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30

[역사기획/ 6·25와 한국교회] (1, 2)기독의용대 십자군을 아십니까 - 기독신문


[역사기획/ 6·25와 한국교회] (1)피난기 대구에서 개교한 총회신학교

정재영 기자
승인 2020.11.10 16:01

‘포성으로 시작된 신학교’ 배움 열기 뜨거웠다
1951년 9월 18일 ‘안전지대’ 대구서 개교식 … 열악한 환경에도 피난민 등 학생 몰려

6·25전쟁 기간의 대구는 피난처이자 방어선의 상징과도 같았다.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도 이 시기 대구에 많은 신세를 졌다. 동란 중에도 신학생 양성 사역을 방치할 수 없었던 총회는 전쟁 발발 이듬해 대구에서 총회신학교를 개교했고, 조국과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 대구·경북의 젊은 기독인들이 주축을 이룬 십자군의용대를 창설했다. 이들의 대구 활동기는 비록 2~3년 정도에 불과했지만, 이후 우리 사회와 복음의 계승자들에게 미친 파급력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총회역사위원회에서 임원으로 활동하며 신학교에서 역사신학 교수로 봉직해 온 박창식 목사(달서교회)와 김병희 목사(서변제일교회)가 6·25 발발 70주년을 기념해 각각 대구 총신과 십자군의용대에 대한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본 지면에서는 앞으로 두 주에 걸쳐 해당 논문을 중심으로 대구 총회신학교 시절 및 십자군 의용대에 관련된 이야기들과 오늘의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6·25 전쟁기에 대구서문교회당에서 문을 연 총회신학교의 개교기념 사진.

6·25 발발 이듬해인 1951년 5월 부산중앙교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다시 열렸다. 한 해 전 개회한 제36회 총회가 경남노회 총대문제로 비상정회 한 후, 전쟁이 터지면서 1년 넘게 속개되지 못하다가 비로소 다시 부산에서 회집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총회에서 가장 큰 화두는 바로 신학교 문제였다.
‘총회신학교’라는 글씨가 선명히 새겨진 대구 시절 정문 현판.

수년 간 총회 안에는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라는 두 직영신학교가 양립하며 커다란 불안요소로 작용했다. 특히 자유주의 신학이 크게 번져가는 조선신학교에 대한 우려가 커져가고 있었다. 이를 정리해 하나의 신학교로 운영하자는 주장이 여러 노회에서 설득력 있게 제기되어 논의되는 중이었다.

게다가 당시는 전국 방방곡곡이 전쟁터로 변해버려, 누가 생존해 있는 지조차 알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했다. 총회의 결론은 안전지대인 대구에 새로운 직영신학교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그해 9월 18일 대구서문교회에서 신학교 개교식을 열었다. 새로운 학교의 이름은 ‘총회신학교’였다. 정식 명칭은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교’였지만, 편의상 줄여 ‘총회신학교’로 불렸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총신’이라는 익숙한 명칭의 기원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교장으로는 미국북장로교 소속 아치볼드 캠벨(한국명 감부열) 선교사를 선임했다. 그는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한 후 1916년에 내한해 평안북도 강계를 중심으로 사역하다 신사참배 반대로 일제에 의해 추방됐다.

하지만 해방 직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대구 계명대학교 초대학장을 지내기도 했다.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양 진영이 예민하게 대립각을 세우던 시기에 원만한 성품을 지닌 외국인을 총회신학교 교장으로 세운 것은 절묘한 선택이었다.
1952년에 대구에서 촬영한 총회신학교 본과 1학년 학생들과 교수들의 단체사진.

감부열 교장을 위시해 권세열 조하파 선교사와 박형룡 김치선 명신홍 계일승 박사 등으로 교수진을 꾸렸다. 교수들은 각자의 전공과목을 충실하고도 깊이 있는 수준으로 가르치는 한편, 6·25라는 국난의 책임이 신사참배라는 과오의 결과라면서 통렬한 회개를 학생들에게 강조했다. 자연히 수업시간에는 회개와 눈물이 넘쳐나곤 했다는 게 당시 재학생들의 회고이다.

