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8

박종홍 - 대한민국의 철학자

박종홍 - 나무위키



박종홍
최근 수정 시각: 2024-08-18 16:46:21

3
편집토론역사


분류
대한민국의 철학자
인문과학 교수
1903년 출생
1976년 사망
평양시 출신 인물
서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인문대학
경성제국대학 출신
서울대학교 재직
성균관대학교 재직
한양대학교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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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홍
朴鍾鴻



출생
1903년 8월 23일

평안남도 평양군

사망
1976년 3월 17일 (향년 72세)


열암(洌巖)

학력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 / 학사)
경성제국대학 대학원 (철학 /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 / 박사)

경력
보성보통학교 훈도
대구고등보통학교 교유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경성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교수, 대학원장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장, 대학원장
한양대학교 문과대학장






1. 개요2. 생애3. 연구/저술4. 가족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철학자.








2. 생애[편집]






1903년 8월 23일 평안남도 평양군(현 북한 평양시)에서 태어났다. 호는 열암(洌巖).

보통학교 입학 전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18세에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여 보성보통학교 훈도(초등교사)가 되었다.

1925년 중등교원자격시험에 합격, 대구고등보통학교의 교유(중등교사)로 발령되어 조선어와 한문을 가르쳤다.

1929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다. 전문학교 입학 검정시험을 거쳐 선과생으로 입학하였는데, 선과생은 일종의 편입생으로 소정의 시험을 통과하면 본과 졸업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1]

1932년 장숙진과 결혼하여 이후 5남2녀를 두었다. 1935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발령받아 강의와 연구 활동을 했다.

해방 후 경성대학 철학과 교수로 취임하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교수 및 대학원장, 한국철학회 회장,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장 및 대학원장, 한양대학교 문과대학장 등을 역임했다.

1960년 '부정(否定)에 관한 연구'로 서울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민교육헌장 초안을 만드는 데 중심적 역할을 했고, 1970년 박정희 대통령 교육문화담당 특보로 영입되어 국민교육헌장 이행을 독려했다.

1976년 3월 17일 종로구 혜화동 자택에서 향년 7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3. 연구/저술[편집]






일반논리학(1948)
인식논리학(1953)
철학개론 강의(1953)
지성의 방향(1956)
철학적 모색(1959)
새날의 지성(1961)
철학개설(1961)
현실과 구상(1963)
지성과 모색(1967)
한국의 사상적 방향(1968)
한국사상사(불교편)(1972)
자각과 의욕(1972)
한국적 가치관(1975)








4. 가족[편집]






妻 장숙진장남 박우창: Rockwell International 연구원
차남 박규창: 전 LG 부사장
3남 박수창: 피부과 의사
4남 박윤창: 성균관대학교 교수
5남 박순창: 을지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장녀 박은경
차녀 박예경








[1] 기록을 보면 1932년 법문학부 선과 졸업, 1933년 철학과 졸업으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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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홍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박종홍
朴鍾鴻

대한민국 대통령 비서실 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
임기 1969년 11월 30일 ~ 1972년 1월 31일
대통령 박정희 대한민국 대통령
총리 정일권 대한민국 국무총리
백두진 대한민국 국무총리
김종필 대한민국 국무총리 서리
김종필 대한민국 국무총리
장관 김정렴 대한민국 대통령 비서실 실장

신상정보
출생일 1903년 8월 23일
출생지 대한제국 평안남도 평양
사망일 1976년 3월 17일(72세)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경력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성균관대학교 석좌교수
한양대학교 석좌교수
정당 무소속
본관 평산(平山)
종교 유교(성리학) → 개신교(침례회)


박종홍(朴鍾鴻, 1903년 8월 23일 ~ 1976년 3월 17일)은 대한민국의 교육자, 철학자, 사상가며, 호(號)는 열암(冽巖)이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대통령 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 등을 역임했다. 안호상 등과 함께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하고 제정하는 데 참여하였다.

1920년 평양고보 졸업 후 교사로 교단에 섰다. 광복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 문학부장, 문리과대학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그밖에 독일 철학 관념론의 영향을 받아 실존주의, 분석철학, 한국 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 섭렵했다. 그밖에 철학 관련 저술 집필을 하였다. 박정희 집권 이후 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이 되었다. 그밖에 그는 조선시대의 성리학자들의 정신세계관에 대한 연구도 하였다.

