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4-11

“고종은 망국 책임자… 대중문화가 돈벌이 위해 역사왜곡”


“고종은 망국 책임자… 대중문화가 돈벌이 위해 역사왜곡”


입력 : 2019-03-13
조선 황실, 그들은 정말 애국자였나



▲ 창덕궁 인정전에서 촬영한 ‘이왕가’(李王家)의 사진. 1913~1915년쯤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왼쪽부터 의친왕 이강, 순종, 덕혜옹주, 영친왕 이은, 고종, 순종의 왕비 순종효황후 윤씨, 의친왕의 왕비 덕인당 김씨,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 대한제국 황실은 경술국치 뒤 일본으로부터 이왕가로 책봉받아 식민지 기간 동안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개혁군주 고종(1852~1919), 조선을 지키려다가 억울하게 살해된 명성황후(1851~1895),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에게 독립의식을 키워 준 덕혜옹주(1912~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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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지금 대한민국의 영화와 드라마, 소설, 뮤지컬이 보여 주는 조선 황실 인물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열강의 조선 침탈 압박에도 나라를 구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한 것으로 그려진다. 문제는 이런 내용이 대부분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일부 문화계가 돈벌이를 위해 반성해야 할 부끄러운 역사까지 항일이라는 이름으로 세탁한다. 학계에서는 “문화 콘텐츠의 특성상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상상은 가능하지만 일부 작품은 가히 역사 창조 수준”이라고 비판한다. 조선 망국의 책임을 모두 일본에 떠넘겨 황실과 당시 지도층의 과오를 희석시키는 ‘분노 마케팅’의 산물이라는 설명이다. 우리는 일본이 위안부 강제 동원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비롯해 “역사 왜곡을 일삼는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우리 역시 또 다른 의미의 ‘역사 왜곡’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1918년 영친왕의 조선 방문 당시 황실 가족과 총독부 관료들이 연회 뒤 덕수궁 석조전에서 같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 영친왕, 고종, 순종.
서울신문 DB●“조선 황실 남성들 日장교 돼 일왕에 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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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큰 인기를 얻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은 항일 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의병과 긴밀히 소통하는 ‘우국(憂國) 군주’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태진(76) 서울대 국사학과 명예교수 등 일부 학자도 “개혁가로서 그의 진면목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패하기는 했지만 광무개혁(1896~1904) 등을 통해 청과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주국을 만들려고 나름 노력했다는 설명이다. 이런 모습은 다양한 작품에 투영돼 고종을 ‘비운의 군주’로 인식하게 만든다.

하지만 학계 대다수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다른 나라들이 입헌군주제로 전환해 민주주의로 나아갈 때 오직 고종만이 전제군주제로 되돌려 놓아 망국을 앞당겼다는 비판이 크다. 청일전쟁(1894~1895) 때는 미국 공사관으로, 러일전쟁(1904~1905) 땐 프랑스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갑신정변(1884)과 을미사변(1895) 등 변고가 생길 때마다 자신을 외세에 의탁하느라 바빴다. 1898년 독립협회가 의회 개설 등 개혁을 요구하자 세계사적 흐름을 읽지 못하고 되레 이들을 탄압한 것도 크나큰 과오였다.



당시 조선사회를 기록한 외국인들도 그를 ‘무능한 군주의 전형’으로 봤다. 
1910년 중국의 대표적 개혁가 량치차오(1873~1929)는 “조선 멸망의 최대 원인은 궁정 자체에 있었다”고 개탄했다. 조선이 입헌군주제로 탈바꿈하지 못해 세계 발전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고 이로 인해 결국 망국에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고종의 잘못을 그대로 지적한 ‘불편한 진실’이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조선 민족 전체를 일본에 넘긴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13일 “고종과 황실은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지키고자 조선의 식민지화에 가장 앞장서 협력했다”며 “조선 황실은 식민지 기간 내내 (백성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이 제공하는 특권을 누렸다. 이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반민족 행위”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조선 황실은 1910년 경술국치 뒤로는 별다른 국권 회복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일본으로부터 ‘이왕가’(李王家)로 책봉된 뒤 엄청난 재정 지원을 받았다. 경술국치 때 작성된 한일병합조약에는 조선 황실의 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조문이 빼곡히 담겨 있다. 황실 인사들은 일본식 고등교육을 받았다. 특히 남성들은 일본군 장교가 돼 일왕에 충성을 바쳤다. 그나마 의친왕 이강(1877~1955)이 1919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을 시도한 것이 거의 유일한 항일 운동이었다. 1919년 3·1운동 시위에 참가한 학생의 기록에는 “백성들은 나라를 빼앗겨 가난 속에서 힘들게 사는데 조선 황실은 너무도 호화롭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실망했다”고 나온다.
●백성들에게 ‘늙은 여우’로 조롱받은 명성황후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는 대사로 유명한 명성황후 역시 매스컴에 의해 이미지가 조작된 대표적 황실 인사다. 일부 문화계에서는 그를 ‘조선의 잔다르크’로 칭송한다. 국민들의 인식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개인적 원한 때문에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1821~1898)과 권력 다툼을 벌여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고 무속 신앙 등으로 국가 재정을 파탄 낸 ‘세기의 악녀’로 평가한다.

일부에서는 그가 “당시 조선의 국가 규모를 감안할 때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를 넘어서는 사치를 부렸다”고 지적한다. 1985년 시해 당시 일본 자객들은 명성황후를 ‘늙은 여우’라고 불렀다. 그 별명은 일본인들이 새로 지은 것이 아니라 당시 그의 악행에 분노해 조선인들이 붙였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명성황후는 소설과 드라마, 영화, 뮤지컬, 무용, 뮤직비디오 등에서 조선을 지키려고 싸우다가 희생된 애국자로 그려진다. 그의 최후가 너무 비극적이어서 대중의 안타까움이 과잉 이입된 탓이다. 하지만 역사 전공자들은 “(그런 사정을 감안해도) 우리나라 문화계가 명성황후를 너무 미화했다”고 비판한다.

