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4

n86세대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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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86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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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86세대

1. 개요2. 용어의 역사
2.1. 발생2.2. 대중화2.3. '86세대'로
3. n86세대들의 특징과 문제
3.1. 사회3.2. 정치3.3. 경제3.4. 교육3.5. 병역
4. 86세대 용어에 대한 비판5. 기타6나무위키에 기재되어 있는 86세대의 인물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1990년대에 나이가 30대였고 80년대 학번이고 60년대에 태어나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고 운동권에서 활동한 대한민국의 세대를 일컫는다. 의미가 확장돼서 1960년대생의 넓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원래 의미는 단순히 1960년대생이 아니라, 1980년대 대학을 나오고 운동권에 투신한 사람만 지칭하는 용어였다.# 맨 앞자리가 n인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나잇대가 함께 바뀌며 갱신되기 때문이다. 뒤 두 자리는 학번과 출생년도를 의미하므로 바뀌지 않지만 해당 세대가 40, 50, 60대를 거치며 앞 자리는 계속 바뀌게 된다. 인텔의 CPU 80386를 탑재한 386 컴퓨터에 빗대어 386세대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 시초이다. 이 세대는 1960년부터 1969년까지 10년간 무려 1,000만 명 가량 태어났고[1], 대한민국 인구의 무려 20%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의 부모 세대는 대부분 1920년대 중후반 ~ 1940년대 초반생이며 자녀들은 대부분 1980년대 중반생 ~ 2000년대 초반생이며 늦둥이일 경우 2000년대 중반생~후반생도 있고 2010년대생들도 소수 있다.

2019년 기점으로 386세대 모두 50대를 넘기면서 586세대펜티엄로 불리기도 한다. 2022년 기점으로는 만 나이 기준, 맏이인 1960~1962년생은 686세대가 되었다. 이후 컴퓨터 용어로서의 '~86'의 인지도가 매우 낮아져서 한동안 앞자리를 그냥 떼고 '86세대'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들과 전후 세대를 합치면 대략 1300만 명 정도로 대한민국 인구의 1/4을 차지한다. 2022년 기준으로 전후 세대가 은퇴하고,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장 큰 주류 집단이 되었다.

2. 용어의 역사[편집]

2.1. 발생[편집]

1980년대에는 이 세대를 한국전쟁 이후에 태어나서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라고 하여 '전후(戰後)세대'라고 불러왔다.

펜티엄과 윈도우 95가 보급되던 1995년경, PC통신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사회적으로 PC 도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대충 적응은 했는데, 그다지 잘 안풀리는 30대를 가리켜서 386 CPU로 윈도우 95 돌리는 것으로 비유한 것이라고 보수 언론에서 주장하였고, 당시 활자신문의 절대적 영향력에 마치 정설처럼 굳어졌다. 실제로는 윈도우 95 출시 전인 1993년에도 PC통신에서 X세대와 구분하려고 386세대라는 말을 만들고 사용하였다는 증언이 있으니 언론이 주도해서 만들었다는 말은 정확히는 거짓말이다. 다만 '신조어'라는 것이 근원을 찾기는 어려운데다가 당시 PC 통신 하던 증인은 소수에 불과하여 이러한 근원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신문사의 비유 자체는 적절한 것이, 386 CPU는 1980년대에 나왔고, 윈도우 95는 1995년에 나왔다. 컴퓨터의 성능이 부족하여 Windows 3.x[2]도 돌리지 못하는 386 PC가 윈도우라는 환경 변화에 적응 못하는 당시 386세대 사무직과 닮은 구석이 있다.

어원에 대하여 월간조선은 2017년 8월, 월간지 ≪말≫지가 1999년 5월호에 낸 별책부록 ≪21세기 한국의 희망 386리더[3]에 소개된 386세대의 어원 성립에 대하여 보도한 적이 있다. 이 별책부록은 당시 주목받던 많은 86세대 인사들을 다루고 있고, 이들의 자세한 인터뷰가 담겨 있어 신빙성이 상당히 높으므로 옮겨본다.
지난 96년 11월 초순 늦은 밤 서초동의 한 인테리어 회사 사무실. 30대 대여섯명이 머리를 맞대고 한 카페에 대한 이름짓기를 하고 있었다. 이정우 변호사, 이왕준 ‘청년의사’ 대표, 김원재 MA 건설 대표, 한창민, 김종민. 그들은 30대 모임의 하나인 ‘열린공간30’의 주요 창립멤버들로 만남의 공간으로 활용한 카페를 ‘디자인’하고 있었다. 자장면에 고량주를 시켜먹으면서.
“386으로 하면 어때요? 우리 세대들이 30세로 80년대에 대학을 나온 60년대 출생들이잖아요. 그 앞 숫자를 모아 386.”
한창민씨(당시 디지털 조선일보 근무)의 제안이었다. 연세대 철학과 82학번인 그는 총학생회 기획부장 시절부터 기발한 아이디어로 유명했던 인물. 그러나 즉석 기각. 당시만 해도 숫자로 이름을 짓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대신 ‘동숭동에서’로 결정됐다. 그런데 96년 12월 7일 그 카페가 개업할 때부터 기각된 이름 386은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카페 대표를 맡았던 김종민(서울대 국문 83)씨의 말. “언론과 인터뷰 할 때 우리 카페를 ‘386들의 모임공간’이라고 했더니 그 뒤부터 386이란 말이 유행되더군요.” 김씨는 “그 용어는 분명히 한창민씨가 처음 만들어 낸 것”이라고 했다. 한창민씨에게 ‘저작권’이 정말 그에게 있는 거냐고 물어봤다. “내가 처음은 아니죠. 그 용어를 만든 건 인텔이니까(웃음). 그것에 약간의 패러디를 한 거죠.” 한씨는 그때 막 컴퓨터들이 펜티엄급으로 접어들고 있었다면서 386은 용량의 한계가 있지만 얼마든지 업그레이드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기에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현재의 30대들은, 이른 학번은 한두 해 후면 30대들은, 이른 학번은 한두 해 후면, 40대로 접어든다. 386세대라는 이름도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 “우리가 486, 586이 될 때 사회적 퍼포먼스가 더 좋아져야겠죠.” 한씨는 ‘준비된 업그레이드’를 위해 요즘 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에 다니고 있다.
- <<21세기 한국의 희망 386리더">> 1999년 5월 발간#

X세대가 자칭 '신세대'라는 기치를 들면서 이전 세대를 구세대로 여기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당시 사용하던 386 컴퓨터를 사용하며 당시 최신이었던 PC 통신까지 하는, 구닥다리가 아니라는 것을 상징함과 동시에 운동권을 하던 자랑스러운 세대라는 의미로, 1994년 즈음의 1990년대 중반부터 사용해온 용어라는 것이다. 중요한 건 이 용어는 언론에서 만든 것으로서 30대 1980년대 학번 1960년대생이 스스로 '386세대'로 부르며 자랑스러워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가 처음 사용될 때는 컴퓨터가 286, 386, 486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듯이 자신들도 세월에 따라 업그레이드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었다. 그러나 펜티엄이 나오고, 코어2듀오 등의 세대별 브랜드명으로 출시되며, X86 CPU의 이름으로 생산되는 CPU가 사라지자 이런 그들의 기대가 무색하게 낡은 명칭이 되어, 스스로 자랑스러워 하지는 않는 것으로 변했다.

2.2. 대중화[편집]

조선일보동아일보[4]를 비롯한 보수언론에 의해 표현이 대중화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보수, 진보에 무관하게 386세대 본인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 당시 종이 신문의 영향력이 강하기도 했고 정치적인 용어임에도 나름대로 중립적인 용어이기도 했다. 또한 시사에서 사용되었음에도 나름대로 신묘한 표현이었다.[5] 그랬던 탓에 한 '세대'를 지칭하는 표현으로서 그 전 시대의 '베이비붐 세대', '전후 세대' 같은 딱딱하기 짝이 없는 것들보다는 훨씬 어감이 말랑했고, 반대로 뒤에 나온 'X세대'니 'N세대' 등의 용어보다는 훨씬 직관적이었다. 그리고 민주화라는 과제를 달성하고 남은 학생 운동 세력이 연세대 사태 등으로 물리적으로 박살나서 대학생 세대의 동질 의식이 약해진데다가, IMF 사태로 각자 살아가기 힘겨운 시대가 찾아 오고서는 이런 세대론도 한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6] '세대'론이 다시 떠오른 것은 양극화 심화로 제시된 88만원 세대론이 등장할 때였고, 그때까지 586세대는 나름대로 '세대'론에서 독보적인 용어로 살아남은 것이다.