생애[편집]

보통학교, 고등학교 교사 생활[편집]

광무 7년(서기 1903년)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태어났다.

1920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교원 임용시험에 바로 합격, 1921년 18세에 전라남도 교육청에 발령되어 최연소 교사가 되었다. 1921년 3월 1학기부터 보성보통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하면서, 1922년 잡지 《개벽 開闢》지에 <한국미술사>를 연재하였다. 그 해에 대구 수창보통학교 교사로 옮겼고, 1924년 철학논문 '퇴계의 교육사상'을 발표하였다. 1926년 고등보통학교 교사자격검정시험에 합격하여 대구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봉직하였으며, 1929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 진학하여 칸트헤겔 철학공리주의를 연구하였다. 1932년 경성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대학원 철학과로 진학했다.

1933년 잡지 《철학》지에 '철학하는 것의 출발점에 관한 일(一)의 문(問)'을 발표하고, 1934년경성제국대학 대학원에서 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해 경성제국대학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모교인 경성제국대학 철학과의 조교가 되었다.

대학 교수 생활과 저술 활동[편집]

1935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옮겼고 다시 경성제국대학 철학과 강사로도 출강하였다. 1937년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 철학교과 담당 교수, 1939년 이화여전 문과 과장을 역임하였다.

1940년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창씨개명령이 떨어지고 유예기간을 거친 뒤 1941년 창씨개명이 단행되자, 그는 자기 소신을 공개적으로 밝혀 조선인에게는 조선인의 것이 최고라며 창씨개명을 거부하였다. 이후 일체의 정치적인 활동을 삼가고 학문 연구와 교육 활동, 독서 장려 운동, 문풍 진작에 진력하였다.

1945년 경성대학 교수가 되고, 광복 후부터는 본격적인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그 동안 《일반논리학》(1948)·《인식논리학》(1953)·《철학개론강의》(1953)·《철학개설》(1954)·《지성의 방향》(1956)·《철학적 모색》(1959)·《새날의 지성》(1962)·《현실과 구상》(1963)·《지성과 모색》(1967)·《한국의 사상적 방향》(1968)·《한국사상사-불교사상편-≫(1972)·《지각과 의욕》(1972) 등 많은 저작을 남겼다.

서울대학교 교수 활동[편집]

1946년 경성대학서울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면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가 되어 1968년까지 봉직했다. 이후 1968년 정년퇴직 때까지 그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장, 대학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인재양성에 힘썼다.

한국 전쟁으로 피난갔다가 1952년 다시 서울로 돌아와 칼럼, 강연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1953년 학술원 회원이 되고 그해 종신회원으로 피선되었으며 1954년 한국철학회 회장이 되었다. 서울대학교 교수로 봉직하면서 그는 한국철학회장, 한국사상연구회장, 학술원 회원, <국민교육헌장> 기초위원 등을 겸직하였다.

1960년 <부정에 관한 연구>로 서울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4년 한국사상연구회 회장이 되었다.

퇴임 이후[편집]

1968년 정년퇴직 후에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에 초빙되었고 1968년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학장과 1969년 유학대학원장, 도산서원장(陶山書院長), 1970년 한양대학교 문과대학 학장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학술활동과 언론 활동, 강연 활동, 사회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직접 서울과 산골 오지까지 손수 자기 차량과 자비를 부담하여 다니면서 인문학의 필요성과 철학이 무엇인가를 직접 강연하여 인문학의 중요성과 독서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다녔다. 1970년 12월에는 대통령 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에 임명되었으며 문화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를 거쳐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일생을 오직 후진교육에 바치면서, 또한 학자로서 저술활동을 통하여 철학과 정치 분야에 대해 업적을 남겼다. 또한 생활의 불편과 생계를 이유로 외면당하던 철학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최후[편집]

76년에는 병으로 거동이 불편하였으나 청와대로 출근하였다. 대통령 박정희는 특별히 그에게 자택에서 구두와 유선으로 자신, 혹은 청와대 관료들과 대담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나, 그는 관리된 도리로 자택에 있을 수 없다며 출근을 강행했다. 1976년 3월 17일 대통령 특별보좌관 재직 중 노환과 과로로 병사하였다. 사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학술, 교육활동[편집]