‘포성으로 시작된 신학교(It opened with a bang)’라는 감부열 교장의 표현처럼 불안정한 시국에서 개교한 학교였기에 모든 환경이 열악했다. 전선이 대구로부터 불과 11km 떨어진 곳에 형성되는가 하면, 어느 날에는 포탄이 신학교 교정까지 날아올 정도로 위협이 끊이지 않았다. 피난민이 끝도 없이 밀려와 건물마다 사람들로 가득 차고, 물자는 모자란 상태였다.총회신학교 대구 시절 권세열 선교사가 강의하는 모습.

일단 교실이 부족했다. 대구서문교회당을 본과 교사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학생 기숙사와 예과 학생들의 수업공간은 따로 구해야 했다. 수소문 끝에 간신히 대구중앙교회당 일부를 기숙사로, 서남교회당을 예과 교사로 확정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칠판도, 교재도 없이 교수의 강의를 받아 적는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당시 학생이었던 고 김종석 원로목사(군산 개복교회)는 생전에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학생들은 마루에 주저앉아 등받이 없는 긴 의자를 책상 삼아 공부했다. 기숙사는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군불을 때보지 못한 온돌방이었고 기숙사 밥이라고는 아침과 점심뿐이었는데, 양은그릇에 흰쌀 한 그릇과 콩나물 열대여섯 개 혹은 가느다란 시래기 열서너 가닥이 들어있는 국물이 전부였다.”
1953년에 열린 총회신학교 제2회 졸업식.

그럼에도 총회신학교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몰려왔다. 당초 200~300명쯤으로 예상한 등록학생의 숫자는 서류미비 등의 이유로 100명 가량을 돌려보냈음에도 무려 519명에 이르렀다. 숫자상으로 당시 장로교신학교 중 세계 최대라 할 만큼 엄청난 규모였다.

학생들 중에는 북한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제38회 총회에 보고된 1952년의 총회신학교 통계에 의하면 전체 494명의 재학생 중 평양노회 소속 83명, 황해노회 소속 50명, 평서노회 소속 27명 등 이북 출신들이 약 4분의 3 가량의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난다. 권세열 선교사의 전기 <씨를 뿌리러 나왔더니>에서는 “그들의 부모 형제 자매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자비하게 순교당한 이들”이라고 기술한다.

그렇게 엄청난 사연과 배경을 지닌 학생들은 수업시간에는 진지하게, 경건회 시간에는 거룩하게, 부흥회 시간에는 뜨겁게 임하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배움의 나날들을 채워나가며 훗날 한국교회의 융성기를 이끄는 지도자들로 자라났다.
대구 시절을 마감한 총회신학교는 서울 남산으로 이전해 역사를 이어간다.

1953년 9월 2일에는 박형룡 박사가 총회신학교 제2대 학장이자 한국인 최초 학장으로 취임하고, 다시 그로부터 한 달 후에는 서울 남산으로 총회신학교 이전이 이루어진다. 이후로도 무수한 신자(信者)를, 학자(學者)를, 성자(聖者)를, 전도자(傳道者)를, 목자(牧者)를 길러낸 선지동산의 첫 장은 이렇게 활짝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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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획/ 6·25와 한국교회] (2)기독의용대 십자군을 아십니까 - 기독신문
[역사기획/ 6·25와 한국교회] (2)기독의용대 십자군을 아십니까

정재영 기자
승인 2020.11.17 15:41

기독청년, 조국과 교회 위해 스스로 생명 던지다
‘대한민국 수호’ 의의에 공감, 자원입대하여 헌신 … 우세현 목사, 전국 돌며 자료 발굴 힘써

무공훈장증. 제30보병연대 육군일등중사 우병옥. 군번 K-1135171.

