람들이 책을 보든 잠을 자든 큰소리로 통화하거나 떠드는 게 승객으로서의 자유와 권리일까. 이렇게 자신의 이익과 편리를 위해 남에게 손해나 불편을 끼치는 행위는 개인주의가 전혀 아니다. 무례요 병적인 이기주의일 뿐이다. 공공영역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권리와 이익을 해치지 않으면서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확보하는 것이 진정한 개인주의인 것이다.
북녘의 사회와 문화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북녘 특유의 집단주의를 이해해야 하는데, 개인주의를 올바로 인식해야 그에 대비되는 집단주의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로 착각하는 경향이 크기에 이에 대해 조금 장황하게 얘기했다.
 
2.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동서양의 문화를 비교할 때 가장 먼저 그리고 자주 거론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개인주의 (individualism)와 집단주의 (collectivism)일 것이다. 서양에서는 개인주의가 발달해온 반면 동양에서는 집단주의가 발달해왔기 때문이다. 개인주의는 '나'를 내세우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중시하고, 그 반대편에 있는 집단주의는 '우리'를 앞세우며 집단의 화합과 조화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데, 미국은 개인주의 성향이 매우 강한 나라 가운데 하나이고, 한국은 전통적으로 집단주의 성향이 가장 강한 나라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동양에서든 서양에서든 개별적으로는 누구든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성향을 어느 정도 함께 지니고 있겠지만, 시대와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날 것이다. 예를 들어 비교문화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체로 나이가 적은 사람들이 많은 사람들보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크며, 교육 수준이 높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낮은 사람들보다 더 개인주의적이다.
개인주의는 자신과 개인을 우선시하고 중시하기 때문에, 사회나 국가 같은 집단을 개인의 자유와 권리 또는 이익이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크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와 평등의 권리를 가지며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서로 계약을 맺어 사회나 국가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사회계약설과, 인간은 어느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보장하기 위하여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자유주의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의 바탕이 되었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또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개인주의가 크게 발달했다고 할 수도 있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자본주의는 '개인'의 재산권 보호에 최대의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인주의에서는 개인의 독립성과 자립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집단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가 대체로 느슨하다. 그리고 자신의 가치와 욕구 또는 목표 등을 성취할 권리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개인의 자유와 선택권이 사회와 국가 같은 집단이나 그 제도에 의해 제한받거나 통제되는 것을 꺼린다. 따라서 개인주의가 지나치게 발달하면 자유방임주의로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집단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보다는 집단의 화합과 사회의 조화를, 사익보다는 공익을, 개인으로서의 생활보다는 집단 속에서의 생활을 더 중시한다. 공동체주의나 민족주의의 바탕이 되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의무와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발달하면, 전체가 있으므로 개인이 존재한다는 논리에 따라 국가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전체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집단주의에서는 가족이나 직장 그리고 사회와 국가 등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하고, 구성원들 사이의 화합을 강조하며, 개인의 권리와 신념보다는 집단이 요구하는 의무와 규범을 중시한다. 개인의 이익이나 목표보다는 집단의 이익이나 목표를 우선시하기 때문에 집단을 위해 개인이 손해를 보거나 희생을 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 이러한 집단주의에서는 자신의 집단 (우리)과 남의 집단 (그들)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을 긋고, '우리 집단' 안에서는 똘똘 뭉쳐서 '그들 집단'과 대립적 관계를 만들기 쉽다.
