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파란
·
박유하 교수 판결을 보면서
나는 지금껏 박유하 교수의 저서에 비판적인 입장을 페북에 썼다. 그렇다고 오늘의 판결에 대해서도 부당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박유하 교수의 판결을 두고 올라오는 게시글을 보면서 이 사회가 전쟁범죄의 희생자나 국가폭력의 피해자를 얼마나 등한시 해왔는지에 새삼 놀랍고 절망스러웠다.
페북에 올라온 어떤 글에서 자신은 '제국의 위안부'를 읽기 전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일본군의 총칼에 끌려간 사람들인 줄 알았다라는 부끄러운 말을 당당하게 했다. 이 말은 일본 아베 전 총리가 "일본군이 총칼을 들고 집에서 끌고 나온 것이 아니다" 라며 강제성을 부인한 말과 같다.
또 이런 발언의 근원을 따라 가면 2007년 6월 14일 미국 하원이 일본정부에게 일본군이 여성들을 '성노예제'로 강제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정하고 사죄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안 채택을 막기 위해 일본의 정치가, 교수, 언론들이 <워싱턴포스트지>에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은 없었다는 광고를 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일본의 광고는 미국인들의 반발을 가져와 오히려 결의안 가결을 촉진시켜 7월 30일 채택된다. 이때 미국의 정치가는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말했다.
"군'위안부'였던 여성들이 강제로 당했는지 어떤지는 관계없다. 일본 이외에는 누구도 그 점에 대해 관심이 없다. 문제는 위안부 등이 비참한 일을 당했다는 것으로, 일본의 정치가들은 이 기본적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이렇게 일본도 고노담화에서 인정한 '구조적'강제성 즉 본인 의사에 반한 강제성을 일본의 우익과 한국의 태만한 지식인들은 '총칼로 위협한'강제성으로 바꾸어 피해자들을 농락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일본군 성노예(일본군 위안부)문제는 역사적 과오나 윤리의 차원을 떠나있다. 이미 국제적으로 전쟁범죄로 규정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일본과 한국 사회만 이런 국제적 사회의 규정과 역행하는 피해자 모독적 발언들이 학문이나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다. 그런 야만적 사회적 토양이 피해자들이 박유하의 저서를 학문의 영역으로만 둘 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렇게 간절하게 박유하 교수의 무죄 판결을 기원하던 사람들에게 나도 물어보고 싶다.
고통에게 등급이 있는가?
학자의 지난한 소송 과정이 당신들에게 그토록 큰 공감을 일으켰다면 반인륜적 전쟁 범죄에 희생된 사람들에게는 왜 그토록 무관심 했으며, 무관심에서 오는 무지로 자신이 옹호하는 학자를 위한 글이 사회정의라고 착각하는 잔인한 글을 쓸 수 있는가를 말이다.
혹 당신들은 결코 그런 반인륜적 범죄에 피해를 입거나 희생될 계급이 아니기 때문에 공감할 수도 관심 가질 필요도 없었던 것은 아닌가를 꼭 돌아보기 바란다.
이처럼 '제국의 위안부' 논란에서 우리가 알 수 있었던 것은, 한국 사회에서는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자신의 발언권을 약자나 국가 폭력의 피해자들의 고통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학문의 진실을 위해 자신들이 어떤 핍박을 받았으며,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는지를 점잖게 말한다. 그런데 정말이지 이들이 자신의 것을 희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언제나 가장 약하고 만만한 존재들을 잘게 부수어 자신의 신념을 빛내고 있을 뿐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박유하 교수 재판의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피해자들의 분노다. 일본군의 반인도적 불법행의 피해자였던 9명의 여성들은 2014년 6월 16일에 일본군 '위안부'를 일본군의 '동지"이자 전쟁의 '협력자'로 표현한 <제국의 위안부>의 기술이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면서 민사상의 손해배상과 출판금지, 접근금지를 요구하는 재판을 시작했고, 아울러 형사상의 명예훼손죄로 고발했다.
이렇게 피해 당사자들은 '제국의 위안부'론의 핵심적 주장을 명예훼손으로 간주한 것이다. 또 거기에는 그럴 만한 근거도 명확했다.