2.3. '86세대'로[편집]

정계를 비롯한 언론에서 나잇대를 나타내는 앞의 숫자를 빼고 그냥 '86세대'로 부르는 유형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는 '80386', '80486', '80586' 등의 CPU 계통을 'x86'으로 호칭하는 것과 어느 정도 궤를 함께 한다.

다만 현재 86세대에 대한 비평은 대부분 꼰대 속성을 비판하는 것이다. 베이비 부머[7]와의 접점도 매우 크다. 그러나 '진보적이었던 86세대가 기득권이 되면서 사회 모순을 그대로 이어받는 걸 비판하는 것이 86세대 비판론'이지, 꼰대 모두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다.

매우 제한적인 용어를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가 있음에도, 꼰대 비판에 '86'으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니 디자이너 이상봉의 열정 페이 논란 때 이상봉을 '86세대'라고 가리키며 비판하는 이도 있었다. 비슷한 사례로 서정희의 강제 결혼 주장에 대하며 '86세대'의 결혼 방식이라며 비꼬는 글이 올라온 적도 있다. 서세원은 1956년생이므로 '86세대'가 아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꼰대와 젊은 세대 간의 갈등을 단순히 '86세대'로 지칭하고, 심지어 '꼰대'의 대명사처럼 쓰이기까지 한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다만 86세대가 40-60대인 시기의 타 세대는 가정에서부터 정치, 사회를 아우르는 86세대의 꼰대기질 공감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3. n86세대들의 특징과 문제[편집]

586세대 지도층의 어떤 점이 문제인가.

“586세대는 1980년대 민주화를 울부짖었다. 상당수는 NL(민족해방)이니 PD(민중민주)니 하는 이념 투쟁에만 골몰했다. 심지어 북한을 신봉하는 주체사상에 빠지기도 했다. 586세대 정치인들이 그런 이념을 버렸어도 젊은 시절 익힌 편협한 세계관의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조선 말 친중 위정척사파의 협애한 가치관과 닮은꼴이다. 여기에 인종적 민족주의까지 결합했다.”

친중 위정척사파에 인종적 민족주의파가 결합했다?

“미국·일본에 대한 반감, 중국·북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그것이다. 지금 남북한이 하나라고 볼 근거는 이른바 ‘피(血)’밖에 없다. 이념과 사고방식이 전혀 다르다. 북한은 지금도 한국을 핵폭탄으로 말살하겠다고 벼른다. 그럼에도 어떤 이는 통일을 낭만적으로만 바라보고 북한 정권에게 뭔가 베풀고 싶어 한다. 인종적 민족주의의 폐해다. 중국에 굴종적 태도를 보이는 것도 친중 위정척사파와 같은 현실 오판이다.”


3.1. 사회[편집]

당시 대졸자 세대의 교육 및 사회환경은 그 사상적 동질감을 형성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앞 세대가 논 팔고 소 팔아서 "우골탑"으로 어렵사리 대학에 진학했다면, 이들은 경제성장의 혜택을 입어 그보다 쉽게 대학에 들어갔다. 특히 1980년대 초반에 이른바 분교설립 열풍과 졸업정원제 실시로 대학정원이 거의 1.5배에서 2배 가까이 팽창했다. 상대적 성장 일로에 있던 당시 경제상황으로 인해 다른 세대보다 고용불안, 소득불안정같은 경제적인 부족함은 상대적으로 덜했으며 사회진출의 경로도 매우 넓었다.[8] 이 때문에 고용없는 성장을 겪고 있는 현 88만원 세대보다 이상적인 측면이 강한 편이다.[9][10]

386세대의 엄밀한 의미이자, 원래 사용된 의미가 '운동권 세대'이다.# 그에 걸맞게 사회적인 측면에서 운동권과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보여주며, 운동권을 제외하고 386세대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장기에 권위주의 독재정권의 관제 민족주의 교육을 받아서 민족주의와 집단주의 성향이 강하다. 86세대는 대학생 시절에 5.18 민주화운동의 학살을 방임한, 미국에 대한 배신감을 가지게 되어, 1980년대 당시 학생운동권에 의해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서울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들이 일어났으며, 시위때마다 미국대통령 인형을 불태우는 화형식이 벌어졌다. 민족주의 과잉과, 1986년 김영환이 저술한 <강철서신>의 영향을 받아, 북한 김일성을 수령으로 추종하여 자체적으로 주체사상을 학습한 NL, 즉 주사파가 최초로 등장한 세대이며, 1986년 4월 10일 서울대 사회대에서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가 설립되었고, 1987년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단과대학 학생회장 전원이 NL계였고, 이들에 의하여 전대협이 조직되어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3위로 평가되는 등, NL은 1980년대 학생 운동권의 주류로 부상했다. 86세대 운동권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에 회의를 품고, 이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비판하였다. 이들은 자유민주주의 대안으로, 부르주아 기득권 계급에게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 민중계급을 인텔리 지식인 계급인 대학생들이 계몽하여 해방시키고, 기득권세력을 타도해야 한다는 계급갈등론(계급투쟁론)을 따르는 민중민주주의(인민민주주의)를 참된 민주주의로 제시하였다. 이 민중민주주의(People's democracy)의 약자가 바로 PD인데, NL(민족해방)과 합쳐서 NLPDR(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혁명론)이라고 부른다.[11]

1980년대 학생운동권의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적 몰이해의 경우에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에 기반한, 시민들의 상호협의에 의한 시민사회의 개념이 무시당했으며, 계급투쟁과 민족해방에만 교조적으로 매몰되었다. 이러한 운동권의 문제는 거대한 악의 진영에 맞서 투쟁하는 선의 진영이라는, 선악 이분법 구조의 극심한 진영논리와 흑백논리로 갈라치기식의 사회분열을 심화하였고, 자신들은 대학교육을 받은 인텔리로써 의식화되고 깨어있으며 옳다는 선민사상에 빠져버리는 한계를 가지게 되었다."우린 선 너흰 악" 386세대 DNA

이러한 86세대의 진영논리적 선악이분법 사고방식의 역사관의 극단적 사례로, 역시 86세대인 이덕일의 노론 음모론이 존재하는데, 당나라와 연합하여 민족을 배신한 신라의 영남세력이 조선시대의 노론으로 이어져오고, 노론은 친일파로, 군사독재로, 경상도에 기반한 보수세력으로 얼굴만 바꿔가며 한국역사의 그림자정부인 딥 스테이트로서 지배해온 악의 세력이라는 음모론이다. 노론 음모론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전혀 사실이 아니며, 애초에 노론은 영남에 기반하지도 않았다. 민주노동당 출신의 나연준 제3의길 편집위원과, 김형근 교수는 이런 노론음모론에 대해 한국의 주류세력은 역동적으로 교체되어 왔다고 반박한다.#1 #2

86세대의 사회주의 학생운동권은 기존의 김영삼과 김대중 같은 자유주의 계열 민주화 운동가들과 갈등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신한민주당의 YS와 DJ가 직선제 개헌 서명운동중에 "소수 학생들의 반미, 용공, 과격 시위를 반대한다." 고 발표하여 사회주의 운동권에 거리를 두자, 자민투 운동권 세력이 신한민주당의 직선제개헌 서명운동을 훼방한 5·3인천사태이다.# [12]

1980년대까지 유교적 가치관이 강하게 남아있어서, 가난한 집안의 경우에는 장남만 대학보내고, 여자는 교육을 포기하는 등 남녀차별이 존재하였다. 대학진학률에서 남녀의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세대이다. 이러한 가부장남성중심적인 시각에서인지 86운동권 내부에서 성범죄가 만연하여도, 조직을 위해 덮고 피해자의 침묵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았다.#1 #2 86세대로 제헌의회그룹계열 운동권인 최영미 시인은, 1987년 백기완 대선후보 캠프에서 선거철에 24시간 합숙하며 일 할때, "한 방에 스무명씩 겹쳐서 자는데 굉장히 불쾌하게 옷 속에 손이 들어왔다”고 말하고, “나에게뿐만 아니라 그 단체 안에서 심각한 성폭력이 있었다”며 “학생 출신 외에 노동자 출신 등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었다. 그때 다 봤고 회의를 느꼈다”고 털어놨다. 당시 최 시인은 피해 사실을 여자 선배에게 상담했으나 “네가 운동을 계속하려면 이것보다 더 심한 일도 참아야 한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일요신문에 의하면 1980년대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시절부터 “복학생 학생회장이나 간부가 저학년 여학생의 ‘순결’을 빼앗는 일이 비일비재 했으나 상명하복, 남성우월문화에서 어린 여학생들은 복학생 ‘오빠’들에게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고 하며, 총학생회 등에서 학기 초 대자보 등을 만들기 위해 함께 밤을 새던 일이 잦았기 때문에 성추행이 가끔 발생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86세대의 성문제를 보여준 사건으로 새천년 NHK 사건이 존재한다. 이러한 마초적 행태와,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페미니즘 성향을 취하는 이중성을 보이기도 한다.

