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22

한국 기독교와 역사 |서서평의 얼굴을 찾아서 1

(12) 한국 기독교와 역사 | Facebook

Sung Deuk O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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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서서평의 얼굴을 찾아서 1


한 인물에 대한 서술과 평가는 역사적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
교회사 인물에 대해서는 너무 성인전이 많다.
말년에 성자다운 완성된 인격을 보여주었다고 해서
처음부터 그런 완벽하고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고 보면 곤란하다.
역사적 서술은 엄격하고 냉정해야 한다.
그래서 그 가족이나 친척이 쓴 전기나 평전,
같은 교단이나 같은 지역 사가가 쓴 글은 신용도가 떨어진다.

가능하면 어떤 이익이 걸려 있지 않는 역사가가 전기를 쓰면 좋다.
과장과 미화가 들어가면 성인전이 된다.
과거에도 지금도 신화를 만들고 싶은 유혹은 강하다.
 
그런 유혹을 물리치고 사료에 충실해야 한다.
너무 내 의견을 추가하는 일은 자제하자.
 
성경 해석에서도 私釋, 즉 eisegesis를 조심하듯이,
사료를 놓고 역사가들도 화려체를 쓰려는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인간 서서평을 제대로 서술해 보자.
인간 서서평의 얼굴을 회복할 때이다.
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1083
서서평의 얼굴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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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평의 얼굴들 1
당신이 기억하는 쉐핑(Elisabeth Johanna Shepping 徐舒平, 1880. 9. 26 - 1934. 6. 26)의 얼굴과 실제 얼굴 1. 광주에서 일할 때, 1914년 1912년 서서평의 첫 임지는 광주였다. 광주 제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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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평의 얼굴들 1 사용자 lutheroak 2021. 4. 21. 10:24 

당신이 기억하는 쉐핑Elisabeth Johanna Shepping 徐舒平, 1880. 9. 26 - 1934. 6. 26의 얼굴과 실제 얼굴 아직도 쉐핑의 일대기는 제대로 쓰여지지 않았다 

1. 광주에서 일할 때 1914년 1912년 서서평의 첫 임지는 광주였다 광주 제중원의 첫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독신 여성 선교사가 거주하는 선교사 사택에서 살았다 가난한 소년들을 배경으로 좋은 말을 타고 있는 1915년 5월 미국 남장로회 선교 잡지에 실린 사진보통 서신이나 글을 미국으로 보내는데 한 달 그것 을 편집해서 싣는데 45개월이 걸림 따라서 아이들의 옷차림으로 볼 때 1914년 여름이나 가을에 촬영되었음에서 우리는 그녀가 다른 선교사 들과 다름 없이 보통 선교사로 생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옥성득 교수의 한국 기독교 역사 4/22/2021 서서평의 얼굴들 1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1083?fbclid=IwAR399IckuWB5KsCKf32w4bdJWgWFO4bQKeLEk4G0ET_fDTOcVYz73WeegrE 2/12 

위키백과에 다음과 같이 서술한 것은 사실이 아니다 kowikipediaorgwiki%EC%84%9C%EC%84%9C%ED%8F%89 

1912년 2월 20일 한국으로 파송된다 여객선 SSKorea호를 타고 20여 일 여행 끝에 한국에 도착한다 광주선교부 제중원원 장 우월순의 간호사로서 병원과 주일학교를 돕는다 한국어를 배우고 옥양목 저고리와 검정 통치마를 입었으며 남자 검정 고 무신을 신고 된장국을 좋아했다 온전한 조선인이 되고자 했고 평생 독신으로 살며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뉴욕에서 간호원양성학교를 졸업할 때1910년 1914년 광주에서 Missionary Survey May 1915]: 455. 

4/22/2021 서서평의 얼굴들 1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1083?fbclid=IwAR399IckuWB5KsCKf32w4bdJWgWFO4bQKeLEk4G0ET_fDTOcVYz73WeegrE 3/12 