오히려 문제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피해자들의 정당한 분노, 또 이런 피해자들의 분노를 공감하며 '제국의 위안부' 라는 책에 대한 진지하고도 학술적인 정당한 비판마저 사법권력과 민족주의의 광기에 맞선 한 사람의 여성(박유하 교수)에 대한 탄압으로 몰고 간 한일 지식인들의 문제였다.
이렇듯 반일 민족주의에 반감을 드러냈던 지식인들은 '제국의 위안부' 비판을 '민족'을 앞세운 '권력'의 옹호로 보고 혼란에 빠지는 어처구니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것은 이 땅의 지식인들이 약자에 대한 관심이 어떠했는지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준 부끄러운 이 사회의 자화상이었다.
<제국의 위안부>라는 박유하의 저서가 피해자들에게 어떤 치명적인 상흔을 남겼는지를 날카롭게 확인하는 것은 학문과 민주 시민의 책무다. 이런 과정에서 사회는 개인의 권리나 국가의 책임, 언론의 책임, 학문의 책임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 낼 수 있다. 특히 박유나 교수나 그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학문, 표현의 자유를 말하며 이번 판결에 환호하기 전에 그 자유가 상처낸 타자의 아픔을 돌아보고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먼저다.
Facebook
Facebook
Facebook
Facebook
Facebook
Facebook
Facebook
Facebook
Facebook
Facebook
Facebook
황규관
글을 쓰고 책을 낸다는 일의 엄중함!
48w
Reply
김시무
대법이 굥정권의 친일기조에 부합하는 판결을 내렸다고 봅니다 ~~
48w
Reply
Do-Eon Kim
선생님 글이 무슨 이야길 하려는 건지는 알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적지 않은, 그리고 치명적인 논리의 비약이 전제되고 있는데, 나중에 시간이 되면 차분하게 제 페북에서 정리해보겠습니다. 좋은 오후 되세요.
48w
Reply
김파란
김도언 예 선생님
48w
Reply
김철웅
김파란 김도언 두 분 선생님, 품격있는 '내가고수'님들 같아요. 저는 이런 멋진 모습을 '살파랑'이라는 현대무협액션에서 견자단과 오경의 대결이후 본 적이 없습니다. ㅎㄷㄷ ㄷㄷㄷ ^^;;;
48w
Reply
부사령관
파란님, 오늘은 긴 시간 오독과 일방적인 편견에 고생 많았던 박유하님을 먼저 안아주시는 편이 더 보기 좋았을 듯합니다. 사실관계는 치열히 다투면서도 서로를 보듬어줄 온도는 남아 있어야 우리 더욱 근사해지지 않을까 합니다. 파란님의 근사한 글을 늘 놓치지 않는 한 녀석이 지나가다 마음 한자락 남겨 놓습니다. 좋은 계절 되십시오.
48w
Reply
Edited
김파란
부사령관 예 맞습니다
늘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제 틀을 깨기가 참 힘듭니다
하지만 또 이렇게 날 언제가
돌아보게 하는 페친들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48w
Reply
김시무
부사령관 대법판결이 면죄부가 됐군요~~ 위안부 할머니들은 사창이 되고~~
48w
Reply
황규관
박유하 교수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이들이 꽤 많습니다. 문제의 그 책이 얼마나 비약 투성이고 환원적인지 그리고 그가 그 뒤로 보여준 퇴행적이고 편벽된 언행들을 다 보고서도 말입니다. 지적 퇴행도 아니고 그냥 전락으로 보입니다.
48w
Reply
김영규
우선 박유하 교수와 재판부에 찬사를 보냅니다.그간 7년간 약자로 몰린 지식인이 강자로 행세한 집권 세력에게 승리해 국가의 체면을 살려준 고귀한 심판입니다.
48w
Reply
최충열
파란작가님!
격 공감합니다!!
늘 응원하고 지지합니다!!!
올도 행복가득한 저녁시간되세유♡♡♡
48w
Reply
Eunjung Oh
공감합니다. 아직 중심을 잡기 힘들고 납작해지는 말들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정리해보게 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래서… 저는 사회 속에서도 이 논란이 더 깊게 이야기 되길 바래요…
48w
Reply
Edited
김무웅
사안의 본질을 꿰뚫는 김파란님의 비판적 분석에 경의를 표합니다.
48w
Reply
김수은
파란쌤이 있어 다행이에요//
48w
Reply
정옥경
이런 멋진 글을 쓰니 제가 수정씨를 안좋아할 수 있냐구요~~~~
48w
Reply
Edited
문득그집
탐독을 권합니다.
