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4

일본이 독도를 러일전쟁(1905년) 당시 편입했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가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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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친네, 헛발질하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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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는) 소화 4년(1929년) 관보에 시마네현 관할 구역으로 편입하고 행정상으로 오키도 고카촌으로 소속되었다."
위 '문서3'을 보면 독도는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편입된 것이다. 대한민국이 주권을 상실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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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에는 "시마네현 관할 구역으로 편입"이 아니라, "시마네현 관할구역으로 쿠미어업조합 지선권(地先權, ちさきけん)이 편입"된 것이라 되어 있다.
요컨대, 1905년에 '무주지선점' 논리로 편입된 섬을 25년 후에 다시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처리를 한 게 아니라(할 리가 없잖은가?!), 특정 어업조합에 배타적인 어업권을 인정하면서 행정구역상으로도 그 동네에 편입시켰다는 이야기.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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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독도를 러일전쟁(1905년) 당시 편입했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가 발견됐다.
일본 측 주장에 의하면 러일 전쟁 당시인 1905년 2월 15일 외무성에서 훈령을 내렸고, 시마네현에서 1905년 2월 22일자로 편입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일본 시마네현에서는 2005년부터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해 매년 2월 22일에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http://omn.kr/1xgdk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니라는 문서가 발견됐다"
OHMYNEWS.COM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니라는 문서가 발견됐다"
김문길 교수 "일제강점기 독도에 어업회사 설립했던 일본인이 일본정부에 보낸 문서가 증명"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니라는 문서가 발견됐다"김문길 교수 "일제강점기 독도에 어업회사 설립했던 일본인이 일본정부에 보낸 문서가 증명"
22.02.22 15:37l최종 업데이트 22.02.22 16:13l
오문수(oms114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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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에서 20여년간 공부하고 부산외국어대학에서 한일관계사를 가르쳤던 김문길 교수가 시마네현 오끼섬에 사는 "야하다 소산"의 할아버지가 쓴 "죽도일기"를 들어보이고 있다. "야하다 소산"의 할아버지 "야하다사이타로"는 일제강점기 시절 독도에 어업회사를 차리고 해산물을 채취했던 사람이다.
ⓒ 김문길


일본이 독도를 러일전쟁(1905년) 당시 편입했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가 발견됐다. 일본측 주장에 의하면 러일 전쟁 당시인 1905년 2월 15일 외무성에서 훈령을 내렸고, 시마네현에서 1905년 2월 22일자로 편입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일본 시마네현에서는 2005년부터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해 매년 2월 22일에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

일본에서 20여 년간 공부한 후 부산외국어대학에서 한일관계사를 가르쳤던 김문길 교수(한일문화연구소 소장)는 수년 전 시마네현 오끼섬을 방문해 독도에 어업회사를 차렸다는 회사를 찾아갔다. 하지만 회사는 없어지고 대신 회사 사장(야하다 사이타로)의 손자인 '야하다 소산'을 만났다. 다음은 사장의 손자인 '야하다 소산'이 할아버지의 <죽도일기>를 김문길 교수한테 전해주면서 했던 말이다.

"죽도(독도)는 우리 할아버지가 명치시절부터 전쟁 전까지 죽도(독도)에 회사를 차리고 고기를 잡은 일본 땅인데 한일협정(1965년 6월 22일) 때 일본 땅이라고 문서화하지 않은 것이 억울해 당시 다케시다 관방장관 한테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사장의 손자는 할아버지가 당시 관방장관한테 보낸 탄원서를 김문길 교수한테 직접 보여줬다. 문서를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온 김교수는 문서에 적힌 내용을 자세히 검토한 후 일본이 1905년부터 독도를 본인들 땅으로 편입한 것은 명백한 허위라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한다.

당시 한일협정 체결 당사자들은 독도가 어느 나라 영토란 것을 명확히 하지 않고 넘어갔다. 한국인들은 불만속에 넘어갔지만 일본 시마네현 주민들은 원성이 컸고 독도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렸던 어부 야하다사이타로가 외무성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다음은 김문길 교수가 사장의 손자인 '야하다 소산'으로부터 획득한 문서에 근거해 쓴 글이다.

'문서1'은 일제강점기 시절 독도에 어업회사를 차렸던 '야하다사이타로'가 '다케시다 관방장관'에게 보낸 탄원서다.


▲ "문서1" 사진으로 독도에 어업회사를 차리고 해산물을 채취했던 "야하다사이타로"가 일본 다케시다 관방장관에게 보낸 탄원서다.
ⓒ 김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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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야하다사이타로'로 현재 83세다. 시마네현 오끼 고가촌 다이오지 후시미라는 동네에 산다. 6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독도(죽도)에서 고기를 잡았기 때문에 독도가 일본영토란 것은 세상이 알고 있다."참고로, 일본 어부들이 독도에서 해산물을 채취해갔다는 시마네현 오끼섬은 독도에서 157.7km, 울릉도에서 독도까지의 거리는 87.4km 떨어져 있다.

'문서2'는 독도에서 해산물을 채취한 일본 어민들의 상황을 설명한 자료다.