고무신 된장국 운운은 그녀가 사망했을 때인 1934년 상황이다 1912년 내한하여 삼일운동 전까지 그녀는 다른 선교사들처럼 서양옷을 입고 구두를 신고 한식을 먹었지만 양식도 즐기며 벽돌 양옥에 살았다 1930년대 서서평의 생활 모습이 처음부터 있었다고 보면 오류다 물론 쉐핑은 광주에서 스와인하트 부인Mrs Lois H Swinehart 서로득이 시작한 소녀와 부인들의 실업 교육 학교의 한 학생인 윤이 Yunnie가 찾아와서 도움을 청했을 때 도와주었다 그녀는 실업학교에서 자수를 배우고 있었는데 부친이 사망하고 빚을 정리하자 남는 게 없 었다 방학에 집에 간 연이는 계모가 어린 동생들을 피가 나도록 때리는 것을 목격했다 연이는 일단 학교로 와서 1년 간 공부한 후 쉐핑에게 도 움을 청한 후 집으로 가서 동생들을 데리고 학교로 돌아왔고 쉐핑은 이들을 기꺼이 도와주었다 Lois H Swinehart Kwangju Girls Industrial School Korea Mission Field Vol XI No1 January 1915): 22.) 당시 이러한 학생 돕기charity는 다른 선교사도 실천하고 있었다 위 사진의 말은 전도여행 용 혹은 왕진 때 이용하던 말로 보인다 그래도 당시에 말을 타고 다닌다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 니는 것보다 더 돈이 드는 일이었다 많은 논문과 글들이 “社說: 偉大한 人類愛 - 徐舒平氏 靈前에 『東亞日報』 (1934. 6. 29을 읽고 그 이미지로 글을 쓴다 그 내용은 1930 년대의 서서평이지 내한 초기 1912년부터 1919년까지의 서서평이 아니다 따라서 1910년대의 서서평을 성인으로 그리는 많은 글들은 비역 사적이다 역사적 논문은 한 인간의 궤적을 따라 가면서 써야 한다 내한 초기부터 환대와 희생의 삶을 살았다고 하면 역사 논문이 아니라 성인 전聖人傳이 된다 역사 논문 쓰는 훈련을 다시 해야 한다 한 인간은 완전하지도 않고 처음부터 그런 희생적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삶에는 굴 곡 좌절 전기 회복이 있다 

2. 1914년 광주에서의 다른 사진 

다음은 digitalhistorypcusaorgislandoraobjectislandora%3A6876 에 따르면 1914년 광주 제중원에서 병원 전도부인과 찍은 사진 이다 여기에도 한복을 입고 건강한 모습으로 서 있다 전도부인에 비해 헤어스타일도 장식이 많고 옷도 더 고급으로 보인다 따라서 1914년까 지 초기 3년 간 서서평은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의식주에서는 풍족한 상태에 있었다고 하겠다 

4/22/2021 서서평의 얼굴들 1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1083?fbclid=IwAR399IckuWB5KsCKf32w4bdJWgWFO4bQKeLEk4G0ET_fDTOcVYz73WeegrE 4/12 4/22/2021 서서평의 얼굴들 1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1083?fbclid=IwAR399IckuWB5KsCKf32w4bdJWgWFO4bQKeLEk4G0ET_fDTOcVYz73WeegrE 5/12 3.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양성소 소장 겸 병원 간호부 1917-1920 1915년 6월 서서평은 맹장염충수염으로 의심되는 병을 앓고 있었다 선교회 실행위원회는 그녀가 한국 음식을 먹어서 그럴 것으로 추정했다 (Missionary Survey [1915]: 752.) 그러나 한국 음식 때문에 맹장염에 걸린 것은 아니었다 당시 모든 선교사들이 한국 음식을 먹었기 때문이 다 사실 그녀는 스프루sprue 곧 만성 소화불량을 일으키는 병에 걸렸는데 당시 불치병이었다 이후 서서평은 사역 기간 동안19151934 스프루를 앓았고 따라서 건강이 좋지 않았다 한편 서서평의 스푸르 기사가 나올 때 전주에는 이미 여자성경학교가 있었다 광주이일학교의 전신인 광주 여자성경학교는 더 나중에 시작되었 다 쉐핑은 1917년 3월 1일자로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임명되었으나 건강 때문에 6개월을 군산에서 휴식하고 9월 1일 서울에 부임했다 1917년 을 정리하면서 선교본부에 보낸 개인 연례보고서에서 쉐핑은 서울 생활에 만족하며 고통 중에도 최고의 해를 보냈다고 썼다 (Missionary Survey Aug 1918]: 447.) 1918년 간호부양성소 졸업사진을 보면 쉐핑은 얼굴이 갸늠할 정도로 수척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스푸르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에도 고무신을 신고 다니고 된장국을 먹은 게 아니다 서울의 독신 여자 선교사들과 함께 지내면서 보통 여자 선교사들 수준의 의식 주 생활을 했다 다만 쉴즈 간호사와 함께 지내면서 그녀의 검소하고 환자들을 위해 모든 저축금을 사용하는 헌신적인 삶을 배웠다 쉴즈는 기 본 생활비만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 서서평의 삶이 크게 변한 것은 이때였다 가난한 환자 들을 위한 social service 프로그램을 체계화하는 작업을 했다 광주제중원에서 서서평과 병원 전도부인 1914년 httpsdigitalhistorypcusaorgislandoraobjectislandora%3A6876 