익명을 요구한 문화평론가는 “명성황후가 대중에게 좋은 이미지로 포장된 것은 2001년 KBS에서 그의 삶을 드라마로 방영하면서부터다. 국민에게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전달해야 할 공영방송이 되레 망국의 주범을 구국의 위인으로 탈바꿈시켜 놨다. 제대로 된 고증 없이 시청률 지상주의에 매몰돼 ‘조선은 선(善), 일본은 악(惡)’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문화 콘텐츠를 생산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덕혜옹주 조선에 살 때부터 기모노 입어”

2016년 개봉 당시 600만명 가까운 관객을 모은 영화 ‘덕혜옹주’도 역사 왜곡 논란으로 입방아에 올랐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인 이덕혜는 1912년 고종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1925년 강제로 일본 유학을 떠났고 1931년 쓰시마번주 귀족과 원치 않는 결혼을 했다. 1962년 극심한 정신질환 상태로 한국에 돌아와 1989년 창덕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영화 속에서 덕혜는 당시 시대 상황을 마음 깊이 고민하고 일제에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일본 옷 입기를 거부하고 조선인 유학생들과 항일 교류 모임을 가졌다.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들을 격려하는 연설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돕고자 중국 상하이 망명도 추진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일제의 괴롭힘으로 정신병을 얻어 힘든 말년을 보냈다. ‘인간 이덕혜’는 분명 우리 역사의 희생물이기는 했다.

하지만 역사 속 덕혜는 조선에 살 때부터 기모노를 입었다. 정신병 증세도 일본의 압박이 본격화되기 전인 10대 때 나타났다. 그가 조선의 독립운동에 간여했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영화 속 내용은 원작소설 ‘덕혜옹주’를 바탕으로 허진호 감독이 만들어 낸 상상의 소산일 뿐이다.

이원규(72) 역사소설 전문작가는 “우리 문화계에 도를 넘는 역사 왜곡이 심각하다. 어떤 작품에서는 등장인물이 살아있는 왕에 대해 ‘우리 고종께서는…’이라며 시호(죽은 뒤 왕에게 내려지는 이름)를 부르기도 한다”며 “최소한의 지식도 없는 일부 작가들이 역사의 궤를 반대 방향으로 바꿔 놓으려는 듯한 콘텐츠를 생산한다. 문화계 내부에서도 문제의식은 있지만 ‘동업자 정신’ 때문에 비판이 쉽지는 않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0314009001&fbclid=IwAR3kkBwlG0BxO5VzuQPl63Wy_VuHs_rQhocxVwjsOeGRWGNv7VPUpM9x6Fw#csidxbd6b5aa20e08f1ab34d52740a18a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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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들지만 한 가지가 아쉬운 칼럼

서울신문에 마음에 드는 칼럼이 하나 실렸다. <고종은 망국 책임자… 대중문화가 돈벌이 위해 역사왜곡 - 조선 황실, 그들은 정말 애국자였나>라는 제목의 칼럼이다.

나도 최근 페이스북에서도 몇번인가 고종을 비롯하여 조선왕실의 일원들과 '항일운동' 및 '대한민국'을 연결 짓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이야기했었는데, 그런 측면에서 이 칼럼은 아주 시의적절하다. 역시 "나에게도 지면을 할애해주신 서울신문이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크크크)

그런데, 칼럼에 사용된 사진에 관한 설명 하나가 좀 아쉽다. 아무래도 이 설명은 틀린 것 같다.

칼럼 속 2번째 사진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달려 있다.

"1910년 8월 한일 강제병합 뒤 고종이 조선총독부 관리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앞줄 왼쪽부터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 영친왕, 고종, 순종."

그런데 1910년 8월 당시에는 '조선총독'이라는 직위 자체가 없었다. 당시에는 '한국통감'이라는 직위만 있었고, 이 당시 이 직위의 주인은 3대 통감이었으며, 10월부터 제 1대 '조선총독'이 되는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그리고 사진에 나오는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데라우치에 이어서 2대 조선총독이 되는 것은 1916년의 일이다. 또한 영친왕 이은은 1897년 생이다. 만약 이 사진이 1910년의 사진이라면, 당시 이은은 13살이었을테니 아직 어린아이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진 속 이은은 최소한 10대 후반은 되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진이 1910년의 사진일 가능성은 낮다고 할 수 있다. 대신, 요시미치가 등장하고 있고, 고종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보면, 1916년에서 1919년 사이에 찍은 사진일 것으로 생각된다.

덧; 석지훈님께서 해당 사진에 대하여 귀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그대로 옮깁니다.

"기사의 두번째 사진은 원본 사진 유리원판의 기록에 따르면 1918년 1월 23일 오후 2시에 촬영된 것입니다. 영친왕이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에 임관되기 전에 잠시 "고국방문"을 했는데 (1월 15일 ~ 1월 24일), 그때 촬영된 사진이지요. 당시 촬영된 일련의 사진 유리원판 원본은 몇 해 전 모 재일교포 수집가가 발굴한 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해서 현재 그곳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원본 사진은 상당히 큰데, 그 중 일부만 잘라서 들어간 사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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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in-Soo Kwack 이 사진에 대한 이야기
    Image may contain: 9 people, people sit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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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기현 곽쌤께선 근대사에도 탁월한 안목을 가졌다고 봅니다~^^ 초대 통감부의 대표는 이토 히로부미였으며 이후 조선총독부가 만들어졌으니 설명의 오류가 맞습니다.
  • Oh-sung Kwon 현대는 반봉건과 반제국주의, 반파시즘 투쟁의 산물이어야 하는데... 혈연 민족주의에만 현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죠. 그 결과가 임시정부가 승계를 거부했던, 앙시앙레짐 그 자체였던 이씨 왕조에 대한 향수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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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문영 추측은 정확하셨는데, 이 사진은 위작이라...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
    고종 황제 가족사진 '조작' 됐다
    OHMYNEWS.COM
    고종 황제 가족사진 '조작' 됐다
    고종 황제 가족사진 '조작'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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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in-Soo Kwack 이문영 그러고보니, 1번째 사진에 대한 저 논란점도 기억이 나네요. (크크크 그런데 제가 이문영 선생님 포스팅에 댓글 다는 그 순간에 이문영 선생님께서는 제게 댓글을 달아주신 것 같아요! 이런 텔레파시....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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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in-Soo Kwack 공기현 전혀 그렇지는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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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in-Soo Kwack 권오성 네, 피식민 자체와 항일을 동일시하는 습관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이건 현대에 와서는 반제국-반군국주의와 반일을 동일시하는 습관으로 이어지는 것도 같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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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in-Soo Kwack 해당 사진의 원본입니다. 관련 내용은 원문에 덧붙였습니다.
    Image may contain: one or more people, crowd and outdo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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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iHoon Suk 감사합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영친왕의 고국 방문 일자를 약간 틀려서 지금 수정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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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iHoon Suk 그나저나 친추 감사드립니다. 전부터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Write a reply...

  • Dong Moon Kim 지금은 이렇게 사신 설명이 담겨있는 듯합니다.