47w
Reply
=====
김파란
·
당신들의 침묵은 이해할 수 없다
: 박유하 교수 판결을 반기는 사람들을 난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이 판결을 그저 학문을 법정으로 끌고 가서는 안된다, 라는 원론적인 말로 이 사건을 축소하는 당신들 침묵은 이해할 수 없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정대협의 사주를 받아 억지 투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교수나, 소송의 주체가 할머니들이 아닌 정대협이라고 언론전을 하는 지식인들이나 박유하 논의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학문의 영역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은 아니다, 할머니들의 소송을 왜 말리지 않았냐? 이 모두는 얼마나 유치한 이해인가?
피해자들이 배우지 못해 자신의 주체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은 학식으로만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무한히 강화된다. 피해자들이 항상 연약한 피해자이자 비주체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지식인들의 오만함은 너무 무식한 편견이다. 그들도 누구나처럼 대의를 만들고 투쟁하고 사랑하고 또 지금의 삶을 즐겁게 살고 나누면서 과거를 극복하는 삶을 살았다.
결코 과거에 얽매여서 현재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세계적인 과거사 문제의 흐름은 시간이 지났다고, 또는 현재의 화해를 위해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니다. 이런 피해자들의 투쟁의 결과로 세계는 더이상 개인의 고통을 역사의 어쩔 수 없는 힘의 논리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류는 이제 그 거대한 폭력을 인권 차원에서 다시 재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자행된 전쟁이나, 식민지지지배에서 일어난 대량학살과 인권 유린에 대해서는 앞으로 과거청산의 범위가 더 확대되고 또한 더 엄격해질 것이다.
그러니 소위 지식인이라는 작자들이 국제법상 '식민지지배 책임'을 물은 적이 없으니 '일본 사과 필요 없다'라는 말을 당당하게 하는 것이나, 학문을 법적 판결에 넘겨서는 안 된다는 말은 사실 너무 쪽팔린 짓이다.
당신들에게 그런 권리가 없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개입하는 정부, 지식인들(전문가) 모두 이런 식이었다.
노동자들은 생존은 위한 첫 번째 단계만이라도 사회적 합의를 통한 법 제정을 해달라는 것인데, 정부는 언론과 지식인들을 동원해 '상생' 과 '양보'를 말하면서 더 내줄 것이 없는 노동자들의 몫을 뺏았는 것을 사회적 합의라는 말로 순화시켰다. 또 이런 권력과 지식인이 결탁해 인간의 정당한 목적을 향해서 투쟁하는 것을 저지할 때 그 기만을 문학적 언어로 폭로하고 이 체제를 언어로 깨부셔야 할 문학이 침묵하는 것을 넘어 사실상 동조했다.
한국작가회가 김대중 - 노무현 - 문재인 정부시대에는 국가와의 긴장감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사실상 문학가들의 이익단체로 바뀐 까탉이다.
이렇게 피해자(피해국), 노동자(약자)의 양보로 문제를 해결 할 때 가장 일반적으로 동원되는 것이 지식인들의 언어다. 우리가 이들의 말과 글을 비판적으로 인식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아무리 국가가 또는 자본이 저지른 폭력이라고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음(불가불)'을 들어 그것을 정당화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더구나 엄밀히 말해 대안이 부재했던 시기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이런저런 이유로 그 대안을 모른 채 해왔을 뿐이다. 즉 피해자들이 직접 자신들의 목소리로 지난 날 자신들이 당한 반인도적 불법적 행위를 세상에 외치고,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어머니, 아버지가 단식을 하며 노동자들의 안전한 일터를 외쳤을 때 그 대안은 이미 존재해왔던 것이다.
이것을 언제까지 모른 채 할 것인가를 우리는 또 묻고 물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을 일반화시켜서 폭력을 행사하는 지식이 정당한지를, 또 "인간의 삶을 인간의 본성을 이 땅에서의 본래적인 인간의 삶을" 왜곡시켜 올바른 인간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이 권력이라는 동냥아치들의 언어를 깨부실 망치는 무엇인지를 말이다.
깊이 공감합니다
지식인들이 동력을 말아 먹어 앞날이 더 막막합니다.
47w
Reply
김파란
문병갑 고맙습니다^^
47w
Reply
========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