호는 열암이고 평양 출생이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8회로, 함석헌, 양주동과 동기)하고 19세에 교사에 임용되어 전남 보성보통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대구고등보통학교 교사를 거쳐 경성제대 철학과에서 학사, 석사학위를 받고 이화여전 강사로 임용된 후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정년퇴임할 때까지 40여 년간 교육활동을 하였으며[1] 이화여전, 경성제대, 서울대 교수, 학술원 회원 등을 역임했다.[2] 1961년 5ㆍ16 군사 정변박정희국가재건최고회의 기획위원, 국민교육헌장 기초위원으로 임명되어 일제의 교육칙어를 본떠 만든 국민교육헌장 기초에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1] 1922년개벽≫지에 〈한국미술사〉를 연재하였다.[3]

기타[편집]

1970년 애그뉴 미국 부통령 방한 이후 김정렴 비서관은 박정희에게 국제정치담당 특별보좌관 신설을 건의했다. 국제정치분야 뿐 아니라 국내의 정치, 문화와 교육,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의 실력있고 덕망있는 인사를 특별보좌관으로 기용하여 사회 각계의 아이디어와 여론을 수렴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4] 박정희는 특별보좌관에 가급적이면 기성의 대가보다는 한참 연구성과를 올리는 젊은 교수와, 병역해당자에 있어서는 병역을 필한 인사 중에서 대학별, 출신지별 안배도 고려해서 기용하라고 하였고, 김정렴은 1968년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을 반포하는 데 참여한 50여 명의 학자를 수소문하던 중 박종홍을 특별보좌관으로 추천하였다.[5]

1970년 12월 10일 대통령 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이 되었다.[2][6] 김정렴은 혜화동 박종홍의 자택을 직접 찾아 특보제도의 목적과 박정희의 뜻을 전하였으나 박종홍은 고령이라는 이유와 밤새 연구하고 새벽에 취침하는 생활습관을 들어 김정렴의 추천을 사양하였다. 그러나 박정희가 박 선생에 한해서는
오후에 출근해도 좋으니 꼭 모셔오라고 지시한 것을 김정렴에게 전달받자 박종홍은 특별배려를 전해듣고 보좌관직을 승낙, 첫날부터 일반 공무원과 같은 시간에 출근하였다.[5] 대통령 특별보좌관에 취임한 얼마 후 박종홍은 박정희에게 국민 정신문화의 계도와 연구, 진흥을 위한 목적의 국민정신연구원 설립계획서를 작성하여 김정렴에게 협조를 구하고 박정희에게 건의하였다.[7]

사상가이자 민족운동으로는 한국 사상 연구가 전무하던 1972년 여름에 박종홍은 한국사상에 무관심한 당대의 지식인들을 질타하는 글을 <한국사상사>에 발표하였다.[1] 1968년 안호상 등과 함께 국민교육헌장 수립에 참여하였다.

사후[편집]

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으로 국민정신연구원 설립은 반드시 성취하고자 하였으나 국가재정 상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 후 박정희는 헬리콥터와 자동차편으로 후보지를 물색, 탐사한 뒤 1978년 6월 경기도 판교와 안양으로 가는 길목인 국사봉 기슭 현 위치에 박종홍의 유지대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을 창립개관하였다.[8] 사후 박정희는 내각에 특별 지시를 내려 국민훈장 무궁화장의 추서를 손수 지시하였다[9]

상훈 경력[편집]
한국학술원상
1970년 12월 대한민국문화훈장 대통령장
3·1문화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평가와 비판[편집]

열암기념사업회의 소광희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박종홍을 '한국철학 연구의 개척자'로 평가하였다.[1] 일생을 학문에 바쳤던 경건한 삶과 독실한 인품에 수많은 제자가 존경했다고도 한다.[10] 한국 실존주의의 효시라는 평가도 있다.[11] 김정렴은 서양의 철학사상을 우리나라에 올바로 소개했고 한국 사상연구를 본격적으로 체계화했으며 이퇴계와 이율곡의 학문에 정통했고 실학을 깊이 수용했다고 하였다.[5]

박정희 정부에 참여하였다 하여 반대편으로부터 국민교육헌장파시즘적 문서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고, 박정희 정부에서 활동한 경력을 놓고 군부독재에 협력한다, 박정희의 푸들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2] 