그러면 우리 사회의 집단주의 특성은 어떠할까. 한민족은 오랫동안 농경생활을 함으로써 집단주의문화가 잘 발달하였다. 농기계가 크게 발달하기 전까지는 모내기할 때든 추수할 때든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농민들은 마을 단위로 '두레'라는 조직을 만들어 바쁜 농사철에 일을 공동으로 했다. 부모부터 손자에 이르기까지 3대가 한 집안에 사는 게 보통이었고, 특히 농촌에서는 방 한 칸을 3-4명의 식구가 공동으로 쓰는 게 예사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가 잘못을 저지르면 일시적으로나마 집 밖으로 내쫓았는데 집단주의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집단주의문화에서는 집단으로부터 소외시키거나 이탈시키는 것이 벌이란 말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서양에서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방 안에 가둠으로써 벌을 준다. 개인주의문화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박탈하는 것이 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집단주의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분야는 언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주의가 발달한 미국에서는 '우리'보다 '나'라는 말을 자주 쓴다. 예를 들어, '나의 가족', '나의 집', '나의 선생님', '나의 학교'라고 부른다. 심지어 '나의 나라'라고 부르는 것도 쉽게 들을 수 있다. 반대로 우리 사회에서는 '나'보다 '우리'라는 말을 즐겨 쓴다.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도 '우리 집'이라고 말하고, 소속이 다른 사람에게도 '우리 학교'라고 부른다. 사람을 가리킬 때는 더욱 심하다. 형제가 없는 사람조차 남에게 '우리 부모'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씨가 다르거나 배가 다른 형제가 되지만 이를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보다 심한 경우도 있다. '우리 남편'이나 '우리 마누라'라는 말이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라도 함께 관계를 가져서는 안되는 남편이나 아내에조차 '우리'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다. 내가 다른 여자에게 말만 걸어도 못마땅해 하는 '내 아내'도 남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우리 남편'이라고 말하니 얼마나 큰 모순인가. 냉정하게 따져보면 일부일처제 (一夫一妻制) 사회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고 도저히 쓸 수 없는 말이지만, 우리는 이를 자연스럽게 쓰고 있으니 우리 사회의 집단주의문화가 얼마나 뿌리깊이 자리잡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사원이나 직원을 모집하는 광고에 같이 일할 '식구'나 '가족'을 구한다는 문구가 자주 사용되는 것도 우리 사회의 집단주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렇게 강한 집단주의 특성을 지닌 우리 사회가 근대화를 이루면서 점차 개인주의 특성을 갖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고, 경제적으로 개인의 재산권 보호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며, 사회문화적으로 개인주의 특성이 매우 강한 미국의 영향을 받아왔으니 당연한 변화다. 또한 가족규모가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바뀌고 주거형태가 방이 많은 아파트로 변하면서, 아이들도 방 한 칸씩 독차지하며 개인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됨으로써 개인주의가 발달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집단주의가 오랫동안 뿌리내려온 우리 사회가 개인주의화하는 과정에서, 앞에서 얘기했듯이 병적인 이기주의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가치의 혼란을 일으키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1988년 서울올림픽 입장식 때 미국선수단이 줄을 맞추지 않고 행진한 것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 반미감정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운동선수들의 자유스러운 행동을 '무질서한 태도'라고 비난한 것이다. 한편, 남쪽 사람들이 단체로 북녘을 방문해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려면 안내원들이 시간을 지정하며 줄을 지어 모여달라고 하는데, 시간을 잘 지키지도 않고 줄을 잘 맞추지도 않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북녘 사람들로부터 너무 '자유주의적'이라는 핀잔을 받으면서도 말이다. 또한 북녘의 집단체조에서 수백명 또는 수천명이 일사불란하게 기계처럼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환상적이라고 환호하는 사람도 많지만, "고대 노예들 같다"며 혀를 끌끌 차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전통에 따른 집단주의적 성격을 지닌 채 변화에 따른 개인주의적 행동을 지향하는 우리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같은 한민족이지만 남쪽에서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며 사회의 다양성을 추구하고 개인주의를 확산시켜온 반면, 북녘에서는 인민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지향하며 사회의 획일성을 강조하고 집단주의를 강화해왔다. 여기서 주제에서 조금 벗어나지만, 남쪽의 국민은 개인주의적으로 바뀌고 북녘의 인민은 집단주의적으로 된 것이 매우 역설적이라는 점을 밝히고 싶다. '국민'은 국가를 이루고 있는 백성이라는 뜻으로 국가라는 집단을 중시하는 말이므로 전체주의를 비롯한 집단주의사회에 잘 어울리고, '인민'은 개별적인 사람들이 모인 백성으로서 어떠한 집단에 소속된 상태를 내포하지 않으므로 자유방임주의 같은 개인주의사회에 적합한 말이다. 영어의 'people'을 정확하게 우리말로 옮기면 '인민'이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1863년 게티스버그에서 한 말로 널리 알려진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을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라고 번역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좋은 말을 북녘에서 널리 쓴다는 이유로, 남쪽에서는 일제의 잔재가 묻어있고 국가우월주의 냄새를 풍기는 '국민'이라는 말을 억지로 써오고 있으니 속좁고 맹목적인 반공정신에서 언제쯤 벗어나게 될지 안타깝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며 개인주의를 발달시켜온 터에 이제는 그에 걸맞은 '인민'이란 말을 사용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3. 북녘의 집단주의
 
(1) 집단주의 사상 및 원칙
북녘에서는 집단주의를 유별나게 강조한다. 집단주의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채 '우리식 사회주의'를 지향하면서 전체주의에 가까울 정도의 강한 집단주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로동당규약 및 헌법에 집단주의를 명시하고 있을 정도다.