    "창덕궁 인정전에서 촬영한 ‘이왕가’(李王家)의 사진. 1913~1915년쯤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왼쪽부터 의친왕 이강, 순종, 덕혜옹주, 영친왕 이은, 고종, 순종의 왕비 순종효황후 윤씨, 의친왕의 왕비 덕인당 김씨,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 대한제국 황실은 경술국치 뒤 일본으로부터 이왕가로 책봉받아 식민지 기간 동안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 Min-Soo Kwack 그건 1번째 사진에 대한 설명이고요, 저는 2번째 사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번째 사진에 대한 설명도, 저를 비롯한 몇몇 분들의 제보와 건의에 의해서 지금은 "918년 영친왕의 조선 방문 당시 황실 가족과 총독부 관료들이 연회 뒤 덕수궁 석조전에서 같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 영친왕, 고종, 순종."로 바뀌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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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고증 없이 시청률 지상주의에 매몰돼 ‘조선은 선(善), 일본은 악(惡)’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문화 콘텐츠를 생산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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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동진 고종과 민비 사악했죠. 왕이 관직을 팔아 그걸로 치부를 할 정도였으니. 서재필 가문 완잔히 박살내고 이승만도 고문을 하도 해 둘 다 이왕가에 치를 떨었죠. 조선민중의 적입니다. 일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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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진 제대로 된 기사가 나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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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수태 기사에서 지적한 값싼 한일 근대사 인식이 횡행할 때 조만간 기사에서와 같은 반론이 등장할 줄 알았습니다. 문제는 값싼 근대사 인식이나 이런 반론이나 역사 인식의 지평이 별 차이가 없다는 것, 심각한 후유증만 따지자면 후자쪽이 오히려 더 심각하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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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황흠 값싼 소비적 소설을 역사로 왜곡 했으니...저도 일부분 왜곡을 받아 들였는데 반성해봅니다. 언론이나 방송이 참 심각합니다. 역사적 사실을 기초하지않고 고작 백년 조금 넘는 시대조차 소설로 써버리니....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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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eve Moon 망국의 주범에다가 . 일제에 가장 충성한 파렴치한 친일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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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경철 서울대 국사학과 이태진 교수는 고종 찬양론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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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this article, 강종일 박사 sent me the following response:


반아님 고종에 대해 쓴 기자의 일방적 주장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고종이 군주로서 외국공관에 피신하려는 행동과 동립협회를 탄합하였고 일본의 자금으로 호의 호식 했으니 무능한 군주로 평가했습니다. 그는 고종의 잘못된 행위만을 기준을로 판단하고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전연 언급이 없습니다. 

다음은 나의 반론 제기입니다. 

  1. 첫째, 고종은 일본의 불한당들이 경복궁 내전까지 들어와 왕비를 시해하고 불태웠습니다. 이에 왕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피신할 공관을 문의한 것은 당연하지요. 일본은 조선에서 중국만 축출하면 조선을 지배하는게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 했겠지요. 그러나 중국이 패전으로 돌아간 후 민비는 국가의 생존전략으로 친러 정책을 택한것은 당연한 외교지요. 일본이 민비의 친러정책에 제동을 걸기 위해 국모시해를 한 것아라 생각 합니다. 
  2. 둘째, 고종은 미국이 피신을 거절하자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했지요 
  3. 셋째, 일본은 갑오경장 으로 고종을 로버트 왕으로 만들고 조선 내정에 간섭했웁니다. 
  4. 넷째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를 고종이 해체한 것은 협회가 민권사상을 강조한 후 왕권과 군주제를 위협했고 서재필이 초빙 계약금 10 만불 지급 강요 등으로 협회를 해산한 것입니다. 
  5. 다섯째, 고종은 일본보다 먼저 조선의 전기와 전철을 부설하였고 국제적십자에 먼저 가입했으며, 끝으로 고종은 국권을 수호하려고 미국 루스벨트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특사를 7번이나 파견하고 협력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친일정책으로 고종의 요구를 무시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고종은 결국 나라를 일본에 빼았겼으니 성공한 군주는 아니나 이본과 기자가 주장한 것과 같이 무능한 군주는 아니라고 분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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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진 ‘고종 구하기’의 함정

‘긍정적 역사 창출’ 목적 의식에 투철하다 ‘자위 사관’으로 기운 건 아닌가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겨레 21 컬럼 2007년11월29일 제6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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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각의 보수적인 사학자들이 고종을 ‘계몽군주’쯤으로 높여주고… 예술인들이 명성황후를 뮤지컬의 주인공이자 민족 저항의 상징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당시 백성들에게 고종의 집권기는 분노와 절망의 시대였다.”


그가 고종시대를 재조명한 이유



△ 고종(사진)은 무능했는가, 아니면 자력 근대화를 위해 애쓴 인물로 평가해야 하는가? 식민사관과 자위사관의 어디쯤에 놓고 고종을 다시 봐야 할까? (사진/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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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박노자가 2003년에 출간한 <나를 배반한 역사>에서 한 말이다. 이런 시각에 동의하는 다른 역사학자들도 많지만, 이런 시각을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보면서 고종·명성황후·대한제국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려는 역사학자들도 적지 않다. 그런 학자들의 대표 주자는 단연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이태진이다. 이태진은 “고종 시대사를 연구하면서 나는 자주 착잡한 심경에 빠져들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시대는 우리 민족사에서 국왕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의 무능과 무력이 가장 심하게 드러난 때로서, 지도층이 그런 지경이었으니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인식이 일반화돼 있다. 이런 역사야말로 민족이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대상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대에 관한 나의 늦게 시작한 공부가 이런 부정적 역사상이 일본 침략주의에 의해 조장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태진의 ‘발견’은 개화기에 일어난 주요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기존 인식에 도전한다. 내가 최근 출간한 <한국 근대사 산책>을 쓰는 동안 내내 고민했던 게 바로 이태진의 새로운 해석이었다. 나는 근대사의 아마추어 연구자로서 현재적 관점에서 모든 역사적 논쟁을 소개하는 데 주력했기 때문에 이태진의 새로운 주장이 큰 무게로 다가왔다. 식민사관의 잔재들을 거둬내려는 이태진의 치열한 노력에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이태진의 글을 통해 많은 공부와 더불어 새로운 깨달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어느 쪽 주장이 더 옳은지 그걸 평가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 전문가들의 다양한 주장들을 살펴보면서 배우는 처지다. 그럼에도 평생을 개화기의 역사 연구에 바친 전문학자들 사이에서도 양극을 달리는 견해들이 충돌하곤 한다는 사실은 그 어떤 ‘틀’이나 ‘시각’이 그 큰 효용에도 불구하고 가질 수밖에 없는 어떤 함정을 시사해주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런 의문은 학생이 교수에게도 제기할 수 있는 것이라 믿기에, 내 나름의 감상평을 말해볼까 한다.