그러나 열암 박종홍의 초기 철학 사상을 발표한 경남대 김재현 교수는 우리의 전통 철학과 서양 철학을 종합하려 시도했던 박 교수의 철학에 대한 연구는 한국현대철학의 역사적 연구 뿐만 아니라 한국 지성사의 이해를 위해서도 필수적인 작업이라 하며 그에 대한 비판은 신중해야 한다고 하였다.[2]

물질에 매진했던 박정희가 정신문화 연구원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방향의 전환이었다. 문제는 정신 문화가 거기에 모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종홍의 또 하나의 실패는 제자를 키우지 못 했다는 것이다.


같이 보기[편집]
철학
민족주의
안호상
국민교육헌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정희
문정창
김정렴
김성칠

각주[편집]
이동:가 (우리 시대의 명저 50)<44> 박종홍의 '한국사상사', 한국일보 2007년 11월 7일 기사[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이동:가 “동아 문화”. 2004년 12월 1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7월 8일에 확인함.
박종홍,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정렴, 《아! 박정희》(중앙M&B, 1997) 29, 30쪽 참조.
이동:가 김정렴, 《아! 박정희》(중앙M&B, 1997) 30쪽 참조.
김정렴, 《아! 박정희》(중앙M&B, 1997) 29,30쪽 참조.
김정렴, 《아! 박정희》(중앙M&B, 1997) 30,31쪽 참조.
김정렴, 《아! 박정희》(중앙M&B, 1997) 31,32쪽 참조.
김정렴, 《아! 박정희》(중앙M&B, 1997) 3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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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일그러진 실천철학 : 책 : 문화 : 뉴스 : 한겨레

참고 문헌[편집]
  • 박종홍, 지성의 방향 (백영사, 1956)
  • 박종홍, 한국의 사상적 방향 (박영사, 1968)
  • 일지사, 스승의 길(일지사, 1977)
  • 손인수, 한국교육사상가평전 Ⅱ(문음사, 1990)

외부 링크[편집]「박종홍」,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민교육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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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암 박종홍 기념사업회『박종홍 전집』출간|논고·철학에서 수필까지 전생애 글 모두실어
중앙일보입력 1980.06.16 00:30

