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4

21 오형규 칼럼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586 | 한경닷컴

오형규 칼럼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586 | 한경닷컴

[오형규 칼럼]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586

오형규 논설위원
입력 2021.04.21
 
국민의 준엄한 선거 심판에도
개혁 빙자해 반성도 흐지부지
미래 상상 못하니 과거사 집착

그런 '정치 586' 정년도 없어
'관념 늪' 탈피한 2030의 일침
"586을 집에 잘 보내드리자"

오형규 논설실장


정치꾼들 눈에는 생업에 바쁜 국민이 ‘가붕개(가재 붕어 개구리)’로 비칠지 모르겠다. 하지만 참다 참다 더는 못 참게 되면 일어나는 게 장삼이사요, 민초다. 망가진 조선의 19세기가 ‘민란의 시대’였다면, 대한민국에선 투표로 심판한다. 지난 ‘4·7 재·보궐선거’가 그렇지 않은가.

3년 만의 기막힌 반전이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전무후무한 대승을 거뒀다. 시·도 단체장과 교육감 17곳 중 14곳, 기초단체장 226곳 중 151곳, 광역의원 78%를 독차지했다. 이를 두고 ‘산업화 세력의 퇴장’이란 평이 절로 나왔다. 코로나 덕에 작년 총선도 180석 압승을 이어갔다. 20년, 50년 집권론까지 들먹였다. 그런데 불과 1년 만에 이젠 ‘민주화 세력의 종말’이란 말이 나온다.

국민은 문재인 정부 4년을 조용히 지켜봤다. 전 정권에 실망이 컸던 만큼 기대한 이도 많았다. 그러나 조국 윤미향 이상직에게서 내로남불과 후안무치의 극치를 봤고, ‘검찰 개혁’을 외치는 이들에게서 적반하장을 목도했으며, 어설픈 아마추어 정책에서 무능을 실감했다. 그들의 ‘입’과 ‘손발’이 얼마나 따로 노는지 속속들이 알게 됐다.


2030세대의 확 달라진 표심을 흔히 ‘공정과 정의에 민감해서’라고 분석한다. 정작 청년들은 복잡하게 생각 안 한다. ‘아닌 건 아니다’라고 한다. 30대 초반 후배는 “그냥 꼴 보기 싫고, 납득도 안 되는 말만 해대고, 맨날 못 하게 하고, 무슨 희한한 담론으로 가만히 있는 애들을 이상한 사람 만들고 난리 치니까 그렇다”고 꼬집는다. 그런데도 자기들만 선(善)이며 정의라고 우기고, ‘내 편 무죄, 네 편 유죄’로 일관했으니 탈(脫)진실·탈염치 집단으로 비칠 수밖에.

선거 보름이 지나자 여권에선 반성도, 성찰도 희미해졌다. 최진석 서강대 명예교수가 그제 민주당 초선모임 강연에서 “생각이 끊겨 정신승리에 빠졌다”고 정곡을 찔렀다. 현안 대처 능력도, 미래를 위한 치열한 상상력도 없으니 과거사에 집착할 뿐이다. 백신과 반도체의 엄중한 위기 앞에서조차 적폐 청산, 친일잔재 청산, 조국 수호의 낡은 레퍼토리를 튼다.

그러면서 ‘중단 없는 개혁’을 하겠다니 어이 상실이다. ‘위선 무능 내로남불’의 본인들부터 개혁해야지 또 뭘 어쩌겠다는 건가. 경제·민생은 손대는 것마다 참사를 빚고, 부끄러움도 없이 셀프특혜법·구제법을 남발한 자신의 몰골은 안 보이는 모양이다. 그런 여권의 핵심 다수가 정치판 586이다. ‘시대의 짐’이 된 그들은 선수층도 두텁다. 전대협 간판들이 뒤로 빠지자 새로운 선수들이 화수분처럼 나온다. 30대부터 정치에 뛰어들어 벌써 3~4선(選)이 수두룩하다. 다른 분야의 동년배들이 정년을 맞아 퇴장하는데 선출직은 정년도 없다. 마르고 닳도록 해먹을 동안 그 아래 40대는 속된 말로 줄을 잘못 섰다.