이태진은 2000년 8월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모은 단행본 <고종시대의 재조명>을 출간해 학술계의 화제가 되었다. 이태진은 ‘고종시대를 재조명한 이유’에 대해 “이 책을 통해 고종시대를 파악하는 새로운 틀을 제공하고 싶었다. 양요와 쇄국, 개항, 갑신정변, 아관파천 등 일본 침략주의의 시혜론적 관점에서 서술된 근대사의 흐름은 국민 사이에 패배주의적 역사 인식을 조장해왔다. 이같은 상황에서는 반성 차원을 넘어 자기 비하나 자괴감만 심화될 뿐 긍정적 역사 창출이 어렵다”고 밝혔다.

이태진은 ‘일본인들의 고종 죽이기’로부터 고종을 구해내려는 자신의 시도에 대해 “왕조 사관 부활이란 비판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는데, 이런 비판은 부당할망정 그런 오해를 유발한 책임은 이태진에게도 있는 것 같다. 즉, ‘고종 구하기’ 열의가 앞선 나머지 국왕의 책임을 너무 협소하게만 보고 있는 것이다.



집착한 나머지 사실들을 무시하다



조선조 부패의 대표적 사례로 자주 거론되는 공명첩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보자. 공명첩은 이름을 밝히지 않는 관직 임명장으로 어떤 신분이든지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면 다 구입할 수 있었기에, 그간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태진은 공명첩은 자연 재난으로 흉년이 들었을 때 곡식을 내는 사람들에게 그 대가로 준 것이라며, “공명첩 제도 운영에는 비리도 많았지만 이처럼 공익성을 지니고 시작된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군주가 주관하는 매관은 공명첩이 그랬듯이 공익의 명분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군주가 무엇이 부족해서 자신의 공기를 치부의 수단으로 삼겠는가. 다만 그 그늘 속에 세도정치기에 성행한 인사 관련 권력자들의 음성적 매관 행위가 덩달아 성행한 점이 문제였다”며 “누가 이것을 나쁜 정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세도정치기에 성행한 인사 관련 권력자들의 음성적 매관 행위’이며,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살피는 동시에 이에 대한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느냐에 대해서도 답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즉, 이태진은 ‘고종 살리기’에만 집착한 나머지 세도가문의 광범위한 매관매직은 비교적 작은 문제로 다루면서 그마저 고종의 책임은 아니란 듯이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태진은 조선이 ‘은둔국’으로 규정된 것에 대해서도 강한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은둔국’이란 딱지는 대원군 집권기까지는 적절할 수 있지만, “이 시기를 벗어나서도 은둔국이란 딱지는 떨어지지 않는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876년 조-일 수호조규, 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 1883년 조-영 수호통상조약 등 각국과의 수교 통상이 시작된 후에도 은둔국이란 규정은 철회되지 않는다. 1910년에 일본에 나라가 병합되었을 때는 은둔과 쇄국 때문에 이렇게 병합되는 지경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이 붙기까지 하였다. 이런 인식 아래 한국 근대사는 곧 자력 근대화에 실패한 역사로 평가되었다. 한국인들은 지금도 국제적으로 어떤 큰 시련을 겪게 되면 ‘실패한 근대’를 들먹인다.”

이태진의 이런 주장에 대해선, 조선이 ‘적극적 자세’를 가진 게 너무 늦은 시점이 아니었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매우 중요한 게 아닌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다. 강재언이 지적한 바와 같이, 1882년경 “이미 양국(조선·일본) 간의 국력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벌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 자력 근대화가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건대, ‘실패한 근대’를 들먹이는 게 그리 무리라고 여겨지진 않는다.

갑신정변은 어떻게 볼 것인가? 이태진은 갑신정변을 무모하게 추진돼 결과적으로 국가에 큰 짐을 지운 해프닝으로 격하했다. 나의 경우, 갑신정변을 근대화의 시발점으로 평가하는 시각보다는 이태진의 시각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태진이 일본에 대한 반작용 또는 반사적 태도로 일관하는 건 안타깝게 여겨진다.

이태진이 갑신정변을 ‘일본의 계략에 놀아난’ 것으로 보는 것까진 좋은데, 그 근거를 갑신정변 이후 일본의 ‘김옥균 이용’과 연결하는 건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태진은 김태웅의 논문 ‘일제강점기 김옥균 추앙과 위인 교육’(2000)을 거론하면서 “이 논문은 ‘한국 병합’ 후 일본 낭인 출신들이 추앙사업을 시작하고 친일 지식인들이 계속해서 위인 만들기 사업을 벌인 것을 자세하게 추적하여 본고의 논지를 크게 뒷받침하였다”고 주장했다. 일제 식민사관의 의도를 날카롭게 꿰뚫어보는 이태진이
일제의 ‘김옥균 이용’의 의도는 너무 단순하게 해석하는 건 아닐까?



부정적 이미지는 모두 조작?



명성황후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옛 노인들은 며느리를 흉볼 때 가끔 ‘민후(閔后) 같은 년’이란 말을 썼다고 한다. 물론 민후란 명성황후를 가리킨다. 명성황후를 이런 부당하고도 지독한 욕으로부터 구출해내는 건 꼭 필요한 일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다.



△ 갑신정변의 주역들. 일제 지배 36년의 콤플렉스는 조선 말과 해방 직전까지의 역사에 대한 해석 논쟁을 여전히 낳고 있다. (사진/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이태진은 명성황후의 부정적 이미지는 모두 일본이 조작한 것이며, 명성황후는 세도가가 아니라 애국자였다고 주장했다. 이태진은 최근 ‘역사소설 속의 명성황후 이미지’라는 논문에서 명성황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계보를 추적했다. 그렇지만 일본인들 이전에, 조선인들이 명성황후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건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이태진은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명성황후에 대해 비판적인 황현의 <매천야록>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 격파를 시도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의문이 해소된 건 아니다. 반일과 명성황후 비판의 입장을 동시에 표출한 조선인은 비단 황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명성황후에 대한 비판이 일제에 의해 과도하게 부풀려졌다는 것엔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지만, 일제의 그런 악용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날 수 있는 명성황후 재평가의 위험도 경계하는 게 좋다.

이태진이 고종과 명성황후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함으로써 던지려는 메시지는 결국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와 연결된다. 그는 “대한제국은 무능으로 망한 것이 아니라 근대화 사업의 빠른 성과에 대한 일본의 조기 박멸책에 희생되었던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대한제국은 무능해서 망한 것이 아니라 많은 가능성 때문에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주의에 부딪혀 좌초하고 말았다”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런 발상에 문제는 없을까?