▲ "문서2"로 일본 시마네현 오끼섬 어민들이 독도에서 해산물을 채취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김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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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죽도)에는 해산물이 풍부하여 미역 등 많은 해산물을 채집했고 특히 물개를 잡았다. 물개는 오사카, 고베 서커스 곡예단에 팔았다. 당시 독도에서 잡은 물개 박제 세트는 여러 곳에서 전시하고 있다."
'문서3'의 밑줄 친 부분을 보면 일본이 1905년에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했다고 주장하는 사실이 틀렸다는 걸 명확하게 증명해준다. '문서3'내용이다.


▲ "문서3"으로 일본이 1905년에 독도를 시마네현 관할 구역으로 편입했다고 주장하는 사실이 틀렸다는 걸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사료에는 "소화 4년(1929년)에 독도를 시마네현 관할 구역으로 편입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 김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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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는) 소화 4년(1929년) 관보에 시마네현 관할 구역으로 편입하고 행정상으로 오키도 고카촌으로 소속되었다."
위 '문서3'을 보면 독도는 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편입된 것이다. 대한민국이 주권을 상실한 때이다.

일본측 주장에 의하면 독도는 러일전쟁 당시인 1905년 2월 15일 외무성 훈령에 독도를 죽도라고 편입했다고 했다. 또한 시마네현 고시 40호로 편입했다면서 매년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했다. 하지만 김문길 교수 주장에 의하면 "시마네현 고시40호는 직인이 찍혀 있지 않고 회람으로 돌린 것이기 때문에 효력이 없다"고 한다. 일본이 주장하는 다케시마의 날을 맞이해 다시 한번 역사적 사실을 상기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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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goo Cho

최근 일본국제문제연구소 홈페이지에는 아래와 같은 게시물이 올라와 있는데, 이런 것은 읽지도 않겠지만요.

Jingoo Cho

https://www.jiia.or.jp/jic/20220218.html...





JIIA.OR.JP
竹島を記載した江戸時代後期航路図の発見について竹島を記載した江戸時代後期航路図の発見について
https://www.jiia.or.jp/jic/20220218.html?fbclid=IwAR0T8BGEiWv09v7R8qMG6etqrTA5P3qigQ8IFCxUWNl5jQrnopGWfXnOoZA

領土・歴史

竹島を記載した江戸時代後期航路図の発見について

2022-02-18
舩杉力修(島根大学法文学部准教授)


竹島を記載した江戸時代後期航路図の発見について

令和4(2022)年2月18日

公益財団法人日本国際問題研究所

日本国際問題研究所では、領土・主権・歴史の分野において、調査研究及び対外発信事業を実施するため、平成29(2017)年に「領土・歴史センター」を設置しました。同センターでは、①わが国の領土・主権・歴史に関する国内外の資料の収集・整理・対外発信等、②同分野に関する国内外での公開シンポジウムの実施、及び③同分野に関する調査研究の実施等の事業を展開しています。

平成30(2018)年度からは、島根大学法文学部の舩杉力修(ふなすぎりきのぶ)准教授に、竹島の古地図の研究のため、受託研究を依頼して実施しています。あわせて、山陰地方を中心に竹島関係の史料調査、聞き取り調査を、舩杉准教授、升田優(ますだゆう)・島根県竹島問題研究顧問に依頼して実施しています。

その結果、平成30(2018)年10 月、東京都内の古書店で、竹島(現在の鬱陵島)と松島(現在の竹島)が記載された、江戸時代後期のわが国の航路図が販売されているのが見つかり、舩杉准教授が購入しました。分析した結果、①竹島(現在の鬱陵島)、松島(現在の竹島)の周辺を通る帆船の松前航路(遠沖乗り航路)を記した江戸時代後期(19 世 紀初期頃)で幕府、長崎奉行作製と考えられる航路図で、いわゆる公的地図が初めて見つかったこと。②松前航路(遠沖乗り航路)を通る帆船の船頭による、竹島、松島の地理的認識が記され、竹島、松島が日本領と認識されていたこと。③この絵図は、竹島(現在の鬱陵島)の渡海を禁止した、元禄9(1696)年の元禄竹島一件以降も、安永8(1779)年初版、水戸藩の地理学者長久保赤水の「改正日本輿地路程全圖」、享和元(1801)年序で、杵築大社の神官矢田高當が記した『長生竹島記』、文政3(1820)年10 月の自序で、浜田藩の儒学者中川顕允が記した、『石見外記』所収の地図「大御國環海私圖」とともに、松島(現在の竹島)に対する実地の知見、松島までわが国の範囲としての認識が継続したことの裏付けになる史料として位置づけることができること。④松島(現在の竹島)近辺を帆船が通ったとか、望見したことが国際法上領有権の根拠になるわけではないものの、朝鮮の側には実見した記録すらないこと。⑤すなわち、この絵図は、竹島がわが国固有の領土であることを補強する資料であるといえることが確認できました。

その概略は別紙の通りです。別紙については、調査者の個人的見解であり、日本国際問題研究所の見解を代表す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

<別紙>

執筆者 舩杉力修・島根大学法文学部准教授(歴史地理学)

別紙1調査成果の概要
別紙2「航路図」(全体)
別紙3「航路図」の注記(表 密貿易の場所での密貿易の状況)
別紙4竹島・松島の注記
別紙5「日本海の海流模式図」(海上保安庁『本州北西岸水路誌』(2017 年刊行所収)




Jong-Chol An

독도문제를 볼 때마다 “한일 독도문제에 대한 연구경향에 대한 연구”가 필요함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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