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30

이승만, 1912년 프린스턴 박사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 출판 < 류석춘 < 자유일보

이승만, 1912년 프린스턴 박사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 출판 < 류석춘의 시간을 달린 지도자, 이승만 < 연재 < 기사본문 - 자유일보



이승만, 1912년 프린스턴 박사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 출판
기자명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
입력 2022.04.11


(18) 유학(학사·석사·박사)

미국 도착 즉시 유학 모색
기독교 네트워크 결정적 도움
1907년 6월 조지워싱턴 학부 졸업
1910년 2월 하버드 석사 취득
1910년 7월 프린스톤 박사 취득
김학은, 이승만 논문 재해석류석춘

1904년 12월 31일 저녁 9시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이 서두른 일 중의 하나는 유학이었다. 도착한 날 바로 다음 날인 1905년 1월 1일 점심에 이승만은 코베넌트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the Covenent) 의 햄린(Lewis T. Hamlin) 목사를 찾아가 세례를 부탁하고 또한 유학에 관한 지도를 받았다(류석춘 외 공편, 『국역 이승만 일기』 2015: 21).

1894년 세워진 연동교회 1대 담임 목사였던 캐나다 장로교 출신의 선교사 게일(James Gale) 박사는 이승만에게 미국에서 가장 먼저 만날 사람으로 햄린을 지목했다. 미국 당대 최고의 목회자였던 햄린은 당시 주미한국공사관 법률고문을 맡고 있기도 했다. 햄린 박사는 이승만을 조지 워싱턴 대학 총장 니담(Charles W. Needham) 에게 소개했다.
프린스턴 대학원 재학 당시 자신이 생활하던 기숙사 공간 책상 앞의 이승만. 사진 위쪽 ‘Hodge Hall, Princeton, 1909’ 글씨는 이승만 친필이다. 출처: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니담 총장은 이승만을 1905년 봄 학기에 조지 워싱턴 대학교 문리과 대학 2학년 특별장학생으로 편입시켰다. 배재학당(Pai Chai College) 수학 경력을 인정한 결과였다. 물론 이승만은 선교사들로부터 받은 19통의 추천서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 스스로도 기독교 네트워크가 이렇게까지 도움이 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선교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승만이 정치범으로 ‘7년간’ 감옥생활을 할 때 40여 명의 동료 죄수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사실을 강조하고 그가 장차 한국 기독교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을 장담하면서 그에게 2~3년간의 교육 ‘완성’ 기회를 베풀어 줄 것을 부탁”하는 추천서를 썼다(유영익, 『이승만의 삶과 꿈』 중앙일보사, 1996: 46).

이렇게 시작된 이승만의 유학은 학사, 석사, 박사를 5년 6개월 만에 마치는 초고속 과정이었다. 그는 1905년 봄 학기부터 1907년 봄 학기까지 합해서 5학기를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수학하고 1907년 6월 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서 그는 1907년 가을 학기부터 ‘하버드 대학’의 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그러나 하버드에서는 본인이 계획한 2년 내 박사학위 취득이 어려운 상황임도 파악하게 됐다.

하버드 수학 1년이 지난 1908년 가을 학기부터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 대학원으로 진학해 1910년 봄 학기까지 합해서 4학기를 수학하고 마침내 1910년 7월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와 함께 이승만은 프린스턴 재학 중이던 1909년 여름 학기를 이용해 하버드 대학에서 ‘미국사’ 한 과목을 추가로 이수한 끝에 1910년 2월 하버드 대학 석사학위도 받을 수 있었다.

1905년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유학 온 30살 이승만은 학부 유학을 시작한 지 5년 6개월 만인 1910년 35살에 국제정치학 박사가 되는 놀라운 성취를 이루었다. 이 5년 6개월이라는 시간은 묘하게도 이승만이 감옥에 갇혀 있던 5년 7개월이라는 시간과 거의 같은 시간이다. 감옥에서의 독학까지 포함하면 결국 이승만은 만 11년을 꼬박 공부에만 전념한 셈이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유생 이승만이 신학문을 배우려 20살에 배재학당 문을 두드린 지 15년 만에 신학문의 챔피언으로 등극한 셈이다.