이태진의 이런 주장에 대해선 사회진화론에 대한 비판과는 정반대의 관점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다. 제국주의 기운이 전세계를 덮치고 있던 시절, 국가 간의 관계에서 다른 나라의 침략주의나 국가이기주의를 비판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근대화의 의지를 국방력과 분리해 말해도 되는 걸까? 타국의 박멸책이나 침략주의를 막아내지 못한 것 이상 더한 ‘무능’이 있을 수 있을까?

식민사관의 주요 공격 대상은 조선 지배계급의 부패와 무능이다. 일제는 그렇게 해야 조선 민중이 일제를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받아들이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식민사관으로 오인받지 않기 위해 조선 지배계급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거나 그들을 미화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신채호는 유교가 사대주의와 당파싸움의 원인이고 그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고 보았다. 신채호뿐만 아니라 한말·일제 때의 많은 지식인들이 ‘유교 망국론’을 주장했다. 반면 이태진은 서양인들이 한국 발전의 비결로 꼽는 ‘유교 자본주의론’을 들어 ‘유교 망국론’을 반박했다. 그러나 ‘유교 자본주의’는 양반제도가 사라진 이후에 가능했기에, ‘유교 망국론’은 양반제를 전제로 한 유교의 폐해를 지적한 것으로 보는 게 옳다.

이태진은 “일제강점하 양반문화에 대한 매도는 거의 습관화된 담론이었다. 양반의 잘못으로 나라가 망했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없는 사실이 되었다. 이런 담론은 계속될수록 조선총독부의 ‘시정 개선’ 선전효과가 생기고 조선인의 복종심을 더 키울 수 있는 것이었다”고 개탄했다.

일면 공감할 수 있는 주장이지만, 문제는 이것이 양자택일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즉, 일본이 그런 나쁜 의도로 퍼뜨린 말이니 반대로 생각하라고 말할 것인가? 그래서 양반과 당파성을 옹호해야 할 것인가? 이는 일본이 부린 한 번의 술책에 우리가 두 번 놀아나는 건 아닐까?
이태진의 사학은 ‘왕조 사관’이 아니다. 그가 원하는 건 ‘긍정적 역사 창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목적 의식에 투철하다 보면 ‘자위(自慰) 사관’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이태진은 한 대학생이 자신에게 조선시대 정치사를 희망적으로 볼 수 있게 해주어 고맙다는 편지를 보내왔다고 밝혔다. 자위의 현실적 효능을 말해주는 사례는 아닐까?



식민사관은 복잡·교묘하다

일본인이 한국인을 폄하했던 것처럼 우리가 일본인의 지능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라면, 식민사관은 단순·무식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복잡·교묘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식민사관의 단순무식성을 공격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효과다.

그럴 만한 바탕이 없는 가운데 왜곡·날조를 해봐야 먹혀들기 어렵다.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걸 부풀릴 때 의도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식민사관이 많은 한국인들을 사로잡았다는 게 그 증거다. 그런 한국인들을 어리석다고 매도하기는 쉽지만, 너무 쉬운 일만 하다 보면 또 한 번 역으로 우리가 당할 수 있다. 식민사관을 공격하느라 본의 아니게 우리의 어떤 점을 정당화하거나 미화할 때에 생겨날 수 있는 부작용도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우리 자신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더 필요하다고 본다. 나는 그것과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심어준, 그리고 나중엔 우리 자신에 의해 확대재생산된 ‘자기 비하’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구분을 전제로 하여 우리 자신에게 엄격하게 구는 것이 진정 ‘포지티브’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관대한 방식으로 ‘긍정적 역사 창출’을 한다 하더라도 그 수명이 오래가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자학과 자위를 동시에 넘어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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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강종일, <고종의 영세중립정책>
"이 책은 한국근세사에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에서 열강들이 전개한 각축과 대립 속에서 한반도가 과거 경험한 망국역사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규명하고, 대안을 찾아보고자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뿐만아니라 고종이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어라나 노력을 했는지, 존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영세중립정책을 시도한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2005 <고종황제 역사청문회>  이태진 vs 김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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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 역사 청문회
이태진,김재호 (지은이),교수신문푸른역사2005-05-15








책소개
우리 기억 속에서 잊혀진 황제, 사라진 제국의 모습을 복구하고 그것을 새롭고, 다양한 시각에서 재평가하기 위해서 기획한 책이다.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한국 근대의 형성 과정과 일제 시기의 성격이 크게 달라진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인 만큼, 과거를 객관적으로 규명하는 작업 이상의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 논쟁들을 담고 있다.


목차


책을 내며
고종황제
논쟁 연표

'고종시대의 재조명', 조명 너무 세다 | 김재호
식민사관의 덫을 경계해야 한다 | 이태진
대한제국에는 황제만 산다 | 김재호

논쟁일지 1

'고종시대' 악센트는 '시대'에 있다 | 이태진
일제 영향력에 관한 연구에 반짝 불을 켜라 | 왕현종
누가 근대화 지상주의자인가? | 김재호

논쟁일지 2

대한제국 근대화 성과, 경제 지표로도 읽힌다 | 이태진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을 넘어서 | 김기봉
대한제국 재정 정책은 주먹구구식 | 김재호
근대의 그늘에도 관심을 가져라 | 김동택
고종은 여전히 소중화적 세계관에서 헤엄친다 | 이영훈

논쟁일지 3

1896년 이후 반등세, 왜 그냥 넘어가는가? | 이태진
국가 재정 움켜쥐는 게 근대화인가? | 김재호
개명군주이나, 민국이념은 레토릭이다 | 주진오
고종은 조선왕조의 비판적 상속자이다 | 강상규

논쟁일지4

일본도 광무 근대화 성과 예의 주시했다 | 이태진
일제의 폭력과 수탈 잊었는가? | 서영희
대한제국 실상 못 보는가, 안 보는가? | 김재호
개항기 근대화 정책은 소중한 경험 | 이헌창
민국이념은 역사의 새로운 동력 | 이태진
내재적 발전론의 탈구축을 위하여 | 이병천
논쟁을 마무리하며 | 이영훈

대면 논쟁
참고 문헌
찾아보기
접기


책속에서




그런데 우리의 정치사상사를 잘 들여다보면 병들어 망해가는 나라를 구원할 개명군주의 출현을 고대해 마지않았던 위대한 사상가를 찾을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이다. 다산은 상제의 명을 받은, 영명하고 간겅한 군왕이 두세 명의 현명한 대신의 보좌를 받으며 전국을 왕토로 장악한 다음,

강력한 중앙군을 편성해 귀족들을 억누르면서 도로와 수로를 닦고 경지를 합리적으로 구획해 농업 생산을 증진시킴과 더불어 해외무역을 일으켜 국부를 축적하는 이른바 부국강병의 정책을 펼치기를 간절히 꿈꿨다.