이렇게 시작되는 한 장의 문서가 우세현 목사(홍은돌산교회)에게는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소중한 가보이다. 무공훈장증의 주인공은 우세현 목사가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생부이다. 아버지는 태어난 지 3개월짜리 아들을 남겨두고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후의 나날을 힘겹게 살 수밖에 없었던 우 목사에게 어쩌면 원망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아버지가 마냥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운 이유는 그가 전쟁영웅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버지는 신앙적으로도 흠모할만한 유산을 남겨주었고, 그것은 우 목사 가문에 확고한 정체성이 되었다. 우병옥 중사는 바로 6·25 당시 조국과 교회를 위해 스스로 생명을 던진 십자군 출신이었다.6·25 당시 십자군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는 ‘십자군동지회’ 회원들이 2002년 11월 1일 함께 촬영한 단체사진. 앞줄 맨 오른쪽이 당시 회장인 우복기 장로,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십자군에 대한 회고록을 남긴 이종배 장로.

십자군은 6·25 발발 초기 인민군의 공세에 밀린 대한민국 정부가 남쪽으로 물러나고, 대구 아래 지역으로 전국 각지의 피난민이 몰려들던 시기인 1950년 7월에 결성됐다.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 청년면려회전국연합회(전국CE) 회장이자, 대구에서 피난민들의 교회인 대구성광교회를 섬기던 김병섭 장로가 대한기독교구국단을 이끌던 한경직 목사와 의기투합해 창설한 민간인 의용대의 이름이 ‘십자군’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우리 군의 전세가 현저하게 불리한 상황에서 기독청년들로 구성된 독립적 의용대 구성의 필요성을 당시 국방부 차관 장경근을 만나 설득해 허락을 이끌어냈고, 1개 연대 규모의 전력 편성을 목표로 십자군 모집을 시작했다.

<범어교회 100년사>에는 대구 사월교회, 칠곡교회, 경산교회, 청도 온막교회, 의성 중리교회, 청송 화목교회, 김천 부곡교회 등 각지에서 모여든 지원병들의 실명과 지원동기 등이 도표로 기재되어있다. 범어교회에서는 청년들은 십자군으로, 학생들은 학도병으로 자원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백악관 종교담당 보좌관과 세계기독청년면려회 총무를 지낸 폴링 박사가 1950년 8월 십자군 의용대원들을 상대로 연설하는 모습.

당시 18세 소년이었던 이종배(훗날 새문안교회 장로)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청도 온막교회에 전해진 십자군 모집공고를 접한 그는 친척 형 이종숙과 함께 의용대에 자원했다.

자서전 <아름다운 흔적>에서 고 이종배 장로는 “기왕에 군에 가야 할 것이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조직하는 십자군에 입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100리길을 하루 종일 걸어서 대구서문교회 십자군부대 본부를 찾아가 자원입대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십자군 대장을 지낸 고 김병섭 장로가 생전인 2003년에 미국 시애틀의 자택에서 십자군에 관해 증언하는 모습.

지원병들에게는 신체검사를 거친 후 신분증이 발급되었고, 각자 훈련받을 장소가 배속되었다. 이들을 통솔할 지휘부는 전국CE와 대한기독교구국단 인사들 중심으로 조직됐다. 한경직 목사가 고문, 김병섭 장로가 대장을 각각 맡았으며, 나중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제61회 총회장을 지낸 황금천 목사가 부대장에 임명됐다.