3.2. 정치[편집]

1960년대 당시에 평균출산율이 5명대를 기록했고, 그래서 이 세대들이 인구수가 다른 세대들보다 압도적으로 많다.[13] 여타의 세대들보다 머릿수가 많기 때문에 그만큼 유명인사들도 많이 포진되어 있고, 가장 많은 유권자수를 가진 만큼 정치적인 힘도 막강하다. 그래서 이 세대가 유명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가장 많이 출생한 세대가 1971년생이다. 이들은 제6공화국 출범 직후부터 이미 투표권을 가진 상태가 되었고, 보수정당 우위의 정치체제를 흔들어버리고 선거판을 주도하는 캐스팅 보터가 되었다. 그들은 민주정부 (민주당 정권), 특히 참여정부를 지지하고 탄생시킨 주역이었다. (당시 30대 ~ 40대 초반.) 이들이 참여정부 세력에 대한 지지를 버렸을 때 이명박 후보에게 표를 주었고, 이렇게 해서 이명박 정부가 등장했다. 그리고 18대 대선 즈음에는 이들은 캐스팅보트 인 40대 후반 ~ 50대 초반 세대를 형성하고 박근혜 후보에게 표를 주었다. 그래서 586세대는 기존 사회의 모순들을 해결하지 않고, 오히려 악화시키고 고착화시켰다는 비판을 지금까지 받아오고 있기도 한다.

사실, 586세대들은 자신들보다 윗세대에 대해서 썩어버린 정치를 강하게 비판하고 저항을 하면서 정치적으로 사회의 모순과 불만을 폭증시키면서 자신들이 처한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려 하긴 했으나 그 노력의 상당수는 정치적 구조에 대한 저항이 대부분이었고, [14]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들어서는, 자신들이 겪었던 똑같은 모순들을 자신들이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2018년에 벌어진 미투운동의 파장인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기득권이 된 586세대는 그 이전세대와 그다지 윤리의식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런 문제 때문에 이후 세대로부터 이들을 비판하는 과격한 가사의 노래도 창작되기 시작했다.[15] 운동권으로 대표되는 386정치세력은 민주화를 목표로 했지만 실제로는 비민주적 운영을 하는 집단인 경우가 많았고 결국 이 문제가 표면화된 것이 2018년 미투운동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 세대의 평균적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은 16, 17대 총선, 특히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때 신생 정당이던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서울이나 그 근교 지역구에 출마해 열린우리당의 압승과 함께 본격 정계로 진입했고, 대부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다가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화려하게 복귀를 했다.

현대 한국 정치는 586세대의 장기집권이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인구가 많다 보니 586세대만큼 대량으로 정치에 입문한 세대가 없었고, 그 후속 세대의 정치 입문은 가뭄에 콩나듯 하는 것이 실정이다.

공교롭게도 정치인이 아니지만 관료들 중에 민중을 개돼지라는 막말을 한 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이나, 천황폐하 만세를 외친 이정호 국가기후변화적응센터장 또한 586세대이다.

우석훈과 박권일의 《88만원 세대》는 이런 세대론적 고찰을 토대로 586 개새끼론을 펴기도 했다. #

3.3. 경제[편집]

시대가 한국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시대라 살림이 엄청 어려웠던 시절에 어린 시절을 보내서 자라왔지만, 대기업부동산같은 안정적인 경제기반을 마련하기 쉬웠던 세대. 한편으로는 양극화가 극심한 모순이 가득한 세대.

586세대 바로 직후인 1990년대 학번 세대는 대입 수험생 수가 사상 최고로 불어난 반면, 졸업정원제는 폐지(약 30% 감소)되어 입시 경쟁이 격화되었다. 또한 등록금이 싸다고 수년간 푸념하던 대학 당국의 항의가 수용되면서, 1989년 대학 등록금 자율화 조치가 시행되고 대학 등록금이 큰 폭으로 올랐다.[16]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는 거의 모든 대학이 계속 등록금을 올려왔다.

1980년대 학번 대학생에 대한 대표적인 회유정책은 대중교통 요금의 할인제도였다. 대학생 버스요금이 중, 고교생과 같았다. 물론, 같은 나이의 취업자(고졸)들은 성인 취급을 하여 이러한 혜택이 없었다. 본격 대학생 우대였다.[17] 그 당시에는 상이군경보다도 훨씬 더 좋은 혜택이었다 볼 수 있다.[18] 이는 무엇보다 인수도권 학생들에게 유리했는데, 서울 시내버스와는 달리 할인폭이 컸다.[19][20]

386세대가 내 집 마련을 한 시기는, 대부분 IMF를 갓 지난 2000년대 초반이다. 이후, 엄청난 집값 폭등(수도권 최소 2~3배)으로 집값상승의 단맛도 많이 본 세대다.[21] 심지어 일부는 은행대출을 통해서 부동산 투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아파트 두세 채 사재기를 했다. 2000년 이전에는 부동산투기가 일반인보다는 소수의 전문 투기세력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였고, 베이비붐 세대는 50년대에 태어나 근검절약이 몸에 밴 세대라서 빚을 지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었다.[22]

그러나 소위 "부자되세요." 열풍[23]에 힘 입은 일반 386 화이트컬러가 대거 가세한 2차 부동산 버블은 그야말로 더욱 복마전이 된 물신 리그였다. 그리고, 그런 투기로 인해 올려놓은 집값은 고스란히 386세대의 아랫세대들에게 일종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장벽이 되어가고 게다가 국민연금마저 2028년부터 국민연금 수급액을 25% 늘리기로 합의되어서 연금 비용은 타 세대보다 적게 내고 연금은 더 받는 것은 물론 자신들 이후 세대가 이를 메꿔야하는 뒤처리도 하게 생겼다. 이것이 86세대 책임론을 이야기하는 가장 큰 이유다.[24]

IMF 외환위기 때도 이들이 별로 피해를 보지 않고 고스란히 자리를 유지했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86세대가 외환위기를 고스란히 피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쟁거리이다. 86세대가 외환위기때 어땠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 자료 입증이 되지 않았으며, 주장이 상호간에 상반되기 때문. 입사 2~3년 뒤 외환위기가 터져 회사에 입사동기 10명중 2명밖에 안 남은 이야기가 있는 반면, 당시 86세대는 대부분 연차가 얼마 안된 직급이 낮은 직원이라서 해고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주장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25] 영세 자영업이나 일용직 근로자로 생계를 이어가는 86세대도 많은 반면, 중견 관리직 혹은 상층직을 차지하고 있는 86세대도 많기 때문.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1980년대 당시 대학에 다녔던 1960년대 출생자들의 숫자는 무려 250만명에 달하는데, 이들 전체를 동질적인 하나의 집단으로 봐야 할지는 많은 논쟁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표명했으며, 소설가 성석제는 '기득권에 취해 있는 이들보다는 여전히 먹고 살 걱정에 시달리는 순응적인 586세대가 훨씬 많다'고 주장했다. 출처 링크 정확하게 말하면 이들 세대조차도 양극화가 심하다. 구름 위 상층에서 공산 귀족처럼 정치 경제적으로 막대한 불로소득을 누리며 살아가는 이들은 극소수 뿐이며, 나머지는 다른 세대와 마찬가지로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온몸으로 다 받아가며 살아왔기 때문에 수혜의 세대라고 일반화하기는 큰 무리가 있다. # 연령별 소득 수준 분포 자료와 세대별 월평균 임금

3.4. 교육[편집]

386 운동권이 사교육 시장을 장악했다. 사회를 변혁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학생들을 상대로 학원 장사를 해 떼돈을 번다. 이들이 사교육 시장을 키운 주범이다.