그가 꿈꾼 개명군주는 군왕이 제대로 덕을 닦기만 하면 온 세상이 저절로 평안하게 된다는 성리도설 속의 도학군주가 결코 아니었다. 그가 원한 개명군주는 스스로 흥작하고 분발하여 그의 국토를 경영하는 작위의 주체이다. 여러 연구자가 지적하고 잇듯이 다산의 개명군주는 비교정치사에서 서유럽 근세의 절대군주들과 비슷하다. - 본문 100~101쪽에서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이태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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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출생으로 서울대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문학박사(2005)학위를 받았다. 1973년 경북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전임강사, 1997년부터 2009년까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 2019년 9월부터 3년 동안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했다. 진단학회ㆍ역사학회ㆍ한국학술단체연합회 회장,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학장(2006~2008)을 역임했다. 2018년 현재 대한민국학술원 회원(2007~)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정치와 軍營制 변천>... 더보기


최근작 : <3 .1="">,<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永樂大典> … 총 37종 (모두보기)

김재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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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jhokim@jnu.ac.kr
「조선왕조 장기지속의 경제적 기원」,『經濟學硏究』, 59(4), 2011.
「朝鮮後期中央財政과 銅錢: 『賦役實摠』을 중심으로」,『경제사학』44, 2008.
「조선후기 중앙재정의 운영: 『六典條例』의 분석을 중심으로」,『경제사학』43, 2007.
「皇室財政と'租稅國家'の成立-韓國と日本との比較」,『社會經濟史學』66(2), 2000.


최근작 : <한국의 장기통계 : 국민계정 1911-2010>,<빼앗긴 우리 역사 되찾기>,<고종황제 역사 청문회> … 총 3종 (모두보기)

교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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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사회를 대변할 정론지 발간의 필요성이 대두하던 1992년 창간되었다. 이후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와 대학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며 지성사회의 여론을 대변하고 있다. 또한 국내외를 아우르는 학술 쟁점과 학계 동향의 분석.보도를 통해 깊이와 쟁점이 살아 있는 ‘학술 담론의 장’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작 : <한국 근현대사 역사의 현장 40>,<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 2>,<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 … 총 7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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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100>,<처음 읽는 정유재란 1597>,<총력전 제국의 인종주의>등 총 269종
대표분야 : 역사 7위 (브랜드 지수 386,999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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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에 대한 성찰과 관련한 많은 화두를 던져준 책.


1.

만약 일제 강점기를 겪지 않았다면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한국사를 배운 학생이라면 한 번쯤은 던져봤음직한 질문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성립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뭔가 안타까운 심정이 여실히 담긴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단 한국사를 배우는 학생의 입장뿐만이 아닌 듯하다. 교과서 저자들도 비슷한 맥락의 ‘안타까운 심정’이 기저에 깔린 채 한국사를 서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때 배웠던 국사 교과서는 《고종황제 역사청문회》의 주 논쟁자인 이태진 교수처럼 내재적 발전론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 이앙법의 도입으로 생산량이 증가했으며 토지의 상품화가 이뤄졌고, 한편 노동생산성의 증가로 토지에서 유리된 농민들이 임노동자나 영세상인이 되어 상공업이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상과 도고의 대두로 조선 후기엔 자유 상공업이 발전하였다고도 한다. 교과서 저자는 시종일관 내재적 발전론의 관점으로 자본주의 맹아에서 근대가 태동하고 있었다고 서술한다. 이쯤 되면 마르크스의 역사 발전 단계설이 시사하는 것처럼 외세의 압박 없이도 우리 힘으로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여 합리적 근대를 맞이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가정이 당연하게 보인다.
근대가 지닌 찬란한 합리성과 성장중심주의 이면에 숨겨진 폭력성에 대해 성찰할 수 있게 되면서 나는 역사에 대한 가정을 철회하였다. ‘주체적으로 근대화를 이룩할 수도 있었다’ 라는 가정 내부엔 ‘근대화는 반드시 추구해야 할 목표다’ 라는 명제가 일종의 선험적 윤리로서 교묘히 자리잡고 있었다. 근대화와 근대가 상정하는 합리성 및 ‘합리적인 인간’에 대한 반성적 사유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자본주의 맹아론’과 같은 관점이 다소 불편해졌다. 자연히 대한민국 역사에서 근대화의 주체가 누구였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었는가, 라는 문제에는 거의 관심을 잃었다. 그런 와중에 나는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2.

《고종황제 역사청문회》는 조선 말 격동기의 군주였던 고종황제가 봉건적이고 부패한 군주인가, 근대화를 추구한 개명군주인가, 라는 문제에서 더 나아가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의를 서로 상반되게 평가하는 학계의 논쟁을 다룬 책이다. 이태진 교수의 저서인 《고종시대의 재조명》에 대해 경제사학자인 김재호 교수가 비판적 서평을 다루고, 거기에 이태진 교수가 반박하면서 논쟁이 시작된다. 이태진 교수는 기존 역사학계의 주류 입장인 내재적 발전론의 연장선상에서, 고종황제가 세운 대한제국이 자력으로 근대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시대적 책무를 인식하고 정책을 추진했다고 본다. 김재호 교수를 필두로 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이태진 교수가 주관 과잉의 역사해석을 한다고 비판하며 최근의 수량통계적 연구 성과를 근거로 한국의 근대화는 일제 강점기에 이루어졌다고 반박한다. 더 나아가 식민지 시대의 한국사도 부끄럽게만 생각할 게 아니라 우리 역사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교수들이 두 논객에게 첨언하거나 반박하는 글이 등장하기 이전까지의 논쟁을 살펴보면, 내가 봤을 때는 이태진 교수보다는 김재호 교수 쪽이 훨씬 설득력 있게 논지를 전개하고 있었다. 이태진 교수가 역사를 해석하여 서술하는 방식은 선언적인 태도라는 느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주체적 역사 발전의 실마리를 찾는 게 당위적 임무라는 소신이 지나치게 확고하다보니 김재호 교수 및 다른 많은 교수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주관과잉의 역사 해석’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태진 교수는 시종일관 ‘식민사관으로 인한 역사 왜곡의 잔재가 심각하다’는 주장을 전제로 깔고 서술한다.

김교수는 전환국이 황제의 사금고였고 백동화 남발이 화폐제도 문란의 주범이라고도 했다. 이런 인식은 사실 일본이 러일전쟁 중 일본인 재정 고문을 강제 투입해 대한제국 재정을 송두리째 삼키면서 국제 사회를 상대로 퍼뜨린 유언비어의 잔재다.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받지 못한 전쟁 배상금을 대한제국에서 벌충하기 위해 제일은행권을 강제 통용시키면서 대한제국의 재정과 화폐를 헐뜯는 음모적 국제 선전전을 폈다. 우리 학계는 아직 이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력 근대화의 역사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실정이다.
― 이태진, 〈식민사관의 덫을 경계해야 한다〉, p.31.