하지만 아쉽게도 연대 구성에 필요한 3000명을 십자군 이름으로 모집하기는 쉽지 않았다. 민간인 기독교인으로만 대상을 제한한 데다, 당시의 혼란한 상황에서 세례교인이어야 하고 담임목사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까지 충족시키기란 몹시 까다로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십자군 지원병들은 대구서문교회, 대구제일교회, 대구남산교회로 분산하여 숙영하며 훈련에 매진했다.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등은 십자군에 훈련장소를 제공했고, 지원병들은 이곳에서 기초군사훈련과 신앙훈련을 매일 반복하며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8월초 육군본부로부터 십자군에 첫 명령이 하달됐다. 전 병력이 부산으로 이동하라는 내용이었다. 찬송가 <십자가 군병들아>를 힘차게 부르며 열차편으로 이동한 십자군들은 부산진역에 도착해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김천에서 찾아온 여성 십자군들도 이들과 합류했다.

그러나 군 지휘부에서도 십자군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고달픈 시간들이 기약 없이 흘러갔다. 침구로 지급된 가마니 두 장씩과 하루 한 개씩 지급되는 주먹밥만으로, 부산 서면의 마구간에서 새우잠을 자며 버텨야 했다.

모두가 실의에 빠질 즈음, 뜻밖의 손님이 십자군을 방문했다. 미국 백악관 종교담당 보좌관과 세계기독청년면려회 총무를 지낸 프랜 폴링 박사였다. 십자군 병사들을 한데 모아 연설하며 용기를 북돋아준 폴링 박사는 곧바로 워커 미8군 사령관과 만나 이들의 장래를 논의했다. 결론이 나왔다.십자군으로 6·25 전쟁에 참전했다 전사한 우병옥 중사의 전사통지서와 무공훈장증.

김병섭 장로가 남긴 자필 회고록에는 “워커 사령관은 전투경험이 없는 십자군을 전선에 투입하면 소모전에 희생만 클 뿐이어서, 전선 배치보다는 특수업무에 투입키로” 결정되었고, 그 결과 여러 대원들이 “카투사 부대와 육군통신학교 등으로 분산 입대”했다고 기술되어있다.

비록 당초 목표인 독립 연대 구성의 목표는 이루지 못했지만, 나중에 국군 제9사단 제28연대가 창설되었을 때 전체 부대원 중 80%가 십자군 출신이었다. 이들은 금화전투, 매봉산전투 등에서 적군을 괴멸하며 혁혁한 전과를 남겼지만 다수의 전사자가 나오는 등 희생이 적지 않았다.

우세현 목사의 부친 우병옥은 ‘백마부대’로 알려진 제9사단 30연대로 이동했다. 그리고 1951년 4월 1일 강원도 철원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가해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전쟁이 끝난 후 1954년 9월 30일자로 고인에게 수여된 화랑무공훈장, 그리고 향나무를 깎아 만든 장기알과 호신용 육모방망이 등 몇 점 안되는 유품만이 아들의 손에 남겨졌다.
고 우병옥 중사의 아들 우세현 목사가 평생 수집한 십자군 관련 자료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몰라도 우세현 목사는 아버지가 몸담은 십자군의 주축이었던 전국CE에서 평신도 시절 제46대 회장을 지냈다. 이런 연결고리들을 바탕으로 우 목사는 국내외를 돌며 십자군에 참여했던 증인들을 만나고, 여러 문서와 사진들을 발굴하며 엄청난 양의 자료를 수집했다.

총회역사위원회에서도 6·25 발발 70주년을 기념한 역사저널을 발간하며, 십자군에 관련된 연구논문을 김병희 목사(서변제일교회)가 담당해 완성했다.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아 세월 속에 묻힐 뻔한 소중한 역사, 십자군이야기는 이제 한국교회 전체의 기억으로 다시 새겨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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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획/ 6·25와 한국교회] 김병희 목사가 말하는 십자군의용대 의미
“신앙인 자세로 국가 의무 다해” 김병희 목사(대구 서변제일교회)

