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05

백승종 - 알고 보면 세종이 "꼬마신랑"을 만들었다고? 세종과 15세기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도덕과 윤리를 문명의... | Facebook

백승종 - 알고 보면 세종이 "꼬마신랑"을 만들었다고? 세종과 15세기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도덕과 윤리를 문명의... | Facebook
알고 보면 세종이 "꼬마신랑"을 만들었다고?
세종과 15세기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도덕과 윤리를 문명의 척도로 여겼다. 그런 그들의 눈앞에 전개된 사회 현실은 비참하였다. 전통적으로 한국사회는 자유분방한 이성 교제를 허용하였기 때문에 성리학적인 기준에서 크게 빗나갔다.
왕은 도덕의 기치를 세우리라 결심하였고, 공권력을 동원해 부적절한 남녀관계를 적발하였다. 범죄자는 모두 중벌로 다스렸는데, 대형사건도 일어났다.
세종 5년(1423) 9월 25일, 대사헌 하연이 지신사(도승지) 조서로를 고발했다. 조서로는 퇴직한 대신 이귀산의 처 유씨와 내연 관계였다. 왕은 조서로의 관직을 빼앗고 경상도 영일로 유배보냈다. 그의 정인(情人) 유씨에게는 사형을 집행하였다(세종 5년 10월 8일).
“유씨는 대신의 아내인데도 음탕한 짓을 하였다”라며, 임금은 그를 사흘 동안 저잣거리에 세웠다가 목을 베었다. 조서로는 개국공신 조반의 큰아들이라 극형을 모면하였다.
조서로와 유씨는 친척이었다. 어릴 때 아버지를 잃고 출가한 유씨는 승복을 입고 친척 조서로의 집에 출입하였다. 조서로가 14세 될 때부터 그들은 연인이었다. 얼마 후 환속한 유씨는 대신 이귀산과 결혼했으나, 조서로와의 연인 관계는 이어졌다. 유씨는 이따금 조서로에게 편지를 보내 친척 집에서 밀회하였다.
이 사건을 끈덕지게 추적한 이는 사헌부 지평 남지였다. 그는 조서로의 하인(丘史)들을 체포해 상전의 행적을 낱낱이 조사하였다.
또, 밀회 때 유씨의 심부름을 한 노인을 다그쳐 두 사람의 내밀한 관계를 확인하였다. 세종이 혼외관계를 척결할 의지를 가진 때문에, 남지는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사건을 다루면서 세종은 풍속을 뜯어고칠 결심을 더욱 확고히 다졌다.
“중국은 남녀 간의 분별이 엄해서 친자매의 얼굴도 못 본다. 그러나 우리나라 풍속은 남성이 자매를 만나는 것을 미풍이라 한다. 그래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자주 일어난다.” (세종 11년 6월 16일)
왕은 누나든 누이동생이든 남성이 여성을 만나면 절대 안 된다고 믿었다. 유교 고전을 중심으로 예법을 다시 정비하는 것이 세종의 목표였다. 왕은 대신 황보인에게도 거듭 강조하였다.
“옛사람이 말씀하기를, ‘형수와 시동생(嫂叔)은 물건을 직접 주고받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 풍속은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니 크게 잘못된 것이다.”(세종 12년 윤12월 24일)
그런데 그 시절에는 근친 간의 은밀한 애정 관계가 흔한 시대였다. 왕은 이를 악습으로 규정하고 그 뿌리를 뽑으려고 하였다. 마침내 왕은 조혼제도를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세종 9년의 일이었다.
왕이 이 문제로 대신들과 거듭 상의하였는데, 변계량은 법령을 엄격히 집행해 친척 간의 이성 교제를 금하자고 하였다. 허조는 조선 여성의 경박한 정조 관념을 문제 삼는 한편, 남성들도 성폭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고 비난하였다. 그는 도덕 교육을 강화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보았다.
대신들의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도 세종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였다.
“여성이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은 결혼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혼기를 절대 놓치지 않게 만들자고 왕은 주장하였다. 그러자 변계량이 결혼 연령을 15세로 정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세종 9년 9월 4일) 조혼법을 강화하자는 의견이 대신들의 지지를 얻자, 세종은 이 문제를 자세히 논의하여 결과를 보고하라고 주문하였다. 10여 일 뒤 신하들이 숙의한 결과가 윤곽을 드러냈다.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 즉 주희(朱熹)가 정한 예법에 근거한 결정이었다.
예법을 주관하는 예조가 올린 최종 보고서의 요점은 다음과 같았다.
현행법에 명시한 대로 남성은 15세, 여성은 13세부터 결혼을 허락한다. 다만 언제까지 결혼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어서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는 사람이 많은데, 이제부터는 《주문공가례》에 따라서 여성은 14세부터 20세까지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관청의 허락을 얻어 조금 미룰 수 있다. 관청은 혹여 약속한 기한을 넘기는 사람이 있는지 조사해서 법대로 처벌한다. 세종은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국법에 조혼을 상세히 규정했다. 왕이 애쓴 효과가 없지 않아, 조혼은 조선의 새로운 관습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근친인 남녀의 사귐도 사회적 금기로 굳어졌다. 우리 귀에 익숙한 조선사회의 엄격한 남녀구별이야말로 세종이 만든 신풍속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세종이란 이름만 나오면 칭찬하기에 바쁘다. "민주적인 왕", "사회적 약자의 편",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인물", "우리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 ... 이런 식으로 감탄을 연발하기에 바쁘다. 그러나 차분히 앉아서 세종의 시대를 들여다 보면 그 왕이 그렇게까지 우리가 칭찬해도 좋은 인물이었던가. 내가 보기에, 그는 "이상적"인 지도자가 아니었다. 세종이 훌륭한 왕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좋으나, 오늘날의 기준에 비추어도 완벽한 인물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All reactions:
89
3 comments
Like
Comment
Share
Most relevant

Dongbaek Lee
정작 세종 자신은 십여명의 후궁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백승종
이동백 첩이나 후궁은 정식 부인이 아니니까요. 그 당시에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Dongbaek Lee
백승종 권력자들에게 참 편한 법이네요 ㅎㅎ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