「20세기 한국이 낳은 큰교육자요 큰 철학자」로 평가받는 열암 박종홍선생(1903∼1976)의 글모음「박종홍전집」(전7권 형설출판사간)이 나왔다.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열암의 남긴 뜻을 기리는 후학들이 기념사업회 전집편찬위원회를 꾸며 만든 이전집은 1922년이래 반세기에 걸쳐 열암이 집필한 글들을 망라하고있다.이글을 통해 우리는 우리시대의 빼어난 철학자로서의일생에 걸친 사색의 발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다.ⓛ초기에 쓴 논고②논리학논저③철학개설④한국사상사(1)⑤한국사상사(2)⑥철학적수상⑦일기·수필·서한등으로구성된 열암의 글은 현대한국철학을 처음으로 체계화하려한 학자의집념과 노력을담고있다. 또「새날의 지성」「지성과 모삭」등쉽고더명쾌하게 생활의 지혜를보여주는 그의 수필들은 치열한사색의 온축이며 편린으로 60년대이래 많은 젊은이들을 감등케 한바 있다.그자신 충실한 삶을통해「철학을 산 노학자」라고 평가받고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미망인 장숙진여사를 만나 적은 자작시,여사를 생각하며금강산비로봉에 올라 채집한「에델바이스」등에서 그의 인간적인 애틋한정을 느낄수있다.「에델바이스」에 붙이는근의 시는 젊었을적 철학도의 풍모를 능히 짐작케한다.선생의 글들을 펴내기위해구성된 전집편찬위원회는 위원장에 김규영(서강대),편집위원에 박종현 이남영 이혜조 최정호교수등 선생의 제자들로 전집출판에서 나온 수익금을 기금으로하여 앞으로열암철학의 연구와 계승발전을위해 장학사업및 연구조성사업도 추진할 방침이다.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15390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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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암 박종홍의 생애와 사상
​1.
열암 박종홍(1903-1976)은 18세에 평양고등보통학교(4년제)를 졸업하고, 이어서 그 학교에 설치되어 있는 사범과에서 1년을 수학하고, 1종 보통학교 훈도 자격을 획득한 뒤 곧바로 전라도 보성(寶城)의 보성보통학교 훈도로 발령받아 내려갔다. 19세 때의 일이다. 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다고 하는데 거기에서 그는 사략(史略)ㆍ통감(通鑑)까지 읽었다고 한다.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로는 1920년대초 보성에는 아직도 조혼과 만학의 경향이 남아 있어서 한학을 많이 익힌 동갑내기 비슷한 학생들이 상투를 튼채 학교에 들어와서는 한시(漢詩) 시합을 하자고 덤비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1년 뒤 그는 대구의 수창보통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부터 시작되는 8, 9년간의 대구 생활이 열암의 생애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는 4년동안(1922-26) 거기서 훈도생활을 하였다.
첫해 여름방학에는 경주의 석굴암의 불상을 연구하였는데, 이것을 기연으로 [개벽(開闢)]이라는 월간잡지에 <조선미술의 사적 고찰(1)>을 1년 동안 연재하였다(1922, 5-1923, 5). 그 문장은 최남선의 독립선언서투이고 내용은 일반 국사책에 나올만한 수준이지만 내가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그의 용기이다.
당시 지식층이 얇았다고는 하지만 20세의 보통학교 교유로서 중앙의 월간지에 연재할 만큼 용기를 가젔다는 것은 요즘 청년으로서는 상상하기 쉽지 않다. 1925년에는 일본 문부성에서 시행하는 중등교원자격 시험(교육과)에 합격, 중등교사가 되는 자격을 획득해서 26년 대구 공립고등봉통학교(대구고보)의 교유로 발령받아 조선어와 한문을 가르첬다. 그때는 아직 조선어 말살정책을 시행하기 전이라 그는 교실에서 향가, 용비어천가,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사략(東國史略)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28년에는 <이퇴계의 교육사상>을 [경북의 교육]에 발표하였다.