2006년 김진경 당시 노무현 정부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26]
“조기교육, 선행학습 같은 ‘반칙’을 대중화한 곳도 대치동이다. 돈 있는 사람들이 ‘차별화된 교육’을 원하면 386운동권이 방법을 찾아내 제공했다. 2000년대 이후 대치동에서는 운동권의 기획력과 부유층의 자본력이 결합된 상품이 끝없이 출시됐고 그것이 대중의 공포를 부추겼다. 그 결과 공교육 현장이 망가져버렸다. 나는 운동권이 한국 교육을 말아먹었다고 생각한다”

박재원 ‘아름다운배움 행복한공부연구소’ 소장
대치동을 만든 세대로 요약할 수 있다. 더 자세하게 읽어보고 싶다면 이곳을 읽어볼 것. 386들이 어떻게 대치동을 만들었고, 왜 대치동인지부터 386이 주류를 차지한 문재인 정부가 사교육비와 싸우겠다고 하지만 386과의 싸움에서 질 수 밖에 없는 이유까지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1980년대 5공 정권의 과외금지 조치는 이들에게 양날의 칼이었다. 수험생 입장에서는 과외금지로 인해 사교육을 받지 않고도 대학에 수월하게 들어갈 수 있었지만, 막상 대학에 들어와서는 저 조치때문에 학비를 조달하기 위한 아르바이트 자리가 사라진 꼴이 되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서비스업이 발달하지 못해서 과외를 하지 않는다면 택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자리는 공장, 노가다 등 뿐이었는데 공장의 경우 운동권의 위장취업으로 오해받아 쫓겨날 위험이 높았으며, 지금보다 소득수준이 훨씬 낮고 최저임금 개념도 없던 시절에 공장이나 노가다로 받는 박봉으로는 학비 조달이 어려웠다.[27]

이후 1980년대 후반 민주화 투쟁으로 ‘전면적 과외 금지’를 몰아붙인 신군부는 1987년 ‘6·10항쟁’ 이후 사실상 힘을 잃었다.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앞장섰던 1970~80년대 학번 대학생들은 ‘투쟁’을 멈추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1989년 교육민주화 운동을 하다 교단을 떠나게 된 ‘전교조 해직교사’들과 더불어 수많은 고학력자가 별다른 일자리를 얻지 못한 채 사회에 진출했다. 사람들은 ‘운동 전과’를 가진 이들을 존중했지만 같이 일하기엔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겼다.

1992년 9월 서울시내 중고교 재학생의 학원 수강이 전면 허용됐다. 사교육 업계가 조금씩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이 움직임에 힘을 실어준 건 1993년 처음 치러진 수능이다. 기존의 암기식 학력고사와 달리 수능은 학생의 사고력, 논리력, 비판 능력 등을 평가 대상으로 삼았다. 대학 시절 고전과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며 체계적으로 학습하고 토론과 세미나를 반복한 운동권 출신에게 최적화된 입시 시스템이었다. 게다가 논술 전형 또한 신설됐다. 교육 당국의 잇단 수능 난이도 조절 실패는 논술의 영향력을 점점 강화했다. 동아일보는 1990년 5월 22일자에서 ‘전교조 해직교사는 1500여 명이며, 상당수가 서점·문방구·출판사 경영, 학원강사, 번역업 등에 종사한다’고 보도했다. 일반적 직장생활이 어려운 이들의 호구지책 중 하나가 학원강사였던 셈이다.

너무 많아 여기에 다 기록할 수는 없지만 ‘메가스터디’를 창업한 손주은이 대표적이다.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장을 역임한 황광우(서울대 77학번)씨는 플라톤청솔학원에서 논술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황씨가 지은 <진리는 나의 빛> <황씨 아저씨네 논술 서리>는 논술교재로 유명한 책이다. 도시형 대안학교 '이우'의 교장인 정광필(서울대 78학번)씨도 플라톤청솔학원에서 논술 강의를 했다.

또한 한석원/생애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그 또한 손주은이범이현김찬휘정지웅 등과 함께 운동권 1세대 강사이다. 또한 그는 2004년 김찬휘, 한석원은 같은 운동권 동료이자 역시 영어학원을 운영하던 최인호를 끌어들여 '티치미'를 공동 설립, 메가스터디를 요망한 장사치라고 깐 내용은 아직도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르몽드 코리아>의 대표이사인 박승흡(서울대 1980학번)씨는 국어교사 출신으로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됐다가 논술강사를 시작했다. 이현씨 또한 중학교 윤리강사로 재직하다가 전교조 활동으로 해직된 뒤 대표적 사교육 업계인 스카이에듀를 만들었다. 전대협 2기 출신인 조동기(고려대 1985학번)씨는 강남 대일학원에서 국어과목으로 스타강사 대열에 들어선 이후 1997년말 대치역에 '조동기국어논술학원'을 열어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핵심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현재는 전국에 19개 분원을 마련하고 올해 매출목표를 400억원으로 잡고 있다.

강동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청산학원을 이끄는 쌍두마차인 최원극(외국어대 1984학번)씨와 박영재(서울대 1984학번)씨는 주체사상쪽 조직이던 자주민주통일(자민통) 소속으로 골수 운동권이었다. 1991년 속셈학원 수준으로 출발한 청산학원은 과학고, 민족사관고, 외국어고 전문학원으로 성장해 매출 100억원대의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논술과 구술 면접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고 22개 분원을 두고 있는 유레카논술아카데미의 대표강사 장민성(서울대 1981학번), 박홍순(성균관대 1982학번)씨는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계로 분류된다. 박홍순씨는 민주노동당 중앙당 기획위원장을 역임했으며 2004년에는 구로구 갑 후보로 출마한 바 있다.

노원구에 있는 학림학원의 채광석(성균관대 1987학번)씨는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으로 운동권의 유명한 시인이었다. 학림학원에는 성대 운동권 출신들이 강사로 다수 포진하고 있다. 초암논술아카데미 대표강사인 이윤호, 송재인씨도 1980년대 초반 학번으로 운동권 출신들이다. 과학탐구 영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연봉18억원을 기록한 이범(서울대 1988학번)씨도 좌파 운동권의 이론을 제공했던 <학회평론>의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학원 사업을 하다가 정치권으로 진출한 경우도 있다. 더불어민주당 정청래(건국대 산업공학 85학번)의원과 열린민주당 정봉주(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 1980학번)의원은 길잡이학원과 외대어학원을 운영하다가 여의도 입성에 성공한 경우다.#

사실 단순히 먹고 살 것이 없어서 뛰어들기는 했지만 대한민국 사교육의 중심이 된 건 운동권 출신 강사들의 남다른 ‘전략’ 덕이기도 했다. 학생들이 하루에 6일씩 학교에 다니던 2005년, 정부가 한 달에 한 번 토요일에 쉬는 ‘놀토’ 정책을 내놓자 대치동 학원가엔 바로 ‘토요 집중반’ 프로그램이 생겼다. 명절 기간에 집중적으로 국영수를 파고드는 이른바 ‘명절 특강’을 만든 것도 대치동이었다.

사교육 전문가로 거듭난 386들은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 못잖게 부지런하고, 열정적이며, 공격적이었다. 정부가 학생들을 공부 부담에서 해방시키고자 입시 전형에서 ‘비교과’ 평가 비율을 높이자 대치동은 즉시 최고 수준의 비교과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대치동을 한국 사교육의 메카로 만든 386 강사들은 이제 대치동의 주류가 아니긴 하다. 50세를 훌쩍 넘기면서, 상당수가 은퇴했거나 새로운 인생 항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 뒤를 이은 사교육 전문가들은 대치동의 명성을 흔들림 없이 공고화하고 있다. 박재원 ‘아름다운배움 행복한공부연구소’ 소장은 “최근 대치동의 새로운 흐름은 포스텍과 KAIST 출신이 컨설팅 업계에 늘어난다는 거다. 이들은 온갖 데이터 분석으로 학부모를 현혹하며 입시 사교육의 새 장을 열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지금의 대치동은 ‘상류층의 반칙과 사교육업계의 탐욕과 일반인의 불안이 만들어낸 괴물’이라고 평가했다.