전시(戰時)의 YMCA, 대구의 경우
(이 글은 한국YMCA소식지 YMCA(2014년 9-10월)에 실렸다.
6.25전쟁이 빚은 참상은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한국YMCA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대구YMCA의 경우는 달랐다. 『대구YMCA 80년사』에 의하면, 전시하의 대구YMCA는 전재민을 위환 구호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는가 하면, 신명여고와 경북여고의 임시 교사, 영락교회의 임시 예배당도 되었다. 대구YMCA 회관에는 기독청년들을 의용군으로 모병하였던 기독교의용군 사무실도 있었다. 진주에서 대구로 피난 온 강문규(전 한국YMCA연맹 총무)도 이 때 기독교의용대에 입대하였다. 아래 글은 기독교의용대 대장을 지낸 김병섭과 가졌던 인터뷰이다. 인터뷰는 필자와 윤경로, 서정민, 최기영이 시애틀을 방문, 2003년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김병섭의 집에서 가졌다. 김병섭 장로는 인터뷰 두 달 뒤 시애틀에서 서거했다. 인터뷰 일부를 요약 소개한다.
대한기독교구국회 조직하다
김흥수: 장로님, 47년 8월 달에 월남하시고 나서 서울에 계셨죠? 서울에 계셨다가 6.25 전쟁은 어디서 겪으셨어요?
김병섭: 서울서. 인도교가 끊어지고, 아비규환인데, 나룻배가 있어서, 나룻배가 있어서 그걸 타고서 우리 아이들 데리고 건너갔어요. 수원 가서 이제 갔다가 하루 있다가 대전을 간 거지. 대전 가서 한경직 목사 중심으로 ‘기독구국회’를 만들었습니다. 대구 가서 완전히 만들었지. 대전에는 아마 한 3-4일 있었나. 대전에서는 아담스(안두화) 선교사 통해 구호품 나누어 주고, 또 선무공작, 나가서 강연도 하고 그랬죠.
김흥수: 무슨 강연을 하셨나요? 전쟁을 돕자?
김병섭: UN군은 경찰군이다. 공산당은 도둑놈이다.
김흥수: 도둑놈을 잡기 위해서 경찰과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해 UN이 들어왔다는 말이죠?
김병섭: 예, 예
김흥수: 그러니까 군사작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경찰과 같은 역할을 하러 왔다.
김병섭: 그게 선무공작이라. 구국회 목적이 선무공작과 십자군, 병사를 해서 우리가 싸우자 이거지.
김흥수: 우리가 기독청년들이 전쟁에 나가서 싸우자 그런 얘기일 텐데, 그걸 어느 분이 그런 말씀을 먼저 하셨어요?
김병섭: 한목사님 하고 저하고. 우리도 군대 조직하자. 그래서 십자군, 이름이 십자군이야. 그래서 의논 해가지고 한 목사님하고 나하고 그때 국방부 차관 장경근 씨가 있었어요.
김흥수: 대구에 가서 기독교의용대 만드는 작업을 구체적으로 하시는데요, 대구에 가서 지금 장경근 차관을 만나셨다는 거지요? 그런데 왜 그분을 만나셨나요? 사전에 그 분을 알고 계셨나요?
김병섭: 사전에 알고 있었지. 그 분이 신의주 사람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한목사님 잘 아니까. 그래서 둘이 갔지요. 가니까 장경근 차관이 명암을 써줬어요. 그 때 작전교육국장이 강문봉 대령이야. 찾아가서 명함을 주니까 강대령이 보더니 “우리 십자군 합시다. 십자군 합시다.”
김흥수: 한목사님이나 장로님이 십자군 만들잔 얘기도 안했는데, 강대령이 먼저 “십자군 만듭시다”는 얘기 했단 말이죠?
김병섭: 네네...나중에 강문봉 대령이 “지금 육군이 있다. 육군이 있는데 십자군 하면 군이 둘이 된다. 하니까, 그렇게 하지 말고 기독의용대로 하라.”