김재호 교수는 내재적 발전론자들에 대해 ‘가보지 않은 길’을 붙들고 시간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식민지시대에 진행된 ‘근대 경제성장’과 그에 따른 사회 변화를 밝히는 것이 현재의 한국 경제에 대한 성찰을 위해 더 유익하다고 충고한다. 가보지 않은 길이 아니라 ‘이미 들어선 길’에서 일본의 전시 무력으로 밀려난 우리였기에 대한제국의 근대화 탐구는 비장한 연구 과제다.
― 이태진, 〈대한제국 근대화 성과, 경제 지표로도 읽힌다〉, p.70.

이 교수는 자신의 소신에 따라 당위적 임무를 수행한다는 태도로 1차적 사료들을 근거로 가져와서 ‘이러한 근거로 황제와 대한제국은 근대화를 추진했음을 알 수 있다’라는 식으로 서술한다. 그의 서술은 버거워 보인다.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이 시도했던 여러 가지 제도나 추진했던 정책을 당위적 책무와 소신에 입각해 ‘자력 근대화의 의지’라는 단 하나의 코드로 힘겹게 번역하려 애쓴다는 인상이 강하다. 중추원관제에 따라 예산안이 심의되었던 사실은 ‘근대 의회제도의 도입’으로, 대한국국제를 반포한 것은 ‘민국이념을 바탕으로 황제에게 절대적 권력을 부여하며 근대적 국가의 초석을 쌓은 것’으로, 고종황제가 스스로 독립협회를 발족한 사실은 ‘관민이 함께 자발적으로 근대국가를 만드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다른 해석이 끼어들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번역된다. 그렇게 주장을 하고 싶었다면 해당 근거들이 근대화 추진이라는 코드로 번역되는 맥락을 일관성 있게 적절히 제시했어야 한다. 게다가 ‘식민사관의 덫’과 ‘자력 근대화 의지’를 대전제로 깔아놓는 타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전제와 주장만 되풀이한다. 아무리 그의 소신이 절대선(絶對善)의 윤리에 근거한다고 해도 학문을 하는 태도로서는 그리 바람직하다고 보이지 않는다. 이태진 교수의 주장은 갸륵한(?) 한편으로 학문적 태도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역사를 반성적으로 봐야 한다는 김재호 교수의 태도보다 다소 불편했던 것이 사실이다.

3.

나는 한국근대사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장애는 우리나라만 예외적으로 ‘구체제’의 극복이라는 보편적인 문제가 부재했던 것처럼 사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조선왕조가 불행히도 이민족에 의해 패망해서 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곤란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민족에게 패망했다고 해서 왕조체제를 극복해야 하는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외면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라고 생각한다.
― 김재호, 〈누가 근대화 지상주의자인가?〉, p.55.

김재호 교수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수량통계적 연구 결과와 사료들을 토대로 하여 다소 냉정한 태도로 근대 경제 성장의 성과는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태진 교수는 이러한 김재호 교수의 주장이 식민사관의 덫이라고 비판한다.

일찍이 김용섭 교수의 광무양전 사업을 통한 근대적 소유권 생성론에 대해 식민지 근대화론 연구자들은 이를 주의 깊게 살피기보다 그 불완전성을 비판하는 데 급급한 느낌을 줬다. 옆에서 보기에는 내재적 발전론이 우세한 연구 터전에 식민지 근대화론을 심기 위해 벌이는 치열한 자리 만들기 같은 인상이었다. 김대준 교수의 연구에 대한 김재호 교수의 대응도 그렇다. 그렇게 추계를 중요시한다면, 대한제국의 연도별 예산서를 면밀히 분석한 김대준 교수의 연구 성과는 진지한 논평의 대상으로 삼아야 했다. 그런데도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 연구라는 식으로 냉대한 것은 옳지 않은 논평자세다. 대한제국=가산제국가설의 전제 아래, 같은 문제를 다룬 김 교수의 연구 방식이 오히려 주관적인 것이 아닐까. (중략) 이 시기는 근대의 시발기로 일제 강점기에 비해 자료 조건이 상대적으로 나쁘다. 그러나 이런 조건을 곧 발전 부재론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 이태진, 〈대한제국 근대화 성과, 경제 지표로도 읽힌다〉, pp.65-66.

이태진 교수가 지적하듯이 ‘자료 조건이 나쁜 상태를 발전 부재론으로 몰아가는 것’이 사실이라면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한편 김재호 교수가 자기기만적 태도를 경계한다고 밝히며 자신은 근대화 지상주의자도 아니고 ‘식민지 근대화론은 단지 근대적 경제 성장이 식민지기에 개시되었다고 주장하는 것 일뿐’이라고 말하는 태도를 보면 그 주장에 수긍이 가게 되기도 한다. 식민사관의 기원과 실체에 대해 알아봐야 판단할 수 있는 문제인 듯하다. 내재적 발전론자들이 식민사관의 실체에 대해 밝혀줬으면 더욱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을 텐데 이 책에서는 그리 시원스레 밝혀주지 못하여 꽤 아쉬웠다.
일단 김재호 교수를 비롯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근대적 경제 성장이 식민지기에 개시되었다는 주장을 설득력 있는 여러 실증적 연구 성과들을 제시하며 개진한다. 설득력 있지만 선뜻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식민사관 문제뿐만이 아니다. 이영훈 교수를 필두로 한 뉴라이트 학자들의 주장이 개진되고 현실에서 포용되는 맥락이 상당히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 대한민국 건국에서 현재까지의 역사를 무조건적인 긍정으로 찬양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사’ 선전전에 이용되고 있다. 불편한 심정이 들지만 내가 한국사에 대해 아는 바가 고등학교 수준에서 그치기 때문에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에게 선뜻 반박할 수도 없다.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재호 교수는 ‘구체제의 극복이라는 것이 조선왕조의 전 문명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동시에 근대에 대한 무비판적인 긍정을 뜻하는 것도 아니’라고 항변한다. 물론 그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한국의 전근대가 ‘극복되어야 하는 대상’으로만 본다고 읽힐 위험성에 대해서도 잘 숙지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자신의 주장을 서술하는 태도를 보면 자신이 숙지한 덫에 자신도 모른 채 걸려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경제성장’이라는 코드를 다소 냉철한 잣대로 일관성 있게 적용하려는 경향은 학문적 태도로 긍정적이지만, 서구적 역사 발전의 잣대로만 재단하려다 보니 한국적 특수성을 염두에 두고 근대를 해석하려는 태도는 부족해 보인다. 따라서 ‘경제성장’이 최우선 지표가 되어버리게 되어, 주진오 교수가 지적하는 것처럼 ‘식민지 지배를 통한 인적·물적 수탈을 통해 식민지 이전 시기에 성장하고 있던 부분이 피해를 입은 부분은 없는지'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다. 경제성장의 코드로 성장이라고 해서 그것을 성장이라 이름붙일 수 있는지, 사회문화적 여러 유산들이 외려 퇴보하지는 않았는지에 대한 성찰은 그에게서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서영희 교수 및 논쟁에 참여한 다른 많은 교수들이 비판하듯이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그 경제 성장’이 누구를 위한 경제 성장이자 발전이었는지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한국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며 달려온 탓에 한국 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성장 중심주의에만 빠져 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얼마 전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의 맥이 끊겨버렸다는 기사가 화제였다. 우리에겐 기초 학문 육성이나 학문의 다양성 확보에 대한 관심을 갖고 전통을 이어나가려는 정신이 천박할 정도로 결여되어 있다. ‘경제성장’이라는 코드 외에도 다른 코드로 역사와 우리의 현실을 읽으려는 태도가 부족한 게 안타깝다.