이승만의 학력은 당대 한국인은 물론 당대 미국인 기준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개화기 미국에 유학했던 한국 지식인은 모두 합쳐 70명 미만이다. 그중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은 유길준, 서재필, 윤치호, 김규식, 신흥우 등이다. 이승만은 이들보다 뒤늦게 미국에서 유학을 시작했지만, 이들보다 더 유명한 대학을 다녔고 또 최초로 국제정치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유영익, 1996: 46). 다른 한편 “미국의 대학원 과정은 1900년 프린스턴 대학이 최초였다. 이승만이 입학하기 불과 8년 전이다” (김학은, 『이승만의 정치·경제 사상』 연세대 출판문화원, 2014: 156).

이승만이 박사를 한 프린스턴 대학은 이승만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우선, 이승만은 프린스턴에서 우드로 윌슨 (Woodrow Wilson, 1856~1924) 이라는 현대사의 거인을 만나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지도교수는 아니지만, 총장이었던 윌슨은 이승만을 자주 집으로 초대해 가족들과 식사를 같이 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왼쪽은 이승만의 박사학위 논문을 우리말로 번역한 책. 정인섭 교수가 역주와 해제를 했다(연세대 출판문화원, 2020). 오른쪽은 이승만의 박사학위 논문을 '독립정신' 및 '일본내막기'와 연관지어 분석한 김학은 교수의 책 (연세대 출판문화원, 2014).

윌슨은 이승만에게 학위를 수여한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대학을 떠났다. 현실 정치에 뛰어든 윌슨은 1911년 뉴저지 주지사, 그리고 1913년부터 1921년까지 미국 대통령으로 활약했다. 그가 1918년 주창한 민족자결주의는 3.1운동의 동력이었다. 이 황금 같은 인맥은 마침내 2012년 3월 프린스턴대학 '우드로 윌슨 스쿨' 건물의 제16 강연장을 ‘이승만 홀’ (Syngman Rhee 1910 Lecture Hall) 로 이름 붙일 수 있게 했다.

다음, 이승만이 1910년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은 1912년 프린스턴 대학 출판부가 책으로 출판했다. 박사 논문을 대학의 출판부가 바로 출판하는 일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다.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이 대목에서 이승만의 박사논문 내용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2020년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이 이승만의 박사논문을 우리말로 번역해 출판한 책에서, 법학자 정인섭 교수는 논문을 해제하며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설명을 했다. 전쟁이 났을 때 전쟁의 당사국이 아닌 중립국가가 교전국과 할 수 있는 해상무역의 범위와 수준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천해 왔는가를 검토한 논문이 바로 이승만의 학위논문이다.

논문에서 이승만은 미국이 건국되기 전까지는 중립국의 전시 무역 권리가 존중받지 못했지만, 유럽의 전쟁과 거리를 둔 강대국 미국이 등장하면서부터 전시 중립국의 무역에 관한 권리가 크게 신장했다고 주장한다. 미국이 세계사에 미친 영향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논문이다. 정인섭의 해제는 이승만 논문의 주제인 ‘전시중립’에 관한 법제사적 해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경제학자 김학은 교수는 시야를 넓혀 이승만의 박사논문을 1910년 출판한 『독립정신』 그리고 1941년 출판한 Japan Inside Out 의 문제의식과 연결지으며 정치·경제적 사상의 맥락을 분석한다. 김학은의 2014년 책 『이승만의 정치경제 사상』 이 제시하는 설명이다.


김학은은 이승만이 박사논문에서 전개한 주장을 위로는 정약용의 ‘목민심서’ 및 유길준의 ‘서유견문’ 옆으로는 중국의 손문과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 그리고 저 멀리 독일의 칸트와 체코의 마사릭은 물론 영국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실천신학, 나아가서 미국의 워싱턴과 우드로 윌슨을 넘나들며 분석해 하나의 일관된 틀로 제시한다. 다름 아닌 ‘약소국이 자유와 평화를 어떻게 지킬 수 있는가’ 하는 맥락에서 이승만의 저작을 설명했다.

김학은의 결론이다. 이승만의 학위논문은 1) 실학으로부터 출발한 『독립정신』의 ‘통상’ 부분을 학문적으로 발전·심화시켰고, 2) 구미 사상 가운데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실천신학’과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계승한 미국의 외교노선을 추적했고, 3) 미국 외교노선에 어울리는 독립 승인의 국제적 조건이 무엇인지를 탐구했으며, 4) 미국의 외교 원리와 일본의 외교 원리가 충돌할 수밖에 없음을 예측했고, 5) 잠들어 있는 ‘칸트의 미국’을 『일본 내막기』를 통해 흔들어 깨웠다고 설명한다.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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