먼저 1980년 개정된 조선로동당 규약을 보면, '당원의 임무'와 관련하여 제 4장 6절에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당원은 고상한 공산주의적 도덕성을 소유하고 조직과 집단을 사랑하며 조직과 집단의 리익을 위하여 개인의 리익을 희생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 개인보다 집단을 앞세우고 사익보다 공익을 중시한다는 집단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을 당규약에 못박아놓은 것이다. 따라서 "자신보다 먼저 사회와 집단을 생각하고 남을 위해 자기를 바치는 것을 고상한 도덕과 참된 사랑으로" 여긴다.
헌법에는 집단주의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명시해놓았다. 1998년 개정된 헌법 제 1장 10조에서 "국가는 사상혁명을 강화하여 사회의 모든 성원들을 혁명화, 로동계급화하며 온 사회를 동지적으로 결합된 하나의 집단으로 만든다"고 했다. 모든 인민은 결속력이 강한 하나의 집단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공민의 기본 권리와 의무'에 대하여 제 5장 63조 및 81조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공민의 권리와 의무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집단주의원칙에 기초한다.... 공민은 조직과 집단을 귀중히 여기며 사회와 인민을 위하여 몸바쳐 일하는 기풍을 높이 발휘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앞에 나오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말은 북녘 집단주의의 특성을 가장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구호다. 이 말은 천리마운동이 시작된 직후인 1959년 초 김일성 수상이 평안남도의 강선제강소를 현지지도하며 그곳 노동자들에게 서로 돕고 이끌면서 집단적으로 혁신을 일으킬 것을 강조하면서 제시한 구호라고 한다. 이 구호에서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라는 앞부분만 있으면 집단의 이익만 내세우는 전체주의를 상징하겠지만,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뒷부분은 개인의 이익을 보장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북녘의 집단주의는 전체주의와 다르다고 주장하는 배경이다. 전체주의는 집단의 이익만 강조하고 개인의 이익이나 자율성을 무시하지만, 집단주의는 집단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을 조화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집단생활은 인민의 요구와 지향을 통일시키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 한정하고 개인생활에서는 개인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최대한 보장함으로써, 집단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을 조화롭게 추구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개인의 이익이란 개인이 집단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이익에 맞추는 개인주의적 탐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참고로 집단의 이익과 개인의 이익에 관해, 2004년 출판된 󰡔우리식 사회주의 100문 100답󰡕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집단의 리익과 개인의 리익이 대립되고 집단의 리익 우에 개인의 리익을 올려놓는 개인주의가 지배한다. 개인주의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불평등과 '부익부, 빈익빈'을 낳고 사람들 사이의 대립관계를 가져온다. 개인주의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사람의 본성적 요구에 배치된다. 사람은 사회적 집단 속에서만 자기 운명을 개척해나갈 수 있는 사회적 존재인 것으로 하여 집단주의를 본성적 요구로 한다. 집단주의의 기본 요구는 집단의 리익을 우위에 놓고 집단의 리익과 개인의 리익을 일치시키며 집단의 리익 속에서 개인의 리익을 실현해나가는 것이다. 집단주의에 배치되는 것은 개인의 리익 자체가 아니라 집단의 리익을 희생시키면서 개인의 리익만 추구하는 개인주의이다.