물론 대수능뿐 아니라 공무원 시험, 전문대학원 입학시험, 임용시험 등에서도 이미 386세대가 만든 학원이 모두 장악했으며 현실은 더 비참하다. 그나마 수능은 매해 매스컴에서라도 언급하지만 현재 이들 시험은 더 심각한 상황에서도 아무도 언급해 주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그리고 이같은 교육계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또 다른 386인 문재인 정부는 이들과의 싸움에서 늘 지고 있다. 사실상 이 같은 교육 열풍이 대한민국의 산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능력주의 등 대한민국 교육의 병폐를 그대로 드러내 대한민국의 저출산에 급격하게 기여하고 있기 때문에 문재인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각종 방법을 사용하지만 매번 이들과의 싸움에서 지고 있다. 그 결과 타국처럼 대학의 서열과 경쟁 구조를 없애고 전원 추첨으로 뽑는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고서는 현재 이 방안을 해결할 방법은 없어 보일 정도로 이미 상황은 심각해져 버렸다.

3.5. 병역[편집]

conscriptionRate
현역판정율현황

이들은 병역의무의 측면에서도 많은 혜택을 받았다. 많은 인구수와 지금에 비해 긴 복무 기간 덕분에 징병률이 낮았기 때문에 병역면제를 받는 비율이 1990년대 이후에 비해서 높았다. 당시 징집대상 남성들 중에서 현역 병역을 수행하는 비율은 40%대~60%대에 불과했다.#[28] 다만 현역 복무기간은 30개월이었고, 1990년대 이후에 비하면 꽤 길었고, 현재에 비하면 군인월급도 형편없는 수준이었으며, 군 가혹행위도 굉장히 심각한 수준이었다. 신체검사에서 이상소견이 있는 경우에 18개월 방위병 복무 판정이나 면제 판정을 받는 비율이 1990년대 이후에 비해 높았고, 2대 독자 등의 경우에는 6개월 방위병 복무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병역에 있어 대학생 우대 제도들이 여전히 남아있었기에, 대학원에 진학한 고학력자의 경우 현역복무 판정을 받아도 6개월 석사장교로 입대하는 방법도 있었다. 다만 석사장교는 사법시험 최종 합격자수와 비슷한 숫자인 매년 평균 1000명 정도의 인원만 선발했다.[29]

또한 이 시절에는 대학 1학년때 문무대 일주일, 2학년때 전방입소 일주일을 하게 되면 복무기간을 90일 단축해줬다. 즉 당시 대학생들의 실질적 복무기가는 27개월이였던 것. 절대 복무기간은 1990년대보다 길었지만 대학 재학자와 최종 고졸이하 간에 복무기간이 달랐다는 점에서 이는 아래 용어 비판에서 서술하는 대학에 가지 못한 세대들의 박탈감을 만드는데 일조했다.[30] 이 제도는 1989년에 없어져서 1989학번 이후는 복무단축이 없다. 1988학번은 문무대만 갔다왔기 때문에 45일 단축.

이 뿐만 아니라 당시 병역법의 입영의무 연령도 모든 병역의무자는 만 30세가 되는 해까지였으며 만 30세가 되는 해를 넘긴 경우에는 소집면제처리가 되도록 되었다.

4. 86세대 용어에 대한 비판[편집]

586세대[31]라는 표현은 "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최종 학력이 고졸 이하인 사람들을 전부 제외한 표현이다. 넓게 잡아도, 대학문화를 조금이라도 경험을 해본 대학 자퇴자까지만 수용하는 표현인 것이다.

이미 1960년대 출생자를 의미하는 '6'자가 있는데도 1980년대 학번을 의미하는 '8'자가 들어가 86세대라고 말하는 것부터가 이 두가지를 모두 갖춘 이들을 칭하는 용어라고 볼 수 있다. 1985년을 기준으로 대학 진학률은 36.5% 정도였다. 여기서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다시 사회주류에 진입한 경우까지를 고려하면 전체 60~80년대생 중에서 소위 86세대는 사실 소수에 불과하다.

86세대는 오히려 그 바로 전의 세대에 비해 양극화가 더욱 심각해진 세대로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인구를 사회에서 배제시켜버린 세대"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86세대의 수많은 문제와 그에 대한 불만이 생겨났다.

최소한 어린 시절을 기준으로 했을 때, 60~80년대 출생자들 중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던 대다수는 그 이전 시절보다도 더욱 열악한 유년 시절을 보냈고, 가난의 대물림을 피할 수 없었다.

아무리 이전 세대보다 대학 진학이 쉬웠다고는 하지만, 당시에도 여전히 중학교 졸업자의 65% 정도만이 일반계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며, 일반계 고등학교 진학자의 35% 정도가 대학에 진학했다. 특히 여학생의 경우, 공부를 어느 정도 잘했어도 부모님들에 의해 상업계 고등학교로, 반쯤 강요된 진학을 하는 경우가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까지도 비일비재했다.[32]

당시 학벌 경쟁은 부모 차이 하나로 판가름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었고, 그렇게 발생한 학벌의 차이는 이후 사회적 차별로 이어졌다. 직장과 사회에서 '중졸자', '고졸자'라는 이유로 무시와 차별을 받았던 대부분의 6~80년생들은 열등감에 빠졌고, 이는 2004년에서 2009년까지 고등학생의 상급학교 진학률 80%로 대표되는[33] 단군 이래 최악의 학벌 경쟁이 일어나는 원동력이 되었다.

다시 말해, 60년대 출생자의 80%가 넘는 압도적인 절대 다수는 최종 학력이 고졸 이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낭만적인 대학 문화를 향유했다는 1960년대 태생 젊은이들은 정작 세대 전체로 보면 일부 소수에 불과하다. 당시의 대다수 젊은이들은 당연하듯이 고졸 이하의 학력인 경우가 많았으며, 86세대들의 동생세대~조카세대인 이른바 서태지 세대, 국초딩 세대, 88만원 세대삼포세대와 비교를 해 보면, 비교적 일찍 사회에 진출하면서 사회인 생활을 시작했다. 결국, 낭만적 황금기를 구가한 86세대 젊은이들은 절대다수가 아니라 극소수의 유복한 대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86세대라는 표현이 1960년대생 전체에 남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1960년대에 태어난 대학생들 중 일부가 정치권으로 들어와, 한 시대의 엘리트로서 정치, 경제, 문화, 언론 등 사회의 중심층을 형성하고, 한 시대의 언어를 독점하는 것에 성공하며, 한국 사회의 주류세력으로 군림하게 되면서 여론을 주도하게 된 것이 큰 원인이다. 즉, 소위 '86세대'는 자연스럽게 '대학 캠퍼스 생활'을 전제로 하면서 과거를 묘사하였고, 다른 형태의 삶을 사는 절대다수의 인물들은 사실상 타자화 • 공백화 하였다.[34]

그리고 이는 제5공화국 당시 3S정책과 맞물려서 왜곡된 보수언론을 비롯한 기득권층에서 의도적으로 주입한 경향이 매우 다분하다. 상대적으로 일부 소수 인원만이 대학에 진학했음에도, 대학 캠퍼스 문화가 뉴스나 드라마, 연예 프로 등으로 수없이 많이 미화되면서 노출되었으며, 실제로 대학의 실상과는 억만광년 정도의 차이나 동떨어져 있는 낭만적인 풍토 등을 의도적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공공매체에서 보여줬다.

단적인 예로, 국풍81같은 어용스런 관제 행사라든가, 대학가요제라든가, 대학 캠퍼스를 소재로 한 수많은 청춘 드라마라든가 등등... 특히 대학입시, 그중에서도 명문대 입시에 관한 언론의 뉴스는 입시 경쟁률이 얼마나 된다고 알려주는 내용이 뉴스에서 보도가 될 정도로 과열되고 지나칠 정도였다.

결국, 상대적으로 절대다수였던 "대학에 가지 못한 1960년대 세대"들은 독자적인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한 상태로 학벌이라는 절대적인 가치에 따라서 대학생들을 동경하면서 이들의 가치에 함몰되었다. 자신과 개개인의 삶을 정체성의 근간으로 삼기보다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었던 대학생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내면화시켰기 때문이다.

