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8

김파란 · 국가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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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
2017년인가 한국작가회의는 '친일문인기념상' 에 대한 입장문에서 "한국작가회의 이름으로 회원의 잘못을 추궁하는 방식은 적절치 않다" 라며 조직의 권위로써 구성원을 제어할 수 있으리라는 착상은 그동안 작가회의가 줄기차게 맞서 싸워온 국가폭력의 작동 방식과 유사한 바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 글을 읽으면서 국가폭력과 청산작업도 구별 못하는 작가회의가 그동안 어떻게 국가폭력에 맞서 싸웠는지 참 의아했다.
국가폭력과 청산은 다른 범주의 개념이다. 즉 국가폭력의 물리적 학살이나 인권탄압은 대량으로 인명을 살상하고 개인의 존엄을 훼손하는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를 가르키는 것이고 일제 잔재 청산이나 제국주의 앞잡이 청산 등은 명분이나 의도의 차원인 것이다. 과거사 청산이 합법적이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행해 질 수도 있고 폭력적 초법적 차원으로 일어날 수 도 있는 것이다.
그럼 '친일문인 기념 문학상'이 과연 작가들의 생각처럼 문단의 이해관계로 축소시켜 자신들의 자율적인 권고만으로 끝나도 되는 문제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오만한 예술지상주의가 친일 잔재의 청산이라는 전 사회적 문제를 문단 내부의 문제만으로 축소시켰다. 이후 문단 내 친일문인 기념 문학상 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은 정치적이고 수준 낮은 전체주의적 사고를 가진 사람으로 규정되었고, 친일 문학상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문학의 순수성과 학자성을 지닌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친일문학상 폐지가 작가들 스스로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질 도리가 있겠는가?
일제 잔재의 청산이나 독재 유산의 청산과 같은 전 사회적 과제에는 어떤 좌와 우도 없고, 진보와 보수가 없다. 그러니 당연하게 이 친일문학상도 일제 잔재의 청산 작업으로 개념 정리가 되어야 한다. 지금 작가회의의 행태처럼 친일문학상 폐지를 어느 일방의 이해관계가 달린 것처럼 왜곡되는 순간 청산 작업도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문학계에 벌어지고 있는 일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친일문학이 범했던 폭력성을 정확하게 이해할 안목과 지식이 없는 이들이 친일문학을 한 사람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만들고 이를 선양한다는 것은 결국 이런 폭력에 동참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문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이런 수준이라는 것이 나는 지금도 이해 하기 어렵다. 내 서재에 있는 저자들 중에서도 친일문학상은 비판해도 그 상을 받은 작가들을 비난할 수 없다는 황당한 말을 하기도 했고, 그럼 친일문학을 다 버려야 되느냐고 항변한 사람도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친일작가들의 작품을 모아 책을 만들어내고 이를 평가받게 하는 일은 꼭 해야 하고 값있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 문학사의 참된 면모를 드러나게 하여 평가를 받게 한다는 의미에서 숨겨두기보다는 오히려 출판을 하여 드러나게 하는 것이 타당한 일이다.
하지만 친일문학의 출판 공개와 친일문학가를 내건 문학상의 제정은 전혀 다르다. 즉 어떤 사건을 기억한다는 것과 기념한다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학교, 언론, 지자제 등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기구가 대대적으로 동원하는 담화나, 포상체계는 문화적 경관을 바꾸어 어떤 기억은 소거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부분만 재호출해서 재형성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런 정치 권력의 습성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문학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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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 2
언제까지 친일을 말하고 토착왜구를 말할 것인가, 라며 과거사 청산을 비아냥 거리는 게시글을 많이 볼 수 있다. 또 자유주의 연대 대표인 신지호가 말했던 '일본을 저항적 민족주의 대상으로 삼는 시대착오적 조류를 개탄한다' 류의 글들도 보인다. 이들의 게시글 밑으로 달리는 오만한 댓글들은 시원하지만, 공동체가 겪은 심리적 상흔과 지금도 그 상흔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투쟁하고 있는 피해자들의 투쟁은 안중에도 없다.
이렇게 과거사 청산이라는 전 사회적 문제에서조차 항상 진영 논리에 빠지고 있다.
나는 문재인 정부가 정치적으로 이용했던있는 관제 애국주의를 여러번 비판했고 이런 역풍은 식민지배의 피해자들에게 돌아갈 것임을 말했다. 그래서 이 상황이 더 뼈아프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진심으로 사과하고, 배상할 일이 있으면 배상하고 그리고 화해해야 한다. 그것이 전세계가 하고 있는 과거사 청산의 보편적 방식이다. 비난의 화살이 종주국을 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유독 한국의 지식인들 중에는 우리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많다. 반대로 일본의 지식인들 중에는 자신들 탓으로 여기는 '자학적 역사관으로 벗어나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말이다. 이 양국의 지식인들로 인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한데도 역사 왜곡은 그치질 않는 것이다.
우리가 해방 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외친 개혁이 어떤 식으로 좌절 되었는지를 돌아보는 것도 '과거사 청산'과 관련이 있다. 민주정권이라고 말하던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를 돌아보라. 이 정권들이 보여준 것은 개혁의 실종과 문고리 인사, 그리고 측근비리를 포함한 대규모 게이트들이었다. 대통령의 후광을 입고 일어난 비리 사건들로부터 대통령과 정부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급기야 박근혜 정부에 와서는 대통령이 직접 비리에 연루되거나 이를 직접 지시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대통령 스스로가 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잘하는 기업'을 소개해줬을 뿐'이라고 기자에게 항변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문재인 정부 또한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손혜원으로 시작해 조국 윤미향으로 이어지는 권력형 범죄와 시민 사회의 타락은 시민들을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고 발생하고 있는 것일까?