이제 정치판 586과 그 배후의 지식인을 자처하는 ‘배운 무식자’들은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부를 만하다. 세대의 유효기간이 한참 지났어도 ‘역사적 경험치’라는 오만에 빠져, 세상이 바뀌었음을 눈 뜨고도 못 보는 청맹과니가 된 것이다. 민주화는 쟁취하는 것이지만, 민주주의는 개개인의 성찰과 절제 속에 체화하는 것임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오로지 증오와 갈등을 부추겨 정치적 지위와 영향력을 유지하는 데 골몰한다. 정권을 잡고도 경세제민과 국리민복을 위해 무슨 입법과 정책 노력을 편 게 있기나 한가.

4·7 선거를 통해 시대착오적 관념론에서 자유로운 2030세대를 확인한 것은 그나마 소득이다. 2030은 586에 빚진 게 없다. 그래서 ‘좌파 전체’가 아니라 ‘좌파 전체인 양’ 민주화 공로를 독식하고 기득권이 된 정치판 586의 퇴장을 당당히 요구한다. “우리 사회는 더이상 86세대에게 사회변혁의 임무를 부과하지 말아야 한다. 역사화해서 집에 잘 보내드리자”(《추월의 시대》)는 30대 논객의 일침도 있다.


‘데뷔작이 대표작’이고, ‘사유는 없고 사익만 충만’한 집단이 나라와 국민의 금쪽같은 5년을 허송케 했다. 어쩌겠나. 국민이 몰라서 또는 약아서 선택한 것인데. 그래서 “정치인과 기저귀는 자주 갈아줘야 한다. 그 이유도 같다”(마크 트웨인)고 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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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규 칼럼] 압축성장은 해도 '압축성숙'은 못 한다

오형규 논설위원
입력 2021.10.20

세계 10위 경제대국 됐지만
정신·품격 등 무형요소는 지체
4류 정치,기업·문화와 간극 커

선진국 중 가장 책 안 읽는 나라
늙어가는데 담론은 아직 미성숙
문제 해결능력 실종이 진짜 위기

‘압축성장은 가능해도 압축성숙은 불가능하다.’ 저작권자가 누군지는 불분명하지만 10여 년 전부터 식자들 사이에 회자된 말이다. 누구나 키가 훌쩍 크는 시기가 있지만 금방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성숙은 세월과 지식·경험이 축적돼야 한다. 국가도 똑같다. 1960년대 이후 선진국들 뒤통수만 보고 좇아간 덕에 기적 같은 압축성장을 이뤘다. 누가 봐도 외견은 소득 3만달러대 선진국이다. 그러나 정신, 윤리, 품격, 배려, 제도, 준법 같은 무형의 요소들은 따라오는 속도가 더디기만 하다.

압축성장기 기업가들의 분투는 눈물겨울 정도였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거북선이 그려진 옛 500원권 지폐와 부지 항공사진만 갖고 조선소 지을 차관을 얻어낸 유명한 일화(현대중공업)부터 일본 반도체공장에 단체로 견학 가 걸음으로 잰 뒤 공장을 설계한 이야기(삼성전자), 제철소 건설에 실패하면 영일만에 빠져 죽자던 ‘우향우 정신’(포항제철)….

‘하면 된다’와 ‘해봤어?’로 무장하고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밤낮없이 누빈 덕에 이젠 세계 10위 경제대국이다. K팝 영화 드라마 등 문화력까지 세계가 주목하는 ‘힙한’ 나라다. 역사 고비마다 수많은 이의 피와 땀과 눈물 덕에 민주화도 이뤘다. 하지만 성취가 큰 만큼 공허함은 더 크게 다가온다. 언제까지 허구한 날 지지고 볶으며 허송해야 할까.