86세대의 다음 세대가 극심한 교육열[35]에 시달리는 가장 큰 이유도 1940-60년대생의 70%~80%가 고졸 이하의 학력자로, 절대다수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화려한 대학 생활로 덮어버린 사회의 진실은 잔혹하기 그지 없었다. 감전, 신체절단 등 각종 산업재해로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는 일이 너무나도 흔했다[36] 하지만, 1980년대 영화나 만화, 방송에서는 달동네나 빈곤층을 다루는 묘사는 소위 국격을 해친다면서 '검열'되었고[37]땡전뉴스와 보도지침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의 사회적인 저항은 주요 미디어에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축소하거나 왜곡시켜서 보도해버렸다.

결과적으로 당시의 빈곤한 삶은 아예 기록말살형같이 검열을 당했던 것이다. 그 결과 텔레비전같은 미디어에서는 극소수에 불과한 대학생들의 삶만을 정상인으로 대우를 했고, 그나마 그 대학생들이 사회의 정의를 위해서 투쟁하는 삶도 완전히 왜곡시켜서 보도했다.

대다수의 고졸 취업자의 삶은 정부의 정책에 따라서 철저하게 무시를 당했고, 그 중에서 상당수는 열악한 노동조건이나 산업재해 등에 시달려야 했고 노조를 결성하려 들기라도 하면 아예 정부에서 직접, 번개같이 나서서 탄압하고 분쇄했다.

결국, 미디어에서 보도하고 기록한 당시의 '시대상'은 '진정한 대한민국이 보여주는 1980년대의 시대상'이 아니라, 철저하게 거품이 끼어있고 왜곡적이고 허구적인 분식회계나 다름없는 시대상이나 다름없었다. 상당수 대학에 다녔었던 86세대들의 대학생 시절은 사회의 정의를 위해 군부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 목숨을 걸었고 인생을 바쳤었던 사람들이 많았다. 과거 학생운동의 중심이었던 전대협에서는 "오월대, 녹두대"처럼 군사조직 비스무리한 단체를 만들어 자기 또래의 전경들과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경우도 많았었고, 실제로 박종철처럼 살해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나마, 1980년대 후반부터 검열이 풀리면서 뉴스비전 동서남북이나 르포 60, 다큐멘터리 제5공화국, PD수첩 같이 본격적으로 사회의 치부를 까발리고 취재하는 프로그램이 등장하고[38] 이들의 삶을 다룬 작품이 나오기도 했지만, 드라마의 경우에는 매우 단기간만 다뤄지거나 방송사 내부검열[39]로 틀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이후에는 시청률에 밀리다 보니까 잘 다뤄지지도 않았으며, 시사 프로그램은 아무래도 초상권 문제나 높으신 분들이 찔리는 문제 같은 것도 있기 때문에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고, 만화의 경우에는 그나마 민중 만화나 시사 만화, 일부 명랑만화에서 다뤘고, 그 이외에도 일부 순정만화에서도 다루기는 했었지만 아무래도 1980년대 만화 중에서 인기 작품 위주로나 출간되는 수준인 데다가 한국 영화에서는 제일 수준이 떨어졌던 시대나 마찬가지였다.

2010년대가 된 지금도 재벌가를 배경으로 하는 막장 드라마가 많이 나오고 예전부터 청소년 드라마 등등, 여러 방송에 나오는 고등학교는 항상 일반계 고등학교인 점도 이러한 맥락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연예인들이 학창시절 연예인 활동을 하느라 제대로 공부도 못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고, 분명히 대학으로 진학할 수 있는 실력이 아닌 경우가 심심치 않게 보이는데도, 왜 그렇게 인서울권 대학의 연극영화과나 실용음악과로 진학을 많이 하고 학력위조에 목을 맸는지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자.

대표적으로, 1980년대 이전부터 문제가 된 심형래의 학력위조 사건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자서전에다 고려대학교 출신이라 대놓고 거짓말을 써놓은 사례가 아주 유명했고 2000년대에 방송된 개그 콘서트를 비롯해서 그 밖의 예능 프로에서 연고대 출신 연예인들이 나와서 동문대결을 했을 때 심형래도 자주 참가했었다.[40]

이러한 사회문화 풍토와 1990년대의 대학진학률이 고도로 높아지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1960년대에 태어난 세대들에게 20대에 대학진학을 하지 않고 대학생들보다 사회인 생활을 먼저 시작한 것은 "대학을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대학을 가지 못한 것"이 되고 말았다.

즉, 1960년대생 중에서 대학생이 아니었던 절대 다수는, 정확한 나이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것을 자신의 인생에서 "강한 열등감을 느껴야 되는 일종의 결핍된 요소"로 받아들였으며, 자신의 또래 대학생들보다 사회 생활을 더 일찍 시작한 것은 단지 후회해야 될 인생의 과오일 뿐이었고, "다음 세대에게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는 자기 자신다운 인생의 형태"로 여기지도 않고 있다. 이처럼 이 세대의 감정에는 어린 시절의 한(恨)이 서려있는 불편한 진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2010년대에서 대학 진학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지고 취업이 더욱 어려워진 시기라면, 소위 지잡대를 가는 것보다 고졸 이후 바로 취업하는 것이 더 효용성이 높을 가능성도 있다.[41] 하지만 소위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너무 강한 60년대생의 고졸 출신들은, "나는 입학하지 못했지만, 자식들만이라도 반드시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강한 자존심 때문에 지금의 대학 정원과 진학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졌다는 시각도 있고, 사실상 정설로 통한다. 그러므로, 586세대가 받았던 혜택의 근본적인 원인은, 대학 진학률이 아주 적어서, 대학생들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애시당초 1960년대생의 절대 다수가 고졸 혹은 그 이하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취업시장에서는 단지 대학생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우수한 인재로 여겨졌으며 그만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 다수인 80% 이상을 차지하고 1960년대생의 고졸 이하 사람들에게는 대학생이었던 적조차 없으니 당연히 이런 혜택이 주어지지 않았다. 당시의 약 20% 미만인 대학 진학률을 현재에 비교하면, 86세대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의 대학생은 "대학생"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최소한 인서울 이상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실제로 현재 인서울+카이스트, 포공 등을 합쳐도 20%가 안 된다. 사실상 현재의 명문대생과 86세대의 대학생은 거의 같은 포지션이라는 의미.

그리고 최악이 된 문제는 당시의 한국 사회가 선진국 마지막 문턱에 탑승했던 과도기에 있었다는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인서울 대학을 나온 이들과 그들이 비슷한 수준이었다면, 지금의 인서울 명문대학을 졸업한 많은 대학생들은 왜 청년실업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극소수의 86세대가 누렸던 특권은 그들이 당시 대학을 졸업했다는 점 덕에서만 나온 게 아니고, 시기가 잘 맞아떨어졌다는 운빨과도 큰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가 힘들다. 요약하자면 시기적으로도 좋은 운을 타고났기 때문에 특권을 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86세대는 그 용어 자체가 시민들을 기만한다. 그리고 바로 그 용어를 만들어낸 주체들이, 대부분의 시민들은 꿈도 못 꾸던 대학을 부모의 부유함 하나만 가지고 대충 입학해 하루종일 시위나 벌이며 공부 하나 제대로 안하다 별 검증 없이 대기업에 취직하고 정계에 진출에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력한 기성 기득권자가 되어있다. 하지만, 부모가 부유하지 못해 대학의 갈 수 없었던 대부분의 6~80년대생들은 그대로 사회에서 버려젔다.

86세대라는 말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대한민국의 깊은 곳에 박혀 있는 악성 신생물과 다름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60년대생들을 싸그리 배제하는 기만적인 용어가 60년대생의 상징이 되어있으며, 그렇게 상징을 차지하고 기성 기득권에 오른 60년대생들이 지금 대한민국을 주무르며 이 기만적인 용어를 계속 배포시키고 있다.

5. 기타[편집]

2013년 박근혜 정부 이후에는 "신386세대"라는 단어도 등장했다. 이는 30년대에 태어나 80세를 넘은 1960년대 인사(사회활동을 시작한)를 뜻하는 말로 대표적인 인물인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한 1960~70년대 정치인, 관료들이 대거 복귀하면서 우파색채가 강화되자 내놓은 말이다.