 
바로 앞에서 "집단의 리익을 희생시키면서 개인의 리익만 추구하는 개인주의"라고 했는데, 이는 잘못이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개인주의는 공익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해치지 않으면서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쪽에서나 북녘에서나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로 오해하거나 '개인주의적 탐욕'과 혼동하는 셈이다.
아무튼 북녘의 설명에 따르면, 사람이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는 데는 집단의 요구와 개인의 요구가 있을 수 있다. 집단의 요구는 사회적 집단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구성원들의 요구이고, 개인의 요구는 사회적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집단을 위해 봉사하며 집단으로부터 보장받을 수 있는 요구라고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요구를 동시에 훌륭하게 실현하는 것은 집단주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개인주의는 자본주의의 산물로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한다며 집단주의가 인간의 본성에 잘 어울린다고 말하는데, 이는 󰡔로동신문󰡕 1994년 11월 4일자에 실린 다음과 같은 "사회주의는 과학이다"는 제목의 논설에 잘 드러나 있다.
 
개인주의는 사적 소유제도의 산물이다. 사적 소유와 그에 의하여 산생되는 개인주의에 기초한 사회는 불피코 사회를 적대되는 계급으로 분렬시키고 계급적 대립과 사회적 불평등을 가져오며 인민대중에 대한 소수 지배계급의 착취와 압박을 동반하게 된다.... 자본주의는 개인주의를 극소수 자본가들의 무제한한 탐욕으로 전환시키고 개인주의에 기초한 사회의 적대적 모순을 극도에 이르게 하였다.... 이것은 개인주의에 기초한 사회가 집단주의에 기초한 사회로 넘어가는 것이 력사 발전의 필연적 요구로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집단주의는 사람의 본성적 요구이다. 사람은 사회적 집단을 이루고 활동하여야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다. 사람은 개별적으로가 아니라 사회 성원들의 집단적 협력에 의해서만 자연과 사회를 개조할 수 있으며 자주적 요구를 실현할 수 있다....
집단주의를 떠난 개인의 요구는 개인주의적 탐욕으로 전환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집단의 다른 성원들의 자주적 요구를 침해하게 되고 집단의 단합과 협력을 저해하게 된다. 집단주의만이 집단의 단합과 협력을 강화하고 집단의 모든 성원들의 창조적 열의를 높이며 집단의 자주적 요구와 개인의 자주적 요구를 옳게 결합시켜 다 같이 원만히 실현해나갈 수 있게 한다. 사회적 집단을 이루고 활동하는 것이 사람의 생존 방식이며 사람의 자주적 요구가 집단주의를 통해서만 훌륭히 실현될 수 있는 것만큼 집단주의에 기초한 사회, 사회주의, 공산주의사회가 사람의 자주적 본성에 부합되는 가장 선진적인 사회이다.
 
북녘의 이러한 집단주의 풍조가 2005년 8월 15일 해방 60주년 및 10월 10일 로동당 창건 60돌을 앞두고 부쩍 강화되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지향하면서 집단주의를 중시하고 확산시키지 않을 수 없겠지만, 2005년 중반부터 이를 강화하기 위한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그 해 6월부터 북녘의 모든 기관과 기업소들에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구호가 일제히 내걸리기 시작했다고 보도되었다.
󰡔로동신문󰡕 2005년 6월 11일자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자본주의 사상 문화적 침투책동은 우리 사회에 개인 리기주의 사상을 퍼뜨리고 서로 돕고 이끌면서 화목하게 사는 우리 인민을 분열, 이간시키기 위한 비열한 책동"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우리는 집단주의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한 우리 인민의 정치 사상적 위력을 약화시키려는 적들의 사상 문화적 침투책동에 언제나 경각성을 높여야 하며 우리 인민의 집단주의적 생활방식과 어긋나는 자그마한 요소도 우리 사회에 절대로 발붙일 수 없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의 사상 문화 침투에 대해 개인보다는 사회와 집단을 우선하는 집단주의 생활로 막아내자고 촉구한 것이다.