29년에는 전문학교 입학 자격검정시험에 합격하여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의 선과생으로 입학했다. 선과생이란 예과과정을 거치지 않은 입학생을 가리키는데 이는 뒤에 대학에서 부과하는 시험에 합격하면 본과생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중등학교 교유는 대학을 나오고 운이 좋아야 얻어걸리는 직장인데 그의 학구열은 그것을 내팽개치고 서울로 올라와서 대학생이 된 것이다. 그의 이런 노력과 향학열이 평양의 동학이나 후배들에게 큰 자극이자 격려가 되었음은 여러 회상 속에서 발견된다.
그는 거의 설흔 살에 대학을 졸업하는 만학이었다. 일본에서 공부한 동년배가 귀국해서 전문학교에서 가르칠 때 그는 사각모를 쓰고 대학에 다녔다. 그러나 그는 쉬지 않고 노력한 덕에 그 늦은 세월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8, 9년 동안 대구 시절의 연구는 주로 유교중심의 한학에 바탕을 둔 것으로서 교육학 방면이었으나, 철학과에 들어온 뒤로는 그는 서양철학, 특히 독일 관념론 연구에 골몰하였다. 그는 더 넓은 세상을 향해 치달은 것이다. 33년 졸업과 동시에 대학원에 진학하였는데 이때 철학인들 끼리 모여 [철학연구회]를 만들고 잡지도 간행했다. 그는 <철학하는 것의 출발점에 관한 한 의문>이라는 글 한편을 발표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철학의 출발점은 현실이라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유의 초창기부터 그의 사유 속에는 현실문제가 자리잡은 것이다.
32년에는 장숙진 여사와 결혼하여 이후 슬하에 5남2녀를 두는 다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였다. 35년부터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출강하다가 35년에 전임교수로 발령받았다. 이화여전 교수시절에는 문과과장으로 보임되기도 하였다. 그의 강의와 지도는 많은 학생들로부터 존경받는 것이 되었다. 35년에는 특히 일본의 암파(岩波)서점에서 발간하는 유력한 학술지 [이상]에 ‘하이데거에 있어서의 지평의 문제’를 일문으로 발표하였다. 해방직전에는 이원구의 <심성록>, 이퇴계의 <경서석의>, 이덕홍의 <주역질의>, 이교의 <복성서>, 정이천의 <안자소호하학론>, 정혜화상의 <절요사기화족>등을 붓과 만년필로 필사하였다. 해방을 전후한 시기부터 그는 신문과 잡지에 많은 논문과 수상을 발표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그는 경성대학 철학과 교수로 취임하고, 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교수가 되었다. 그로부터 68년 정년 때까지 33년 동안 그는 문리과대학 교수와 대학원장으로서 대학을 떠나지 않고 오직 학문연구에만 정진하였다. 53년 수복 후 54년에는 학술원 일반회원과 한국철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55년에는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따라 1년간 미네소타 대학에서 연구하고는 귀국 길에 유럽 철학계를 둘러보았다.
그는 그 기회에 많은 세계적 지성을 방문하여 대담하였으며 그것을 발표하곤 하였다. 정년을 앞두고 그는 국민교육헌장을 초안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으며, 도산서원 원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69). 정년 후에는 잠시 성균관대학의 유학대학장과 대학원장, 한양대학의 문과대학장을 역임하다가 70년 박정희 정권의 대통령 교육문화담당 특보로 영입되어 약 5년간 전국의 각급학교를 방문해서 국민교육훈장의 이행을 독려하였다. 71년 다산학회 회장 추대, 75년 발병으로 이 직을 면제받고 치료하다가 다음해(76년) 3월에 서거하였다. 향년 73세.