대한민국에서 청소년기 체력이 가장 강인했던 세대였다. 이전 세대는 절대빈곤에 따른 영양부족으로 체력이 떨어졌으나 이들 세대에 들어 보릿고개가 사라지면서 그 문제가 해소되었고, 이들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낼 때에는 아직 컴퓨터와 전자오락 등이 보급되기 이전이라 대부분 밖에서 또래들과 격렬한 신체 활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군사정권의 교련과목이 체육과 같이 존재했고 학력고사에 체육 과목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입시과목화 되었다는 사실이 있었다.[42]

6. 나무위키에 기재되어 있는 86세대의 인물[편집]

※ 가나다순으로 배열되었다.

이 외의 인물이 더 있으면 추가 바람.

7. 관련 문서[편집]

[1] 연도별 대한민국 출생 및 사망 통계[2] 최소성능: 286(영문), 386(한글)이상 CPU[3] 2017년 이 별책부록에 소개된 인사들이 노무현 정권 이후 국회의원이 되고, 문재인 정부에서 대통령 비서실장, 장관 등을 맡게 되자 예언서로 불리며 상당히 고가로 거래되고 있다.[4] 황중환의 386c가 대표적이다.[5] 이 말이 처음 등장했던 90년대는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 '사오정(45세가 정년)', '당나귀(당신과 나의 귀중한 시간을 위하여)' 등 깔깔유머집(요즘 말로는 아재 개그)에서 겨우 나올 단어들이 유행하던, 정확히는 진짜 깔깔유머집이 직장 분위기를 살릴 유머라고 유행했다. 정말로 신묘한 단어였던 것.[6] '밀레니엄 세대' 같은 직관성이 높은 용어를 제외하면 X세대, N세대는 그나마 히트한 축에 속하고, G세대니 C세대니 하는 지금은 사전에서나 볼 법한 용어들이 쏟아졌으나 살아남은 것은 거의 없다. 가장 히트했다는 X세대도 서태지와 아이들로 대표되는 'X세대 패션'의 유행 덕에 잘 정착한 것이지, '자유롭고 규정할 수 없다'는 X세대의 특징은 딱히 현재 그 사람들에게 남은 것이 없고 자연히 쓸 이유도 없어졌다.[7] 한국 기준 1955~63년생. 86세대와 중첩된 1961~63년생을 제외하면 1955~60년생이다.[8] 일자리가 크게 늘어나던 시절이라, 서울 소재 4년제 대학 졸업생 학과 불문, 이공계 전문대졸 남자라면 거의 100% 취업이 되었다.[9] 위 서술에서처럼 86세대들이 정말로 '개나소나' 대학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과거보다는 상대적으로 높은 진학률을 보였다는 것 뿐이지, 실제로는 겨우 30% 수준이었다. 87년 중앙일보 기사 그러니 대학 졸업하고 좋은 직장으로 프리패스했다는 묘사는 86세대의 다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10] 대학 교육이 보편화된 시기는 빨라도 1990년대 후반이며, 보통 2000년대로 잡는다. 대학 진학률은 1990년대 후반에 65% 정도였고, 2000년대 초반에서야 80%를 넘겼다.[11] 사회구성체 논쟁으로 NL과 PD는 갈라졌는데, 1980년대 학생운동권의 주류는 NL이 차지하였고, 나머지는 PD 분파들이 차지하였다.[12] 양김은 사회주의 계열 운동권으로부터 부르주아 리버럴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김대중의 자서전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에서도 사회주의 운동권과의 갈등이 기록되어 있다.[13] 사실 현 1980~90년대 생의 쪽수가 전보다 비교적으로 적고 남초인 건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기 인구정책의 영향이 크다.[14] 아래에서 언급한 안희정 비서 사건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하면 된다. 독재정권타도라는 대의를 위해 탄압받는 재야가 뭉쳐야 되고, 뭉치기 위해서는 작은 실수정도는 모른체하고 넘어가야 재야세력 분열로 인한 투쟁력 상실을 막을 수 있다는 것. 안그래도 586세대는 유,초년시절 극단적인 사회(유신정권) 하에서 초,중등교육을 받아 집단주의가 몸에 밴 상태라서 이러한 사고가 자연스럽게 형성될 수 있었다. 물론 1980년대의 학생운동이 정말 목숨 걸고 해야될 수준이라서 내심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나 그 때 생긴 속성이 30년이상 지난 시점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는 것은 문제다.[15]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중략) 너희들이 정녕 민주화를 아느냐 이 손으로 일군 민주주의 대한민국 / 요즘 어린 것들은 몰라도 한참 몰라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 투쟁도 혁명도 이제는 모두 봄날의 꿈 / 그리웠던 혁명동지 돈을 꾸러 찾아왔네 / 골프채로 쫓아내니 마음속이 허전해 / 내일은 미스김의 보지냄새 맡아야지 - 밤섬해적단 - 386 Sucks 중에서.[16] 그나마 첫해인 1989년도에는 대학들이 눈치를 보느라 등록금 인상을 하지 않은 대학이 더 많았으며 모 대학처럼 인상했다가 학생회의 반발로 인상분을 도로 환불받은 사례도 있었다.[17] 정확히 말하면 중,고,대학생 할인을 받으려면 현금승차는 안되고 "회수권"이라는 것을 구매해야 하는데 중고생용과 대학생용이 있었다. 대학생용은 일반인의 전용을 막고자 대학 학생회관 매점에서만 팔았으며 좀 깐깐한 대학에서는 그 대학 학생증까지 보여줘야 팔았다. 참고로 노량진 재수학원가에서는 어디서 빼돌렸는지 대학생 회수권을 확보해 10~20원의 프리미엄을 얹어 팔기도 했다. (1989년 기준 일반인 140원, 중,고,대학생 회수권 100원)[18] 이러한 사례 중에서 좀 더 심한 사례는 번화가에서의 미성년자 음주단속이였다. 1980년대 당시는 만 20세 미만은 미성년자였는데 대부분의 대학 1년생과 생일이 안 지난 대학 2학년생은 대부분 미성년자였음에도 단속 시 봐 주는 분위기였다. 물론 재수생은 무조건 단속. 이게 일견 법적 일관성에 모순점이 있었지만 인텔리 계층으로써 사회에 불만을 일으킬 가능성이 가장 크던 대학생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유지되었다. (참고로 결국 이런 모순된 상황은 미성년자 기준을 만 19세 미만으로 낮춰도 없어지지 않아서 음주 가능 시기를 만 19세가 되는 해의 1월 1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19] 이 정책은 1990년부터 없어져서 인수도권 대학 학생들은 교통비가 2배로 올랐다.[20] 철도청(과 지하철공사)에서 운영하는 수도권 전철은 상당히 늦게까지 학생 할인이 유지됐다. 1회권은 할인이 없었지만 정액권은 할인받을 수 있었다. 기준은 '신분'이고 나이는 고려 대상이 아니라 만학도도 할인받을 수 있었다. 애초에 철도는 만 13세부터 성인 운임을 받는다. 그러나 중고대학생은 통일호 이하(나중엔 무궁화호까지 확대) 열차는 철도청에서 소속 학교로 배부한 할인증을 이용하면 20% 운임 할인을 받을 수 있었다(단, 최저운임 아래로는 할인되지 않았다. 즉 서울-천안, 서대전-익산 같은 중거리 구간은 있으나마나).[21] 자세한 것은 부동산버블세븐 문서를 참고하자.[22] 다만 이건 IMF 이전에 은행 이자율이 10%나 그 이상급으로 매우 높았기에 빚을 빌려쓰기도 힘들었던 데다가 복지제도 같은 것이 제대로 마련되어있지 않던 때라 (사실 지금도 별로 좋지 않지만) 빚을 거하게 졌다가 바로 한강이나 낙동강으로 입수할 판이라서 그랬던 영향이 강하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빚을 3000만 원 졌다 하면 1년에 300-400만 원씩을 추가로 갚아야했다. 역으로 이자율이 높았기에 은행에 돈을 저축해놓으면 부동산은 모르지만 적어도 주식이나 펀드에 넣어두는 것 보다는 안정적으로 돈을 벌 수 있었기에 저축상품이나 전세가 흥했던 것이다. (은행에 가서 1억 원 저축을 하면 1년에 이자로 1000만 원을 얻어먹을 수 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말-2000년대 초반을 기점, IMF의 후유증 극복과 경기부양을 이유로 이자율이 2%대까지 낮아지고 대출문턱도 낮아지면서 빚을 지는 데 부담이 덜해졌고 그래서 대출이 급증하게 된 것. 양심 팔아치운 수준의 부동산 거품 때문에 은행 이자 불어나는 것보다 땅값이 더 빨리 오르므로(...) 빚내서 집 사도 이득이다.[23] 2000년대 초반 히트친 BC카드 광고다.[24] IMF 사태 이후 일어난 벤처 지원의 특혜는 386세대에 집중되었고, 이후 사교육 열풍을 주도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도 하는 등 # ##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그들에게 주어진 자금이 서울을 중심으로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어가 부동산 거품을 일으키는 바람에 다음 세대에게 집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로 만들정도로 직접적인 직격탄을 날려 엄청난 고통을 안겨줬다는 것이다. # ## #[25] 당시 이들 세대의 실직률이나 이직률에 대한 정확한 통계 자료가 없기 때문에 확실한 자료가 나오기전까지는 지속적인 논쟁이 이어질것으로 보인다.