이 무렵 집단주의 정신의 강화 및 확산과 관련하여 외부 세계의 비판을 의식한 탓인지, 북녘 당국은 2005년 6월 27일 󰡔우리민족끼리 (www.uriminzokkiri.com)󰡕 웹사이트에 올린 "집단주의와 전체주의는 어떻게 구별되는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집단주의를 전체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은 완전한 날조"라고 주장했다. 앞에서 이미 소개했듯, "집단주의는 집단의 공동의 리익을 존중할 뿐 아니라 집단에 속한 모든 성원들의 리익을 다 같이 귀중히 여기는 사상"이지만, "전체주의는 개인은 전체에 복종해야 한다는 미명 아래 통치계급의 탐욕적인 리익을 위하여 근로인민대중의 리익을 희생시키는 반동적 리념"이라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 "전체주의에서 말하는 전체는 국가주권을 틀어쥔 독점자본가, 대지주, 반동 관료배, 군벌과 같은 극소수 특권계층을 의미한다"며, "집단주의가 반대하는 것은 개인의 리익 자체가 아니라 집단의 리익보다 개인의 리익을 더 기본으로 내세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남을 위해 자기를 바치는 미덕이 꽃피는 사회가 바로 우리 공화국"이라고 했다.
󰡔로동신문󰡕 2005년 7월 1일자에서는 "선군혁명 총진군은 집단주의에 기초한 대중적 전진운동"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통해, "사회주의의 우월성과 생활력의 원천은 집단주의에 있다"며 "미제의 악랄한 반공화국 압살책동을 짓부수고 우리식 사회주의를 견결히 고수하고 빛내여 나가자고 하여도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집단주의 구호를 높이 들고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2005년 7월 2일 발표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및 중앙군사위원회 공동구호에도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구호가 포함되었는데, 북녘 당국은 이 구호가 "사회주의 강성대국을 일떠 세우려는 조선인민의 무궁무진한 힘을 적극 발동하는 위력한 사상 정신적 원동력으로 된다"고 주장했다. 특히 사상혁명과 관련하여, 혁명전통 교양 강화와 우리민족 제일주의 정신을 발양하자면서, "온 사회에 고상한 사회주의 도덕관, 집단주의 생활기풍을 확립하자"고 호소했다. 이처럼 당시 북녘에서 집단주의 정신을 강화하고 확산시켰던 이유는 로동당 창건 60돌을 맞아 경제 혁신을 이루는 가운데 자본주의 사상이 유입되는 것을 막으며 우리식 사회주의체제를 지키려는데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2008년에도 정부수립 60주년을 앞두고 집단주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먼저 󰡔로동신문󰡕, 󰡔조선인민군󰡕, 󰡔청년전위󰡕 명의의 1월 1일자 새해 공동사설은 "사회와 집단,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보다 더 값높은 삶은 없다는 고결한 인생관을 지녀야 한다"면서, "경제관리에서 사회주의 원칙, 집단주의 원칙을 철저히 고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로동신문󰡕은 2008년 1월 11일 "사람의 삶은 사회적 집단의 사랑과 믿음을 받으면 값있는 것으로 되고, 사회적 집단의 버림을 받으면 값없는 것으로 된다"며 "우리 공화국은 높은 집단주의 사상으로 무장되고 동지적으로 단합된 인민대중의 위대한 정신력으로 발전하는 사회"라고 주장하며 집단주의를 강조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는 "사회주의 경제는 자본주의 경제와 질적으로 구별된다"며 "경제강국 건설에서 우리 앞에 나서는 무겁고 방대한 과업을 성과적으로 수행하려면 그 어느 때보다 경제관리에서 사회주의 원칙, 집단주의 원칙을 철저히 구현해나가야 한다"고 집단주의 원칙을 거듭 주장했다.
 
(2) 집단주의적 생활방식
그러면 집단주의 사상이나 원칙이 북녘 주민들의 실제생활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을까? 첫째, 집단주의 원칙이 가장 중요하게 적용되는 분야는 무엇보다 경제활동과 관련된 분야일 것이다. 이 책 제 4부에서 여러 차례 소개하였듯이, 북녘에서는 '사회주의적 소유' 원칙에 따라 생산수단을 개인이 갖지 못하고 국가와 사회협동단체 등 집단만이 소유할 수 있다. 대체로 공장과 기업 그리고 원자재 등 공업분야의 생산수단은 국가가 소유하고, 토지와 농기계 등 농업분야의 생산수단은 협동단체가 소유하는 것이다.