4.

서로 다른 관점으로 역사를 해석하다보니 같은 사료를 놓고도 내리는 해석이 상이하다. 경제사학자들의 연구를 토대로 19세기 후반 인구 및 지대 등의 장기 경제 지표 수치의 변화를 보면 1896년을 저점으로 하여 반등세가 나타나는 양상을 보인다고 한다. 이 시계열 자료를 놓고 한쪽에서는 대한제국의 근대화 성과라고 이야기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대한제국의 근대화 성과라고 이야기하기는 너무 성급하며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조선말에서 대한제국은 경제적 파탄 상태였다고 말한다. 내장원의 《회계책》에서 내입액이 1904년에 급증하는 것을 보고 한쪽에서는 대한제국의 재정이 황제의 사금고에 지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한쪽에서는 그런 통계만 볼 것이 아니라 초고액 내입금이 1904년 한 해에만 이뤄진 사실과 긴박했던 당시 역사적 정세를 유념해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내장원 《회계책》사료는 다른 2차적 사료들과 더불어 집요하게 파고들며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리는 반박과 재반박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렇듯 두 교수가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고 서로의 주장을 반박하는 과정은 과연, 《교수신문》 발행인이 책 서문에 쓴 말처럼 ‘드라마틱한 과정’이었다. 다음 회가 어떨까 궁금해 하며 연재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읽는 내내 손을 떼기 힘들 정도로 재미있었다. 양측 모두 더 활발한 실증적 연구가 진행되어 사실fact이 많이 밝혀져야 생산적 논의를 전개할 수 있겠다고 결론을 내리므로, 이후의 학계 연구가 어떻게 진행될지 기대해본다.
관점이 다른 두 교수가 논쟁을 하니 물론 생산적인 토론도 있었지만 평행선을 달리는 부분도 많았다. 나는 그들이 논쟁하는 중요한 주제인 ‘근대화’의 ‘근대’가 무엇인가에 대한 충분한 합의 없이 논쟁이 진행된 때문이기도 하다고 본다. 자력 근대화의 노력이 있었느냐는 사실의 여부를 떠나, 조선말 제국주의와의 충돌하여 국제적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와중에 대한제국을 거쳐 식민지가 되는 과정에서 근대적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들이 인식한 근대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시발점이 된 주체와 영향을 받는 세력에게 어떤 방식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졌는지 논의하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5.

근대화가 이루어진 시점을 달리 보는 이태진 교수와 김재호 교수는 서로 근대화 지상주의자가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다.

김 교수는 내가 동학·서학·민국이념 등 세 가지 사조를 근대 지향적인 것으로 본 것에 대해 조선사회를 ‘근대성’의 단일 기준으로 지나치게 풀이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마키아벨리즘의 잣대로 민국이념을 평가하려는 그의 논평 자체가 오히려 ‘근대주의’로 보인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일어나는 탈중세의 현상들은 꼭 같은 모습일 수 없다. 서양 근대 이행기에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일어난 현상들을 우리 역사가 다 갖추기를 기대하기는 더욱 어렵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근대적 왕정의 모델이 돼야 하는 이유도 없다.
― 이태진, 〈‘고종시대’ 악센트는 ‘시대’에 있다〉, p.44.

주지하듯이 우리나라가 식민지화 이전에 근대화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수십 년을 노력해왔다. 그리고 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근대가 추구할 지상의 가치가 아니라면 왜 그렇게 고투했겠는가? 왜곡되지 않은 그 근대란 도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인가?
― 김재호, 〈누가 근대화 지상주의자인가?〉, p.57.

두 교수 모두 ‘근대화 지상주의’를 경계하지만 정작 그들이 역사를 해석하며 주장하는 논지를 차근차근히 읽어보면 두 교수 모두 근대화를 지상 명제로 여긴다는 느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력 근대화’가 ‘외세’에 꺾였다는 이태진 교수의 주장엔 근대화가 추구해야 할 지상 가치라는 전제가 이미 깔려 있다. 김재호 교수 역시 경제 발전을 근대화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관심을 갖고 그 외의 부분에는 배려가 부족하다는 측면에서 근대화 지상주의의 태도가 엿보인다. ‘양자 모두 근대가 초래한 억압과 불평등에 대해서는 무심하다’는 김동택 교수의 지적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제국주의는 세계에 폭력적으로 근대화와 자본주의적 발전을 강요했으며 서로 다른 공간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변화의 흐름을 단절시켜버렸다. 우리는 근대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거치면서 우리는 근대화가 확립한 이 체제가 절대선이 아니지만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별다른 대안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경제성장률이 0이지만 굶주리는 사람도 없이 행복지수는 세계 최고라는 부탄 왕국의 예가 생각난다. 우리 사회는 경제는 성장하지만 성장의 그늘 하에서 빈부격차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하여 ‘그 성장’은 누구나 행복하게 만드는 지상 가치가 아니라는 회의가 이미 짙게 깔린 지 오래다. 지구온난화와 자원의 고갈 등 생태계 파괴의 문제도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다. 근대화를 이룩하도록 전환되었던 패러다임을 근간으로 한 ‘경제 성장’은 인류 역사를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길로 이끌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서구 중심의 역사가 폭력적으로 강요한 근대화 외에도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세, 주류 경제학의 성장 중심주의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다른 지표로도 우리의 현실과 역사를 읽을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한 때다.




IshaGreen 2009-10-18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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