[26] 이 사람은 운동권 출신인 데다 전교조 초대 정책실장, 노무현 정부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대통령직속 국가교육회의 대입제도개편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27] 1980년대에 노가다가 고수입 직종이었다는 낭설이 퍼져 있는데, 노가다 임금이 급격히 상승한 것은 한국이 선진국 반열에 오르면서 3D직종 기피 풍조가 가속화된 1990년대의 이야기이지, 적어도 1980년대 중반까지는 그렇지 않았다.[28] 참고로 2019년에는 징집대상 남성의 94.3%가 현역 또는 보충역으로 징병되었다.#[29]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저자 김난도 역시 석사장교로 군복무를 마쳤다. 전 법무부 장관 조국 역시 석사장교 출신.[30] 군필자는 잘 알겠지만, 선임보다 먼저 전역하는 후임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31] 2019년 기준 1969년생이 50세에 접어들었으며, 2020년~21년에 1960~61년생은 60대에 진입했다.[32] 1992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인기리에 방영된 배우 김희애와 최수종 주연의 드라마 아들과 딸이 이러한 사회적 풍토를 잘 그려냈다.[33] e-나라지표 취학률 및 진학률 출처.[34] 공교롭게도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적 소외의 대표적인 예시이다.[35] 다만, 교육열 자체는 그 이전부터 분명히 존재했던 상태이기는 했다. 하지만, 더더욱 지독한 학력 인플레이션 때문에 그 목표가 지속해서 높아져갔을 뿐. 그리고, 지금은 토익 700이니 800이니 해도 취직하기가 쉽지 않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36] 이 문제는 산업현장에서 안전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거나 보호장구 착용에 미숙하거나 원가절감으로 빼버리는 부분이 많아 생기는 문제이다. 우리나라가 OECD 국가들 중 산업재해 사망률 1위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2012년 11월 9일에 방송되었고 아주대병원 이국종 교수가 출연하였던 "MBC스페셜" '골든타임은 있다. - 외상외과' 편에서 하루에 전국적으로 100여 명이 사망하는 중증외상 환자 거의 대부분은 생업현장에서 다치는 경우라고 언급되었던 점과, 설령 다치지 않는다 해도 이러한 직종에서 종사할 경우 보험회사의 상해위험등급에서 높은 등급을 받아 보험 가입 시 어느 정도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37] 참고로 이런 조치가 입식생활이 맞지 않는 대한민국 가옥들에 침대가 보급되게 만드는 데에도 한몫 거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드라마에 나오는 집들 중에서 침대가 없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설령 바닥에서 생활하는 집이 나온다고 해도 그건 서민이나 빈곤계층 아니면 농어촌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나 등장한다. 사실 침대생활을 하려면 바닥 난방이 아닌 벽난로, 라디에이터, 팬코일유니트 등으로 난방을 해야 한다. 결국, 한국의 주거공간에는 침대가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38] 물론, 그 이전에도 추적 60분이나 MBC 리포트 같은 프로그램이 존재했었지만 5공 시절 특성상 검열의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39] 주로 3당 합당 이후의 1990년대다.[40] 사실, 이 학력위조는 고려대 측도 할 말이 없는 것이 학력위조를 확인해 줘야 될 학교 측이 나서서 대놓고 심형래를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선전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했다. 개그 콘서트를 고려대에서 촬영한 적이 있었는데, 특별 초대손님으로 자랑스런 선배라고 대놓고 구라를 치면서 심형래가 등장을 했다는 것이다. 교내에서 벌어지는 공식행사에서 대놓고 동문이라고 말을 하는데, 고려대 측이 오히려 심형래를 감싸주면서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력위조가 밝혀진 다음에 고려대 측에서는 "학부는 아니지만 고대에서 개설한 과정을 수료했으므로 넓은 의미의 동문으로 본다."는 희대의 개드립을 시전했다. 당시의 명문대학들은 돈을 벌고 유명인사들을 이용해서 학교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최고경영자 과정이나 평생교육원 등을 운영했고, 지금도 운영하고 있는 중이다. 물론, 교육도 진행하지만 수강생들을 자신의 학교 인맥으로 묶어서 동문의식을 심어주고, 다양한 분야에서 이미 일가를 이뤄낸 중장년층들이 서로 소통하면서 동업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그러면서 가방끈 비스무리한 것 하나 달아주면서 학교에서는 수업료도 걷고 기부도 받을 수 있고, 유명인이 나서서 대학 홍보도 해줬으니 손해를 볼 것이 없는 일석이조나 다름없었다. 이처럼 불공정한 관행이 있는 것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아직도 유명 연예인들을 수능도 제대로 보지 않고 실력과 상관없이 입학시키는 악습이 존재하는 것도 이런 사유 때문이다. 결국, 나중에 고려대에서는 이건희 명예박사 사건이 터지면서 화룡점정으로 변한다.#[41] 물론 이쪽도 중소기업 생산직이라는, 거의 높은 확률로 비인간적인 삶을 강제당할 수 있다.[42] 오죽하면 90년대에 체력장으로 고교생 3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43]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을 당시 "50대 민주화 세대들의 문제의식은 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30대 중반에서 40대는 논리가 아닙니다. 그냥 막연한 정서입니다. 거대한 무지와 착각입니다"라고 발언하여 86 운동권 출신으로서의 삐뚤어진 자부심을 드러낸 바 있다.[44] 정계에서 '386하면 김민석'이라 할 정도로 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386 운동권 출신의 독보적인 대표주자였다.[45] 후술할 신해철, 김용태와 동갑이지만 4수했다. 공부를 못한 건 아니고 오직 서울대학교만 고집하다가 이렇게 되었다. 물론 현역병 입영 통지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홍익대학교에는 입학했다. 90년대 학번이지만 거의 같은 세대에 정치성향도 586쪽이다.[46] 김어준과 마찬가지, 사실상 5수를 했는데, 중간에 군복무기간이 포함된 수치이다. 친분이 있는 정치인들 모두 586세대 정치인들이 대부분.[47] 중간에 중퇴하였다.[48] 기업인이다.[49] 빠른 65년생이지만 재수를 했다.[50] 중간에 중퇴했다. 2018년 사망 당시 만 50세.[51] 빠른 66년생으로 재수해서 85학번이다.[52] 중간에 중퇴했다. 2014년 사망 당시 만 46세.[53] 아래의 우상호, 우현과 연관이 깊은 인물이기도 하다.[54] 위의 남경필과 대학 동기이다. 실제로 친분이 있다고.[55] 재수를 했다. 그래서 이혜훈과 대학 동기이며, 꽤 친한 사이라고 한다.[56] 검정고시를 봤다.[57] 위의 안내상, 우상호와 연관이 깊은 인물이기도 하다.[58] 호적상의 생년은 1962년이지만 실제 생년은 1960년이다.[59] 중퇴했다.[60] 임수경 방북 사건으로 유명한 인물. 후술할 임종석, 하태경과 같이 통일운동을 했었던 인물이다. 이후 지향점이 완전 달라졌지만(...)[61] 만 4세에 초교에 입학, 대학 입학 당시 만 16세로 알려졌으나 실제 1963년생이다.[62] 만 4세에 초교에 입학, 대학 입학 당시 만 16세로 알려졌으나 호적상 생년 기준이며 실제로는 1965년생이다.[63] 특이하게 4월생임에도 만 5세에 초교에 입학하였고, 대학 입학 당시 만 17세.[64] 1996년까진 System M VHF-Low 2ch였으나 1996년부터 UHF 34ch로 변경되었고 MTS/SAP방식의 스테레오 방송을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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