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7

윤석열 자필 편지 “장수(將帥)가 적(敵) 두려워하면 어떻게 싸움에 임하나?” : 월간조선

[단독] 윤석열 자필 편지 “장수(將帥)가 적(敵) 두려워하면 어떻게 싸움에 임하나?” : 월간조선
[단독] 윤석열 자필 편지 “장수(將帥)가 적(敵) 두려워하면 어떻게 싸움에 임하나?”
“약간의 체념이 어려움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는 것 같다”

글 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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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문제는 마음의 안정인데 호수(湖水)와 같은 평정을 찾으려고 노력해도 알 수 없는 고독과 흥분 사이를 표류하면서 격한 파도가 치니 말이다. 마음을 달래려 먹는 술은 도리어 이를 더욱 격하게 하는 것 같아 가급적 감상적(感傷的) 음주는 삼가고 있다. 약간의 체념이 사람을 단순하게 하고 어려움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는 것 같다.> - 사법시험 낙방 후 윤 후보가 친구 신용락 변호사에게 쓴 편지 일부.


신용락 변호사. 사진=법무법인 원
국민의힘 윤석열 대통령 후보가 대학 시절 친구에게 보낸 자필(自筆) 편지가 공개됐다.

윤석열 후보와 충암고, 서울대 법대 동기인 신용락 변호사(법무법인 원·연수원 18기)는 《월간조선》에 1981년과 1985년 윤석열 후보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했다. 신 변호사는 자신의 일기에 등장하는 윤 후보 관련 부분도 본지에 함께 전달하기도 했다.

신용락 변호사는 “나와 석열이가 대학에 입학했던 시기(1979년)는 군사정권 시절이었다”며 “대다수 대학생들이 정권에 불만을 갖고 있던 때였다”고 회고했다. 신 변호사는 “이듬해인 1980년에는 전두환의 등장과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로 이어져 ‘군사정권의 재등장’이라는 불안감이 극에 달했다”고 말했다. 그는 윤 후보 관련 일화 중 이른바 ‘전두환 모의재판’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들려줬다.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직전, 군사정권에 불만을 가진 학생들이 서울대 학생회관에 모였다. 거기서 ‘전두환 모의재판’이 이뤄졌다. 특별한 준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즉석에서 이뤄진 게 모의재판이었다. 윤석열이 덩치도 좀 있고 해서 재판장 역할을 맡았다. 그 시절 대학가에는 정보기관이 풀어놓은 학원사찰 요원들이 있었다. 재판장을 맡은 윤석열도 ‘요주의 인물’로 분류됐다. 5·17 계엄 확대가 발표된 직후, 석열이는 외가(外家)가 있는 강원도 강릉으로 도피를 해야 했다.”

신 변호사는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강릉에 가 있던 석열이랑 연락이 잘 안 됐다”며 “그 해 가을 휴교(休校)했던 대학이 비로소 개강을 해 석열이와 재회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80년 엄혹한 시기가 지나고, 모든 대학생들이 그러했듯이 윤석열 후보 역시 다시금 학업에 집중했다. 신용락 변호사는 “석열이는 일관된 자기 주관이 있었고 집중력 또한 대단했던 걸로 기억한다”고 했다. 신 변호사는 1981년 5월 10일 쓴 자신의 일기장을 보여줬다. 거기엔 이런 대목이 있다.


<오늘이 사법 2차 시험이 끝나는 날이다. 홍근이는 나와 가족의 권유대로 자신의 의지를 세워서 끝까지 시험을 치렀다. 3학년 때 시험에 합격한다는 것이 석열이 말대로 법과대학에는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칠 것이지만, 그 개인으로 보면 –홍근이의 경우- 지긋지긋한 것을 떨쳐버리고 보다 많은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석열이는 형법학회 모의재판 준비에 바쁜 모습이다. 무엇을 하면 거기에 매몰되는 그의 모습이 대견스럽다. 내가 본 받을 점이다. >

그는 “‘무엇을 하면 거기에 매몰되는 그의 모습이 대견스럽다’ 평가가 석열이의 집중력을 표현해주는 좋은 예일 것”이라고 했다. 신 변호사 일기에 등장하는 ‘홍근’은 2020년 12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뜬 고(故) 윤홍근 변호사를 말한다. 윤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 4학년 재학 중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윤석열과 윤홍근, 그리고 윤기원 변호사(법무법인 원) 세 사람 모두 고교와 대학 동기 동창이다. 고교 시절 이들은 ‘3윤(尹)’으로 불렸다. 공교롭게도 이들 ‘3윤’은 생일이 6일 간격으로 서로 비슷하다. 윤 후보가 12월 18일이고, 나머지 두 사람은 12월 12일, 12월 6일이라고 한다. 세 사람 모두 본관이 ‘파평 윤씨’란 것도 공통점이다. 신 변호사의 1981년 10월 27일 자 일기장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저녁에 갑자기 석열이가 나를 찾았다. 끝까지 타락하지 말고 보다 나은 사회, 올바른 사회를 위해 기여하자는 약속을 했다. 그의 거시적·인격적 철저성을 매우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친구가 내 곁에 있다는 것도 나의 커다란 행운이다.>

신 변호사는 “석열이가 고시에 늦게 합격했어도 그 시기를 허송세월하지 않았다”며 “사회 현상은 물론 세상사의 흐름을 자기 나름대로 탐구하고 고뇌했다”고 말했다.