2.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맨 처음에 쓴 것은 <일반논리학>(48)이다. 이 책은 당시 고등학교와 대학 1년생의 교재로 널리 읽혔다. 지금은 고등학교 수학에서 이미 기호논리학을 가르치고 있지만 그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교과서 구실을 할 수 있었다. 대학의 한 학기 교재로는 좀 부족했으나 그 뒤 여러 번 증보하였다.
그 다음에 나온 책이 부산 피난시절의 <인식논리학>과 <철학개론 강의>(53)이다. 전자는 당시의 지적 수준으로는 매우 학술적인 것이었고, 후자는 대학 강의안을 출판한 것인데 뒤에 <철학개설>로 증보개정(61)되었다. 이 증보개정판에는 우리나라의 선철들이 소개되어 있다. 이것은 한국적 사유를 처음으로 교과서에 반영한 것인데, 뒤에 한국사상 또는 한국철학이라는 개념이 잉태되는 기초를 만들 수 있었다.
거기에 이어 이미 신문과 잡지에 발표한 글들을 모아 <지성의 방향>(56), <철학적 모색>(59), <새날의 지성>(61), <현실과 구상>(63), <지성과 모색>(67)이라는 제호의 단행본으로 발표하였다. 수준높은 학술적 논문을 모아서는 <한국의 사상적 방향>(68), <한국사상사(불교편)>, <자각과 의욕>(72), <한국적 가치관>(75)을 간행하였다. 60년에는 <부정(否定)에 관한 연구>로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열암의 학문적 지향은 어디인가?
그는 <일반논리학>과 <인식논리학>을 저술하고는 이어서 논리학 체계를 구상하게 되었다. 그것은 위의 두 저술에 이어 <변증법 논리>, <역(易)의 논리>, <창조의 논리>를 저술함으로써 완성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변증법 논리>만을 유고(77)로 발표하였을 뿐 나머지는 손을 대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 논리학 체계가 학문적으로 가능한지 안한지는 별도로 치더라도 그 구상이 중단되었다는 것은 비단 열암 개인뿐 아니라 한국 철학계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그것이 완성되었어야 철학적으로 그 의의를 검토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경성제국대학은 일본 동경제국대학의 식민지 분교이었기 때문에 교수들은 전원 동경제대 출신이고 따라서 학풍도 거의 그것을 답습했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특히 사학과에서 우리의 역사를 형편없이 폄하하는 소위 식민지사관을 악랄하게 주장하는 것이었다. 철학과에서는 동경제대의 커리큘럼을 그대로 옮겨와서 독일철학 일변도로 가르쳤다.
그 시대의 일반적 경향에 따라 처음에는 신칸트학파의 영향 아래 주로 칸트와 헤겔 등 독일 관념론이 교수되었으나 이어서 후설의 의식현상학이 도입되고 거기서 혜성처럼 등장한 하이데거가 연구되었다. 이것이 19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중반까지의 일반적 흐름이었다. 30년대 후반부터는 전쟁준비로 광분하거나 또는 반전운동에 휩쓸려서 철학연구에 몰두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 철학연구 제1세대가 대학교수로서 철학 강의를 해야 할 처지가 되었을 때 그들이 가르친 것은 다름 아닌 칸트, 헤겔, 후설, 하이데거가 주이고 거기에 곁들여서 니체 정도가 언급되었다. 철학사를 가르쳐야 했기 때문에 플라톤ㆍ아리스토텔레스ㆍ데카르트ㆍ스피노자・로크 등이 언급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6ㆍ25 전란을 당하여 삶이 극한상태에 빠지자 실존주의 사상이 물밀 듯이 들어와서 50년대를 풍미하였다. 지성계에서는 사르트르・까뮈 등이 폭발적으로 읽혔다. 6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우리 것에 대한 자각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열암의 한학과 이퇴계, 이율곡, 최한기 등을 중심으로 한 유교연구(주로 성리학)가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강의도 50년대 후반부터는 한국사상의 방향으로 움직여 갔다. 논문도 주로 한국사상에 관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다. 위에서 언급한 <한국의 사상적 방향>(68), <한국사상사(불교편)>, <자각과 의욕>(72), <한국적 가치관>, 미처 간행하지 못한 <한국사상사논고>(유학편)등이 이를 증명한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그의 저술은 첫째 논리학 계통과 철학 개설류, 둘째 <지성의 방향>, <철학적 모색>), <새날의 지성>, <현실과 구상>, <지성과 모색> 등 계몽적인 구상과 모색, 그리고 셋째 한국사상 연구이다. 구상과 모색은 마지막 단계인 한국사상 연구로 향하는 길 위에서의 모색이고 구상이다. 이것으로 보면 그의 사상적 고민의 축은 한국사상에 가서 멎는다.
열암은 유가적 인품과 교양을 갖춘 철학자였다. 나는 그분을 4, 5년 동안 모셔 봤지만 한 번도 화내는 모습을 본 일이 없다. 그는 온화하고 자상한 어버이 같은 분이었다. 누구에게나 늘 친절하고 자상하였다. 남을 험담하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고, 불필요한 객담이나 농담 따위는 아예 입에 올리지 않는 근엄한 군자요 인격자였다. 강의실에서 그는 명강의로 유명하였다. 발의(發疑)로 시작해서 결론에 이르는 논의과정이 분명하여 조금도 의심스런 데가 없었다.
글씨는 명필이어서 분필로 쓰는 판서도 아름다웠다. 저 앞에서 말한 붓과 만년필의 필사본은 뒷날 영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나눠 가젔는데 그 내용보다도 글씨가 아름답고 힘차서 여간 탐나지 않았다. 50년대 졸업생들은 열암 선생을 모시고 결혼식 올리는 것을 큰 영광과 보람으로 여길 정도로 제자들의 존경을 한 몸에 안았다. 그는 천성적으로 애국자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교육문화 특보로 근무할 때 한국의 지성계는 그것을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한국의 대표적 지성이 독재정권을 비호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로는 그는 참으로 유학적 애국자였고, 그래서 흔들림 없이 자기의 외로운 길을 거침없이 걸어갔던 것이다. 그는 뛰어난 교육자이었다. 초ㆍ중등교와 대학에서 교육을 실천했으며, 처음에 쓴 논문도 교육이고 교유로서 지망한 교과목도 교육이었다. 생의 마지막 단계에서 관여한 것도 국민교육헌장이고 마지막으로 국가에 봉사한 것도 교육문화 특보이었으며, 5년간 각급학교에 가서 강연한 것도 교육헌장이었다. 유가적 인격과 한국사상 연구 그리고 교육의 실천과 애국정신, 나는 열암의 일생을 이렇게 특징짓는다.