한국 현대사가 시작되는 1945년 시점에서부터 그 근원의 단초를 찾을 수 있다. 해방 후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일제 잔재의 청산이었다. 당연히 한국 정치에서는 일제 잔재의 청산에 찬성하는 사람들과 잔재가 계속되기를 원하는 사람들 사이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어야 했다. 그러나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협정을 거치면서 정국은 청산의 전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좌익 세력만의 정치적 이해관계로 축소되었다. 이후 친일파 청산을 외치는 사람들은 모두 '좌익'으로 규정되었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민족적 과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저 어느 사회에나 있는 '보수 우익'으로 평가되었다. 즉 '민족 대 반민족'의 프레임이 '좌익과 우익'의 프레임으로 바뀌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 프레임은 독재의 유산을 청산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답습된다. 독재의 유산을 청산하는 것은 어느 정파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화 이후 사회적 차원에서 실행되어야 할 문제였다. 그러나 이 또한 어느 순간 진보와 보수의 구도로 바뀌었다. '독재 청산과 독재 유산 지속'의 프레임이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으로 대치되면서 독재의 유산을 청산하는 작업들은 진보만의 정치노선이 되었다. 독재시대의 비합리적이고 냉전적인 '가짜 보수'를 청산하는 것은 진보와 보수를 넘어서는 전 사회적인 문제였기에 진보와 보수 시민사회가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였음에도, 정치세력 중 어느 일방의 이해관계가 달린 것처럼 왜곡되었고 그 순간 독재 유산의 청산 작업도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다.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이 청산 작업의 중대성과 시급함에도 불구하고, 그 작업이 실행될 수 없는 상황에 진보세력 역시 편승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일재 잔재의 청산이나 일제 앞잡이 청산 등은 명분이나 의도의 차원이다. 과거사 청산이 합법적이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행해질 수도 있고, 폭력적 초법적으로 일어나 인명 손실도 일어날 수 있다. 그만큼 국가폭력이나 이런 제국주의 잔재의 청산은 사회적으로 중대한 작업이다.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그 끔찍한 폭력이 계속 되풀이 되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건 죄익과 우익이 있고, 진보와 보수가 있으며,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사이의 경쟁이 있다. 그러나 일제 잔재의 청산이나 독재 유산의 청산과 같은 전 사회적 과제에는 좌와 우도 없고, 진보와 보수가 없다. 그러나 이 과거사 청산 작업의 왜곡된 프레임으로 항상 사회 개혁을 위한 토대인 청산 작업은 좌초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실패는 고스란히 민중의 피로 돌아왔다.
한국 근대사가 시작되는 1945년 시점에서부터 이 남한의 모든 고통(학살)의 근원은 제대로 단죄하지 못한 과거사 청산이었다. 이 미청산의 역사는 그대로 민중 학살의 역사로 이어진다. 수 많은 양민 학살의 역사. 제주에서 삼만 이상을 죽였고, 베트남 가서 또 죽였고, 광주에서 또 죽였다. 이게 다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거의 같은 계열의 집단이 동일한 행동을 반복한 것이다. 그 이후 군사독재의 역사. 그 안에서 있었던 수많은 고문. 박종철 김근태만이 아닌 수 많은 고문 피해자가 있는데 고문 가해자 한 놈도 제대로 단죄하지 못했다.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수 많은 사법살인의 역사. 넥타이 맨 살인자들이다. 왜 이들은 처벌되지 않는가? 법복을 입은 짐승들이 앉아서 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사형으로 죽였다. 그 사법 살인자들 즉 가해 법관들 단 한명도 단죄하지 못했다. 정말 있을 수 없는 역사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 상층부 지식인들은 '과거사 청산'을 외치는 사람들을 향해 뭐라고 비아냥 거리고 있나? 참담한 현실이다. 어떻게 이런 끔찍한 학살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도 불구하고 단 한번의 제대로 된 '과거청산'이 없었는가?를 묻고 또 물어서 이런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그들이 해야 될 사회적 책무다. 그런데 그들은 그저 민중들의 이런 열망을 열등감이나 넋두리로 이해한다. 지식인 사회가 퇴락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현상이다.
진보의 추동력은 뭘까? 갈등과 투쟁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래서 지배자(계급, 인종, 국가포함)의 기득권 포기를 이루어 내야 한다. 지금 리버럴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외치는 민족주의는 정말 독인가! 그렇다면 탈민족주의 혹은 민족주의 해체가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코로나 시대를 겪으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앞으로 지구는 세계화 보다는 지역화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물론 퇴행적 민족주의, 즉 민족주의를 이용한 독재는 비판받야 한다. 하지만 강대국과 약탈적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지역적 민족주의를 폐기하는 것은 지극히 나이브한 발상이다. 또 국민통합과 나라발전을 위해서 민족주의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의 속내는 민중의 수탈과 피로 이 땅에서 이룬 기득권의 토대를 과거사 청산이나 개혁으로 절대 뺏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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