생산수단의 소유 형태뿐만 아니라 관리 방법에서도 집단주의 원칙이 적용된다. 국가가 전체 경제를 통일적이고 계획적으로 관리 운영하는 가운데, 각 공장이나 기업소에서는 지배인이나 관리인 혼자 운영하지 않고, 공장의 당위원회를 최고 지도기관으로 하여 집체적으로 경영 관리한다. 협동농장에서는 그 이름에서부터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전문적인 농업지도 기관들의 지원을 받으며 농장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일하고 공동으로 분배받는다.
둘째, 모든 주민들은 어릴 때부터 각종 조직생활을 하게 된다. 나이와 직업에 따라 [소년단], [김일성사회주의 청년동맹], [직업총동맹], [농업근로자동맹], [민주녀성동맹] 등 일정한 조직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것이다.
먼저 아이들이 남쪽의 초등학교에 해당되는 4년제 소학교에 입학하면 대개 9-13살 사이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소년단]에 가입한다. 남쪽에서도 세모꼴의 붉은색 넥타이를 맨 북녘 어린이들의 사진이나 동영상 등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이들이 "나라의 사회주의 건설을 힘껏 돕는 꼬마 건설자"인 소년단원들이다. 이들은 지역별 학교별로 조직 운영되면서, 다양한 체육활동과 각종 문예활동을 통해 집단의식을 고취한다.
남쪽의 중고등학교를 합친 것과 같은 6년제 중학교에 진학한 뒤에는 14-30세 사이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김일성사회주의 청년동맹]에 가입한다. 이들은 "혁명과업을 직접 계승하는 청년들의 혁명적 조직이며 당의 전투적 후비대"로서, [소년단]을 지도하고, 학생들에 대한 공산주의적 도덕품성을 교양하며, 공산주의사상 주입을 위한 정치학습을 조직하는 등의 임무를 맡게 된다. 또한 [소년단]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체육행사를 통해 체력을 단련하며, 학업 이외의 다양한 분야별 동아리 학습활동을 한다.
그리고 31세가 되면 공장이나 기업소의 노동자나 사무원들은 [직업총동맹]에 가입하고, 협동농장원들은 [농업근로자동맹]에 가입하며, 여성들은 별도로 [민주려성동맹]에 가입한다. 이후 남자들은 대개 정년퇴직 연령인 65세까지 여자들은 60세까지 조직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조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 가운데 하나가 생활총화일 것이다. '총화'는 "사업이나 생활에 대해 그 결과를 분석하고 결속지으며 앞으로의 사업과 생활에 도움이 될 경험과 교훈을 찾는 것"을 뜻하는 북녘말로, '생활총화'란 자신의 언행을 비롯한 개인생활과 업무에 대한 평가나 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 토요일 오후에 진행되는데, 여기에서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도 비판을 제기한다고 한다. 비판이나 충고를 통해 자신의 생활을 되돌아보며 반성의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람직하겠지만, '호상 (상호) 비판'은 자칫하면 상대방과 갈등을 일으키기 쉬울 텐데, 집단주의에 바탕을 둔 동료들 사이의 화합이나 유대 관계가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한편, 1990년대 중반부터는 극심해진 경제난 때문에 정치학습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과 열의가 낮아지면서 생활총화를 소홀히 하거나 기피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참고로, 총화와 관련하여 직장에서도 매일 퇴근 전에 30분 정도 하는 것으로 보인다. 2005년 10월 평양의 한 수지연필 (샤프펜슬) 공장을 둘러보는데 작업실 벽에 붙어있는 '일과표'가 눈길을 끌었다. 북녘 사람들의 공장생활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1. 출근 8시 30분
2. 체조 및 독보 8시 30분 - 8시 50분
3. 대렬검열 및 작업지시 8시 50분 - 9시
4. 오전작업 9시 - 12시
5. 점심시간 12시 - 1시
6. 오후작업 1시 - 6시
7. 작업총화 6시 - 6시 30분
 
위에서 '독보'란 한자로 '讀報'일테니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신문 읽기'라는 뜻인데, 출근하자마자 20분간 󰡔로동신문󰡕을 소리 내어 읽거나 로동당의 방침 또는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일 위원장의 교시 등을 공부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남쪽에서 말하는 이른바 사상교육을 먼저 하고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작업을 모두 마치고 나면 30분 동안 총화를 하고 나서 퇴근하는 듯하다. 남쪽의 직장에서도 일을 시작하기 전에 조회를 하고 일이 끝난 뒤 석회 (夕會)나 종회 (終會)를 가질 테니 형식은 비슷하지만 내용이 좀 다른 셈이랄까.