그는 윤석열 후보가 자신에게 쓴 두 통의 편지를 공개하기도 했다. 한 통은 1981년 대학교 3학년 때 윤 후보가 신 변호사에게 쓴 편지였다. 또다른 한 통은 신 변호사가 육군3사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있을 당시 윤 후보가 보낸 위문편지다. 첫 번째 편지에는 윤 후보의 인생관이, 두 번째 편지에는 사법시험에서 고배(苦杯)를 마셨을 당시의 심경이 녹아 있다. 한자가 많아 읽기 쉽도록 대부분을 한글로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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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1년 2월 10일, 윤석열 후보가 신용락 변호사에게 보낸 편지

<용락에게

보내준 엽서 잘 받았다.

항상 유혹에 빠져들기 쉬운 부족한 나를 잊지 않고 편달해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아마 이것이 영원한 우정이라는 것인가 싶다. 네가 적어 보낸 김춘수(金春洙)의 ‘서시(序詩)’는 매우 감명적이었다. 우리의 지상명령(Kategorischer Imperativ)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 같구나.

사실 한 인간이 그의 인생에 있어서 어떤 한 가지 일을 하건 안 하건 무슨 차이가 있겠니. 또 그 일이 상당한 시련이 따르는 일이라면 누가 구태여 그 일을 하려고 들겠니.

보통 사람이라면 어려운 상황과 시련이 닥치면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 이 같은 회의(懷疑)를 갖게 되고 결국은 그 일을 꼭 해야 필요성을 찾지 못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도피를 합리화시키게 마련이다. 그리고 어느 사회든 그 구성원의 대다수는 이런 자들인 것 같다. 아담과 이브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 원죄(原罪)를 범했듯이.

그러나 또한 어느 사회든지 그 사회가 존립·발전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밝히고, 정의를 세우고, 양심을 수호하려는 자들이 꼭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꼭 그러한 자가 되라는 의무는 부여받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양심이 있는 이상, 우리가 바로 그러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도 그 시련이 두려워 도피할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같이 어울리는 가운데 묵시적으로 약속하지 않았느냐?

이제 우리는 당당하다. 그 시련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진 지 오래다. 장수(將帥)가 상대해야 할 적을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싸움에 임하겠느냐? 서로 격려하면서 불모(不毛)의 열사(熱砂)를 걸어가자! 그것이 우리의 지상명령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일체의 유혹을 뿌리치면서.

그리고 우리의 생각을 깊게 하고 안목을 넓혀줄 힘을 기르자. 항상 어떤 상황에서라도 인정과 사랑 또한 잊지 말자. 그것은 생각지 않게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네가 하고 있는 일이 잘 되기를 항상 빌겠다. 그러나 때로 예기치 않게 일이 그르쳐져도 실망하지 말고 군자(君子) 답게 여유를 가져라.

긴 이야기들은 다음 기회에 만나서 나누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쓴다. 고마우이.

1981. 2, 10 석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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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985년 10월 11일, 윤석열 후보가 신용락 변호사에게 보낸 편지

<용락에게
 
맑은 가을의 아침이구나.

너는 벌써 아침 식사를 끝내고 훈련장에 도착하여 교관으로부터 교육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으리라. 청명한 하늘 아래 싱싱하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맑은 미래의 인재들과 더불어 규칙 생활하며 장교훈련을 받고 있는 너의 활기찬 모습이 부럽구나. 젊음의 발산이라 하면 너무 낭만적인 말이 될까?

하여튼 육체적으로 고달프겠지. ○○이형을 그저께 만났는데 네가 너무 야위었다고 하더구나. 정신적으로라도 매사를 심각하게보다는 단순히 생각하고 편하게 지나 보내는 것이 육체적 고달픔을 이기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나는 요새 몸이 더 불어나서 배가 ○○이 아버님처럼 나왔단다. 어제 옷을 좀 사려고 나갔는데 맞는 옷이 (two ex-large) 거의 없더구나. 맞춤으로 해야 할 형편이다. 오늘 아침도 우유 한 컵과 사과 몇 조각으로 때웠는데 당분간은 체중조절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진중(陣中)에서의 시험 소식이 네게 어느 정도 충격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나중에 알겠지만 이번 시험의 결과는 납득이 안 가는 점이 많다. 하지만 일단은 준비 부족으로 돌려야지.

난 지금 대학원 수업 발제 준비와 내년 논문을 위한 자료 수집을 하고 있단다. 발표 다음 날 논문 제출 자격시험이 있었는데 다행히 통과 되고, 몇 달 동안 술이나 마시고 긴장이 확 풀린 탓인지 뭘 좀 해보려 해도 머리에 주입(注入)이 되질 않는구나.

가장 큰 문제는 마음의 안정인데 호수(湖水)와 같은 평정을 찾으려고 노력해도 알 수 없는 고독과 흥분 사이를 표류하면서 격한 파도가 치니 말이다.

마음을 달래려 먹는 술은 도리어 이를 더욱 격하게 하는 것 같아 가급적 감상적(感傷的) 음주는 삼가고 있다. 약간의 체념이 사람을 단순하게 하고 어려움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는 것 같다.

20일 아니면 27일 면회 갈 것 같다. 가을 햇볕에 그을린 네 모습이 보고 싶구나. 만나서 이빨도 좀 까고.

○○도 얘기를 들어보니 잘 넘기고 있는 모양이더라. 의젓하고 심각한 면과 childish(어린애 같은-기자 주)한 면이 함께 있는 이○○ 후보생에게도 안부 전해주렴. 잘 개기라고. rough it!(‘고생해라’의 관용적 표현-기자 주)

너도 그럼 rough it!

다른 모든 친구들도 rough it!

1985. 10. 11 석열>


신용락 변호사는 “이 두 통의 편지는 ‘인간 윤석열’의 인격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며 “윤석열에 대해 궁금한 이들이 이 편지를 읽으면 그가 어떤 성품을 지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글=조성호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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