1987년 민주화 이후 한 세대 넘게 흘렀건만, 민주주의는 되레 후진 중이다. 자유와 진실이란 절대가치가 무지와 억지, 포퓰리즘, 진영논리에 의해 훼손되고 있다. 정치판 시계는 거꾸로 돌고, 골 깊은 진영 갈등은 끝이 안 보인다. 조국·윤미향 사태, 대장동 게이트를 겪으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조차 합의가 안 된다. 투명성 낮은 저신뢰 사회의 전형이다.

5개월도 채 안 남은 대선판은 그런 혼돈의 집약판이다. 민주화 이후 여덟 번째 대통령을 뽑는데 유권자에겐 점점 고역이 돼간다. 국가비전을 주도해야 할 정치 담론은 ‘GSGG’ ‘손바닥 왕(王)자’ 같은 저열한 논쟁과 말꼬리 잡기에 머물러 있다. 나라 밖에까지 알려질까 봐 겁난다. ‘축(軸)’이 바뀌는 대전환기에 미래를 위한 혁신은커녕 제 앞가림도 못 하는 이들의 난장판이다. 오죽하면 정치인 자격시험이라도 치자는 주장이 공감을 얻겠나 싶다.

서구 선진국만큼 먹고살게 됐다고 해서, 그들이 수백 년간 쌓아올린 ‘성숙과 숙고’의 아비투스까지 거저 따라오진 않는다. 이런 지체를 설명하는 데는 ‘리비히의 최소량 법칙’이 안성맞춤이다. 식물의 생장은 여러 필수 영양소 중 최소량으로 존재하는 영양소에 의해 결정되듯, 나라를 구성하는 무수한 분야 중 제일 뒤처진 것이 국격과 국가경쟁력을 좌우하지 않는가. 기업과 문화 경쟁력이 높아질수록 정치 퇴행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국가의 총체적 수준은 정치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정치판 탓만 할 일도 아니다. 사명감, 기강, 청렴으로 채워야 할 공직자의 머릿속에 줄대기, 자리보전, 한탕주의가 자리잡는다. 지식인 사회에 참된 지식이 없고, 시민사회에는 시민이 없다. 최후 보루인 사법부조차 신뢰하기 어렵고, 흐물흐물해진 사정기관들은 짠맛을 잃었다. 같은 진영이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을 만큼 거짓말도 쉽게 용인된다.


성숙 사회가 되려면 숙고하는 개개인이 다수가 돼야 한다. 숙고는 검색이 아니라 독서와 사색에서 나온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은 선진국 중 책을 가장 안 읽는 나라다. 지난해 조사에서 성인 10명 중 4.5명은 1년 동안 책을 한 권도 안 읽었다. 한 달 독서량은 전자책·오디오북까지 합쳐 0.6권(연간 7.5권)이다. 1년 도서구입비(3만5000원)가 한우 1인분 값도 안 된다. 해마다 거꾸로 신기록이다. 문맹은 사라졌는데 문해력은 점점 떨어진다. 대신 유튜브를 월 30시간 보고, 먹방과 오디션 프로그램은 나오는 족족 히트다.

초고령 국가로 달려가는데 성숙한 담론과 진지한 성찰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 국민 중위연령이 1980년 21.8세에서 2020년 43.8세로 스물두 살이나 높아졌는데도 그렇다. 그러니 정치가 그 모양 그 꼴이 아니겠나. 문제없는 나라가 없듯이 우리나라는 격차, 일자리, 부동산, 가계빚, 재정 악화, 내수 위축, 탈원전, 교육 퇴보, 연금 고갈, 규제 만능, 미·중 대립, 북핵 등 숱한 문제를 안고 있다. 문제가 많은 게 위기가 아니다. 문제를 알고도 눈감고 해결할 능력이 실종된 게 진짜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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