4/22/2021 서서평의 얼굴들 1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1083?fbclid=IwAR399IckuWB5KsCKf32w4bdJWgWFO4bQKeLEk4G0ET_fDTOcVYz73WeegrE 6/12 4/22/2021 서서평의 얼굴들 1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1083?fbclid=IwAR399IckuWB5KsCKf32w4bdJWgWFO4bQKeLEk4G0ET_fDTOcVYz73WeegrE 7/12 

서서평은 1919년 3월 삼일운동 때까지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양성소에서 근무했다 자신이 감독하던 병원 간호부들과 양성소 간호부 훈련생들 중에 일부가 삼일운동에 참여하고 감옥에 가자 총독부 압력 때문에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더 이상 근무하기가 어려웠다 삼일운동을 폭력으로 진압한 일제을 만행을 폭로하고 감옥에 갇힌 기독교인 의학생 등을 방문한 스코필드 의사가 1920년 7월에 추방되었다 쉐핑은 광주로 다시 내 려와야 했다 그 전에 서울을 방문하고 1919년 3월 26일 자동차로 서울을 떠난 광주의 벨 부부와 녹스 목사 목포의 크레인 부부가 탄 차가 사고가 나서 벨 부 인과 크레인 부인이 사망했다 언더우드 목사 에비슨 의사 허스트 의사 쉐핑 간호사는 즉시 사고 현장인 병점으로 가서 사건을 조사 수습하고 허스트 의사와 쉐핑 간호사는 생존자들과 함께 기차로 서울로 돌아왔다 

4. 서울에서 주일학교 교사양성소 강사로 활동 1919-1920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쉐핑은 1920년 초 Sunday School Teacher Training Institute in Seoul에서 클라크 목사 현순 신흥우를 조 교로 주일학교 교사양성소에서 초등부 교사들을 가르쳤다 아마 이 사실은 누구도 언급하지 않은 듯하여 그 자료를 아래와 같이 공개한다 쉐핑 은 내한 전 뉴욕에서 Biblical Seminary of New York을 졸업했기 때문에 성경 교사로서도 제대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한국어도 잘 했 기 때문에 잘 가르쳤다 학습도구와 지도 사용법 모델 만들기 등을 가르쳤다 이 때의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1920년대 광주에서 쉐핑이 이일성 경학교를 통해 여성 지도자 교육에 집중하는 계기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교사 강습회 정도가 아니라 성경학교를 세워 여성 지도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4/22/2021 서서평의 얼굴들 1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1083?fbclid=IwAR399IckuWB5KsCKf32w4bdJWgWFO4bQKeLEk4G0ET_fDTOcVYz73WeegrE 8/12 4/22/2021 서서평의 얼굴들 1 https://koreanchristianity.tistory.com/1083?fbclid=IwAR399IckuWB5KsCKf32w4bdJWgWFO4bQKeLEk4G0ET_fDTOcVYz73WeegrE 9/12 

5. 소결 1912년부터 1920년까지 8년 동안

Shepping은 다른 간호 선교사들처럼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선교사 사택에 거주하고 의식주에서 부족함이 없었다 일반 의료 선교사로서 살았다 다만 개인적으로 만성소화불량 병인 스프루에 걸려 점차 살이 빠지면서 몸무게가 줄었다 그녀가 세브란 스병원을 그만 둔 이유는 직접 삼일운동에 참여한 때문이 아니라 감독 책임이 있던 병원 간호사 중 두세 명이 삼일운동 시위에 참여하고 감옥에 갔기 때문이다 1919년까지 서서평의 삶을 너무 미화할 필요는 없다 일부 나환자를 간호하고 환자들을 돌보고 간호부들을 양성한 일은 간호 선교사라면 마땅히 해야 했고 다른 선교사들도 하던 일이었다 서서평은 1910년대에 벽돌 사택에서 지냈고 벽돌 병원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검소하게 살았다 또한 조직력이 강하고 지도력을 나타내 교사들을 가르치는 일까지 했다 무엇보다 간호를 사회봉사social service 차원으 로 확대하는 생각을 하고 이를 실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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