3.
이제 제자들이 그 분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를 적어야 할 것 같다. 그것으로 그의 학문과 인격 및 후인들에게 준 그의 감화가 짐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63년 열암의 회갑을 앞두고 제자들은 마치 계돈 모으듯이 모금하여 회갑기념논문집을 준비하였다. 논문도 모았는데 이것을 모두 열암에게 주어서 손수 골라서 게재하도록 했다. 그것이 당시 유일한 제자들만의 회갑기념논총이었다.
그런데 논문집을 발간하고 보니 약간의 돈이 남았다. 이것을 가지고 그때 정체상태에 있던 한국철학회의 회지 [철학]을 대신하는 젊은이들 중심의 학회를 구성하기로 하고, 앞의 기념논총에 싣지 못한 논문들을 거기에 발표하기로 하였다. 학회명칭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 하는 문제로 약간의 잡음이 생겼다. 일부에서는 열암을 기리기 위해 모은 돈이고 그것을 밑천으로 만드는 학회이니 ‘열암철학회’로 하자고 하는가 하면, 열암의 동료교수 몇 분은 졸업생을 열암이 독차지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를 극력 반대하곤 하였다. 결국 고유명사를 정하지 못한 채 회지를 발간하지 않을 수 없어 그냥 ‘철학연구회’로 하고만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고유명사 없는[철학연구회]라는 학회명의 유래이다. 나는 그때 그 회지 [철학연구] 제1호의 편집자이었다.
열암이 세상을 떠난 직후 76년에는 제자들 중심으로 ‘열암선생유고간행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다음 해(77)에는 <변증법적 논리>가 유고로 간행되었다. 같은 해 <한국사상논고 유학편>과 <스승의 길>이라는 회상록 모음이 간행되었다. <스승의 길>은 두 번 발간되었다. 첫 번째는 77년에, 두 번째는 20년 후에 재간되었는데 후자에는 전자에 미처 수록하지 못하고 빠졌던 글들, 즉 여기에 수록하기로 청탁받아 쓰지 않고 이미 다른 곳에 발표한 회상록들을 마저 모아서 수록한 것이다.
대우재단에서는 이 책을 구입해서 그해 서울교육대학 졸업생들에게 기증하곤 하였다. 여기에는 동료교수와 평양고보 동창들, 대구 교유시절과 경성제대 시절의 제자 후배들,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시절의 제자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철학과 교수시절의 제자들, 대학원장 시절에 인연맺은 사람들,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 언론사 등이 모두 참여하였다. 필자는 모두 82명이었다. 그 모든 글은 열암의 인품을 찬양하고 그로부터 받은 교훈과 격려를 회상하고 기록한 것들이었다.
열암은 3월 17일에 작고하였는데 작고한 다음해부터 졸업생들이 모여 3월 둘째 토요일에 산소참배를 시작했다. 이 행사는 약 30여년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졸업생들도 세상을 떠나는데다 사모님마저 작고하신 2007년을 마지막으로 나는 참배를 중단하기로 하고, 그 대신 모여서 열암을 기념할만한 이야기를 하기로 하였다. 그 첫 번째 행사로 나는 ‘한국철학 제1세대의 철학연구’를 발표하였다(08). 거기에 이어 제2차로 50년대의 학풍을 발표하기로 했다.
78년에는 열암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다. 80년에는 <박종홍전집> 전7권이 형설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오자와 오식이 너무 많은데다가 많은 글이 수록되지 못해 언젠가는 다시 간행해야겠다는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98에 대우재단의 지원을 받아 나는 <박종홍전집> 전7권을 재간하였다. 10년간의 교열과 새로 발견된 원고를 모두 수록해서 이번에는 완전한 것으로 만들어 묘소에 가서 고유제를 지냈다.
2003년에는 열암탄생 1백주년을 맞아 세 사람에게 열암철학을 발표하게 하고 이것을 열암을 기리는 회지 [현실과 창조] 제3권에 수록하였다. 이것 역시 묘소에 가서 헌증하였다. 이 일들이 사모님 생전에 한 일이라 보람 있었다. 열암기념사업회에서는 해마다 훌륭한 업적을 낸 저자를 발굴하여 시상하기 시작했다. 이 상은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30회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상금은 처음에는 3백만 원이었으나 곧 5백만으로 증액했다. 그러나 금리가 떨어져 한정된 기금이 줄어들고 물가는 올라서 5백만 원의 시상도 해마다 하기가 버거워 몇 해전부터는 시상을 격년으로 하고 있다. 나는 열암기념사업회 회장을 11년간 역임하다가 2008년에 그 책을 벗었다. 이것으로 나는 생전의 열암선생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만분의 일에 보답한 것으로 자위하고 있다.

<참고문헌>
1. 서울대 명예교수 소광희, 서울대동창회보 17호. 20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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