그런데 '일과표' 옆에 있는 '일 생산 및 재정총화 평가기준'이란 게시판도 재미있다. 생산, 자재, 노력 등 6가지 분야로 나누어 평가를 하는 것 같은데 생산활동과 직접 관련이 없는 분야에서도 근로자들을 평가한다는 게 흥미롭다. '생산문화, 생활문화'라는 분야에 청소와 복장 문제가 들어있는 것이다. "담당구역 청소 하루 3번 했을 때"는 +2점이고, "담당구역 청소 하루 2번 했을 때"는 -2점이라고 해놓았다. 또한 "작업복, 머리수건 착용 안했을 때"는 -2점이니 복장위반을 무척 꺼리는 모양인데, 위생이나 청결 문제를 특별히 챙겨야 하는 장소도 아니고 정밀 전자제품을 만들어내는 곳도 아닌 연필공장에서 복장단속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미성년자들이 다니는 학교도 아니고 성인들이 다니는 직장에서 말이다. 이런 게 바로 개인주의를 죄악시하고 집단주의를 중시하는 북녘 사회의 특징이 아닐까.
셋째, 주민들의 여가도 단체로 보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여가활동을 북녘에서는 '문화정서 생활'이라고 부르는데, 사람이 단순하게 먹고 입으며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생활을 즐겁고 아름답고 고상하게 영위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퇴근 후나 쉬는 날에 공원이나 유원지로 나가 놀기도 하고, 낚시질이나 영화 관람, 산책이나 운동, 장기나 주패놀이 (중국식 트럼프) 등을 하며 여가를 즐긴다. 그러나 대개 수요일로 정해진 '문화의 날'에는 공장이나 기업소 또는 협동농장 등의 직장 단위로 영화를 감상한 뒤 토론회를 갖기도 하고, 무슨 기념일에는 직장이나 지역별로 예술공연, 운동회나 무도회, 사적지 답사나 명승지 참관 등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조직적으로 진행되는 문화정서 생활을 '군중 문화사업'이라고 부른다. 군중이 광범위하게 참가하여 문학예술 작품을 직접 만들고 유통시키며 즐기도록 하는 문화사업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북녘 주민들은 음악이나 영화 또는 연극을 단지 듣거나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공연자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학교 다닐 때부터 한 가지 이상의 악기를 다룰 줄 알도록 훈련을 받을 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1인 1기의 문화교양 사업을 통해 악기와 노래 또는 춤 등을 배우고 익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학교,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 군부대 등에 여러 가지 '예술소조 (小組)'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다.
체육활동 역시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주민들 특히 청소년들의 체력를 향상시키고 조직생활을 강화하기 위해 매년 '동계체육 월간' (1-2월)에는 학생과 노동자들에게 스키, 스케이트, 집단 달리기 등을 훈련시키고, '하계체육 월간' (7-8월)에는 수영, 수구, 다이빙을 훈련시킨다고 한다. 또한 해마다 8-9월에는 소학교 학생들부터 50살 안팎의 성인들에게까지 학교 및 직장별로 달리기, 수영, 건강 태권도, 대중 율동체조 등 기초체력을 점검하는 '인민 체력검정'을 실시하고 있다.
넷째, 전문적 문학예술 분야에서도 집단주의 정신 및 원칙을 중시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집체창작'을 꼽을 수 있는데, 여러 사람의 지혜와 재능을 모아 문학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당국이 요구하는 지침과 일치하도록 공동으로 내용과 방법 등을 결정하고 각자 집필한 뒤 다른 작가의 동의나 수정을 통해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내는 창작방법이다. 여러 사람이 집단적으로 창작함으로써 작업속도와 작품수준을 높일 수 있다며, 각 작가의 특성을 충분히 살린 채 공동작업의 효과를 최대한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춘다고 한다.