김흥수: 그러니까 강문봉 대령이 장로님과 한경직 목사님을 다시 보자고 그래서 하신 말씀이 “십자군은 이미 군이 있으니까 적절한 용어가 아니니까 기독교의용대라는 이름으로 모집을 좀 하는 것이 좋겠다?”
김흥수: 대구에 내려가실 때에 장경근 차관이나 강대령 만나기 전에 그 어디로 가셨어요? 대구 YMCA로 먼저 가셨나요?
김병섭: 그럼!
기독교의용대 모집은 대구YMCA 회관에서
김흥수: 대구 YMCA에 찾아갔는데 거기 아는 분이 있었어요?
김병섭: YMCA 총무가 이원우 목사라고 있었어요. 그분이 내 본 교회 장수원 평양 본교회 조사로 있었어요. 신학하면서 그땐 조사야. 조사로 있었어요. 사무실 쓸려고 왔다 하니까 쾌히 승낙하고, 또 나도 나지만은 한목사도 중요한 분이니까 구국회도 거기서 다 하자, 그렇게 된 거예요.
김흥수: 대구 YMCA에다가 구국회 사무실을 하나 얻어서 일을 시작하기로 하고 맨먼저 장차관을 만나러 갔고 그렇게 해서 강대령을 만나게 되고. 강대령을 만나서 기독교의용대를 만들기로 했는데 어떻게 광고 하셨어요?
김병섭: 벽보 붙였지요. 벽보, 벽보를 각 교회마다 또 거리에 붙였어요.
대구 시내의 교회 하고 거리에다가(강문규는 대구 시내에서 현수막을 보았는데, “하나님은 너를 원하신다!” 전쟁터에 나가 싸울 기독교 십자군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고 회고한다. 강문규, 『나의 에큐메니컬 운동 반세기』).
김흥수: 제가 지난 번 대구 가서 기독교의용대 출신 분들 말씀을 듣다보니까 대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피난을 갔는데 교회에서 목사님이 광고하시기를 기독교 의용대를 모집한다고 하더라 대구 서문교회에서, 그래서 왔다고 해요. 그러니까 대구 말고도 몇 십리 떨어진 교회에서도 기독교의용대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거군요?
김병섭: 물론. 그러니까 YMCA에 피난 목사도 오셨지만은 또 시골 목사님 많이 왔으니까. 영남지방에 있는 목사들이 많이 왔으니까.
김흥수: 대구 YMCA에?
김병섭: 그렇지.
김흥수: 그분들이 기독교의용대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교회에 가서 광고를 하신거로군요. 기독교의용대 지원생들이 대구 YMCA 사무실로 먼저 왔나요?
김병섭: 그렇습니다.
김흥수: 대구에 가서 기독교의용대를 모집하기 시작하게 날짜가 언제쯤 될까요?
김병섭: 7월 중순께.
김흥수: 7월 중순부터 언제까지 이 의용대 분들을 모집 하셨어요?
김병섭: 한 보름 동안 했어요.
김병섭: 식량은 육군본부에서 배급해 주고 우리가 그 예비역 우리 기독청년 가운데 예비역 장성이 있었으니까, 그분들이 도수훈련, 도수훈련 하게 됐어요. 연병장은 계성학교 교정이예요. 아침 기상해가지고 거기서 이제 우리 군가 의용대가를 찬송가 “십자가 군병들아” 그 걸 군가로 제정했어요. “십자가 군병들아” 그거 부르고 기도하고 훈련 착수했어요.
김흥수: 그러니까 제식훈련을 하신 거죠? 아직 무기도 아직 지급받지 못하고 복장도 못하고 평상시에 입었던 옷 입고 제식훈련도 좀 하고 달리기도 하고 기도회도 좀 하고. 그렇게 하셨군요. 그 당시 의용대에 오는 사람들이 나이가 어느 정도?
김병섭: 나이가 뭐 고등학생도 있고 중학생도 있고 암만 많아도 30 이후로는 없고. 다 미만.
김흥수: 그래서 대구에서 모집한 의용대가 숫자가 어느 정도 됐나요?
김병섭: 삼천 명 가까이 됐어요(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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