집체창작은 소설, 그림, 조각, 영화 등 거의 모든 문학예술 분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를 위해 분야별로 전문 창작단이 조직되어 있다. 예를 들어, 문학부문의 4.15문학창작단, 미술부문의 만수대창작단, 영화부문의 백두산창작단 등이다. 그런데 1980년대 남쪽에서도 이른바 민중미술 분야에서 유행했던 대형 걸개그림처럼 미술작품이나 음악, 연극, 영화 등에서는 집체창작이 효과적이겠지만, 소설 같은 문학작품에서도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는 게 특이하다. 대개 남쪽에서 대하소설이라 부르는 작품처럼 대작 (大作)을 만들 때 집체창작이 이루어지는데, 예를 들어 김일성 주석에 관한 󰡔불멸의 력사󰡕는 1972년부터 30여년 동안 30여권이 출간되었다.
집체창작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분야는 연극일 텐데, 규모가 큰 '혁명가극'이나 '혁명연극'은 대부분 등장인물이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전형적인 집체예술이다. 따라서 공연장 역시 무대가 넓고 음향이나 조명시설 등이 잘 갖추어진 대규모 극장이다.
참고로 지금까지 북녘의 집단주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준 예술작품은 남쪽에도 널리 알려진 대집단체조와 예술 공연 '아리랑'일 것이다. 전문예술인과 체육인 그리고 학생들을 포함하여 약 10만명이 출연하는 '아리랑'은 북녘 당국이 '21세기의 대걸작'으로 자랑하는 것처럼, "민족적 정서가 짙고 높은 예술적 기교로 일관된 음악과 무용, 체조와 교예 (서커스), 률동화된 배경대, 특색 있는 무대장치물들과 전광장치, 레이저 조명" 등이 어우러지는 초대형 공연이다. 2002년, 2005년, 2007년에 수 개월 동안 공연되었는데, 나는 2005년의 공연을 관람한 적이 있다.
운동장에서 펼치는 율동이나 체조 등은 웅장하고도 화려하며, 약 20,000명의 학생들로 이루어진 배경대가 율동이나 체조에 맞춰 눈 깜짝할 사이에 카드섹션으로 만들어내는 온갖 글자나 그림은 사람의 짓으로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황홀하다. 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조그마한 어린이들이 줄을 맞춰 몸을 자유자재로 돌리고 구르기도 하고, 한복 차림의 무용수들은 수천 마리의 나비를 옮겨다 놓은 듯 춤을 춘다. 남녀 군인들은 기계처럼 일사불란하게 총검술을 펼치기도 하고, 교예배우들은 성냥개비로 뚝딱뚝딱 집짓듯 자신들의 몸으로 금세 5층탑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높은 하늘에서 땅바닥으로 곤두박칠치듯 뚝 떨어지는 아찔한 묘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북녘의 선전대로 진짜 "천변만화의 신비경과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무쌍한 배경대와 레이저 조명이 예술적으로 배합된 황홀한 입체적 공연"을 펼치는 것이다.
하나의 장면에 대개 수천명씩 출연하는데,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남자들이나 여자들이나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어찌 그리 한 치도 어긋나지 않게 뛰고 돌고 구르는 등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지 놀랍다. 인간의 무한한 능력에 감탄하게 되기도 하고 얼마나 연습을 했기에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섬뜩해지기도 한다. 따라서 관점이나 시각에 따라 '아리랑'은 믿기 어려울 만큼 환상적인 공연을 통해 북녘 사회의 단결되고 조화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도 있을 테고, 대여섯살 어린이들을 포함해 10만명에 가까운 출연자들을 마치 기계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훈련시켰다는 점에서 북녘 사회의 통제가 얼마나 심한지 드러냈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을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무튼 긍정적으로 평가하든 부정적으로 평가하든 약 10만명의 출연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공연을 통해 북녘의 집단주의가 얼마나 독특하고 어느 정도 강한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재봉, <두 눈으로 보는 북한> (평화세상, 2008), 290-3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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